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조회 : 73 추천 : 0 글자수 : 4,974 자 2025-08-27
에필로그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 진심. 그 진심이 두 사람을 영원히 지켜줄 것이었다."
타닥, 타닥, 타닥… 탁.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마지막 마침표 위에서 멈췄다.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허혁은 뻐근한 목을 돌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두운 원룸을 밝히는 것은 오직 노트북 화면의 희미한 불빛뿐이었다. 화면에는 방금 그가 써 내려간 문장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계약 결혼의 끝 - 30부 (完)]. 3년..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를 울고 웃게 했던 지독했던 사랑 이야기가 마침내 끝나는 순간이었다.
허혁은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지만,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그는 익숙하게 부엌으로 향해 커피를 내렸다. 쌉쌀한 커피 향이 방 안에 퍼지자, 비로소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지독한 이야기 속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는 커피 잔을 든 채, 벽에 붙어있는 수많은 메모들을 바라보았다. 정인서와 허혁. 두 주인공의 감정선, 그들을 둘러싼 인물 관계도, 그리고 파멸적인 사건들의 순서. 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에서 태어나고, 그의 손끝에서 완성되었다.
정인서. J 그룹의 후계자. 차갑고 완벽하지만 내면에 깊은 상처와 뜨거운 욕망을 숨기고 있는 남자. 허혁은 그를 만들며 세상의 모든 냉철함과 고독을 담았다.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절박한 순애보도 함께.
그리고 허혁. 자신의 이름을 붙인 주인공. 가난하고, 절망적이지만,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청년. 허혁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을 그에게 투영했다. 소설 속 허혁은 자신보다 훨씬 더 용감했고, 강했으며, 결국 사랑을 지켜냈다.
"이제… 진짜 끝이구나."
허혁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완성된 대본 파일을 메일로 보냈다. 수신인은 스타 PD인 봉준호 감독이었다. 1년 전, 단막극 공모전에 당선된 허혁의 글을 눈여겨본 봉 감독은 그에게 파격적으로 장편 드라마 집필을 제안했다. 그리고 허혁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계약 결혼의 끝>을 완성했다.
며칠 후, 봉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허 작가님! 대본 미쳤어요! 마지막까지 아주 그냥… 사람을 쥐었다 놨다 하는구만! 이거… 대박 나겠는데?"
봉 감독의 흥분한 목소리에 허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날부터, 드라마 <계약 결혼의 끝>의 제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방송사가 편성되었고, 제작사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관문이 남아 있었다. 바로, 정인서와 허혁을 연기할 배우를 찾는 것.
시간을 거슬러 현재.
드라마 <계약 결혼의 끝>의 캐스팅 오디션이 한창이던 상암동의 한 스튜디오.
오디션장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J 그룹의 후계자, 차갑고 완벽하지만 내면에 깊은 상처와 뜨거운 욕망을 숨기고 있는 남자, '정인서' 역을 맡기 위해 수많은 배우들이 오디션에 지원했다. 이미 이름이 알려진 기성 배우부터 아이돌, 모델까지. 하지만 봉 감독과 허혁의 마음에 쏙 드는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너무 느끼해. 재벌 흉내만 내잖아. 정인서는 그런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고."
"너무 착해 보여. 저 얼굴로 어떻게 사람을 지배하고 파멸시키겠어."
봉 감독은 까다로웠다. 허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정인서'는 단순히 차가운 재벌이 아니었다. 고독하고, 위태로우며,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복잡하고 입체적인 인물이어야 했다.
지쳐갈 무렵, 오디션장 문이 열리고 137번 지원자가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는 순간, 허혁은 숨을 멈췄다. 봉 감독과 다른 심사위원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허혁이 상상했던 '정인서' 그 자체였다. 키가 크고, 몸은 단단했으며, 값비싼 수트가 아니었음에도 온몸에서 기품이 흘렀다. 무엇보다 그의 얼굴. 날카로운 턱선, 오뚝한 콧날, 그리고 깊고 차가운 눈. 그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로우면서도, 그 깊은 곳에는 알 수 없는 슬픔과 고독이 담겨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지원자 번호 137번, 정인서입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허혁은 그의 입에서 나온 '정인서'라는 이름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우연일까. 아니면…
"이름이… 정인서라고요?"
봉 감독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네. 본명입니다."
"경력은… 거의 없네요. 신인인가요?"
"네. 연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신인. 하지만 그의 분위기는 웬만한 기성 배우들을 압도했다. 허혁은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바로… 내 이야기 속의 '정인서'다.
