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조회 : 140 추천 : 0 글자수 : 8,037 자 2025-12-15
제16화
강윤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팔을 지호가 강하게 붙잡았다.
“안 돼, 강윤아! 절대 가면 안 돼! 가면 너도, 아저씨 아주머니도 다 죽어! 우리 아버지는 약속 같은 거 지킬 사람이 절대 아니야! 이건 함정이라고!”
지호의 눈에는 굵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얼마나 무자비하고 이기적인 인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어떡해…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고! 다른 방법이 없잖아!”
강윤이 절규했다. 그의 눈에서도 참아왔던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흘러내렸다.
“방법이… 방법이 분명 있을 거야. 아직 포기하면 안 돼! 정신 차려, 이 멍청아!”
지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의 뇌리에, 어릴 적 아버지 서재에서 호기심으로 훔쳐보았던, 복잡하기 그지없던 연구소의 비상 전력 시스템 설계도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단 하나의 약점, 아버지가 완벽주의 때문에 만들어 놓은 치명적인 약점.
“강윤아! 내 말 잘 들어. 이 연구소의 모든 시스템, 보안, 통신, 심지어 외부와의 연결망까지 전부 중앙 비상 발전소 하나에 연결되어 있어. 만약 그 발전소를 파괴하면… 모든 시스템이 최소 10분간 완벽하게 마비될 거야! 그 틈을 타서 여기서 빠져나가서 아저씨 댁으로 가는 거야! 그게 유일한 방법이야!”
“발전소는 어디 있는데?”
“지하 3층, 가장 깊숙한 곳에. 하지만 거긴… 연구소 전체에서 방어 시스템이 가장 강력한 곳이야.”
그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도박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좋아. 그렇게 하자.”
강윤의 텅 비었던 눈에 다시 희미한, 그러나 강렬한 빛이 돌아왔다. 그는 지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차가운 손의 떨림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지호야. 만약… 만약에 내가 잘못되면, 우리 부모님을… 부탁한다.”
“닥쳐! 우린 같이 사는 거야. 죽더라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거라고! 무조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짧게, 그러나 굳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크린 속,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표진석을 향해, 강윤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소리쳤다.
“미안하지만, 당신 뜻대로는 안 될 것 같네, 이 미치광이 살인자야!”
그 말과 함께, 강윤은 통제실의 모든 장비를 향해 강력한 염력의 파동을 뿜어냈다. ‘콰콰쾅!’ 하는 굉음과 함께 수십 개의 모니터와 컴퓨터 본체가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서로 부딪히며 폭발했고, 천장에서는 불꽃이 비처럼 쏟아졌다. 중앙 통제실은 순식간에 암흑과 자욱한 연기로 가득 찼다.
“지하로!”
두 사람은 연기를 뚫고 비상 계단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등 뒤로 무장 병력들이 소리치며 쫓아오는 소리와 총성이 어지럽게 울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강철로 된 방화문들이 굉음을 내며 닫혔지만, 강윤은 울부짖으며 문을 종잇장처럼 구겨버리며 길을 열었다.
지하 3층 발전소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숨 막힐 듯이 육중한 티타늄 합금 문과, 그 문을 지키는 두 대의 중무장 전투 로봇이었다. 차가운 붉은색 센서가 두 사람을 포착했다.
“침입자 제거. 침입자 제거.”
감정 없는 기계적인 음성과 함께, 로봇들의 어깨와 팔에 장착된 미니건과 플라즈마 포가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수백 발의 총알과 푸른 에너지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내가 막을게! 넌 어떻게든 문을 열 방법을 찾아!”
강윤이 자신의 앞에 거대한 반투명 방어막을 생성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실탄의 물리적인 위력은 이전의 에너지탄과는 차원이 달랐다. 방어막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강윤에게 전해졌다. 강윤은 피를 토하며, 무릎이 꺾이는 것을 간신히 버텼다.
지호는 문의 제어판을 뜯어내고,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과 전선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웠던 모든 지식과 해킹 기술을 총동원해, 지옥처럼 복잡한 보안 시스템을 해킹하려 애썼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고, 등 뒤에서는 강윤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심장을 찔러왔다.
