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2화
조회 : 374 추천 : 0 글자수 : 8,431 자 2025-09-08
제2화
시간은 바닷물의 흐름처럼 조용하고 꾸준하게 흘렀다. 차강윤이 태어난 후 5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차태주와 서지윤의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색채와 무게를 띠게 되었다. 불타는 연구소에서 시작된 과거의 악몽은 깊은 바닷속 난파선처럼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지만,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그 어둡고 차가운 심해까지 비추는 따스한 햇살과도 같았다. 그 빛 아래서 두 사람은 점차 상처를 치유하고, ‘부모’라는 이름의 새로운 삶의 항해를 위태롭지만 꿋꿋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강윤은 놀라울 정도로, 그리고 기적적일 만큼 평범한 아이였다. 부모의 가장 크고 깊은 걱정이 무색할 만큼, 아이는 세상 모든 아기들이 그러하듯 때가 되면 뒤집고, 엉금엉금 기고,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를 했다. 유전자에 저주처럼 각인되었을지도 모를 ‘제노-7’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섯 살이 된 지금은 동네 골목을 대장처럼 누비고 다니기 좋아하는 개구쟁이가 되었다. 닳아빠진 운동화를 신고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다가 무릎이 까지기 일쑤였고, 아이스크림을 입가에 잔뜩 묻힌 채로 엄마에게 달려와 안기며 옷에 초콜릿 자국을 남기곤 했다. 감기에 걸려 콜록거리며 밤새 열이 나기도 했고,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 갖고 싶은 로봇을 사주지 않으면 바닥에 드러누워 온몸으로 떼를 쓰며 두 사람의 애를 태우기도 했다.
그런 지극히 평범하고 때로는 고된 육아의 과정 속에서, 태주와 지윤은 오히려 깊고 진한 위안을 얻었다. 아이에게서 비범함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들이 매일 밤 서로의 손을 잡고 잠들기 전에 간절히 기도하던 가장 큰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평범함. 한때는 지루하고 답답하게만 여겼던 그 단어가, 이제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늘 한 가닥의 불안감이 뱀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 흘러도 결코 무뎌지지 않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과도 같았다. 그들은 강윤에게서 단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아이가 높이 쌓은 블록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때, 홧김에 장난감을 벽에 던질 때, 심지어 악몽을 꾸며 잠꼬대를 하는 아주 사소한 순간에도, 두 사람은 심장이 멎는 듯한 긴장감과 함께 혹시 모를 이상 징후가 나타나지 않을까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것은 세상 모든 부모가 가진 지극한 사랑이었고, 동시에 불타는 연구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만이 가진, 감시에 가까운 비극적인 관찰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네 살배기 강윤이 식탁 의자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던 찰나였다.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지윤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었지만, 이미 아이의 몸은 중력을 따라 바닥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이의 몸이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아주 잠시, 0.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마치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아이는 머리를 부딪히지 않고 엉덩방아를 찧는 정도로 그쳤고, 잠시 울음을 터뜨리다 이내 그쳤다. 태주는 그것이 그저 아이가 운이 좋았거나, 지윤의 착각일 뿐이라고 아내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날 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똑같은 공포를 공유했다. 그것이 착각이 아니었다면? 만약 그것이 아이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힘의 첫 번째 발현이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몸에 깃든 힘을 철저히 봉인했다. 태주는 조선소에서 무거운 철판을 옮길 때 자신도 모르게 솟구치는 힘을 억누르느라 늘 온몸에 긴장을 담고 살았다. 그는 더 이상 새벽 바다에 나가 힘을 시험하지 않았다. 지윤은 설거지를 하거나 책장을 정리할 때, 물건들이 자신의 의지에 미세하게 반응하려는 기미가 보일 때마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들에게 초능력은 이제 자랑스러운 특별함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이에게 결코 들켜서는 안 될 위험하고 추악한 비밀이었다. 평범한 부모가 되는 것. 그것이 두 사람이 아이를 위해 스스로에게 내린,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신성한 과제였다.
