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조회 : 147 추천 : 0 글자수 : 5,995 자 2025-12-16
제17화
지옥의 화염이 세상의 모든 색을 집어삼키고, 푸른 광기의 에너지가 지구를 찢어발기던 그 순간. 절규와 굉음으로 가득 찼던 강윤의 세계는 거짓말처럼, 아주 차갑고 섬뜩한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침묵은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소리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완벽한 '무'의 상태였다. 그의 영혼이 겪는 영원한 상실과 공허를 완벽하게 구현한 물리적인 공간이었다.
강윤은 자신이 더 이상 땅 위에 서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거대한 중력을 잃고,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시공간 속에서 마치 실오라기처럼 공중에 누워 붕 떠 있는 상태였다.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오직 순도 100%의 흰색뿐. 차갑고, 습도도 없고, 방향 감각도 없고, 시간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태초의 얼음처럼 투명한 공허함이었다. 그의 몸에서 솟구쳐 나왔던 에너지는 폭발하는 대신, 이 하얀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그를 잔혹한 시공간 안에 가두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어깨를 꿰뚫었던 총상의 고통, 피와 잿더미의 끈적한 감촉, 부모님의 싸늘한 체온, 이 모든 극심한 감각들은 백색 소음에 짓눌려 아득히 멀어졌다. 그는 완전히 마비된 채, 그저 부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텅.
그의 심장이 뛰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그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 모든 것이 끝났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분노도, 슬픔도, 절망도 이 거대한 흰색 앞에서 무의미해졌다. 감정이 극에 달하면 오히려 모든 것이 증발하여 텅 빈 재만 남는다는 것을 그는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그의 영혼은 이제 깨진 도자기처럼 산산조각 났고, 그 조각들을 붙잡아 줄 어떤 접착제도 세상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이 무한한 백색의 감옥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1초였을 수도 있고, 10년이었을 수도 있었다. 시간의 개념이 소멸한 곳에서는 영원과 순간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그의 의식은 오직 한 가지 사실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실패했다. 두 번째 기회도 허무하게 끝났다. 나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두 번의 기회, 두 번의 절규, 두 번의 상실. 이 잔인한 반복은 그가 겪어야 할 숙명이었던가. 아니면 그의 능력이 결국은 시공간을 거스를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는 증거인가. 그는 그저 물결에 휩쓸려 두 번의 죽음을 목격한 무력한 존재에 불과했는가.
공허를 채우는 온기의 주마등
바로 그때, 그를 감싸고 있던 새하얀 벽이 희미한 색채와 함께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CRT 모니터의 화면이 켜지듯, 검은색 노이즈와 함께 빛이 점멸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소중하며, 지극히 아프게 빛나는 주마등이었다.
푸른색 공허 속에 점점이 떠오른 장면들은, 먼지가 앉은 오래된 영사기의 필름처럼 희미했지만, 그 속의 온기는 생생했다. 기억은 무자비했고, 강윤의 영혼 깊숙한 곳을 찔러왔다.
아버지의 투박한 손
강윤의 눈앞에 투박하지만 단단한 손 하나가 거대하게 확대되어 나타났다. 열 살 때, 자전거를 처음 배우다 넘어져 무릎을 다친 강윤을 일으켜주던 아버지, 차태주의 손이었다. 그는 철공소에서 일했기에 손바닥에는 늘 굳은살이 박혀 있었고, 기름때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아 검게 그을려 있었다.
“울긴 왜 울어, 남자 새끼가! 봐, 아빠 손 잡아. 아빠는 너보다 더 심하게 넘어지면서 컸어. 괜찮아. 다치면서 크는 거야, 아들.”
걸걸한 웃음소리가 이명처럼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강윤은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손에 잡힌 자신의 작은 손의 감촉을 느꼈다. 그 손은 때로는 거칠었지만, 그 어떤 명품 장갑보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 손은 강윤이 자전거를 배울 때, 붕어빵을 사 들고 올 때, 그리고 중학교 입학식 날 교문 앞에서 어색하게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아줄 때 늘 그와 함께 있었다. 그 손에 잡혔던 강윤의 작은 손은, 그의 모든 세계를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기둥이었다.
