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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115 추천 : 0 글자수 : 1.0만 자 2025-08-20
ㅤㅤ할아버지의 팔순 잔치였다. 도심의 한 호텔 연회장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그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웅장한 샹들리에 아래, 잔칫집 특유의 북적거림과 소음이 공기 중에 섞여 있었다. 낯익은 듯 낯선 얼굴들이 오가며 인사를 나누고, 간간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와 건배사, 그리고 접시 부딪히는 소리가 홀 안을 채웠다. 윤서희는 사실 이런 자리가 그다지 편치 않았다.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실제로는 일 년에 한두 번, 그것도 잠깐 얼굴만 보는 친척들과는 딱히 깊은 이야기를 나눌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형식적인 덕담과 의례적인 인사들, 그리고 나이에 맞는 질문들을
"결혼은 언제 하니?",
"직장은 어때?",
"애인은 있니?"
그녀에게 늘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들의 시선은 때로는 따뜻했지만, 때로는 평가하는 듯 느껴졌다. 마치 가족이라는 틀 안에 그녀를 끼워 맞추려는 듯한 느낌. 그래도 할아버지의 경사스러운 날이니 참석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서희는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 써서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행사장에 도착했다. 회색 원피스가 이런 자리에 무난할 거라고 생각했다.
ㅤㅤ예상대로 연회장 안은 시끄럽고 어수선했다. 잔칫집 특유의 들뜬 분위기, 맛있는 음식 냄새, 그리고 낯익은 얼굴과 낯선 얼굴이 뒤섞인 풍경. 친척이라는 이름 아래 모였지만, 대부분은 서희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그들 각자의 삶과 이야기_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고, 그들 역시 서희의 삶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다. 그저 '누구네 딸', '누구네 손녀'라는 이름표만 달고 있는 듯했다. 그녀 또래의 사촌들은 이미 자기들끼리 테이블에 모여 휴대폰을 보거나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들만의 세계는 활기찼고,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끈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서희는 그 속에 쉽사리 끼어들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그래왔듯, 그녀는 그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못한 채, 적당히 미소 짓고, 적당히 대꾸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뷔페 음식을 조금 가져다 구석 테이블에 앉았다. 금방 식어버린 음식들을 깨작거리며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이런 자리에서 그녀가 택하는 흔한 도피처였다. 손안의 작은 기기만이 그녀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듯했다. 그 속의 사람들은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했고, 그녀 역시 그들에게 진짜 자신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ㅤㅤ휴대폰으로 SNS 피드를 넘기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문득 시선이 멈췄다. 홀 안쪽, 어른들 테이블 사이에 앉아 있는 한 남자. 나이는 서희의 나이 또래거나 몇 살 많아 보였다. 멀리서 봤는데도 어딘가 익숙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동시에 완전히 낯선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활기나 소란스러움과는 달리, 그는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풍겼다. 혼자 생각에 잠긴 듯, 주변의 왁자지껄함과는 동떨어진 고요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마치 연회장 안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분리된 듯한 느낌. 그의 존재감은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유독 두드러졌다. 누구지? 우리 친척 중에 저런 사람이 있었나? 왜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서희의 호기심이 일었다. 평범해 보이지 않는 그의 존재감이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는 마치 오래된 흑백 영화 속 인물처럼, 주변의 선명한 색깔과 대비되는 차분함을 가지고 있었다.
ㅤㅤ그때 옆에서 고모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가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ㅤㅤ"어머, 서희야! 여기 있었네. 이리 와 봐라. 저기 태준이 왔어, 태준이! 너 어릴 때 보고 진짜 오랜만이지?"
ㅤㅤ태준이?
ㅤㅤ윤태준. 그 이름이 귓가에 꽂혔다. 사촌 오빠. 어릴 때 딱 한 번, 아주 짧게 마주쳤던 기억이 있는 사람. 아, 맞다. 시골에 살아서 명절에도 잘 오지 못한다는 그 사촌 오빠. 서희의 머릿속에 어린 시절 마당에서 노란 장난감 차를 굴려주던 희미한 아이의 모습이 스쳤다. 흙바닥 위를 굴러오던 노란 차,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던 조용한 눈빛. 프롤로그 속의 그 아련한 조각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거의 십 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그녀의 기억 속에 그의 모습은 그저 흐릿한 어린아이의 잔상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지금 저 남자라고? 눈앞의 성인 남성과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 속 아이가 쉽사리 연결되지 않았다. 믿기 힘들 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ㅤㅤ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모할머니의 성화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기는데, 어색함과 묘한 기대감이 뒤섞여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에게 다가가는 짧은 거리가 왜 그렇게 멀게 느껴졌을까.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긴장감이 차올랐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의 모습이 더 또렷해졌다. 기억 속 애매한 어린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성인 남자의 단단함과 안정감을 가진, 분명 잘생긴 사람이었다. 꽤 넓은 어깨와 곧게 뻗은 허리, 정갈하게 넘긴 머리, 차분한 눈빛, 단정한 옷차림. 예상했던 친척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텔레비전에서나 볼 법한, 어딘가 특별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였다. 배우 같기도 하고, 모델 같기도 하고.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서는 꾸며낸 듯한 화려함이 아닌, 자연스러운 편안함이 느껴졌다.
