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3화
조회 : 302 추천 : 0 글자수 : 7,763 자 2025-09-10
제03화
여름의 끝자락, 귀뚜라미가 매미의 마지막 자리를 빼앗으려 울어대기 시작하던 어느 날 오후였다. 햇살 유치원 마당은 하원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들뜬 웃음소리와 엄마 아빠를 부르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강윤과 지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축축한 모래사장에서 거대한 성을 만들며 놀고 있었다. 성벽을 쌓고, 해자를 파고, 나뭇가지로 깃발을 꽂는, 지극히 평화롭고 순수한 시간. 하루의 끝을 향해 가는 교사들의 나른한 시선과, 아이를 데리러 온 부모들의 다정한 미소가 뒤섞인, 수백 번 반복된 일상 중 하나였다.
바로 그 순간, 유치원 철문이 삐걱거리며 조용히 열렸다.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이름은 박기태. 사채 빚에 쫓겨 막다른 골목에 몰린 남자였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색하듯 아이들을 훑었다. 하원 시간이라 낯선 어른들이 들고나는 것이 자연스러웠기에, 교사들은 그에게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박기태의 시선은 잠시 아이들 사이를 헤매다, 혼자 모래성을 쌓는 데 열중하고 있는 강윤에게 고정되었다. 아이는 또래에 비해 유난히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입고 있는 옷과 신발은 값비싸 보이는 브랜드 제품이었다. 부유한 집의 외동아들. 그가 지난 며칠간 유치원 주변을 맴돌며, 가장 손쉬워 보이는 목표물로 점찍어 둔 아이였다.
박기태는 아이들 근처에 있는 미끄럼틀의 낡은 볼트를 조이는 척하며 완벽한 기회를 엿보았다. 그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태연한 척, 동네 아저씨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한 아이가 울음을 터뜨려 교사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한 그 짧은 틈을 타, 그는 강윤에게 다가갔다.
“꼬마야, 저기 문 앞에 너희 엄마가 와서 기다리시는데, 선생님이 지금 다른 동생 보느라 바쁘셔서 너보고 혼자 오라고 하셔.”
박기태는 최대한 인자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내며 말했다. 그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달콤한 사탕 하나를 꺼내 아이에게 건네려는 제스처까지 취했다. 강윤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에서 나는 낯선 땀 냄새와, 지나치게 친절한 그의 미소에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정말요? 엄마가요?”
“그럼. 저기 저 차, 너희 엄마 차 맞지? 어서 가봐. 늦으면 엄마한테 혼난다.”
남자가 가리킨 곳에는 낡은 흰색 승합차가 서 있었다. 공범인 김철수가 운전석에서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강윤은 잠시 망설였다. 엄마는 항상 교실 앞까지 데리러 와서 자신을 꼭 안아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라는 마법 같은 단어에, 아이의 경계심은 크게 무뎌졌다. 엄마가 정말 급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강윤아, 어디 가?”
그때, 옆에서 성벽을 보수하던 지호가 물었다. 그는 낯선 남자가 강윤에게 말을 거는 것을 처음부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가 오셨대. 저 아저씨가 알려줬어.”
“이상하다. 아주머니는 항상 나한테도 ‘지호 안녕?’ 하고 인사하고 가시는데.”
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아버지, 표진석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 데리러 오면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 아빠가 보낸 사람이라고 해도, 반드시 엄마나 아빠에게 직접 전화를 해서 확인해야 한다.’ 지호는 본능적으로 강윤의 팔을 잡았다.
“강윤아, 가지 마. 우리 엄마 아빠 올 때까지 같이 기다리자. 저 아저씨 좀 이상해.”
박기태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계획에 없던 방해꾼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이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지호의 어깨를 툭 쳤다.
“어허, 꼬마가 의심이 많네. 넌 네 엄마나 기다려. 쟤는 엄마가 급한 일이 있으신가 보지.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거 아니야.”
박기태는 강윤의 등을 떠밀며 서둘러 유치원 문밖으로 이끌었다. 강윤은 지호에게 미안하다는 듯 손을 흔들며 흰색 승합차로 향했다. 차 문이 열리고, 강윤이 안으로 타자마자 차는 부드럽게, 하지만 신속하게 출발했다. 지호는 그 모든 과정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뭔가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의 온몸을 감쌌지만, 다섯 살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서 자신의 엄마나 강윤의 엄마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잠시 후, 지윤이 평소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강윤을 데리러 유치원에 도착했다. 그녀를 맞이한 것은 울먹이며 달려오는 지호와, 그제야 지호의 말을 듣고 상황을 파악하여 사색이 된 유치원 교사였다.
