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조회 : 99 추천 : 0 글자수 : 5,536 자 2025-08-25
26화: 상처의 조각들
노을이 지는 해변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후, 인서와 허혁의 시간은 느리게, 그리고 위태롭게 흘러갔다. J 그룹의 후계자도, 계약 결혼의 배우자도 아닌, 그저 정인서와 허혁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삶. 그 삶은 폭풍이 지나간 뒤의 폐허처럼 고요했지만, 결코 평화롭지는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과거의 상처와 미완의 용서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은 해변가 언덕에 자리한, 통유리창으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모던한 집에서 함께 살았다. 집 안은 인서의 취향대로 불필요한 장식 없이 깔끔하고 미니멀했지만, 곳곳에 허혁이 서툰 솜씨로 가꾼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어 서먹한 온기가 느껴졌다. 인서는 더 이상 몸에 딱 맞는 완벽한 수트를 입지 않았다. 편안한 면바지와 캐시미어 니트 차림의 그는 J 그룹의 냉철한 후계자라기보다는, 깊은 상처와 고독을 안고 사는 한 명의 남자로 보였다. 그의 어깨에는 정우진에게 맞았던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허혁은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인서의 맨 어깨에 남은 그 흉터를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흉터는 허혁에게 죄책감과 동시에 인서의 사랑을 증명하는 지워지지 않는 낙인 같았다.
허혁은 매일 아침 동이 트기 전 잠에서 깨어났다. 인서의 옆에서 잠드는 것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놓이다가도, 문득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숨이 막혔다. 원수의 아들. 자신을 사랑한다고 눈물로 고백했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해변을 걸었다. 차가운 새벽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는 아버지의 죽음과 인서의 고백, 그리고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정리하려 애썼다. 증오해야 마땅한데, 왜 자꾸만 그의 고독한 뒷모습이 눈에 밟히는 걸까. 그의 차가운 손이 자신의 손을 잡을 때 느껴졌던 미약한 온기를 잊을 수가 없었다.
인서는 그런 허혁의 고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는 허혁이 새벽마다 해변을 걷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결코 따라나서지 않았다. 허혁에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섣부른 위로나 변명이 오히려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허혁이 자신을 받아들일 때까지,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라도, 기다리겠다는 듯 조용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허혁을 향한 깊은 애정과 함께, 자신이 저지른 죄(가문의 죄)에 대한 끝없는 후회가 담겨 있었다.
어느 날 아침, 허혁은 잠에서 깨어나 옆자리를 보았다. 인서가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거실로 나가보니, 인서는 소파에 앉아 낡은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두웠고, 표정에는 깊은 고뇌가 서려 있었다. 화면에는 복잡한 숫자들과 J 그룹의 로고가 희미하게 보였다.
"사장님... 아니... 인서 씨..."
허혁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인서는 허혁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노트북을 덮었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한, 허혁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계약 관계였을 때, 그가 자신의 계획을 숨기려 할 때 짓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일어났습니까, 허혁 씨."
인서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 J 그룹... 관련 일인가요?"
허혁이 물었다. 모든 것을 버렸다고 했지만, 인서는 여전히 J 그룹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옛날 자료들을 좀 보고 있었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인서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혁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인서는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인서는 밤늦게까지 서재에서 무언가를 하거나, 혼자 외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외출할 때면 그는 항상 검은 옷을 입었고, 돌아올 때는 깊은 피로와 함께 알 수 없는 슬픔을 담고 있었다. 허혁은 인서의 비밀스러운 행동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가 자신 몰래 J 그룹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있는 걸까. 정 회장이나 박 마담, 혹은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자신에게 말하지 못할 또 다른 비밀이 있는 걸까.
허혁은 김도진에게 연락했다. J 그룹 사태가 마무리된 후, 김도진은 다시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갔다. 그는 허혁에게 든든한 친구이자 유일한 상담 상대였다. 인서의 저택에 갇혔던 경험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지만, 허혁과의 우정은 그 상처를 이겨낼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도진아... 나야..."
"혁아! 괜찮아?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김도진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했다.
"인서 씨가... 좀 이상해... 나한테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아. 밤늦게까지 서재에 있거나... 혼자 외출하고... 돌아오면 너무 지쳐 보여."
허혁은 불안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수화기 너머로 김도진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혁아... 그 사람... 아직 모든 걸 내려놓지 못했을 수도 있어. J 그룹... 그리고 네 아버지 일까지... 그 사람이 짊어져야 할 무게가... 너무 크잖아. 평생을 후계자로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잊고 평범하게 살기는 어렵겠지."