“여보, 이것 좀 봐. 강윤이가 그린 거래. 우리 가족이래.”
어느 화창한 주말 오후, 지윤이 웃으며 스케치북 하나를 내밀었다. 이제 막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된 강윤이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그린 그림이었다. 빨간색 크레파스로 그린, 팔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긴 동그라미는 아빠,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동그라미는 엄마,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얼굴보다 더 큰 파란색 모자를 쓴 작은 동그라미는 자신이라고 했다. 배경에는 서툰 솜씨로 그린 바다와 갈매기, 그리고 그들이 사는 작은 집이 그려져 있었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낙서에 가까웠지만, 그 안에는 세 식구의 단란하고 행복한 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우리 아들, 벌써 화가의 소질이 보이는데? 이거 나중에 비싸게 팔리는 거 아니야?”
태주는 일부러 과장된 몸짓을 하며 강윤을 번쩍 들어 올려 목말을 태웠다. 아이는 세상을 다 가진 듯 까르르 웃으며 아빠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 평화로운 광경을 바라보며 지윤은 행복감에 젖었다. 이 작은 행복, 이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행복감의 이면에는, 이 평화가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녀는 가끔, 아무도 모르게 밤을 새워 과거 네오젠 연구소에서 가져온 데이터의 백업 파일을 분석하곤 했다. 남편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그녀만의 비밀이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아들에게 발현될지 모를 제노-7의 부작용이나 위험성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과학자로서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어머니로서 아들을 지키기 위한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매일 새벽, 모두가 잠든 시간에 일어나 체력 단련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이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언젠가 가족을 지켜야 할 순간이 왔을 때 사용할 수 있도록 조용히 연마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소의 무거운 쇠망치를 들어 올릴 때마다, 그것이 아들을 지키기 위한 방패가 될 수도, 혹은 아들에게 상처를 입힐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뇌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불안을 온전히 털어놓지 않았다. 상대방에게 더 큰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차강윤의 평범한 삶’이라는 위태로운 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봄, 두 사람은 큰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바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문제였다. 언제까지고 아이를 부모라는 울타리 안에만 가둬둘 수는 없었다. 아이에게는 다투고 화해하며 관계를 맺어갈 친구가 필요했고, 더 넓은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유치원은 부모의 통제가 닿지 않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정말 괜찮을까?”
유치원 입학 원서를 앞에 두고 지윤이 밤늦도록 잠 못 이루며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만약… 만약에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와 심하게 다투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힘을 쓰게 되면 어떡하지? 우리가 바로 옆에 있어줄 수 없잖아. 다른 아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어.”
“괜찮을 거야.”
태주가 어둠 속에서 아내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그 역시 아내와 똑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계속 걱정하고 불안해하면, 그게 강윤이한테도 전해질 거야. 아이를 믿어주자. 강윤이는 누구보다 착하고 마음이 깊은 아이잖아. 그리고 우리도 예전처럼 무력하지만은 않아. 무슨 일이 생기면, 세상이 무너져도 우리가 지켜주면 돼. 그땐… 더 이상 숨지 않을 거야.”
며칠간의 고민과 부부의 긴 대화 끝에, 두 사람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집에서 가장 가깝고, 아이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존중해주기로 평판이 좋은 ‘햇살 유치원’에 강윤을 등록시켰다. 아이의 첫 사회생활, 그것은 부모에게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들은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내딛는 첫걸음이, 부디 평탄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강윤이 만 5세가 되던 해 봄, 두 사람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언제까지고 아이를 부모라는 이름의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만 가둬둘 수는 없었다. 아이에게는 다투고, 화해하고, 때로는 서로 상처를 주면서 관계를 맺어갈 친구가 필요했고, 더 넓은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것이 평범한 삶의 필수적인 과정임을, 두 사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괜찮을까?”
유치원 입학 원서를 앞에 두고 지윤이 밤늦도록 잠 못 이루며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지난 며칠간의 고민의 흔적이 역력했다.
