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조회 : 103 추천 : 0 글자수 : 8,785 자 2025-09-01
프롤로그
세상은 숨을 죽였다. 칠흑 같은 어둠이 대지를 삼킨 시각, 창밖은 신의 분노라도 산 듯 미친듯이 번개를 토해냈다. ‘쿠르릉-’ 하는 불길한 천둥소리는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괴수가 내뱉는 위협적인 포효처럼 대기를 진동시켰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바람이 견고한 콘크리트 외벽을 할퀴는 소리는, 고립된 요새를 공격하는 보이지 않는 적들의 아우성 같았다.
도심의 현란한 불빛이 결코 닿지 않는 깊고 깊은 산중. 이곳은 지도에도, 위성사진에도 존재하지 않는 땅, 대한민국 국방부 산하 최첨단 비밀 생물공학 연구소 ‘네오젠(Neogen)’의 심장이었다. 인간의 오만함이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빚어낸,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금단의 성역이었다. 외부로는 군사 통제 구역이라는 육중한 철조망과 수십 개의 감시탑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 안쪽으로는 최첨단 보안 시스템과 중무장한 경비 병력이 24시간 철통같은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국가 1급 기밀이었으며, 그 내용은 대통령조차 일부만 열람할 수 있을 정도의 극비 사항이었다.
연구소 내부는 바깥의 광란과는 대조적으로 병적일 만큼 완벽한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길게 뻗은 복도, 차가운 금속 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순백의 멸균등만이 위태롭게 깜박이며 기계적인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공기 중에는 오존 소독제의 싸한 냄새와 정체 모를 화학 약품 냄새가 희미하게 떠다녔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된 공간. 온도, 습도, 기압, 심지어 공기 중의 미세먼지 입자 하나까지 중앙 통제실의 거대한 컴퓨터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인위적인 완벽함은, 아주 작은 균열 하나만으로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롭고 아슬아슬했다.
제7실험실. 네오젠 연구소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보안이 삼엄한 곳. 그 안에는 두 명의 연구원이 있었다.
한쪽에서는 흰 가운을 입은 남자, 차태주가 컴퓨터 모니터 속 빼곡한 데이터를 향해 병적인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는 며칠 밤을 꼬박 새운 극심한 피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광기에 가까운 형형한 빛을 잃지 않았다. 화면을 가득 채운 복잡한 염기서열과 단백질 구조식, 그리고 알 수 없는 기호들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암호의 나열에 불과했지만, 그에게는 세상의 근원을 파헤치는 신성한 경전과도 같았다. 그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춤추듯 움직였고, 그의 뇌는 슈퍼컴퓨터처럼 수백만 개의 변수를 동시에 계산하고 있었다.
그의 옆, 투명한 원통형 보관장치 ‘크래들(Cradle)’ 앞에 선 것은 여자 연구원 서지윤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짙은 다크서클로 인해 절망처럼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장치 안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며 유영하는 푸른빛 액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영롱하면서도 불길한 빛. 살아있는 생물처럼 미세하게,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파동하는 저것은 과연 인류의 희망인가, 혹은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겨진 마지막 재앙의 전조인가. 그녀는 저 액체가 단순한 화합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학습하고, 진화하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생명’이었다.
고요를 깬 것은 차태주의 목소리였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완벽하게 방음 처리된 밀폐된 공간 안에서는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지윤 씨, 수치가… 안정화됐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과 함께 억누르고 있던 희열이 담겨 있었다. 태주는 스크롤을 내려 모니터 속 복잡한 그래프의 마지막 지점을 가리켰다. 지난 72시간 동안 혼돈처럼 미친듯이 날뛰던 생체 에너지 곡선이, 마침내 평온하고 아름다운 수평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던 실험의 성공을 의미하는, 과학자에게는 신의 계시와도 같은 그래프였다.
“이 샘플… ‘제노-7’은 완벽하게 살아있습니다.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 속도, 자기 복제 능력, 에너지 변환 효율… 모든 데이터가 이론치를 뛰어넘었어요. 이건… 이건 기적이야.”
서지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기쁨이 아닌, 깊은 불안과 회의감으로 잠식되어 있었다.
