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4화
조회 : 105 추천 : 0 글자수 : 7,989 자 2025-10-06
제4화
시간은 상처를 무디게 만들었지만, 결코 완벽하게 지워주지는 못했다. 끔찍했던 유괴 사건 이후 6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절반쯤 변한다는 시간. 강윤은 어느덧 젖살이 빠지고 턱선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덥수룩한 머리의 초등학교 5학년 소년이 되어 있었다. 아이의 키는 지난 1년간 10센티미터나 훌쩍 자랐고, 맑고 높았던 목소리는 변성기를 맞아 조금씩 굵고 어색하게 갈라지곤 했다. 겉보기에는 교실 창가 자리에 앉아 친구들과 시시덕거리기를 좋아하고, 축구공 하나만 있으면 하루 종일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여느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하고 건강한 소년이었다.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그의 내면에 새겨진 균열은 지워지지 않는 수성펜 자국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강윤은 6년 전 그날의 일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했다. 어린아이의 정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끔찍했던 공포와 충격. 그의 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날의 기억 위에 두껍고 축축한 안개의 장막을 쳐버린 탓이었다. 그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그저 ‘나쁜 아저씨들’과 ‘축축하고 어두웠던 창고’, ‘역한 쇠 냄새’ 같은 막연하고 파편적인 공포의 조각들뿐이었다. 마치 조각난 거울처럼, 그날의 진실을 온전히 비추지 못했다.하지만 그 조각들은 끈질기게 아이의 잠을 파고들었다. 그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악몽을 꾸며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꿈속에서 그는 언제나 어둡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고, 정체 모를 위협에 쫓기고 있었다. 그 결과, 그는 어둡고 폐쇄된 공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할 때도 결코 좁은 벽장 안에는 숨지 않았고, 텅 빈 엘리베이터를 혼자 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불 꺼진 창고 같은 곳에 혼자 남겨지면 어김없이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조여 오는 듯한 과호흡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낯선 어른에 대한 경계심도 병적으로 강해졌다. 길을 묻는 친절한 어른에게도,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굳히고 시선을 피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이 무례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인 거부감을 이겨낼 수 없었다.태주와 지윤은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심장이 저미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들은 아이의 심리 치료를 위해 용하다는 아동 상담 센터는 모두 찾아다녔다. 하지만 상담사는 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입니다. 아이가 겪은 충격이 너무 큽니다. 약물 치료보다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충분한 사랑을 주며 아이가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려주시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 ‘기다림’이라는 단어만큼 부모에게 잔인한 것은 없었다.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부모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그들은 아이가 다시는 단 1초라도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거의 편집증에 가까운 보호를 시작했다. 등하교는 무조건 부모 중 한 명이 동행했고, 학원이나 친구 집에 갈 때도 위치 추적이 가능한 스마트 워치를 채워 5분마다 스마트폰으로 위치를 확인했다. 아이가 집에 돌아오면,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오늘 있었던 일들을 캐물으며, 아이의 심리 상태에 작은 변화라도 없는지 살폈다.강윤은 그런 부모의 걱정과 지극한 사랑을 이해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사랑은 때로는 자신을 옭아매는 보이지 않는 사슬처럼 느껴져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그는 친구들처럼 혼자서 분식집에 가고, PC방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차마 부모님께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자신의 어설픈 반항이, 부모님에게 또 다른 상처와 불안을 안겨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그렇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감옥 안에서 조용히 성장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 갑갑한 감옥에도 작은 창문은 있었다. 강윤의 곁에는 언제나 표지호가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초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여전히 가장 친한, 소위 ‘영혼의 단짝’이라 불리는 사이였다. 지호의 존재는 강윤에게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이자, 숨 막히는 현실에서 잠시나마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창문과도 같았다. 활달하고 사교적인 지호는 내성적인 강윤을 다른 친구들의 무리로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그가 없었다면, 강윤은 아마 교실 구석에서 혼자 책만 읽는 외톨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지호는 강윤의 말 못 할 불안감을 유일하게 알아주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주는 이해자였다. 강윤이 악몽을 꾼 다음 날이면, 지호는 귀신같이 그의 안색을 알아보고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기분을 풀어주려 애썼다. 강윤이 낯선 어른 앞에서 쭈뼛거리면, 지호는 먼저 나서서 어른과 대화하며 강윤을 보호해주었다.
