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조회 : 163 추천 : 0 글자수 : 6,221 자 2025-12-10
제13화
다시 시작된 7월 13일, 금요일. 강윤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지독한 기시감(데자뷔)으로 가득한 하루였다. 똑같은 시간표에 따라 진행되는 수업, 어제와 정확히 똑같은 타이밍에 터지는 선생님의 썰렁한 농담, 심지어 점심 급식으로 나온 돈가스의 소스 맛까지. 교실의 친구들은 어제와 똑같은 시시껄렁한 화제로 떠들고 웃었지만, 강윤은 더 이상 그들의 평화로운 대화에 온전히 섞여들 수 없었다. 그는 홀로 미래의 기억이라는 보이지 않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는 고독한 이방인과도 같았다.
그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르게, 그리고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친구들의 사소한 행동, 선생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미래에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올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그는 마치 세상의 모든 인과관계를 꿰뚫어 보는 신이라도 된 듯한 기묘하고 오만한 감각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는 신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끔찍한 미래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돌아온, 겁에 질린 열일곱 살의 생존자일 뿐이었다.
그는 하루 종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지호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전의 시간대에서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감시를 무의식적으로 의식하며 1교시와 4교시, 정확히 두 번 교실 뒤편 CCTV를 힐끗거리는 불안한 눈빛. 자신과 대화할 때마다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죄책감에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 끝. 그리고 복도에서 마주친 다솜을 바라볼 때, 그 표정에 스쳐 지나가는 애정과 부러움, 그리고 체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까지. 강윤은 이제야 지호가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서 이 모든 비밀의 무게를 짊어지고 고통스러운 줄타기를 해왔는지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연민과 함께, 지난 시간 속에서 그를 원망했던 자신에 대한 미안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소란스러운 점심시간, 강윤은 식판을 들고 일부러 혼자 앉아 있는 지호의 맞은편으로 향했다. 이전 시간대에서는 불안한 기색의 지호가 먼저 다가왔지만, 이번에는 강윤이 먼저였다.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한 그의 첫 번째 행동이었다.
“지호야.”
강윤이 나직이 불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지호는 제 이름이 들리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명백한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오늘 밤, 나랑 같이 갈 데가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야. 너한테 모든 걸 설명해주고 싶고, 또… 네 도움이 필요해.”
강윤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단단했고, 그의 눈빛은 마치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는 듯 깊고 차분했다. 지호는 강윤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크게 당황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했던 친구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확신, 그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윤은 이전의 시간대에서처럼 지호를 다그치거나 원망의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대신, 처음부터 그를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동료’로 대했다. 그것이 어긋난 미래의 톱니바퀴를 바로잡는 첫 번째 단추였다.
하교 후, 두 사람은 강윤의 방에 마주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호는 강윤이 비밀 연구소의 USB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강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지호야, 넌 네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알아?”
“뭐? 갑자기 그건 왜…”
“네 아버지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위대한 과학자가 아닐지도 몰라. 그리고 나 역시, 네가 생각하는 평범한 친구가 아니야.”
강윤은 결심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을 공유하기로. 불완전한 정보와 불신이 비극을 낳는다는 것을 그는 뼈저리게 배웠다. 그는 자신이 가진 염력에 대해, 그리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표진석의 거대한 음모에 대해 털어놓았다. 물론, 시간을 되돌렸다는 핵심적인 사실은 숨긴 채였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최근 이상한 일을 겪으며 알게 된 사실’과 ‘마치 미래를 본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른 불길한 예감’으로 포장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린다는 거 알아.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날 믿어줘. 어제 아주 끔찍한 꿈을 꿨어. 우리 집이 불타고 있었고… 오늘 밤, 네 아버지의 연구소에 가지 않으면, 우리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이 끔찍한 일이 생길 거야. 우리 부모님, 그리고 너까지도.”
