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1화
조회 : 35 추천 : 0 글자수 : 9,047 자 2025-09-02
제1화
과거는 등 뒤에서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차태주와 서지윤이 자신들의 청춘과 지성을 송두리째 바쳤던 국방부 비밀 연구소 ‘네오젠’은 지금 이 순간, 밤하늘을 찢어발기는 거대한 화마가 되어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포효하며 치솟을 때마다, 주변의 침엽수림은 마치 지옥의 무대에 선 배우들처럼 그 음산한 형체를 드러냈다가 다시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해발 수백 미터 산 정상의 살을 에는 듯한 겨울바람도 그 맹렬하고 압도적인 열기 앞에서는 힘을 잃고 흩어졌다. 마치 태초의 혼돈이, 혹은 세상의 종말이 바로 등 뒤에서 장엄하게 펼쳐지고 있는 듯했다.
“하아, 하아… 커헉!”
태주는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폐부 깊숙한 곳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열기와 함께, 비릿하고 역한 피 냄새가 입안에 가득 찼다.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검붉은 피가 선명하게 묻어 나왔다. 몸이 보내는 첫 번째 경고였다. 아니, 이미 경고의 단계는 지났을지도 모른다. 그의 몸속에서는 지금 이 순간, 인류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화학적 반란, 세포 단위의 혁명이 강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제노-7’이라 명명된 푸른 액체는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기존의 모든 생물학적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중이었다. 그 과정은 그의 육체와 정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지윤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냉기가 심장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휘젓고 다녔다. 마치 자신의 혈액이 모두 얼음물로 바뀌어버린 듯한 감각. 그녀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주사했던 부위. 두꺼운 연구복 소매 아래로, 마치 살아있는 문신처럼 푸른 핏줄이 희미하게 빛나다 스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우리가… 대체… 뭘 한 거죠?”
지윤의 목소리는 갈라진 유리 조각처럼 위태롭게 흘러나왔다.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겉보기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온전한 자신의 것이 아님을. 마치 자신의 영혼이 낯선 육체에 갇혀버린 듯한, 근원적인 위화감이 온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았다. 분명 자신의 손가락인데도,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을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살아남은 거야.”
태주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손 역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역시도 자신의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미지의 힘을 느끼고 있었다. 방금 전, 비상 통로에서 불붙은 파편이 떨어질 때, 자신도 모르게 뻗었던 손끝에서 터져 나왔던 푸른빛의 잔상.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발현된 힘이었지만, 동시에 통제 불가능한 괴물이 깨어났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우린… 그걸로 된 거야, 지금은.”
그의 말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눈동자도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타는 연구소는 그들의 과거와의 완벽한 단절을 의미했다. 연구원 차태주와 서지윤은 저 불길 속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이름도, 신분도, 심지어 인간이라는 정체성마저 불분명해진 두 존재만이 남았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어둠 속으로 절뚝이며 걸어 들어갔다. 세상의 모든 기록에서, 그리고 스스로의 삶에서 완벽하게 증발하기 위한, 길고 고독한 도피의 첫걸음이었다.
도피 생활은 영혼을 갉아먹는 형벌과도 같았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찾아든 변두리 모텔의 낡은 방은 그들의 절망을 담기에 딱 알맞은 관 같았다. 창밖의 햇살마저 두껍게 쌓인 먼지를 통과하며 빛을 잃었다. 공기 중에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여 떠다녔다. TV에서는 연일 ‘강원도 인근 군사 통제 구역에서 원인 불명의 가스 폭발 사고가 발생, 연구원 전원 사망 추정’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왔고, 두 사람은 그림자처럼 숨죽이며 그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뉴스 속에서 자신의 사망 소식을 듣는 기묘하고도 끔찍한 경험을 매일 반복해야 했다.
“그들… 우리가 살아있는 걸 알까요?”
지윤이 며칠째 이어진 고열 속에서 힘겹게 물었다. 그녀의 몸은 ‘제노-7’이라는 강력한 이물질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면역체계가 붕괴되었다가 재구성되는 과정은 그녀를 산 채로 불태우는 듯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어떤 날은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가, 어떤 날은 시베리아의 얼음장 속에 갇힌 것처럼 추위에 떨었다. 태주는 묵묵히 젖은 수건으로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폭발 속에서 살아남았으리라곤 아무도 생각 못 해. 폭발 규모나 화재 진압의 어려움을 봤을 때, 시신 수습조차 불가능할 거야. 우린 이제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라고.”
