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조회 : 293 추천 : 0 글자수 : 5,868 자 2025-08-13
프롤로그
여름날의 노란 차
ㅤㅤ찌는 듯한 여름 햇살이 마당 가득 내려앉던 날이었다. 아지랑이가 지표면 위로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뜨거운 공기는 숨쉬기조차 버거웠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매미 소리는 귀청을 찢을 듯 요란했고, 그 소리 위로 시골 할아버지 댁 마당은 북적임으로 가득했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친척들의 떠들썩한 목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어른들의 잔소리가 뒤섞여, 온통 소음으로 가득한 풍경이었다. 명절이 아니었으니 아마 누구의 생일이었거나, 아니면 그저 어른들이 모여 정을 나누기 좋은 날이었을 게다. 어린 서희는 초등학교 저학년쯤이었을까. 정확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어른들의 복잡한 대화에 끼어들 만큼 크지도 않았고, 사촌 언니 오빠들의 복잡한 놀이 규칙을 이해하기에도 어렸다. 그 거대한 친척들의 세계는 그녀에게는 낯설고 복잡했다. 마치 거미줄처럼 얽힌 관계들,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시선들, 그리고 그들만의 암묵적인 규칙들. 서희는 그 어느 곳에도 쉽사리 끼어들지 못하고, 그 모든 소란스러움에서 한 발짝 물러나 마루 끝에 앉아 발만 까딱거리거나, 눈이 부시도록 하얀 햇살 아래 먼지 쌓인 마당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북적이는 친척들 틈에서 서희는 늘 어딘가 겉도는 기분이었다. 낯선 얼굴들, 의례적인 인사들, 그리고 그녀에게는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그들만의 세계. 그 모든 것으로부터 그녀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마루의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발아래 널브러진 마당의 흙먼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작은 흙 알갱이들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던 순간도 있었다.
ㅤㅤ그때, 마당 한가운데서 몇몇 남자 사촌 형제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다른 소음 위로 유독 크게 들렸다. 무언가 번쩍이는 것을 가지고 신나게 소리를 질렀고, 서로 차지하려 작은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쨍한 햇살 아래서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그것은 노란색 스포츠카 모양의 장난감 자동차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였을까. 매끈하게 빠진 차체는 진짜 자동차처럼 보였다. 리모컨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었지만, 꽤 정교하고 빠른 속도로 마당 흙바닥 위를 매끈하게 굴러가는 모양이었다. 나보다 몇 살 위인 오빠들 같았다. 땀에 젖은 얼굴로 장난감 하나에 열광하는 그들의 웃음소리와 환호성, 그리고 장난감을 차지하기 위한 작은 몸싸움 소리가 쨍한 햇살 아래 울려 퍼졌다. 그들만의 견고한 세계. 그 세계는 활기찼고, 즐거워 보였지만, 서희는 그 세계의 문턱조차 넘을 수 없었다. 다가가고 싶었지만, 왠지 모를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다른 여자 사촌들은 이미 방 안으로 들어가 인형 놀이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제 나름의 조용한 놀이에 집중하고 있었다. 서희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그저 마당 끝에 앉아 멀리서 그들의 놀이를 지켜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녀의 발밑의 흙바닥만이 그녀를 아는 유일한 존재 같았다. 외롭다는 감정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시린 것은 느낄 수 있었다.
ㅤㅤ서희는 그 장난감 자동차에 시선을 완전히 빼앗겼다. 흙바닥 위를 빠르게 움직이는 노란색 차체, 햇살에 반짝이는 표면, 남자아이들의 환호성.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멀리 있는, 갖고 싶은 보물처럼 느껴졌다. 저 작고 반짝이는 물건을 손에 쥐어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작은 가슴 속에서 일었다. 나도 한 번만, 아주 잠깐만이라도 저걸 만져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일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빠들은 낯설었고, 그들이 만들어낸 놀이 세계는 그녀에게는 너무 견고하고 쉽게 허락되지 않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혹시라도 끼어들었다가 싫은 소리라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 말 한마디 건넬 용기가 없어, 서희는 그저 마당 끝에 앉아 눈으로만 노란 차를 좇을 뿐이었다. 그녀의 작은 눈동자는 노란색 잔상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간절한 시선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어린아이의 순수한 호기심이었을까. 서희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저 눈을 뗄 수 없었다.
