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조회 : 180 추천 : 0 글자수 : 7,356 자 2025-12-12
제15화
세상은 다시 한번 핏빛 절망과 통제 불능의 푸른 에너지 폭풍으로 가득 찼다. 강윤의 품에 안긴 다솜의 몸은 내리는 비에 젖어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새하얀 교복을 짙게 적시는 선명한 붉은 피는, 그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을 낙인처럼 찍히는 죄책감처럼 끈적하고 선명했다. 자신의 이기적인 싸움에 아무 상관없는 친구를 휘말리게 한 것도 모자라, 결국 눈앞에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끔찍한 무력감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되어 그의 이성을 남김없이 좀먹어 들어갔다.
“안 돼… 안 돼, 다솜아… 제발, 제발 눈 좀 떠봐…!”
강윤의 처절한 절규는 세찬 빗소리와 그의 분노에 공명하여 뿌리째 뽑히는 나무들의 비명 소리에 묻혀 공허하게 흩어졌다. 주변을 완벽하게 포위했던 최정예 추격조들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예측 불가능한 에너지 폭풍에 겁을 먹고 감히 접근하지 못한 채, 멀리서 이 기괴하고도 신성모독적인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더 이상 생포해야 할 목표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로 강림한 파괴신 그 자체였다.
‘되돌려야 해.’
강윤의 혼돈으로 가득 찬 머릿-속에,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처럼 단 하나의 생각이 모든 것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 끔찍한 실수를, 나의 실패를 만회해야 해. 어떻게든 시간을 되돌려서… 다솜이가 이곳에 오기 전으로… 아니, 이 숲에 발을 들여놓기 전으로…!’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그의 영혼 자체를 대가로 치르는 위험하고도 금지된 도박이라는 것을. 첫 번째 회귀 이후, 그는 설명할 수 없는 극심한 피로감과 간헐적인 기억의 단절을 매일 밤 겪고 있었다. 한번 바꾼 미래를 또다시 억지로 비틀려 할 때, 우주가 그 반작용으로 어떤 끔찍한 대가를 요구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멸해버릴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공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강윤아, 정신 차려! 제발! 지금 네가 무너지면 우리 다 끝이야!”
지호가 빗속을 뚫고 다가와 그의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 하지만 강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은 이미 현실 세계의 풍경을 떠나, 시공간의 뒤틀린 심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모든 빛과 희망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깊고 아득한 어둠의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다솜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 대가로 자신의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더라도 기꺼이 악마에게 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발… 단 한 번만 더… 기회를…!”
그의 간절한 염원이 결국 시공간의 법칙에 다시 한번 흉터와도 같은 균열을 일으켰다. 그의 주변 세상이, 마치 오래된 비디오테이프가 늘어붙듯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끔찍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던 빗방울들이 허공에서 멈춰 섰다가,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거꾸로 솟구쳐 올라갔다. 쓰러졌던 거대한 나무들이 제자리를 찾아 퍼즐처럼 일어섰고,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다솜의 몸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상처 속으로 기괴하게 빨려 들어갔다. 세상이, 그의 절규에 응답하여 다시 거꾸로 감기기 시작했다.
첫 번째 회귀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혼이 원자 단위로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되는 듯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 강윤을 덮쳤다. 그의 의식은 수억 개의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 났다가, 차갑고 어두운 무의식의 깊은 바다 속으로 끝없이, 끝없이 가라앉았다.
강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의 방, 너무나도 익숙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창밖은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의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똑같았다. 책상 위에는 어젯밤 풀다 만 수학 문제집이 펼쳐져 있었고, 의자에는 어머니가 다려준, 오늘 입고 갈 교복이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꿈…이었나?’
그는 그 모든 것이 지독하게 길고 끔찍한 악몽이었다고 생각했다. 비밀 연구소, 아버지의 광기, 총에 맞는 다솜의 슬픈 눈… 모든 것이 현실처럼 너무나도 생생했지만,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가슴 깊이 내쉬며 뻐근한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경고를 보내는 듯한 지독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의 몸은 마치 덤프트럭에 치이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아팠다. 머릿속은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멍했고,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 자신의 목숨과도 같이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듯한 정체 모를 불안감이 심장을 강하게 짓눌렀다.
