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9화
조회 : 444 추천 : 0 글자수 : 6,129 자 2025-10-21
제9화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아파트 옥상. 도시의 불빛들은 멀리서 아스라이 반짝이며 거대한 성운(星雲)을 이루고 있었지만, 두 소년이 서 있는 공간은 마치 우주 공간처럼 짙고 고요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강윤과 지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십수 년을 그림자처럼 함께해온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숨 막히는 어색함과 칼날처럼 날카로운 불신의 벽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옥상 환풍구가 내는 낮은 소음만이 둘 사이의 침묵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강윤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겨울 호수의 얼음처럼 차갑고 메말라 있었다.
“너… 알고 있었지?”
질문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내가 가진 이 이상하고 끔찍한 힘에 대해서, 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라는 원망과, 제발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한 가닥 희망, 그리고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자의 체념까지 뒤섞인 복잡한 질문이었다. 그는 지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현실감을 주었다.
지호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 없는 곳으로 내려앉았다. 그는 이 순간이 언젠가 올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왔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그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들었던 냉정한 목소리와, 빗속에서 공포에 질려 있던 강윤의 얼굴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진실을 말해야 할까? 하지만 진실을 말하는 순간, 자신은 친구를 오랫동안 속여온 비겁한 배신자가 되고, 아버지는 아들을 이용한 잔인한 과학자가 된다. 무엇보다 강윤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었던 친구마저 자신을 기만했다는 사실에 더 큰 혼란과 고통에 빠질 것이다. 아버지는 그것을 ‘불안정한 감정 상태’라고 부를 것이고, 더 지독하고 촘촘한 통제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안 돼. 아직은 말할 수 없어. 지금 진실을 말하는 건, 강윤이를 더 깊은 지옥으로 밀어 넣는 짓이야.’
지호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지난 며칠간 머릿속으로 수없이 연습했던 거짓말을 내뱉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필사적으로 바랐다.
“무슨 소리야? 뭘 알고 있었다는 거야? 나도 그날 너처럼 엄청 놀랐어. 그게 대체 무슨 힘인지, 나도 무섭고 혼란스럽다고. 내가 요즘 널 피했던 건… 그날 일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야. 정말이야.”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진심을 담아 연기하려 애썼다. 하지만 강윤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마치 엑스레이처럼 지호의 거짓말을 투과해 그 안의 진실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거짓말을 할 때면 미세하게 눈동자가 흔들리고, 말이 빨라지는 지호의 오랜 버릇을, 강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거짓말.”
강윤의 목소리가 더욱 차갑게, 그리고 단호하게 가라앉았다. 그 한마디에 지호의 어설픈 방어막이 산산조각 났다.
“너, 지금 나를 보면서 거짓말하고 있어. 예전부터 이상했어. 아주 가끔씩, 네가 나를… 시험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어. 피구 시합 때도, 유치원 때 달팽이 사건 때도… 난 그냥 내 착각이라고 생각했어. 널 믿었으니까. 그런데 그날 다솜이랑 우리 집 앞에서 얘기하는 걸 봤어. 너희 둘 표정, 심각했어. 나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내가 없는 곳에서. 내 비밀을 가지고 너희 둘이서 무슨 작당이라도 한 거냐고.”
강윤의 추궁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지호의 어설픈 방어막을 찢고 들어왔다. 지호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건… 다솜이가 너무 놀란 것 같아서, 그냥 괜찮을 거라고 위로해주고 있었던 거야! 네 걱정돼서 그런 거라고! 넌 학교도 안 나오고, 연락도 안 받으니까!”
“위로? 내 걱정?”
강윤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밤공기 속으로 메아리 없이 공허하게 흩어졌다. “그럼 왜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나를 피했는데? 진짜 내 걱정을 했으면, 가장 먼저 나한테 와서 괜찮냐고 물어봤어야지! 나를 괴물 보듯 피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끼리 내 등 뒤에서 심각한 얼굴로 수군거리는 게 아니라!”
강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억눌려왔던 배신감과 서운함, 그리고 고립감에 대한 공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는 자신의 힘이 두려운 것보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줄 것이라 믿었던 친구에게 기만당했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러웠다.
“말해봐, 표지호. 너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언제부터 나를 속인 거야? 네 아버지는? 너희 아버지는 또 뭘 알고 계신데? 그 똑똑하신 박사님께서 이걸 모르셨을 리가 없잖아!”
절벽 끝에 몰린 지호는 결국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것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분노이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죄책감에 대한 자기 파괴적인 절규였다.