ㅤㅤ한참을 그렇게 앉아 노란 차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좇았다.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노란색 잔상. 그때였다. 그 무리 중 한 아이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시끄럽게 떠들거나 몸싸움을 하지 않고, 조금 떨어져 앉아 혼자 장난감 자동차를 굴리던 아이였다. 또래보다 조금 큰 듯한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왁자지껄한 소란 속에서도 어딘가 차분하고 조용한 존재감. 마치 그 아이 주변만 작은 고요함이 감도는 듯했다. 어린 서희에게도 그런 느낌이 어렴풋이 전해졌던 것 같다. 그 아이가 장난감 자동차를 멈추고는, 불쑥 고개를 돌려 서희를 보았다. 그의 시선이 서희에게 향했다. 그 눈빛은... 다른 아이들의 눈빛과는 달랐다. 장난기나 경쟁심이 아닌, 그저... 바라보는 눈빛.
ㅤㅤ그 아이의 시선이 서희에게 닿았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장난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얼굴이 살짝 화끈거렸다. 마치 들켜버린 비밀처럼. 그저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이미 그녀의 눈빛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나 보다. 그 아이는 서희를 보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저 작고 어리숙한 동생을 보는 평범한 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서희는 혹시 방해된다고 꾸중이라도 들을까 봐 순간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작게, 더 작게. 마루 끝에 앉아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 했다. 세상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긴장감도 느껴졌다.
ㅤㅤ하지만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그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노란색 장난감 자동차를 멈췄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설명도, 대화도, 심지어 작은 미소조차 없이. 그저 아주 천천히, 손목을 살짝 꺾어, 그 작은 노란색 스포츠카를 마당 흙바닥 위로 서희에게로 향하게 했다.
ㅤㅤ데구르르.
ㅤㅤ노란색 장난감 자동차가 마당의 흙먼지를 아주 살짝 일으키며 서희에게로 굴러왔다. 느릿하게, 하지만 멈추지 않고. 작은 바퀴가 흙 위를 구르는 미세한 소리만이 귓가에 희미하게 들렸다. 그 소리는 세상의 모든 소음보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서희의 발치에 거의 다다랐을 때, 노란 차는 부드럽게 멈춰 섰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서희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나에게 이걸... 주겠다는 건가? 만져보라는 건가? 순식간에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노란 차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 아이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ㅤㅤ그 아이는 여전히 서희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어떤 재촉이나 기대도, 심지어 흔한 아이들의 호기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서희가 무얼 할지 기다리는 듯한 차분하고 고요한 시선이었다. 다른 오빠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놀이에 정신이 팔려 우리가 무얼 하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짧은 몇 초 동안, 그 아이와 서희 사이에는 오직 그 노란색 장난감 자동차와 설명할 수 없는 고요함만이 존재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순간 우리는 그 북적이는 마당 한가운데서, 우리 둘만의 작은 섬을 만든 것 같았다. 그 아이의 눈빛은 그녀에게 안전함과 동시에 묘한 신비감을 느끼게 했다. 무언가 복잡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낯선 존재에게서 받는 예상치 못한 친절에 대한 막연한 안도감과, 그 친절을 베푼 상대에 대한 조용한 호기심.
ㅤㅤ서희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장난감 자동차를 집어 들었다. 햇살에 약간 뜨거워져 있었지만, 손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매끈한 감촉이 신기하고 좋았다. 그 작고 단단한 물건의 무게가 손바닥에 실렸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기울여보았다. 노란색 차체가 햇살에 반짝이며 작은 무지개 빛깔을 흩뿌리는 것 같았다. 작은 바퀴들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진짜 작은 자동차처럼 느껴졌다. 그 작은 물건 하나가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이 갑자기 환해진 것 같았다. 외로웠던 오후에 찾아온 작은 기적 같았다. 그녀는 그것을 소중하게 손에 쥐고 있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조각처럼. 그 짧은 시간 동안, 서희는 그 노란 자동차를 가진 세상의 전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이 이 작은 장난감에 응축된 것만 같았다. 다른 아이들의 소음, 어른들의 시선, 모든 것이 멀어지고 오직 이 노란 차와,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그 아이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 아이의 조용한 시선 아래서, 그녀는 처음으로 누군가와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록 말은 없었지만, 그 무언의 교감이 어린 서희에게는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ㅤ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짧았는지 길었는지, 어린 서희에게는 시간의 개념이 모호했다. 다만 멀리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라고 하셨다. 익숙한 부름에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아쉬운 마음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 작은 노란 차를 더 가지고 놀고 싶었다. 이 작은 행복을 좀 더 오래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장난감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장난감 자동차를 다시 그 아이에게 굴려 보냈다. 데구르르. 노란 차가 마당을 가로질러 그 아이에게 돌아갔다. 아이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장난감을 받아들였다. 그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있었는지, 기뻤는지 아쉬웠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의 차분한 눈빛만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다른 오빠들과 함께 시끄러운 놀이에 합류했다. 그들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그 작은 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ㅤㅤ서희는 그 아이에게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달려갔다. 옷에 묻은 흙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신발을 신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자꾸만 그 여름날 마당에서의 짧은 순간을 떠올렸다. 손에 닿았던 그 노란색 장난감 자동차의 차가운 금속 감촉,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자신에게 건네던 아이의 조용하고 차분했던 눈빛. 이름도 몰랐던 그 아이. 누구였을까? 그저 사촌들 중 한 명이었겠지. 어린 서희의 기억은 그게 전부였다. 그 아이가 왜 자신에게 장난감을 굴려줬을까. 그냥 착한 아이였을까. 아니면 자신이 너무 불쌍해 보였을까. 어린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작은 수수께끼였다.
