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6화
조회 : 9 추천 : 0 글자수 : 6,591 자 2025-10-13
제6화
어색하게 몸에 맞춘, 아직 풀 먹인 감촉이 빳빳한 새 교복과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무게의 새 가방. 고등학생이 된 첫날, 차강윤과 표지호는 설렘과 불안이 뒤섞인 수많은 학생의 물결에 휩쓸려 낯선 교문으로 들어섰다. 중학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넓은 운동장과 하늘을 찌를 듯 위압적으로 솟은 5층짜리 건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성채처럼 보였다. 복도를 스쳐 지나가는 무심한 표정의 선배들은 이미 이 세계의 법칙을 통달한 원주민처럼 보였고, 자신들은 그저 어리둥절한 이방인일 뿐이었다. 강윤은 이 새로운 환경이 자신에게 기회가 될 수도, 혹은 더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예감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와, 진짜 넓다. 우리 길 잃어버리는 거 아니냐? 중학교 운동장은 그냥 점이었네, 점.”
지호가 과장된 몸짓으로 두리번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의 유쾌함은 언제나 낯선 환경에 대한 강윤의 내면적 불안을 녹여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강윤은 알고 있었다. 저 소란스러움 뒤에는 지호 역시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긴장감을 애써 감추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긴장감의 일부는 분명 자신 때문일 거라는 것도.
“그러게. 매점부터 찾아놔야 하는 거 아냐?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강윤이 농담으로 받아치자, 두 사람은 마주 보고 긴장이 풀린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도, 신의 장난인지 배려인지 그들은 같은 반에 배정되었다. 1학년 3반. 교실 문을 열자 35명의 낯선 얼굴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서로가 아는 얼굴이라는 사실은, 망망대해에서 작은 뗏목이라도 발견한 듯한 안도감을 주었다. 강윤은 창가 쪽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여기서는, 제발 평범하게만 지낼 수 있기를.’
고등학교 생활은 소문처럼 삭막하지만은 않았다. 물론, 중학교와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의 수학 공식과 외워도 끝이 없는 영어 단어, 베고 자도 될 만큼 두꺼운 참고서의 압박이 숨 막히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10대 소년들의 삶은 나름의 활기를 찾아 흘러갔다. 어려워진 수업과 늘어난 공부량에 투덜거리기도 하고, 새로 생긴 매점에서 파는 ‘악마의 초코 소라빵’에 열광하며 점심시간마다 전력 질주를 하기도 했다. 강윤은 본래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언제나 그의 곁에서 특유의 친화력으로 분위기를 주도하는 지호 덕분에 자연스럽게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활발한 무리들과 어울려 점심시간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땀을 뺐고, 쉬는 시간이면 복도에 모여 시시껄렁한 아이돌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 틈에 끼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 평범하고 소란스러운 일상 속에서, 강윤은 잠시 자신의 무거운 비밀을 잊을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밤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위험한 능력 실험을 하지 않았다. 못 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에 가까웠다. 고등학교 공부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고, 매일 쏟아지는 숙제와 쪽지 시험, 수행평가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벅찼다. 녹초가 되어 침대에 쓰러지면 ‘초능력’이라는 비현실적이고 거대한 고민은, 당장 내일 있을 영어 단어 시험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뒤로 잠시 밀려났다. 능력 사용 후 찾아오는 날카로운 두통 대신, 공부로 인한 멍한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평범한 고등학생의 삶이라고,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몸이 급격히 성장함에 따라, 능력 역시 이전보다 훨씬 안정되고 제어하기 쉬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었다. 사춘기의 격렬한 감정의 파도를 겪으면서도, 이제는 더 이상 감정이 격해진다고 해서 무의식적으로 능력을 사용해 주변에 이상 현상을 일으키지 않았다. 대신, 필요할 때 아주 미세하게,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법을 터득해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예를 들어, 체육 시간 농구 시합 중, 종료 버저와 함께 친구가 던진 슛이 골대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갔을 때, 모두가 안타까운 탄성을 지르는 그 찰나의 순간, 그는 날아가는 공에 살짝 힘을 가했다. 공은 허공에서 마치 강한 바람을 만난 듯 미세하게 궤적을 틀어 ‘팅-’ 하는 소리와 함께 백보드를 맞고 골망을 흔들었다. 친구는 어리둥절해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고, 팀원들은 그에게 달려들어 환호했다. 강윤은 그저 멀리서 웃으며 어깨를 툭 쳐줄 뿐이었다. 칠판 글씨가 안 보인다고 투덜거리는 지호의 안경에 묻은 작은 먼지를, 그가 안경을 닦으려 손을 들기 직전, 손을 대지 않고 바람처럼 털어내 주기도 했다. 펜을 떨어뜨린 짝꿍을 위해, 펜이 바닥에 닿기 직전 속도를 줄여 ‘또르르’ 굴러가지 않고 바로 발밑에 멈추게 해주는 것은 이제 그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그만의 소소한 장난이자 작은 친절, 그리고 은밀한 자기만족이었다. 이 정도라면 괜찮겠지. 이 정도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니까. 오히려 조금은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강윤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합리화하며, 위험한 비밀과 평범한 일상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갔다.