그의 흐릿한 시선이 책상 위 달력에 닿았다.
‘7월 13일, 금요일.’
비극이 일어났던 바로 그날이었다. 그는 어젯밤, 비밀 연구소에 잠입했다가 모든 것을 잃고 시간을 되돌렸다. 그리고 오늘, 다시 한번 그 끔찍한 미래를 바꾸기 위해 이전의 실패를 교훈 삼아 더욱 치밀하고 완벽한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왜 기억이 이렇게 희미하지?
그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분명 연구소에 잠입하는 완벽한 계획을 세웠던 것 같은데, 그 구체적인 내용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꿈의 잔상처럼,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만 남아있을 뿐, 그 알맹이가 통째로 증발해버린 기분이었다. 그는 다급하게 책상 서랍을 열어보았다. 어젯밤, 결의에 찬 필체로 ‘미래 변경 계획 - 코드네임: 리플레이(Replay)’라고 적어두었던 낡은 노트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강윤아, 일어났니? 어서 나와서 아침 먹어야지!”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그는 화들짝 놀랐다. 강윤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고 거실로 나갔다. 식탁에서는 아빠가 안경을 쓴 채 아침 신문을 보고 있었고, 주방에서는 엄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계란 프라이를 접시에 담고 있었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그래서 지독하게 비현실적인 아침 풍경. 그는 이 풍경을 한번 잃었다가 기적처럼 되찾았다는 사실을, 아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는 지호였다.
“야, 차강윤! 너 오늘 완전 중요하다고 한 날인 거 잊어버린 거 아니지? 어젯밤에 우리 둘이 세운 완벽한 계획 말이야!”
지호의 목소리는 긴장과 흥분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강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계획? 무슨 계획 말하는 거야?”
“…뭐? 야, 장난치지 마. 너 어제 나한테 네 능력에 대해서 다 얘기해주고, 우리 아버지 연구소에 오늘 밤 잠입해서… 너 설마 밤새 무리해서 코피라도 쏟고 기억상실이라도 온 거냐?”
지호의 말을 듣는 순간, 강윤의 머릿속을 차가운 섬광 같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기억… 내 기억의 일부가 사라졌어.’
두 번째 시간 회귀의 대가.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의 소실이었다. 그는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얻었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 스스로 수립했던 작전 계획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이제 미래를 아는 자가 아니었다. 그저 끔찍한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심만을 가진, 평범하고 무력한 소년으로 돌아와 버렸다.
“기억이 안 나… 지호야,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어떡하지? 나 진짜 어떡하면 좋아?”
강윤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전화기 너머로 지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를 들었다.
“젠장… 괜찮아. 일단 침착해. 내가 있잖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내가 어제 네가 말한 계획, 네가 준비해야 할 물건들, 하나도 빠짐없이 다 메모해뒀어. 오늘 밤 만나서 다시 얘기하자. 넌 그냥… 몸 관리나 잘하고 있어. 목소리가 말이 아니야.”
지호의 의외로 침착하고 든든한 대응 덕분에, 강윤은 간신히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 혼란을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불안감은 안개처럼 더욱 짙어져만 갔다. 자신이 세웠다는 그 계획. 그것은 과연 완벽한 계획이었을까? 기억나지 않는 미래 속에서, 자신이 놓친 치명적인 변수는 없었을까?
그날 하루는 강윤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모든 것이 미세하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은 그는 이전 시간대에서 보여주었던 냉철한 치밀함과 대담함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는 지호가 건네준 메모에 의존해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신의 대본을 잃어버린 배우처럼, 그는 모든 상황이 불안하고 두려웠다.
점심시간, 다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강윤아, 너 어디 아파? 아침부터 얼굴이 하얘. 무슨 일 있어?"
