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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127 추천 : 0 글자수 : 1.5만 자 2025-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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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도시의 상처를 검은 천으로 덮듯 내려앉았다. 서울의 후미진 골목길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흠뻑 젖어, 낡고 해진 아스팔트의 균열 사이로 스며드는 빗물이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번들거렸다. 마치 오래된 수채화처럼, 모든 색은 바래고 경계는 흐릿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고요함 속에서 또렷하게 울렸고,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는 젖은 노면 위를 미끄러지듯 희미하게 왕복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간판이 쇳소리를 내며 위태롭게 몸을 뒤틀었다. 그 소리는 도시의 불안처럼, 간헐적으로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와 뒤섞여 스산함을 더했다.
고장 난 가로등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깜빡거리며 힘겹게 어둠을 밀어냈다. 그 위태로운 빛 아래, 젖은 벽돌 틈새를 비집고 솟아난 잡초들이 음울한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길 잃은 영혼들처럼 축축한 밤바람에 을씨년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그림자 사이를, 강지훈은 위태롭게 가로질렀다. 그의 걸음걸이는 술기운에 풀어진 다리와 삶의 무게를 동시에 짊어진 듯 휘청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단했던 어깨는 눈에 띄게 처져 있었고, 초점 없는 시선은 빗물 고인 바닥의 희미한 불빛 위를 부유했다. 한때 유도 매트 위를 호령하며 포효하던 그의 다부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불의의 부상으로 선수 생활의 정점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진 후, 그는 방향을 상실한 난파선처럼 도시의 밤거리를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술기운에 흐릿하게 풀어진 눈동자만이, 그의 고독하고 공허한 현실을 위태롭게 비추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거의 바닥을 드러낸 초록색 소주병이 위태롭게 들려 있었다. 그는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혹은 잊힌 영광의 잔재라도 확인하려는 듯 병을 무심하게 흔들었다. 찰랑이는 소리 대신, 텅 빈 유리 부딪히는 공허한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한때 환호와 땀, 승리의 함성으로 가득 찼던 그의 세계는 이제 싸구려 알코올의 역한 냄새와 쓰디쓴 회한,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으로 채워져 있었다. 매트 위에서 세상을 다 가진 듯 포효하던 젊은 날의 강지훈은, 이제 빛바랜 사진 속 희미한 잔상으로만 남아, 현재의 비참함을 더욱 날카롭게 후벼 팔 뿐이었다.
그때였다. 빗줄기 너머, 흐릿한 시야 속으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실루엣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지훈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발이 아스팔트에 달라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술기운 탓인가, 아니면 너무 깊어진 절망이 빚어낸 환영인가.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오는 그 모습은, 그의 기억 저장고 깊숙한 곳, 먼지 쌓인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한 페이지를 강제로 펼쳐냈다. 10년 전, 늘 한 발짝 뒤에서,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맴돌며 뜨거운 동경의 눈빛을 보내던 까까머리 후배, 이서윤이었다.
시간은 이서윤이라는 원석을 정교하게 깎아낸 듯했다. 밤거리의 누추한 어둠 속에서도 그는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처럼 빛났다. 훌쩍 자란 키는 웬만한 성인 남자를 압도할 만큼 훤칠했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어두운 색 코트는 그의 곧은 자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짙고 곱게 뻗은 눈썹 아래,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는 여전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소년의 풋풋함이 아닌, 날카롭게 벼려진 지성과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관조였다. 예전의 순수하고 동경심으로 반짝이던 표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자리에는 세월과 경험이 새겨 넣은 듯한 냉철함과,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깊이가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지훈은 그 낯선 냉정함 속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쇳가루처럼, 그의 시선은 서윤에게 고정되었다. 쏟아지는 빗방울이 서윤의 짙은 검은 머리카락을 차갑게 적시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그 빗방울보다 더 깊고 섬뜩한 빛을 담고 있었다. 마치 잔잔한 호수 아래 숨겨진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그의 눈빛은, 낡고 초라한 골목길의 풍경을 순식간에 비현실적인 영화의 한 장면으로 탈바꿈시켰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이 유난히 껄끄럽게 느껴졌다.
"지훈이 형… 맞죠? 오랜만이에요."
서윤의 목소리는 기억 속 소년의 것과 다르지 않게 맑았지만, 그 울림은 훨씬 깊고 낮아져 있었다. 잘 조율된 첼로 현처럼, 듣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동시에 미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힘이 있었다. 지훈은 서윤의 목소리에, 그의 놀랍도록 변한 모습에, 그리고 이 기이하고 우연한 재회 자체에 아련함과 동시에 날카로운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한때 그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유도계의 샛별이었고, 서윤은 그런 그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 중 하나였다. 지훈은 서윤에게 든든하고 자상한 선배였으며, 서윤은 그런 그를 하늘처럼 여기며 따랐다. 함께 땀 흘리고, 웃고, 때로는 경쟁했던 기억들. 하지만 부상과 함께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 지훈에게, 서윤은 빛바랜 사진첩 속 희미한 추억, 혹은 애써 외면하고 싶은 과거의 한 조각일 뿐이었다. 서윤의 얼굴은 세월과 절망 속에서 거의 잊힌 듯했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시간을 거슬러 지훈의 귓가에 놀랍도록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지훈은 술기운과 뒤섞인 당혹감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서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잊고 있던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비참함을 동시에 환기시키며 묵직한 통증을 안겨주는 듯 불편하면서도, 동시에 이 지독한 고독 속에서 자신을 알아봐 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아주 미미한, 거의 죄책감에 가까운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안도감 뒤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본능적인 불안감이 스멀스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서윤아… 너, 정말… 많이 컸네.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지훈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서윤의 깊은 눈빛을 제대로 마주 보기가 어려웠다. 그의 시선은 마치 엑스레이처럼 자신의 속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초라한 현재를, 속절없이 무너진 자존심을, 서윤이 이미 모두 간파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오래된 상처를 정면으로 들킨 듯한 불편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해 있는 그대로 다가오는 듯한 서윤의 따뜻한 혹은 그렇게 보이는 시선 사이에서 그의 내면은 복잡하게 요동쳤다. 그는 이 미묘하고 불안정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발은 이미 땅에 뿌리내린 듯 무겁게 느껴졌다.
서윤은 지훈의 대답에 만족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리고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치 오랫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지훈의 휘청거리는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의 손은 비에 젖어 차가울 법도 한데, 놀랍도록 따뜻한 온기를 전해왔다. 그 예상치 못한 인간적인 온기에, 지훈은 순간적으로 몸에 잔뜩 들어갔던 힘을 풀었다. 뼛속까지 스며든 추위와 외로움 속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은, 경계심이라는 얇은 얼음 막을 잠시나마 녹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손길 속에는 미묘한 강인함이 느껴졌다. 단순한 부축이 아닌, 결코 놓지 않겠다는 은근한 의지 같은 것이었다. 지훈의 마음속에서는 과거 서윤에게 가졌던 선배로서의 우월감과 동경을 받았던 달콤한 기억, 그리고 현재 그의 서늘하게 변한 모습과 알 수 없는 의도에서 비롯된 낯선 불안감이 위태롭게 공존하며 충돌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서윤의 손길에 거부감을 느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경고등이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깜빡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따뜻한 손길을 뿌리칠 기력도, 어쩌면 의지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지친 영혼은 과거의 달콤했던 추억과 현재의 불길한 예감 사이에서 격렬하게 흔들렸다.
