12 완
조회 : 117 추천 : 0 글자수 : 6,087 자 2025-09-16
미끼, 그리고 새로운 시작
한강 변에서의 입맞춤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화려하고 위험했던 ‘지안’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서툴지만 진실한 ‘이수연’과 ‘이민준’의 이야기가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밤의 네온사인 대신 아침 햇살이, 위스키 대신 따뜻한 커피가, 거짓된 신음 대신 서툰 웃음소리가 우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다음 날, 수연이는 약속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김선우가 마련해 준 청담동의 고급 오피스텔을 비우고, 명품 옷과 가방들을 모두 처분했다. 그의 법인카드는 가위로 잘라버렸고, 차 키는 퀵서비스를 통해 그의 사무실로 돌려보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입고 있던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벗어 던지는 것처럼, 후련하고 단호했다.
나는 그녀가 짐을 정리하는 내내 곁을 지켰다. 그녀의 옷장에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값비싼 옷들이 가득했다. 그 옷들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김선우가 빚어낸 ‘지안’이라는 작품의 일부였고, 그녀는 이제 그 작품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녀는 가장 아끼던 몇 벌의 평범한 옷과 책 몇 권만을 챙겼다. 그녀의 새로운 삶에 필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텅 빈 오피스텔 거실에 서서,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 넓은 공간은 이제 낯설고 차갑게 느껴졌다.
“우리 집으로 가자.”
나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비록 좁고 낡았지만, 그래도 네가 편히 쉴 곳은 있어. 네가 새로운 집을 구할 때까지.”
수연이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하지 않았다. 나에게 기대는 법을, 서툴지만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작은 자취방에서 우리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지만, 그 어색함마저도 우리에게는 소중했다. 우리는 함께 장을 보고, 함께 요리를 했다. 그녀는 의외로 요리에 소질이 있었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계란말이를 만드는 그녀의 모습은 내가 알던 지안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지만, 나는 그 모습이 훨씬 더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평범한 연인들처럼 함께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의 빈 곳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과거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길고 짙었다. 수연이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김선우에게 쫓기거나, 혹은 과거의 자신처럼 다른 남자들을 유혹하는 꿈을 꾸고는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아, 내가 옆에 있어’라고 속삭여주었다. 나의 체온과 목소리가 그녀에게 유일한 안정제였다.
현실의 문제들도 만만치 않았다. 수연이는 당장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중퇴라는 학력과, 그동안의 삶의 방식 때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녀는 몇 군데 카페와 레스토랑에 지원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녀는 좌절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괜찮아. 언젠가는 나를 받아주는 곳이 있겠지.”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눈빛에 어린 불안감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검정고시를 준비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대학에도 가고, 네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는 거야. 내가 도와줄게.”
내 말에, 수연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필요했다. 과거를 지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것이니까. 그날부터 나는 그녀의 선생님이 되었다. 낮에는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저녁에는 그녀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수학 문제를 풀어주었다. 우리는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함께 웃으며, 그렇게 서로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박재혁이었다. 그는 수소문 끝에 내 자취방 주소를 알아내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이전보다 훨씬 더 수척해 보였지만, 눈빛은 예전처럼 공허하지 않았다. 어딘가 평온을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수연의 앞을 막아서듯 살짝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수연이는 내 팔을 가만히 잡으며, 나를 제지했다. 그녀는 재혁을 피하지 않고, 담담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 이상 경계나 두려움이 없었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과 연민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재혁 씨.”
수연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지안’도, 상처에 떠는 ‘소녀’도 아니었다.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책임지려는 한 명의 어른이었다.