“만약… 만약에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와 심하게 다투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힘을 쓰게 되면 어떡하지? 우리가 바로 옆에 있어줄 수 없잖아. 다른 아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어. 우리 아이는 평생 괴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게 될 거야.”
“괜찮을 거야.”
태주가 어둠 속에서 아내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지만, 그 역시 아내와 똑같은 두려움에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계속 걱정하고 불안해하면, 그게 강윤이한테도 전해질 거야.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잖아. 아이를 믿어주자. 강윤이는 누구보다 착하고 마음이 깊은 아이잖아. 그리고 우리도 예전처럼 무력하지만은 않아. 무슨 일이 생기면, 세상이 무너져도 우리가 지켜주면 돼. 그땐… 더 이상 숨지 않을 거야.”
며칠간의 고민과 부부의 긴 대화 끝에, 두 사람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집에서 가장 가깝고, 아이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존중해주기로 평판이 좋은 ‘햇살 유치원’에 강윤을 등록시켰다. 아이의 첫 사회생활, 그것은 부모에게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입학식 날, 강윤은 아직 몸에 조금 큰 노란색 원복을 입고 잔뜩 상기된 얼굴로 엄마 아빠의 손을 꼭 잡았다. 교실 안은 아이들의 들뜬 재잘거림과 부모들의 기대 섞인 소음으로 가득했다. 강윤은 낯선 환경에 어색해하며 엄마의 다리 뒤에 바싹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의 눈에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보다,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 보였다.
“강윤아, 저기 봐. 친구들이 많네. 가서 인사해야지.”
지윤이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었다. 하지만 강윤은 고개를 저으며 엄마의 옷자락만 더 꽉 붙잡았다. 바로 그때였다.
“안녕? 난 표지호라고 해.”
조금 마르고 창백한 얼굴의 남자아이가 다가와 강윤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는 강윤과 같은 노란색 원복을 입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나이보다 조숙해 보이는, 차분하고 깊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넌 이름이 뭐야?”
강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엄마의 등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차… 강윤…”
“차강윤? 이름 멋있다. 나는 블록 쌓기 좋아하는데, 너는 뭐 좋아해? 우리 같이 놀래? 저기 공룡 모형 진짜 크다! 티라노사우루스 같아!”
지호는 망설이는 강윤의 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잡아끌었다. 마치 어제도 만났던 친구처럼 스스럼없고 다정한 태도였다. 신기하게도, 낯가림이 심한 강윤은 낯선 아이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순순히 따라나섰다. 두 아이가 나란히 블록 코너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며 지윤과 태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좋은 친구를 만난 것 같네.”
태주의 말에 지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지호라는 아이의 부모를 찾아 눈인사를 나누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교실 한쪽 구석, 다른 부모들과 어울리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서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회사원처럼 보이는 남자였지만, 유난히 날카로운 눈매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남자는 이쪽을 보고 있는 지윤과 눈이 마주치자, 기계적인 동작으로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곧장 시선을 돌려버렸다. 지윤은 어색하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왠지 모를 위화감이 스쳤지만, 아이의 첫 사회생활에 대한 긴장감 때문이려니 하고 넘겼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 남자가 바로 1년 전, 병원 주차장에서 자신의 아들을 ‘관찰 대상’으로 지정했던 표진석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아들 표지호가 지난 몇 달간, ‘차강윤의 신상 정보와 사진을 보며 얼굴을 익히고, 그의 예상 성향에 맞춰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법’을 아버지에게 혹독하게 교육받아왔다는 사실을. 지호의 천진한 얼굴 뒤에 숨겨진 것이 치밀하게 계획된 접근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강윤과 지호는 유치원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마치 자석의 다른 극처럼, 두 아이는 서로에게 강하게 끌렸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강윤은 활발하고 다정한 지호에게 의지하며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웠고, 조숙하고 영리한 지호는 순수하고 마음 깊은 강윤 곁에서 비로소 진짜 어린아이처럼 웃는 법을 배웠다. 그들의 우정은 표진석의 계획된 시나리오 위에서 시작되었지만,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은 계산을 넘어 진심으로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두 아이가 함께 하원하는 날이면, 표진석은 항상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결코 태주나 지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거나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평범한 학부모인 척, 무심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인 척 행동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언제나 강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이의 걸음걸이, 표정 변화, 친구와의 사소한 몸짓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요하게.