다솜의 눈에는 순수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강윤에게는 그 걱정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정체 모를 불안감과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거대한 계획에 대한 압박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니,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그는 다솜의 눈을 피하며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상처받은 다솜의 얼굴을 보며, 강윤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미래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 아주 조금씩, 하지만 분명하게 최악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밤이 되고, 두 소년은 다시 한번 비밀 연구소 앞에 섰다. 지호의 메모 덕분에 잠입은 기계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강윤은 계속해서 불안했다. 모든 것이 처음 겪는 일처럼 낯설고 두려웠다. 마치 누군가 짜놓은 함정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정말 괜찮겠지? 우리 이러다 잡히는 거 아니야? 뭔가… 뭔가 이상해.”
“걱정 마. 네가 짠 계획이야. 완벽하다고 했잖아, 너 스스로.”
지호가 그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역력했다. 리더를 잃은 작전은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중앙 통제실에 도착하여 파일 복사를 시작하는 순간, 강윤은 깨달았다. 자신이 잊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실, 그를 두 번째 시간 회귀로 이끌었던 바로 그 끔찍한 기억을.
‘다솜이…! 다솜이가 위험해! 숲으로 온다고!’
그의 머릿속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다솜의 모습이 깨진 거울 조각처럼 떠올랐다. 왜 그녀가 거기 있었지? 어떻게 그곳을 알고 찾아왔지? 세부적인 내용은 여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당장 다솜을 막아야 한다는 것.
“지호야, 계획 취소야!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해! 그리고 다솜이한테…!”
강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구소 전체에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 달랐다. 출입문이 닫히고 공격용 드론이 나타나는 대신, 통제실의 거대한 메인 스크린이 켜지며 표진석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모든 것을 조롱하는 듯한 비웃음이 가득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내 예상 시나리오보다 조금 늦었지만 말이다.”
표진석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처음부터 ‘설계’한 것처럼 보였다.
“너희가 복사해간 그 파일, 재밌게 읽었는지 모르겠구나. 물론, 내가 너희 같은 좀도둑들을 위해 일부러 흘려둔 가짜 정보들이지만.”
그의 말에 강윤과 지호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진짜 파티는 지금부터다. 너희가 여기서 소꿉놀이를 하는 동안, 너희 부모님께 손님을 좀 보냈거든.”
스크린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검은 전투복 차림의 무장 병력들에게 둘러싸여 겁에 질린 채 무릎 꿇고 있는 강윤의 부모님, 차태주와 서지윤의 모습이었다. 배경은 너무나도 익숙한 그들의 집 거실이었다.
“강윤아! 지호야! 이게 대체 무슨…!”
차태주의 충격과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두 번째 시간 회귀는 미래를 바꾸지 못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최악의 방향으로, 표진석이 완벽하게 통제하는 세계선으로 뒤틀어버린 것이다. 강윤은 깨달았다. 시간을 되돌린 대가는 단순한 기억상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상실이었다.
“이제 선택하거라, 차강윤. 네 부모를 살리고 싶으면, 얌전히 내게 와서 너의 모든 것을 바쳐라.”
표진석의 잔인하고도 지독하게 차가운 목소리가 중앙 통제실의 차가운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그 목소리에는 승리자의 오만함과, 모든 것을 자신의 게임판 위에서 내려다보는 신과 같은 냉혹함이 담겨 있었다.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강윤의 부모님은 검은 전투복 차림의 무장 병력들에게 둘러싸여 속수무책으로 공포에 질린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뿐인 아들을 향한 애끓는 걱정과, 눈앞에서 벌어지는 악몽 같은 상황에 대한 믿을 수 없다는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실신할 듯 입술을 파랗게 떨고 있었다.
“강윤아! 지호야! 이게 대체 무슨…!”
아버지 차태주의 충격과 분노에 찬 외침이 스피커를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순간, 옆에 서 있던 한 병사가 감정 없는 기계처럼, 무자비하게 개머리판으로 그의 등을 강하게 내리쳤고, 태주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빠!”