“괜찮아? 또 그 꿈 꿨어?”
어느 날 아침, 학교 가는 길에 강윤의 안색이 유난히 창백하고 눈이 퀭한 것을 보고 지호가 툭, 하고 물었다. 강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도 그는 꿈속에서 자신을 쫓는 거대한 그림자와, 녹슨 철문이 닫히는 끔찍한 소리를 들으며 비명을 지르다 잠에서 깼다.
“에이, 또 그 꿈. 야, 그거 그냥 개꿈이야, 개꿈. 네가 어제 저녁에 피자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래. 잊어버려. 이따 점심시간에 축구 한판하면 싹 날아갈걸? 내가 오늘 너한테만 패스 몰아줘서 골 넣어줄게.”
지호는 장난스럽게 강윤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강윤도 마주 희미하게 웃었다. 지호의 저런 가벼움이 좋았다. 자신의 어둡고 무거운 상처를, 마치 별것 아닌 감기 몸살처럼 만들어주는 그의 쾌활함이 늘 고마웠다.하지만 지호의 마음 한구석은 늘 묵직한 납덩이가 들어앉은 듯 무거웠다. 그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아버지 표진석의 서재에 불려 가 ‘차강윤 일일 관찰 보고’를 해야 했다. 강윤의 기분, 성적, 교우 관계, 심지어 점심시간에 어떤 반찬을 남겼는지까지. 아버지의 질문은 날이 갈수록 더 집요하고 세밀해졌다.
처음 유치원 시절에는, 아버지가 말한 ‘수호천사’의 임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생각이 깊어지면서, 그것이 감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아버지의 집요하고 날카로운 질문들은 때로 날 선 송곳이 되어 그의 양심을 찔렀다. 특히 아버지는 ‘이상 현상’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했다.
"오늘 강윤이가 특별히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기뻐한 적은 없었니? 감정이 격해졌을 때, 주변에 뭔가 이상한 일은 없었고? 물건을 만지지 않았는데 움직인다거나, 네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본 적은? 아주 사소한 거라도 괜찮으니 기억나는 대로 말해보렴. 이건 모두 강윤이를 위한 거란다."
지호는 늘
“아니요, 없었어요. 그냥 똑같았어요.”
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대부분 사실이기도 했지만, 유치원 시절 달팽이 사건처럼 마음속에 걸리는 몇몇 순간들을 애써 외면한, 소극적인 거짓말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가 강윤에게서 무언가 ‘특별하고 위험한 것’을 찾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아버지로부터 지켜줘야 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를 속이는, 아슬아슬하고 고독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 무게는 열한 살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운 것이었다.
유괴 사건 이후, 강윤의 폭발적인 능력은 깊고 어두운 무의식의 바다 밑으로 다시 가라앉았다. 마치 거대한 화산이 폭발한 뒤, 다음 분출을 위해 오랜 시간 용암을 축적하며 휴면기에 들어간 것처럼.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마치 수면 아래를 유영하는 거대한 고래가 가끔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그 모습을 살짝 드러내듯, 그의 능력은 아주 사소하고 미미한 형태로,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상 속에 스며 나오곤 했다. 강윤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사소하고 찰나적인 순간들이었다.한 번은 과학 시간, 알코올램프로 비커의 물을 끓이는 실험을 하던 중이었다. 조별로 진행된 실험에서, 같은 조의 장난기 많은 친구가 다른 조와 떠들다가 팔꿈치로 알코올램프를 쳤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램프는 결국 균형을 잃고 넘어졌고, 불붙은 심지가 포물선을 그리며 강윤의 손등으로 떨어지려 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앗, 뜨거워!”
강윤이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빼는 순간, 그와 같은 조였던 아이들 모두가 보았다. 불붙은 심지가 강윤의 손등 피부에 닿기 직전,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의 거리에서, 마치 보이지 않는 바람에 밀려나듯 옆으로 휙- 하고 날아가 실험대 바닥에 떨어져 치이익, 소리를 내며 꺼지는 것을. 너무나 순식간에, 찰나처럼 일어난 일이라, 아이들은 그저
“우와, 운이 좋았네.”