“제발… 제발… 뚫려라!”
바로 그때, 강윤의 방어막이 ‘쨍그랑!’ 하는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총알 하나가 그의 어깨를 그대로 관통했다.
“강윤아!”
절체절명의 순간, 지호의 노트북 화면에 초록색 글씨로 ‘HACKING SUCCESS’라는 문구가 떴다. 육중한 티타늄 문이 ‘끼이이익’ 하는 굉음을 내며 아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됐어! 들어가!”
지호가 소리쳤다. 강윤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전투 로봇 한 대를 염력으로 들어 올려 다른 로봇에게 미사일처럼 집어 던졌다. 두 로봇이 뒤엉켜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틈을 타, 두 사람은 좁게 열린 문틈으로 발전소 안으로 몸을 날렸다.
발전소 중앙에는 거대한 에너지 코어가 굉음과 함께 섬뜩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저 코어를 파괴해야 해!”
강윤은 피를 흘리는 어깨를 부여잡고, 코어를 향해 자신의 남은 모든 생명력을 집중했다. 그의 몸에서 푸른빛의 에너지가 용솟음치며, 거대한 창의 형태로 변해 맹렬하게 회전하며 코어를 향해 날아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연구소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렸다. 모든 조명이 꺼지고, 세상은 빛 한 점 없는 완벽한 암흑에 잠겼다. 비상 전등조차 켜지지 않았다. 계획은 성공했다.
두 사람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치며 지상으로 빠져나왔다. 연구소는 완벽한 혼란 그 자체였다. 통신이 두절되고 전력이 차단되자, 정예라던 무장 병력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틈을 타, 연구소 외부에 주차되어 있던 차 한 대를 훔쳐 타고 미친 듯이 그들의 집으로 향했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제발!”
지호가 엑셀을 끝까지 밟으며 절규하듯 말했다. 강윤은 피를 흘리는 어깨를 부여잡고, 창밖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제발, 부모님이 무사해야 했다. 이번에야말로 미래를 바꿀 수 있어야 했다.
마침내 익숙한 동네에 접어들었을 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밤하늘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는 거대한 붉은 화염이었다.
이전 시간대와 똑같이, 그의 소중한 기억이 담긴 집은 거대한 화마가 되어 밤하늘을 핏빛으로 태우고 있었다.
“안 돼… 왜… 왜 또 똑같은 거야…!”
강윤의 목소리가 절망으로 갈라졌다. 기억을 잃었어도, 그의 몸과 영혼은 이 끔찍한 광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렸지만,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이 더 최악이 되어버렸다.
차량이 미끄러지듯 집 앞에 멈춰 서는 순간, 불타는 집의 현관문이 부서지며 두 사람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강윤의 부모님, 차태주와 서지윤이었다. 그들의 등 뒤로, 집 전체가 굉음과 함께 폭발하며 무너져 내렸다.
“엄마! 아빠!”
강윤이 차에서 뛰어내리며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보았다. 두 사람의 몸에, 가슴팍에, 선명하게 박혀 있는 총상과 그 상처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표진석의 부하들은 전력이 차단되기 직전, 마지막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한 것이었다.
“강윤아… 우리 아들… 도망쳐… 어서…”
차태주가 피를 토하며, 아들을 향해 마지막 힘을 다해 말했다. 서지윤은 아들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어 주려는 듯 힘겹게 손을 뻗다가, 그대로 힘없이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으로 쓰러졌다.
“엄마… 아빠… 안 돼요… 제발… 제발 눈 좀 떠보세요!”
강윤은 무너져 내리는 부모님의 몸을 끌어안고 어린아이처럼 오열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의 두 번째 기회는, 결국 똑같은, 아니, 그의 눈앞에서 벌어졌기에 더욱 잔인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그의 품에서, 사랑하는 부모님의 몸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의 등 뒤, 차 안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지호는 핸들을 부서져라 내리치며 짐승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아버지가, 결국 이 모든 비극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그는 영혼까지 파괴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밤하늘은 더 이상 별들이 반짝이는 검푸른 밤하늘이 아니었다. 거대한 붓으로 칠해 놓은 듯, 인간의 광기와 파멸만이 새겨진 온통 핏빛이었다. 강윤의 집은 이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거대한 화마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격렬하게 타오르는 집의 뼈대가 녹아내리며 뿜어내는 섬뜩한 화염은, 마치 지옥의 심장이 펄떡이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수십 미터 높이로 솟구쳤다. 그 맹렬한 불길은 세상의 모든 공기를 집어삼키고, 오직 파괴의 굉음만을 남겼다.