강윤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여 머리로 솟구치는 듯한 맹렬한 분노가 그의 이성을 순식간에 마비시켰다. 그는 스크린을 향해 손을 뻗어, 화면 속의 저주받을 병사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살인적인 충동에 휩싸였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 스파크가 파직거리며 튀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의 목숨이, 그의 세상 전부가 저들의 손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진정해, 강윤아! 제발! 지금 흥분하면 저 악마의 뜻대로 되는 거야!”
지호가 강윤의 어깨를 부서져라 붙잡고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공포와 절망으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아버지가 꾸민 짓이라는 사실에, 그는 영혼이 날카로운 칼날에 수천 번 난도질당하는 듯한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어때, 차강윤? 나의 새로운 창조물이여. 대답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특별히 10초 주지. 10초 안에 네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투항하지 않으면, 네 부모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거다. 바로 네 눈앞에서, 아주 고통스럽게.”
표진석은 마치 체스 게임의 마지막 체크메이트를 선언하는 것처럼, 여유롭고 잔인하게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통제실 전체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법칙처럼 울려 퍼졌다.
“10… 9… 8…”
강윤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시간을 되돌린 결과가 결국 이것이란 말인가. 다솜을 구하고 모두를 지키려 했던 그의 오만한 시도가, 결국 부모님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그는 한없이 작고 무력했다. 지독한 죄책감과 절망이 차가운 밧줄이 되어 그의 목을 강하게 졸랐다.
“7… 6…”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제발, 제발 우리 부모님은 건드리지 마세요.”
강윤이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몸에서 모든 힘과 의지가 빠져나간 듯했다. 그의 목소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패배자의 것처럼 공허하게 바닥에 흩어졌다.
“내가… 내가 갈게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제발 그것만은…”
“현명한 선택이다. 역시 넌 내 최고의 작품이야.”
표진석의 입가에 마침내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럼 지금 즉시, 모든 저항을 멈추고 중앙 복도로 걸어 나와라. 지호, 너도 함께다. 아비에게 돌아와야지.”
세상은 다시 한번 핏빛 절망과 통제 불능의 푸른 에너지 폭풍으로 가득 찼다. 강윤의 품에 안긴 다솜의 몸은 내리는 비에 젖어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새하얀 교복을 짙게 적시는 선명한 붉은 피는, 그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을 낙인처럼 찍히는 죄책감처럼 끈적하고 선명했다. 자신의 이기적인 싸움에 아무 상관없는 친구를 휘말리게 한 것도 모자라, 결국 눈앞에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끔찍한 무력감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되어 그의 이성을 남김없이 좀먹어 들어갔다.
“안 돼… 안 돼, 다솜아… 제발, 제발 눈 좀 떠봐…!”
강윤의 처절한 절규는 세찬 빗소리와 그의 분노에 공명하여 뿌리째 뽑히는 나무들의 비명 소리에 묻혀 공허하게 흩어졌다. 주변을 완벽하게 포위했던 최정예 추격조들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예측 불가능한 에너지 폭풍에 겁을 먹고 감히 접근하지 못한 채, 멀리서 이 기괴하고도 신성모독적인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더 이상 생포해야 할 목표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로 강림한 파괴신 그 자체였다.
‘되돌려야 해.’
강윤의 혼돈으로 가득 찬 머릿-속에,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처럼 단 하나의 생각이 모든 것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 끔찍한 실수를, 나의 실패를 만회해야 해. 어떻게든 시간을 되돌려서… 다솜이가 이곳에 오기 전으로… 아니, 이 숲에 발을 들여놓기 전으로…!’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그의 영혼 자체를 대가로 치르는 위험하고도 금지된 도박이라는 것을. 첫 번째 회귀 이후, 그는 설명할 수 없는 극심한 피로감과 간헐적인 기억의 단절을 매일 밤 겪고 있었다. 한번 바꾼 미래를 또다시 억지로 비틀려 할 때, 우주가 그 반작용으로 어떤 끔찍한 대가를 요구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멸해버릴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공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강윤아, 정신 차려! 제발! 지금 네가 무너지면 우리 다 끝이야!”