“죽은 사람… 유령…”
지윤은 허탈하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메말라 갈라졌다.
“살아있는 괴물보다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머물렀다. 가만히 있어도, 가끔 손끝에서 전기가 오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며칠 전, 탁자 위 컵에 물을 따르려다 컵이 손에 닿기도 전에 미세하게 흔들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녀는 기겁하며 손을 뗐고, 컵은 이내 잠잠해졌다. 그 이후로 그녀는 물건을 잡을 때마다 심호흡을 해야 했다.
태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육체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그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연구소에 갇혀 불길에 휩싸이는 꿈, 자신을 쫓는 용병들의 총구, 그리고 자신의 손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끔찍한 꿈. 며칠 전, 잠결에 꾼 악몽 속에서 그는 벗어나려 발버둥 쳤고, 그 순간 침대 옆의 낡은 스탠드가 ‘퍽’하는 소리와 함께 저절로 넘어져 전구가 박살 났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고, 그 이후로 잠을 잘 때마다 자신의 손을 이불 밑에 단단히 고정하는 버릇이 생겼다.
두 사람은 서로의 변화에 대해 애써 침묵했다.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막연한 불안이 끔찍한 현실이 되어 그들을 덮칠 것만 같았다. 그들은 그저 서로의 창백한 얼굴과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다크서클을 바라보며, 말없이 서로의 고통을 짐작할 뿐이었다. 밤이 되면, 그들은 서로의 등 뒤에서 나는 작은 뒤척임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로가 언제 괴물로 변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괴물 아니야.”
어느 날 밤,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나 숨죽여 울고 있는 지윤의 등을 토닥이며 태주가 나직이 말했다.
“우린 그냥…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친 연구원일 뿐이야. 아직은.”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도, 그녀의 손도 비정상적으로 차가웠다. 공유된 비극과 공포는 역설적으로 두 사람을 더 단단하게 묶어주었다. 동료애와 연민, 그리고 그 이상의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가 아니면 이 세상에 기댈 곳이 없는 유일한 존재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미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몸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정신은 더욱 황폐해졌다. 그들은 여러 도시를 전전했다. 허름한 여인숙, 버려진 폐가, 심지어 강변의 다리 밑에서 박스를 덮고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태주는 공사판 막노동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고, 지윤은 가짜 신분증으로 식당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과거, 대한민국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다는 네오젠의 엘리트 연구원이었던 그들의 삶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몸에 깃든 힘의 일부를 깨닫게 되었다. 태주는 무거운 철근을 들 때 자신도 모르게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한번은 동료 인부가 크레인에서 떨어지는 철판에 깔릴 뻔한 아찔한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철판은 동료의 머리 위에서 아주 잠시,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멈칫했다가 옆으로 떨어졌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태주는 자신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지윤은 설거지를 하다가 실수로 쌓아놓은 접시 더미를 놓쳤다. 수십 개의 접시가 와장창 깨져나가야 할 상황.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요란한 파열음이 아니라, ‘툭, 투둑’ 하는 둔탁한 소리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 접시들은 거의 깨지지 않은 채 바닥에 얌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것처럼.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그 힘을 철저히 숨겼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비장의 카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그 힘을 사용할 때마다, 그들은 자신이 점점 더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그 깨달음은 뼈를 깎는 듯한 고통과 함께 찾아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비밀과 공포를 공유했다. 그들의 침묵은, 그 어떤 절규보다도 더 깊고 어두운 감정을 담고 있었다.