“모르는 남자가 데려갔다고요? 강윤이를요? 흰색 승합차를 타고요?”
지윤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심장이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강윤이 좋아하는 공룡 모양 쿠키가 담긴 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비명 같은 외침이 평화롭던 유치원 마당에 울려 퍼졌다.
강윤이 탄 승합차는 익숙한 동네를 벗어나 점점 낯설고 황량한 길로 접어들었다. 차 안에는 운전하는 김철수와, 옆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박기태가 있었다. 강윤은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불안감을 느꼈다.
“아저씨, 우리 집은 이쪽이 아닌데요. 길을 잘못 드신 것 같아요.”
강윤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박기태의 다정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차갑고 무서운 얼굴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시끄러워. 이제부터 조용히 해. 한 마디만 더 하면 입을 테이프로 막아버릴 테니까.”
그 순간, 강윤은 무언가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는 한참을 더 달려, 인적이 끊긴 거대한 공장 지대에 멈춰 섰다. 남자들은 강윤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어 낡고 버려진 거대한 창고 안으로 데려갔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녹슨 쇠 냄새, 기름 냄새가 뒤섞여 역하게 코를 찔렀다. 창고 안은 어두컴컴했고, 깨진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만이 먼지 쌓인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아저씨들 누구세요? 왜 나를 데리고 왔어요? 우리 엄마 아빠는 어디 있어요?”
강윤의 목소리가 공포로 가늘게 떨렸다.
“우린 돈이 좀 필요하거든. 네 아빠가 돈이 많아 보이던데, 연락해서 돈 좀 달라고 해야겠다.”
김철수가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거액의 빚에 쪼들리다, 며칠간의 사전 답사 끝에 가장 만만해 보이는 아이를 납치해 한몫 챙기려던 어리석은 범죄자들이었다.
“얌전히만 있으면 털끝 하나 안 건드리고 보내줄 테니, 소리 지르거나 도망갈 생각은 마라.”
남자들은 강윤을 먼지 쌓인 창고 구석에 밀어 넣고, 낡은 밧줄로 작은 의자에 몸을 묶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강윤은 웅크린 채 온몸을 떨었다. 무서웠다. 너무 무서워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아빠의 넓은 품이 그리웠다. 그는 눈을 꼭 감고, 이 모든 것이 끔찍한 악몽이기를 바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돈을 요구하는 방식을 두고 남자들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박기태는 당장 아이의 부모에게 전화해서 돈을 요구하자고 주장했고, 김철수는 며칠간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차분하게 접근해야 경찰에 신고할 위험이 적다고 맞섰다.
“당장 전화해서 1억 가져오라고 해! 오늘 밤 안에 끝내자고!”
“미쳤어? 그럼 경찰에 신고할 거 아냐! 며칠 데리고 있으면서 애 사진이라도 찍어 보내고, 진심이라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이 초짜 새끼야!”
점점 거칠어지는 분위기에 강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옥신각신하던 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울음을 터뜨릴 듯한 강윤에게 향했다.
“아, 저 꼬마 표정 보니까 짜증 나네!”
박기태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강윤에게 다가왔다.
“그만 안 울어? 뭘 잘했다고 울려고 해? 한 번만 더 울면 진짜 혼난다!”
남자가 위협적으로 손을 치켜들었다. 강윤은 너무 놀라 울음소리마저 삼킨 채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남자의 화가 더 치밀었다. 아이의 공포에 질린 눈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진짜 말 안 듣네! 버르장마리 없는 놈!”
박기태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강윤의 뺨을 때리기 위해 손을 휘둘렀다. 아이를 향해 날아드는 거대한 손바닥.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절대적인 폭력. 공포가 뇌의 회로를 태워버릴 듯한 그 찰나, 강윤의 머릿속에 단 하나의 생각만이 섬광처럼 남았다.
‘안 돼!’
그것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을 향한,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온 원초적인 절규였다.