아버지가 만든 흔들의자
화면이 바뀌었다. 아버지가 늦은 밤까지 작업실에서 땀을 흘리며 강윤의 생일 선물로 나무 흔들의자를 만들던 모습이었다. 톱밥 냄새와 뜨거운 쇠 냄새가 뒤섞인 공간. 아버지는 서툰 솜씨로 나무를 다듬고 사포질을 하며, 투박한 흔들의자를 완성했다. 다음 날 아침, 강윤은 그 흔들의자에 앉아 TV를 보며 행복해했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비록 엉성해도… 아빠의 사랑은 튼튼하게 들어있다. 알지, 아들?”
강윤은 그 흔들의자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예술품이라고 생각했다. 그 흔들의자는 이제 재가 되어버렸지만, 그 속의 사랑은 이 하얀 공허 속에서 영원히 불멸할 것처럼 빛났다. 강윤은 그 흔들의자에 앉으려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손은 그저 허공을 헤집을 뿐이었다. 붙잡을 수 없는 빛의 환영. 아버지의 손과 흔들의자는 그대로 공허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버렸다.
어머니의 따스한 부엌
다음 순간, 흰 공간에 부엌의 노란빛이 감도는 풍경이 떠올랐다. 그의 어머니, 서지윤이 앞치마를 두른 채 냄비 속을 휘젓고 있었다. 바로 강윤이 가장 좋아하는 김치찌개의 냄새가, 이 차가운 시공간을 잠시나마 데우는 듯했다.
“강윤아, 이제 왔니? 얼른 손 씻고 와. 엄마가 너 좋아하는 김치찌개 끓여놨지. 네가 요즘 밤샘 공부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는지 엄마는 다 알아.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힘내야지.”
어머니의 얼굴에는 세상의 어떤 미인도 따라올 수 없는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는 강윤을 향한 순수한 사랑 그 자체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장가였고, 그의 모든 불안과 슬픔을 잠재우는 마법이었다.
시험 망친 날
중학교 2학년, 강윤이 기말고사를 역대급으로 망쳤던 날. 강윤은 어머니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학교가 끝나고도 밤늦게까지 PC방을 전전했다. 밤 11시, 결국 현관문을 열었을 때, 어머니는 거실에서 잠들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윤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엄마… 죄송해요. 이번 시험… 완전히 망쳤어요.”
강윤이 겨우 말을 꺼냈을 때, 어머니는 야단치는 대신 조용히 그를 안아주었다. 그 품은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솜이불 같았다.
“강윤아. 괜찮아. 시험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잖아.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엄마 아빠는 네가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그걸로 돼. 대신 밤늦게 들어와서 걱정시키는 건 나쁜 거야. 알겠지? 이제 라면이라도 끓여줄까? 너 배고플 텐데.”
그녀는 언제나 결과보다 과정을, 성적보다 아들의 마음을 먼저 보듬어주었다. 그 다정한 위로가, 당시 강윤의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잔소리조차 이 공간에서는 메아리 없이 증발하는 헛된 환영이었다. 강윤은 그 환영 속의 김치찌개 냄새를 맡으려 코를 킁킁거렸지만, 그는 그저 차가운 허공 속에서 홀로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세 가족의 평범한 일상
주마등은 더욱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억은 파노라마처럼 그의 의식을 덮쳤다.
* 가족 여행: 낡은 캠코더로 찍은 바닷가 영상. 아버지가 튜브를 타고 파도에 휩쓸려가는 모습을 어머니와 강윤이 깔깔대며 웃는 장면. 그 때의 햇살, 짠 바닷바람의 냄새까지 너무나 생생했다.