시간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더디게, 그러나 끈질기게 흘러갔다. 태주와 지윤은 수차례 거처를 옮긴 끝에, 세상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힌 듯한 어느 작은 바닷가 마을에 정착했다. 그들은 어둠의 경로를 통해 구한, ‘김민준’과 ‘이수진’이라는 이름의 낡은 신분증을 얻었다.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의 신분. 그 이름들은 낯설고 어색했지만, 동시에 과거의 자신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갑옷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월세로 얻은 집은 낡았지만 햇볕이 잘 들었다. 창문을 열면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함께 갈매기 소리가 밀려 들어왔고,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은 그들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처음으로 짐을 풀고, 냄비에 밥을 안치고, 낡았지만 깨끗한 이불을 폈을 때, 두 사람은 비로소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편안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비로소 ‘도망자’가 아닌 ‘생존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태주는 마을의 작은 조선소에서 용접 기술을 배워 일을 시작했다. 뜨거운 불꽃과 씨름하고, 쇠를 깎고 붙이는 거친 노동은 그의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는 땀 흘려 일하고, 동료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녹초가 되어 잠드는 평범한 노동자의 삶에 점차 익숙해져 갔다. 그는 자신의 몸에 깃든 초인적인 힘을 철저히 억눌렀다. 무거운 철판을 옮길 때는 일부러 인상을 찌푸리며 힘든 척했고,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남들보다 한발 앞서 피하는 것으로 자신의 능력을 위장했다. 그는 평범함이라는 가면 뒤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철저히 숨겼다.
지윤은 마을의 작은 도서관에서 비정규직 사서로 일했다. 책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가득한 그곳은, 그녀에게 뜻밖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그녀는 조용히 책을 정리하고,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창가에 앉아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과거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나갔다. 그녀 역시 자신의 능력을 철저히 봉인했다. 높은 곳의 책을 꺼내려다 손이 닿지 않으면, 위험하게 의자를 밟고 올라서는 대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법을 배웠다. 그녀는 자신의 특별함이, 이 소중한 평화를 깨뜨리는 불씨가 될까 두려워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결혼했다. 물론 법적인 절차는 불가능했다. 어느 늦여름 저녁, 노을이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때, 지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 두 사람은 방파제에 나란히 앉아, 아무 말 없이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주 씨… 아니, 민준 씨.”
그녀는 아직도 그의 가짜 이름이 입에 붙지 않았다. 마른오징어를 씹던 태주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우리… 결혼할까요?”
태주의 눈이 커졌다. 그는 씹던 오징어를 내려놓고 그녀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미안함,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지윤아… 우린 서류상으론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결혼 같은 건… 우리에겐 사치야.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서류 같은 건 상관없어요.”
지윤이 그의 거칠어진 손을 잡았다. 용접 불꽃과 쇳가루로 뒤덮인, 투박하지만 따뜻한 손이었다.
“그냥… 우리 둘이서 서로에게 약속하는 거예요. 어떤 일이 있어도, 세상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당신이랑 나, 그리고 저 바다. 우리만 아는 증인이면 되잖아요. 더 이상 혼자라는 생각으로 잠들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주면 안 될까요?”
태주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난 1년간의 지옥 같았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언제 발각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버텨왔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그는 자신의 고독하고 지친 그림자를 보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 하자, 결혼.”
그들은 반지도, 하객도, 축복의 말도 없이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유일한 증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고, 가장 절실한 서약. 그것은 단순한 사랑의 맹세라기보다는, 이 잔인한 세상에서 함께 살아남아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겠다는, 생존의 동맹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해 겨울, 두 사람에게 기적 같은 선물이 찾아왔다.
지윤의 몸에 변화가 찾아왔을 때, 두 사람의 마음에는 희망보다 공포가 먼저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들의 몸은 이미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생명을 잉태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은 진료소에서 들려온 의사의 축하 인사는 그들의 마지막 현실 부정마저 앗아갔다.
“무서워요.”
어느 늦은 밤, 잠 못 이루던 지윤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배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 작은 온기 속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신비가, 그녀를 더 큰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이 아이는… 우리 같으면 어떡하죠? 우리 때문에 평생을 도망자로, 괴물로 살아야 하면… 만약, 만약에 이 끔찍한 힘을 물려받는다면…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거예요. 태어나자마자 세상의 모든 위험에 노출되는 거잖아요.”
