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8화
조회 : 395 추천 : 0 글자수 : 6,054 자 2025-10-20
제8화
빗속의 그날 밤 이후,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고 지루한 회색빛 아침을 맞이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가느다란 비가 내렸고, 등교하는 학생들의 우산 행렬이 이어졌으며, 어김없이 학교 종이 울렸다. 하지만 강윤과 지호, 그리고 다솜, 세 사람의 세계는 한바탕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뒤였다. 평범했던 일상의 모든 풍경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배경이 되어, 그 자체로 고통의 증거가 되었다.
다음 날 아침, 강윤은 뇌를 쥐어짜는 듯한 끔찍한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깼다. 단순히 머리가 아픈 수준이 아니었다. 관자놀이 안쪽에서 누군가 날카로운 송곳을 박고 휘젓는 듯한 통증이었고, 온몸의 기운이 모조리 빨려나간 듯한 탈진 상태에, 눈을 뜨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현기증이 덮쳤다. 입안에서는 희미한 피 맛이 맴돌았다. 어젯밤의 기억은 마치 잘려나간 필름처럼 군데군데 끊겨 있었지만, 자신을 경악과 공포가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던 다솜과 지호의 얼굴만은 망막에 뜨거운 낙인처럼 찍혀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솜의 하얗게 질린 얼굴, 믿을 수 없다는 듯 미세하게 떨리던 지호의 입술. 그 표정들이 그의 심장을 차가운 심해 속으로 끝없이 가라앉게 했다. 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축축하고 어두운 동굴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학교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가장 추악하고 무서운 비밀을, 가장 폭력적인 형태로 알아버린 친구들을, 이제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라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을 망친 것이 바로 자신이었기에. 그는 결국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꾀병을 부렸고, 아들의 창백한 안색과 식은땀에 진짜로 아픈 줄로만 안 지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이마를 짚으며 서둘러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학교는 그야말로 폭풍전야였다. 강윤이 결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1학년 3반 교실에는 미묘하고 불편한 긴장감이 흘렀다. 어젯밤, 학교 근처 어두운 골목에서 신원불명의 중년 남성 두 명이 온몸의 뼈가 으스러진 채로 중상을 입고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하룻밤 사이에 온갖 흉흉한 꼬리표를 달고 삽시간에 퍼져나갔기 때문이었다. 목격자도 없고 CCTV에도 제대로 찍힌 것이 없어 ‘외국인 노동자들의 집단 폭행이다’, ‘조직폭력배들의 세력 다툼에 휘말린 것이다’ 등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아이들은 그저 동네에서 일어난 무서운 사건 정도로 치부하며 자기들끼리 떠들어댔지만, 진실을 아는 지호와 다솜에게는 그 모든 소문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날아와 심장을 후벼 파는 듯했다.
다솜은 하루 종일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교과서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의미 없는 기호처럼 흩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어젯밤의 광경이 강박적으로,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종잇장처럼 구겨지던 사람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 모든 파괴의 중심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서 있던 강윤의 얼굴. 자신이 알던, 조금은 수줍음 많고 다정했던 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괴물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을 지켜준 흑기사였을까? 혼란스러운 감정이 그녀를 옭아맸다. 그녀는 두려웠다. 강윤이, 그리고 그가 가진 정체 모를 그 압도적인 힘이. 자신을 향한 그의 다정한 미소 뒤에, 그런 끔찍한 파괴력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쩌면 그 미소마저 진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호의 상황은 더욱 최악이었다. 그는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침묵했던 공범자이자, 가장 친한 친구를 속여온 배신자였다. 그는 어젯밤, 빗물에 흠뻑 젖은 채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에게 모든 상황을 보고해야 했다. 강윤이 어떻게 분노했고, 어떤 방식으로 힘을 사용했으며, 그 결과 어떤 파괴가 일어났는지. 그는 마치 기계처럼, 감정을 모조리 배제한 채 객관적인 사실만을 건조하게 나열했다. 표진석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보고를 들으며, “아주 흥미로운 데이터야. 감정적 격분이 능력의 폭발적 증폭을 가져왔군. 대상의 공격성 임계점을 확인할 좋은 기회였어. 앞으로의 관찰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말을 덧붙였다. 지호는 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에서 과학자의 탐구심이 아닌, 탐욕스러운 사냥꾼의 희열을 보았다.