“정말 이걸 계속해야 할까요, 선배? 국방부의 최종 목표는 이걸 ‘인간 병기’ 프로젝트에 쓰는 거잖아요. 어제 상부에서 내려온 보고서 보셨어요? 그들은 제노-7을 인간에게 주입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슈퍼 솔저를 만들 계획이에요. 사람을… 사람을 살아있는 무기로 만들겠다는 거잖아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연구자로서의 윤리의식과 인간으로서의 근원적인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그녀와 태주는 본래 난치병 치료를 위한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연구하던 순수한 과학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연구 성과가 국방부의 눈에 띄면서, 프로젝트는 점차 그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끔찍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가 연구를 멈춘다고 해도… 이미 너무 늦었어요.”
차태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목소리는 냉정하리만큼 차갑고 현실적이었다.
“이 데이터가 상부에 보고된 이상, 프로젝트는 절대 중단되지 않아. 우리가 거부하면 다른 팀이, 그것도 아니면 더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과학자들이 이 연구를 이어받겠지. 그들은 제노-7의 힘을 120% 끌어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거야. 수많은 비공식 임상실험, 무고한 희생자들이 생겨나겠지.”
그는 크래들 속 푸른 액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단순한 과학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의 자식을 바라보는 창조주처럼, 애정과 책임감, 그리고 두려움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우리 손으로 끝낸다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최소한의 인간성을 이 안에 심어놓을 순 있어요. 통제 불가능한 파괴의 괴물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고 소중한 것을 수호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위이이이잉-!
실험실 천장이 낮게 진동하며 고막을 찢는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순백의 멸균등이 일제히 꺼지고, 시야를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는 비상등이 광적으로 깜박이기 시작했다. 연구소 전체가 거대한 심장처럼, 공포의 박동을 시작했다. 스피커에서 터져 나온 기계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절망을 선고했다.
“경고. 경고. 미상 무장세력 침입. 코드 레드. 모든 연구원은 즉시 지정된 대피소로 대피하십시오. 반복합니다. 미상 무장세력 침입…”
서지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입술이 바싹 말라붙었고,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세차게 뛰었다.
“무장세력…? 어떻게…! 연구소의 위치는 S급 기밀이었잖아요! 외부에서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곳인데!”
“누군가 내부에서 정보를 흘렸거나, 혹은 우리와 동급의 기술력을 가진 세력이 있다는 뜻이겠지.”
차태주는 혼란 속에서도 얼음처럼 침착했다. 그의 두뇌는 이미 최악의 시나리오를 수백, 수천 가지로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목표는 단 하나, ‘제노-7’ 샘플을 노리는 겁니다. 저들이 저걸 손에 넣으면…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거야.”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수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맞춰온 호흡처럼,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차태주는 크래들에 연결된 복잡한 생명 유지 장치와 데이터 케이블을 분리했고, 서지윤은 휴대용 저온 냉각 시스템을 챙겼다. 샘플을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한 마지막 절차였다.
그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둔탁한 총성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단순한 권총 소리가 아니었다. 두꺼운 방탄 벽을 뚫고 공기를 찢는, 군용 소총의 파열음이었다. 연구소 경비 병력들의 비명과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가 뒤섞여, 평화롭던 금단의 성역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쾅-!
마침내, 두께 10cm의 강화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제7실험실의 문이 거대한 폭발과 함께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안으로 날아들었다. 매캐한 화약 연기와 파편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 것은 검은 전투복 차림의 남자들이었다. 어둠보다 더 짙은 검은색, 얼굴을 완전히 가린 방독면과 전술 가면. 그들의 복장은 정규 군대의 그것과 확연히 달랐다. 제각각인 무장과, 대형을 무시한 채 오직 효율적인 살상만을 위해 움직이는 야수 같은 분위기는, 그들이 국가나 이념이 아닌 오직 돈으로 움직이는, 고도로 훈련된 용병 집단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가면 너머로, 기계적으로 변조된 리더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소음기가 달린 총구를 정확히 차태주의 미간에 겨누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완벽한 조준이었다.
“샘플을 넘겨라. 저항하면 죽는다. 5초 주지. 5…”
서지윤은 극심한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눈이 애원하듯 태주에게 향했다.