* 크리스마스 아침: 어머니가 새벽에 몰래 트리에 선물을 놓아두고 자는 척하다가, 선물을 발견한 강윤의 모습에 환하게 웃던 모습.
* 평범한 저녁 식사: 세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이야기하던 장면. 아버지는 회사 이야기를, 어머니는 동네 이야기를, 강윤은 학교 이야기를 했다.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따뜻했던 그 일상.
이 모든 아름다운 기억들은 공허 속에 갇힌 그를 향한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다. 기억이 생생할수록, 현재 그가 홀로 갇혀 있는 이 텅 빈 공간의 차가움이 더욱 뼈저리게 느껴졌다.
‘나는… 저 시간을 되찾을 수 있었다. 두 번이나… 두 번 모두!’
강윤은 자신의 능력을 원망했다.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능력이 주어져서, 이토록 잔인한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맛보게 하는가. 능력을 갖지 않았다면, 차라리 기억조차 없이 그저 평범하게 상실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알았고, 모든 것을 지키려 했으나, 결국 두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 그 실패는 그를 영원히 고통받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모든 기억의 필름이 멈춘 순간, 하얀 공간은 다시 끔찍한 진실의 핏빛으로 물들었다. 주마등의 잔상 위로, 불타는 집의 현관문이 겹쳐졌다.
붉은 화염 속에서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던 부모님의 모습. 그들의 가슴팍에 선명하게 박혀 있던 검붉은 총상. 아버지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뱉던 피 섞인 목소리와, 어머니의 놀라움으로 가득 찬 채 굳어버린 시선.
“엄마! 아빠! 안 돼요!”
강윤은 전신을 뒤틀며 절규하듯 몸부림쳤다. 그는 부유하는 상태에서 격렬하게 팔과 다리를 휘저었다. 하지만 이 시공간의 감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무력한 몸짓만이 하얀 공간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기억 속의 따뜻한 체온을 만지려 할수록, 현실의 잔인한 총상만이 더욱 선명해졌다.
결국, 강윤은 온몸의 힘을 놓아버렸다. 그는 다시 하얀 침묵 속에 완전히 흡수되어, 무중력 상태로 붕 뜬 채 눈을 감았다. 따뜻했던 모든 것은 이제 사라지고, 영원한 공허만이 남았다.
그의 감정샘이 완전히 말라버린 줄 알았지만, 그의 닫힌 눈꺼풀 아래로, 단 한 방울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그의 모든 절망, 모든 후회, 모든 사랑과 모든 증오를 담고 있었다.
그 눈물은 그가 갇힌 순백의 공간을 아주 느리게, 그러나 명확하게 가르며 흘러갔다. 마치 세상의 마지막 중력이 눈물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눈물은 곧은 궤적을 그리며 하얀 공간 속으로 침잠했다.
눈물이 공간에 닿는 순간,
콰아아아아아-!
고요했던 백색의 공간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강윤의 눈물이 시공간의 균열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눈물이 가진 '감정의 무게'가 이 초월적인 공간의 질서를 거부했다.
푸른 빛이 터져 나오자, 강윤은 자신이 더 이상 공허 속에 있지 않음을 느꼈다. 그의 몸이 벼락 맞은 것처럼 경련하며, 무중력 상태에서 벗어나 무언가 단단한 곳에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는 다시 세상으로 던져졌다.
"크아아악!"
강윤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온몸의 뼈가 삐걱거렸다. 그의 눈앞에는, 이미 차갑게 식어있는 부모님이 앞쪽에 누워있었다.
화염은 희안하게도 더이상 자신과 부모 주의에선 타고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시간을 되돌린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는 달랐다. 그의 어깨를 관통했던 총상의 격렬한 고통이, 여전히 그의 어깨를 관통하고 있었다. 총알은 없었지만, 고통의 잔상만이 끔찍하게 남아 그의 온몸을 짓눌렀다.