쿠콰콰콰쾅-!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에 멎었다가,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강윤을 중심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의 파동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것은 단순한 충격파가 아니었다. 공간 자체를 비트는 듯한, 강력하고 순수한 염력이었다.
아이를 때리려던 박기태의 몸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의 몸은 마치 시속 200km로 달리는 투명한 열차에 정면으로 부딪힌 것처럼 ‘억’ 소리와 함께 뒤로 튕겨 나갔다.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경악과 함께, 자신의 몸이 왜 날아가고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혼란이 담겨 있었다. 그는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10미터는 족히 떨어진 반대편 콘크리트 벽에 세게 처박혔다. 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벽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기며 그는 피를 토하고 그대로 사망했다.
“뭐, 뭐야…!”
그 광경을 보고 경악하던 김철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붙들린 것처럼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의 몸은 마치 걸레처럼 짜이듯 비틀렸고, 뼈가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천장 근처에 처박혔다가 바닥으로 추락해 죽어버렸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주인을 잃고 폭주하는 힘은 창고 안의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수백 킬로그램은 족히 나갈 법한 낡은 프레스 기계가 엿가락처럼 휘어졌고,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쇠파이프들이 뿌리째 뽑혀 허공을 날아다녔다. 창고 지붕의 얇은 함석판들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뜯겨 나갔고, 그 틈으로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이 보였다. 마치 작은 태풍이 창고 내부를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몇 분 후, 모든 파괴가 잠잠해졌다. 아수라장이 된 창고의 중앙, 강윤은 밧줄이 풀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온몸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다 스러졌다. 아이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기억 속에는 자신을 때리려던 무서운 아저씨의 손과, 아주 큰 소리가 났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극심한 공포와 능력의 폭주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 순간의 기억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는 그저 자신을 위협하던 나쁜 아저씨들이 갑자기 아파하며 쓰러졌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부서진 문틈으로 걸어 나왔다. 밖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멀리, 익숙한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그 불빛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야 했다. 엄마와 아빠가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비밀 실험실. 표진석은 수십 개의 모니터를 통해 펼쳐지는 광경을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도시 곳곳에 설치해 둔 CCTV와 통신 감청 시스템을 통해 ‘차강윤 실종 사건’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범인들의 신상과 위치까지 특정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계획에 없던 위험한 돌발 상황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가설을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극한의 스트레스는 잠재된 능력 발현의 가장 효율적인 촉매제가 될 수 있다.’
그는 조용히 강윤의 옷깃에 새의 깃털처럼 가볍게 몰래 부착해 둔 초소형 생체 센서의 데이터 값을 주시했다. 심박수, 아드레날린 수치, 뇌파… 모든 것이 평범한 아이가 느끼는 극도의 공포 수준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모든 데이터 값이 폭발적으로, 측정 범위를 아득히 초과하며 치솟았다가 일순간에 ‘측정 불가(ERROR)’ 상태로 바뀌었다. 센서가 강력하고도 미지의 에너지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타버린 것이다.
표진석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그리고 거의 황홀경에 가까운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드디어 깨어났구나. 내 예상이 맞았어. 너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야. 너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그는 범인들에 시신이 있는 공장의 위치를 익명으로 경찰에 제보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관찰자이자 연구자일 뿐, 시시콜콜한 사건의 해결사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이제 더 흥미로운 관찰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자신의 능력을 인지하지 못하는 초능력자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연구였다.
한편, 지윤과 태주의 집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은 절망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경찰에 신고하고, 연락 가능한 모든 곳에 수소문했지만 아이의 행방은 묘연했다. 태주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제노-7’의 피가 결국 아이에게까지 위험한 일을 내린 것이라며 자책했고, 지윤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자신을 탓하며 눈물만 흘렸다. 온 집안은 생기를 잃고, 차가운 슬픔으로 가득 찬 묘지처럼 변해버렸다.
밤이 깊어갈 무렵, 모든 희망을 거의 포기하고 망연자실해 있던 두 사람의 귀에, 현관문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거의 동시에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멍한 표정으로,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서 있는 강윤이 있었다.
“강윤아!”
지윤은 아이를 와락 끌어안고 오열했다. 태주 역시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다행이었다. 아이가 무사히 돌아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옥 같았던 지난 몇 시간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누가 널 데려갔었어? 다친 데는 없어? 몸은 괜찮은 거야?”