매일 밤, 지호는 아버지의 서재에 불려 가 그날 있었던 일들을 보고해야 했다.
“오늘 강윤이는 무엇을 하고 놀았니?”
“점심은 다 먹었니? 싫어하는 반찬은 없었고?”
“다른 친구와 다투지는 않았니? 혹시 화를 내거나, 우는 것을 본 적은?”
지호는 아버지가 왜 강윤에게 그토록 관심이 많은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는 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호야, 강윤이는 아주 특별한 아이란다. 그래서 나쁜 사람들이 강윤이를 데려가려고 할지도 몰라. 아빠는 강윤이가 다치지 않고 잘 자랄 수 있도록 돕고 싶은 거야. 그러니 넌 강윤이 옆에서 오늘 있었던 이상한 일이나 특별한 일을 꼭 아빠한테 말해줘야 해. 그게 강윤이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란다. 넌 강윤이의 수호천사인 거야.’
‘수호천사’. 지호는 그 말이 좋았다. 그는 정말로 강윤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묻는 말에 아는 대로 성실하게 대답했다.
어느 비 오는 하원길, 유치원 처마 밑에서 두 아이가 나란히 앉아 엄마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가 오니까 심심하다. 축구하고 싶은데.”
지호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때, 두 아이의 눈앞에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느릿느릿 시멘트 바닥을 기어가고 있었다. 빗물에 젖은 바닥 위로 반짝이는 길이 생겨났다.
“와, 달팽이다!”
강윤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쪼그려 앉아 작은 생명체의 움직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처마 끝에 포도알처럼 맺혀 있던 커다란 물방울 하나가 뚝, 하고 달팽이 위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 작은 생명에게는 피할 수 없는 홍수나 다름없을 재앙이었다.
“앗!”
강윤이 자신도 모르게 작은 손을 뻗었다. 도와주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 순간, 지호는 보았다. 물방울이 달팽이에 닿기 직전, 아주 기묘하게 경로를 틀어 옆으로 떨어지는 것을. 마치 보이지 않는 바람이 살짝 불어준 것처럼. 너무나 찰나의 순간이라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어? 신기하다. 바람이 불었나 봐.”
강윤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달팽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호의 심장은 평소보다 훨씬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버지가 말했던 ‘이상한 일’. 이것이 바로 그것일까? 그는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해야 할까? 하지만 이걸 말하면 강윤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그날 밤, 지호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다.
“오늘 강윤이랑 뭐 했니? 특별한 일은 없었고?”
“…아니요. 그냥… 달팽이 보고 놀았어요. 비가 와서 다른 건 아무것도 못 했어요.”
지호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표진석은 잠시 아들의 눈을 꿰뚫어 보듯 응시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작은 반항을 눈치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우정이라는 변수가, 자신의 완벽한 실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는 관찰이 될 터였다.