그리고 그의 심장 깊은 곳에는, 부모님의 싸늘한 체온과 불타는 집의 냄새, 그리고 지호의 자신의 어버지로 인한 화재로 부모님을 잃은 친구에게 미안해하는 눈빛이 선명한 기억의 족쇄로 새겨져 있었다.
이번의 타임 워프는 리셋이 아니었다. 이전 시점도 아닌 현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전 시간에 겪었던 모든 고통과 기억, 그리고 절대적인 절망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채, 세 번째 삶을 시작했다.
강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슬픔이나 절망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남은, 차갑고 맹렬한 순수한 의지였다. 그의 내면에서는, 모든 인간적인 감정을 초월한, 오직 표진석이라는 존재를 말살하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만이 빛나고 있었다.
‘이 고통을 잊지 않을거야. 이번에는... 나는 절대로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을 겠어.’
강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났다. 그 순간, 주변에 있던 흐트러진 물건들이 바스러지며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의 힘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시공간의 공허 속에서, 그의 초능력은 임계점을 넘어 완전히 '각성' 한 것이다.
강윤은 구겨진 물건들을 내려다보며, 피처럼 붉은 빛이 감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표진석. 이제부터는... 네가 나를 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찾아갈 차례야. 그리고 이번에는 너뿐만이 아니라... 지호를 제외한 너와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할 거야."
그는 새로운 삶, 새로운 힘, 그리고 새로운 증오와 함께, 세 번째 운명의 날을 맞이했다. 새벽의 희미한 햇살이 그의 방을 비추었지만, 그의 눈빛은 밤하늘보다도 깊은 암흑이었다.
지옥의 화염이 세상의 모든 색을 집어삼키고, 푸른 광기의 에너지가 지구를 찢어발기던 그 순간. 절규와 굉음으로 가득 찼던 강윤의 세계는 거짓말처럼, 아주 차갑고 섬뜩한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침묵은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소리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완벽한 '무'의 상태였다. 그의 영혼이 겪는 영원한 상실과 공허를 완벽하게 구현한 물리적인 공간이었다.
강윤은 자신이 더 이상 땅 위에 서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거대한 중력을 잃고,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시공간 속에서 마치 실오라기처럼 공중에 누워 붕 떠 있는 상태였다.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오직 순도 100%의 흰색뿐. 차갑고, 습도도 없고, 방향 감각도 없고, 시간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태초의 얼음처럼 투명한 공허함이었다. 그의 몸에서 솟구쳐 나왔던 에너지는 폭발하는 대신, 이 하얀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그를 잔혹한 시공간 안에 가두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어깨를 꿰뚫었던 총상의 고통, 피와 잿더미의 끈적한 감촉, 부모님의 싸늘한 체온, 이 모든 극심한 감각들은 백색 소음에 짓눌려 아득히 멀어졌다. 그는 완전히 마비된 채, 그저 부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텅.
그의 심장이 뛰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그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 모든 것이 끝났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분노도, 슬픔도, 절망도 이 거대한 흰색 앞에서 무의미해졌다. 감정이 극에 달하면 오히려 모든 것이 증발하여 텅 빈 재만 남는다는 것을 그는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그의 영혼은 이제 깨진 도자기처럼 산산조각 났고, 그 조각들을 붙잡아 줄 어떤 접착제도 세상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이 무한한 백색의 감옥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1초였을 수도 있고, 10년이었을 수도 있었다. 시간의 개념이 소멸한 곳에서는 영원과 순간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그의 의식은 오직 한 가지 사실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실패했다. 두 번째 기회도 허무하게 끝났다. 나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두 번의 기회, 두 번의 절규, 두 번의 상실. 이 잔인한 반복은 그가 겪어야 할 숙명이었던가. 아니면 그의 능력이 결국은 시공간을 거스를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는 증거인가. 그는 그저 물결에 휩쓸려 두 번의 죽음을 목격한 무력한 존재에 불과했는가.