재혁은 그녀의 담담한 반응에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우리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네, 오랜만입니다. 수연 씨.” 그는 ‘지안’이 아닌 ‘수연’이라는 이름을 정확히 발음했다. “오늘 저는 피해자로서 용서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나를 한번, 그리고 수연이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저 역시… 가해자였기 때문입니다. 처음 수연 씨를 만났을 때, 저는 당신을 인격체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룻밤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트로피, 제 컬렉션에 추가할 또 하나의 사냥감으로만 여겼죠. 제 오만함과 추잡한 욕망이, 결국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오만했던 과거의 저 자신에 대해, 사죄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고백은 충격적일 만큼 솔직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수연 씨는 제게 거울 같은 존재였습니다. 제가 얼마나 텅 비고, 얼마나 천박한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인지를 비춰주는 거울. 당신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나서야, 저는 비로소 제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은 지옥과도 같았지만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왜 그토록 지배하려 했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쉽게 굴복했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이 사과는 당신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이 지긋지긋한 챕터를 끝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저만의 의식입니다. 더 이상 과거에 얽매여 당신을 원망하거나, 혹은 갈망하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수연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우리… 둘 다 어리석었네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조와 함께, 그를 이해한다는 듯한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
“재혁 씨는 재혁 씨의 방식으로, 저는 저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았어요. 이제 와서 누가 더 잘못했는지 따지는 건 의미가 없겠죠. 재혁 씨가… 앞으로는 정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요.”
그것은 용서이자, 화해의 선언이었다. 그녀는 재혁을 용서함으로써, 마침내 과거의 자신까지도 용서하고 있었다.
재혁은 그녀의 말에, 처음으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모든 짐을 내려놓은 사람의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부디 행복하십시오. 두 분은 서로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저는 멀리서나마, 두 분의 새로운 시작을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그는 할 말을 마쳤다는 듯,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수연이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시간은 흘렀고, 계절은 바뀌었다. 수연이는 작은 카페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고, 검정고시 준비도 꾸준히 해나갔다.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밝아졌다. 밤에 악몽을 꾸는 횟수도 줄어들었고, 웃는 일이 많아졌다. 그녀의 진짜 얼굴, ‘이수연’의 얼굴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더없는 행복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구원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빛이 되어주고, 서로를 성장시키는 동반자였다.
우리의 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쯤, 김선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나에게 만나자고 했다. 수연이는 걱정했지만, 나는 이제 그를 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관계를 완전히 매듭짓기 위해서는, 내가 그를 직접 만나야만 했다.
약속 장소는 그가 자주 가던 청담동의 프라이빗 바였다.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품위 있는 모습이었지만, 몇 달 사이에 부쩍 늙어 보였다. 그의 눈에는 깊은 피로와 상실감이 서려 있었다.
“자네가 이겼군.”
그가 나를 보자마자 뱉은 첫마디였다.
“승패는 없었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뿐입니다.”
내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자리라… 그 아이의 제자리가, 자네 같은 풋내기 옆이라는 건가.”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수연이는 강한 아이야. 내가 없어도, 자네가 없어도, 결국엔 스스로 일어섰을 거야. 나는 그저 그 아이가 조금 더 빨리, 그리고 덜 아프게 일어설 수 있도록 옆에서 부축해줬을 뿐이지.”
“…….”
“대표님께서도 이제 그 아이를 놓아주셔야 합니다. 진심으로 그 아이의 행복을 바라신다면요. 대표님이 만든 ‘지안’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수연’의 삶을 응원해주셔야 합니다.”
내 말에,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잔에 담긴 위스키를 천천히 비워냈다.
“내가… 틀렸던 걸까.”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그 아이를 사랑했어.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었지. 하지만 그 사랑이, 결국 그 아이를 가장 아프게 하는 새장이 되어버렸군.”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진심을 보았다. 뒤틀리고 이기적이었지만, 그것 역시 사랑의 한 형태였다.
“이제 곧 외국으로 떠나네. 사업도 정리하고,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볼 생각이야. 그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겠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내가 그 아이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그 아이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써주게. 자네를 믿고 맡기지.”
나는 봉투를 받지 않았다.
“감사하지만, 받을 수 없습니다. 수연 씨는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겁니다. 그것이 대표님께서 그녀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겁니다.”
내 단호한 태도에,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 말이 맞아.”