지호는 교실 창밖의 흐린 하늘을 내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강윤에게는 미안했고, 다솜에게도 미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비인간적인 상황에 무력하게 끌려다니는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아버지의 말처럼, 자신이 정말 강윤을 위한 ‘안전장치’일까? 아니면, 그저 친구의 영혼과 삶을 팔아넘기는 비겁한 스파이일 뿐일까. 십수 년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었던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에, 처음으로 선명하고 깊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학교가 끝나고, 지호는 차마 집으로 바로 갈 수가 없었다. 발걸음은 저절로 강윤의 집 앞으로 향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괜찮으냐고, 어젯밤 일은 잊어버리라고, 혹은… 미안하다고. 하지만 막상 강윤의 집 대문 앞에 서자,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었고, ‘괜찮다’는 말은 이 모든 상황을 겪은 친구에 대한 기만이었다. 그는 아파트 입구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가 돌아서려던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솜이었다. 그녀 역시 걱정스러운 마음에 강윤의 집을 찾아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마주 섰다. 어젯밤의 공포를 함께 겪은 공범자들처럼, 서로의 얼굴에서 피곤함과 혼란을 읽어냈다.
“너도… 강윤이 보러 왔어?”
다솜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명랑함을 잃고 가라앉아 있었다.
“응. 괜찮은지… 걱정돼서.”
“지호야, 솔직하게 말해줘. 어젯밤에 그거… 대체 뭐야? 강윤이… 원래 저런 애였어? 너는 알고 있었지? 가장 친한 친구니까.”
다솜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동시에 진실을 갈망하는 절실함이 묻어 있었다. 지호는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숨기려 하는 비밀을,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침묵의 동조자로 살아온 비밀을. 여기서 진실을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달을 것 같았다.
“나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너무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뭐, 이상한 일이 벌어진 거 아닐까? 우리도 모르는 뭔가가…”
그는 어설픈 거짓말로 둘러댔다. 하지만 다솜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지호의 흔들리는 눈빛, 어색한 말투 속에서 그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솜은 지호가 강윤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렇다면, 지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알면서도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숨겨온 것일지도. 그 생각이 들자, 두려움은 서운함과 서늘한 배신감으로 변했다.
“됐어.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너희 둘만의 비밀이겠지.”
다솜은 차갑게 돌아섰다. 바로 그때, 집 안에서 인기척을 느낀 강윤이 2층 자신의 방 창문 커튼을 살짝 들추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집 앞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호와 다솜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의 표정과 분위기만으로도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강윤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 없는 곳으로 내려앉았다.
‘둘이… 내 얘기를 하고 있구나.’
자신을 빼놓고, 자신의 끔찍하고 징그러운 비밀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호는 어쩌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을 속여온 것일지도 모른다. 다솜은 이제 자신을 괴물 보듯 피하겠지. 최악의 상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는 차마 밖으로 나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조용히 커튼을 내렸다. 방 안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그는 그 어둠 속으로 기꺼이 침잠했다.
엇갈린 시선, 어긋난 타이밍, 그리고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침묵. 세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소리 없이, 그러나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강윤은 고립되었고, 다솜은 상처받았으며, 지호는 죄책감에 짓눌렸다.
그날 이후, 세 사람 사이에는 시베리아의 겨울바람보다 더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강윤은 학교에 다시 나왔지만, 투명인간처럼 지냈다.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말을 걸어오는 친구에게는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그는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책상에 엎드려 잠만 잤다. 다솜은 복도에서 강윤과 마주칠 때마다 애써 시선을 피했다. 말을 걸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호는 그 둘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지호는 마침내 결심했다. 그는 더 이상 아버지의 꼭두각시로, 친구를 배신하는 스파이로 살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서재 문을 노크도 없이 열어젖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늘 주눅 들어 있던 아들의 당당하고 분노에 찬 태도에, 표진석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해보거라.”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강윤이 감시하는 거… 더는 못 하겠어요. 이건 강윤이를 위한 일이 아니에요. 이건 그냥, 아버지의 호기심과 욕심을 채우기 위한 비인간적인 실험일 뿐이잖아요!”
지호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항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표진석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었다. 그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아직 어려서 세상의 복잡성을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세상은 네 생각처럼 선과 악으로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단다. 차강윤의 힘은 인류의 미래를 바꿀 수도, 혹은 파괴할 수도 있는 판도라의 상자다. 그런 엄청난 힘을,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미숙한 십대 소년에게 아무런 통제 없이 맡겨두는 것이 과연 옳을까?”