"형,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 빗속에서 그냥 헤어질 순 없죠."
서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제가 정말 좋은 곳 아는데, 조용하고… 형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거기 가서 못다 한 이야기 좀 더 할까요? 제가… 좋아하는 형을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곳이에요. 꼭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서윤의 말은 더없이 다정하고 사려 깊게 들렸다. 하지만 지훈은 그 말의 행간, 특히 ‘특별히 준비한 곳’이라는 구절에 숨겨진 무언가를 감지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위험 신호가 울리고 있었지만, 서윤의 제안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처럼 다가왔다. 이 지긋지긋한 현실, 이 냄새나는 골목길을 벗어나, 잠시라도 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면. 게다가 자신을 여전히 ‘좋아하는 형’이라고 부르며 기억해주고, 심지어 무언가를 ‘준비’까지 했다는 서윤의 말은,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지훈의 메마른 마음을 미세하게 적셨다.
그는 서윤을 믿고 싶었다. 과거의 그 순수하고 맑았던 후배의 얼굴을 떠올리며, 지금의 서늘함은 그저 세월이 남긴 불가피한 흔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서윤의 눈빛 깊은 곳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차갑고 집요한 무언가가 그의 마음을 계속해서 어지럽혔다. 그것은 단순한 호의나 반가움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냥감을 마침내 발견하고, 천천히 거리를 좁히는 포식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서윤의 친절은 정교하게 위장된 덫처럼 느껴졌고, 그의 마음은 불안과 희미한 기대 사이에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의 이성은 필사적으로 경고했지만, 그의 외로운 본능은 서윤이 내민 손을 잡으라고, 이 고독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길고 짧은 망설임 끝에, 지훈은 거의 체념하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지훈은 서윤이 골목 어귀에 세워둔 검은색 세단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어떤 차종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고급 가죽 시트의 향과 정갈한 내부는 그의 낡고 허름한 처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또 한 번 그의 자존심을 할퀴었다. 차는 부드러운 엔진음을 내며 빗줄기를 거칠게 가르기 시작했다. 서울의 번잡한 불빛과 소음은 점차 희미해졌고, 차는 익숙한 길을 벗어나 외곽으로, 더 어둡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창밖은 가로등조차 찾아보기 힘든 짙은 어둠에 잠식되었고, 굵어진 빗줄기가 쉴 새 없이 차창을 두드리며 시야를 흐렸다. 마치 세상과 단절되어 어딘가 미지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그의 온몸을 감쌌다.
차가 굽이진 언덕길로 접어들자 불안감은 더욱 선명해졌다. 이런 외진 곳에 ‘이야기하기 좋은 곳’이 있다는 말인가? 지훈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잠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서윤아, 우리 어디 가는 거야? 꽤 멀리 온 것 같은데… 여긴 어디야?"
서윤은 운전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백미러로 지훈의 불안한 표정을 잠깐 확인하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 손길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어쩐지 상황을 능숙하게 무마하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거의 다 왔어요, 형.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정말 괜찮은 곳이라니까요. 형 피곤하실까 봐 일부러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 잡았어요. 걱정 마세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인위적일 정도로 차분하고 부드러웠지만, 그 표정 없는 옆얼굴과 핵심을 교묘하게 비껴가는 대답 속에는 무언가를 철저히 숨기고 있는 듯한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치 잘 짜인 각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 지훈은 불안한 마음에 계속해서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짙은 어둠과 빗줄기에 뭉개져 흐르는 나무들의 형체뿐이었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불안감을 극도로 증폭시켰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고, 축축한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는 자신이 서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실에 매달린 꼭두각시가 된 것 같은 깊은 무력감에 휩싸였다.
얼마나 더 어둠 속을 달렸을까. 굽이진 언덕길의 거의 끝자락, 더 이상 길이 없을 것 같은 막다른 곳에 이르자, 마침내 차가 속도를 줄이며 부드럽게 멈춰 섰다. 지훈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외부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는 듯한 거대한 저택, 혹은 작은 요새였다. 높게 솟아오른 담벼락은 웬만한 성벽을 방불케 했고, 굳게 닫힌 육중한 철제 대문은 그 자체로 침입자를 거부하는 듯한 강한 위압감을 풍겼다. 빗줄기는 이제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고, 거센 바람은 낡은 철문을 뒤흔들며 섬뜩한 삐걱거림을 밤의 정적 속으로 음산하게 울려 퍼지게 했다.
서윤이 차 안에서 작은 리모컨을 조작하자, 낡은 대문이 마치 신화 속 거대한 짐승의 입처럼 느릿하게, 소름 끼치는 마찰음을 내며 안쪽으로 열렸다. 그 너머로 드러난 것은 짙은 어둠에 잠긴 넓고 깊은 정원이었다. 지훈은 차 안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숨을 죽였다. 집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기이하고 폐쇄적인 분위기에 그는 완전히 압도당했다. 막연했던 불안감은 이제 뚜렷한 형태를 가진 공포로 변해가고 있었다. 심장은 갈비뼈를 부술 듯이 격렬하게 뛰었고, 그의 발걸음은 이미 보이지 않는 족쇄에 채워진 듯 무겁게 느껴졌다.
"형, 도착했어요."
서윤이 먼저 차에서 내리며, 지훈 쪽 문을 열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어서 내려요. 여기가 바로 제가 형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곳이에요. 제가 특별히 아끼고 좋아하는 공간이죠. 형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거예요."