지호는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다. 강윤의 말은 누가 들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동안 자신이 느꼈던 모든 의심과 불안의 조각들이 거대한 자석에 이끌리듯 하나로 맞춰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특히 ‘너까지도 위험하다’는 말은 그의 심장을 얼음장처럼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는 언젠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몰래 보았던 정체 모를 파일들과, 자신의 이름이 온갖 의료 데이터와 함께 기록되어 있던 낡은 연구 노트를 떠올렸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그걸 다 아는 거야?”
“나도 몰라. 그냥… 어느 순간부터 알게 됐어.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알았느냐가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거지. 넌 어떻게 할래, 지호야? 계속 모르는 척, 위험한 아버지 밑에서 불안하게 살래, 아니면 나랑 같이 진실을 확인할래?”
강윤은 친구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이전 시간대의 비극은, 결국 소통의 부재와 서로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호는 한참을 고뇌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강윤의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아버지가 무언가 끔찍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갈게. 같이 가서… 내 눈으로 직접 모든 것을 확인하겠어.”
두 소년의 위태로운 동맹은, 이번에는 서로에 대한 완전한 신뢰 위에서 다시 맺어졌다.
깊은 밤이 되자, 두 사람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철저하고 치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윤은 실패로 끝났던 미래의 기억을 바탕으로 전체 작전을 지휘했고, 지호는 아버지의 습성과 연구소 내부 구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더해 계획의 미세한 빈틈까지 완벽하게 메웠다.
“지난번엔 너무 서둘렀어. 정문 근처의 센서를 피하려다 오히려 내부 감시망에 걸렸지. 그래서 경보를 울렸고. 이번엔 달라.”
강윤은 자신의 방 침대 밑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소형 드론과 분해된 부품들, 그리고 노트북이 들어 있었다. 그가 오랫동안 용돈을 모아 몰래 사둔 것들이었다.
“이 드론에 소형 카메라랑 내가 만든 EMP 장치를 달았어. 이걸 먼저 연구소 북쪽 환풍구로 들여보낼 거야. 거기가 유일한 아날로그 통로거든. 이걸로 내부 상황을 정찰하고, 중앙 통제실로 가는 길목의 순찰 로봇 두 대와 CCTV 세 개를 정확히 5분간 무력화시킬 거야.”
지호는 강윤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평범한 학생이었던 친구가, 마치 수십 번의 작전을 수행해 본 전문 요원처럼 움직이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든든했다.
“그리고 이건 너를 위한 거야.”
강윤은 지호에게 엄지손톱만 한 작은 USB 장치 하나를 건넸다.
“이건 ‘데이터 복제 웜’이야. 단순 복사 프로그램이 아니야. 컴퓨터에 꽂기만 하면, 네가 미리 설정한 특정 키워드 예를 들어 내 이름, 우리 부모님 이름, 프로젝트 프로메테우스 가 포함된 모든 파일을 1분 안에 자동으로 암호화해서 외부 백업 서버로 전송할 거야. 우리가 직접 파일을 찾고 복사할 필요 없어. 시간을 아끼고 위험을 줄이는 거지.”
이 모든 것은 이전 시간대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단 한 번의 처절한 실패의 경험은 강윤을 놀라울 정도로 성장시켰다.
연구소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강윤이 드론을 조종해 내부를 정찰하고 주요 보안 장치를 차례로 무력화시키는 동안, 지호는 외부에서 노트북으로 연구소의 3중 방화벽을 우회하고 있었다. 지호는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해킹 기술을 총동원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좋아, 지금부터 정확히 5분간의 안전 시간을 확보했어. 지금 들어가자!”
두 사람은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은밀하게 중앙 통제실에 도착했다. 복도 구석에는 순찰 로봇이 스파크를 튀기며 작동을 멈춘 채 서 있었다. 지호는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메인 컴퓨터에 USB를 꽂았다. 화면에 수많은 파일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복사되어 전송되는 진행률 표시 막대가 나타났다.
“1분… 아니, 데이터 양을 보니 45초면 돼.”