지호가 빗속을 뚫고 다가와 그의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 하지만 강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은 이미 현실 세계의 풍경을 떠나, 시공간의 뒤틀린 심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모든 빛과 희망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깊고 아득한 어둠의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다솜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 대가로 자신의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더라도 기꺼이 악마에게 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발… 단 한 번만 더… 기회를…!”
그의 간절한 염원이 결국 시공간의 법칙에 다시 한번 흉터와도 같은 균열을 일으켰다. 그의 주변 세상이, 마치 오래된 비디오테이프가 늘어붙듯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끔찍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던 빗방울들이 허공에서 멈춰 섰다가,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거꾸로 솟구쳐 올라갔다. 쓰러졌던 거대한 나무들이 제자리를 찾아 퍼즐처럼 일어섰고,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다솜의 몸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상처 속으로 기괴하게 빨려 들어갔다. 세상이, 그의 절규에 응답하여 다시 거꾸로 감기기 시작했다.
첫 번째 회귀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혼이 원자 단위로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되는 듯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 강윤을 덮쳤다. 그의 의식은 수억 개의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 났다가, 차갑고 어두운 무의식의 깊은 바다 속으로 끝없이, 끝없이 가라앉았다.
강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의 방, 너무나도 익숙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창밖은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의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똑같았다. 책상 위에는 어젯밤 풀다 만 수학 문제집이 펼쳐져 있었고, 의자에는 어머니가 다려준, 오늘 입고 갈 교복이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꿈…이었나?’
그는 그 모든 것이 지독하게 길고 끔찍한 악몽이었다고 생각했다. 비밀 연구소, 아버지의 광기, 총에 맞는 다솜의 슬픈 눈… 모든 것이 현실처럼 너무나도 생생했지만,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가슴 깊이 내쉬며 뻐근한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경고를 보내는 듯한 지독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의 몸은 마치 덤프트럭에 치이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아팠다. 머릿속은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멍했고,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 자신의 목숨과도 같이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듯한 정체 모를 불안감이 심장을 강하게 짓눌렀다.
그의 흐릿한 시선이 책상 위 달력에 닿았다.
‘7월 13일, 금요일.’
비극이 일어났던 바로 그날이었다. 그는 어젯밤, 비밀 연구소에 잠입했다가 모든 것을 잃고 시간을 되돌렸다. 그리고 오늘, 다시 한번 그 끔찍한 미래를 바꾸기 위해 이전의 실패를 교훈 삼아 더욱 치밀하고 완벽한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왜 기억이 이렇게 희미하지?
그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분명 연구소에 잠입하는 완벽한 계획을 세웠던 것 같은데, 그 구체적인 내용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꿈의 잔상처럼,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만 남아있을 뿐, 그 알맹이가 통째로 증발해버린 기분이었다. 그는 다급하게 책상 서랍을 열어보았다. 어젯밤, 결의에 찬 필체로 ‘미래 변경 계획 - 코드네임: 리플레이(Replay)’라고 적어두었던 낡은 노트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강윤아, 일어났니? 어서 나와서 아침 먹어야지!”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그는 화들짝 놀랐다. 강윤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고 거실로 나갔다. 식탁에서는 아빠가 안경을 쓴 채 아침 신문을 보고 있었고, 주방에서는 엄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계란 프라이를 접시에 담고 있었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그래서 지독하게 비현실적인 아침 풍경. 그는 이 풍경을 한번 잃었다가 기적처럼 되찾았다는 사실을, 아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는 지호였다.
“야, 차강윤! 너 오늘 완전 중요하다고 한 날인 거 잊어버린 거 아니지? 어젯밤에 우리 둘이 세운 완벽한 계획 말이야!”
지호의 목소리는 긴장과 흥분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강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계획? 무슨 계획 말하는 거야?”