지호는 고개를 들어 멀리 주차된 아버지의 익숙한 검은색 차를 바라보았다. 빗물이 묻은 차창 너머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자, 왠지 모를 무거운 책임감이 어린 마음을 짓눌렀다. 친구의 비밀을 엿본 것 같은 죄책감과, 친구를 지켜야 한다는 아빠와의 약속, 그리고 친구를 지키기 위해 처음으로 아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혼란스러움. 다섯 살 아이의 마음은 감당하기 힘든 무게의 감정들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평화로운 일상이라는 캔버스 위에, 그렇게 첫 번째 그림자가 아주 희미하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앞으로 두 아이의 순수한 우정과 삶을, 그리고 그들의 운명 전체를 어떻게 물들여갈지, 아직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시간은 바닷물의 흐름처럼 조용하고 꾸준하게 흘렀다. 차강윤이 태어난 후 5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차태주와 서지윤의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색채와 무게를 띠게 되었다. 불타는 연구소에서 시작된 과거의 악몽은 깊은 바닷속 난파선처럼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지만,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그 어둡고 차가운 심해까지 비추는 따스한 햇살과도 같았다. 그 빛 아래서 두 사람은 점차 상처를 치유하고, ‘부모’라는 이름의 새로운 삶의 항해를 위태롭지만 꿋꿋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강윤은 놀라울 정도로, 그리고 기적적일 만큼 평범한 아이였다. 부모의 가장 크고 깊은 걱정이 무색할 만큼, 아이는 세상 모든 아기들이 그러하듯 때가 되면 뒤집고, 엉금엉금 기고,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를 했다. 유전자에 저주처럼 각인되었을지도 모를 ‘제노-7’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섯 살이 된 지금은 동네 골목을 대장처럼 누비고 다니기 좋아하는 개구쟁이가 되었다. 닳아빠진 운동화를 신고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다가 무릎이 까지기 일쑤였고, 아이스크림을 입가에 잔뜩 묻힌 채로 엄마에게 달려와 안기며 옷에 초콜릿 자국을 남기곤 했다. 감기에 걸려 콜록거리며 밤새 열이 나기도 했고,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 갖고 싶은 로봇을 사주지 않으면 바닥에 드러누워 온몸으로 떼를 쓰며 두 사람의 애를 태우기도 했다.
그런 지극히 평범하고 때로는 고된 육아의 과정 속에서, 태주와 지윤은 오히려 깊고 진한 위안을 얻었다. 아이에게서 비범함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들이 매일 밤 서로의 손을 잡고 잠들기 전에 간절히 기도하던 가장 큰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평범함. 한때는 지루하고 답답하게만 여겼던 그 단어가, 이제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늘 한 가닥의 불안감이 뱀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 흘러도 결코 무뎌지지 않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과도 같았다. 그들은 강윤에게서 단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아이가 높이 쌓은 블록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때, 홧김에 장난감을 벽에 던질 때, 심지어 악몽을 꾸며 잠꼬대를 하는 아주 사소한 순간에도, 두 사람은 심장이 멎는 듯한 긴장감과 함께 혹시 모를 이상 징후가 나타나지 않을까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것은 세상 모든 부모가 가진 지극한 사랑이었고, 동시에 불타는 연구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만이 가진, 감시에 가까운 비극적인 관찰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네 살배기 강윤이 식탁 의자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던 찰나였다.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지윤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었지만, 이미 아이의 몸은 중력을 따라 바닥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이의 몸이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아주 잠시, 0.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마치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아이는 머리를 부딪히지 않고 엉덩방아를 찧는 정도로 그쳤고, 잠시 울음을 터뜨리다 이내 그쳤다. 태주는 그것이 그저 아이가 운이 좋았거나, 지윤의 착각일 뿐이라고 아내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날 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똑같은 공포를 공유했다. 그것이 착각이 아니었다면? 만약 그것이 아이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힘의 첫 번째 발현이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몸에 깃든 힘을 철저히 봉인했다. 태주는 조선소에서 무거운 철판을 옮길 때 자신도 모르게 솟구치는 힘을 억누르느라 늘 온몸에 긴장을 담고 살았다. 그는 더 이상 새벽 바다에 나가 힘을 시험하지 않았다. 지윤은 설거지를 하거나 책장을 정리할 때, 물건들이 자신의 의지에 미세하게 반응하려는 기미가 보일 때마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들에게 초능력은 이제 자랑스러운 특별함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이에게 결코 들켜서는 안 될 위험하고 추악한 비밀이었다. 평범한 부모가 되는 것. 그것이 두 사람이 아이를 위해 스스로에게 내린,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신성한 과제였다.