지호가 숨 막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강윤은 문밖을 경계하며 망을 보았다. 그의 손바닥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지만,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그는 이미 이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데이터 전송이 완료되는 순간, 경보음이 울릴 것이다. 표진석이 분노에 차서 도착할 것이고, 공격용 드론들이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거의 다 됐어… 5, 4, 3, 2, 1… 완료!”
데이터 전송이 완료되는 것과 동시에, 연구소 전체에 고막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이전과 똑같은 절망적인 상황. 하지만 강윤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가자, 지호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두 사람은 출구를 향해 달리지 않았다. 오히려 연구소의 가장 깊숙한 곳, 표진석이 자신의 연구 데이터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보관실’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지호조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최상위 보안 구역이었다.
복도 천장에서 공격용 드론들이 강하하며 푸른 에너지탄을 빗발치듯 발사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처럼! 길을 열어줘!”
지호가 본능적으로 외쳤다. 강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전처럼 살아남기 위해 무작정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 던지지 않았다. 그는 날아오는 에너지탄의 궤도를 정확히 읽고, 최소한의 힘으로 복도 벽의 금속 파편들을 날려 허공에서 서로 부딪치게 만들었다. ‘쾅! 쾅!’ 공중에서 연쇄적인 폭발이 일어나며 섬광과 연기가 드론들의 시야와 조준 시스템을 완벽하게 방해했다. 그 찰나의 틈을 타, 두 사람은 보관실의 육중한 강철 문 앞에 도착했다.
“이 문은… 내 카드키로는 절대 안 열려! 아버지의 홍채와 정맥, 이중 생체 인식이 필요해!”
지호가 절망적으로 외쳤다. 바로 그때, 연구소 전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표진석의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까지구나, 어리석은 것들. 내 연구실을 엉망으로 만들고,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이제 와서 발버둥 쳐봐야 아무 소용없다. 얌전히 나오너라.”
표진석은 중앙 통제실의 CCTV를 통해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여유로웠다. 두 마리 생쥐가 자신의 철옹성 가장 깊은 곳에서 완벽하게 갇혔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가장 아끼는 걸 가지러 왔다.”
강윤이 머리 위의 CCTV 카메라를 똑바로 노려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는 두꺼운 보관실 문에 손을 얹었다.
“이 안에… 당신 연구의 알파이자 오메가. ‘제노-7’ 원본 샘플이 있지?”
스피커 너머로, 처음으로 표진석의 당황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강윤이 그것의 이름과 존재를 어떻게 알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아들인 지호에게조차 말해준 적 없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네가… 네가 그것을 어떻게…”
“당신이 나에 대해 모든 걸 안다고 생각했겠지만, 당신도 모르는 게 있어, 박사님.”
강윤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힘을 손바닥에 집중했다. 그의 목표는 문을 무식하게 부수는 것이 아니었다. 문의 잠금장치, 그 복잡하고 정교한 내부 회로를 자신의 염력으로 정밀하게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지지직-! 치지지직!’
문에서 푸른 스파크가 격렬하게 튀고 역한 타는 냄새가 났다. ‘철컥’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수십 겹의 잠금장치가 풀리고 두꺼운 강철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열렸다.
보관실 중앙에는 영롱하고 불길한 푸른빛을 내는 액체가 담긴 원통형 보관장치가 있었다. 표진석의 모든 연구의 시작이자 끝. 그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안 돼! 그것만은 안 돼!”
표진석의 이성을 잃은 외침이 스피커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이제 협상할 시간이야, 표진석 박사.”
강윤은 보관장치를 당장이라도 부술 듯이 손에 쥐고, CCTV를 향해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안전하게 여기서 나갈 수 있게 길을 열어. 그리고 내 친구, 지호를 다시는 당신의 더러운 실험에 이용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그 위대한 연구는 바로 여기서 끝이야. 나와 함께, 영원히 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거지.”