그리고 그 붉은 불빛 위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경찰차와 구급차의 새하얀 섬광과 광란처럼 회전하는 붉은 경광등이 뒤섞였다. 이 상반된 색채들이 만들어낸 세상은, 신이 버린 땅, 거대한 지옥의 아가리처럼 붉고 소란스러웠다. 불길한 굉음과 사람들의 비명이 뒤섞여 귀를 찢을 듯한 아비규환 속에서, 시간의 흐름은 강윤에게만 멈춘 듯 느려졌다. 모든 소음은 아득히 멀어졌고, 오직 그의 극심한 절망만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강윤은 그 지옥의 중심에서, 검게 그을린 잔해와 눅눅한 잿더미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서서히, 너무나도 싸늘하게 식어가는 부모님의 몸을 두 팔로 끌어안고 있었다. 아버지의 몸은 폭발의 충격과 화염으로 이미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피부는 검게 변해 있었고, 강윤이 기억하던 그 단단하고 투박한 체온은 이제 차가운 돌덩이처럼 느껴졌다. 어머니는 그나마 온전했지만, 그 얼굴은 고통 대신 놀라움으로 굳어 있었다. 그녀의 눈은 반쯤 열린 채 하늘을 향하고 있었는데, 마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아들을 찾는 듯한 형상이었다.
“엄마… 아빠… 안 돼요… 제발… 눈 좀 떠보세요… 제발…”
그의 목소리는 뜨거운 불 속에서 끓는 쇳물처럼 거칠고 갈라져 나왔다. 그는 부모님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미친 듯이 울부짖었지만, 두 사람은 미동도 없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그들의 육신은 강윤의 품속에서 무겁고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의 온몸은 부모님의 피와 잿가루, 그리고 자신의 눈물로 엉망이 되어갔다.
아버지의 마지막 남은 희미한 온기와 어머니의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따스했던 손길이, 그의 손끝에서 차가운 모래처럼 속절없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강윤은 그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그들을 꽉 끌어안았다. 하지만 붙잡을수록, 그 차가움은 더욱 선명하게 그의 영혼을 찔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숨 쉬며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던, 따뜻한 밥을 먹자며 웃어주었던, 그의 세상의 전부였던 두 존재가, 그의 눈앞에서 차가운 육신이 되어 재로 변해가는 집과 함께 소멸해가고 있었다. 이 비현실적인 공포와 상실감은 그의 이성을 한 조각, 한 조각 찢어발기고 있었다. 이 잔인한 현실은 차강윤이라는 소년에게 내려진 가장 끔찍한 사형 선고였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어머니의 뺨에 자신의 뺨을 거칠게 비볐다. 늘 따뜻했던, 세상에서 가장 포근했던 그 온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차가운 대리석 같은 감촉만이 그의 모든 희망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빗물과 뒤섞인 피 냄새, 살과 머리카락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역한 냄새였지만, 강윤은 그 냄새조차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지독한 냄새만이 부모님이 '여기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감각과 의식은 오직 눈앞의 두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아빠… 일어나 봐요. 나한테 도망치라고 했잖아요… 그럼 아빠도 같이 도망쳤어야지… 왜 혼자 남았어요… 나를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이제 누가 나를 지켜줘요…”
기억이 쓰나미처럼 그의 의식을 덮쳤다. 열 살 때, 자전거를 처음 가르쳐주다 넘어진 자신을 일으켜주던 투박하지만 커다란 아버지의 손. 그 손에 잡혔던 강윤의 작은 손의 감촉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중학교 시절, 시험을 망친 날 말없이 어깨를 두드리며 함께 밤길을 걸어주던 든든한 등. 그 넓고 믿음직했던 등이 이제는 싸늘하게 식어 그의 무릎에 기대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만질 수 없는 과거의 환영이 되어버렸다. 그는 아버지를 붙들고 서럽게 오열했다.