“여보, 이것 좀 봐. 강윤이가 그린 거래. 우리 가족이래.”
어느 화창한 주말 오후, 지윤이 웃으며 스케치북 하나를 내밀었다. 이제 막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된 강윤이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그린 그림이었다. 빨간색 크레파스로 그린, 팔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긴 동그라미는 아빠,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동그라미는 엄마,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얼굴보다 더 큰 파란색 모자를 쓴 작은 동그라미는 자신이라고 했다. 배경에는 서툰 솜씨로 그린 바다와 갈매기, 그리고 그들이 사는 작은 집이 그려져 있었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낙서에 가까웠지만, 그 안에는 세 식구의 단란하고 행복한 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우리 아들, 벌써 화가의 소질이 보이는데? 이거 나중에 비싸게 팔리는 거 아니야?”
태주는 일부러 과장된 몸짓을 하며 강윤을 번쩍 들어 올려 목말을 태웠다. 아이는 세상을 다 가진 듯 까르르 웃으며 아빠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 평화로운 광경을 바라보며 지윤은 행복감에 젖었다. 이 작은 행복, 이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행복감의 이면에는, 이 평화가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녀는 가끔, 아무도 모르게 밤을 새워 과거 네오젠 연구소에서 가져온 데이터의 백업 파일을 분석하곤 했다. 남편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그녀만의 비밀이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아들에게 발현될지 모를 제노-7의 부작용이나 위험성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과학자로서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어머니로서 아들을 지키기 위한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매일 새벽, 모두가 잠든 시간에 일어나 체력 단련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이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언젠가 가족을 지켜야 할 순간이 왔을 때 사용할 수 있도록 조용히 연마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소의 무거운 쇠망치를 들어 올릴 때마다, 그것이 아들을 지키기 위한 방패가 될 수도, 혹은 아들에게 상처를 입힐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뇌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불안을 온전히 털어놓지 않았다. 상대방에게 더 큰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차강윤의 평범한 삶’이라는 위태로운 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봄, 두 사람은 큰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바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문제였다. 언제까지고 아이를 부모라는 울타리 안에만 가둬둘 수는 없었다. 아이에게는 다투고 화해하며 관계를 맺어갈 친구가 필요했고, 더 넓은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유치원은 부모의 통제가 닿지 않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정말 괜찮을까?”
유치원 입학 원서를 앞에 두고 지윤이 밤늦도록 잠 못 이루며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만약… 만약에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와 심하게 다투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힘을 쓰게 되면 어떡하지? 우리가 바로 옆에 있어줄 수 없잖아. 다른 아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어.”
“괜찮을 거야.”
태주가 어둠 속에서 아내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그 역시 아내와 똑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계속 걱정하고 불안해하면, 그게 강윤이한테도 전해질 거야. 아이를 믿어주자. 강윤이는 누구보다 착하고 마음이 깊은 아이잖아. 그리고 우리도 예전처럼 무력하지만은 않아. 무슨 일이 생기면, 세상이 무너져도 우리가 지켜주면 돼. 그땐… 더 이상 숨지 않을 거야.”
며칠간의 고민과 부부의 긴 대화 끝에, 두 사람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집에서 가장 가깝고, 아이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존중해주기로 평판이 좋은 ‘햇살 유치원’에 강윤을 등록시켰다. 아이의 첫 사회생활, 그것은 부모에게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들은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내딛는 첫걸음이, 부디 평탄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강윤이 만 5세가 되던 해 봄, 두 사람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언제까지고 아이를 부모라는 이름의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만 가둬둘 수는 없었다. 아이에게는 다투고, 화해하고, 때로는 서로 상처를 주면서 관계를 맺어갈 친구가 필요했고, 더 넓은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것이 평범한 삶의 필수적인 과정임을, 두 사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괜찮을까?”
유치원 입학 원서를 앞에 두고 지윤이 밤늦도록 잠 못 이루며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지난 며칠간의 고민의 흔적이 역력했다.