그는 마지막으로 내 어깨를 한번 툭 치고는, 바를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길고 길었던 싸움이 마침내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날 밤, 나는 수연이에게 김선우를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모든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는,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고마워, 민준아. 나를 지켜줘서. 그리고… 나를 믿어줘서.”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새로운 미래를 그렸다.
몇 년 후, 수연이는 마침내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원하던 대학의 심리학과에 입학했다. 그녀는 자신처럼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상담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상처에 얽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상처를, 타인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힘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퇴근 후, 캠퍼스에서 공부하고 있는 그녀를 데리러 가는 것이 내 하루의 가장 큰 낙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좁은 자취방에 살았고, 여전히 넉넉하지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어느 주말 오후, 우리는 네버랜드에 갔다. 이제 그곳은 우리에게 아픈 기억의 장소가 아닌, 우리의 사랑이 시작된 소중한 추억의 장소였다.
“나, 그때 왜 내 존재 자체를 ‘미끼’처럼 사용했는지 알아?”
수연이가 칵테일을 마시며, 뜬금없이 물었다.
“글쎄. 남자들을 유혹하려고?”
“그것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어.”
그녀는 나를 보며, 비밀스럽게 웃었다.
“나는 사실, 미끼를 던지고 있었던 거야. 이 넓고 차가운 세상 속에서, 내 진짜 모습을 알아봐 주고,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줄 단 한 사람을 낚기 위한 미끼. 내 활동명이었던 '지안'은, 결국 그 낚시를 위한 나의 가장 정교한 '미끼'였던 거지.”
“…….”
“그리고 마침내, 그 미끼를 네가 물어준 거야. 멍청하고, 순진하고, 겁 많은 내 구원자.”
그녀는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미끼에 걸린 것은 내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였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거부할 수 없는 미끼. 우리는 그 미끼에 걸려, 서로의 세상으로 기꺼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완전한 하나가 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향해 계속되고 있었다.
한강 변에서의 입맞춤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화려하고 위험했던 ‘지안’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서툴지만 진실한 ‘이수연’과 ‘이민준’의 이야기가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밤의 네온사인 대신 아침 햇살이, 위스키 대신 따뜻한 커피가, 거짓된 신음 대신 서툰 웃음소리가 우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다음 날, 수연이는 약속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김선우가 마련해 준 청담동의 고급 오피스텔을 비우고, 명품 옷과 가방들을 모두 처분했다. 그의 법인카드는 가위로 잘라버렸고, 차 키는 퀵서비스를 통해 그의 사무실로 돌려보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입고 있던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벗어 던지는 것처럼, 후련하고 단호했다.
나는 그녀가 짐을 정리하는 내내 곁을 지켰다. 그녀의 옷장에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값비싼 옷들이 가득했다. 그 옷들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김선우가 빚어낸 ‘지안’이라는 작품의 일부였고, 그녀는 이제 그 작품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녀는 가장 아끼던 몇 벌의 평범한 옷과 책 몇 권만을 챙겼다. 그녀의 새로운 삶에 필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텅 빈 오피스텔 거실에 서서,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 넓은 공간은 이제 낯설고 차갑게 느껴졌다.
“우리 집으로 가자.”
나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비록 좁고 낡았지만, 그래도 네가 편히 쉴 곳은 있어. 네가 새로운 집을 구할 때까지.”
수연이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하지 않았다. 나에게 기대는 법을, 서툴지만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작은 자취방에서 우리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지만, 그 어색함마저도 우리에게는 소중했다. 우리는 함께 장을 보고, 함께 요리를 했다. 그녀는 의외로 요리에 소질이 있었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계란말이를 만드는 그녀의 모습은 내가 알던 지안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지만, 나는 그 모습이 훨씬 더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평범한 연인들처럼 함께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의 빈 곳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과거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길고 짙었다. 수연이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김선우에게 쫓기거나, 혹은 과거의 자신처럼 다른 남자들을 유혹하는 꿈을 꾸고는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아, 내가 옆에 있어’라고 속삭여주었다. 나의 체온과 목소리가 그녀에게 유일한 안정제였다.