“창문 열려 있어서 바람이 불었나 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 순간, 강윤은 자신의 손 주변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젤리처럼 끈끈하고 무겁게 일렁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기분 나쁜 감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뜨거운 불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안전하고 포근한 느낌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또 한 번은 체육 시간, 학급 대항 피구 시합 중이었다. 운동신경이 둔한 강윤은 늘 공을 피하기에 급급해, 시작한 지 1분도 안 되어 아웃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날도 그는 상대편 코트에서 쉴 새 없이 날아오는 공을 피해 코트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상대편 에이스인, 덩치 큰 친구가 그런 강윤을 발견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있는 힘껏 공을 던졌다.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온 공은, 피할 틈도 없이 정확하게 강윤의 얼굴을 향했다.
“으악!”
강윤은 공포에 질려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묵직하고 얼얼한 고통이 얼굴을 강타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1초, 2초가 지나도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이상하게 생각하며 눈을 떠보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공은 그의 코앞 몇 센티미터 거리에서,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아주 천천히, 끈적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공의 붉은색 표면에 새겨진 상표와 닳아빠진 실밥까지, 슬로우 모션 비디오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는 이내 모든 힘을 잃은 채, ‘툭’ 하고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야, 너 뭐냐? 공에 바람 빠졌잖아! 아, 김 샜네!”
공을 던진 아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터덜터덜 굴러가는 공에만 신경 쓸 뿐, 아무도 그 이상한 현상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직 지호만이, 강윤의 굳은 표정과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 그리고 안도와 극심한 혼란이 뒤섞인 그의 눈빛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그날 밤,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보고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밤새 뒤척였다. 결국 그는, ‘공에 정말 바람이 빠져 있었던 것 같다’고 거짓말을 했다. 친구를 향한 죄책감이 아버지에 대한 의무감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이긴 밤이었다.이런 일들이 반복될수록, 강윤의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의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이상한 일이 생기지? 왜 항상 위험한 순간에, 말도 안 되는 행운이 따르는 걸까?’
그는 자신이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혹시 내가 어딘가 아픈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인 동시에,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비밀을 가진 것만 같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떨리는 호기심이기도 했다.결정적인 사건은 중학교 입학을 앞둔,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렸던 겨울방학에 일어났다. 부모님이 잠시 장을 보러 나간 사이, 강윤은 혼자 거실에 앉아 새로 산 게임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전투에 몇 시간 동안 몰두하던 그는, 갈증을 느껴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차가운 유리컵에 가득 따랐다. 그리고 다시 게임기에 정신이 팔려, 컵을 소파 팔걸이 끝,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곳에 아슬아슬하게 올려놓았다.
“아차!”
결정적인 순간, 보스를 거의 다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고 캐릭터가 쓰러지자, 강윤은 안타까움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척였다. 바로 그 순간, 그의 팔꿈치가 정확하게 유리컵을 치고 말았다. 오렌지 주스가 가득 담긴 유리컵이 소파 아래, 얼마 전 엄마가 큰맘 먹고 새로 산 아이보리색 카펫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했다. 지울 수 없는 흉측한 얼룩이 생길 것이고, 엄마에게 엄청나게 야단맞을 것이다. 그 생각에 강윤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안 돼!’
그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기묘하고도 압도적인 감각이 그를 덮쳤다.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거실 벽에 걸린 괘종시계의 ‘째깍째깍’하는 초침 소리도, 냉장고의 ‘웅-’하는 모터 돌아가는 소리도, 창밖의 매서운 겨울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완벽한 진공의 세계. 오직 그의 눈앞, 공중에 떠 있는 유리컵만이 보였다. 컵은 바닥에 닿기 직전, 약 10센티미터 상공에서 완벽하게 정지해 있었다. 컵에서 흘러나온 오렌지 주스 방울들마저 공중에서 영롱한 보석처럼 동그란 모양을 유지한 채 멈춰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겨울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그 광경은 마치 한 폭의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비현실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했다.강윤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운이 좋았던 것도, 바람이 분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자신의 의지가, 자신의 간절한 마음이 이 시간을 멈추고 컵을 공중에 붙잡고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지만 너무나도 명확하게,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게… 이게 뭐지? 내가… 내가 한 건가?’