“엄마… 오늘 저녁에 김치찌개 해준다고 했잖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 알잖아… 일어나서 해줘야지… 엄마… 나 배고파요…”
그의 귓가에 어머니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리는 듯했다. ‘우리 아들, 다 컸네. 이제 엄마보다 키도 크고.’ ‘강윤아, 언제나 엄마 아빠는 네 편이야. 사랑한다, 아들아.’ 그 사랑한다는 말이,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저주가 되어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세상에 홀로 남겨지는 것. 그것은 단순한 죽음보다 더한, 영원히 고통받는 형벌이었다. 그는 부모님과의 소중했던 기억의 무게에 짓눌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 지옥에서 단 한 발짝 떨어진 곳, 길 건너 어둠 속에 주차된 차 안. 지호는 운전대를 쥔 채 몸을 좌우로 흔들며 그 모든 광경을 보며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땀과 눈물로 젖은 그의 얼굴은 극도의 공포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려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차마 차에서 내릴 수 없었다.
친구의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비극을 만들어낸 극악무도한 악행의 원흉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 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죄책감은 이미 그의 영혼을 으스러뜨리고 있었다. 마치 투명한 쇠사슬이 그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그의 발목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철옹성 같은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가야 해! 저곳에 가서 강윤을 안아줘야 해! 친구잖아!' 이성이 필사적으로 그에게 외쳤다.
'가지 마. 네가 가면 강윤은 네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떠올릴 거야. 너는 살인자의 아들이다. 너는 그를 위로할 자격이 없어.' 죄책감이 그의 목소리를 짓눌렀다.
그는 지금 저곳에 갈 자격이 없었다. 위로의 말을 건넬 자격조차 없었다. 그는 그저 무력하게, 자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악행의 결과를 지켜보는 비겁한 공범자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그리고 이 상황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처럼,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혐오스러운 존재라고 스스로를 저주했다. 핸들을 쥔 손은 핏기가 사라져 하얗게 질릴 정도로 떨렸고, 입에서는 의미 없는 신음과 함께 헛구역질만이 새어 나왔다. 그는 차 문을 열고 싶었지만, 그의 몸은 족쇄에 묶인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겁함이 그를 지배했다.
주변은 완벽한 혼돈 그 자체였다. 갑작스러운 폭발과 화재에 놀란 이웃 주민들의 공포에 질린 비명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케스트라의 불협화음 같았다. 다급하게 무전을 주고받으며 외치는 소방관들의 고함,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는 경찰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섞여 난장판을 이루었다.
하지만 강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세계는 완벽한 진공의 침묵에 갇혀버렸다. 그 침묵 속에서 오직 부모님의 멈춰버린 심장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리는 환영만이 그를 맴돌았다.
그는 부모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돌아가셨을 텐데도, 두 분의 얼굴은 놀랍게도 평온했다. 마치 기나긴 악몽에서 벗어나 영원한 잠에 빠진 것처럼. 그 잔인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평온함이, 강윤의 마음을 마지막 한 조각까지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왜 평온한가! 왜!' 그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분노. 슬픔. 절망. 죄책감. 자기혐오. 배신감.
그 모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어둡고 부정적인 감정의 핵이 그의 작은 몸 안에서 임계점을 넘어섰다. 그것은 마치 핵분열과도 같은 끔찍한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그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눈물샘이 완전히 말라버렸다. 그 자리에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불태워버릴 듯한, 차갑고 텅 빈 증오와 순수한 광기만이 얼음처럼 서렸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파괴를 갈망하는 우주의 공허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영혼이 원자 단위로 분해되는 듯한 처절한 절규가 그의 목에서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에서 푸른빛의 에너지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로 폭발했다. 그것은 더 이상 집중된 기둥이나 한정된 파동의 형태가 아니었다. 거대한 돔 형태의 순수한 에너지 장막이 그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 장막은 단순히 충격을 가하는 것을 넘어, 주변의 모든 것을 에너지의 심해 속으로 집어삼키고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그의 분노는 이제 물리적인 힘이 되어 세상을 찢어발겼다.