“…뭐? 야, 장난치지 마. 너 어제 나한테 네 능력에 대해서 다 얘기해주고, 우리 아버지 연구소에 오늘 밤 잠입해서… 너 설마 밤새 무리해서 코피라도 쏟고 기억상실이라도 온 거냐?”
지호의 말을 듣는 순간, 강윤의 머릿속을 차가운 섬광 같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기억… 내 기억의 일부가 사라졌어.’
두 번째 시간 회귀의 대가.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의 소실이었다. 그는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얻었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 스스로 수립했던 작전 계획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이제 미래를 아는 자가 아니었다. 그저 끔찍한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심만을 가진, 평범하고 무력한 소년으로 돌아와 버렸다.
“기억이 안 나… 지호야,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어떡하지? 나 진짜 어떡하면 좋아?”
강윤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전화기 너머로 지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를 들었다.
“젠장… 괜찮아. 일단 침착해. 내가 있잖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내가 어제 네가 말한 계획, 네가 준비해야 할 물건들, 하나도 빠짐없이 다 메모해뒀어. 오늘 밤 만나서 다시 얘기하자. 넌 그냥… 몸 관리나 잘하고 있어. 목소리가 말이 아니야.”
지호의 의외로 침착하고 든든한 대응 덕분에, 강윤은 간신히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 혼란을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불안감은 안개처럼 더욱 짙어져만 갔다. 자신이 세웠다는 그 계획. 그것은 과연 완벽한 계획이었을까? 기억나지 않는 미래 속에서, 자신이 놓친 치명적인 변수는 없었을까?
그날 하루는 강윤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모든 것이 미세하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은 그는 이전 시간대에서 보여주었던 냉철한 치밀함과 대담함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는 지호가 건네준 메모에 의존해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신의 대본을 잃어버린 배우처럼, 그는 모든 상황이 불안하고 두려웠다.
점심시간, 다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강윤아, 너 어디 아파? 아침부터 얼굴이 하얘. 무슨 일 있어?"
다솜의 눈에는 순수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강윤에게는 그 걱정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정체 모를 불안감과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거대한 계획에 대한 압박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니,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그는 다솜의 눈을 피하며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상처받은 다솜의 얼굴을 보며, 강윤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미래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 아주 조금씩, 하지만 분명하게 최악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밤이 되고, 두 소년은 다시 한번 비밀 연구소 앞에 섰다. 지호의 메모 덕분에 잠입은 기계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강윤은 계속해서 불안했다. 모든 것이 처음 겪는 일처럼 낯설고 두려웠다. 마치 누군가 짜놓은 함정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정말 괜찮겠지? 우리 이러다 잡히는 거 아니야? 뭔가… 뭔가 이상해.”
“걱정 마. 네가 짠 계획이야. 완벽하다고 했잖아, 너 스스로.”
지호가 그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역력했다. 리더를 잃은 작전은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중앙 통제실에 도착하여 파일 복사를 시작하는 순간, 강윤은 깨달았다. 자신이 잊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실, 그를 두 번째 시간 회귀로 이끌었던 바로 그 끔찍한 기억을.
‘다솜이…! 다솜이가 위험해! 숲으로 온다고!’
그의 머릿속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다솜의 모습이 깨진 거울 조각처럼 떠올랐다. 왜 그녀가 거기 있었지? 어떻게 그곳을 알고 찾아왔지? 세부적인 내용은 여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당장 다솜을 막아야 한다는 것.
“지호야, 계획 취소야!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해! 그리고 다솜이한테…!”
강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구소 전체에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 달랐다. 출입문이 닫히고 공격용 드론이 나타나는 대신, 통제실의 거대한 메인 스크린이 켜지며 표진석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모든 것을 조롱하는 듯한 비웃음이 가득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내 예상 시나리오보다 조금 늦었지만 말이다.”
표진석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처음부터 ‘설계’한 것처럼 보였다.
“너희가 복사해간 그 파일, 재밌게 읽었는지 모르겠구나. 물론, 내가 너희 같은 좀도둑들을 위해 일부러 흘려둔 가짜 정보들이지만.”