ㅤㅤ고모할머니가 들뜬 목소리로 앞장서 다가갔다. 그의 옆에 선 서희를 보며 활짝 웃으셨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소중한 가족을 소개하는 듯 들떠 있었다.
ㅤㅤ"태준아! 얘가 서희야, 서희! 너 기억나? 어릴 때 같이 놀았잖아!"
ㅤㅤ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았다. 그의 눈빛이 서희의 눈과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프롤로그에서 묘사되었던 그 조용한 눈빛. 십 년이 넘는 시간의 깊이가 더해져, 더욱 깊고 고요해진 눈이었다. 그 눈빛에, 어딘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눈에는 세상의 소음이 닿지 않는 듯한 차분함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만남인 듯한, 묘한 기류가 흘렀다.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그 눈빛만은 어릴 적 기억 속 아이와 연결되는 듯했다.
ㅤㅤ그가 아주 작게, 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그의 모습이 서희에게는 인상 깊게 다가왔다.
ㅤㅤ"아... 서희구나. 어릴 때 봤는데... 정말 오랜만이네."
ㅤㅤ그녀가 작게 인사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예상치 못한 그의 모습과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ㅤㅤ"네... 안녕하세요, 오빠."
ㅤㅤ서희의 입에서 나온 '오빠'라는 호칭이 낯설고 어색해서 몸이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촌이라는 관계 외에,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타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름과 관계만 알고 있을 뿐, 서로의 삶에 대한 백지는 너무나 넓었다. 이 사람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까. 하지만 다른 호칭은 더욱 어색했다. '태준 씨'라고 부를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가장 익숙한 '오빠'라는 단어를 선택했지만, 그 무게감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ㅤㅤ고모할머니는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러 가셨고, 그들은 둘만 남겨졌다. 갑자기 주변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멀어진 듯했다. 그들 주변만 공기가 달라진 것 같았다. 시간을 멈춘 듯한 고요함. 견디기 힘든 어색함이 공기 중에 흘렀다. 서희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발끝만 쳐다보거나, 엉뚱한 곳을 응시하거나 했다. 태준 역시 말없이 서희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차마 고개를 들어 마주 보기가 어려웠다.
ㅤㅤ"많이 컸네."
ㅤㅤ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고 차분했다. 그 목소리에 묘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긴장했던 서희의 어깨가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기분이었다.
ㅤㅤ"오빠도요."
ㅤㅤ서희는 여전히 어색함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말했다.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어린 시절의 그 아이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 그의 얼굴에는 어린 시절의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동시에 성인이 된 남자의 깊이와 무게가 더해져 있었다. 그의 눈가에는 아주 작은 주름이 잡혀 있었고, 입가에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ㅤㅤ"정말 오랜만이지. 거의 십 년 넘었을 거야."
ㅤㅤ그의 말에 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ㅤㅤ"네, 그런 것 같아요. 거의 기억도 안 나요."
ㅤㅤ"나도 그래. 워낙 어릴 때였으니까."
ㅤㅤ몇 마디의 어색한 대화가 오갔다. 서로의 근황을 묻는 것도 어색했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학교는 어디 나왔는지, 지금은 무얼 하고 있는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 마치 처음 만난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듯 질문을 던지고 답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서희는 그가 생각보다 훨씬 편안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의 질문은 진솔했고, 서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태도는 성의가 있었다. 그의 눈은 서희를 똑바로 바라보았고, 그의 표정에서는 진심이 읽혔다. 억지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서희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ㅤㅤ신기하게도, 대화를 할수록 어색함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딱딱했던 공기가 조금씩 말랑해지는 느낌이었다. 그의 차분한 목소리, 그의 조용한 웃음, 그리고 서희의 말에 대한 그의 진솔한 반응들이 서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가 서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태도가 편안했고, 눈을 피하지 않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오히려 안정감을 주었다. 그의 반응은 억지가 아닌 진솔함이 느껴졌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안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가족이라는 관계의 무게는 잠시 잊혀졌다.