"지정 대본… 32페이지. 허혁을 처음 만나 계약 결혼을 제안하는 장면입니다. 준비됐으면… 시작하세요."
인서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오디션장의 신인 배우가 아니었다. J 그룹의 후계자, 자신의 계획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차갑고 잔혹한 남자 정인서였다.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대사를 뱉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절망에 빠진 '허혁'이 보이는 듯했다.
"나와… '결혼'해야겠어. 그것도… 당장."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유혹과 협박, 그리고 알 수 없는 슬픔이 뒤섞인 목소리.
"선택지는 두 개뿐이야. 지금… 나랑 같이 가든가. 아니면… 여기서 뒤돌아서서… 네 어머니와 동생이 어떻게 되는지… 직접 확인하든가."
마지막 대사를 읊는 그의 눈빛. 그 눈빛 속에서 허혁은 자신이 대본에 미처 다 담지 못했던 정인서의 모든 감정을 보았다. 허혁을 향한 잔혹한 집착, 그를 이용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운명적인 끌림.
"컷."
봉 감독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디션장은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가 그의 연기에 압도당했다. 허혁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자신의 주인공이… 살아 숨 쉬는 것을 본 감동이었다.
"합격입니다."
봉 감독이 말했다. 주저 없는 결정이었다.
"정인서 씨. 당신이… 이 드라마의 '정인서'입니다."
그날 이후, 신인 배우 정인서는 드라마 <계약 결혼의 끝>의 남자 주인공으로 확정되었다. 상대역인 '허혁' 역에는 아이돌 출신 배우 서지한이 캐스팅되었다. 두 사람의 케미는 폭발적이었고, 드라마는 촬영 전부터 큰 기대를 모았다.
허혁은 작가로서 촬영 현장을 자주 찾았다. 그는 특히 정인서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연기 경험이 전무한 신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정인서'를 연기했다. 그의 차가운 눈빛, 절제된 몸짓, 그리고 허혁 역의 서지한을 바라보는 복잡하고 깊은 감정 연기. 모든 것이 허혁이 상상했던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정인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예의 바르고 조용한 청년으로 돌아왔다. 그는 항상 허혁에게 다가와 대본에 대해 질문하고, 캐릭터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작가님. 이 장면에서 정인서가 허혁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소유욕일까요? 아니면… 연민일까요?"
"이 대사… 너무 잔인하게 들리지는 않을까요? 그의 내면에 숨겨진 아픔이… 조금 더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질문은 날카로웠고, 캐릭터에 대한 이해는 깊었다. 허혁은 그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이 창조한 '정인서'라는 인물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배우 정인서라는 사람에게 점점 더 끌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차가운 외모 뒤에 숨겨진 따뜻함, 연기에 대한 진지한 열정,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깊고 알 수 없는 눈빛.
드라마 촬영이 막바지에 이를수록,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졌다. 허혁은 정인서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글을 쓰며 버텼던 힘든 시간들. 정인서는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따뜻한 눈빛으로 그를 위로해주었다.
마침내, 드라마의 마지막 촬영이 끝났다. 쫑파티에서, 술에 취한 허혁은 정인서에게 물었다.
"인서 씨… 정말… 연기는 처음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게… 정인서를 연기할 수 있었어요?"
정인서는 잠시 허혁을 바라보더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글쎄요… 어쩌면… 나도… 그와 닮은 구석이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의 대답은 모호했지만, 그 눈빛 속에서 허혁은 인서 역시 자신처럼 깊은 상처와 고독을 안고 살아왔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쫑파티가 끝나고, 인서는 술에 취한 허혁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허혁의 작은 원룸. 책상 위에는 <계약 결혼의 끝> 대본이 흩어져 있었고, 벽에는 드라마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작가님. 이제… 드라마는 끝났네요."
인서가 나직이 말했다.
"네… 끝났어요…"
허혁은 아쉬움에 잠겨 말했다.
"그럼… 이제… 정인서와 허혁의 이야기도… 끝인 걸까요?"
인서의 질문에 허혁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아니요."
인서가 말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정인서와… 허혁의… 진짜 이야기."
인서의 얼굴이 허혁에게 가까워졌다. 허혁은 숨을 멈췄다. 드라마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장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연기가 아니었다.
인서의 입술이 허혁의 입술에 닿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키스였다. 계약도, 아픔도 없는, 오직 진심만이 담긴 키스.
"사랑해요, 허혁 작가님."
인서가 나직이 속삭였다.
허혁은 눈물을 흘리며 미소 지었다.
"나도… 사랑해요, 인서 씨."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지독했던 이야기는 끝났지만, 그들의 진짜 사랑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드라마 <계약 결혼의 끝>의 크랭크인과 함께.