공허를 채우는 온기의 주마등
바로 그때, 그를 감싸고 있던 새하얀 벽이 희미한 색채와 함께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CRT 모니터의 화면이 켜지듯, 검은색 노이즈와 함께 빛이 점멸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소중하며, 지극히 아프게 빛나는 주마등이었다.
푸른색 공허 속에 점점이 떠오른 장면들은, 먼지가 앉은 오래된 영사기의 필름처럼 희미했지만, 그 속의 온기는 생생했다. 기억은 무자비했고, 강윤의 영혼 깊숙한 곳을 찔러왔다.
아버지의 투박한 손
강윤의 눈앞에 투박하지만 단단한 손 하나가 거대하게 확대되어 나타났다. 열 살 때, 자전거를 처음 배우다 넘어져 무릎을 다친 강윤을 일으켜주던 아버지, 차태주의 손이었다. 그는 철공소에서 일했기에 손바닥에는 늘 굳은살이 박혀 있었고, 기름때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아 검게 그을려 있었다.
“울긴 왜 울어, 남자 새끼가! 봐, 아빠 손 잡아. 아빠는 너보다 더 심하게 넘어지면서 컸어. 괜찮아. 다치면서 크는 거야, 아들.”
걸걸한 웃음소리가 이명처럼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강윤은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손에 잡힌 자신의 작은 손의 감촉을 느꼈다. 그 손은 때로는 거칠었지만, 그 어떤 명품 장갑보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 손은 강윤이 자전거를 배울 때, 붕어빵을 사 들고 올 때, 그리고 중학교 입학식 날 교문 앞에서 어색하게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아줄 때 늘 그와 함께 있었다. 그 손에 잡혔던 강윤의 작은 손은, 그의 모든 세계를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기둥이었다.
아버지가 만든 흔들의자
화면이 바뀌었다. 아버지가 늦은 밤까지 작업실에서 땀을 흘리며 강윤의 생일 선물로 나무 흔들의자를 만들던 모습이었다. 톱밥 냄새와 뜨거운 쇠 냄새가 뒤섞인 공간. 아버지는 서툰 솜씨로 나무를 다듬고 사포질을 하며, 투박한 흔들의자를 완성했다. 다음 날 아침, 강윤은 그 흔들의자에 앉아 TV를 보며 행복해했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비록 엉성해도… 아빠의 사랑은 튼튼하게 들어있다. 알지, 아들?”
강윤은 그 흔들의자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예술품이라고 생각했다. 그 흔들의자는 이제 재가 되어버렸지만, 그 속의 사랑은 이 하얀 공허 속에서 영원히 불멸할 것처럼 빛났다. 강윤은 그 흔들의자에 앉으려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손은 그저 허공을 헤집을 뿐이었다. 붙잡을 수 없는 빛의 환영. 아버지의 손과 흔들의자는 그대로 공허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버렸다.
어머니의 따스한 부엌
다음 순간, 흰 공간에 부엌의 노란빛이 감도는 풍경이 떠올랐다. 그의 어머니, 서지윤이 앞치마를 두른 채 냄비 속을 휘젓고 있었다. 바로 강윤이 가장 좋아하는 김치찌개의 냄새가, 이 차가운 시공간을 잠시나마 데우는 듯했다.
“강윤아, 이제 왔니? 얼른 손 씻고 와. 엄마가 너 좋아하는 김치찌개 끓여놨지. 네가 요즘 밤샘 공부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는지 엄마는 다 알아.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힘내야지.”
어머니의 얼굴에는 세상의 어떤 미인도 따라올 수 없는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는 강윤을 향한 순수한 사랑 그 자체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장가였고, 그의 모든 불안과 슬픔을 잠재우는 마법이었다.
시험 망친 날
중학교 2학년, 강윤이 기말고사를 역대급으로 망쳤던 날. 강윤은 어머니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학교가 끝나고도 밤늦게까지 PC방을 전전했다. 밤 11시, 결국 현관문을 열었을 때, 어머니는 거실에서 잠들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윤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엄마… 죄송해요. 이번 시험… 완전히 망쳤어요.”