ㅤㅤ서희는 그를 계속 관찰했다. 어릴 때 희미한 기억 속 태준이 오빠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그냥 한 명의 잘생긴 어른 남자였다. 차분하고, 사려 깊고, 그리고 묘하게 끌리는 분위기를 가진 사람. 그런데 그가 자신의 사촌 오빠라니. 복잡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일렁였다. 이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단순한 친척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대화를 할수록 그는 생각보다 훨씬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조용해 보였지만, 가끔 던지는 유머는 서희의 코드와 맞았고, 세상을 보는 시각도 그녀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그의 말에 자연스레 웃음이 터졌고, 그는 그녀의 웃음 소리에 작게 미소 지었다. 그들만의 작은 대화의 섬이 북적이는 연회장 한가운데 만들어졌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분리된, 둘만의 공간. 마치 그들만이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이동한 듯했다.
ㅤㅤ잔치가 슬슬 무르익으면서, 서희는 잠시 답답함을 느꼈다. 너무 많은 사람, 너무 많은 소음. 그리고 그와의 대화 속에서 느껴지는 복잡한 감정들. 이대로 이 자리에 계속 앉아 있기 어려웠다. 잠시 숨을 고르고 싶었다. 그때 서희는 홀 바깥 테라스로 통하는 문을 보았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복잡한 머리를 식힐 공간이 필요했다.
ㅤㅤ시원한 밤공기가 서희를 맞았다. 홀 안의 소음이 멀어지고, 고요함이 찾아왔다. 도시의 밤 풍경이 멀리 펼쳐져 있었다. 고층 빌딩의 불빛들이 반짝였고, 밤하늘에는 별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폐부 깊숙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니,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듯했다.
ㅤㅤ"여기 있었네."
ㅤㅤ등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서희는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태준이었다. 그는 서희의 옆에 와서 난간에 기대 밤하늘을 봤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차분해 보였다. 낮에 보았던 그의 모습과는 또 다른,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어둠이 그의 윤곽을 더욱 부드럽게 만들었다.
ㅤㅤ"안 들어가고 뭐 해?"
ㅤㅤ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배려가 담겨 있었다. 춥지는 않은지, 불편하지는 않은지 묻는 듯한 목소리였다.
ㅤㅤ"그냥... 바람 좀 쐴까 해서요. 너무 복잡해서요."
ㅤㅤ서희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 공간에서 그녀는 더 이상 애써 웃거나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는 편안함을 주었다.
ㅤㅤ"나도 좀. 사람 너무 많잖아."
ㅤㅤ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아까보다 훨씬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서희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했다. 그 역시 이런 자리를 불편해하는 사람이구나. 그에게서 공감대를 느꼈다.
ㅤㅤ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밤공기를 마셨다. 조용한 밤, 멀리서 들려오는 연회장의 희미한 소음만이 그들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이 짧은 침묵 속에서 서희는 이상한 편안함을 느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지만, 동시에 그 관계의 무게에서 잠시 벗어난 듯한 자유로움. 그리고 그 자유로움을 그와 함께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다가왔다. 세상의 시선에서 떨어진, 둘만의 시간. 오직 '우리'만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
ㅤㅤ그때 서희는 불쑥 어릴 때 기억을 꺼냈다. 프롤로그 속 그 아련한 조각. 왜 그 기억이 지금 떠올랐을까. 그의 조용한 눈빛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 고요한 순간 때문이었을까.
ㅤㅤ"저... 어릴 때, 오빠 장난감 만졌었죠?"
ㅤㅤ그가 살짝 눈썹을 올리며 서희를 보았다. 그의 눈에 희미한 놀라움이 스쳤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ㅤㅤ"아... 그거 기억하는구나."
ㅤㅤ"네. 노란색 스포츠카였는데. 오빠가 마당에서 가지고 놀던 거요. 제가 그거 엄청 만져보고 싶어 했는데... 오빠가 아무 말 없이 그냥 저한테 굴려줬었어요. 다른 오빠들은 안 빌려줬는데."
ㅤㅤ서희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 순간의 작은 친절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그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ㅤㅤ그가 낮게 웃었다.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그의 눈빛이 잠시 먼 과거로 향하는 것 같았다.
ㅤㅤ"그랬나. 잘 기억 안 나는데... 그냥... 마당 끝에 혼자 앉아서 그거 되게 조용히 쳐다보고 있는 네 모습이 보였어. 다른 애들처럼 소리 지르거나 와서 달라고 떼쓰지도 않고. 그냥... 갖고 싶어 하는 게 보여서."
ㅤㅤ그는 별다른 의미 부여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서희에게는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주었다. 그는 그저 어린 서희의 작은 소망을 알아봐 준 것이었다. 세상의 소란 속에서 혼자 겉돌던 작은 아이의 마음을.
ㅤㅤ"저는 그때 오빠가 되게... 멋있었어요."