“태주 씨…”
차태주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을 겨눈 총구가 아닌, 용병 리더의 가면 속 눈을,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거대하고 탐욕스러운 어둠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도, 공포도 아닌, 모든 것을 체념한 자의 차가운 결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걸… 이대로 빼앗기면, 수백, 수천 명이 죽어요.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는 보란 듯이, 천천히 손을 움직여 휴대용 보관장치의 마지막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딸깍’하는 작은 소리가 죽음의 정적을 갈랐다. 그 소리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서지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입술이 바싹 말라붙었고,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세차게 뛰었다. 눈앞의 현실이 마치 잘 만들어진 악몽처럼 느껴졌다. 어둠보다 더 짙은 검은색 전투복,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기계적인 가면, 그리고 자신들의 심장을 꿰뚫을 듯 겨눠진 차가운 총구. 평생을 무균실 안에서 현미경과 데이터만 들여다보던 그녀에게, 이 폭력적이고 원초적인 상황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였다.
“무장세력…? 어떻게…! 연구소의 위치는 S급 국가 기밀이었잖아요! 외부에서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곳인데!”
“누군가 내부에서 정보를 흘렸거나, 혹은 우리와 동급의 기술력을 가진 세력이 있다는 뜻이겠지.”
차태주는 혼란 속에서도 얼음처럼 침착했다. 그의 두뇌는 이미 최악의 시나리오를 수백, 수천 가지로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시뮬레이션의 결과도 ‘생존’이라는 단어를 보여주지 않았다.
“목표는 단 하나, ‘제노-7’ 샘플을 노리는 겁니다. 저들이 저걸 손에 넣으면…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거야.”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수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맞춰온 호흡처럼, 그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리고 절망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차태주는 크래들에 연결된 복잡한 생명 유지 장치와 데이터 케이블을 분리했고, 서지윤은 휴대용 저온 냉각 시스템을 챙겼다. 샘플을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한, 어쩌면 아무 의미 없을지도 모를 마지막 절차였다.
그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둔탁한 총성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단순한 권총 소리가 아니었다. 두꺼운 방탄 벽을 뚫고 공기를 찢는, 군용 소총의 파열음이었다. 연구소 경비 병력들의 짧은 비명과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가 뒤섞여, 평화롭던 금단의 성역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쾅-!
마침내, 두께 10cm의 강화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제7실험실의 문이 거대한 폭발과 함께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안으로 날아들었다. 매캐한 화약 연기와 파편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 것은 검은 전투복 차림의 남자들이었다. 어둠보다 더 짙은 검은색, 얼굴을 완전히 가린 방독면과 전술 가면. 그들의 복장은 정규 군대의 그것과 확연히 달랐다. 제각각인 무장과, 대형을 무시한 채 오직 효율적인 살상만을 위해 움직이는 야수 같은 분위기는, 그들이 국가나 이념이 아닌 오직 돈으로 움직이는, 고도로 훈련된 용병 집단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가면 너머로, 기계적으로 변조된 리더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소음기가 달린 총구를 정확히 차태주의 미간에 겨누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완벽한 조준이었다.
“샘플을 넘겨라. 저항하면 죽는다. 5초 주지. 5…”
서지윤은 극심한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눈이 애원하듯 태주에게 향했다.
“태주 씨…”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떨렸다.
차태주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을 겨눈 총구가 아닌, 용병 리더의 가면 속 눈을,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거대하고 탐욕스러운 어둠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도, 공포도 아닌, 모든 것을 체념한 자의 차가운 결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걸… 이대로 빼앗기면, 수백, 수천 명이 죽어요.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는 보란 듯이, 천천히 손을 움직여 휴대용 보관장치의 마지막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딸깍’하는 작은 소리가 죽음의 정적을 갈랐다. 그 소리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영롱한 푸른 액체가 담긴 투명 주사기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제노-7’의 원액. 액체는 그의 손안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며,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요동쳤다.
서지윤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그의 광기 어린 계획을.
“당신… 미쳤어요? 그걸… 그걸 우리 몸에 직접 주입하겠다고요? 임상실험은커녕 동물실험 데이터조차 불완전한 실험체를?”