김도진의 말은 현실적이었다. 인서는 J 그룹의 모든 것을 버렸지만, 과거의 죄책감과 책임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나한테까지 숨길 필요는 없잖아... 우리는... 함께하기로 했는데... 그의 짐을... 같이 짊어지고 싶은데..."
허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인서와의 관계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로 했지만,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혁아... 그 사람... 너를 보호하려는 걸 수도 있어. 너에게 더 이상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는 걸지도 몰라. 그 사람... 그런 사람이잖아. 혼자 다 끌어안고... 아파도 아프다고 말 못 하는 사람."
김도진은 인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애썼다. 그는 인서가 허혁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얼마나 큰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모르는 척... 기다려야 할까?"
허혁은 막막했다.
"기다려줘. 그리고... 믿어줘. 그 사람이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 그것만은... 진심이잖아. 네가 먼저 다가가서... 그의 마음을 열어줘. 네가 그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줘야지."
김도진의 말에 허혁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 인서의 사랑은 진심이었다. 그 진심 하나만을 믿고, 그는 이 불안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그에게 다가가야 했다.
그날 밤, 허혁은 잠든 인서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평소의 차가운 가면을 벗은 그의 얼굴은 지쳐 보였고,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허혁은 자신도 모르게 인서의 뺨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에 인서가 잠결에 뒤척이며 허혁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허혁 씨..."
인서가 잠꼬대처럼 허혁의 이름을 불렀다. 허혁은 가슴이 아팠다. 인서는 꿈속에서도 자신을 찾고 있었다. 그의 고독과 불안이 느껴졌다.
허혁은 결심했다. 인서가 무엇을 숨기고 있든, 그가 자신을 보호하려 하든...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먼저 다가가 그의 마음을 열고, 그의 짐을 함께 짊어지기로. 그것이 자신이 인서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허혁은 인서에게 말했다.
"인서 씨. 오늘... 저와 함께 가주실 곳이 있어요."
인서는 허혁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허혁의 의도를 읽으려는 듯한 탐색이 담겨 있었다.
"어디로 갑니까?"
"가보면 알아요."
허혁은 인서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허혁의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작은 납골당이었다.
납골당에 들어서는 순간, 인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허혁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를 직감했다. 죄책감과 두려움이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그는 허혁의 손을 놓으려 했지만, 허혁은 그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허혁은 아버지의 유골함 앞에 섰다. 그리고 인서를 돌아보았다.
"인사... 드리세요."
허혁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인서는 망설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인 남자의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는 허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허혁의 눈빛은 그를 원망하는 대신, 함께 아픔을 나누자는 듯한 깊은 슬픔을 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인서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인서는 천천히 허혁의 아버지 유골함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인서의 목소리는 갈라졌고,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가운 가면을 벗은 남자의 진짜 눈물.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죄를 대신하여 허혁의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그의 등은 한없이 작고 위태로워 보였다.
허혁은 그런 인서의 모습을 보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증오와 원망이 눈물과 함께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완벽한 용서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가장 깊은 상처를 마주하고, 함께 아파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이 순간, 그들은 원수의 아들과 피해자의 아들이 아닌, 그저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두 사람이었다.
"일어나세요, 인서 씨."
허혁이 인서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아버지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니까. 그리고... 나도... 당신을... 원망하고 싶지 않아요."
허혁의 말에 인서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지만, 그 눈빛 속에서 아주 작은 희망의 빛이 보였다.
납골당을 나서는 길,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전의 어색한 침묵과는 다른,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는 듯한 조용한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인서는 허혁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가 밤늦게까지 서재에서 했던 일은, J 그룹의 비자금과 관련된 자료들을 정리하고, 20년 전 사고의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익명으로 보상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조금이라도 씻고 싶어 했다.
"당신에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에게 더 이상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나 혼자...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인서의 목소리에는 깊은 후회가 담겨 있었다.
허혁은 인서의 손을 잡았다.
"이제... 혼자 아파하지 마세요. 같이... 해요. 당신의 짐... 나도... 같이 짊어질게요. 당신 아버지의 죄... 그리고 내 아버지의 죽음... 그 모든 것을... 우리가 함께... 감당해요."
허혁의 말에 인서는 눈물을 흘렸다. 그는 허혁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품에 안겨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과거의 상처는 여전히 깊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댄 채,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갈 용기를 얻고 있었다.
상처 속에서 피어난 진심. 그 진심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미완의 용서를 향한 긴 여정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제 막, 진짜 시작이었다.