서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냥했지만, 그의 눈빛은 짙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왕국에 귀한 손님을 초대하는 군주처럼 당당하고 여유로웠다. 지훈은 망설였다. 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강한 예감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서윤이 내민 손은, 그 눈빛은, 거부할 수 없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는 마지못해, 거의 홀린 듯이 서윤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차가운 빗물이 순식간에 그의 마른 어깨를 파고들었지만, 그 차가움보다 더한 것은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불안감이었다. 서윤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이제 그 온기는 위안이 아닌 속박처럼, 덫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그는 서윤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한 외침을 속으로 삼켰다. 그의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미묘하지만 단호한 힘에 그는 저항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공포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서윤이 자신을 이 낯설고 위압적인 곳으로 데려온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서윤은 지훈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앞장서서 어둠에 잠긴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정원은 밤의 장막에 가려져 세세한 모습은 알 수 없었지만, 언뜻 보기에도 사람의 손길이 닿아 비현실적일 정도로 세심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그 인위적인 단정함이 오히려 기이한 느낌을 자아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듯한 나무와 화초들의 실루엣은 음산하게 느껴졌고, 빗물에 젖은 자갈과 흙을 밟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지훈은 그의 뒤를 따르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심장 박동은 점점 더 빨라지고 불규칙해졌다. 이 집에서 느껴지는 이상하고 인위적인 분위기, 그리고 압도적인 침묵은 그의 불안감을 끊임없이 자극했고,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정원의 차갑고 축축한 공기는 단순한 비 때문이 아니라, 마치 이 공간 자체가 내뿜는 냉기처럼 느껴져 지훈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의 영혼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었다.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워졌고, 그의 마음속에는 벗어날 수 없는 덫에 완벽하게 걸려들었다는 절망적인 두려움이 싹트기 시작했다.
"형, 거의 다 왔어요."
서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훈을 돌아보며 말했다. 입가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서 와요. 형이 정말 좋아할 만한 곳이 기다리고 있어요. 형만을 위한 곳이죠."
서윤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지만,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그와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의 미소는 이제 더 이상 부드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면처럼, 그 뒤에 숨겨진 섬뜩한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훈은 서윤이 숨기고 있는 그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차라리 영원히 모르고 싶다는 상반된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는 서윤의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려 정원 깊숙한 곳으로, 저택의 현관을 향해 걸어가면서, 자신의 운명이 완전히 서윤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는 불안감과 무력감에 휩싸였다. 마치 출구를 알 수 없는 낯선 미로에 발을 들인 듯,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깊고 짙은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정원 끝에 다다르자 고풍스럽지만 동시에 위압적인 디자인의 거대한 현관문이 나타났다. 서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돌렸다. 묵직한 금속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고, 그는 지훈을 안으로 정중하게 초대했다. 현관 내부는 예상대로 어둡고 좁았으며, 바깥과는 다른 종류의 무겁고 탁한 공기가 지훈을 짓눌렀다. 바깥의 거센 폭우 소리가 거짓말처럼 멀어지고, 문이 ‘쿵’하는 둔탁하고 최종적인 소리와 함께 닫히자, 지훈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고 고립되었다는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마치 관 뚜껑이 닫히는 소리처럼, 그 소리는 지훈의 귓가에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그의 탈출구는 이제 완벽하게 봉쇄되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이 소용돌이쳤다. 심장은 이제 통제 불능 상태로 목구멍까지 치받는 듯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숨결은 얕고 가빠졌다. 그는 이 순간,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음을,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음을 직감했다. 자신의 발로 이 밀실과도 같은 공간에 들어섰고, 이제 모든 것은 서윤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후회와 공포가 뒤섞여 그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형, 이쪽이에요."
서윤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지훈의 등을 가볍게 밀며 안으로 안내했다.
"어서 들어와요. 비 맞아서 추우실 텐데. 안은 따뜻해요."
서윤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지만, 지훈은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서 섬세하게 조율된 연극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의 부드러움 뒤에 숨겨진 섬뜩한 냉철함과 병적인 집요함을 그는 이제 명확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공포심은 더욱 짙게 자라나 질긴 뿌리를 내렸다. 그는 마치 덫에 걸린 채 주인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가련한 짐승처럼, 서윤의 손에 무력하게 이끌려 그의 집 안, 미지의 심장부로 들어섰다. 현관문이 굳게 잠기는 소리는 그의 운명에 찍힌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스스로의 의지로는 벗어날 수 없는 곳에 와 있음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지훈은 서윤의 안내에 따라 짧은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은 예상외로 넓고 천장도 높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사람이 오랫동안 거주한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낯설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조명은 벽난로 위 스탠드 하나만 희미하게 켜져 있어 짙은 어둠이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 속에 놓인 값비싸 보이는 앤티크풍 가구들은 제 형태를 잃고 기괴하고 흉측한 그림자를 벽과 바닥에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마치 살아 움직이며 지훈을 주시하고 압박하는 듯한 섬뜩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느리고 슬픈 피아노 선율은 공간의 비현실적이고 음울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쇼팽의 야상곡이었던가,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절망을 담은 곡이었던가.
그는 마치 잘 꾸며진 거대한 미로, 혹은 생명력이 박제된 음산한 박물관 속에 갇힌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자신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불안감을 필사적으로 떨쳐내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불안감은 오히려 증폭되어 그의 온몸을 차가운 쇠사슬처럼 옥죄어왔다.
"형, 여기는 제가 주로 시간을 보내는 곳이에요."
서윤이 벽 쪽의 스탠드 조명을 하나 더 켜며 말했다. 조금 더 밝아졌지만, 여전히 그림자는 짙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평온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 소파, 꽤 편해요. 이탈리아에서 직접 가져온 건데… 편하게 앉아요. 뭐 마실 것 좀 가져다 드릴까요? 따뜻한 차라도?"
서윤의 목소리와 행동은 여전히 손님을 융숭하게 접대하는 주인의 그것처럼 다정했지만, 조명 아래 드러난 그의 눈빛은 아까 골목길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욱 차갑고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지훈을 향한 복잡하고 강렬한 감정이 담겨 있는 듯했지만, 그 감정의 실체는 여전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지훈은 마지못해 그가 가리킨 푹신해 보이는 짙은 녹색 벨벳 소파 끝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몸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시선은 서윤의 모든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따라다녔다.
그는 서윤의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느껴지는 이 기이하고 불길한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당했고, 그의 불안감은 이제 견딜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고, 그의 마음은 끊임없이 요동치며 혼란의 극치를 달렸다. 이 집에 발을 들인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것을, 자신은 서윤이 정교하게 짜 놓은 판 위의 무력한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앞으로 닥쳐올 미지의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두려움에 떨면서 기다릴 뿐이었다.
서윤은 지훈에게 잠시 앉아 있으라고 권했지만, 그 자신은 잠시도 쉬지 않고 다시 움직였다.
"형, 잠시만요. 정말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요."
그는 다시 지훈을 일으켜 세워 집 안 더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거실을 지나자 나타난 복도는 현관 옆 복도보다 더 길고 어두웠다. 낡은 마호가니 나무 바닥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불길한 비명을 질러댔고, 양옆 벽에는 어떤 그림이나 장식도 없이 짙은 색 벽지가 밋밋하게 이어져 숨 막히는 폐쇄감을 더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희미하게 느껴졌던 정체불명의 낮고 일정한 기계음이 이 복도에서는 더욱 뚜렷하게 들려왔다. 마치 집의 심장부, 벽 너머 혹은 바닥 아래에서 낮은 숨을 쉬고 있는 거대한 기계가 잠들어 있는 것처럼.
