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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252 추천 : 0 글자수 : 4,165 자 2025-09-09
폐허 위의 빛
그날 밤, 재혁의 오피스텔을 빠져나온 후, 나는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나 자신을 격리시켰다. 지안의 전화기를 꺼버린 것은 단순히 김선우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인위적인 관계들 김선우의 뒤틀린 보호, 재혁의 종속적인 숭배, 그리고 나의 오만한 구원 의지로부터 그녀를 해방시키고, 동시에 나 자신도 그 복잡한 관계의 사슬에서 벗어나겠다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나는 며칠 동안 휴대폰을 꺼놓고 지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안이 잠에서 깨어 어떤 혼란을 겪고 있을지 애써 외면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리고 유일한 방법은 침묵과 거리두기뿐이라고 믿었다. 그녀에게는 스스로 상처를 마주하고, 부서진 자신을 추스를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내가 그녀의 곁에 머무는 한, 그녀는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없을 터였다. 나는 그녀의 그림자가 아닌, 그녀가 스스로 빛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등대가 되어야 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옥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는 텅 빈 방 안에서 수없이 많은 생각과 싸워야 했다. 내가 정말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혹시 나의 침묵이 그녀에게 또 다른 형태의 버림받음으로 느껴지지는 않을까? 그녀가 다시 예전의 방식으로, 다른 남자를 사냥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하지는 않을까? 온갖 불안감이 나를 잠식했지만, 나는 굳건히 버텨냈다. 그녀를 믿어야만 했다. 그녀 안에 숨겨진,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일주일이 지난 금요일 밤, 나는 마침내 휴대폰 전원을 켰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대부분은 학교 친구들과 가족들의 걱정 어린 연락이었고, 재혁에게서도 몇 통의 문자가 와 있었다.
[지안 씨는 괜찮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의 짧은 메시지에서 나는 복잡한 감정을 읽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었지만, 이제는 한 걸음 물러나 나처럼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연락들 속에, 내가 가장 기다렸던 이름은 없었다. 지안은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실망감과 함께 미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가 나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나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 발걸음은 어느새 익숙한 곳, 네버랜드로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 안에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바텐더에게 익숙하게 위스키를 주문하고, 늘 앉던 구석 자리에 몸을 묻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내 옆자리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숨을 멈췄다. 지안이었다. 그녀는 예고 없이,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도, 짙은 화장도 없었다. 편안한 면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질끈 묶은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은 조금 수척해 보였지만, 그 어떤 때보다 맑고 투명했다. 그녀의 눈빛 역시 달라져 있었다. 상대를 꿰뚫어 보던 날카로움이나, 모든 것을 비웃던 냉소 대신, 깊고 고요한 호수 같은 평온함이 담겨 있었다.
“오랜만이네, 이민준.”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 또한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웠다.
“……어떻게 지냈어?”
나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내 물었다.
“그냥. 생각 좀 했어. 나에 대해서, 너에 대해서, 그리고… 내 인생에 대해서.”
그녀는 바텐더에게 물 한 잔을 주문하고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마워.”
“뭐가?”
“그날 밤, 나를 혼자 내버려 둬서. 그리고… 내 전화기를 꺼버려서.”
그녀의 말에, 나는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나의 의도를, 나의 진심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처음엔 화가 났어. 네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지. 모두가 나를 떠났다고. 세상에 나 혼자 남겨졌다고. 그래서 예전처럼 다른 남자를 만날까도 생각했어. 내 가치를 확인받고 싶어서. 내가 여전히 매력적이고, 누군가를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어. 이상하게,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았어. 그 모든 게임이 다 부질없고, 허무하게 느껴졌어. 네가 꺼버린 전화기처럼, 내 안의 무언가도 함께 꺼져버린 기분이었지.”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며칠 동안, 그냥 방 안에만 있었어. 아무것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그냥 멍하니 천장만 봤어. 그러다 보니, 잊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떠오르더라. 내가 왜 이렇게 살게 됐는지. 내가 진짜로 원했던 건 뭐였는지.”
그녀의 눈빛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과거를 향해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난 어렸을 때,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어.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매일같이 맞고 살았지.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집을 나갔고. 내 유일한 꿈은 그 지옥 같은 집에서 탈출하는 거였어.”
나는 처음 듣는 그녀의 과거 이야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아줄 뿐이었다.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열여덟 살에 집을 나왔어. 가진 건 몸뚱이 하나뿐이었지.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 공장, 식당, 편의점… 그러다 우연히, 한 트랜스젠더 바에서 일하게 됐어. 거기서 처음으로 ‘나처럼’ 생긴 사람들을 봤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당당하고, 화려했지. 나는 그들의 세계에 매료됐어.”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눈을 뜬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배운 것이다.