그가 혼란에 빠져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순간, 그를 감싸던 고요의 막이 깨지고, 멈췄던 세상의 소음이 한꺼번에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쨍그랑-!유리컵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고, 오렌지 주스가 카펫 위로 흉측한 주황색 얼룩을 남기며 쏟아졌다. 다시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려왔고, 창밖에서는 눈을 치우는 제설차 소리가 들렸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강윤에게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세상이 아니었다.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굳은살 하나 없는, 평범한 열세 살 소년의 손. 하지만 그는 방금 이 손으로, 아니, 자신의 생각만으로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6년 전 유괴 사건 이후 굳게 닫혀 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그의 눈앞에서 아주 조금, 열린 것이다.그때, 현관문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부모님이 돌아온 것이다. 강윤은 황급히 주방으로 달려가 걸레를 찾아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엄마에게 야단맞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방금 자신이 경험한, 세상의 법칙을 거스르는 미지의 힘에 대한 경외감과 공포,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 때문이었다.그날 밤, 강윤은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잠들지 못했다. 그는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집중했다. 아까의 그 감각, 세상을 멈췄던 그 압도적인 순간을 떠올리며.
‘떠올라라.’
책상 위에 놓인 연필을 향해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필사적으로 명령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을 더 시도했지만 연필은 마치 바닥에 붙어버린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역시… 꿈이었나. 내가 너무 놀라서 헛것을 본 건가…’
그가 실망하며 포기하려던 순간이었다. 침대 옆 작은 휴지통 안에 있던, 오늘 아침에 수학 문제를 풀다 구겨버린 종이 뭉치가 아주 살짝, 움찔하고 움직였다. 너무나 미미한 움직임이라 방 안의 공기 흐름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윤은 보았다. 분명히 자신의 의지에 반응했다는 것을. 그는 다시 한번, 이번에는 온 신경을 곤두세워 집중했다.
‘움직여!’
구겨진 종이 뭉치가 ‘달칵’하는 작은 소리를 내며 휴지통 안에서 1센티미터쯤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이내 힘을 잃고 다시 ‘툭’ 하고 떨어졌다.그 짧은 1초. 강윤의 세상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순간이었다.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자신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위험한 비밀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비밀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부모님에게도,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인 지호에게도 말할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이 알고 감당해야 할 비밀이었다.소년의 세계에 드리워진 균열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흉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소년 자신이 인지하고 탐험해야 할, 거대하고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이었다. 그리고 그 문을 열었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것이 희망일지 절망일지, 아직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시간은 상처를 무디게 만들었지만, 결코 완벽하게 지워주지는 못했다. 끔찍했던 유괴 사건 이후 6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절반쯤 변한다는 시간. 강윤은 어느덧 젖살이 빠지고 턱선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덥수룩한 머리의 초등학교 5학년 소년이 되어 있었다. 아이의 키는 지난 1년간 10센티미터나 훌쩍 자랐고, 맑고 높았던 목소리는 변성기를 맞아 조금씩 굵고 어색하게 갈라지곤 했다. 겉보기에는 교실 창가 자리에 앉아 친구들과 시시덕거리기를 좋아하고, 축구공 하나만 있으면 하루 종일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여느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하고 건강한 소년이었다.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그의 내면에 새겨진 균열은 지워지지 않는 수성펜 자국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강윤은 6년 전 그날의 일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했다. 어린아이의 정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끔찍했던 공포와 충격. 그의 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날의 기억 위에 두껍고 축축한 안개의 장막을 쳐버린 탓이었다. 그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그저 ‘나쁜 아저씨들’과 ‘축축하고 어두웠던 창고’, ‘역한 쇠 냄새’ 같은 막연하고 파편적인 공포의 조각들뿐이었다. 마치 조각난 거울처럼, 그날의 진실을 온전히 비추지 못했다.하지만 그 조각들은 끈질기게 아이의 잠을 파고들었다. 그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악몽을 꾸며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꿈속에서 그는 언제나 어둡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고, 정체 모를 위협에 쫓기고 있었다. 