태주가 아이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며 다급하게 물었다. 하지만 강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극심한 공포와 충격으로 기억의 일부가 하얗게 지워진 듯했다. 아이는 그저
“나쁜 아저씨들이 있었어. 아주 무서웠어.”
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다가, 엄마의 품에 안겨 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두 사람은 아이가 겪었을 정신적 충격이 너무나도 크다고만 생각했다. 그들은 강윤이 어떻게 수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혼자 집을 찾아왔는지,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의문을 잠시 잊기로 했다. 그저 아이가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지금은 아이를 보살피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그 평화롭고 눈물겨운 재회의 순간을, 어둠 속에서 차갑게 지켜보는 또 다른 눈이 있었다.
강윤의 집 건너편, 불 꺼진 차 안에서 표진석은 고성GLISH 성능 야간 망원경으로 그들의 집 안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태블릿을 켰다. 그리고
‘관찰 보고서: 차강윤’
파일에 새로운 메모를 추가했다.
[결론: 외부의 우발적 자극에 의해 능력 발현 확인. 방출된 에너지의 규모는 예측을 월등히 초과함. 파괴력의 수준은 초기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활용 가치가 매우 높을 것으로 판단됨. 대상은 현재 자신의 능력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이며, 트라우마로 인한 기억 봉인 현상이 관측됨. 이는 매우 흥미로운 관찰 포인트임.]
[향후 계획: 아들(표지호)을 통한 장기적이고 일상적인 심리적 유도 및 데이터 수집 방식을 유지. 대상이 무의식적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순간들을 포착하는 것에 집중할 것. 오늘의 사건이 대상의 무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함. 소꿉친구라는 관계는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실험 환경을 제공한다.]
표진석은 차의 시동을 걸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 밤의 사건으로, 강윤의 평화로웠던 삶에는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그 틈을 통해, 아이 자신도 모르는 거대한 힘, 포식자와도 같은 능력이 처음으로 세상에 그 이빨을 드러냈다. 평화로운 일상은 산산조각 났고, 이제 아무것도 예전 같을 수는 없었다. 소년의 운명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폭풍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름의 끝자락, 귀뚜라미가 매미의 마지막 자리를 빼앗으려 울어대기 시작하던 어느 날 오후였다. 햇살 유치원 마당은 하원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들뜬 웃음소리와 엄마 아빠를 부르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강윤과 지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축축한 모래사장에서 거대한 성을 만들며 놀고 있었다. 성벽을 쌓고, 해자를 파고, 나뭇가지로 깃발을 꽂는, 지극히 평화롭고 순수한 시간. 하루의 끝을 향해 가는 교사들의 나른한 시선과, 아이를 데리러 온 부모들의 다정한 미소가 뒤섞인, 수백 번 반복된 일상 중 하나였다.
바로 그 순간, 유치원 철문이 삐걱거리며 조용히 열렸다.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이름은 박기태. 사채 빚에 쫓겨 막다른 골목에 몰린 남자였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색하듯 아이들을 훑었다. 하원 시간이라 낯선 어른들이 들고나는 것이 자연스러웠기에, 교사들은 그에게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박기태의 시선은 잠시 아이들 사이를 헤매다, 혼자 모래성을 쌓는 데 열중하고 있는 강윤에게 고정되었다. 아이는 또래에 비해 유난히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입고 있는 옷과 신발은 값비싸 보이는 브랜드 제품이었다. 부유한 집의 외동아들. 그가 지난 며칠간 유치원 주변을 맴돌며, 가장 손쉬워 보이는 목표물로 점찍어 둔 아이였다.
박기태는 아이들 근처에 있는 미끄럼틀의 낡은 볼트를 조이는 척하며 완벽한 기회를 엿보았다. 그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태연한 척, 동네 아저씨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한 아이가 울음을 터뜨려 교사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한 그 짧은 틈을 타, 그는 강윤에게 다가갔다.
“꼬마야, 저기 문 앞에 너희 엄마가 와서 기다리시는데, 선생님이 지금 다른 동생 보느라 바쁘셔서 너보고 혼자 오라고 하셔.”