그것은 태주 역시 매일 밤 되새기는,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이었다. 자신들의 혈관에 흐르는 ‘제노-7’의 변형된 유전 정보가 2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네오젠의 데이터에도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최악의 경우, 아이는 끔찍한 기형으로 태어나거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통제 불가능한 힘을 가진 존재가 되어 스스로를 파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내 앞에서 무너질 수 없었다. 그는 지윤의 배 위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로, 희미하지만 분명한 생명의 고동, 작은 태동이 느껴졌다. 그 작은 떨림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부성을 깨웠다.
“그럼 우리가 지켜주면 돼.”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누구보다 잘 이해해줄 수 있잖아, 우린. 남들이 보기에 이상한 점이 있더라도, 우린 그게 왜 그런 건지 알아줄 수 있어. 그 힘이 저주가 아니라 선물이 될 수도 있어. 괴물이 아니라, 특별한 아이로 자라게…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주면 돼. 내가 약속할게, 지윤아. 내 모든 것을 걸고, 당신과 우리 아이를 지킬게.”
그 약속은 그녀를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기 자신에게 거는 필사적인 주문이기도 했다. 그는 반드시 이 아이를 평범하고 행복하게 키워내야만 했다. 그것이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의 일에 대한 유일한 속죄 방식이자, 이 지옥 같은 삶을 버텨낼 유일한 이유였다.
몇 달 후, 작은 도시의 동네 병원 분만실에서 한 생명이 세상에 나왔다.
“응애, 응애-!”
세상을 가르는 우렁찬 울음소리에, 지윤과 태주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간호사가 품에 안겨준 작고 붉은 핏덩이는 그저 평범해 보였다. 꼬물거리는 손가락, 꼭 감은 눈. 그 순간만큼은, 두 사람의 얼굴에서 지난 과거의 악몽과 불안의 그림자가 모두 사라진 듯했다.
“고생했어, 지윤아…”
“우리 아기… 이름은, 강윤. 어때요? 굳셀 강(强), 빛날 윤(潤). 세상의 어떤 어려움에도 굳세고, 스스로 빛나는 아이가 되라고.”
“차강윤… 좋은 이름이다.”
태주는 아들의 이름을 나직이 읊조렸다. 자신의 진짜 성을 물려준 이름. 더 이상 김민준이라는 가짜 이름 뒤에 숨지 않겠다는, 아버지로서의 작은 다짐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완벽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운명의 톱니바퀴는 이미 차갑게, 그리고 가차 없이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병원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주차장 구석, 낡은 세단 한 대가 유령처럼 서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평범한 중년의 회사원처럼 보였지만, 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포착한 매처럼 날카롭고 집요했다. 그는 과거 네오젠의 또 다른 생존자이자, 그날의 참사를 기획한 내부 협력자, 표진석이었다.
그날 밤, 그는 용병 세력을 연구소로 끌어들이는 대가로 막대한 돈과 새로운 신분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그는 약속대로 모든 것을 얻었다. 그는 차태주와 서지윤이 살아남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편집증적인 성격은 혹시 모를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지난 1년 넘게, 끈질기게 두 사람의 흔적을 추적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그 결실을 본 것이다.
그의 무릎 위에 놓인 태블릿 PC 화면에는 ‘실종’ 처리되었던 차태주와 서지윤의 연구원 시절 사진과 신상 정보가 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상태: 실종(Missing)] 문구를 터치해 [상태: 확인(Located)]으로 변경했다. 붉은색 경고 문구가 푸른색 확인 문구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는 두 사람의 파일 아래, 새로운 하위 폴더를 생성했다. 차가운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려 파일명을 입력했다.
[관찰 대상: 차강윤 (Observation Target: Cha Kang-yoon)]
갓 태어난 아기의 이름 위로, 검은 커서가 심장처럼 깜박였다. 표진석의 입가에 뱀처럼 서늘하고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제노-7’의 진정한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초능력 혈청이 아니었다. 인류의 진화를 강제로 앞당길 수 있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열쇠였다. 그리고 그 열쇠의 가장 완벽한 실험체가, 바로 지금 저 병원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자라나라, 아가야. 너는 내 평생의 역작이 될 테니.’
표진석은 자신의 어린 아들, 표지호의 사진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두었다. 가장 완벽한 감시는, 의심받지 않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는 태블릿을 끄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불타는 연구소에서 시작된 비극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막, 가장 순수하고 연약한 숙주를 찾아, 잔혹한 관찰의 서막을 열었을 뿐이었다.