지훈은 서윤의 넓고 단단한 등을 말없이 따라 걸으면서 점점 더 심해지는 불안감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의 발걸음은 납덩이라도 매달린 듯 무거웠고,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벗어날 수 없는 덫에 완벽히 걸려들었다는, 혹은 제 발로 호랑이 굴 가장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왔다는 섬뜩한 공포감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이 어둡고 끝없는 복도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불안감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형, 이제 정말 다 왔어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서윤이 앞서 걸어가며, 뒤돌아보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어딘가 기대감마저 서려 있는 듯했다.
"제가 형을 위해 아주 특별한 곳을 준비해뒀어요. 형만을 위한… 안전하고 아늑한 곳. 누구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는 곳이죠."
서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움의 외피를 두르고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사냥감을 몰아가는 맹수처럼 빠르고 망설임이 없었다. 지훈은 흔들림 없는 서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이 전적으로 서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잔인한 현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는 서윤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이끌려 어둠 속으로, 미지의 공간으로 속절없이 향하고 있었고, 그의 영혼은 점차 짙고 차가운 공포에 완전히 휩싸였다. 그는 서윤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인지 희미하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그 짐작이 현실이 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 애써 생각을 떨쳐냈다. 그저 서윤의 뒤를 따라, 마치 고대 의식의 제물처럼, 어둠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뿐이었다.
길고 어두운 복도의 끝, 서윤은 마침내 하나의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다른 방문들과는 확연히 다른, 유난히 두껍고 견고해 보이는, 마치 은행의 금고 문이나 방공호의 입구를 연상시키는 육중한 철제 문이었다. 서윤은 문 옆 벽에 부착된 최첨단 지문 인식기에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삐빅’하는 짧은 전자음과 함께 희미한 녹색 불빛이 들어왔고,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철컥’하는 기계음이 복도에 울렸다. 그리고 서윤은 묵직한 문 손잡이를 돌려 안쪽으로 밀어 열었다.
문 안쪽은 지훈의 가장 불길한 예상을 처참하게 현실로 만들었다.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매끈한 금속 재질로 보이는 벽으로 막힌, 완벽한 밀실이었다. 방은 꽤 넓었지만, 가구라고는 방 한가운데 놓인 안락의자 하나뿐이었고,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복잡한 기계 장치들이 벽을 따라, 그리고 천장에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어떤 기계는 낮은 ‘웅’하는 소음과 함께 규칙적으로 여러 색깔의 빛을 깜빡이고 있었고, 어떤 기계는 복잡한 전선 다발과 투명한 튜브들로 서로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방 전체는 차갑고 인공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으며, 병원 수술실이나 미래적인 실험실을 연상시키는 싸늘하고 비인간적인 공기가 흘렀다.
지훈은 그 밀실의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그의 눈은 충격과 공포로 극도까지 커진 채, 방 안 곳곳을 미친 듯이 훑었다. 이곳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저 섬뜩한 기계들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서윤은 왜, 도대체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는가? 수많은 질문이 비명처럼 머릿속을 스쳤지만, 어떤 답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원초적인 공포가 자리 잡았다. 심장은 목구멍까지 뛰어오른 듯 격렬하게 박동했고, 숨은 턱까지 차올라 폐가 터질 것처럼 가빴다. 그는 마치 외딴 행성의 낯선 실험실에 홀로 던져진 실험체처럼, 극한의 불안감과 고립감에 휩싸였다.
"형, 여기가 바로 그곳이에요."
서윤이 지훈을 방 안으로 부드럽게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마침내 목표를 달성한 자의 만족감과 뒤틀린 소유욕이 뒤섞인 기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형을 위해 준비한… 우리만의 공간. 여기서는 형과 저, 단둘이…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함께할 수 있어요. 영원히."
서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속삭이듯 다정했지만, 그의 눈빛은 이제 숨길 수 없는 광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공들여 추적해온 먹잇감을 마침내 자신의 안전한 영역 안에 가두는 데 성공한 맹수처럼, 섬뜩하고 집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훈은 밀실에서 풍기는 기이한 분위기와 서윤의 노골적인 선언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의 불안감은 공포를 넘어 절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서윤에게 완벽하게 속았다는 것을, 그의 친절과 동정심, 과거의 추억을 들먹인 모든 것은 전부 이 순간을 위한 정교하고 잔인한 연기였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하지만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는 이미 밀실 안에 갇힌 후였고, 육중한 문은 그의 등 뒤에서 마치 단두대의 칼날처럼, 소리 없이 부드럽게 닫혔다. 그의 영혼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잠식되어 가늘게 떨었고, 그의 마음은 짙고 차가운 절망감으로 까맣게 물들었다.
서윤은 밀실 한쪽에 숨겨져 있던 작은 냉장고에서 차가운 생수병을 꺼내 지훈에게 건네려다, 그의 멍한 표정을 보고는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대신, 그는 방 중앙에 놓인 유일한 안락의자에 넋 나간 듯 앉아 있는 지훈의 옆, 차가운 금속 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걸터앉았다. 그의 모든 행동은 놀랍도록 차분하고 일상적이었으며, 마치 오랜 연인과 아늑한 저녁 시간을 보내는 듯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텅 비어 있는 듯 차갑고, 지훈을 향한 시선은 집요함을 넘어 병적인 소유욕과 광채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제 지훈에게는 공포였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조차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지훈은 이 순간, 자신이 물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서윤의 손아귀 안에 완전히 들어왔다는 것을, 그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이 좌우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현실을 깨달았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필사적인 절규와 함께, 동시에 이 기이하고 압도적인 상황과 서윤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알 수 없는 감정 – 극도의 두려움과 약간의 병적인 호기심, 그리고 아주 희미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무력한 기대감마저 뒤섞인 감정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형, 많이 피곤하죠?"
서윤이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지훈을 올려다보며,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마치 자장가처럼, 혹은 최면술사의 주문처럼 밀실의 기계음 사이로 스며들었다.
"오는 동안 힘들었을 테니… 일단 편히 쉬어요.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그냥 형이랑 저랑, 여기서 함께 밤을 보내는 거예요. 아주 오랫동안… 영원히 함께 있을 거니까."
지훈은 서윤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의 혀는 마비된 듯 굳어버렸고, 정신은 공포와 혼란,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폭풍 속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이성의 마지막 불꽃이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동시에 서윤이 만들어낸 이 비현실적인 공간과 그의 강렬하고 압도적인 존재감, 그리고 그의 기이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는 무력한 예감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의 지치고 상처 입은 영혼은 저항을 포기하고,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서윤이 구축한 세계, 이 차갑고 인공적인 밀실 속으로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극한의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역설적이게도 서윤의 존재와 그가 내뿜는 기묘한 안정감(?)에 익숙해지려는 듯, 미세하게 떨림을 멈추기 시작했다. 밀실의 문은 굳게 닫혔고, 두 사람의 예측 불가능하고 기나긴 밤은, 이제 막 그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
밤은 도시의 상처를 검은 천으로 덮듯 내려앉았다. 서울의 후미진 골목길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흠뻑 젖어, 낡고 해진 아스팔트의 균열 사이로 스며드는 빗물이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번들거렸다. 마치 오래된 수채화처럼, 모든 색은 바래고 경계는 흐릿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고요함 속에서 또렷하게 울렸고,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는 젖은 노면 위를 미끄러지듯 희미하게 왕복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간판이 쇳소리를 내며 위태롭게 몸을 뒤틀었다. 그 소리는 도시의 불안처럼, 간헐적으로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와 뒤섞여 스산함을 더했다.