노을이 지는 해변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후, 인서와 허혁의 시간은 느리게, 그리고 위태롭게 흘러갔다. J 그룹의 후계자도, 계약 결혼의 배우자도 아닌, 그저 정인서와 허혁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삶. 그 삶은 폭풍이 지나간 뒤의 폐허처럼 고요했지만, 결코 평화롭지는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과거의 상처와 미완의 용서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은 해변가 언덕에 자리한, 통유리창으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모던한 집에서 함께 살았다. 집 안은 인서의 취향대로 불필요한 장식 없이 깔끔하고 미니멀했지만, 곳곳에 허혁이 서툰 솜씨로 가꾼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어 서먹한 온기가 느껴졌다. 인서는 더 이상 몸에 딱 맞는 완벽한 수트를 입지 않았다. 편안한 면바지와 캐시미어 니트 차림의 그는 J 그룹의 냉철한 후계자라기보다는, 깊은 상처와 고독을 안고 사는 한 명의 남자로 보였다. 그의 어깨에는 정우진에게 맞았던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허혁은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인서의 맨 어깨에 남은 그 흉터를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흉터는 허혁에게 죄책감과 동시에 인서의 사랑을 증명하는 지워지지 않는 낙인 같았다.
허혁은 매일 아침 동이 트기 전 잠에서 깨어났다. 인서의 옆에서 잠드는 것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놓이다가도, 문득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숨이 막혔다. 원수의 아들. 자신을 사랑한다고 눈물로 고백했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해변을 걸었다. 차가운 새벽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는 아버지의 죽음과 인서의 고백, 그리고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정리하려 애썼다. 증오해야 마땅한데, 왜 자꾸만 그의 고독한 뒷모습이 눈에 밟히는 걸까. 그의 차가운 손이 자신의 손을 잡을 때 느껴졌던 미약한 온기를 잊을 수가 없었다.
인서는 그런 허혁의 고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는 허혁이 새벽마다 해변을 걷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결코 따라나서지 않았다. 허혁에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섣부른 위로나 변명이 오히려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허혁이 자신을 받아들일 때까지,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라도, 기다리겠다는 듯 조용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허혁을 향한 깊은 애정과 함께, 자신이 저지른 죄(가문의 죄)에 대한 끝없는 후회가 담겨 있었다.
어느 날 아침, 허혁은 잠에서 깨어나 옆자리를 보았다. 인서가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거실로 나가보니, 인서는 소파에 앉아 낡은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두웠고, 표정에는 깊은 고뇌가 서려 있었다. 화면에는 복잡한 숫자들과 J 그룹의 로고가 희미하게 보였다.
"사장님... 아니... 인서 씨..."
허혁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인서는 허혁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노트북을 덮었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한, 허혁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계약 관계였을 때, 그가 자신의 계획을 숨기려 할 때 짓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일어났습니까, 허혁 씨."
인서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 J 그룹... 관련 일인가요?"
허혁이 물었다. 모든 것을 버렸다고 했지만, 인서는 여전히 J 그룹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옛날 자료들을 좀 보고 있었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인서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혁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인서는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인서는 밤늦게까지 서재에서 무언가를 하거나, 혼자 외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외출할 때면 그는 항상 검은 옷을 입었고, 돌아올 때는 깊은 피로와 함께 알 수 없는 슬픔을 담고 있었다. 허혁은 인서의 비밀스러운 행동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가 자신 몰래 J 그룹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있는 걸까. 정 회장이나 박 마담, 혹은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자신에게 말하지 못할 또 다른 비밀이 있는 걸까.
허혁은 김도진에게 연락했다. J 그룹 사태가 마무리된 후, 김도진은 다시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갔다. 그는 허혁에게 든든한 친구이자 유일한 상담 상대였다. 인서의 저택에 갇혔던 경험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지만, 허혁과의 우정은 그 상처를 이겨낼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도진아... 나야..."
"혁아! 괜찮아?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김도진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했다.
"인서 씨가... 좀 이상해... 나한테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아. 밤늦게까지 서재에 있거나... 혼자 외출하고... 돌아오면 너무 지쳐 보여."
허혁은 불안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수화기 너머로 김도진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혁아... 그 사람... 아직 모든 걸 내려놓지 못했을 수도 있어. J 그룹... 그리고 네 아버지 일까지... 그 사람이 짊어져야 할 무게가... 너무 크잖아. 평생을 후계자로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잊고 평범하게 살기는 어렵겠지."