그 결과, 그는 어둡고 폐쇄된 공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할 때도 결코 좁은 벽장 안에는 숨지 않았고, 텅 빈 엘리베이터를 혼자 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불 꺼진 창고 같은 곳에 혼자 남겨지면 어김없이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조여 오는 듯한 과호흡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낯선 어른에 대한 경계심도 병적으로 강해졌다. 길을 묻는 친절한 어른에게도,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굳히고 시선을 피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이 무례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인 거부감을 이겨낼 수 없었다.태주와 지윤은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심장이 저미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들은 아이의 심리 치료를 위해 용하다는 아동 상담 센터는 모두 찾아다녔다. 하지만 상담사는 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입니다. 아이가 겪은 충격이 너무 큽니다. 약물 치료보다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충분한 사랑을 주며 아이가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려주시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 ‘기다림’이라는 단어만큼 부모에게 잔인한 것은 없었다.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부모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그들은 아이가 다시는 단 1초라도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거의 편집증에 가까운 보호를 시작했다. 등하교는 무조건 부모 중 한 명이 동행했고, 학원이나 친구 집에 갈 때도 위치 추적이 가능한 스마트 워치를 채워 5분마다 스마트폰으로 위치를 확인했다. 아이가 집에 돌아오면,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오늘 있었던 일들을 캐물으며, 아이의 심리 상태에 작은 변화라도 없는지 살폈다.강윤은 그런 부모의 걱정과 지극한 사랑을 이해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사랑은 때로는 자신을 옭아매는 보이지 않는 사슬처럼 느껴져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그는 친구들처럼 혼자서 분식집에 가고, PC방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차마 부모님께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자신의 어설픈 반항이, 부모님에게 또 다른 상처와 불안을 안겨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그렇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감옥 안에서 조용히 성장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 갑갑한 감옥에도 작은 창문은 있었다. 강윤의 곁에는 언제나 표지호가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초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여전히 가장 친한, 소위 ‘영혼의 단짝’이라 불리는 사이였다. 지호의 존재는 강윤에게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이자, 숨 막히는 현실에서 잠시나마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창문과도 같았다. 활달하고 사교적인 지호는 내성적인 강윤을 다른 친구들의 무리로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그가 없었다면, 강윤은 아마 교실 구석에서 혼자 책만 읽는 외톨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지호는 강윤의 말 못 할 불안감을 유일하게 알아주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주는 이해자였다. 강윤이 악몽을 꾼 다음 날이면, 지호는 귀신같이 그의 안색을 알아보고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기분을 풀어주려 애썼다. 강윤이 낯선 어른 앞에서 쭈뼛거리면, 지호는 먼저 나서서 어른과 대화하며 강윤을 보호해주었다.
“괜찮아? 또 그 꿈 꿨어?”
어느 날 아침, 학교 가는 길에 강윤의 안색이 유난히 창백하고 눈이 퀭한 것을 보고 지호가 툭, 하고 물었다. 강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도 그는 꿈속에서 자신을 쫓는 거대한 그림자와, 녹슨 철문이 닫히는 끔찍한 소리를 들으며 비명을 지르다 잠에서 깼다.
“에이, 또 그 꿈. 야, 그거 그냥 개꿈이야, 개꿈. 네가 어제 저녁에 피자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래. 잊어버려. 이따 점심시간에 축구 한판하면 싹 날아갈걸? 내가 오늘 너한테만 패스 몰아줘서 골 넣어줄게.”
지호는 장난스럽게 강윤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강윤도 마주 희미하게 웃었다. 지호의 저런 가벼움이 좋았다. 자신의 어둡고 무거운 상처를, 마치 별것 아닌 감기 몸살처럼 만들어주는 그의 쾌활함이 늘 고마웠다.하지만 지호의 마음 한구석은 늘 묵직한 납덩이가 들어앉은 듯 무거웠다. 그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아버지 표진석의 서재에 불려 가 ‘차강윤 일일 관찰 보고’를 해야 했다. 강윤의 기분, 성적, 교우 관계, 심지어 점심시간에 어떤 반찬을 남겼는지까지. 아버지의 질문은 날이 갈수록 더 집요하고 세밀해졌다.
처음 유치원 시절에는, 아버지가 말한 ‘수호천사’의 임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생각이 깊어지면서, 그것이 감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아버지의 집요하고 날카로운 질문들은 때로 날 선 송곳이 되어 그의 양심을 찔렀다. 특히 아버지는 ‘이상 현상’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했다.
"오늘 강윤이가 특별히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기뻐한 적은 없었니? 감정이 격해졌을 때, 주변에 뭔가 이상한 일은 없었고? 물건을 만지지 않았는데 움직인다거나, 네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본 적은? 아주 사소한 거라도 괜찮으니 기억나는 대로 말해보렴. 이건 모두 강윤이를 위한 거란다."
지호는 늘
“아니요, 없었어요. 그냥 똑같았어요.”