강윤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팔을 지호가 강하게 붙잡았다.
“안 돼, 강윤아! 절대 가면 안 돼! 가면 너도, 아저씨 아주머니도 다 죽어! 우리 아버지는 약속 같은 거 지킬 사람이 절대 아니야! 이건 함정이라고!”
지호의 눈에는 굵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얼마나 무자비하고 이기적인 인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어떡해…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고! 다른 방법이 없잖아!”
강윤이 절규했다. 그의 눈에서도 참아왔던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흘러내렸다.
“방법이… 방법이 분명 있을 거야. 아직 포기하면 안 돼! 정신 차려, 이 멍청아!”
지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의 뇌리에, 어릴 적 아버지 서재에서 호기심으로 훔쳐보았던, 복잡하기 그지없던 연구소의 비상 전력 시스템 설계도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단 하나의 약점, 아버지가 완벽주의 때문에 만들어 놓은 치명적인 약점.
“강윤아! 내 말 잘 들어. 이 연구소의 모든 시스템, 보안, 통신, 심지어 외부와의 연결망까지 전부 중앙 비상 발전소 하나에 연결되어 있어. 만약 그 발전소를 파괴하면… 모든 시스템이 최소 10분간 완벽하게 마비될 거야! 그 틈을 타서 여기서 빠져나가서 아저씨 댁으로 가는 거야! 그게 유일한 방법이야!”
“발전소는 어디 있는데?”
“지하 3층, 가장 깊숙한 곳에. 하지만 거긴… 연구소 전체에서 방어 시스템이 가장 강력한 곳이야.”
그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도박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좋아. 그렇게 하자.”
강윤의 텅 비었던 눈에 다시 희미한, 그러나 강렬한 빛이 돌아왔다. 그는 지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차가운 손의 떨림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지호야. 만약… 만약에 내가 잘못되면, 우리 부모님을… 부탁한다.”
“닥쳐! 우린 같이 사는 거야. 죽더라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거라고! 무조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짧게, 그러나 굳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크린 속,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표진석을 향해, 강윤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소리쳤다.
“미안하지만, 당신 뜻대로는 안 될 것 같네, 이 미치광이 살인자야!”
그 말과 함께, 강윤은 통제실의 모든 장비를 향해 강력한 염력의 파동을 뿜어냈다. ‘콰콰쾅!’ 하는 굉음과 함께 수십 개의 모니터와 컴퓨터 본체가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서로 부딪히며 폭발했고, 천장에서는 불꽃이 비처럼 쏟아졌다. 중앙 통제실은 순식간에 암흑과 자욱한 연기로 가득 찼다.
“지하로!”
두 사람은 연기를 뚫고 비상 계단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등 뒤로 무장 병력들이 소리치며 쫓아오는 소리와 총성이 어지럽게 울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강철로 된 방화문들이 굉음을 내며 닫혔지만, 강윤은 울부짖으며 문을 종잇장처럼 구겨버리며 길을 열었다.
지하 3층 발전소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숨 막힐 듯이 육중한 티타늄 합금 문과, 그 문을 지키는 두 대의 중무장 전투 로봇이었다. 차가운 붉은색 센서가 두 사람을 포착했다.
“침입자 제거. 침입자 제거.”
감정 없는 기계적인 음성과 함께, 로봇들의 어깨와 팔에 장착된 미니건과 플라즈마 포가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수백 발의 총알과 푸른 에너지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내가 막을게! 넌 어떻게든 문을 열 방법을 찾아!”
강윤이 자신의 앞에 거대한 반투명 방어막을 생성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실탄의 물리적인 위력은 이전의 에너지탄과는 차원이 달랐다. 방어막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강윤에게 전해졌다. 강윤은 피를 토하며, 무릎이 꺾이는 것을 간신히 버텼다.
지호는 문의 제어판을 뜯어내고,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과 전선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웠던 모든 지식과 해킹 기술을 총동원해, 지옥처럼 복잡한 보안 시스템을 해킹하려 애썼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고, 등 뒤에서는 강윤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심장을 찔러왔다.
“제발… 제발… 뚫려라!”