이전 시간대에서는 공포에 질려 쫓기는 쥐에 불과했던 소년. 하지만 두 번째 기회 속에서, 그는 이제 판을 완전히 뒤엎고 사냥꾼의 목에 칼을 겨누는 냉혹한 복수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진짜 반격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다시 시작된 7월 13일, 금요일. 강윤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지독한 기시감(데자뷔)으로 가득한 하루였다. 똑같은 시간표에 따라 진행되는 수업, 어제와 정확히 똑같은 타이밍에 터지는 선생님의 썰렁한 농담, 심지어 점심 급식으로 나온 돈가스의 소스 맛까지. 교실의 친구들은 어제와 똑같은 시시껄렁한 화제로 떠들고 웃었지만, 강윤은 더 이상 그들의 평화로운 대화에 온전히 섞여들 수 없었다. 그는 홀로 미래의 기억이라는 보이지 않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는 고독한 이방인과도 같았다.
그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르게, 그리고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친구들의 사소한 행동, 선생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미래에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올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그는 마치 세상의 모든 인과관계를 꿰뚫어 보는 신이라도 된 듯한 기묘하고 오만한 감각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는 신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끔찍한 미래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돌아온, 겁에 질린 열일곱 살의 생존자일 뿐이었다.
그는 하루 종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지호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전의 시간대에서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감시를 무의식적으로 의식하며 1교시와 4교시, 정확히 두 번 교실 뒤편 CCTV를 힐끗거리는 불안한 눈빛. 자신과 대화할 때마다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죄책감에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 끝. 그리고 복도에서 마주친 다솜을 바라볼 때, 그 표정에 스쳐 지나가는 애정과 부러움, 그리고 체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까지. 강윤은 이제야 지호가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서 이 모든 비밀의 무게를 짊어지고 고통스러운 줄타기를 해왔는지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연민과 함께, 지난 시간 속에서 그를 원망했던 자신에 대한 미안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소란스러운 점심시간, 강윤은 식판을 들고 일부러 혼자 앉아 있는 지호의 맞은편으로 향했다. 이전 시간대에서는 불안한 기색의 지호가 먼저 다가왔지만, 이번에는 강윤이 먼저였다.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한 그의 첫 번째 행동이었다.
“지호야.”
강윤이 나직이 불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지호는 제 이름이 들리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명백한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오늘 밤, 나랑 같이 갈 데가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야. 너한테 모든 걸 설명해주고 싶고, 또… 네 도움이 필요해.”
강윤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단단했고, 그의 눈빛은 마치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는 듯 깊고 차분했다. 지호는 강윤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크게 당황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했던 친구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확신, 그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윤은 이전의 시간대에서처럼 지호를 다그치거나 원망의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대신, 처음부터 그를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동료’로 대했다. 그것이 어긋난 미래의 톱니바퀴를 바로잡는 첫 번째 단추였다.
하교 후, 두 사람은 강윤의 방에 마주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호는 강윤이 비밀 연구소의 USB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강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지호야, 넌 네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알아?”
“뭐? 갑자기 그건 왜…”
“네 아버지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위대한 과학자가 아닐지도 몰라. 그리고 나 역시, 네가 생각하는 평범한 친구가 아니야.”
강윤은 결심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을 공유하기로. 불완전한 정보와 불신이 비극을 낳는다는 것을 그는 뼈저리게 배웠다. 그는 자신이 가진 염력에 대해, 그리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표진석의 거대한 음모에 대해 털어놓았다. 물론, 시간을 되돌렸다는 핵심적인 사실은 숨긴 채였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최근 이상한 일을 겪으며 알게 된 사실’과 ‘마치 미래를 본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른 불길한 예감’으로 포장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린다는 거 알아.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날 믿어줘. 어제 아주 끔찍한 꿈을 꿨어. 우리 집이 불타고 있었고… 오늘 밤, 네 아버지의 연구소에 가지 않으면, 우리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이 끔찍한 일이 생길 거야. 우리 부모님, 그리고 너까지도.”