ㅤㅤ그 기억은 곧 일상에 묻혀 희미해졌다. 새로운 학년이 되고, 새로운 장난감을 선물 받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면서. 유치원에서의 추억, 학교에서의 경험, 가족과의 소풍, 사소한 다툼과 화해. 어린 시절의 수많은 경험들이 겹겹이 쌓여가면서, 그 여름날 마당에서의 작은 조각은 기억의 서랍 깊숙한 곳으로, 점점 더 희미해진 색깔로 밀려났다. 다른 더 크고 선명한 기억들이 그 위를 덮어버렸다. 그 아이가 나보다 몇 살 많은 사촌 오빠였고, 그의 이름이 윤태준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의 작은 교감이 십 년이 훌쩍 넘는 시간 후에 자신과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특별하고도 강렬한 인연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그때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저 어린 날의 아련하고 아름다운 기억 한 조각으로만 남아, 긴 잠에 빠져 있었다. 마치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작은 보석처럼. 그 존재조차 잊고 지냈던, 마음에 묻어둔 작은 파편.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우연히 다시 마주하게 될 그에게서 문득 그 기억이 되살아나, 예상치 못한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서희 자신을 이끌 때까지. 그 노란 차의 차가운 감촉처럼, 그리고 그 아이의 조용한 눈빛처럼, 그 기억은 그녀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아무도 모르게, 오롯이 침전되어 있었다. 십 년이 넘는 시간의 먼지가 쌓여 그 존재마저 잊힐 때까지.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시 빛을 발할 날만을 기다리며.
여름날의 노란 차
ㅤㅤ찌는 듯한 여름 햇살이 마당 가득 내려앉던 날이었다. 아지랑이가 지표면 위로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뜨거운 공기는 숨쉬기조차 버거웠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매미 소리는 귀청을 찢을 듯 요란했고, 그 소리 위로 시골 할아버지 댁 마당은 북적임으로 가득했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친척들의 떠들썩한 목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어른들의 잔소리가 뒤섞여, 온통 소음으로 가득한 풍경이었다. 명절이 아니었으니 아마 누구의 생일이었거나, 아니면 그저 어른들이 모여 정을 나누기 좋은 날이었을 게다. 어린 서희는 초등학교 저학년쯤이었을까. 정확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어른들의 복잡한 대화에 끼어들 만큼 크지도 않았고, 사촌 언니 오빠들의 복잡한 놀이 규칙을 이해하기에도 어렸다. 그 거대한 친척들의 세계는 그녀에게는 낯설고 복잡했다. 마치 거미줄처럼 얽힌 관계들,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시선들, 그리고 그들만의 암묵적인 규칙들. 서희는 그 어느 곳에도 쉽사리 끼어들지 못하고, 그 모든 소란스러움에서 한 발짝 물러나 마루 끝에 앉아 발만 까딱거리거나, 눈이 부시도록 하얀 햇살 아래 먼지 쌓인 마당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북적이는 친척들 틈에서 서희는 늘 어딘가 겉도는 기분이었다. 낯선 얼굴들, 의례적인 인사들, 그리고 그녀에게는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그들만의 세계. 그 모든 것으로부터 그녀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마루의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발아래 널브러진 마당의 흙먼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작은 흙 알갱이들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던 순간도 있었다.