표진석은 서재의 거대한 스크린을 켰다. 화면에는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원인 불명의 폭발 사고, 기상이변, 대규모 정전 사태에 대한 뉴스 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러시아의 다리가 갑자기 붕괴하는 영상, 일본 해안에 설명할 수 없는 거대 해일이 닥치는 영상, 북미 대륙에 거대한 싱크홀이 생겨나는 영상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이 모든 것이, 통제되지 않은 초능력자들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일으킨 사건이라면 믿을 수 있겠니? 나는 강윤이가 저렇게 되지 않도록 막고 있는 거다. 그의 힘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거라고. 넌 그 위대한 과업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다. 사소하고 유치한 감정에 휘둘려 대의를 그르치지 마라.”
아버지의 거대하고 흔들림 없는 논리 앞에서, 지호의 작은 반항은 힘없이 꺾였다. 아버지가 보여준 세상은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복잡했다. 어쩌면, 정말로 아버지가 옳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마저 들었다.
“강윤이와 다솜의 관계는 지금 어떤 상태지? 여전히 냉전 상태인가?”
표진석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지호는 패배감에 휩싸인 채,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관계를 회복시켜주도록 해라.”
“네?”
지호는 예상치 못한 지시에 놀라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단절되면, 강윤이는 더욱 고립되고 힘을 제어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안정적인 감정 상태 유지를 위해선 한다솜이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해. 긍정적이고 안정적인 사회적 유대는 능력 제어에 필수적인 변수거든. 넌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 둘을 화해시키고, 예전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들어. 이것도 너의 새로운 임무다. 이해했나?”
지호는 할 말을 잃었다. 아버지는 친구의 우정마저, 자신의 실험을 위한 도구이자 통제 가능한 변수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는 거대한 체스판 위의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깊은 절망감과 무력감에 휩싸인 채 서재를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그의 스마트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강윤이었다.
[지호야. 지금 시간 괜찮으면, 우리 아파트 옥상으로 잠깐 올라와 줄 수 있어? 할 말이 있어.]
지호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아파트 옥상으로 향했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의 뺨을 때렸다. 옥상 난간에 기대어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강윤이,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두 소년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길고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그 침묵의 무게가 너무나도 버거웠다.
빗속의 그날 밤 이후,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고 지루한 회색빛 아침을 맞이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가느다란 비가 내렸고, 등교하는 학생들의 우산 행렬이 이어졌으며, 어김없이 학교 종이 울렸다. 하지만 강윤과 지호, 그리고 다솜, 세 사람의 세계는 한바탕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뒤였다. 평범했던 일상의 모든 풍경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배경이 되어, 그 자체로 고통의 증거가 되었다.
다음 날 아침, 강윤은 뇌를 쥐어짜는 듯한 끔찍한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깼다. 단순히 머리가 아픈 수준이 아니었다. 관자놀이 안쪽에서 누군가 날카로운 송곳을 박고 휘젓는 듯한 통증이었고, 온몸의 기운이 모조리 빨려나간 듯한 탈진 상태에, 눈을 뜨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현기증이 덮쳤다. 입안에서는 희미한 피 맛이 맴돌았다. 어젯밤의 기억은 마치 잘려나간 필름처럼 군데군데 끊겨 있었지만, 자신을 경악과 공포가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던 다솜과 지호의 얼굴만은 망막에 뜨거운 낙인처럼 찍혀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솜의 하얗게 질린 얼굴, 믿을 수 없다는 듯 미세하게 떨리던 지호의 입술. 그 표정들이 그의 심장을 차가운 심해 속으로 끝없이 가라앉게 했다. 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축축하고 어두운 동굴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학교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가장 추악하고 무서운 비밀을, 가장 폭력적인 형태로 알아버린 친구들을, 이제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라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을 망친 것이 바로 자신이었기에. 그는 결국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꾀병을 부렸고, 아들의 창백한 안색과 식은땀에 진짜로 아픈 줄로만 안 지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이마를 짚으며 서둘러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학교는 그야말로 폭풍전야였다. 강윤이 결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1학년 3반 교실에는 미묘하고 불편한 긴장감이 흘렀다. 어젯밤, 학교 근처 어두운 골목에서 신원불명의 중년 남성 두 명이 온몸의 뼈가 으스러진 채로 중상을 입고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하룻밤 사이에 온갖 흉흉한 꼬리표를 달고 삽시간에 퍼져나갔기 때문이었다. 목격자도 없고 CCTV에도 제대로 찍힌 것이 없어 ‘외국인 노동자들의 집단 폭행이다’, ‘조직폭력배들의 세력 다툼에 휘말린 것이다’ 등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아이들은 그저 동네에서 일어난 무서운 사건 정도로 치부하며 자기들끼리 떠들어댔지만, 진실을 아는 지호와 다솜에게는 그 모든 소문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날아와 심장을 후벼 파는 듯했다.