박기태는 최대한 인자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내며 말했다. 그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달콤한 사탕 하나를 꺼내 아이에게 건네려는 제스처까지 취했다. 강윤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에서 나는 낯선 땀 냄새와, 지나치게 친절한 그의 미소에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정말요? 엄마가요?”
“그럼. 저기 저 차, 너희 엄마 차 맞지? 어서 가봐. 늦으면 엄마한테 혼난다.”
남자가 가리킨 곳에는 낡은 흰색 승합차가 서 있었다. 공범인 김철수가 운전석에서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강윤은 잠시 망설였다. 엄마는 항상 교실 앞까지 데리러 와서 자신을 꼭 안아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라는 마법 같은 단어에, 아이의 경계심은 크게 무뎌졌다. 엄마가 정말 급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강윤아, 어디 가?”
그때, 옆에서 성벽을 보수하던 지호가 물었다. 그는 낯선 남자가 강윤에게 말을 거는 것을 처음부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가 오셨대. 저 아저씨가 알려줬어.”
“이상하다. 아주머니는 항상 나한테도 ‘지호 안녕?’ 하고 인사하고 가시는데.”
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아버지, 표진석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 데리러 오면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 아빠가 보낸 사람이라고 해도, 반드시 엄마나 아빠에게 직접 전화를 해서 확인해야 한다.’ 지호는 본능적으로 강윤의 팔을 잡았다.
“강윤아, 가지 마. 우리 엄마 아빠 올 때까지 같이 기다리자. 저 아저씨 좀 이상해.”
박기태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계획에 없던 방해꾼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이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지호의 어깨를 툭 쳤다.
“어허, 꼬마가 의심이 많네. 넌 네 엄마나 기다려. 쟤는 엄마가 급한 일이 있으신가 보지.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거 아니야.”
박기태는 강윤의 등을 떠밀며 서둘러 유치원 문밖으로 이끌었다. 강윤은 지호에게 미안하다는 듯 손을 흔들며 흰색 승합차로 향했다. 차 문이 열리고, 강윤이 안으로 타자마자 차는 부드럽게, 하지만 신속하게 출발했다. 지호는 그 모든 과정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뭔가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의 온몸을 감쌌지만, 다섯 살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서 자신의 엄마나 강윤의 엄마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잠시 후, 지윤이 평소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강윤을 데리러 유치원에 도착했다. 그녀를 맞이한 것은 울먹이며 달려오는 지호와, 그제야 지호의 말을 듣고 상황을 파악하여 사색이 된 유치원 교사였다.
“모르는 남자가 데려갔다고요? 강윤이를요? 흰색 승합차를 타고요?”
지윤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심장이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강윤이 좋아하는 공룡 모양 쿠키가 담긴 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비명 같은 외침이 평화롭던 유치원 마당에 울려 퍼졌다.
강윤이 탄 승합차는 익숙한 동네를 벗어나 점점 낯설고 황량한 길로 접어들었다. 차 안에는 운전하는 김철수와, 옆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박기태가 있었다. 강윤은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불안감을 느꼈다.
“아저씨, 우리 집은 이쪽이 아닌데요. 길을 잘못 드신 것 같아요.”
강윤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박기태의 다정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차갑고 무서운 얼굴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시끄러워. 이제부터 조용히 해. 한 마디만 더 하면 입을 테이프로 막아버릴 테니까.”
그 순간, 강윤은 무언가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는 한참을 더 달려, 인적이 끊긴 거대한 공장 지대에 멈춰 섰다. 남자들은 강윤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어 낡고 버려진 거대한 창고 안으로 데려갔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녹슨 쇠 냄새, 기름 냄새가 뒤섞여 역하게 코를 찔렀다. 창고 안은 어두컴컴했고, 깨진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만이 먼지 쌓인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아저씨들 누구세요? 왜 나를 데리고 왔어요? 우리 엄마 아빠는 어디 있어요?”
강윤의 목소리가 공포로 가늘게 떨렸다.
“우린 돈이 좀 필요하거든. 네 아빠가 돈이 많아 보이던데, 연락해서 돈 좀 달라고 해야겠다.”
김철수가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거액의 빚에 쪼들리다, 며칠간의 사전 답사 끝에 가장 만만해 보이는 아이를 납치해 한몫 챙기려던 어리석은 범죄자들이었다.