고장 난 가로등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깜빡거리며 힘겹게 어둠을 밀어냈다. 그 위태로운 빛 아래, 젖은 벽돌 틈새를 비집고 솟아난 잡초들이 음울한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길 잃은 영혼들처럼 축축한 밤바람에 을씨년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그림자 사이를, 강지훈은 위태롭게 가로질렀다. 그의 걸음걸이는 술기운에 풀어진 다리와 삶의 무게를 동시에 짊어진 듯 휘청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단했던 어깨는 눈에 띄게 처져 있었고, 초점 없는 시선은 빗물 고인 바닥의 희미한 불빛 위를 부유했다. 한때 유도 매트 위를 호령하며 포효하던 그의 다부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불의의 부상으로 선수 생활의 정점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진 후, 그는 방향을 상실한 난파선처럼 도시의 밤거리를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술기운에 흐릿하게 풀어진 눈동자만이, 그의 고독하고 공허한 현실을 위태롭게 비추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거의 바닥을 드러낸 초록색 소주병이 위태롭게 들려 있었다. 그는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혹은 잊힌 영광의 잔재라도 확인하려는 듯 병을 무심하게 흔들었다. 찰랑이는 소리 대신, 텅 빈 유리 부딪히는 공허한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한때 환호와 땀, 승리의 함성으로 가득 찼던 그의 세계는 이제 싸구려 알코올의 역한 냄새와 쓰디쓴 회한,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으로 채워져 있었다. 매트 위에서 세상을 다 가진 듯 포효하던 젊은 날의 강지훈은, 이제 빛바랜 사진 속 희미한 잔상으로만 남아, 현재의 비참함을 더욱 날카롭게 후벼 팔 뿐이었다.
그때였다. 빗줄기 너머, 흐릿한 시야 속으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실루엣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지훈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발이 아스팔트에 달라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술기운 탓인가, 아니면 너무 깊어진 절망이 빚어낸 환영인가.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오는 그 모습은, 그의 기억 저장고 깊숙한 곳, 먼지 쌓인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한 페이지를 강제로 펼쳐냈다. 10년 전, 늘 한 발짝 뒤에서,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맴돌며 뜨거운 동경의 눈빛을 보내던 까까머리 후배, 이서윤이었다.
시간은 이서윤이라는 원석을 정교하게 깎아낸 듯했다. 밤거리의 누추한 어둠 속에서도 그는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처럼 빛났다. 훌쩍 자란 키는 웬만한 성인 남자를 압도할 만큼 훤칠했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어두운 색 코트는 그의 곧은 자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짙고 곱게 뻗은 눈썹 아래,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는 여전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소년의 풋풋함이 아닌, 날카롭게 벼려진 지성과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관조였다. 예전의 순수하고 동경심으로 반짝이던 표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자리에는 세월과 경험이 새겨 넣은 듯한 냉철함과,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깊이가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지훈은 그 낯선 냉정함 속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쇳가루처럼, 그의 시선은 서윤에게 고정되었다. 쏟아지는 빗방울이 서윤의 짙은 검은 머리카락을 차갑게 적시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그 빗방울보다 더 깊고 섬뜩한 빛을 담고 있었다. 마치 잔잔한 호수 아래 숨겨진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그의 눈빛은, 낡고 초라한 골목길의 풍경을 순식간에 비현실적인 영화의 한 장면으로 탈바꿈시켰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이 유난히 껄끄럽게 느껴졌다.
"지훈이 형… 맞죠? 오랜만이에요."
서윤의 목소리는 기억 속 소년의 것과 다르지 않게 맑았지만, 그 울림은 훨씬 깊고 낮아져 있었다. 잘 조율된 첼로 현처럼, 듣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동시에 미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힘이 있었다. 지훈은 서윤의 목소리에, 그의 놀랍도록 변한 모습에, 그리고 이 기이하고 우연한 재회 자체에 아련함과 동시에 날카로운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한때 그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유도계의 샛별이었고, 서윤은 그런 그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 중 하나였다. 지훈은 서윤에게 든든하고 자상한 선배였으며, 서윤은 그런 그를 하늘처럼 여기며 따랐다. 함께 땀 흘리고, 웃고, 때로는 경쟁했던 기억들. 하지만 부상과 함께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 지훈에게, 서윤은 빛바랜 사진첩 속 희미한 추억, 혹은 애써 외면하고 싶은 과거의 한 조각일 뿐이었다. 서윤의 얼굴은 세월과 절망 속에서 거의 잊힌 듯했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시간을 거슬러 지훈의 귓가에 놀랍도록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지훈은 술기운과 뒤섞인 당혹감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서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잊고 있던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비참함을 동시에 환기시키며 묵직한 통증을 안겨주는 듯 불편하면서도, 동시에 이 지독한 고독 속에서 자신을 알아봐 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아주 미미한, 거의 죄책감에 가까운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안도감 뒤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본능적인 불안감이 스멀스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서윤아… 너, 정말… 많이 컸네.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지훈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서윤의 깊은 눈빛을 제대로 마주 보기가 어려웠다. 그의 시선은 마치 엑스레이처럼 자신의 속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초라한 현재를, 속절없이 무너진 자존심을, 서윤이 이미 모두 간파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오래된 상처를 정면으로 들킨 듯한 불편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해 있는 그대로 다가오는 듯한 서윤의 따뜻한 혹은 그렇게 보이는 시선 사이에서 그의 내면은 복잡하게 요동쳤다. 그는 이 미묘하고 불안정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발은 이미 땅에 뿌리내린 듯 무겁게 느껴졌다.
서윤은 지훈의 대답에 만족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리고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치 오랫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지훈의 휘청거리는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의 손은 비에 젖어 차가울 법도 한데, 놀랍도록 따뜻한 온기를 전해왔다. 그 예상치 못한 인간적인 온기에, 지훈은 순간적으로 몸에 잔뜩 들어갔던 힘을 풀었다. 뼛속까지 스며든 추위와 외로움 속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은, 경계심이라는 얇은 얼음 막을 잠시나마 녹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손길 속에는 미묘한 강인함이 느껴졌다. 단순한 부축이 아닌, 결코 놓지 않겠다는 은근한 의지 같은 것이었다. 지훈의 마음속에서는 과거 서윤에게 가졌던 선배로서의 우월감과 동경을 받았던 달콤한 기억, 그리고 현재 그의 서늘하게 변한 모습과 알 수 없는 의도에서 비롯된 낯선 불안감이 위태롭게 공존하며 충돌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서윤의 손길에 거부감을 느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경고등이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깜빡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따뜻한 손길을 뿌리칠 기력도, 어쩌면 의지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지친 영혼은 과거의 달콤했던 추억과 현재의 불길한 예감 사이에서 격렬하게 흔들렸다.