김도진의 말은 현실적이었다. 인서는 J 그룹의 모든 것을 버렸지만, 과거의 죄책감과 책임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나한테까지 숨길 필요는 없잖아... 우리는... 함께하기로 했는데... 그의 짐을... 같이 짊어지고 싶은데..."
허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인서와의 관계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로 했지만,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혁아... 그 사람... 너를 보호하려는 걸 수도 있어. 너에게 더 이상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는 걸지도 몰라. 그 사람... 그런 사람이잖아. 혼자 다 끌어안고... 아파도 아프다고 말 못 하는 사람."
김도진은 인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애썼다. 그는 인서가 허혁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얼마나 큰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모르는 척... 기다려야 할까?"
허혁은 막막했다.
"기다려줘. 그리고... 믿어줘. 그 사람이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 그것만은... 진심이잖아. 네가 먼저 다가가서... 그의 마음을 열어줘. 네가 그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줘야지."
김도진의 말에 허혁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 인서의 사랑은 진심이었다. 그 진심 하나만을 믿고, 그는 이 불안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그에게 다가가야 했다.
그날 밤, 허혁은 잠든 인서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평소의 차가운 가면을 벗은 그의 얼굴은 지쳐 보였고,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허혁은 자신도 모르게 인서의 뺨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에 인서가 잠결에 뒤척이며 허혁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허혁 씨..."
인서가 잠꼬대처럼 허혁의 이름을 불렀다. 허혁은 가슴이 아팠다. 인서는 꿈속에서도 자신을 찾고 있었다. 그의 고독과 불안이 느껴졌다.
허혁은 결심했다. 인서가 무엇을 숨기고 있든, 그가 자신을 보호하려 하든...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먼저 다가가 그의 마음을 열고, 그의 짐을 함께 짊어지기로. 그것이 자신이 인서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허혁은 인서에게 말했다.
"인서 씨. 오늘... 저와 함께 가주실 곳이 있어요."
인서는 허혁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허혁의 의도를 읽으려는 듯한 탐색이 담겨 있었다.
"어디로 갑니까?"
"가보면 알아요."
허혁은 인서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허혁의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작은 납골당이었다.
납골당에 들어서는 순간, 인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허혁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를 직감했다. 죄책감과 두려움이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그는 허혁의 손을 놓으려 했지만, 허혁은 그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허혁은 아버지의 유골함 앞에 섰다. 그리고 인서를 돌아보았다.
"인사... 드리세요."
허혁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인서는 망설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인 남자의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는 허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허혁의 눈빛은 그를 원망하는 대신, 함께 아픔을 나누자는 듯한 깊은 슬픔을 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인서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인서는 천천히 허혁의 아버지 유골함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인서의 목소리는 갈라졌고,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가운 가면을 벗은 남자의 진짜 눈물.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죄를 대신하여 허혁의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그의 등은 한없이 작고 위태로워 보였다.
허혁은 그런 인서의 모습을 보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증오와 원망이 눈물과 함께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완벽한 용서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가장 깊은 상처를 마주하고, 함께 아파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이 순간, 그들은 원수의 아들과 피해자의 아들이 아닌, 그저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두 사람이었다.
"일어나세요, 인서 씨."
허혁이 인서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아버지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니까. 그리고... 나도... 당신을... 원망하고 싶지 않아요."
허혁의 말에 인서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지만, 그 눈빛 속에서 아주 작은 희망의 빛이 보였다.
납골당을 나서는 길,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전의 어색한 침묵과는 다른,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는 듯한 조용한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인서는 허혁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가 밤늦게까지 서재에서 했던 일은, J 그룹의 비자금과 관련된 자료들을 정리하고, 20년 전 사고의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익명으로 보상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조금이라도 씻고 싶어 했다.
"당신에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에게 더 이상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나 혼자...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인서의 목소리에는 깊은 후회가 담겨 있었다.
허혁은 인서의 손을 잡았다.
"이제... 혼자 아파하지 마세요. 같이... 해요. 당신의 짐... 나도... 같이 짊어질게요. 당신 아버지의 죄... 그리고 내 아버지의 죽음... 그 모든 것을... 우리가 함께... 감당해요."
허혁의 말에 인서는 눈물을 흘렸다. 그는 허혁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품에 안겨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과거의 상처는 여전히 깊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댄 채,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갈 용기를 얻고 있었다.
상처 속에서 피어난 진심. 그 진심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미완의 용서를 향한 긴 여정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제 막, 진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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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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