ㅤㅤ그때, 마당 한가운데서 몇몇 남자 사촌 형제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다른 소음 위로 유독 크게 들렸다. 무언가 번쩍이는 것을 가지고 신나게 소리를 질렀고, 서로 차지하려 작은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쨍한 햇살 아래서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그것은 노란색 스포츠카 모양의 장난감 자동차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였을까. 매끈하게 빠진 차체는 진짜 자동차처럼 보였다. 리모컨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었지만, 꽤 정교하고 빠른 속도로 마당 흙바닥 위를 매끈하게 굴러가는 모양이었다. 나보다 몇 살 위인 오빠들 같았다. 땀에 젖은 얼굴로 장난감 하나에 열광하는 그들의 웃음소리와 환호성, 그리고 장난감을 차지하기 위한 작은 몸싸움 소리가 쨍한 햇살 아래 울려 퍼졌다. 그들만의 견고한 세계. 그 세계는 활기찼고, 즐거워 보였지만, 서희는 그 세계의 문턱조차 넘을 수 없었다. 다가가고 싶었지만, 왠지 모를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다른 여자 사촌들은 이미 방 안으로 들어가 인형 놀이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제 나름의 조용한 놀이에 집중하고 있었다. 서희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그저 마당 끝에 앉아 멀리서 그들의 놀이를 지켜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녀의 발밑의 흙바닥만이 그녀를 아는 유일한 존재 같았다. 외롭다는 감정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시린 것은 느낄 수 있었다.
ㅤㅤ서희는 그 장난감 자동차에 시선을 완전히 빼앗겼다. 흙바닥 위를 빠르게 움직이는 노란색 차체, 햇살에 반짝이는 표면, 남자아이들의 환호성.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멀리 있는, 갖고 싶은 보물처럼 느껴졌다. 저 작고 반짝이는 물건을 손에 쥐어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작은 가슴 속에서 일었다. 나도 한 번만, 아주 잠깐만이라도 저걸 만져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일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빠들은 낯설었고, 그들이 만들어낸 놀이 세계는 그녀에게는 너무 견고하고 쉽게 허락되지 않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혹시라도 끼어들었다가 싫은 소리라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 말 한마디 건넬 용기가 없어, 서희는 그저 마당 끝에 앉아 눈으로만 노란 차를 좇을 뿐이었다. 그녀의 작은 눈동자는 노란색 잔상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간절한 시선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어린아이의 순수한 호기심이었을까. 서희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저 눈을 뗄 수 없었다.
ㅤㅤ한참을 그렇게 앉아 노란 차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좇았다.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노란색 잔상. 그때였다. 그 무리 중 한 아이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시끄럽게 떠들거나 몸싸움을 하지 않고, 조금 떨어져 앉아 혼자 장난감 자동차를 굴리던 아이였다. 또래보다 조금 큰 듯한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왁자지껄한 소란 속에서도 어딘가 차분하고 조용한 존재감. 마치 그 아이 주변만 작은 고요함이 감도는 듯했다. 어린 서희에게도 그런 느낌이 어렴풋이 전해졌던 것 같다. 그 아이가 장난감 자동차를 멈추고는, 불쑥 고개를 돌려 서희를 보았다. 그의 시선이 서희에게 향했다. 그 눈빛은... 다른 아이들의 눈빛과는 달랐다. 장난기나 경쟁심이 아닌, 그저... 바라보는 눈빛.
ㅤㅤ그 아이의 시선이 서희에게 닿았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장난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얼굴이 살짝 화끈거렸다. 마치 들켜버린 비밀처럼. 그저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이미 그녀의 눈빛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나 보다. 그 아이는 서희를 보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저 작고 어리숙한 동생을 보는 평범한 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서희는 혹시 방해된다고 꾸중이라도 들을까 봐 순간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작게, 더 작게. 마루 끝에 앉아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 했다. 세상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긴장감도 느껴졌다.
ㅤㅤ하지만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그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노란색 장난감 자동차를 멈췄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설명도, 대화도, 심지어 작은 미소조차 없이. 그저 아주 천천히, 손목을 살짝 꺾어, 그 작은 노란색 스포츠카를 마당 흙바닥 위로 서희에게로 향하게 했다.
ㅤㅤ데구르르.
ㅤㅤ노란색 장난감 자동차가 마당의 흙먼지를 아주 살짝 일으키며 서희에게로 굴러왔다. 느릿하게, 하지만 멈추지 않고. 작은 바퀴가 흙 위를 구르는 미세한 소리만이 귓가에 희미하게 들렸다. 그 소리는 세상의 모든 소음보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서희의 발치에 거의 다다랐을 때, 노란 차는 부드럽게 멈춰 섰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서희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나에게 이걸... 주겠다는 건가? 만져보라는 건가? 순식간에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노란 차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 아이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ㅤㅤ그 아이는 여전히 서희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어떤 재촉이나 기대도, 심지어 흔한 아이들의 호기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서희가 무얼 할지 기다리는 듯한 차분하고 고요한 시선이었다. 다른 오빠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놀이에 정신이 팔려 우리가 무얼 하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짧은 몇 초 동안, 그 아이와 서희 사이에는 오직 그 노란색 장난감 자동차와 설명할 수 없는 고요함만이 존재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순간 우리는 그 북적이는 마당 한가운데서, 우리 둘만의 작은 섬을 만든 것 같았다. 그 아이의 눈빛은 그녀에게 안전함과 동시에 묘한 신비감을 느끼게 했다. 무언가 복잡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낯선 존재에게서 받는 예상치 못한 친절에 대한 막연한 안도감과, 그 친절을 베푼 상대에 대한 조용한 호기심.