“그래! 알았어! 네가 이상하다는 거, 남들과는 다르다는 거,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럼 내가 너한테 가서 ‘강윤아, 너 혹시 초능력자니? 영화에 나오는 애들처럼 물건도 움직이고 그러니?’ 하고 물어봤어야 하냐? 네가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 그 비밀 때문에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는지 뻔히 아는데, 그걸 어떻게 내 손으로 직접 들춰내! 나도 무서웠다고! 갑자기 네 주변 물건들이 이상하게 움직이고, 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그러다 그날 밤처럼 사람을 반 죽여놓고! 그런 널 보고 어떻게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라는 건데!”
지호의 외침에, 강윤은 할 말을 잃었다. 지호 역시 자신만큼이나, 어쩌면 자신보다 더 오랫동안 혼란스럽고 두려웠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강윤은 자신만 이 비밀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호는 그 비밀을 공유하지도 못한 채, 곁에서 함께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그럼 말을 했어야지… 나한테만이라도… 혼자 너무 무서웠단 말이야…”
강윤의 목소리가 힘없이 떨렸다. 분노는 사그라들고, 그 자리에는 어린아이 같은 원망과 외로움만이 남았다.
“말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지호의 목소리도 지쳐 있었다. 그는 난간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말하면 네가 그 힘을 없앨 수 있어? 아니면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그냥 우리 둘 다 더 비참해지고, 더 위험해질 뿐이야! 난 그냥… 네가 평범하게 살길 바랐어. 그냥 지금처럼,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그렇게 계속 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고, 이 바보야.”
두 소년은 서로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말을 주고받고 나서야, 자신들의 우정이 얼마나 망가지고 뒤틀렸는지를 깨달았다. 옥상 위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서로를 향한 원망과 분노의 감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깊은 슬픔과 어쩔 수 없는 연민,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이해라는 기묘한 감정만이 남았다.
“미안하다.”
지호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몰랐어. 지금도 모르겠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호는 옥상 문을 향해 천천히, 힘없이 걸어갔다. 쾅, 하고 닫히는 철문 소리는 마치 하나의 관계가 끝났음을 알리는 장송곡처럼 들렸다. 혼자 남겨진 강윤은 난간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마음속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린 듯 허전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조금은 후련했다. 더 이상 혼자서 비밀을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기묘한 해방감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세 사람 사이에는 얼음장 같은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은 이전의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과는 조금 다른,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침묵이었다. 강윤은 더 이상 지호를 의심의 눈으로 보지 않았고, 지호 역시 강윤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며 장난을 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그들의 관계는 소년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성장통과도 같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지호는 아버지의 명령과 자신의 진심 사이에서 깊이 고민했다. 그는 아버지가 시킨 대로 ‘억지 화해’를 주선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그는 다솜에게 찾아가 어젯밤 강윤과 나누었던 대화의 일부를 솔직하게, 하지만 비밀의 핵심은 교묘하게 감춘 채 털어놓았다.
“다솜아, 미안해. 내가 너한테 거짓말했어. 강윤이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대충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게 뭔지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냥… 강윤이가 어릴 때 겪은 큰 사고 때문에, 가끔 자기도 모르게 주변에 이상한 일이 생기는 것 같아. 트라우마 같은 거야. 자기도 제어를 못 해서 힘들어하고 있어. 그리고 그날 밤, 걔는 널 지키려고 그랬던 거, 그거 하나만은 진짜야.”
지호의 진심 어린 사과와 설명에, 다솜의 마음도 조금씩 움직였다. 그녀는 여전히 강윤의 힘이 두려웠지만, 그를 ‘괴물’이 아닌, 남모를 아픔을 가진 ‘아픈 친구’로 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점심시간에 혼자 밥을 먹는 강윤의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식판에 있던 계란말이 하나를 강윤의 식판 위에 올려주었다.
“어제… 지호한테 얘기 들었어. 많이 힘들었겠다. 그래도… 그날 구해줘서 고마워.”
강윤은 놀라 다솜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다. 대신, 따뜻한 걱정과 연민이 담겨 있었다. 강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란말이를 입에 넣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목이 메었다. 그 작은 행동 하나로, 세 사람의 얼어붙었던 관계는 아주 조금씩, 서툴게 녹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위태롭지만, 그들의 관계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봉합되는 것처럼 보였다. 지호는 아버지에게 ‘계획대로 관계가 회복되고 있음’이라고 보고했다. 표진석은 아들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믿으며 만족했다.