과거는 등 뒤에서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차태주와 서지윤이 자신들의 청춘과 지성을 송두리째 바쳤던 국방부 비밀 연구소 ‘네오젠’은 지금 이 순간, 밤하늘을 찢어발기는 거대한 화마가 되어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포효하며 치솟을 때마다, 주변의 침엽수림은 마치 지옥의 무대에 선 배우들처럼 그 음산한 형체를 드러냈다가 다시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해발 수백 미터 산 정상의 살을 에는 듯한 겨울바람도 그 맹렬하고 압도적인 열기 앞에서는 힘을 잃고 흩어졌다. 마치 태초의 혼돈이, 혹은 세상의 종말이 바로 등 뒤에서 장엄하게 펼쳐지고 있는 듯했다.
“하아, 하아… 커헉!”
태주는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폐부 깊숙한 곳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열기와 함께, 비릿하고 역한 피 냄새가 입안에 가득 찼다.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검붉은 피가 선명하게 묻어 나왔다. 몸이 보내는 첫 번째 경고였다. 아니, 이미 경고의 단계는 지났을지도 모른다. 그의 몸속에서는 지금 이 순간, 인류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화학적 반란, 세포 단위의 혁명이 강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제노-7’이라 명명된 푸른 액체는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기존의 모든 생물학적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중이었다. 그 과정은 그의 육체와 정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지윤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냉기가 심장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휘젓고 다녔다. 마치 자신의 혈액이 모두 얼음물로 바뀌어버린 듯한 감각. 그녀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주사했던 부위. 두꺼운 연구복 소매 아래로, 마치 살아있는 문신처럼 푸른 핏줄이 희미하게 빛나다 스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우리가… 대체… 뭘 한 거죠?”
지윤의 목소리는 갈라진 유리 조각처럼 위태롭게 흘러나왔다.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겉보기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온전한 자신의 것이 아님을. 마치 자신의 영혼이 낯선 육체에 갇혀버린 듯한, 근원적인 위화감이 온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았다. 분명 자신의 손가락인데도,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을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살아남은 거야.”
태주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손 역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역시도 자신의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미지의 힘을 느끼고 있었다. 방금 전, 비상 통로에서 불붙은 파편이 떨어질 때, 자신도 모르게 뻗었던 손끝에서 터져 나왔던 푸른빛의 잔상.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발현된 힘이었지만, 동시에 통제 불가능한 괴물이 깨어났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우린… 그걸로 된 거야, 지금은.”
그의 말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눈동자도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타는 연구소는 그들의 과거와의 완벽한 단절을 의미했다. 연구원 차태주와 서지윤은 저 불길 속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이름도, 신분도, 심지어 인간이라는 정체성마저 불분명해진 두 존재만이 남았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어둠 속으로 절뚝이며 걸어 들어갔다. 세상의 모든 기록에서, 그리고 스스로의 삶에서 완벽하게 증발하기 위한, 길고 고독한 도피의 첫걸음이었다.
도피 생활은 영혼을 갉아먹는 형벌과도 같았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찾아든 변두리 모텔의 낡은 방은 그들의 절망을 담기에 딱 알맞은 관 같았다. 창밖의 햇살마저 두껍게 쌓인 먼지를 통과하며 빛을 잃었다. 공기 중에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여 떠다녔다. TV에서는 연일 ‘강원도 인근 군사 통제 구역에서 원인 불명의 가스 폭발 사고가 발생, 연구원 전원 사망 추정’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왔고, 두 사람은 그림자처럼 숨죽이며 그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뉴스 속에서 자신의 사망 소식을 듣는 기묘하고도 끔찍한 경험을 매일 반복해야 했다.
“그들… 우리가 살아있는 걸 알까요?”
지윤이 며칠째 이어진 고열 속에서 힘겹게 물었다. 그녀의 몸은 ‘제노-7’이라는 강력한 이물질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면역체계가 붕괴되었다가 재구성되는 과정은 그녀를 산 채로 불태우는 듯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어떤 날은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가, 어떤 날은 시베리아의 얼음장 속에 갇힌 것처럼 추위에 떨었다. 태주는 묵묵히 젖은 수건으로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폭발 속에서 살아남았으리라곤 아무도 생각 못 해. 폭발 규모나 화재 진압의 어려움을 봤을 때, 시신 수습조차 불가능할 거야. 우린 이제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라고.”