"형,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 빗속에서 그냥 헤어질 순 없죠."
서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제가 정말 좋은 곳 아는데, 조용하고… 형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거기 가서 못다 한 이야기 좀 더 할까요? 제가… 좋아하는 형을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곳이에요. 꼭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서윤의 말은 더없이 다정하고 사려 깊게 들렸다. 하지만 지훈은 그 말의 행간, 특히 ‘특별히 준비한 곳’이라는 구절에 숨겨진 무언가를 감지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위험 신호가 울리고 있었지만, 서윤의 제안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처럼 다가왔다. 이 지긋지긋한 현실, 이 냄새나는 골목길을 벗어나, 잠시라도 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면. 게다가 자신을 여전히 ‘좋아하는 형’이라고 부르며 기억해주고, 심지어 무언가를 ‘준비’까지 했다는 서윤의 말은,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지훈의 메마른 마음을 미세하게 적셨다.
그는 서윤을 믿고 싶었다. 과거의 그 순수하고 맑았던 후배의 얼굴을 떠올리며, 지금의 서늘함은 그저 세월이 남긴 불가피한 흔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서윤의 눈빛 깊은 곳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차갑고 집요한 무언가가 그의 마음을 계속해서 어지럽혔다. 그것은 단순한 호의나 반가움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냥감을 마침내 발견하고, 천천히 거리를 좁히는 포식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서윤의 친절은 정교하게 위장된 덫처럼 느껴졌고, 그의 마음은 불안과 희미한 기대 사이에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의 이성은 필사적으로 경고했지만, 그의 외로운 본능은 서윤이 내민 손을 잡으라고, 이 고독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길고 짧은 망설임 끝에, 지훈은 거의 체념하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지훈은 서윤이 골목 어귀에 세워둔 검은색 세단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어떤 차종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고급 가죽 시트의 향과 정갈한 내부는 그의 낡고 허름한 처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또 한 번 그의 자존심을 할퀴었다. 차는 부드러운 엔진음을 내며 빗줄기를 거칠게 가르기 시작했다. 서울의 번잡한 불빛과 소음은 점차 희미해졌고, 차는 익숙한 길을 벗어나 외곽으로, 더 어둡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창밖은 가로등조차 찾아보기 힘든 짙은 어둠에 잠식되었고, 굵어진 빗줄기가 쉴 새 없이 차창을 두드리며 시야를 흐렸다. 마치 세상과 단절되어 어딘가 미지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그의 온몸을 감쌌다.
차가 굽이진 언덕길로 접어들자 불안감은 더욱 선명해졌다. 이런 외진 곳에 ‘이야기하기 좋은 곳’이 있다는 말인가? 지훈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잠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서윤아, 우리 어디 가는 거야? 꽤 멀리 온 것 같은데… 여긴 어디야?"
서윤은 운전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백미러로 지훈의 불안한 표정을 잠깐 확인하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 손길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어쩐지 상황을 능숙하게 무마하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거의 다 왔어요, 형.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정말 괜찮은 곳이라니까요. 형 피곤하실까 봐 일부러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 잡았어요. 걱정 마세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인위적일 정도로 차분하고 부드러웠지만, 그 표정 없는 옆얼굴과 핵심을 교묘하게 비껴가는 대답 속에는 무언가를 철저히 숨기고 있는 듯한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치 잘 짜인 각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 지훈은 불안한 마음에 계속해서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짙은 어둠과 빗줄기에 뭉개져 흐르는 나무들의 형체뿐이었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불안감을 극도로 증폭시켰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고, 축축한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는 자신이 서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실에 매달린 꼭두각시가 된 것 같은 깊은 무력감에 휩싸였다.
얼마나 더 어둠 속을 달렸을까. 굽이진 언덕길의 거의 끝자락, 더 이상 길이 없을 것 같은 막다른 곳에 이르자, 마침내 차가 속도를 줄이며 부드럽게 멈춰 섰다. 지훈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외부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는 듯한 거대한 저택, 혹은 작은 요새였다. 높게 솟아오른 담벼락은 웬만한 성벽을 방불케 했고, 굳게 닫힌 육중한 철제 대문은 그 자체로 침입자를 거부하는 듯한 강한 위압감을 풍겼다. 빗줄기는 이제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고, 거센 바람은 낡은 철문을 뒤흔들며 섬뜩한 삐걱거림을 밤의 정적 속으로 음산하게 울려 퍼지게 했다.
서윤이 차 안에서 작은 리모컨을 조작하자, 낡은 대문이 마치 신화 속 거대한 짐승의 입처럼 느릿하게, 소름 끼치는 마찰음을 내며 안쪽으로 열렸다. 그 너머로 드러난 것은 짙은 어둠에 잠긴 넓고 깊은 정원이었다. 지훈은 차 안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숨을 죽였다. 집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기이하고 폐쇄적인 분위기에 그는 완전히 압도당했다. 막연했던 불안감은 이제 뚜렷한 형태를 가진 공포로 변해가고 있었다. 심장은 갈비뼈를 부술 듯이 격렬하게 뛰었고, 그의 발걸음은 이미 보이지 않는 족쇄에 채워진 듯 무겁게 느껴졌다.
"형, 도착했어요."
서윤이 먼저 차에서 내리며, 지훈 쪽 문을 열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어서 내려요. 여기가 바로 제가 형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곳이에요. 제가 특별히 아끼고 좋아하는 공간이죠. 형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거예요."