하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지호는 더 이상 맹목적인 감시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아버지에게 제출하는 보고서의 정보를 선별하고, 때로는 교묘하게 왜곡하며 강윤을 보호하려는 ‘이중 스파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몰래 관련 서적들을 빼내 읽으며, 염력, 초심리학, 뇌과학 등 강윤의 힘에 대한 정보를 독자적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언젠가 친구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강윤 역시 변했다. 그는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자신의 비밀을 온전히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자신의 아픔을 이해해주려는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상상 이상의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친구들을 다시는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다고, 그러기 위해 이 정체 모를 힘을 반드시 완벽하게 통제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날 밤, 강윤은 자신의 방에서 낡은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첫 페이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의 힘에 대한 보고서 - 통제와 이해를 위한 기록]
그는 그날부터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기록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가설 1: 강한 감정(분노, 공포, 보호 본능)은 힘의 출력을 제어 불가능할 정도로 증폭시킨다. (가장 시급한 통제 대상)
가설 2: 힘의 사용은 신체 에너지(특히 정신력)를 극심하게 소모하며, 과도한 사용은 신체적 손상(두통, 비출혈, 현기증 등)을 유발한다. (한계점 명확히 인지하고 관리할 것)
실험 1: 매일 5분씩, 작은 물체(압정)를 공중에 띄우는 훈련. 두통이 시작되는 시점, 유지 시간, 집중력의 변화 등을 상세히 기록.
목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한 상태에서 의식적으로 힘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방법을 찾는다. (궁극적 목표: 완벽한 제어와 응용)
그의 눈에는 더 이상 평범한 십대 소년의 혼란이 없었다. 그 자리에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자의 차갑고 단단한 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노트를 덮고, 지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호야. 나 혼자서는 안 될 것 같아. 도와줘.]
메시지는 짧았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더 이상 혼자 끙끙 앓지 않겠다는 의지이자, 상처를 딛고 친구를 다시 한번 온전히 믿어보겠다는 용기였다. 잠시 후, 지호에게서 답장이 왔다.
[언제나. 내가 옆에 있을게.]
짧은 답장이었지만, 강윤은 그 안에 담긴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두 소년의 우정은 가장 큰 위기를 겪으며 산산조각 날 뻔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균열을 통해 더욱 단단하고 성숙한 형태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각자의 위치에서, 같은 비밀을 공유하고 함께 싸워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한 명은 자신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 다른 한 명은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부터 친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의 위태로운 동맹은 그렇게 다시, 진정한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아파트 옥상. 도시의 불빛들은 멀리서 아스라이 반짝이며 거대한 성운(星雲)을 이루고 있었지만, 두 소년이 서 있는 공간은 마치 우주 공간처럼 짙고 고요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강윤과 지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십수 년을 그림자처럼 함께해온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숨 막히는 어색함과 칼날처럼 날카로운 불신의 벽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옥상 환풍구가 내는 낮은 소음만이 둘 사이의 침묵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강윤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겨울 호수의 얼음처럼 차갑고 메말라 있었다.
“너… 알고 있었지?”
질문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내가 가진 이 이상하고 끔찍한 힘에 대해서, 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라는 원망과, 제발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한 가닥 희망, 그리고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자의 체념까지 뒤섞인 복잡한 질문이었다. 그는 지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현실감을 주었다.
지호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 없는 곳으로 내려앉았다. 그는 이 순간이 언젠가 올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왔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그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들었던 냉정한 목소리와, 빗속에서 공포에 질려 있던 강윤의 얼굴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진실을 말해야 할까? 하지만 진실을 말하는 순간, 자신은 친구를 오랫동안 속여온 비겁한 배신자가 되고, 아버지는 아들을 이용한 잔인한 과학자가 된다. 무엇보다 강윤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었던 친구마저 자신을 기만했다는 사실에 더 큰 혼란과 고통에 빠질 것이다. 아버지는 그것을 ‘불안정한 감정 상태’라고 부를 것이고, 더 지독하고 촘촘한 통제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안 돼. 아직은 말할 수 없어. 지금 진실을 말하는 건, 강윤이를 더 깊은 지옥으로 밀어 넣는 짓이야.’
지호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지난 며칠간 머릿속으로 수없이 연습했던 거짓말을 내뱉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필사적으로 바랐다.
“무슨 소리야? 뭘 알고 있었다는 거야? 나도 그날 너처럼 엄청 놀랐어. 그게 대체 무슨 힘인지, 나도 무섭고 혼란스럽다고. 내가 요즘 널 피했던 건… 그날 일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야. 정말이야.”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진심을 담아 연기하려 애썼다. 하지만 강윤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마치 엑스레이처럼 지호의 거짓말을 투과해 그 안의 진실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거짓말을 할 때면 미세하게 눈동자가 흔들리고, 말이 빨라지는 지호의 오랜 버릇을, 강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거짓말.”
강윤의 목소리가 더욱 차갑게, 그리고 단호하게 가라앉았다. 그 한마디에 지호의 어설픈 방어막이 산산조각 났다.