지호는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다. 강윤의 말은 누가 들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동안 자신이 느꼈던 모든 의심과 불안의 조각들이 거대한 자석에 이끌리듯 하나로 맞춰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특히 ‘너까지도 위험하다’는 말은 그의 심장을 얼음장처럼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는 언젠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몰래 보았던 정체 모를 파일들과, 자신의 이름이 온갖 의료 데이터와 함께 기록되어 있던 낡은 연구 노트를 떠올렸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그걸 다 아는 거야?”
“나도 몰라. 그냥… 어느 순간부터 알게 됐어.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알았느냐가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거지. 넌 어떻게 할래, 지호야? 계속 모르는 척, 위험한 아버지 밑에서 불안하게 살래, 아니면 나랑 같이 진실을 확인할래?”
강윤은 친구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이전 시간대의 비극은, 결국 소통의 부재와 서로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호는 한참을 고뇌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강윤의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아버지가 무언가 끔찍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갈게. 같이 가서… 내 눈으로 직접 모든 것을 확인하겠어.”
두 소년의 위태로운 동맹은, 이번에는 서로에 대한 완전한 신뢰 위에서 다시 맺어졌다.
깊은 밤이 되자, 두 사람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철저하고 치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윤은 실패로 끝났던 미래의 기억을 바탕으로 전체 작전을 지휘했고, 지호는 아버지의 습성과 연구소 내부 구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더해 계획의 미세한 빈틈까지 완벽하게 메웠다.
“지난번엔 너무 서둘렀어. 정문 근처의 센서를 피하려다 오히려 내부 감시망에 걸렸지. 그래서 경보를 울렸고. 이번엔 달라.”
강윤은 자신의 방 침대 밑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소형 드론과 분해된 부품들, 그리고 노트북이 들어 있었다. 그가 오랫동안 용돈을 모아 몰래 사둔 것들이었다.
“이 드론에 소형 카메라랑 내가 만든 EMP 장치를 달았어. 이걸 먼저 연구소 북쪽 환풍구로 들여보낼 거야. 거기가 유일한 아날로그 통로거든. 이걸로 내부 상황을 정찰하고, 중앙 통제실로 가는 길목의 순찰 로봇 두 대와 CCTV 세 개를 정확히 5분간 무력화시킬 거야.”
지호는 강윤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평범한 학생이었던 친구가, 마치 수십 번의 작전을 수행해 본 전문 요원처럼 움직이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든든했다.
“그리고 이건 너를 위한 거야.”
강윤은 지호에게 엄지손톱만 한 작은 USB 장치 하나를 건넸다.
“이건 ‘데이터 복제 웜’이야. 단순 복사 프로그램이 아니야. 컴퓨터에 꽂기만 하면, 네가 미리 설정한 특정 키워드 예를 들어 내 이름, 우리 부모님 이름, 프로젝트 프로메테우스 가 포함된 모든 파일을 1분 안에 자동으로 암호화해서 외부 백업 서버로 전송할 거야. 우리가 직접 파일을 찾고 복사할 필요 없어. 시간을 아끼고 위험을 줄이는 거지.”
이 모든 것은 이전 시간대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단 한 번의 처절한 실패의 경험은 강윤을 놀라울 정도로 성장시켰다.
연구소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강윤이 드론을 조종해 내부를 정찰하고 주요 보안 장치를 차례로 무력화시키는 동안, 지호는 외부에서 노트북으로 연구소의 3중 방화벽을 우회하고 있었다. 지호는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해킹 기술을 총동원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좋아, 지금부터 정확히 5분간의 안전 시간을 확보했어. 지금 들어가자!”
두 사람은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은밀하게 중앙 통제실에 도착했다. 복도 구석에는 순찰 로봇이 스파크를 튀기며 작동을 멈춘 채 서 있었다. 지호는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메인 컴퓨터에 USB를 꽂았다. 화면에 수많은 파일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복사되어 전송되는 진행률 표시 막대가 나타났다.
“1분… 아니, 데이터 양을 보니 45초면 돼.”