다솜은 하루 종일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교과서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의미 없는 기호처럼 흩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어젯밤의 광경이 강박적으로,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종잇장처럼 구겨지던 사람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 모든 파괴의 중심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서 있던 강윤의 얼굴. 자신이 알던, 조금은 수줍음 많고 다정했던 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괴물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을 지켜준 흑기사였을까? 혼란스러운 감정이 그녀를 옭아맸다. 그녀는 두려웠다. 강윤이, 그리고 그가 가진 정체 모를 그 압도적인 힘이. 자신을 향한 그의 다정한 미소 뒤에, 그런 끔찍한 파괴력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쩌면 그 미소마저 진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호의 상황은 더욱 최악이었다. 그는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침묵했던 공범자이자, 가장 친한 친구를 속여온 배신자였다. 그는 어젯밤, 빗물에 흠뻑 젖은 채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에게 모든 상황을 보고해야 했다. 강윤이 어떻게 분노했고, 어떤 방식으로 힘을 사용했으며, 그 결과 어떤 파괴가 일어났는지. 그는 마치 기계처럼, 감정을 모조리 배제한 채 객관적인 사실만을 건조하게 나열했다. 표진석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보고를 들으며, “아주 흥미로운 데이터야. 감정적 격분이 능력의 폭발적 증폭을 가져왔군. 대상의 공격성 임계점을 확인할 좋은 기회였어. 앞으로의 관찰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말을 덧붙였다. 지호는 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에서 과학자의 탐구심이 아닌, 탐욕스러운 사냥꾼의 희열을 보았다.
지호는 교실 창밖의 흐린 하늘을 내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강윤에게는 미안했고, 다솜에게도 미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비인간적인 상황에 무력하게 끌려다니는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아버지의 말처럼, 자신이 정말 강윤을 위한 ‘안전장치’일까? 아니면, 그저 친구의 영혼과 삶을 팔아넘기는 비겁한 스파이일 뿐일까. 십수 년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었던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에, 처음으로 선명하고 깊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학교가 끝나고, 지호는 차마 집으로 바로 갈 수가 없었다. 발걸음은 저절로 강윤의 집 앞으로 향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괜찮으냐고, 어젯밤 일은 잊어버리라고, 혹은… 미안하다고. 하지만 막상 강윤의 집 대문 앞에 서자,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었고, ‘괜찮다’는 말은 이 모든 상황을 겪은 친구에 대한 기만이었다. 그는 아파트 입구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가 돌아서려던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솜이었다. 그녀 역시 걱정스러운 마음에 강윤의 집을 찾아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마주 섰다. 어젯밤의 공포를 함께 겪은 공범자들처럼, 서로의 얼굴에서 피곤함과 혼란을 읽어냈다.
“너도… 강윤이 보러 왔어?”
다솜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명랑함을 잃고 가라앉아 있었다.
“응. 괜찮은지… 걱정돼서.”
“지호야, 솔직하게 말해줘. 어젯밤에 그거… 대체 뭐야? 강윤이… 원래 저런 애였어? 너는 알고 있었지? 가장 친한 친구니까.”
다솜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동시에 진실을 갈망하는 절실함이 묻어 있었다. 지호는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숨기려 하는 비밀을,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침묵의 동조자로 살아온 비밀을. 여기서 진실을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달을 것 같았다.
“나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너무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뭐, 이상한 일이 벌어진 거 아닐까? 우리도 모르는 뭔가가…”
그는 어설픈 거짓말로 둘러댔다. 하지만 다솜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지호의 흔들리는 눈빛, 어색한 말투 속에서 그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솜은 지호가 강윤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렇다면, 지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알면서도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숨겨온 것일지도. 그 생각이 들자, 두려움은 서운함과 서늘한 배신감으로 변했다.
“됐어.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너희 둘만의 비밀이겠지.”