ㅤㅤ서희는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조금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놀란 듯했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ㅤㅤ"멋있었다니. 그냥 어린애였을 뿐인데."
ㅤㅤ"아니요. 다른 오빠들은 다 자기들끼리 놀고 저 신경도 안 썼는데... 오빠는 저를 봐줬잖아요. 그리고 말없이... 장난감을 줬고. 그게 어린 저한테는 되게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ㅤㅤ서희는 자신의 어린 시절 외로움과, 그 순간 태준이 자신에게 내밀었던 작은 손길의 의미를 이야기했다. 태준은 서희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다.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마치 그 어린 시절의 순간으로 돌아간 듯한 눈빛이었다.
ㅤㅤ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었다. 카페 안의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오직 그와 그녀, 그리고 그들 사이를 오가는 이야기와 감정들만이 중요했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했고, 서로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그의 낮은 목소리, 그녀의 조용한 웃음소리, 그들 사이에 흐르는 편안하지만 묘한 긴장감.
ㅤㅤ시간이 꽤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서희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이 관계. 이 만남. 사촌 오빠와 단 둘이, 밤늦게까지 카페에 앉아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 그제야 주변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혹시 누군가 자신들을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까. 죄책감과 불안감이 다시 밀려왔다. 이 행복한 순간이 깨질까 봐 두려웠다.
ㅤㅤ"오빠... 시간이 꽤 늦었네요."
ㅤㅤ서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치 마법이 풀린 듯,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ㅤㅤ태준도 시계를 확인했다. 예상보다 훨씬 늦은 시간이었다. 그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서희는 그 아쉬움을 그의 눈빛에서 읽었다. 그 역시 이 시간이 끝나는 것이 아쉬운 걸까.
ㅤㅤ"그러게. 이야기하다 보니까 시간이 금방 가버렸네."
ㅤㅤ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리고 서희의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까의 편안함과는 다른, 무언가 강렬한 감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서희는 그 눈빛 속에서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그의 마음을 읽은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 역시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밤이,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ㅤㅤ카페 문을 닫을 시간이 다가왔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밤공기가 낮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카페 안이라는 안전한 공간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 속으로 나온 것이다. 세상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ㅤㅤ카페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 침묵은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감정들이 오가는 밀도 높은 침묵이었다.
ㅤㅤ태준이 서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단호했지만, 동시에 부드러웠다. 그는 망설이지 않는 듯했다. 서희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중요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ㅤㅤ그가 서희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다른 손이 서희의 뺨으로 향했다. 아까 카페 앞에서처럼. 따뜻한 온기가 서희의 뺨에 전해졌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서희는 숨을 멈췄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눈빛 속에서 서희는 그의 진심, 그리고 그가 이 순간 어떤 결심을 했는지를 읽었다. 사촌이라는 경계. 그 경계 위에서, 아니, 이미 경계를 넘어서려는 그의 발걸음.
ㅤㅤ"서희야."
ㅤㅤ그가 나지막하게 서희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지만, 깊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서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ㅤㅤ그가 서서히 얼굴을 숙였다. 서희는 눈을 감지 않았다.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순간을 받아들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짧고 깊은 입맞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순간이었다. 밤공기, 그의 손길, 그의 입술. 모든 것이 서희의 감각을 지배했다. 사촌이라는 관계, 사회적 금기, 죄책감, 두려움.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오직 그와 나. 오직, 우리.
ㅤㅤ입술이 떨어졌다. 태준은 여전히 서희의 뺨에 손을 올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확신으로 가득했다. 서희의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한 걸까.
ㅤㅤ"우리... 어떻게 되는 거예요?"
ㅤㅤ서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혼란과 불안함, 그리고 질문이 가득했다.
ㅤㅤ태준은 서희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그의 손은 따뜻했다. 그는 서희의 눈을 깊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단호했다.
ㅤㅤ"나도 잘 모르겠어."
ㅤㅤ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서희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ㅤㅤ"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ㅤㅤ태준은 서희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ㅤㅤ"나는 너를 놓을 수 없어."
ㅤㅤ그의 말에 서희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위험한 길의 끝이 어디일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고, 이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 했다. 사촌이라는 경계는 무너졌다. 그들은 이제 새로운 경계, 세상과 자신들 사이의 경계 앞에 서 있었다.
ㅤㅤ"오빠..."
ㅤㅤ서희는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어색함이 아닌, 복잡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ㅤㅤ"집에 바래다줄게."
ㅤㅤ태준이 서희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밤거리로 향했다. 함께 걷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밤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단순한 사촌이 아니었다. 금지된 이끌림에 몸을 맡긴, 비밀스러운 관계의 시작점에 서 있었다. 죄책감과 불안함, 그리고 강렬한 사랑과 설렘이 뒤섞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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