강윤이 겨우 말을 꺼냈을 때, 어머니는 야단치는 대신 조용히 그를 안아주었다. 그 품은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솜이불 같았다.
“강윤아. 괜찮아. 시험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잖아.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엄마 아빠는 네가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그걸로 돼. 대신 밤늦게 들어와서 걱정시키는 건 나쁜 거야. 알겠지? 이제 라면이라도 끓여줄까? 너 배고플 텐데.”
그녀는 언제나 결과보다 과정을, 성적보다 아들의 마음을 먼저 보듬어주었다. 그 다정한 위로가, 당시 강윤의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잔소리조차 이 공간에서는 메아리 없이 증발하는 헛된 환영이었다. 강윤은 그 환영 속의 김치찌개 냄새를 맡으려 코를 킁킁거렸지만, 그는 그저 차가운 허공 속에서 홀로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세 가족의 평범한 일상
주마등은 더욱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억은 파노라마처럼 그의 의식을 덮쳤다.
* 가족 여행: 낡은 캠코더로 찍은 바닷가 영상. 아버지가 튜브를 타고 파도에 휩쓸려가는 모습을 어머니와 강윤이 깔깔대며 웃는 장면. 그 때의 햇살, 짠 바닷바람의 냄새까지 너무나 생생했다.
* 크리스마스 아침: 어머니가 새벽에 몰래 트리에 선물을 놓아두고 자는 척하다가, 선물을 발견한 강윤의 모습에 환하게 웃던 모습.
* 평범한 저녁 식사: 세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이야기하던 장면. 아버지는 회사 이야기를, 어머니는 동네 이야기를, 강윤은 학교 이야기를 했다.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따뜻했던 그 일상.
이 모든 아름다운 기억들은 공허 속에 갇힌 그를 향한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다. 기억이 생생할수록, 현재 그가 홀로 갇혀 있는 이 텅 빈 공간의 차가움이 더욱 뼈저리게 느껴졌다.
‘나는… 저 시간을 되찾을 수 있었다. 두 번이나… 두 번 모두!’
강윤은 자신의 능력을 원망했다.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능력이 주어져서, 이토록 잔인한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맛보게 하는가. 능력을 갖지 않았다면, 차라리 기억조차 없이 그저 평범하게 상실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알았고, 모든 것을 지키려 했으나, 결국 두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 그 실패는 그를 영원히 고통받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모든 기억의 필름이 멈춘 순간, 하얀 공간은 다시 끔찍한 진실의 핏빛으로 물들었다. 주마등의 잔상 위로, 불타는 집의 현관문이 겹쳐졌다.
붉은 화염 속에서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던 부모님의 모습. 그들의 가슴팍에 선명하게 박혀 있던 검붉은 총상. 아버지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뱉던 피 섞인 목소리와, 어머니의 놀라움으로 가득 찬 채 굳어버린 시선.
“엄마! 아빠! 안 돼요!”
강윤은 전신을 뒤틀며 절규하듯 몸부림쳤다. 그는 부유하는 상태에서 격렬하게 팔과 다리를 휘저었다. 하지만 이 시공간의 감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무력한 몸짓만이 하얀 공간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기억 속의 따뜻한 체온을 만지려 할수록, 현실의 잔인한 총상만이 더욱 선명해졌다.
결국, 강윤은 온몸의 힘을 놓아버렸다. 그는 다시 하얀 침묵 속에 완전히 흡수되어, 무중력 상태로 붕 뜬 채 눈을 감았다. 따뜻했던 모든 것은 이제 사라지고, 영원한 공허만이 남았다.
그의 감정샘이 완전히 말라버린 줄 알았지만, 그의 닫힌 눈꺼풀 아래로, 단 한 방울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그의 모든 절망, 모든 후회, 모든 사랑과 모든 증오를 담고 있었다.