평화롭던 일상에 작지만 선명한 파문이 인 것은, 땀과 눈물로 얼룩진 1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직후였다. 해방감에 들뜬 교실, 종례가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였다. 같은 반 여학생인 한다솜이 수줍은 얼굴로 강윤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강윤아, 저기… 너 혹시 주말에 시간 있어? 새로 개봉한 영화 있는데…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래?”
다솜은 하얀 피부와 긴 생머리, 웃을 때 예쁘게 휘어지는 눈매를 가진, 반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아이였다. 쾌활하고 상냥한 성격 덕분에 남학생뿐만 아니라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그런 다솜의 갑작스러운 데이트 신청에, 아직 교실에 남아 있던 남학생들의 휘파람 소리와 짓궂은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강윤의 얼굴은 순식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어오르는 것 같았다.
“어? 으응… 나? 어… 시간… 있어.”
강윤이 평생 내본 적 없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다솜은 환하게 웃으며 “그럼 토요일 두 시에 영화관 앞에서 봐!” 하고는 친구들에게로 총총 달려갔다. 강윤은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이성에 대한 설렘과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야, 차강윤! 너 완전 계 탔다! 한다솜이 너한테 관심 있었네! 대박 사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지호가 다가와 강윤의 등을 세게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강윤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지호는 겉으로는 웃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강윤에게 여자친구가 생긴다는 것은, 자신의 ‘관찰’ 범위가 더 넓어지고 복잡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생긴 것이다. 아버지, 표진석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떤 새로운 ‘미션’을 내릴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표진석은 지호에게 다솜의 SNS까지 뒤져 찾아낸 사진들을 보여주며 집요하게 물었다. 서재의 공기는 평소보다 더 차갑고 밀도 높게 느껴졌다.
“이름은 한다솜. 성적은 중상위권, 교우 관계도 원만하고… 가족 관계도 평범. 특별한 점은 없어 보이는군. 강윤이가 왜 이 아이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 같으냐? 네가 보기에 어떤 점이 마음에 든 것 같지? 외모인가? 성격인가? 구체적으로 말해보렴.”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냥… 얘기하다 보니까 친해지고, 예쁘니까 좋아하는 거겠죠!”
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친구의 가장 사적이고 설레는 감정마저 해부하듯 분석하고 보고해야 하는 현실이 넌더리가 났다. 다솜의 웃는 얼굴 사진이 마치 범죄자 파일처럼 모니터에 떠 있는 것을 보니 역겨움이 치밀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마라, 지호야.”
표진석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잠시 안경을 벗어 닦으며 말을 이었다. “이 모든 것은 강윤이를 위한 일이다. 너도 알다시피 그의 힘은 불안정한 감정에 의해 폭주할 수 있어.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은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렬하고 비이성적인 감정 중 하나다. 기쁨, 설렘, 질투, 분노, 슬픔. 이 모든 감정의 진폭이 극대화되지. 그것은 가장 위험한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뜻이야. 넌 그 옆에서 어떤 감정의 변화가 있는지, 그로 인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저 객관적인 과학자처럼 관찰하고 보고하면 되는 거다. 명심해라. 넌 강윤이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안전장치다.”