“이건 단순한 실험체가 아니야, 지윤 씨. 이건 사람을 초월적인 존재로, 혹은 끔찍한 괴물로 만드는 열쇠야. 신이 되거나, 악마가 되는 도박이지.”
태주의 눈빛이 불타올랐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과학자의 이성이 아닌, 모든 것을 건 도박사의 광기가 서려 있었다.
“이들이 가져가면, 세상은 끝장이야. 통제할 방법도, 막을 방법도 없이 대량살상무기로 쓰이겠지. 하지만 우리 몸에 있다면… 최소한 도망칠 수는 있어. 이 희망의 불씨를, 이 지옥에서 꺼내 갈 수는 있다고.”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주저 없이 주사기 하나를 자신의 목, 경동맥이 세차게 뛰는 부위에 그대로 꽂아 넣었다.
“크윽…!”
순간, 푸른빛이 혈관을 타고 폭포수처럼 번져나갔다. 피부 밑으로 푸른 섬광이 흐르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심장이 북처럼 두 번, 세차게 울리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 그를 덮쳤다. 호흡이 멎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그의 몸속에서, 기존의 모든 유전 정보가 파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폭력적으로 세워지고 있었다.
“지윤 씨…! 해요, 빨리…! 망설일 시간 없어!”
차태주는 이를 악물고, 남은 주사기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의 손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지윤은 잠시 망설였다. 이성과 생존 본능이 머릿속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저 문밖에는 확실한 죽음이, 자신의 손안에는 미지의 지옥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태주의 눈을 보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졌지만, 그 안에는 자신과,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지의 미래에 대한 강렬한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주사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팔 정맥에 꽂았다.
차갑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차가운 얼음 칼날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끔찍한 감각. 눈앞이 번쩍이며, 세상이 온통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완벽한 암전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쏴!”
용병 리더의 외침과 함께, 유리문이 산산조각 나며 용병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수십 발의 총알이 불꽃을 뿜으며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피할 수 없는, 완벽한 죽음의 탄도였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혹은 저주가 시작되었다.
총알들은 두 사람의 몸에 닿기 직전, 마치 보이지 않는 끈적한 젤리 속에라도 빠진 것처럼 급격히 속도가 느려졌다. 이내 모든 운동 에너지를 잃고, ‘툭, 툭’ 하는 무기력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역장이, 마치 어머니의 양수처럼 두 사람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뭐… 뭐야?”
용병 하나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가면 속 용병 리더의 눈에도 명백한 당혹감이 스쳤다. 그는 수많은 전장을 겪었지만, 이런 비과학적인 현상은 처음이었다.
“발포 계속해! 멈추지 마! 놈들은 지금 변이 중이다! 저 역장이 완성되기 전에 끝장내!”
그러나 연이은 사격에도 총알은 두 사람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오히려 역장은 더욱 단단해져, 총알을 맞고 튕겨내기 시작했다. 차태주는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지윤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정신 차려요, 지윤 씨! 뛰어야 해! 지금이야!”
두 사람은 비상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의 등 뒤에서, 용병들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챙겨온 소형 폭탄이 터지며 연구 시설 전체가 거대한 불길에 휩싸였다. 붉은 화염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지옥도 속에서, 피부 밑으로 푸른빛이 희미하게 흐르는 두 사람의 모습은 기괴할 정도로 이질적이고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불타는 복도를 달리며, 서지윤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우리가…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차태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에는 없던 강철 같은 확신이 서려 있었다.
“살아남아야죠. 반드시. 이제… 우리에겐 더 지켜야 할 것들이 생길 테니까.”
그날 밤, 불타는 연구소를 뒤로한 채 두 사람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국가의 모든 기록에서, 세상의 모든 기억에서 증발해버렸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어느 평업한 도시의 작은 동네 병원 분만실에서, 우렁찬 울음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갈랐다. 창백한 얼굴의 서지윤과,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차태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 사람의 아이, 차강윤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뱃속에서부터 부모의 푸른 피, 그 위대한 가능성과 커다란 힘을 물려받은 그 아이가 훗날 세상을 구원하거나, 혹은 파멸시킬 거대한 운명의 열쇠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운명을 차지하기 위한 어둠이, 이미 갓 태어난 아기의 요람 곁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다는 것을.