“죽은 사람… 유령…”
지윤은 허탈하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메말라 갈라졌다.
“살아있는 괴물보다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머물렀다. 가만히 있어도, 가끔 손끝에서 전기가 오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며칠 전, 탁자 위 컵에 물을 따르려다 컵이 손에 닿기도 전에 미세하게 흔들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녀는 기겁하며 손을 뗐고, 컵은 이내 잠잠해졌다. 그 이후로 그녀는 물건을 잡을 때마다 심호흡을 해야 했다.
태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육체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그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연구소에 갇혀 불길에 휩싸이는 꿈, 자신을 쫓는 용병들의 총구, 그리고 자신의 손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끔찍한 꿈. 며칠 전, 잠결에 꾼 악몽 속에서 그는 벗어나려 발버둥 쳤고, 그 순간 침대 옆의 낡은 스탠드가 ‘퍽’하는 소리와 함께 저절로 넘어져 전구가 박살 났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고, 그 이후로 잠을 잘 때마다 자신의 손을 이불 밑에 단단히 고정하는 버릇이 생겼다.
두 사람은 서로의 변화에 대해 애써 침묵했다.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막연한 불안이 끔찍한 현실이 되어 그들을 덮칠 것만 같았다. 그들은 그저 서로의 창백한 얼굴과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다크서클을 바라보며, 말없이 서로의 고통을 짐작할 뿐이었다. 밤이 되면, 그들은 서로의 등 뒤에서 나는 작은 뒤척임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로가 언제 괴물로 변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괴물 아니야.”
어느 날 밤,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나 숨죽여 울고 있는 지윤의 등을 토닥이며 태주가 나직이 말했다.
“우린 그냥…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친 연구원일 뿐이야. 아직은.”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도, 그녀의 손도 비정상적으로 차가웠다. 공유된 비극과 공포는 역설적으로 두 사람을 더 단단하게 묶어주었다. 동료애와 연민, 그리고 그 이상의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가 아니면 이 세상에 기댈 곳이 없는 유일한 존재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미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몸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정신은 더욱 황폐해졌다. 그들은 여러 도시를 전전했다. 허름한 여인숙, 버려진 폐가, 심지어 강변의 다리 밑에서 박스를 덮고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태주는 공사판 막노동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고, 지윤은 가짜 신분증으로 식당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과거, 대한민국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다는 네오젠의 엘리트 연구원이었던 그들의 삶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몸에 깃든 힘의 일부를 깨닫게 되었다. 태주는 무거운 철근을 들 때 자신도 모르게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한번은 동료 인부가 크레인에서 떨어지는 철판에 깔릴 뻔한 아찔한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철판은 동료의 머리 위에서 아주 잠시,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멈칫했다가 옆으로 떨어졌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태주는 자신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지윤은 설거지를 하다가 실수로 쌓아놓은 접시 더미를 놓쳤다. 수십 개의 접시가 와장창 깨져나가야 할 상황.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요란한 파열음이 아니라, ‘툭, 투둑’ 하는 둔탁한 소리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 접시들은 거의 깨지지 않은 채 바닥에 얌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것처럼.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그 힘을 철저히 숨겼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비장의 카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그 힘을 사용할 때마다, 그들은 자신이 점점 더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그 깨달음은 뼈를 깎는 듯한 고통과 함께 찾아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비밀과 공포를 공유했다. 그들의 침묵은, 그 어떤 절규보다도 더 깊고 어두운 감정을 담고 있었다.