현실의 문제들도 만만치 않았다. 수연이는 당장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중퇴라는 학력과, 그동안의 삶의 방식 때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녀는 몇 군데 카페와 레스토랑에 지원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녀는 좌절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괜찮아. 언젠가는 나를 받아주는 곳이 있겠지.”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눈빛에 어린 불안감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검정고시를 준비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대학에도 가고, 네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는 거야. 내가 도와줄게.”
내 말에, 수연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필요했다. 과거를 지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것이니까. 그날부터 나는 그녀의 선생님이 되었다. 낮에는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저녁에는 그녀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수학 문제를 풀어주었다. 우리는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함께 웃으며, 그렇게 서로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박재혁이었다. 그는 수소문 끝에 내 자취방 주소를 알아내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이전보다 훨씬 더 수척해 보였지만, 눈빛은 예전처럼 공허하지 않았다. 어딘가 평온을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수연의 앞을 막아서듯 살짝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수연이는 내 팔을 가만히 잡으며, 나를 제지했다. 그녀는 재혁을 피하지 않고, 담담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 이상 경계나 두려움이 없었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과 연민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재혁 씨.”
수연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지안’도, 상처에 떠는 ‘소녀’도 아니었다.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책임지려는 한 명의 어른이었다.
재혁은 그녀의 담담한 반응에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우리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네, 오랜만입니다. 수연 씨.” 그는 ‘지안’이 아닌 ‘수연’이라는 이름을 정확히 발음했다. “오늘 저는 피해자로서 용서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나를 한번, 그리고 수연이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저 역시… 가해자였기 때문입니다. 처음 수연 씨를 만났을 때, 저는 당신을 인격체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룻밤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트로피, 제 컬렉션에 추가할 또 하나의 사냥감으로만 여겼죠. 제 오만함과 추잡한 욕망이, 결국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오만했던 과거의 저 자신에 대해, 사죄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고백은 충격적일 만큼 솔직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수연 씨는 제게 거울 같은 존재였습니다. 제가 얼마나 텅 비고, 얼마나 천박한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인지를 비춰주는 거울. 당신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나서야, 저는 비로소 제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은 지옥과도 같았지만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왜 그토록 지배하려 했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쉽게 굴복했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이 사과는 당신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이 지긋지긋한 챕터를 끝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저만의 의식입니다. 더 이상 과거에 얽매여 당신을 원망하거나, 혹은 갈망하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수연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우리… 둘 다 어리석었네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조와 함께, 그를 이해한다는 듯한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
“재혁 씨는 재혁 씨의 방식으로, 저는 저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았어요. 이제 와서 누가 더 잘못했는지 따지는 건 의미가 없겠죠. 재혁 씨가… 앞으로는 정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요.”
그것은 용서이자, 화해의 선언이었다. 그녀는 재혁을 용서함으로써, 마침내 과거의 자신까지도 용서하고 있었다.
재혁은 그녀의 말에, 처음으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모든 짐을 내려놓은 사람의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부디 행복하십시오. 두 분은 서로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저는 멀리서나마, 두 분의 새로운 시작을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그는 할 말을 마쳤다는 듯,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수연이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시간은 흘렀고, 계절은 바뀌었다. 수연이는 작은 카페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고, 검정고시 준비도 꾸준히 해나갔다.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밝아졌다. 밤에 악몽을 꾸는 횟수도 줄어들었고, 웃는 일이 많아졌다. 그녀의 진짜 얼굴, ‘이수연’의 얼굴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더없는 행복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구원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빛이 되어주고, 서로를 성장시키는 동반자였다.
우리의 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쯤, 김선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나에게 만나자고 했다. 수연이는 걱정했지만, 나는 이제 그를 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관계를 완전히 매듭짓기 위해서는, 내가 그를 직접 만나야만 했다.
약속 장소는 그가 자주 가던 청담동의 프라이빗 바였다.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품위 있는 모습이었지만, 몇 달 사이에 부쩍 늙어 보였다. 그의 눈에는 깊은 피로와 상실감이 서려 있었다.