(에필로그 끝)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 진심. 그 진심이 두 사람을 영원히 지켜줄 것이었다."
타닥, 타닥, 타닥… 탁.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마지막 마침표 위에서 멈췄다.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허혁은 뻐근한 목을 돌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두운 원룸을 밝히는 것은 오직 노트북 화면의 희미한 불빛뿐이었다. 화면에는 방금 그가 써 내려간 문장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계약 결혼의 끝 - 30부 (完)]. 3년..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를 울고 웃게 했던 지독했던 사랑 이야기가 마침내 끝나는 순간이었다.
허혁은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지만,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그는 익숙하게 부엌으로 향해 커피를 내렸다. 쌉쌀한 커피 향이 방 안에 퍼지자, 비로소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지독한 이야기 속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는 커피 잔을 든 채, 벽에 붙어있는 수많은 메모들을 바라보았다. 정인서와 허혁. 두 주인공의 감정선, 그들을 둘러싼 인물 관계도, 그리고 파멸적인 사건들의 순서. 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에서 태어나고, 그의 손끝에서 완성되었다.
정인서. J 그룹의 후계자. 차갑고 완벽하지만 내면에 깊은 상처와 뜨거운 욕망을 숨기고 있는 남자. 허혁은 그를 만들며 세상의 모든 냉철함과 고독을 담았다.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절박한 순애보도 함께.
그리고 허혁. 자신의 이름을 붙인 주인공. 가난하고, 절망적이지만,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청년. 허혁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을 그에게 투영했다. 소설 속 허혁은 자신보다 훨씬 더 용감했고, 강했으며, 결국 사랑을 지켜냈다.
"이제… 진짜 끝이구나."
허혁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완성된 대본 파일을 메일로 보냈다. 수신인은 스타 PD인 봉준호 감독이었다. 1년 전, 단막극 공모전에 당선된 허혁의 글을 눈여겨본 봉 감독은 그에게 파격적으로 장편 드라마 집필을 제안했다. 그리고 허혁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계약 결혼의 끝>을 완성했다.
며칠 후, 봉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허 작가님! 대본 미쳤어요! 마지막까지 아주 그냥… 사람을 쥐었다 놨다 하는구만! 이거… 대박 나겠는데?"
봉 감독의 흥분한 목소리에 허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날부터, 드라마 <계약 결혼의 끝>의 제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방송사가 편성되었고, 제작사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관문이 남아 있었다. 바로, 정인서와 허혁을 연기할 배우를 찾는 것.
시간을 거슬러 현재.
드라마 <계약 결혼의 끝>의 캐스팅 오디션이 한창이던 상암동의 한 스튜디오.
오디션장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J 그룹의 후계자, 차갑고 완벽하지만 내면에 깊은 상처와 뜨거운 욕망을 숨기고 있는 남자, '정인서' 역을 맡기 위해 수많은 배우들이 오디션에 지원했다. 이미 이름이 알려진 기성 배우부터 아이돌, 모델까지. 하지만 봉 감독과 허혁의 마음에 쏙 드는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너무 느끼해. 재벌 흉내만 내잖아. 정인서는 그런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고."
"너무 착해 보여. 저 얼굴로 어떻게 사람을 지배하고 파멸시키겠어."
봉 감독은 까다로웠다. 허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정인서'는 단순히 차가운 재벌이 아니었다. 고독하고, 위태로우며,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복잡하고 입체적인 인물이어야 했다.
지쳐갈 무렵, 오디션장 문이 열리고 137번 지원자가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는 순간, 허혁은 숨을 멈췄다. 봉 감독과 다른 심사위원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허혁이 상상했던 '정인서' 그 자체였다. 키가 크고, 몸은 단단했으며, 값비싼 수트가 아니었음에도 온몸에서 기품이 흘렀다. 무엇보다 그의 얼굴. 날카로운 턱선, 오뚝한 콧날, 그리고 깊고 차가운 눈. 그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로우면서도, 그 깊은 곳에는 알 수 없는 슬픔과 고독이 담겨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지원자 번호 137번, 정인서입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허혁은 그의 입에서 나온 '정인서'라는 이름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우연일까. 아니면…
"이름이… 정인서라고요?"
봉 감독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네. 본명입니다."
"경력은… 거의 없네요. 신인인가요?"
"네. 연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신인. 하지만 그의 분위기는 웬만한 기성 배우들을 압도했다. 허혁은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바로… 내 이야기 속의 '정인서'다.
"지정 대본… 32페이지. 허혁을 처음 만나 계약 결혼을 제안하는 장면입니다. 준비됐으면… 시작하세요."