시간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더디게, 그러나 끈질기게 흘러갔다. 태주와 지윤은 수차례 거처를 옮긴 끝에, 세상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힌 듯한 어느 작은 바닷가 마을에 정착했다. 그들은 어둠의 경로를 통해 구한, ‘김민준’과 ‘이수진’이라는 이름의 낡은 신분증을 얻었다.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의 신분. 그 이름들은 낯설고 어색했지만, 동시에 과거의 자신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갑옷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월세로 얻은 집은 낡았지만 햇볕이 잘 들었다. 창문을 열면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함께 갈매기 소리가 밀려 들어왔고,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은 그들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처음으로 짐을 풀고, 냄비에 밥을 안치고, 낡았지만 깨끗한 이불을 폈을 때, 두 사람은 비로소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편안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비로소 ‘도망자’가 아닌 ‘생존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태주는 마을의 작은 조선소에서 용접 기술을 배워 일을 시작했다. 뜨거운 불꽃과 씨름하고, 쇠를 깎고 붙이는 거친 노동은 그의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는 땀 흘려 일하고, 동료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녹초가 되어 잠드는 평범한 노동자의 삶에 점차 익숙해져 갔다. 그는 자신의 몸에 깃든 초인적인 힘을 철저히 억눌렀다. 무거운 철판을 옮길 때는 일부러 인상을 찌푸리며 힘든 척했고,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남들보다 한발 앞서 피하는 것으로 자신의 능력을 위장했다. 그는 평범함이라는 가면 뒤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철저히 숨겼다.
지윤은 마을의 작은 도서관에서 비정규직 사서로 일했다. 책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가득한 그곳은, 그녀에게 뜻밖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그녀는 조용히 책을 정리하고,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창가에 앉아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과거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나갔다. 그녀 역시 자신의 능력을 철저히 봉인했다. 높은 곳의 책을 꺼내려다 손이 닿지 않으면, 위험하게 의자를 밟고 올라서는 대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법을 배웠다. 그녀는 자신의 특별함이, 이 소중한 평화를 깨뜨리는 불씨가 될까 두려워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결혼했다. 물론 법적인 절차는 불가능했다. 어느 늦여름 저녁, 노을이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때, 지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 두 사람은 방파제에 나란히 앉아, 아무 말 없이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주 씨… 아니, 민준 씨.”
그녀는 아직도 그의 가짜 이름이 입에 붙지 않았다. 마른오징어를 씹던 태주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우리… 결혼할까요?”
태주의 눈이 커졌다. 그는 씹던 오징어를 내려놓고 그녀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미안함,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지윤아… 우린 서류상으론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결혼 같은 건… 우리에겐 사치야.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서류 같은 건 상관없어요.”
지윤이 그의 거칠어진 손을 잡았다. 용접 불꽃과 쇳가루로 뒤덮인, 투박하지만 따뜻한 손이었다.
“그냥… 우리 둘이서 서로에게 약속하는 거예요. 어떤 일이 있어도, 세상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당신이랑 나, 그리고 저 바다. 우리만 아는 증인이면 되잖아요. 더 이상 혼자라는 생각으로 잠들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주면 안 될까요?”
태주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난 1년간의 지옥 같았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언제 발각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버텨왔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그는 자신의 고독하고 지친 그림자를 보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 하자, 결혼.”
그들은 반지도, 하객도, 축복의 말도 없이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유일한 증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고, 가장 절실한 서약. 그것은 단순한 사랑의 맹세라기보다는, 이 잔인한 세상에서 함께 살아남아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겠다는, 생존의 동맹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해 겨울, 두 사람에게 기적 같은 선물이 찾아왔다.
지윤의 몸에 변화가 찾아왔을 때, 두 사람의 마음에는 희망보다 공포가 먼저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들의 몸은 이미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생명을 잉태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은 진료소에서 들려온 의사의 축하 인사는 그들의 마지막 현실 부정마저 앗아갔다.
“무서워요.”
어느 늦은 밤, 잠 못 이루던 지윤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배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 작은 온기 속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신비가, 그녀를 더 큰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이 아이는… 우리 같으면 어떡하죠? 우리 때문에 평생을 도망자로, 괴물로 살아야 하면… 만약, 만약에 이 끔찍한 힘을 물려받는다면…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거예요. 태어나자마자 세상의 모든 위험에 노출되는 거잖아요.”
그것은 태주 역시 매일 밤 되새기는,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이었다. 자신들의 혈관에 흐르는 ‘제노-7’의 변형된 유전 정보가 2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네오젠의 데이터에도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최악의 경우, 아이는 끔찍한 기형으로 태어나거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통제 불가능한 힘을 가진 존재가 되어 스스로를 파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내 앞에서 무너질 수 없었다. 그는 지윤의 배 위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로, 희미하지만 분명한 생명의 고동, 작은 태동이 느껴졌다. 그 작은 떨림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부성을 깨웠다.