세상은 숨을 죽였다. 칠흑 같은 어둠이 대지를 삼킨 시각, 창밖은 신의 분노라도 산 듯 미친듯이 번개를 토해냈다. ‘쿠르릉-’ 하는 불길한 천둥소리는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괴수가 내뱉는 위협적인 포효처럼 대기를 진동시켰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바람이 견고한 콘크리트 외벽을 할퀴는 소리는, 고립된 요새를 공격하는 보이지 않는 적들의 아우성 같았다.
도심의 현란한 불빛이 결코 닿지 않는 깊고 깊은 산중. 이곳은 지도에도, 위성사진에도 존재하지 않는 땅, 대한민국 국방부 산하 최첨단 비밀 생물공학 연구소 ‘네오젠(Neogen)’의 심장이었다. 인간의 오만함이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빚어낸,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금단의 성역이었다. 외부로는 군사 통제 구역이라는 육중한 철조망과 수십 개의 감시탑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 안쪽으로는 최첨단 보안 시스템과 중무장한 경비 병력이 24시간 철통같은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국가 1급 기밀이었으며, 그 내용은 대통령조차 일부만 열람할 수 있을 정도의 극비 사항이었다.
연구소 내부는 바깥의 광란과는 대조적으로 병적일 만큼 완벽한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길게 뻗은 복도, 차가운 금속 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순백의 멸균등만이 위태롭게 깜박이며 기계적인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공기 중에는 오존 소독제의 싸한 냄새와 정체 모를 화학 약품 냄새가 희미하게 떠다녔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된 공간. 온도, 습도, 기압, 심지어 공기 중의 미세먼지 입자 하나까지 중앙 통제실의 거대한 컴퓨터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인위적인 완벽함은, 아주 작은 균열 하나만으로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롭고 아슬아슬했다.
제7실험실. 네오젠 연구소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보안이 삼엄한 곳. 그 안에는 두 명의 연구원이 있었다.
한쪽에서는 흰 가운을 입은 남자, 차태주가 컴퓨터 모니터 속 빼곡한 데이터를 향해 병적인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는 며칠 밤을 꼬박 새운 극심한 피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광기에 가까운 형형한 빛을 잃지 않았다. 화면을 가득 채운 복잡한 염기서열과 단백질 구조식, 그리고 알 수 없는 기호들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암호의 나열에 불과했지만, 그에게는 세상의 근원을 파헤치는 신성한 경전과도 같았다. 그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춤추듯 움직였고, 그의 뇌는 슈퍼컴퓨터처럼 수백만 개의 변수를 동시에 계산하고 있었다.
그의 옆, 투명한 원통형 보관장치 ‘크래들(Cradle)’ 앞에 선 것은 여자 연구원 서지윤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짙은 다크서클로 인해 절망처럼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장치 안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며 유영하는 푸른빛 액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영롱하면서도 불길한 빛. 살아있는 생물처럼 미세하게,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파동하는 저것은 과연 인류의 희망인가, 혹은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겨진 마지막 재앙의 전조인가. 그녀는 저 액체가 단순한 화합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학습하고, 진화하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생명’이었다.
고요를 깬 것은 차태주의 목소리였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완벽하게 방음 처리된 밀폐된 공간 안에서는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지윤 씨, 수치가… 안정화됐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과 함께 억누르고 있던 희열이 담겨 있었다. 태주는 스크롤을 내려 모니터 속 복잡한 그래프의 마지막 지점을 가리켰다. 지난 72시간 동안 혼돈처럼 미친듯이 날뛰던 생체 에너지 곡선이, 마침내 평온하고 아름다운 수평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던 실험의 성공을 의미하는, 과학자에게는 신의 계시와도 같은 그래프였다.
“이 샘플… ‘제노-7’은 완벽하게 살아있습니다.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 속도, 자기 복제 능력, 에너지 변환 효율… 모든 데이터가 이론치를 뛰어넘었어요. 이건… 이건 기적이야.”
서지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기쁨이 아닌, 깊은 불안과 회의감으로 잠식되어 있었다.