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의 말은 언제나 그럴듯하고 논리 정연했다. ‘안전장치’라는 말은 결국 ‘감시자’라는 말의 세련된 포장일 뿐이었다. 그는 친구를 속이고 있다는 무거운 죄책감과, 친구를 지켜야 한다는 아버지의 교묘한 논리 사이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 강윤은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먼저 영화관 앞에 도착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머리를 아침에만 세 번이나 감고, 옷장 속 모든 옷을 꺼내 입어본 끝에 겨우 골라 입은 셔츠의 옷깃을 연신 매만졌다. 잠시 후, 예쁜 원피스 차림의 다솜이 나타나자 강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햇살 아래 웃는 그녀의 모습이 눈부시게 예뻤다.
영화는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였지만, 강윤에게는 모든 장면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어두운 공간에서 나란히 앉아 같은 화면을 본다는 것, 커다란 팝콘 통 안에서 손가락이 스쳤을 때의 짜릿함, 가끔 서로를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을 때의 어색한 침묵. 모든 것이 처음 겪는 설레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두 사람은 아직 집에 들어가기 아쉽다는 생각에 근처 시립 도서관에 들러 시험공부를 하기로 했다. 주말 오후의 도서관은 책장 넘어가는 소리와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한, 조용하고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두 사람은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아 두꺼운 수학 문제집을 폈다. 하지만 공부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강윤은 문제를 푸는 척하며 힐끗힐끗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다솜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때였다. 두 사람이 앉은 자리 위쪽, 3미터는 족히 될 법한 높다란 책꽂이 맨 위 칸에 위태롭게 꽂혀 있던, 거의 벽돌 두께의 두꺼운 백과사전 한 권이 미세한 진동과 함께 서서히 앞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마도 다른 쪽 통로에서 누군가 책을 빼면서 밀린 모양이었다. 묵직한 사전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어려운 문제에 열중하고 있는 다솜.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로 낙하하기 시작하는 백과사전.
“다솜아, 피해!”
소리를 지르기에는 너무 늦었다. 시간은 찰나였고, 몸이 반응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강윤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 순간, 그의 몸은 이성적인 판단보다 먼저 움직였다. 아니, 그의 ‘의지’가 먼저 폭발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온 신경을 떨어지는 사전에 집중했다.
‘멈춰!’
시간이 끈적한 젤리처럼 늘어나는 듯한 기묘한 감각. 떨어지던 사전의 속도가 아주 미세하게, 거의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느려졌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여기서 멈추게만 하면, 잠시 후 더 큰 힘으로 떨어질 것이다. 강윤은 본능적으로 힘의 방향을 틀었다. 이전의 장난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극한의 정교한 컨트롤이 필요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관자놀이의 혈관이 팽창하고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옆으로! 조금만 더 옆으로!’
그러자 사전은 마치 보이지 않는 미끄럼틀을 타듯,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다솜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옆으로 비껴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쿵-!
마치 작은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요란한 소리에 도서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다솜 역시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머, 깜짝이야! 책이 떨어졌네. 학생, 다친 데는 없니?”
사서가 놀라 달려와 두꺼운 책을 주우며 중얼거렸다.
“네, 괜찮아요. 바로 옆으로 떨어져서… 하마터면 머리 맞을 뻔했네요. 운이 좋았어요.”
다솜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강윤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관자놀이 부근의 혈관이 터질 듯이 쿵쿵 뛰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방금 전, 그는 단순히 물체를 멈추는 것을 넘어, 그 궤도를 완벽하게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섬세하고 정교한 제어였다. 그리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코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주르륵 흐르는 느낌이 났다. 코피였다.
“강윤아, 괜찮아? 너 얼굴이 새하얘. 어디 아파?”
다솜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어? 어어… 괜찮아. 그냥 너무 놀라서 그런가 봐.”
강윤은 애써 웃어 보이며 황급히 고개를 숙여 휴지로 코피를 닦았다. 그는 오늘, 자신의 힘이 누군가를 ‘지키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것은 비밀스러운 실험의 희열과는 다른, 심장이 뻐근해질 정도로 가슴 벅찬 무언가를 느끼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 힘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힘이 언제든 누군가를 해칠 수도 있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그의 어깨를 강하게 짓눌렀다.