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대부분 사실이기도 했지만, 유치원 시절 달팽이 사건처럼 마음속에 걸리는 몇몇 순간들을 애써 외면한, 소극적인 거짓말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가 강윤에게서 무언가 ‘특별하고 위험한 것’을 찾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아버지로부터 지켜줘야 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를 속이는, 아슬아슬하고 고독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 무게는 열한 살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운 것이었다.
유괴 사건 이후, 강윤의 폭발적인 능력은 깊고 어두운 무의식의 바다 밑으로 다시 가라앉았다. 마치 거대한 화산이 폭발한 뒤, 다음 분출을 위해 오랜 시간 용암을 축적하며 휴면기에 들어간 것처럼.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마치 수면 아래를 유영하는 거대한 고래가 가끔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그 모습을 살짝 드러내듯, 그의 능력은 아주 사소하고 미미한 형태로,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상 속에 스며 나오곤 했다. 강윤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사소하고 찰나적인 순간들이었다.한 번은 과학 시간, 알코올램프로 비커의 물을 끓이는 실험을 하던 중이었다. 조별로 진행된 실험에서, 같은 조의 장난기 많은 친구가 다른 조와 떠들다가 팔꿈치로 알코올램프를 쳤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램프는 결국 균형을 잃고 넘어졌고, 불붙은 심지가 포물선을 그리며 강윤의 손등으로 떨어지려 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앗, 뜨거워!”
강윤이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빼는 순간, 그와 같은 조였던 아이들 모두가 보았다. 불붙은 심지가 강윤의 손등 피부에 닿기 직전,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의 거리에서, 마치 보이지 않는 바람에 밀려나듯 옆으로 휙- 하고 날아가 실험대 바닥에 떨어져 치이익, 소리를 내며 꺼지는 것을. 너무나 순식간에, 찰나처럼 일어난 일이라, 아이들은 그저
“우와, 운이 좋았네.”
“창문 열려 있어서 바람이 불었나 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 순간, 강윤은 자신의 손 주변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젤리처럼 끈끈하고 무겁게 일렁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기분 나쁜 감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뜨거운 불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안전하고 포근한 느낌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또 한 번은 체육 시간, 학급 대항 피구 시합 중이었다. 운동신경이 둔한 강윤은 늘 공을 피하기에 급급해, 시작한 지 1분도 안 되어 아웃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날도 그는 상대편 코트에서 쉴 새 없이 날아오는 공을 피해 코트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상대편 에이스인, 덩치 큰 친구가 그런 강윤을 발견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있는 힘껏 공을 던졌다.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온 공은, 피할 틈도 없이 정확하게 강윤의 얼굴을 향했다.
“으악!”
강윤은 공포에 질려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묵직하고 얼얼한 고통이 얼굴을 강타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1초, 2초가 지나도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이상하게 생각하며 눈을 떠보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공은 그의 코앞 몇 센티미터 거리에서,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아주 천천히, 끈적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공의 붉은색 표면에 새겨진 상표와 닳아빠진 실밥까지, 슬로우 모션 비디오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는 이내 모든 힘을 잃은 채, ‘툭’ 하고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야, 너 뭐냐? 공에 바람 빠졌잖아! 아, 김 샜네!”
공을 던진 아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터덜터덜 굴러가는 공에만 신경 쓸 뿐, 아무도 그 이상한 현상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직 지호만이, 강윤의 굳은 표정과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 그리고 안도와 극심한 혼란이 뒤섞인 그의 눈빛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그날 밤,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보고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밤새 뒤척였다. 결국 그는, ‘공에 정말 바람이 빠져 있었던 것 같다’고 거짓말을 했다. 친구를 향한 죄책감이 아버지에 대한 의무감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이긴 밤이었다.이런 일들이 반복될수록, 강윤의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의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이상한 일이 생기지? 왜 항상 위험한 순간에, 말도 안 되는 행운이 따르는 걸까?’
그는 자신이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혹시 내가 어딘가 아픈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인 동시에,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비밀을 가진 것만 같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떨리는 호기심이기도 했다.결정적인 사건은 중학교 입학을 앞둔,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렸던 겨울방학에 일어났다. 부모님이 잠시 장을 보러 나간 사이, 강윤은 혼자 거실에 앉아 새로 산 게임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전투에 몇 시간 동안 몰두하던 그는, 갈증을 느껴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차가운 유리컵에 가득 따랐다. 그리고 다시 게임기에 정신이 팔려, 컵을 소파 팔걸이 끝,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곳에 아슬아슬하게 올려놓았다.