ㅤㅤ서희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장난감 자동차를 집어 들었다. 햇살에 약간 뜨거워져 있었지만, 손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매끈한 감촉이 신기하고 좋았다. 그 작고 단단한 물건의 무게가 손바닥에 실렸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기울여보았다. 노란색 차체가 햇살에 반짝이며 작은 무지개 빛깔을 흩뿌리는 것 같았다. 작은 바퀴들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진짜 작은 자동차처럼 느껴졌다. 그 작은 물건 하나가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이 갑자기 환해진 것 같았다. 외로웠던 오후에 찾아온 작은 기적 같았다. 그녀는 그것을 소중하게 손에 쥐고 있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조각처럼. 그 짧은 시간 동안, 서희는 그 노란 자동차를 가진 세상의 전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이 이 작은 장난감에 응축된 것만 같았다. 다른 아이들의 소음, 어른들의 시선, 모든 것이 멀어지고 오직 이 노란 차와,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그 아이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 아이의 조용한 시선 아래서, 그녀는 처음으로 누군가와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록 말은 없었지만, 그 무언의 교감이 어린 서희에게는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ㅤ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짧았는지 길었는지, 어린 서희에게는 시간의 개념이 모호했다. 다만 멀리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라고 하셨다. 익숙한 부름에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아쉬운 마음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 작은 노란 차를 더 가지고 놀고 싶었다. 이 작은 행복을 좀 더 오래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장난감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장난감 자동차를 다시 그 아이에게 굴려 보냈다. 데구르르. 노란 차가 마당을 가로질러 그 아이에게 돌아갔다. 아이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장난감을 받아들였다. 그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있었는지, 기뻤는지 아쉬웠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의 차분한 눈빛만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다른 오빠들과 함께 시끄러운 놀이에 합류했다. 그들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그 작은 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ㅤㅤ서희는 그 아이에게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달려갔다. 옷에 묻은 흙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신발을 신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자꾸만 그 여름날 마당에서의 짧은 순간을 떠올렸다. 손에 닿았던 그 노란색 장난감 자동차의 차가운 금속 감촉,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자신에게 건네던 아이의 조용하고 차분했던 눈빛. 이름도 몰랐던 그 아이. 누구였을까? 그저 사촌들 중 한 명이었겠지. 어린 서희의 기억은 그게 전부였다. 그 아이가 왜 자신에게 장난감을 굴려줬을까. 그냥 착한 아이였을까. 아니면 자신이 너무 불쌍해 보였을까. 어린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작은 수수께끼였다.
ㅤㅤ그 기억은 곧 일상에 묻혀 희미해졌다. 새로운 학년이 되고, 새로운 장난감을 선물 받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면서. 유치원에서의 추억, 학교에서의 경험, 가족과의 소풍, 사소한 다툼과 화해. 어린 시절의 수많은 경험들이 겹겹이 쌓여가면서, 그 여름날 마당에서의 작은 조각은 기억의 서랍 깊숙한 곳으로, 점점 더 희미해진 색깔로 밀려났다. 다른 더 크고 선명한 기억들이 그 위를 덮어버렸다. 그 아이가 나보다 몇 살 많은 사촌 오빠였고, 그의 이름이 윤태준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의 작은 교감이 십 년이 훌쩍 넘는 시간 후에 자신과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특별하고도 강렬한 인연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그때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저 어린 날의 아련하고 아름다운 기억 한 조각으로만 남아, 긴 잠에 빠져 있었다. 마치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작은 보석처럼. 그 존재조차 잊고 지냈던, 마음에 묻어둔 작은 파편.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우연히 다시 마주하게 될 그에게서 문득 그 기억이 되살아나, 예상치 못한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서희 자신을 이끌 때까지. 그 노란 차의 차가운 감촉처럼, 그리고 그 아이의 조용한 눈빛처럼, 그 기억은 그녀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아무도 모르게, 오롯이 침전되어 있었다. 십 년이 넘는 시간의 먼지가 쌓여 그 존재마저 잊힐 때까지.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시 빛을 발할 날만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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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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