소년은 이제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자신의 평범한 일상이란, 살얼음판 위에서 추는 춤처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균형을 지키기 위한 위태로운 줄타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어색하게 몸에 맞춘, 아직 풀 먹인 감촉이 빳빳한 새 교복과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무게의 새 가방. 고등학생이 된 첫날, 차강윤과 표지호는 설렘과 불안이 뒤섞인 수많은 학생의 물결에 휩쓸려 낯선 교문으로 들어섰다. 중학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넓은 운동장과 하늘을 찌를 듯 위압적으로 솟은 5층짜리 건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성채처럼 보였다. 복도를 스쳐 지나가는 무심한 표정의 선배들은 이미 이 세계의 법칙을 통달한 원주민처럼 보였고, 자신들은 그저 어리둥절한 이방인일 뿐이었다. 강윤은 이 새로운 환경이 자신에게 기회가 될 수도, 혹은 더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예감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와, 진짜 넓다. 우리 길 잃어버리는 거 아니냐? 중학교 운동장은 그냥 점이었네, 점.”
지호가 과장된 몸짓으로 두리번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의 유쾌함은 언제나 낯선 환경에 대한 강윤의 내면적 불안을 녹여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강윤은 알고 있었다. 저 소란스러움 뒤에는 지호 역시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긴장감을 애써 감추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긴장감의 일부는 분명 자신 때문일 거라는 것도.
“그러게. 매점부터 찾아놔야 하는 거 아냐?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강윤이 농담으로 받아치자, 두 사람은 마주 보고 긴장이 풀린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도, 신의 장난인지 배려인지 그들은 같은 반에 배정되었다. 1학년 3반. 교실 문을 열자 35명의 낯선 얼굴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서로가 아는 얼굴이라는 사실은, 망망대해에서 작은 뗏목이라도 발견한 듯한 안도감을 주었다. 강윤은 창가 쪽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여기서는, 제발 평범하게만 지낼 수 있기를.’
고등학교 생활은 소문처럼 삭막하지만은 않았다. 물론, 중학교와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의 수학 공식과 외워도 끝이 없는 영어 단어, 베고 자도 될 만큼 두꺼운 참고서의 압박이 숨 막히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10대 소년들의 삶은 나름의 활기를 찾아 흘러갔다. 어려워진 수업과 늘어난 공부량에 투덜거리기도 하고, 새로 생긴 매점에서 파는 ‘악마의 초코 소라빵’에 열광하며 점심시간마다 전력 질주를 하기도 했다. 강윤은 본래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언제나 그의 곁에서 특유의 친화력으로 분위기를 주도하는 지호 덕분에 자연스럽게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활발한 무리들과 어울려 점심시간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땀을 뺐고, 쉬는 시간이면 복도에 모여 시시껄렁한 아이돌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 틈에 끼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 평범하고 소란스러운 일상 속에서, 강윤은 잠시 자신의 무거운 비밀을 잊을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밤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위험한 능력 실험을 하지 않았다. 못 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에 가까웠다. 고등학교 공부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고, 매일 쏟아지는 숙제와 쪽지 시험, 수행평가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벅찼다. 녹초가 되어 침대에 쓰러지면 ‘초능력’이라는 비현실적이고 거대한 고민은, 당장 내일 있을 영어 단어 시험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뒤로 잠시 밀려났다. 능력 사용 후 찾아오는 날카로운 두통 대신, 공부로 인한 멍한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평범한 고등학생의 삶이라고,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몸이 급격히 성장함에 따라, 능력 역시 이전보다 훨씬 안정되고 제어하기 쉬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었다. 사춘기의 격렬한 감정의 파도를 겪으면서도, 이제는 더 이상 감정이 격해진다고 해서 무의식적으로 능력을 사용해 주변에 이상 현상을 일으키지 않았다. 대신, 필요할 때 아주 미세하게,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법을 터득해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예를 들어, 체육 시간 농구 시합 중, 종료 버저와 함께 친구가 던진 슛이 골대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갔을 때, 모두가 안타까운 탄성을 지르는 그 찰나의 순간, 그는 날아가는 공에 살짝 힘을 가했다. 공은 허공에서 마치 강한 바람을 만난 듯 미세하게 궤적을 틀어 ‘팅-’ 하는 소리와 함께 백보드를 맞고 골망을 흔들었다. 친구는 어리둥절해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고, 팀원들은 그에게 달려들어 환호했다. 강윤은 그저 멀리서 웃으며 어깨를 툭 쳐줄 뿐이었다. 칠판 글씨가 안 보인다고 투덜거리는 지호의 안경에 묻은 작은 먼지를, 그가 안경을 닦으려 손을 들기 직전, 손을 대지 않고 바람처럼 털어내 주기도 했다. 펜을 떨어뜨린 짝꿍을 위해, 펜이 바닥에 닿기 직전 속도를 줄여 ‘또르르’ 굴러가지 않고 바로 발밑에 멈추게 해주는 것은 이제 그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그만의 소소한 장난이자 작은 친절, 그리고 은밀한 자기만족이었다. 이 정도라면 괜찮겠지. 이 정도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니까. 오히려 조금은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강윤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합리화하며, 위험한 비밀과 평범한 일상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갔다.