서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냥했지만, 그의 눈빛은 짙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왕국에 귀한 손님을 초대하는 군주처럼 당당하고 여유로웠다. 지훈은 망설였다. 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강한 예감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서윤이 내민 손은, 그 눈빛은, 거부할 수 없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는 마지못해, 거의 홀린 듯이 서윤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차가운 빗물이 순식간에 그의 마른 어깨를 파고들었지만, 그 차가움보다 더한 것은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불안감이었다. 서윤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이제 그 온기는 위안이 아닌 속박처럼, 덫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그는 서윤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한 외침을 속으로 삼켰다. 그의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미묘하지만 단호한 힘에 그는 저항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공포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서윤이 자신을 이 낯설고 위압적인 곳으로 데려온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서윤은 지훈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앞장서서 어둠에 잠긴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정원은 밤의 장막에 가려져 세세한 모습은 알 수 없었지만, 언뜻 보기에도 사람의 손길이 닿아 비현실적일 정도로 세심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그 인위적인 단정함이 오히려 기이한 느낌을 자아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듯한 나무와 화초들의 실루엣은 음산하게 느껴졌고, 빗물에 젖은 자갈과 흙을 밟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지훈은 그의 뒤를 따르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심장 박동은 점점 더 빨라지고 불규칙해졌다. 이 집에서 느껴지는 이상하고 인위적인 분위기, 그리고 압도적인 침묵은 그의 불안감을 끊임없이 자극했고,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정원의 차갑고 축축한 공기는 단순한 비 때문이 아니라, 마치 이 공간 자체가 내뿜는 냉기처럼 느껴져 지훈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의 영혼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었다.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워졌고, 그의 마음속에는 벗어날 수 없는 덫에 완벽하게 걸려들었다는 절망적인 두려움이 싹트기 시작했다.
"형, 거의 다 왔어요."
서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훈을 돌아보며 말했다. 입가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서 와요. 형이 정말 좋아할 만한 곳이 기다리고 있어요. 형만을 위한 곳이죠."
서윤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지만,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그와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의 미소는 이제 더 이상 부드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면처럼, 그 뒤에 숨겨진 섬뜩한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훈은 서윤이 숨기고 있는 그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차라리 영원히 모르고 싶다는 상반된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는 서윤의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려 정원 깊숙한 곳으로, 저택의 현관을 향해 걸어가면서, 자신의 운명이 완전히 서윤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는 불안감과 무력감에 휩싸였다. 마치 출구를 알 수 없는 낯선 미로에 발을 들인 듯,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깊고 짙은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정원 끝에 다다르자 고풍스럽지만 동시에 위압적인 디자인의 거대한 현관문이 나타났다. 서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돌렸다. 묵직한 금속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고, 그는 지훈을 안으로 정중하게 초대했다. 현관 내부는 예상대로 어둡고 좁았으며, 바깥과는 다른 종류의 무겁고 탁한 공기가 지훈을 짓눌렀다. 바깥의 거센 폭우 소리가 거짓말처럼 멀어지고, 문이 ‘쿵’하는 둔탁하고 최종적인 소리와 함께 닫히자, 지훈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고 고립되었다는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마치 관 뚜껑이 닫히는 소리처럼, 그 소리는 지훈의 귓가에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그의 탈출구는 이제 완벽하게 봉쇄되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이 소용돌이쳤다. 심장은 이제 통제 불능 상태로 목구멍까지 치받는 듯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숨결은 얕고 가빠졌다. 그는 이 순간,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음을,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음을 직감했다. 자신의 발로 이 밀실과도 같은 공간에 들어섰고, 이제 모든 것은 서윤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후회와 공포가 뒤섞여 그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형, 이쪽이에요."
서윤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지훈의 등을 가볍게 밀며 안으로 안내했다.
"어서 들어와요. 비 맞아서 추우실 텐데. 안은 따뜻해요."
서윤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지만, 지훈은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서 섬세하게 조율된 연극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의 부드러움 뒤에 숨겨진 섬뜩한 냉철함과 병적인 집요함을 그는 이제 명확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공포심은 더욱 짙게 자라나 질긴 뿌리를 내렸다. 그는 마치 덫에 걸린 채 주인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가련한 짐승처럼, 서윤의 손에 무력하게 이끌려 그의 집 안, 미지의 심장부로 들어섰다. 현관문이 굳게 잠기는 소리는 그의 운명에 찍힌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스스로의 의지로는 벗어날 수 없는 곳에 와 있음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지훈은 서윤의 안내에 따라 짧은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은 예상외로 넓고 천장도 높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사람이 오랫동안 거주한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낯설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조명은 벽난로 위 스탠드 하나만 희미하게 켜져 있어 짙은 어둠이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 속에 놓인 값비싸 보이는 앤티크풍 가구들은 제 형태를 잃고 기괴하고 흉측한 그림자를 벽과 바닥에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마치 살아 움직이며 지훈을 주시하고 압박하는 듯한 섬뜩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느리고 슬픈 피아노 선율은 공간의 비현실적이고 음울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쇼팽의 야상곡이었던가,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절망을 담은 곡이었던가.
그는 마치 잘 꾸며진 거대한 미로, 혹은 생명력이 박제된 음산한 박물관 속에 갇힌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자신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불안감을 필사적으로 떨쳐내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불안감은 오히려 증폭되어 그의 온몸을 차가운 쇠사슬처럼 옥죄어왔다.
"형, 여기는 제가 주로 시간을 보내는 곳이에요."
서윤이 벽 쪽의 스탠드 조명을 하나 더 켜며 말했다. 조금 더 밝아졌지만, 여전히 그림자는 짙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평온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 소파, 꽤 편해요. 이탈리아에서 직접 가져온 건데… 편하게 앉아요. 뭐 마실 것 좀 가져다 드릴까요? 따뜻한 차라도?"
서윤의 목소리와 행동은 여전히 손님을 융숭하게 접대하는 주인의 그것처럼 다정했지만, 조명 아래 드러난 그의 눈빛은 아까 골목길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욱 차갑고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지훈을 향한 복잡하고 강렬한 감정이 담겨 있는 듯했지만, 그 감정의 실체는 여전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지훈은 마지못해 그가 가리킨 푹신해 보이는 짙은 녹색 벨벳 소파 끝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몸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시선은 서윤의 모든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따라다녔다.
그는 서윤의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느껴지는 이 기이하고 불길한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당했고, 그의 불안감은 이제 견딜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고, 그의 마음은 끊임없이 요동치며 혼란의 극치를 달렸다. 이 집에 발을 들인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것을, 자신은 서윤이 정교하게 짜 놓은 판 위의 무력한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앞으로 닥쳐올 미지의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두려움에 떨면서 기다릴 뿐이었다.
서윤은 지훈에게 잠시 앉아 있으라고 권했지만, 그 자신은 잠시도 쉬지 않고 다시 움직였다.
"형, 잠시만요. 정말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요."
그는 다시 지훈을 일으켜 세워 집 안 더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거실을 지나자 나타난 복도는 현관 옆 복도보다 더 길고 어두웠다. 낡은 마호가니 나무 바닥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불길한 비명을 질러댔고, 양옆 벽에는 어떤 그림이나 장식도 없이 짙은 색 벽지가 밋밋하게 이어져 숨 막히는 폐쇄감을 더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희미하게 느껴졌던 정체불명의 낮고 일정한 기계음이 이 복도에서는 더욱 뚜렷하게 들려왔다. 마치 집의 심장부, 벽 너머 혹은 바닥 아래에서 낮은 숨을 쉬고 있는 거대한 기계가 잠들어 있는 것처럼.