“김 대표님은 거기서 만났어. 그는 다른 남자들과 달랐지. 나를 성적인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어. 내 안에 있는 상처와 가능성을 봐줬지. 그는 나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줬어. 수술을 시켜주고, 좋은 옷을 입혀주고, 교양을 가르쳐줬지. 그는 나를 지금의 ‘지안’으로 만들어준 창조주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김선우에 대한 깊은 애증이 담겨 있었다. 그는 구원자였지만, 동시에 그녀를 자신의 세계에 가둔 주인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보답하고 싶었어. 그가 원하는 완벽한 작품이 되어주고 싶었지. 그래서 더 독해졌어. 더 강해졌고. 다른 남자들을 지배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면서, 내가 더 이상 과거의 그 불쌍하고 힘없는 소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 김 대표님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이제야 모든 조각이 맞춰졌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녀가 쌓아 올린 성벽은, 사실은 너무나도 연약한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널 만났어, 이민준.”
그녀가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그 어떤 때보다 깊고 진지했다.
“넌 다른 남자들과 달랐어. 내 화려한 겉모습에 속지도 않았고, 내 게임에 놀아나지도 않았지. 넌 자꾸만 내 성벽을 두드리고, 그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어. 나는 그게 너무 무서웠어. 내 진짜 모습을 들키는 게. 내가 사실은 얼마나 보잘것없고 약한 존재인지 네가 알게 되는 게.”
“…….”
“그래서 널 밀어냈어. 상처 주고, 시험하고. 네가 지쳐서 떠나길 바랐지. 그런데 넌 떠나지 않았어. 오히려 내 가장 아픈 곳을 꿰뚫어 보고, 나를 무너뜨렸지. 그리고… 나를 혼자 내버려 뒀어. 내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그녀의 눈가에 다시 물기가 어렸다. 하지만 이번의 눈물은 이전의 그것과는 달랐다. 슬픔이나 분노의 눈물이 아닌, 정화와 감사의 눈물이었다.
“나 이제, 다시 시작해보려고.”
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내가 본 그녀의 모습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물론 쉽지 않겠지. 김 대표님과의 관계도 정리해야 하고, 재혁 씨한테도 사과해야 하고. 무엇보다, 나 자신과 싸워야 하니까.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거야. 네가 있잖아.”
그녀의 마지막 말은 나에게 건네는 고백이자, 함께 길을 걷자는 제안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래. 내가 옆에 있을게.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항상 네 편이야.”
우리는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우리 사이에는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통해 연결되었고, 서로의 진심을 통해 하나가 되었다. 폐허 위에, 아주 작지만 따뜻한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바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김선우였다.
그날 밤, 재혁의 오피스텔을 빠져나온 후, 나는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나 자신을 격리시켰다. 지안의 전화기를 꺼버린 것은 단순히 김선우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인위적인 관계들 김선우의 뒤틀린 보호, 재혁의 종속적인 숭배, 그리고 나의 오만한 구원 의지로부터 그녀를 해방시키고, 동시에 나 자신도 그 복잡한 관계의 사슬에서 벗어나겠다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나는 며칠 동안 휴대폰을 꺼놓고 지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안이 잠에서 깨어 어떤 혼란을 겪고 있을지 애써 외면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리고 유일한 방법은 침묵과 거리두기뿐이라고 믿었다. 그녀에게는 스스로 상처를 마주하고, 부서진 자신을 추스를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내가 그녀의 곁에 머무는 한, 그녀는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없을 터였다. 나는 그녀의 그림자가 아닌, 그녀가 스스로 빛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등대가 되어야 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옥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는 텅 빈 방 안에서 수없이 많은 생각과 싸워야 했다. 내가 정말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혹시 나의 침묵이 그녀에게 또 다른 형태의 버림받음으로 느껴지지는 않을까? 그녀가 다시 예전의 방식으로, 다른 남자를 사냥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하지는 않을까? 온갖 불안감이 나를 잠식했지만, 나는 굳건히 버텨냈다. 그녀를 믿어야만 했다. 그녀 안에 숨겨진,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일주일이 지난 금요일 밤, 나는 마침내 휴대폰 전원을 켰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대부분은 학교 친구들과 가족들의 걱정 어린 연락이었고, 재혁에게서도 몇 통의 문자가 와 있었다.
[지안 씨는 괜찮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의 짧은 메시지에서 나는 복잡한 감정을 읽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었지만, 이제는 한 걸음 물러나 나처럼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연락들 속에, 내가 가장 기다렸던 이름은 없었다. 지안은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실망감과 함께 미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가 나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나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 발걸음은 어느새 익숙한 곳, 네버랜드로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 안에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바텐더에게 익숙하게 위스키를 주문하고, 늘 앉던 구석 자리에 몸을 묻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내 옆자리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숨을 멈췄다. 지안이었다. 그녀는 예고 없이,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도, 짙은 화장도 없었다. 편안한 면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질끈 묶은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은 조금 수척해 보였지만, 그 어떤 때보다 맑고 투명했다. 그녀의 눈빛 역시 달라져 있었다. 상대를 꿰뚫어 보던 날카로움이나, 모든 것을 비웃던 냉소 대신, 깊고 고요한 호수 같은 평온함이 담겨 있었다.