그 눈물은 그가 갇힌 순백의 공간을 아주 느리게, 그러나 명확하게 가르며 흘러갔다. 마치 세상의 마지막 중력이 눈물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눈물은 곧은 궤적을 그리며 하얀 공간 속으로 침잠했다.
눈물이 공간에 닿는 순간,
콰아아아아아-!
고요했던 백색의 공간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강윤의 눈물이 시공간의 균열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눈물이 가진 '감정의 무게'가 이 초월적인 공간의 질서를 거부했다.
푸른 빛이 터져 나오자, 강윤은 자신이 더 이상 공허 속에 있지 않음을 느꼈다. 그의 몸이 벼락 맞은 것처럼 경련하며, 무중력 상태에서 벗어나 무언가 단단한 곳에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는 다시 세상으로 던져졌다.
"크아아악!"
강윤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온몸의 뼈가 삐걱거렸다. 그의 눈앞에는, 이미 차갑게 식어있는 부모님이 앞쪽에 누워있었다.
화염은 희안하게도 더이상 자신과 부모 주의에선 타고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시간을 되돌린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는 달랐다. 그의 어깨를 관통했던 총상의 격렬한 고통이, 여전히 그의 어깨를 관통하고 있었다. 총알은 없었지만, 고통의 잔상만이 끔찍하게 남아 그의 온몸을 짓눌렀다.
그리고 그의 심장 깊은 곳에는, 부모님의 싸늘한 체온과 불타는 집의 냄새, 그리고 지호의 자신의 어버지로 인한 화재로 부모님을 잃은 친구에게 미안해하는 눈빛이 선명한 기억의 족쇄로 새겨져 있었다.
이번의 타임 워프는 리셋이 아니었다. 이전 시점도 아닌 현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전 시간에 겪었던 모든 고통과 기억, 그리고 절대적인 절망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채, 세 번째 삶을 시작했다.
강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슬픔이나 절망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남은, 차갑고 맹렬한 순수한 의지였다. 그의 내면에서는, 모든 인간적인 감정을 초월한, 오직 표진석이라는 존재를 말살하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만이 빛나고 있었다.
‘이 고통을 잊지 않을거야. 이번에는... 나는 절대로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을 겠어.’
강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났다. 그 순간, 주변에 있던 흐트러진 물건들이 바스러지며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의 힘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시공간의 공허 속에서, 그의 초능력은 임계점을 넘어 완전히 '각성' 한 것이다.
강윤은 구겨진 물건들을 내려다보며, 피처럼 붉은 빛이 감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표진석. 이제부터는... 네가 나를 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찾아갈 차례야. 그리고 이번에는 너뿐만이 아니라... 지호를 제외한 너와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할 거야."
그는 새로운 삶, 새로운 힘, 그리고 새로운 증오와 함께, 세 번째 운명의 날을 맞이했다. 새벽의 희미한 햇살이 그의 방을 비추었지만, 그의 눈빛은 밤하늘보다도 깊은 암흑이었다.
작가의 말
등록된 작가의 말이 없습니다.
닫기![]()
초능력 아이 더 오리지널스
25.마지막회조회 : 8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848 24.제23화조회 : 8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44 23.제22화조회 : 10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644 22.제21화조회 : 11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971 21.제20화조회 : 14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574 20.제19화조회 : 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1.2만 19.제18화조회 : 15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118 18.제17화조회 : 15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95 17.제16화조회 : 11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8,037 16.제15화조회 : 14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356 15.제14화조회 : 1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099 14.제13화조회 : 12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221 13.제12화조회 : 12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882 12.제11화조회 : 13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537 11.제10화조회 : 64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155 10.제09화조회 : 71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129 9.제08화조회 : 60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054 8.제07화조회 : 62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691 7.제06화조회 : 76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591 6.제05화조회 : 72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065 5.제04화조회 : 74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989 4.제03화조회 : 90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763 3.제02화조회 : 54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8,431 2.제01화조회 : 62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9,047 1.프롤로그조회 : 1,41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8,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