지훈은 서윤의 넓고 단단한 등을 말없이 따라 걸으면서 점점 더 심해지는 불안감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의 발걸음은 납덩이라도 매달린 듯 무거웠고,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벗어날 수 없는 덫에 완벽히 걸려들었다는, 혹은 제 발로 호랑이 굴 가장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왔다는 섬뜩한 공포감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이 어둡고 끝없는 복도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불안감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형, 이제 정말 다 왔어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서윤이 앞서 걸어가며, 뒤돌아보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어딘가 기대감마저 서려 있는 듯했다.
"제가 형을 위해 아주 특별한 곳을 준비해뒀어요. 형만을 위한… 안전하고 아늑한 곳. 누구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는 곳이죠."
서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움의 외피를 두르고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사냥감을 몰아가는 맹수처럼 빠르고 망설임이 없었다. 지훈은 흔들림 없는 서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이 전적으로 서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잔인한 현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는 서윤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이끌려 어둠 속으로, 미지의 공간으로 속절없이 향하고 있었고, 그의 영혼은 점차 짙고 차가운 공포에 완전히 휩싸였다. 그는 서윤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인지 희미하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그 짐작이 현실이 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 애써 생각을 떨쳐냈다. 그저 서윤의 뒤를 따라, 마치 고대 의식의 제물처럼, 어둠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뿐이었다.
길고 어두운 복도의 끝, 서윤은 마침내 하나의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다른 방문들과는 확연히 다른, 유난히 두껍고 견고해 보이는, 마치 은행의 금고 문이나 방공호의 입구를 연상시키는 육중한 철제 문이었다. 서윤은 문 옆 벽에 부착된 최첨단 지문 인식기에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삐빅’하는 짧은 전자음과 함께 희미한 녹색 불빛이 들어왔고,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철컥’하는 기계음이 복도에 울렸다. 그리고 서윤은 묵직한 문 손잡이를 돌려 안쪽으로 밀어 열었다.
문 안쪽은 지훈의 가장 불길한 예상을 처참하게 현실로 만들었다.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매끈한 금속 재질로 보이는 벽으로 막힌, 완벽한 밀실이었다. 방은 꽤 넓었지만, 가구라고는 방 한가운데 놓인 안락의자 하나뿐이었고,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복잡한 기계 장치들이 벽을 따라, 그리고 천장에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어떤 기계는 낮은 ‘웅’하는 소음과 함께 규칙적으로 여러 색깔의 빛을 깜빡이고 있었고, 어떤 기계는 복잡한 전선 다발과 투명한 튜브들로 서로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방 전체는 차갑고 인공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으며, 병원 수술실이나 미래적인 실험실을 연상시키는 싸늘하고 비인간적인 공기가 흘렀다.
지훈은 그 밀실의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그의 눈은 충격과 공포로 극도까지 커진 채, 방 안 곳곳을 미친 듯이 훑었다. 이곳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저 섬뜩한 기계들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서윤은 왜, 도대체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는가? 수많은 질문이 비명처럼 머릿속을 스쳤지만, 어떤 답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원초적인 공포가 자리 잡았다. 심장은 목구멍까지 뛰어오른 듯 격렬하게 박동했고, 숨은 턱까지 차올라 폐가 터질 것처럼 가빴다. 그는 마치 외딴 행성의 낯선 실험실에 홀로 던져진 실험체처럼, 극한의 불안감과 고립감에 휩싸였다.
"형, 여기가 바로 그곳이에요."
서윤이 지훈을 방 안으로 부드럽게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마침내 목표를 달성한 자의 만족감과 뒤틀린 소유욕이 뒤섞인 기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형을 위해 준비한… 우리만의 공간. 여기서는 형과 저, 단둘이…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함께할 수 있어요. 영원히."
서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속삭이듯 다정했지만, 그의 눈빛은 이제 숨길 수 없는 광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공들여 추적해온 먹잇감을 마침내 자신의 안전한 영역 안에 가두는 데 성공한 맹수처럼, 섬뜩하고 집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훈은 밀실에서 풍기는 기이한 분위기와 서윤의 노골적인 선언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의 불안감은 공포를 넘어 절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서윤에게 완벽하게 속았다는 것을, 그의 친절과 동정심, 과거의 추억을 들먹인 모든 것은 전부 이 순간을 위한 정교하고 잔인한 연기였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하지만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는 이미 밀실 안에 갇힌 후였고, 육중한 문은 그의 등 뒤에서 마치 단두대의 칼날처럼, 소리 없이 부드럽게 닫혔다. 그의 영혼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잠식되어 가늘게 떨었고, 그의 마음은 짙고 차가운 절망감으로 까맣게 물들었다.
서윤은 밀실 한쪽에 숨겨져 있던 작은 냉장고에서 차가운 생수병을 꺼내 지훈에게 건네려다, 그의 멍한 표정을 보고는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대신, 그는 방 중앙에 놓인 유일한 안락의자에 넋 나간 듯 앉아 있는 지훈의 옆, 차가운 금속 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걸터앉았다. 그의 모든 행동은 놀랍도록 차분하고 일상적이었으며, 마치 오랜 연인과 아늑한 저녁 시간을 보내는 듯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텅 비어 있는 듯 차갑고, 지훈을 향한 시선은 집요함을 넘어 병적인 소유욕과 광채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제 지훈에게는 공포였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조차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지훈은 이 순간, 자신이 물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서윤의 손아귀 안에 완전히 들어왔다는 것을, 그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이 좌우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현실을 깨달았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필사적인 절규와 함께, 동시에 이 기이하고 압도적인 상황과 서윤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알 수 없는 감정 – 극도의 두려움과 약간의 병적인 호기심, 그리고 아주 희미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무력한 기대감마저 뒤섞인 감정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형, 많이 피곤하죠?"
서윤이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지훈을 올려다보며,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마치 자장가처럼, 혹은 최면술사의 주문처럼 밀실의 기계음 사이로 스며들었다.
"오는 동안 힘들었을 테니… 일단 편히 쉬어요.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그냥 형이랑 저랑, 여기서 함께 밤을 보내는 거예요. 아주 오랫동안… 영원히 함께 있을 거니까."
지훈은 서윤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의 혀는 마비된 듯 굳어버렸고, 정신은 공포와 혼란,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폭풍 속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이성의 마지막 불꽃이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동시에 서윤이 만들어낸 이 비현실적인 공간과 그의 강렬하고 압도적인 존재감, 그리고 그의 기이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는 무력한 예감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의 지치고 상처 입은 영혼은 저항을 포기하고,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서윤이 구축한 세계, 이 차갑고 인공적인 밀실 속으로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극한의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역설적이게도 서윤의 존재와 그가 내뿜는 기묘한 안정감(?)에 익숙해지려는 듯, 미세하게 떨림을 멈추기 시작했다. 밀실의 문은 굳게 닫혔고, 두 사람의 예측 불가능하고 기나긴 밤은, 이제 막 그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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