“정말 이걸 계속해야 할까요, 선배? 국방부의 최종 목표는 이걸 ‘인간 병기’ 프로젝트에 쓰는 거잖아요. 어제 상부에서 내려온 보고서 보셨어요? 그들은 제노-7을 인간에게 주입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슈퍼 솔저를 만들 계획이에요. 사람을… 사람을 살아있는 무기로 만들겠다는 거잖아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연구자로서의 윤리의식과 인간으로서의 근원적인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그녀와 태주는 본래 난치병 치료를 위한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연구하던 순수한 과학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연구 성과가 국방부의 눈에 띄면서, 프로젝트는 점차 그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끔찍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가 연구를 멈춘다고 해도… 이미 너무 늦었어요.”
차태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목소리는 냉정하리만큼 차갑고 현실적이었다.
“이 데이터가 상부에 보고된 이상, 프로젝트는 절대 중단되지 않아. 우리가 거부하면 다른 팀이, 그것도 아니면 더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과학자들이 이 연구를 이어받겠지. 그들은 제노-7의 힘을 120% 끌어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거야. 수많은 비공식 임상실험, 무고한 희생자들이 생겨나겠지.”
그는 크래들 속 푸른 액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단순한 과학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의 자식을 바라보는 창조주처럼, 애정과 책임감, 그리고 두려움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우리 손으로 끝낸다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최소한의 인간성을 이 안에 심어놓을 순 있어요. 통제 불가능한 파괴의 괴물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고 소중한 것을 수호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위이이이잉-!
실험실 천장이 낮게 진동하며 고막을 찢는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순백의 멸균등이 일제히 꺼지고, 시야를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는 비상등이 광적으로 깜박이기 시작했다. 연구소 전체가 거대한 심장처럼, 공포의 박동을 시작했다. 스피커에서 터져 나온 기계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절망을 선고했다.
“경고. 경고. 미상 무장세력 침입. 코드 레드. 모든 연구원은 즉시 지정된 대피소로 대피하십시오. 반복합니다. 미상 무장세력 침입…”
서지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입술이 바싹 말라붙었고,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세차게 뛰었다.
“무장세력…? 어떻게…! 연구소의 위치는 S급 기밀이었잖아요! 외부에서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곳인데!”
“누군가 내부에서 정보를 흘렸거나, 혹은 우리와 동급의 기술력을 가진 세력이 있다는 뜻이겠지.”
차태주는 혼란 속에서도 얼음처럼 침착했다. 그의 두뇌는 이미 최악의 시나리오를 수백, 수천 가지로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목표는 단 하나, ‘제노-7’ 샘플을 노리는 겁니다. 저들이 저걸 손에 넣으면…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거야.”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수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맞춰온 호흡처럼,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차태주는 크래들에 연결된 복잡한 생명 유지 장치와 데이터 케이블을 분리했고, 서지윤은 휴대용 저온 냉각 시스템을 챙겼다. 샘플을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한 마지막 절차였다.
그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둔탁한 총성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단순한 권총 소리가 아니었다. 두꺼운 방탄 벽을 뚫고 공기를 찢는, 군용 소총의 파열음이었다. 연구소 경비 병력들의 비명과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가 뒤섞여, 평화롭던 금단의 성역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쾅-!
마침내, 두께 10cm의 강화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제7실험실의 문이 거대한 폭발과 함께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안으로 날아들었다. 매캐한 화약 연기와 파편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 것은 검은 전투복 차림의 남자들이었다. 어둠보다 더 짙은 검은색, 얼굴을 완전히 가린 방독면과 전술 가면. 그들의 복장은 정규 군대의 그것과 확연히 달랐다. 제각각인 무장과, 대형을 무시한 채 오직 효율적인 살상만을 위해 움직이는 야수 같은 분위기는, 그들이 국가나 이념이 아닌 오직 돈으로 움직이는, 고도로 훈련된 용병 집단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가면 너머로, 기계적으로 변조된 리더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소음기가 달린 총구를 정확히 차태주의 미간에 겨누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완벽한 조준이었다.
“샘플을 넘겨라. 저항하면 죽는다. 5초 주지. 5…”
서지윤은 극심한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눈이 애원하듯 태주에게 향했다.