“아차!”
결정적인 순간, 보스를 거의 다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고 캐릭터가 쓰러지자, 강윤은 안타까움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척였다. 바로 그 순간, 그의 팔꿈치가 정확하게 유리컵을 치고 말았다. 오렌지 주스가 가득 담긴 유리컵이 소파 아래, 얼마 전 엄마가 큰맘 먹고 새로 산 아이보리색 카펫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했다. 지울 수 없는 흉측한 얼룩이 생길 것이고, 엄마에게 엄청나게 야단맞을 것이다. 그 생각에 강윤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안 돼!’
그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기묘하고도 압도적인 감각이 그를 덮쳤다.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거실 벽에 걸린 괘종시계의 ‘째깍째깍’하는 초침 소리도, 냉장고의 ‘웅-’하는 모터 돌아가는 소리도, 창밖의 매서운 겨울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완벽한 진공의 세계. 오직 그의 눈앞, 공중에 떠 있는 유리컵만이 보였다. 컵은 바닥에 닿기 직전, 약 10센티미터 상공에서 완벽하게 정지해 있었다. 컵에서 흘러나온 오렌지 주스 방울들마저 공중에서 영롱한 보석처럼 동그란 모양을 유지한 채 멈춰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겨울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그 광경은 마치 한 폭의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비현실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했다.강윤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운이 좋았던 것도, 바람이 분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자신의 의지가, 자신의 간절한 마음이 이 시간을 멈추고 컵을 공중에 붙잡고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지만 너무나도 명확하게,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게… 이게 뭐지? 내가… 내가 한 건가?’
그가 혼란에 빠져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순간, 그를 감싸던 고요의 막이 깨지고, 멈췄던 세상의 소음이 한꺼번에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쨍그랑-!유리컵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고, 오렌지 주스가 카펫 위로 흉측한 주황색 얼룩을 남기며 쏟아졌다. 다시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려왔고, 창밖에서는 눈을 치우는 제설차 소리가 들렸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강윤에게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세상이 아니었다.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굳은살 하나 없는, 평범한 열세 살 소년의 손. 하지만 그는 방금 이 손으로, 아니, 자신의 생각만으로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6년 전 유괴 사건 이후 굳게 닫혀 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그의 눈앞에서 아주 조금, 열린 것이다.그때, 현관문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부모님이 돌아온 것이다. 강윤은 황급히 주방으로 달려가 걸레를 찾아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엄마에게 야단맞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방금 자신이 경험한, 세상의 법칙을 거스르는 미지의 힘에 대한 경외감과 공포,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 때문이었다.그날 밤, 강윤은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잠들지 못했다. 그는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집중했다. 아까의 그 감각, 세상을 멈췄던 그 압도적인 순간을 떠올리며.
‘떠올라라.’
책상 위에 놓인 연필을 향해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필사적으로 명령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을 더 시도했지만 연필은 마치 바닥에 붙어버린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역시… 꿈이었나. 내가 너무 놀라서 헛것을 본 건가…’
그가 실망하며 포기하려던 순간이었다. 침대 옆 작은 휴지통 안에 있던, 오늘 아침에 수학 문제를 풀다 구겨버린 종이 뭉치가 아주 살짝, 움찔하고 움직였다. 너무나 미미한 움직임이라 방 안의 공기 흐름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윤은 보았다. 분명히 자신의 의지에 반응했다는 것을. 그는 다시 한번, 이번에는 온 신경을 곤두세워 집중했다.
‘움직여!’
구겨진 종이 뭉치가 ‘달칵’하는 작은 소리를 내며 휴지통 안에서 1센티미터쯤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이내 힘을 잃고 다시 ‘툭’ 하고 떨어졌다.그 짧은 1초. 강윤의 세상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순간이었다.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자신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위험한 비밀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비밀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부모님에게도,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인 지호에게도 말할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이 알고 감당해야 할 비밀이었다.소년의 세계에 드리워진 균열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흉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소년 자신이 인지하고 탐험해야 할, 거대하고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이었다. 그리고 그 문을 열었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것이 희망일지 절망일지, 아직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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