“얌전히만 있으면 털끝 하나 안 건드리고 보내줄 테니, 소리 지르거나 도망갈 생각은 마라.”
남자들은 강윤을 먼지 쌓인 창고 구석에 밀어 넣고, 낡은 밧줄로 작은 의자에 몸을 묶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강윤은 웅크린 채 온몸을 떨었다. 무서웠다. 너무 무서워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아빠의 넓은 품이 그리웠다. 그는 눈을 꼭 감고, 이 모든 것이 끔찍한 악몽이기를 바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돈을 요구하는 방식을 두고 남자들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박기태는 당장 아이의 부모에게 전화해서 돈을 요구하자고 주장했고, 김철수는 며칠간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차분하게 접근해야 경찰에 신고할 위험이 적다고 맞섰다.
“당장 전화해서 1억 가져오라고 해! 오늘 밤 안에 끝내자고!”
“미쳤어? 그럼 경찰에 신고할 거 아냐! 며칠 데리고 있으면서 애 사진이라도 찍어 보내고, 진심이라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이 초짜 새끼야!”
점점 거칠어지는 분위기에 강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옥신각신하던 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울음을 터뜨릴 듯한 강윤에게 향했다.
“아, 저 꼬마 표정 보니까 짜증 나네!”
박기태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강윤에게 다가왔다.
“그만 안 울어? 뭘 잘했다고 울려고 해? 한 번만 더 울면 진짜 혼난다!”
남자가 위협적으로 손을 치켜들었다. 강윤은 너무 놀라 울음소리마저 삼킨 채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남자의 화가 더 치밀었다. 아이의 공포에 질린 눈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진짜 말 안 듣네! 버르장마리 없는 놈!”
박기태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강윤의 뺨을 때리기 위해 손을 휘둘렀다. 아이를 향해 날아드는 거대한 손바닥.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절대적인 폭력. 공포가 뇌의 회로를 태워버릴 듯한 그 찰나, 강윤의 머릿속에 단 하나의 생각만이 섬광처럼 남았다.
‘안 돼!’
그것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을 향한,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온 원초적인 절규였다.
쿠콰콰콰쾅-!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에 멎었다가,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강윤을 중심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의 파동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것은 단순한 충격파가 아니었다. 공간 자체를 비트는 듯한, 강력하고 순수한 염력이었다.
아이를 때리려던 박기태의 몸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의 몸은 마치 시속 200km로 달리는 투명한 열차에 정면으로 부딪힌 것처럼 ‘억’ 소리와 함께 뒤로 튕겨 나갔다.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경악과 함께, 자신의 몸이 왜 날아가고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혼란이 담겨 있었다. 그는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10미터는 족히 떨어진 반대편 콘크리트 벽에 세게 처박혔다. 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벽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기며 그는 피를 토하고 그대로 사망했다.
“뭐, 뭐야…!”
그 광경을 보고 경악하던 김철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붙들린 것처럼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의 몸은 마치 걸레처럼 짜이듯 비틀렸고, 뼈가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천장 근처에 처박혔다가 바닥으로 추락해 죽어버렸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주인을 잃고 폭주하는 힘은 창고 안의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수백 킬로그램은 족히 나갈 법한 낡은 프레스 기계가 엿가락처럼 휘어졌고,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쇠파이프들이 뿌리째 뽑혀 허공을 날아다녔다. 창고 지붕의 얇은 함석판들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뜯겨 나갔고, 그 틈으로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이 보였다. 마치 작은 태풍이 창고 내부를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몇 분 후, 모든 파괴가 잠잠해졌다. 아수라장이 된 창고의 중앙, 강윤은 밧줄이 풀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온몸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다 스러졌다. 아이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기억 속에는 자신을 때리려던 무서운 아저씨의 손과, 아주 큰 소리가 났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극심한 공포와 능력의 폭주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 순간의 기억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는 그저 자신을 위협하던 나쁜 아저씨들이 갑자기 아파하며 쓰러졌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부서진 문틈으로 걸어 나왔다. 밖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멀리, 익숙한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그 불빛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야 했다. 엄마와 아빠가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비밀 실험실. 표진석은 수십 개의 모니터를 통해 펼쳐지는 광경을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도시 곳곳에 설치해 둔 CCTV와 통신 감청 시스템을 통해 ‘차강윤 실종 사건’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범인들의 신상과 위치까지 특정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계획에 없던 위험한 돌발 상황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가설을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극한의 스트레스는 잠재된 능력 발현의 가장 효율적인 촉매제가 될 수 있다.’