평화롭던 일상에 작지만 선명한 파문이 인 것은, 땀과 눈물로 얼룩진 1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직후였다. 해방감에 들뜬 교실, 종례가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였다. 같은 반 여학생인 한다솜이 수줍은 얼굴로 강윤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강윤아, 저기… 너 혹시 주말에 시간 있어? 새로 개봉한 영화 있는데…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래?”
다솜은 하얀 피부와 긴 생머리, 웃을 때 예쁘게 휘어지는 눈매를 가진, 반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아이였다. 쾌활하고 상냥한 성격 덕분에 남학생뿐만 아니라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그런 다솜의 갑작스러운 데이트 신청에, 아직 교실에 남아 있던 남학생들의 휘파람 소리와 짓궂은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강윤의 얼굴은 순식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어오르는 것 같았다.
“어? 으응… 나? 어… 시간… 있어.”
강윤이 평생 내본 적 없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다솜은 환하게 웃으며 “그럼 토요일 두 시에 영화관 앞에서 봐!” 하고는 친구들에게로 총총 달려갔다. 강윤은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이성에 대한 설렘과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야, 차강윤! 너 완전 계 탔다! 한다솜이 너한테 관심 있었네! 대박 사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지호가 다가와 강윤의 등을 세게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강윤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지호는 겉으로는 웃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강윤에게 여자친구가 생긴다는 것은, 자신의 ‘관찰’ 범위가 더 넓어지고 복잡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생긴 것이다. 아버지, 표진석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떤 새로운 ‘미션’을 내릴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표진석은 지호에게 다솜의 SNS까지 뒤져 찾아낸 사진들을 보여주며 집요하게 물었다. 서재의 공기는 평소보다 더 차갑고 밀도 높게 느껴졌다.
“이름은 한다솜. 성적은 중상위권, 교우 관계도 원만하고… 가족 관계도 평범. 특별한 점은 없어 보이는군. 강윤이가 왜 이 아이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 같으냐? 네가 보기에 어떤 점이 마음에 든 것 같지? 외모인가? 성격인가? 구체적으로 말해보렴.”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냥… 얘기하다 보니까 친해지고, 예쁘니까 좋아하는 거겠죠!”
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친구의 가장 사적이고 설레는 감정마저 해부하듯 분석하고 보고해야 하는 현실이 넌더리가 났다. 다솜의 웃는 얼굴 사진이 마치 범죄자 파일처럼 모니터에 떠 있는 것을 보니 역겨움이 치밀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마라, 지호야.”
표진석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잠시 안경을 벗어 닦으며 말을 이었다. “이 모든 것은 강윤이를 위한 일이다. 너도 알다시피 그의 힘은 불안정한 감정에 의해 폭주할 수 있어.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은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렬하고 비이성적인 감정 중 하나다. 기쁨, 설렘, 질투, 분노, 슬픔. 이 모든 감정의 진폭이 극대화되지. 그것은 가장 위험한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뜻이야. 넌 그 옆에서 어떤 감정의 변화가 있는지, 그로 인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저 객관적인 과학자처럼 관찰하고 보고하면 되는 거다. 명심해라. 넌 강윤이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안전장치다.”
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의 말은 언제나 그럴듯하고 논리 정연했다. ‘안전장치’라는 말은 결국 ‘감시자’라는 말의 세련된 포장일 뿐이었다. 그는 친구를 속이고 있다는 무거운 죄책감과, 친구를 지켜야 한다는 아버지의 교묘한 논리 사이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 강윤은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먼저 영화관 앞에 도착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머리를 아침에만 세 번이나 감고, 옷장 속 모든 옷을 꺼내 입어본 끝에 겨우 골라 입은 셔츠의 옷깃을 연신 매만졌다. 잠시 후, 예쁜 원피스 차림의 다솜이 나타나자 강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햇살 아래 웃는 그녀의 모습이 눈부시게 예뻤다.