“만약… 만약에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와 심하게 다투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힘을 쓰게 되면 어떡하지? 우리가 바로 옆에 있어줄 수 없잖아. 다른 아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어. 우리 아이는 평생 괴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게 될 거야.”
“괜찮을 거야.”
태주가 어둠 속에서 아내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지만, 그 역시 아내와 똑같은 두려움에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계속 걱정하고 불안해하면, 그게 강윤이한테도 전해질 거야.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잖아. 아이를 믿어주자. 강윤이는 누구보다 착하고 마음이 깊은 아이잖아. 그리고 우리도 예전처럼 무력하지만은 않아. 무슨 일이 생기면, 세상이 무너져도 우리가 지켜주면 돼. 그땐… 더 이상 숨지 않을 거야.”
며칠간의 고민과 부부의 긴 대화 끝에, 두 사람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집에서 가장 가깝고, 아이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존중해주기로 평판이 좋은 ‘햇살 유치원’에 강윤을 등록시켰다. 아이의 첫 사회생활, 그것은 부모에게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입학식 날, 강윤은 아직 몸에 조금 큰 노란색 원복을 입고 잔뜩 상기된 얼굴로 엄마 아빠의 손을 꼭 잡았다. 교실 안은 아이들의 들뜬 재잘거림과 부모들의 기대 섞인 소음으로 가득했다. 강윤은 낯선 환경에 어색해하며 엄마의 다리 뒤에 바싹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의 눈에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보다,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 보였다.
“강윤아, 저기 봐. 친구들이 많네. 가서 인사해야지.”
지윤이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었다. 하지만 강윤은 고개를 저으며 엄마의 옷자락만 더 꽉 붙잡았다. 바로 그때였다.
“안녕? 난 표지호라고 해.”
조금 마르고 창백한 얼굴의 남자아이가 다가와 강윤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는 강윤과 같은 노란색 원복을 입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나이보다 조숙해 보이는, 차분하고 깊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넌 이름이 뭐야?”
강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엄마의 등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차… 강윤…”
“차강윤? 이름 멋있다. 나는 블록 쌓기 좋아하는데, 너는 뭐 좋아해? 우리 같이 놀래? 저기 공룡 모형 진짜 크다! 티라노사우루스 같아!”
지호는 망설이는 강윤의 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잡아끌었다. 마치 어제도 만났던 친구처럼 스스럼없고 다정한 태도였다. 신기하게도, 낯가림이 심한 강윤은 낯선 아이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순순히 따라나섰다. 두 아이가 나란히 블록 코너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며 지윤과 태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좋은 친구를 만난 것 같네.”
태주의 말에 지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지호라는 아이의 부모를 찾아 눈인사를 나누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교실 한쪽 구석, 다른 부모들과 어울리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서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회사원처럼 보이는 남자였지만, 유난히 날카로운 눈매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남자는 이쪽을 보고 있는 지윤과 눈이 마주치자, 기계적인 동작으로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곧장 시선을 돌려버렸다. 지윤은 어색하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왠지 모를 위화감이 스쳤지만, 아이의 첫 사회생활에 대한 긴장감 때문이려니 하고 넘겼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 남자가 바로 1년 전, 병원 주차장에서 자신의 아들을 ‘관찰 대상’으로 지정했던 표진석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아들 표지호가 지난 몇 달간, ‘차강윤의 신상 정보와 사진을 보며 얼굴을 익히고, 그의 예상 성향에 맞춰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법’을 아버지에게 혹독하게 교육받아왔다는 사실을. 지호의 천진한 얼굴 뒤에 숨겨진 것이 치밀하게 계획된 접근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강윤과 지호는 유치원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마치 자석의 다른 극처럼, 두 아이는 서로에게 강하게 끌렸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강윤은 활발하고 다정한 지호에게 의지하며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웠고, 조숙하고 영리한 지호는 순수하고 마음 깊은 강윤 곁에서 비로소 진짜 어린아이처럼 웃는 법을 배웠다. 그들의 우정은 표진석의 계획된 시나리오 위에서 시작되었지만,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은 계산을 넘어 진심으로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두 아이가 함께 하원하는 날이면, 표진석은 항상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결코 태주나 지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거나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평범한 학부모인 척, 무심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인 척 행동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언제나 강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이의 걸음걸이, 표정 변화, 친구와의 사소한 몸짓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요하게.