“자네가 이겼군.”
그가 나를 보자마자 뱉은 첫마디였다.
“승패는 없었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뿐입니다.”
내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자리라… 그 아이의 제자리가, 자네 같은 풋내기 옆이라는 건가.”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수연이는 강한 아이야. 내가 없어도, 자네가 없어도, 결국엔 스스로 일어섰을 거야. 나는 그저 그 아이가 조금 더 빨리, 그리고 덜 아프게 일어설 수 있도록 옆에서 부축해줬을 뿐이지.”
“…….”
“대표님께서도 이제 그 아이를 놓아주셔야 합니다. 진심으로 그 아이의 행복을 바라신다면요. 대표님이 만든 ‘지안’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수연’의 삶을 응원해주셔야 합니다.”
내 말에,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잔에 담긴 위스키를 천천히 비워냈다.
“내가… 틀렸던 걸까.”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그 아이를 사랑했어.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었지. 하지만 그 사랑이, 결국 그 아이를 가장 아프게 하는 새장이 되어버렸군.”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진심을 보았다. 뒤틀리고 이기적이었지만, 그것 역시 사랑의 한 형태였다.
“이제 곧 외국으로 떠나네. 사업도 정리하고,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볼 생각이야. 그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겠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내가 그 아이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그 아이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써주게. 자네를 믿고 맡기지.”
나는 봉투를 받지 않았다.
“감사하지만, 받을 수 없습니다. 수연 씨는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겁니다. 그것이 대표님께서 그녀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겁니다.”
내 단호한 태도에,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 말이 맞아.”
그는 마지막으로 내 어깨를 한번 툭 치고는, 바를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길고 길었던 싸움이 마침내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날 밤, 나는 수연이에게 김선우를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모든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는,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고마워, 민준아. 나를 지켜줘서. 그리고… 나를 믿어줘서.”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새로운 미래를 그렸다.
몇 년 후, 수연이는 마침내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원하던 대학의 심리학과에 입학했다. 그녀는 자신처럼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상담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상처에 얽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상처를, 타인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힘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퇴근 후, 캠퍼스에서 공부하고 있는 그녀를 데리러 가는 것이 내 하루의 가장 큰 낙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좁은 자취방에 살았고, 여전히 넉넉하지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어느 주말 오후, 우리는 네버랜드에 갔다. 이제 그곳은 우리에게 아픈 기억의 장소가 아닌, 우리의 사랑이 시작된 소중한 추억의 장소였다.
“나, 그때 왜 내 존재 자체를 ‘미끼’처럼 사용했는지 알아?”
수연이가 칵테일을 마시며, 뜬금없이 물었다.
“글쎄. 남자들을 유혹하려고?”
“그것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어.”
그녀는 나를 보며, 비밀스럽게 웃었다.
“나는 사실, 미끼를 던지고 있었던 거야. 이 넓고 차가운 세상 속에서, 내 진짜 모습을 알아봐 주고,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줄 단 한 사람을 낚기 위한 미끼. 내 활동명이었던 '지안'은, 결국 그 낚시를 위한 나의 가장 정교한 '미끼'였던 거지.”
“…….”
“그리고 마침내, 그 미끼를 네가 물어준 거야. 멍청하고, 순진하고, 겁 많은 내 구원자.”
그녀는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미끼에 걸린 것은 내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였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거부할 수 없는 미끼. 우리는 그 미끼에 걸려, 서로의 세상으로 기꺼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완전한 하나가 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향해 계속되고 있었다.
작가의 말
등록된 작가의 말이 없습니다.
닫기![]()
미끼 (The Lure)
12.12 완조회 : 11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087 11.11조회 : 22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304 10.10조회 : 25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165 9.09조회 : 30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42 8.08조회 : 33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78 7.07조회 : 46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81 6.06조회 : 38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42 5.05조회 : 37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018 4.04조회 : 47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389 3.03조회 : 37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19 2.02조회 : 28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555 1.01조회 : 63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