지호가 숨 막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강윤은 문밖을 경계하며 망을 보았다. 그의 손바닥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지만,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그는 이미 이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데이터 전송이 완료되는 순간, 경보음이 울릴 것이다. 표진석이 분노에 차서 도착할 것이고, 공격용 드론들이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거의 다 됐어… 5, 4, 3, 2, 1… 완료!”
데이터 전송이 완료되는 것과 동시에, 연구소 전체에 고막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이전과 똑같은 절망적인 상황. 하지만 강윤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가자, 지호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두 사람은 출구를 향해 달리지 않았다. 오히려 연구소의 가장 깊숙한 곳, 표진석이 자신의 연구 데이터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보관실’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지호조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최상위 보안 구역이었다.
복도 천장에서 공격용 드론들이 강하하며 푸른 에너지탄을 빗발치듯 발사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처럼! 길을 열어줘!”
지호가 본능적으로 외쳤다. 강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전처럼 살아남기 위해 무작정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 던지지 않았다. 그는 날아오는 에너지탄의 궤도를 정확히 읽고, 최소한의 힘으로 복도 벽의 금속 파편들을 날려 허공에서 서로 부딪치게 만들었다. ‘쾅! 쾅!’ 공중에서 연쇄적인 폭발이 일어나며 섬광과 연기가 드론들의 시야와 조준 시스템을 완벽하게 방해했다. 그 찰나의 틈을 타, 두 사람은 보관실의 육중한 강철 문 앞에 도착했다.
“이 문은… 내 카드키로는 절대 안 열려! 아버지의 홍채와 정맥, 이중 생체 인식이 필요해!”
지호가 절망적으로 외쳤다. 바로 그때, 연구소 전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표진석의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까지구나, 어리석은 것들. 내 연구실을 엉망으로 만들고,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이제 와서 발버둥 쳐봐야 아무 소용없다. 얌전히 나오너라.”
표진석은 중앙 통제실의 CCTV를 통해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여유로웠다. 두 마리 생쥐가 자신의 철옹성 가장 깊은 곳에서 완벽하게 갇혔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가장 아끼는 걸 가지러 왔다.”
강윤이 머리 위의 CCTV 카메라를 똑바로 노려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는 두꺼운 보관실 문에 손을 얹었다.
“이 안에… 당신 연구의 알파이자 오메가. ‘제노-7’ 원본 샘플이 있지?”
스피커 너머로, 처음으로 표진석의 당황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강윤이 그것의 이름과 존재를 어떻게 알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아들인 지호에게조차 말해준 적 없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네가… 네가 그것을 어떻게…”
“당신이 나에 대해 모든 걸 안다고 생각했겠지만, 당신도 모르는 게 있어, 박사님.”
강윤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힘을 손바닥에 집중했다. 그의 목표는 문을 무식하게 부수는 것이 아니었다. 문의 잠금장치, 그 복잡하고 정교한 내부 회로를 자신의 염력으로 정밀하게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지지직-! 치지지직!’
문에서 푸른 스파크가 격렬하게 튀고 역한 타는 냄새가 났다. ‘철컥’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수십 겹의 잠금장치가 풀리고 두꺼운 강철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열렸다.
보관실 중앙에는 영롱하고 불길한 푸른빛을 내는 액체가 담긴 원통형 보관장치가 있었다. 표진석의 모든 연구의 시작이자 끝. 그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안 돼! 그것만은 안 돼!”
표진석의 이성을 잃은 외침이 스피커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이제 협상할 시간이야, 표진석 박사.”
강윤은 보관장치를 당장이라도 부술 듯이 손에 쥐고, CCTV를 향해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안전하게 여기서 나갈 수 있게 길을 열어. 그리고 내 친구, 지호를 다시는 당신의 더러운 실험에 이용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그 위대한 연구는 바로 여기서 끝이야. 나와 함께, 영원히 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거지.”
이전 시간대에서는 공포에 질려 쫓기는 쥐에 불과했던 소년. 하지만 두 번째 기회 속에서, 그는 이제 판을 완전히 뒤엎고 사냥꾼의 목에 칼을 겨누는 냉혹한 복수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진짜 반격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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