“태주 씨…”
차태주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을 겨눈 총구가 아닌, 용병 리더의 가면 속 눈을,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거대하고 탐욕스러운 어둠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도, 공포도 아닌, 모든 것을 체념한 자의 차가운 결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걸… 이대로 빼앗기면, 수백, 수천 명이 죽어요.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는 보란 듯이, 천천히 손을 움직여 휴대용 보관장치의 마지막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딸깍’하는 작은 소리가 죽음의 정적을 갈랐다. 그 소리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서지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입술이 바싹 말라붙었고,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세차게 뛰었다. 눈앞의 현실이 마치 잘 만들어진 악몽처럼 느껴졌다. 어둠보다 더 짙은 검은색 전투복,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기계적인 가면, 그리고 자신들의 심장을 꿰뚫을 듯 겨눠진 차가운 총구. 평생을 무균실 안에서 현미경과 데이터만 들여다보던 그녀에게, 이 폭력적이고 원초적인 상황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였다.
“무장세력…? 어떻게…! 연구소의 위치는 S급 국가 기밀이었잖아요! 외부에서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곳인데!”
“누군가 내부에서 정보를 흘렸거나, 혹은 우리와 동급의 기술력을 가진 세력이 있다는 뜻이겠지.”
차태주는 혼란 속에서도 얼음처럼 침착했다. 그의 두뇌는 이미 최악의 시나리오를 수백, 수천 가지로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시뮬레이션의 결과도 ‘생존’이라는 단어를 보여주지 않았다.
“목표는 단 하나, ‘제노-7’ 샘플을 노리는 겁니다. 저들이 저걸 손에 넣으면…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거야.”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수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맞춰온 호흡처럼, 그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리고 절망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차태주는 크래들에 연결된 복잡한 생명 유지 장치와 데이터 케이블을 분리했고, 서지윤은 휴대용 저온 냉각 시스템을 챙겼다. 샘플을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한, 어쩌면 아무 의미 없을지도 모를 마지막 절차였다.
그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둔탁한 총성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단순한 권총 소리가 아니었다. 두꺼운 방탄 벽을 뚫고 공기를 찢는, 군용 소총의 파열음이었다. 연구소 경비 병력들의 짧은 비명과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가 뒤섞여, 평화롭던 금단의 성역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쾅-!
마침내, 두께 10cm의 강화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제7실험실의 문이 거대한 폭발과 함께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안으로 날아들었다. 매캐한 화약 연기와 파편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 것은 검은 전투복 차림의 남자들이었다. 어둠보다 더 짙은 검은색, 얼굴을 완전히 가린 방독면과 전술 가면. 그들의 복장은 정규 군대의 그것과 확연히 달랐다. 제각각인 무장과, 대형을 무시한 채 오직 효율적인 살상만을 위해 움직이는 야수 같은 분위기는, 그들이 국가나 이념이 아닌 오직 돈으로 움직이는, 고도로 훈련된 용병 집단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가면 너머로, 기계적으로 변조된 리더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소음기가 달린 총구를 정확히 차태주의 미간에 겨누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완벽한 조준이었다.
“샘플을 넘겨라. 저항하면 죽는다. 5초 주지. 5…”
서지윤은 극심한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눈이 애원하듯 태주에게 향했다.
“태주 씨…”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떨렸다.
차태주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을 겨눈 총구가 아닌, 용병 리더의 가면 속 눈을,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거대하고 탐욕스러운 어둠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도, 공포도 아닌, 모든 것을 체념한 자의 차가운 결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걸… 이대로 빼앗기면, 수백, 수천 명이 죽어요.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는 보란 듯이, 천천히 손을 움직여 휴대용 보관장치의 마지막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딸깍’하는 작은 소리가 죽음의 정적을 갈랐다. 그 소리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영롱한 푸른 액체가 담긴 투명 주사기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제노-7’의 원액. 액체는 그의 손안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며,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요동쳤다.
서지윤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그의 광기 어린 계획을.
“당신… 미쳤어요? 그걸… 그걸 우리 몸에 직접 주입하겠다고요? 임상실험은커녕 동물실험 데이터조차 불완전한 실험체를?”