“오랜만이네, 이민준.”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 또한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웠다.
“……어떻게 지냈어?”
나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내 물었다.
“그냥. 생각 좀 했어. 나에 대해서, 너에 대해서, 그리고… 내 인생에 대해서.”
그녀는 바텐더에게 물 한 잔을 주문하고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마워.”
“뭐가?”
“그날 밤, 나를 혼자 내버려 둬서. 그리고… 내 전화기를 꺼버려서.”
그녀의 말에, 나는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나의 의도를, 나의 진심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처음엔 화가 났어. 네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지. 모두가 나를 떠났다고. 세상에 나 혼자 남겨졌다고. 그래서 예전처럼 다른 남자를 만날까도 생각했어. 내 가치를 확인받고 싶어서. 내가 여전히 매력적이고, 누군가를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어. 이상하게,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았어. 그 모든 게임이 다 부질없고, 허무하게 느껴졌어. 네가 꺼버린 전화기처럼, 내 안의 무언가도 함께 꺼져버린 기분이었지.”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며칠 동안, 그냥 방 안에만 있었어. 아무것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그냥 멍하니 천장만 봤어. 그러다 보니, 잊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떠오르더라. 내가 왜 이렇게 살게 됐는지. 내가 진짜로 원했던 건 뭐였는지.”
그녀의 눈빛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과거를 향해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난 어렸을 때,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어.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매일같이 맞고 살았지.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집을 나갔고. 내 유일한 꿈은 그 지옥 같은 집에서 탈출하는 거였어.”
나는 처음 듣는 그녀의 과거 이야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아줄 뿐이었다.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열여덟 살에 집을 나왔어. 가진 건 몸뚱이 하나뿐이었지.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 공장, 식당, 편의점… 그러다 우연히, 한 트랜스젠더 바에서 일하게 됐어. 거기서 처음으로 ‘나처럼’ 생긴 사람들을 봤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당당하고, 화려했지. 나는 그들의 세계에 매료됐어.”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눈을 뜬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배운 것이다.
“김 대표님은 거기서 만났어. 그는 다른 남자들과 달랐지. 나를 성적인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어. 내 안에 있는 상처와 가능성을 봐줬지. 그는 나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줬어. 수술을 시켜주고, 좋은 옷을 입혀주고, 교양을 가르쳐줬지. 그는 나를 지금의 ‘지안’으로 만들어준 창조주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김선우에 대한 깊은 애증이 담겨 있었다. 그는 구원자였지만, 동시에 그녀를 자신의 세계에 가둔 주인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보답하고 싶었어. 그가 원하는 완벽한 작품이 되어주고 싶었지. 그래서 더 독해졌어. 더 강해졌고. 다른 남자들을 지배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면서, 내가 더 이상 과거의 그 불쌍하고 힘없는 소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 김 대표님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이제야 모든 조각이 맞춰졌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녀가 쌓아 올린 성벽은, 사실은 너무나도 연약한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널 만났어, 이민준.”
그녀가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그 어떤 때보다 깊고 진지했다.
“넌 다른 남자들과 달랐어. 내 화려한 겉모습에 속지도 않았고, 내 게임에 놀아나지도 않았지. 넌 자꾸만 내 성벽을 두드리고, 그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어. 나는 그게 너무 무서웠어. 내 진짜 모습을 들키는 게. 내가 사실은 얼마나 보잘것없고 약한 존재인지 네가 알게 되는 게.”
“…….”
“그래서 널 밀어냈어. 상처 주고, 시험하고. 네가 지쳐서 떠나길 바랐지. 그런데 넌 떠나지 않았어. 오히려 내 가장 아픈 곳을 꿰뚫어 보고, 나를 무너뜨렸지. 그리고… 나를 혼자 내버려 뒀어. 내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그녀의 눈가에 다시 물기가 어렸다. 하지만 이번의 눈물은 이전의 그것과는 달랐다. 슬픔이나 분노의 눈물이 아닌, 정화와 감사의 눈물이었다.
“나 이제, 다시 시작해보려고.”
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내가 본 그녀의 모습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물론 쉽지 않겠지. 김 대표님과의 관계도 정리해야 하고, 재혁 씨한테도 사과해야 하고. 무엇보다, 나 자신과 싸워야 하니까.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거야. 네가 있잖아.”
그녀의 마지막 말은 나에게 건네는 고백이자, 함께 길을 걷자는 제안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래. 내가 옆에 있을게.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항상 네 편이야.”
우리는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우리 사이에는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통해 연결되었고, 서로의 진심을 통해 하나가 되었다. 폐허 위에, 아주 작지만 따뜻한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바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김선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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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끼 (The L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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