그의 말에 강윤과 지호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진짜 파티는 지금부터다. 너희가 여기서 소꿉놀이를 하는 동안, 너희 부모님께 손님을 좀 보냈거든.”
스크린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검은 전투복 차림의 무장 병력들에게 둘러싸여 겁에 질린 채 무릎 꿇고 있는 강윤의 부모님, 차태주와 서지윤의 모습이었다. 배경은 너무나도 익숙한 그들의 집 거실이었다.
“강윤아! 지호야! 이게 대체 무슨…!”
차태주의 충격과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두 번째 시간 회귀는 미래를 바꾸지 못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최악의 방향으로, 표진석이 완벽하게 통제하는 세계선으로 뒤틀어버린 것이다. 강윤은 깨달았다. 시간을 되돌린 대가는 단순한 기억상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상실이었다.
“이제 선택하거라, 차강윤. 네 부모를 살리고 싶으면, 얌전히 내게 와서 너의 모든 것을 바쳐라.”
표진석의 잔인하고도 지독하게 차가운 목소리가 중앙 통제실의 차가운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그 목소리에는 승리자의 오만함과, 모든 것을 자신의 게임판 위에서 내려다보는 신과 같은 냉혹함이 담겨 있었다.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강윤의 부모님은 검은 전투복 차림의 무장 병력들에게 둘러싸여 속수무책으로 공포에 질린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뿐인 아들을 향한 애끓는 걱정과, 눈앞에서 벌어지는 악몽 같은 상황에 대한 믿을 수 없다는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실신할 듯 입술을 파랗게 떨고 있었다.
“강윤아! 지호야! 이게 대체 무슨…!”
아버지 차태주의 충격과 분노에 찬 외침이 스피커를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순간, 옆에 서 있던 한 병사가 감정 없는 기계처럼, 무자비하게 개머리판으로 그의 등을 강하게 내리쳤고, 태주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빠!”
강윤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여 머리로 솟구치는 듯한 맹렬한 분노가 그의 이성을 순식간에 마비시켰다. 그는 스크린을 향해 손을 뻗어, 화면 속의 저주받을 병사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살인적인 충동에 휩싸였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 스파크가 파직거리며 튀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의 목숨이, 그의 세상 전부가 저들의 손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진정해, 강윤아! 제발! 지금 흥분하면 저 악마의 뜻대로 되는 거야!”
지호가 강윤의 어깨를 부서져라 붙잡고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공포와 절망으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아버지가 꾸민 짓이라는 사실에, 그는 영혼이 날카로운 칼날에 수천 번 난도질당하는 듯한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어때, 차강윤? 나의 새로운 창조물이여. 대답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특별히 10초 주지. 10초 안에 네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투항하지 않으면, 네 부모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거다. 바로 네 눈앞에서, 아주 고통스럽게.”
표진석은 마치 체스 게임의 마지막 체크메이트를 선언하는 것처럼, 여유롭고 잔인하게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통제실 전체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법칙처럼 울려 퍼졌다.
“10… 9… 8…”
강윤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시간을 되돌린 결과가 결국 이것이란 말인가. 다솜을 구하고 모두를 지키려 했던 그의 오만한 시도가, 결국 부모님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그는 한없이 작고 무력했다. 지독한 죄책감과 절망이 차가운 밧줄이 되어 그의 목을 강하게 졸랐다.
“7… 6…”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제발, 제발 우리 부모님은 건드리지 마세요.”
강윤이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몸에서 모든 힘과 의지가 빠져나간 듯했다. 그의 목소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패배자의 것처럼 공허하게 바닥에 흩어졌다.
“내가… 내가 갈게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제발 그것만은…”
“현명한 선택이다. 역시 넌 내 최고의 작품이야.”
표진석의 입가에 마침내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럼 지금 즉시, 모든 저항을 멈추고 중앙 복도로 걸어 나와라. 지호, 너도 함께다. 아비에게 돌아와야지.”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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