매일 밤, 지호는 아버지의 서재에 불려 가 그날 있었던 일들을 보고해야 했다.
“오늘 강윤이는 무엇을 하고 놀았니?”
“점심은 다 먹었니? 싫어하는 반찬은 없었고?”
“다른 친구와 다투지는 않았니? 혹시 화를 내거나, 우는 것을 본 적은?”
지호는 아버지가 왜 강윤에게 그토록 관심이 많은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는 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호야, 강윤이는 아주 특별한 아이란다. 그래서 나쁜 사람들이 강윤이를 데려가려고 할지도 몰라. 아빠는 강윤이가 다치지 않고 잘 자랄 수 있도록 돕고 싶은 거야. 그러니 넌 강윤이 옆에서 오늘 있었던 이상한 일이나 특별한 일을 꼭 아빠한테 말해줘야 해. 그게 강윤이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란다. 넌 강윤이의 수호천사인 거야.’
‘수호천사’. 지호는 그 말이 좋았다. 그는 정말로 강윤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묻는 말에 아는 대로 성실하게 대답했다.
어느 비 오는 하원길, 유치원 처마 밑에서 두 아이가 나란히 앉아 엄마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가 오니까 심심하다. 축구하고 싶은데.”
지호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때, 두 아이의 눈앞에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느릿느릿 시멘트 바닥을 기어가고 있었다. 빗물에 젖은 바닥 위로 반짝이는 길이 생겨났다.
“와, 달팽이다!”
강윤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쪼그려 앉아 작은 생명체의 움직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처마 끝에 포도알처럼 맺혀 있던 커다란 물방울 하나가 뚝, 하고 달팽이 위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 작은 생명에게는 피할 수 없는 홍수나 다름없을 재앙이었다.
“앗!”
강윤이 자신도 모르게 작은 손을 뻗었다. 도와주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 순간, 지호는 보았다. 물방울이 달팽이에 닿기 직전, 아주 기묘하게 경로를 틀어 옆으로 떨어지는 것을. 마치 보이지 않는 바람이 살짝 불어준 것처럼. 너무나 찰나의 순간이라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어? 신기하다. 바람이 불었나 봐.”
강윤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달팽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호의 심장은 평소보다 훨씬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버지가 말했던 ‘이상한 일’. 이것이 바로 그것일까? 그는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해야 할까? 하지만 이걸 말하면 강윤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그날 밤, 지호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다.
“오늘 강윤이랑 뭐 했니? 특별한 일은 없었고?”
“…아니요. 그냥… 달팽이 보고 놀았어요. 비가 와서 다른 건 아무것도 못 했어요.”
지호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표진석은 잠시 아들의 눈을 꿰뚫어 보듯 응시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작은 반항을 눈치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우정이라는 변수가, 자신의 완벽한 실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는 관찰이 될 터였다.
지호는 고개를 들어 멀리 주차된 아버지의 익숙한 검은색 차를 바라보았다. 빗물이 묻은 차창 너머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자, 왠지 모를 무거운 책임감이 어린 마음을 짓눌렀다. 친구의 비밀을 엿본 것 같은 죄책감과, 친구를 지켜야 한다는 아빠와의 약속, 그리고 친구를 지키기 위해 처음으로 아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혼란스러움. 다섯 살 아이의 마음은 감당하기 힘든 무게의 감정들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평화로운 일상이라는 캔버스 위에, 그렇게 첫 번째 그림자가 아주 희미하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앞으로 두 아이의 순수한 우정과 삶을, 그리고 그들의 운명 전체를 어떻게 물들여갈지, 아직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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