인서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오디션장의 신인 배우가 아니었다. J 그룹의 후계자, 자신의 계획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차갑고 잔혹한 남자 정인서였다.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대사를 뱉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절망에 빠진 '허혁'이 보이는 듯했다.
"나와… '결혼'해야겠어. 그것도… 당장."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유혹과 협박, 그리고 알 수 없는 슬픔이 뒤섞인 목소리.
"선택지는 두 개뿐이야. 지금… 나랑 같이 가든가. 아니면… 여기서 뒤돌아서서… 네 어머니와 동생이 어떻게 되는지… 직접 확인하든가."
마지막 대사를 읊는 그의 눈빛. 그 눈빛 속에서 허혁은 자신이 대본에 미처 다 담지 못했던 정인서의 모든 감정을 보았다. 허혁을 향한 잔혹한 집착, 그를 이용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운명적인 끌림.
"컷."
봉 감독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디션장은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가 그의 연기에 압도당했다. 허혁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자신의 주인공이… 살아 숨 쉬는 것을 본 감동이었다.
"합격입니다."
봉 감독이 말했다. 주저 없는 결정이었다.
"정인서 씨. 당신이… 이 드라마의 '정인서'입니다."
그날 이후, 신인 배우 정인서는 드라마 <계약 결혼의 끝>의 남자 주인공으로 확정되었다. 상대역인 '허혁' 역에는 아이돌 출신 배우 서지한이 캐스팅되었다. 두 사람의 케미는 폭발적이었고, 드라마는 촬영 전부터 큰 기대를 모았다.
허혁은 작가로서 촬영 현장을 자주 찾았다. 그는 특히 정인서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연기 경험이 전무한 신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정인서'를 연기했다. 그의 차가운 눈빛, 절제된 몸짓, 그리고 허혁 역의 서지한을 바라보는 복잡하고 깊은 감정 연기. 모든 것이 허혁이 상상했던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정인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예의 바르고 조용한 청년으로 돌아왔다. 그는 항상 허혁에게 다가와 대본에 대해 질문하고, 캐릭터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작가님. 이 장면에서 정인서가 허혁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소유욕일까요? 아니면… 연민일까요?"
"이 대사… 너무 잔인하게 들리지는 않을까요? 그의 내면에 숨겨진 아픔이… 조금 더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질문은 날카로웠고, 캐릭터에 대한 이해는 깊었다. 허혁은 그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이 창조한 '정인서'라는 인물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배우 정인서라는 사람에게 점점 더 끌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차가운 외모 뒤에 숨겨진 따뜻함, 연기에 대한 진지한 열정,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깊고 알 수 없는 눈빛.
드라마 촬영이 막바지에 이를수록,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졌다. 허혁은 정인서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글을 쓰며 버텼던 힘든 시간들. 정인서는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따뜻한 눈빛으로 그를 위로해주었다.
마침내, 드라마의 마지막 촬영이 끝났다. 쫑파티에서, 술에 취한 허혁은 정인서에게 물었다.
"인서 씨… 정말… 연기는 처음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게… 정인서를 연기할 수 있었어요?"
정인서는 잠시 허혁을 바라보더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글쎄요… 어쩌면… 나도… 그와 닮은 구석이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의 대답은 모호했지만, 그 눈빛 속에서 허혁은 인서 역시 자신처럼 깊은 상처와 고독을 안고 살아왔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쫑파티가 끝나고, 인서는 술에 취한 허혁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허혁의 작은 원룸. 책상 위에는 <계약 결혼의 끝> 대본이 흩어져 있었고, 벽에는 드라마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작가님. 이제… 드라마는 끝났네요."
인서가 나직이 말했다.
"네… 끝났어요…"
허혁은 아쉬움에 잠겨 말했다.
"그럼… 이제… 정인서와 허혁의 이야기도… 끝인 걸까요?"
인서의 질문에 허혁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아니요."
인서가 말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정인서와… 허혁의… 진짜 이야기."
인서의 얼굴이 허혁에게 가까워졌다. 허혁은 숨을 멈췄다. 드라마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장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연기가 아니었다.
인서의 입술이 허혁의 입술에 닿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키스였다. 계약도, 아픔도 없는, 오직 진심만이 담긴 키스.
"사랑해요, 허혁 작가님."
인서가 나직이 속삭였다.
허혁은 눈물을 흘리며 미소 지었다.
"나도… 사랑해요, 인서 씨."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지독했던 이야기는 끝났지만, 그들의 진짜 사랑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드라마 <계약 결혼의 끝>의 크랭크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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