바로 그때, 강윤의 방어막이 ‘쨍그랑!’ 하는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총알 하나가 그의 어깨를 그대로 관통했다.
“강윤아!”
절체절명의 순간, 지호의 노트북 화면에 초록색 글씨로 ‘HACKING SUCCESS’라는 문구가 떴다. 육중한 티타늄 문이 ‘끼이이익’ 하는 굉음을 내며 아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됐어! 들어가!”
지호가 소리쳤다. 강윤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전투 로봇 한 대를 염력으로 들어 올려 다른 로봇에게 미사일처럼 집어 던졌다. 두 로봇이 뒤엉켜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틈을 타, 두 사람은 좁게 열린 문틈으로 발전소 안으로 몸을 날렸다.
발전소 중앙에는 거대한 에너지 코어가 굉음과 함께 섬뜩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저 코어를 파괴해야 해!”
강윤은 피를 흘리는 어깨를 부여잡고, 코어를 향해 자신의 남은 모든 생명력을 집중했다. 그의 몸에서 푸른빛의 에너지가 용솟음치며, 거대한 창의 형태로 변해 맹렬하게 회전하며 코어를 향해 날아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연구소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렸다. 모든 조명이 꺼지고, 세상은 빛 한 점 없는 완벽한 암흑에 잠겼다. 비상 전등조차 켜지지 않았다. 계획은 성공했다.
두 사람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치며 지상으로 빠져나왔다. 연구소는 완벽한 혼란 그 자체였다. 통신이 두절되고 전력이 차단되자, 정예라던 무장 병력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틈을 타, 연구소 외부에 주차되어 있던 차 한 대를 훔쳐 타고 미친 듯이 그들의 집으로 향했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제발!”
지호가 엑셀을 끝까지 밟으며 절규하듯 말했다. 강윤은 피를 흘리는 어깨를 부여잡고, 창밖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제발, 부모님이 무사해야 했다. 이번에야말로 미래를 바꿀 수 있어야 했다.
마침내 익숙한 동네에 접어들었을 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밤하늘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는 거대한 붉은 화염이었다.
이전 시간대와 똑같이, 그의 소중한 기억이 담긴 집은 거대한 화마가 되어 밤하늘을 핏빛으로 태우고 있었다.
“안 돼… 왜… 왜 또 똑같은 거야…!”
강윤의 목소리가 절망으로 갈라졌다. 기억을 잃었어도, 그의 몸과 영혼은 이 끔찍한 광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렸지만,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이 더 최악이 되어버렸다.
차량이 미끄러지듯 집 앞에 멈춰 서는 순간, 불타는 집의 현관문이 부서지며 두 사람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강윤의 부모님, 차태주와 서지윤이었다. 그들의 등 뒤로, 집 전체가 굉음과 함께 폭발하며 무너져 내렸다.
“엄마! 아빠!”
강윤이 차에서 뛰어내리며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보았다. 두 사람의 몸에, 가슴팍에, 선명하게 박혀 있는 총상과 그 상처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표진석의 부하들은 전력이 차단되기 직전, 마지막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한 것이었다.
“강윤아… 우리 아들… 도망쳐… 어서…”
차태주가 피를 토하며, 아들을 향해 마지막 힘을 다해 말했다. 서지윤은 아들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어 주려는 듯 힘겹게 손을 뻗다가, 그대로 힘없이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으로 쓰러졌다.
“엄마… 아빠… 안 돼요… 제발… 제발 눈 좀 떠보세요!”
강윤은 무너져 내리는 부모님의 몸을 끌어안고 어린아이처럼 오열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의 두 번째 기회는, 결국 똑같은, 아니, 그의 눈앞에서 벌어졌기에 더욱 잔인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그의 품에서, 사랑하는 부모님의 몸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의 등 뒤, 차 안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지호는 핸들을 부서져라 내리치며 짐승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아버지가, 결국 이 모든 비극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그는 영혼까지 파괴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밤하늘은 더 이상 별들이 반짝이는 검푸른 밤하늘이 아니었다. 거대한 붓으로 칠해 놓은 듯, 인간의 광기와 파멸만이 새겨진 온통 핏빛이었다. 강윤의 집은 이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거대한 화마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격렬하게 타오르는 집의 뼈대가 녹아내리며 뿜어내는 섬뜩한 화염은, 마치 지옥의 심장이 펄떡이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수십 미터 높이로 솟구쳤다. 그 맹렬한 불길은 세상의 모든 공기를 집어삼키고, 오직 파괴의 굉음만을 남겼다.