다솜은 차갑게 돌아섰다. 바로 그때, 집 안에서 인기척을 느낀 강윤이 2층 자신의 방 창문 커튼을 살짝 들추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집 앞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호와 다솜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의 표정과 분위기만으로도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강윤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 없는 곳으로 내려앉았다.
‘둘이… 내 얘기를 하고 있구나.’
자신을 빼놓고, 자신의 끔찍하고 징그러운 비밀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호는 어쩌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을 속여온 것일지도 모른다. 다솜은 이제 자신을 괴물 보듯 피하겠지. 최악의 상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는 차마 밖으로 나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조용히 커튼을 내렸다. 방 안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그는 그 어둠 속으로 기꺼이 침잠했다.
엇갈린 시선, 어긋난 타이밍, 그리고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침묵. 세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소리 없이, 그러나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강윤은 고립되었고, 다솜은 상처받았으며, 지호는 죄책감에 짓눌렸다.
그날 이후, 세 사람 사이에는 시베리아의 겨울바람보다 더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강윤은 학교에 다시 나왔지만, 투명인간처럼 지냈다.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말을 걸어오는 친구에게는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그는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책상에 엎드려 잠만 잤다. 다솜은 복도에서 강윤과 마주칠 때마다 애써 시선을 피했다. 말을 걸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호는 그 둘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지호는 마침내 결심했다. 그는 더 이상 아버지의 꼭두각시로, 친구를 배신하는 스파이로 살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서재 문을 노크도 없이 열어젖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늘 주눅 들어 있던 아들의 당당하고 분노에 찬 태도에, 표진석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해보거라.”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강윤이 감시하는 거… 더는 못 하겠어요. 이건 강윤이를 위한 일이 아니에요. 이건 그냥, 아버지의 호기심과 욕심을 채우기 위한 비인간적인 실험일 뿐이잖아요!”
지호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항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표진석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었다. 그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아직 어려서 세상의 복잡성을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세상은 네 생각처럼 선과 악으로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단다. 차강윤의 힘은 인류의 미래를 바꿀 수도, 혹은 파괴할 수도 있는 판도라의 상자다. 그런 엄청난 힘을,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미숙한 십대 소년에게 아무런 통제 없이 맡겨두는 것이 과연 옳을까?”
표진석은 서재의 거대한 스크린을 켰다. 화면에는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원인 불명의 폭발 사고, 기상이변, 대규모 정전 사태에 대한 뉴스 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러시아의 다리가 갑자기 붕괴하는 영상, 일본 해안에 설명할 수 없는 거대 해일이 닥치는 영상, 북미 대륙에 거대한 싱크홀이 생겨나는 영상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이 모든 것이, 통제되지 않은 초능력자들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일으킨 사건이라면 믿을 수 있겠니? 나는 강윤이가 저렇게 되지 않도록 막고 있는 거다. 그의 힘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거라고. 넌 그 위대한 과업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다. 사소하고 유치한 감정에 휘둘려 대의를 그르치지 마라.”
아버지의 거대하고 흔들림 없는 논리 앞에서, 지호의 작은 반항은 힘없이 꺾였다. 아버지가 보여준 세상은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복잡했다. 어쩌면, 정말로 아버지가 옳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마저 들었다.
“강윤이와 다솜의 관계는 지금 어떤 상태지? 여전히 냉전 상태인가?”
표진석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지호는 패배감에 휩싸인 채,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관계를 회복시켜주도록 해라.”
“네?”
지호는 예상치 못한 지시에 놀라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단절되면, 강윤이는 더욱 고립되고 힘을 제어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안정적인 감정 상태 유지를 위해선 한다솜이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해. 긍정적이고 안정적인 사회적 유대는 능력 제어에 필수적인 변수거든. 넌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 둘을 화해시키고, 예전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들어. 이것도 너의 새로운 임무다. 이해했나?”
지호는 할 말을 잃었다. 아버지는 친구의 우정마저, 자신의 실험을 위한 도구이자 통제 가능한 변수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는 거대한 체스판 위의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깊은 절망감과 무력감에 휩싸인 채 서재를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그의 스마트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강윤이었다.
[지호야. 지금 시간 괜찮으면, 우리 아파트 옥상으로 잠깐 올라와 줄 수 있어? 할 말이 있어.]
지호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아파트 옥상으로 향했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의 뺨을 때렸다. 옥상 난간에 기대어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강윤이,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두 소년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길고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그 침묵의 무게가 너무나도 버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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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 아이 더 오리지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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