“이건 단순한 실험체가 아니야, 지윤 씨. 이건 사람을 초월적인 존재로, 혹은 끔찍한 괴물로 만드는 열쇠야. 신이 되거나, 악마가 되는 도박이지.”
태주의 눈빛이 불타올랐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과학자의 이성이 아닌, 모든 것을 건 도박사의 광기가 서려 있었다.
“이들이 가져가면, 세상은 끝장이야. 통제할 방법도, 막을 방법도 없이 대량살상무기로 쓰이겠지. 하지만 우리 몸에 있다면… 최소한 도망칠 수는 있어. 이 희망의 불씨를, 이 지옥에서 꺼내 갈 수는 있다고.”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주저 없이 주사기 하나를 자신의 목, 경동맥이 세차게 뛰는 부위에 그대로 꽂아 넣었다.
“크윽…!”
순간, 푸른빛이 혈관을 타고 폭포수처럼 번져나갔다. 피부 밑으로 푸른 섬광이 흐르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심장이 북처럼 두 번, 세차게 울리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 그를 덮쳤다. 호흡이 멎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그의 몸속에서, 기존의 모든 유전 정보가 파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폭력적으로 세워지고 있었다.
“지윤 씨…! 해요, 빨리…! 망설일 시간 없어!”
차태주는 이를 악물고, 남은 주사기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의 손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지윤은 잠시 망설였다. 이성과 생존 본능이 머릿속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저 문밖에는 확실한 죽음이, 자신의 손안에는 미지의 지옥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태주의 눈을 보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졌지만, 그 안에는 자신과,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지의 미래에 대한 강렬한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주사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팔 정맥에 꽂았다.
차갑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차가운 얼음 칼날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끔찍한 감각. 눈앞이 번쩍이며, 세상이 온통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완벽한 암전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쏴!”
용병 리더의 외침과 함께, 유리문이 산산조각 나며 용병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수십 발의 총알이 불꽃을 뿜으며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피할 수 없는, 완벽한 죽음의 탄도였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혹은 저주가 시작되었다.
총알들은 두 사람의 몸에 닿기 직전, 마치 보이지 않는 끈적한 젤리 속에라도 빠진 것처럼 급격히 속도가 느려졌다. 이내 모든 운동 에너지를 잃고, ‘툭, 툭’ 하는 무기력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역장이, 마치 어머니의 양수처럼 두 사람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뭐… 뭐야?”
용병 하나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가면 속 용병 리더의 눈에도 명백한 당혹감이 스쳤다. 그는 수많은 전장을 겪었지만, 이런 비과학적인 현상은 처음이었다.
“발포 계속해! 멈추지 마! 놈들은 지금 변이 중이다! 저 역장이 완성되기 전에 끝장내!”
그러나 연이은 사격에도 총알은 두 사람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오히려 역장은 더욱 단단해져, 총알을 맞고 튕겨내기 시작했다. 차태주는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지윤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정신 차려요, 지윤 씨! 뛰어야 해! 지금이야!”
두 사람은 비상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의 등 뒤에서, 용병들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챙겨온 소형 폭탄이 터지며 연구 시설 전체가 거대한 불길에 휩싸였다. 붉은 화염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지옥도 속에서, 피부 밑으로 푸른빛이 희미하게 흐르는 두 사람의 모습은 기괴할 정도로 이질적이고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불타는 복도를 달리며, 서지윤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우리가…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차태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에는 없던 강철 같은 확신이 서려 있었다.
“살아남아야죠. 반드시. 이제… 우리에겐 더 지켜야 할 것들이 생길 테니까.”
그날 밤, 불타는 연구소를 뒤로한 채 두 사람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국가의 모든 기록에서, 세상의 모든 기억에서 증발해버렸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어느 평업한 도시의 작은 동네 병원 분만실에서, 우렁찬 울음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갈랐다. 창백한 얼굴의 서지윤과,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차태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 사람의 아이, 차강윤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뱃속에서부터 부모의 푸른 피, 그 위대한 가능성과 커다란 힘을 물려받은 그 아이가 훗날 세상을 구원하거나, 혹은 파멸시킬 거대한 운명의 열쇠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운명을 차지하기 위한 어둠이, 이미 갓 태어난 아기의 요람 곁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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