그리고 그 붉은 불빛 위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경찰차와 구급차의 새하얀 섬광과 광란처럼 회전하는 붉은 경광등이 뒤섞였다. 이 상반된 색채들이 만들어낸 세상은, 신이 버린 땅, 거대한 지옥의 아가리처럼 붉고 소란스러웠다. 불길한 굉음과 사람들의 비명이 뒤섞여 귀를 찢을 듯한 아비규환 속에서, 시간의 흐름은 강윤에게만 멈춘 듯 느려졌다. 모든 소음은 아득히 멀어졌고, 오직 그의 극심한 절망만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강윤은 그 지옥의 중심에서, 검게 그을린 잔해와 눅눅한 잿더미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서서히, 너무나도 싸늘하게 식어가는 부모님의 몸을 두 팔로 끌어안고 있었다. 아버지의 몸은 폭발의 충격과 화염으로 이미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피부는 검게 변해 있었고, 강윤이 기억하던 그 단단하고 투박한 체온은 이제 차가운 돌덩이처럼 느껴졌다. 어머니는 그나마 온전했지만, 그 얼굴은 고통 대신 놀라움으로 굳어 있었다. 그녀의 눈은 반쯤 열린 채 하늘을 향하고 있었는데, 마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아들을 찾는 듯한 형상이었다.
“엄마… 아빠… 안 돼요… 제발… 눈 좀 떠보세요… 제발…”
그의 목소리는 뜨거운 불 속에서 끓는 쇳물처럼 거칠고 갈라져 나왔다. 그는 부모님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미친 듯이 울부짖었지만, 두 사람은 미동도 없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그들의 육신은 강윤의 품속에서 무겁고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의 온몸은 부모님의 피와 잿가루, 그리고 자신의 눈물로 엉망이 되어갔다.
아버지의 마지막 남은 희미한 온기와 어머니의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따스했던 손길이, 그의 손끝에서 차가운 모래처럼 속절없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강윤은 그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그들을 꽉 끌어안았다. 하지만 붙잡을수록, 그 차가움은 더욱 선명하게 그의 영혼을 찔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숨 쉬며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던, 따뜻한 밥을 먹자며 웃어주었던, 그의 세상의 전부였던 두 존재가, 그의 눈앞에서 차가운 육신이 되어 재로 변해가는 집과 함께 소멸해가고 있었다. 이 비현실적인 공포와 상실감은 그의 이성을 한 조각, 한 조각 찢어발기고 있었다. 이 잔인한 현실은 차강윤이라는 소년에게 내려진 가장 끔찍한 사형 선고였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어머니의 뺨에 자신의 뺨을 거칠게 비볐다. 늘 따뜻했던, 세상에서 가장 포근했던 그 온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차가운 대리석 같은 감촉만이 그의 모든 희망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빗물과 뒤섞인 피 냄새, 살과 머리카락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역한 냄새였지만, 강윤은 그 냄새조차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지독한 냄새만이 부모님이 '여기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감각과 의식은 오직 눈앞의 두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아빠… 일어나 봐요. 나한테 도망치라고 했잖아요… 그럼 아빠도 같이 도망쳤어야지… 왜 혼자 남았어요… 나를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이제 누가 나를 지켜줘요…”
기억이 쓰나미처럼 그의 의식을 덮쳤다. 열 살 때, 자전거를 처음 가르쳐주다 넘어진 자신을 일으켜주던 투박하지만 커다란 아버지의 손. 그 손에 잡혔던 강윤의 작은 손의 감촉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중학교 시절, 시험을 망친 날 말없이 어깨를 두드리며 함께 밤길을 걸어주던 든든한 등. 그 넓고 믿음직했던 등이 이제는 싸늘하게 식어 그의 무릎에 기대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만질 수 없는 과거의 환영이 되어버렸다. 그는 아버지를 붙들고 서럽게 오열했다.