그는 조용히 강윤의 옷깃에 새의 깃털처럼 가볍게 몰래 부착해 둔 초소형 생체 센서의 데이터 값을 주시했다. 심박수, 아드레날린 수치, 뇌파… 모든 것이 평범한 아이가 느끼는 극도의 공포 수준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모든 데이터 값이 폭발적으로, 측정 범위를 아득히 초과하며 치솟았다가 일순간에 ‘측정 불가(ERROR)’ 상태로 바뀌었다. 센서가 강력하고도 미지의 에너지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타버린 것이다.
표진석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그리고 거의 황홀경에 가까운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드디어 깨어났구나. 내 예상이 맞았어. 너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야. 너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그는 범인들에 시신이 있는 공장의 위치를 익명으로 경찰에 제보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관찰자이자 연구자일 뿐, 시시콜콜한 사건의 해결사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이제 더 흥미로운 관찰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자신의 능력을 인지하지 못하는 초능력자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연구였다.
한편, 지윤과 태주의 집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은 절망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경찰에 신고하고, 연락 가능한 모든 곳에 수소문했지만 아이의 행방은 묘연했다. 태주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제노-7’의 피가 결국 아이에게까지 위험한 일을 내린 것이라며 자책했고, 지윤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자신을 탓하며 눈물만 흘렸다. 온 집안은 생기를 잃고, 차가운 슬픔으로 가득 찬 묘지처럼 변해버렸다.
밤이 깊어갈 무렵, 모든 희망을 거의 포기하고 망연자실해 있던 두 사람의 귀에, 현관문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거의 동시에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멍한 표정으로,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서 있는 강윤이 있었다.
“강윤아!”
지윤은 아이를 와락 끌어안고 오열했다. 태주 역시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다행이었다. 아이가 무사히 돌아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옥 같았던 지난 몇 시간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누가 널 데려갔었어? 다친 데는 없어? 몸은 괜찮은 거야?”
태주가 아이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며 다급하게 물었다. 하지만 강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극심한 공포와 충격으로 기억의 일부가 하얗게 지워진 듯했다. 아이는 그저
“나쁜 아저씨들이 있었어. 아주 무서웠어.”
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다가, 엄마의 품에 안겨 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두 사람은 아이가 겪었을 정신적 충격이 너무나도 크다고만 생각했다. 그들은 강윤이 어떻게 수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혼자 집을 찾아왔는지,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의문을 잠시 잊기로 했다. 그저 아이가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지금은 아이를 보살피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그 평화롭고 눈물겨운 재회의 순간을, 어둠 속에서 차갑게 지켜보는 또 다른 눈이 있었다.
강윤의 집 건너편, 불 꺼진 차 안에서 표진석은 고성GLISH 성능 야간 망원경으로 그들의 집 안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태블릿을 켰다. 그리고
‘관찰 보고서: 차강윤’
파일에 새로운 메모를 추가했다.
[결론: 외부의 우발적 자극에 의해 능력 발현 확인. 방출된 에너지의 규모는 예측을 월등히 초과함. 파괴력의 수준은 초기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활용 가치가 매우 높을 것으로 판단됨. 대상은 현재 자신의 능력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이며, 트라우마로 인한 기억 봉인 현상이 관측됨. 이는 매우 흥미로운 관찰 포인트임.]
[향후 계획: 아들(표지호)을 통한 장기적이고 일상적인 심리적 유도 및 데이터 수집 방식을 유지. 대상이 무의식적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순간들을 포착하는 것에 집중할 것. 오늘의 사건이 대상의 무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함. 소꿉친구라는 관계는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실험 환경을 제공한다.]
표진석은 차의 시동을 걸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 밤의 사건으로, 강윤의 평화로웠던 삶에는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그 틈을 통해, 아이 자신도 모르는 거대한 힘, 포식자와도 같은 능력이 처음으로 세상에 그 이빨을 드러냈다. 평화로운 일상은 산산조각 났고, 이제 아무것도 예전 같을 수는 없었다. 소년의 운명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폭풍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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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 아이 더 오리지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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