영화는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였지만, 강윤에게는 모든 장면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어두운 공간에서 나란히 앉아 같은 화면을 본다는 것, 커다란 팝콘 통 안에서 손가락이 스쳤을 때의 짜릿함, 가끔 서로를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을 때의 어색한 침묵. 모든 것이 처음 겪는 설레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두 사람은 아직 집에 들어가기 아쉽다는 생각에 근처 시립 도서관에 들러 시험공부를 하기로 했다. 주말 오후의 도서관은 책장 넘어가는 소리와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한, 조용하고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두 사람은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아 두꺼운 수학 문제집을 폈다. 하지만 공부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강윤은 문제를 푸는 척하며 힐끗힐끗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다솜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때였다. 두 사람이 앉은 자리 위쪽, 3미터는 족히 될 법한 높다란 책꽂이 맨 위 칸에 위태롭게 꽂혀 있던, 거의 벽돌 두께의 두꺼운 백과사전 한 권이 미세한 진동과 함께 서서히 앞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마도 다른 쪽 통로에서 누군가 책을 빼면서 밀린 모양이었다. 묵직한 사전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어려운 문제에 열중하고 있는 다솜.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로 낙하하기 시작하는 백과사전.
“다솜아, 피해!”
소리를 지르기에는 너무 늦었다. 시간은 찰나였고, 몸이 반응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강윤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 순간, 그의 몸은 이성적인 판단보다 먼저 움직였다. 아니, 그의 ‘의지’가 먼저 폭발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온 신경을 떨어지는 사전에 집중했다.
‘멈춰!’
시간이 끈적한 젤리처럼 늘어나는 듯한 기묘한 감각. 떨어지던 사전의 속도가 아주 미세하게, 거의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느려졌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여기서 멈추게만 하면, 잠시 후 더 큰 힘으로 떨어질 것이다. 강윤은 본능적으로 힘의 방향을 틀었다. 이전의 장난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극한의 정교한 컨트롤이 필요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관자놀이의 혈관이 팽창하고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옆으로! 조금만 더 옆으로!’
그러자 사전은 마치 보이지 않는 미끄럼틀을 타듯,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다솜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옆으로 비껴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쿵-!
마치 작은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요란한 소리에 도서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다솜 역시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머, 깜짝이야! 책이 떨어졌네. 학생, 다친 데는 없니?”
사서가 놀라 달려와 두꺼운 책을 주우며 중얼거렸다.
“네, 괜찮아요. 바로 옆으로 떨어져서… 하마터면 머리 맞을 뻔했네요. 운이 좋았어요.”
다솜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강윤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관자놀이 부근의 혈관이 터질 듯이 쿵쿵 뛰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방금 전, 그는 단순히 물체를 멈추는 것을 넘어, 그 궤도를 완벽하게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섬세하고 정교한 제어였다. 그리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코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주르륵 흐르는 느낌이 났다. 코피였다.
“강윤아, 괜찮아? 너 얼굴이 새하얘. 어디 아파?”
다솜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어? 어어… 괜찮아. 그냥 너무 놀라서 그런가 봐.”
강윤은 애써 웃어 보이며 황급히 고개를 숙여 휴지로 코피를 닦았다. 그는 오늘, 자신의 힘이 누군가를 ‘지키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것은 비밀스러운 실험의 희열과는 다른, 심장이 뻐근해질 정도로 가슴 벅찬 무언가를 느끼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 힘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힘이 언제든 누군가를 해칠 수도 있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그의 어깨를 강하게 짓눌렀다.
소년은 이제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자신의 평범한 일상이란, 살얼음판 위에서 추는 춤처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균형을 지키기 위한 위태로운 줄타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작가의 말
등록된 작가의 말이 없습니다.
닫기![]()
초능력 아이 더 오리지널스
8.제07화조회 : 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691 7.제06화조회 : 1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591 6.제05화조회 : 8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065 5.제04화조회 : 10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989 4.제03화조회 : 30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763 3.제02화조회 : 3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8,431 2.제01화조회 : 50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9,047 1.프롤로그조회 : 64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8,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