“그럼 우리가 지켜주면 돼.”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누구보다 잘 이해해줄 수 있잖아, 우린. 남들이 보기에 이상한 점이 있더라도, 우린 그게 왜 그런 건지 알아줄 수 있어. 그 힘이 저주가 아니라 선물이 될 수도 있어. 괴물이 아니라, 특별한 아이로 자라게…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주면 돼. 내가 약속할게, 지윤아. 내 모든 것을 걸고, 당신과 우리 아이를 지킬게.”
그 약속은 그녀를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기 자신에게 거는 필사적인 주문이기도 했다. 그는 반드시 이 아이를 평범하고 행복하게 키워내야만 했다. 그것이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의 일에 대한 유일한 속죄 방식이자, 이 지옥 같은 삶을 버텨낼 유일한 이유였다.
몇 달 후, 작은 도시의 동네 병원 분만실에서 한 생명이 세상에 나왔다.
“응애, 응애-!”
세상을 가르는 우렁찬 울음소리에, 지윤과 태주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간호사가 품에 안겨준 작고 붉은 핏덩이는 그저 평범해 보였다. 꼬물거리는 손가락, 꼭 감은 눈. 그 순간만큼은, 두 사람의 얼굴에서 지난 과거의 악몽과 불안의 그림자가 모두 사라진 듯했다.
“고생했어, 지윤아…”
“우리 아기… 이름은, 강윤. 어때요? 굳셀 강(强), 빛날 윤(潤). 세상의 어떤 어려움에도 굳세고, 스스로 빛나는 아이가 되라고.”
“차강윤… 좋은 이름이다.”
태주는 아들의 이름을 나직이 읊조렸다. 자신의 진짜 성을 물려준 이름. 더 이상 김민준이라는 가짜 이름 뒤에 숨지 않겠다는, 아버지로서의 작은 다짐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완벽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운명의 톱니바퀴는 이미 차갑게, 그리고 가차 없이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병원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주차장 구석, 낡은 세단 한 대가 유령처럼 서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평범한 중년의 회사원처럼 보였지만, 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포착한 매처럼 날카롭고 집요했다. 그는 과거 네오젠의 또 다른 생존자이자, 그날의 참사를 기획한 내부 협력자, 표진석이었다.
그날 밤, 그는 용병 세력을 연구소로 끌어들이는 대가로 막대한 돈과 새로운 신분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그는 약속대로 모든 것을 얻었다. 그는 차태주와 서지윤이 살아남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편집증적인 성격은 혹시 모를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지난 1년 넘게, 끈질기게 두 사람의 흔적을 추적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그 결실을 본 것이다.
그의 무릎 위에 놓인 태블릿 PC 화면에는 ‘실종’ 처리되었던 차태주와 서지윤의 연구원 시절 사진과 신상 정보가 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상태: 실종(Missing)] 문구를 터치해 [상태: 확인(Located)]으로 변경했다. 붉은색 경고 문구가 푸른색 확인 문구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는 두 사람의 파일 아래, 새로운 하위 폴더를 생성했다. 차가운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려 파일명을 입력했다.
[관찰 대상: 차강윤 (Observation Target: Cha Kang-yoon)]
갓 태어난 아기의 이름 위로, 검은 커서가 심장처럼 깜박였다. 표진석의 입가에 뱀처럼 서늘하고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제노-7’의 진정한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초능력 혈청이 아니었다. 인류의 진화를 강제로 앞당길 수 있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열쇠였다. 그리고 그 열쇠의 가장 완벽한 실험체가, 바로 지금 저 병원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자라나라, 아가야. 너는 내 평생의 역작이 될 테니.’
표진석은 자신의 어린 아들, 표지호의 사진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두었다. 가장 완벽한 감시는, 의심받지 않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는 태블릿을 끄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불타는 연구소에서 시작된 비극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막, 가장 순수하고 연약한 숙주를 찾아, 잔혹한 관찰의 서막을 열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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