“엄마… 오늘 저녁에 김치찌개 해준다고 했잖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 알잖아… 일어나서 해줘야지… 엄마… 나 배고파요…”
그의 귓가에 어머니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리는 듯했다. ‘우리 아들, 다 컸네. 이제 엄마보다 키도 크고.’ ‘강윤아, 언제나 엄마 아빠는 네 편이야. 사랑한다, 아들아.’ 그 사랑한다는 말이,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저주가 되어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세상에 홀로 남겨지는 것. 그것은 단순한 죽음보다 더한, 영원히 고통받는 형벌이었다. 그는 부모님과의 소중했던 기억의 무게에 짓눌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 지옥에서 단 한 발짝 떨어진 곳, 길 건너 어둠 속에 주차된 차 안. 지호는 운전대를 쥔 채 몸을 좌우로 흔들며 그 모든 광경을 보며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땀과 눈물로 젖은 그의 얼굴은 극도의 공포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려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차마 차에서 내릴 수 없었다.
친구의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비극을 만들어낸 극악무도한 악행의 원흉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 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죄책감은 이미 그의 영혼을 으스러뜨리고 있었다. 마치 투명한 쇠사슬이 그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그의 발목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철옹성 같은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가야 해! 저곳에 가서 강윤을 안아줘야 해! 친구잖아!' 이성이 필사적으로 그에게 외쳤다.
'가지 마. 네가 가면 강윤은 네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떠올릴 거야. 너는 살인자의 아들이다. 너는 그를 위로할 자격이 없어.' 죄책감이 그의 목소리를 짓눌렀다.
그는 지금 저곳에 갈 자격이 없었다. 위로의 말을 건넬 자격조차 없었다. 그는 그저 무력하게, 자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악행의 결과를 지켜보는 비겁한 공범자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그리고 이 상황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처럼,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혐오스러운 존재라고 스스로를 저주했다. 핸들을 쥔 손은 핏기가 사라져 하얗게 질릴 정도로 떨렸고, 입에서는 의미 없는 신음과 함께 헛구역질만이 새어 나왔다. 그는 차 문을 열고 싶었지만, 그의 몸은 족쇄에 묶인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겁함이 그를 지배했다.
주변은 완벽한 혼돈 그 자체였다. 갑작스러운 폭발과 화재에 놀란 이웃 주민들의 공포에 질린 비명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케스트라의 불협화음 같았다. 다급하게 무전을 주고받으며 외치는 소방관들의 고함,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는 경찰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섞여 난장판을 이루었다.
하지만 강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세계는 완벽한 진공의 침묵에 갇혀버렸다. 그 침묵 속에서 오직 부모님의 멈춰버린 심장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리는 환영만이 그를 맴돌았다.
그는 부모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돌아가셨을 텐데도, 두 분의 얼굴은 놀랍게도 평온했다. 마치 기나긴 악몽에서 벗어나 영원한 잠에 빠진 것처럼. 그 잔인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평온함이, 강윤의 마음을 마지막 한 조각까지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왜 평온한가! 왜!' 그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분노. 슬픔. 절망. 죄책감. 자기혐오. 배신감.
그 모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어둡고 부정적인 감정의 핵이 그의 작은 몸 안에서 임계점을 넘어섰다. 그것은 마치 핵분열과도 같은 끔찍한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그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눈물샘이 완전히 말라버렸다. 그 자리에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불태워버릴 듯한, 차갑고 텅 빈 증오와 순수한 광기만이 얼음처럼 서렸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파괴를 갈망하는 우주의 공허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영혼이 원자 단위로 분해되는 듯한 처절한 절규가 그의 목에서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에서 푸른빛의 에너지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로 폭발했다. 그것은 더 이상 집중된 기둥이나 한정된 파동의 형태가 아니었다. 거대한 돔 형태의 순수한 에너지 장막이 그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 장막은 단순히 충격을 가하는 것을 넘어, 주변의 모든 것을 에너지의 심해 속으로 집어삼키고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그의 분노는 이제 물리적인 힘이 되어 세상을 찢어발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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