“너, 지금 나를 보면서 거짓말하고 있어. 예전부터 이상했어. 아주 가끔씩, 네가 나를… 시험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어. 피구 시합 때도, 유치원 때 달팽이 사건 때도… 난 그냥 내 착각이라고 생각했어. 널 믿었으니까. 그런데 그날 다솜이랑 우리 집 앞에서 얘기하는 걸 봤어. 너희 둘 표정, 심각했어. 나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내가 없는 곳에서. 내 비밀을 가지고 너희 둘이서 무슨 작당이라도 한 거냐고.”
강윤의 추궁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지호의 어설픈 방어막을 찢고 들어왔다. 지호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건… 다솜이가 너무 놀란 것 같아서, 그냥 괜찮을 거라고 위로해주고 있었던 거야! 네 걱정돼서 그런 거라고! 넌 학교도 안 나오고, 연락도 안 받으니까!”
“위로? 내 걱정?”
강윤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밤공기 속으로 메아리 없이 공허하게 흩어졌다. “그럼 왜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나를 피했는데? 진짜 내 걱정을 했으면, 가장 먼저 나한테 와서 괜찮냐고 물어봤어야지! 나를 괴물 보듯 피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끼리 내 등 뒤에서 심각한 얼굴로 수군거리는 게 아니라!”
강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억눌려왔던 배신감과 서운함, 그리고 고립감에 대한 공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는 자신의 힘이 두려운 것보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줄 것이라 믿었던 친구에게 기만당했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러웠다.
“말해봐, 표지호. 너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언제부터 나를 속인 거야? 네 아버지는? 너희 아버지는 또 뭘 알고 계신데? 그 똑똑하신 박사님께서 이걸 모르셨을 리가 없잖아!”
절벽 끝에 몰린 지호는 결국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것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분노이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죄책감에 대한 자기 파괴적인 절규였다.
“그래! 알았어! 네가 이상하다는 거, 남들과는 다르다는 거,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럼 내가 너한테 가서 ‘강윤아, 너 혹시 초능력자니? 영화에 나오는 애들처럼 물건도 움직이고 그러니?’ 하고 물어봤어야 하냐? 네가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 그 비밀 때문에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는지 뻔히 아는데, 그걸 어떻게 내 손으로 직접 들춰내! 나도 무서웠다고! 갑자기 네 주변 물건들이 이상하게 움직이고, 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그러다 그날 밤처럼 사람을 반 죽여놓고! 그런 널 보고 어떻게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라는 건데!”
지호의 외침에, 강윤은 할 말을 잃었다. 지호 역시 자신만큼이나, 어쩌면 자신보다 더 오랫동안 혼란스럽고 두려웠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강윤은 자신만 이 비밀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호는 그 비밀을 공유하지도 못한 채, 곁에서 함께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그럼 말을 했어야지… 나한테만이라도… 혼자 너무 무서웠단 말이야…”
강윤의 목소리가 힘없이 떨렸다. 분노는 사그라들고, 그 자리에는 어린아이 같은 원망과 외로움만이 남았다.
“말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지호의 목소리도 지쳐 있었다. 그는 난간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말하면 네가 그 힘을 없앨 수 있어? 아니면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그냥 우리 둘 다 더 비참해지고, 더 위험해질 뿐이야! 난 그냥… 네가 평범하게 살길 바랐어. 그냥 지금처럼,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그렇게 계속 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고, 이 바보야.”
두 소년은 서로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말을 주고받고 나서야, 자신들의 우정이 얼마나 망가지고 뒤틀렸는지를 깨달았다. 옥상 위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서로를 향한 원망과 분노의 감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깊은 슬픔과 어쩔 수 없는 연민,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이해라는 기묘한 감정만이 남았다.
“미안하다.”
지호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몰랐어. 지금도 모르겠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호는 옥상 문을 향해 천천히, 힘없이 걸어갔다. 쾅, 하고 닫히는 철문 소리는 마치 하나의 관계가 끝났음을 알리는 장송곡처럼 들렸다. 혼자 남겨진 강윤은 난간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마음속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린 듯 허전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조금은 후련했다. 더 이상 혼자서 비밀을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기묘한 해방감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세 사람 사이에는 얼음장 같은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은 이전의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과는 조금 다른,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침묵이었다. 강윤은 더 이상 지호를 의심의 눈으로 보지 않았고, 지호 역시 강윤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며 장난을 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그들의 관계는 소년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성장통과도 같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지호는 아버지의 명령과 자신의 진심 사이에서 깊이 고민했다. 그는 아버지가 시킨 대로 ‘억지 화해’를 주선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그는 다솜에게 찾아가 어젯밤 강윤과 나누었던 대화의 일부를 솔직하게, 하지만 비밀의 핵심은 교묘하게 감춘 채 털어놓았다.
“다솜아, 미안해. 내가 너한테 거짓말했어. 강윤이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대충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게 뭔지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냥… 강윤이가 어릴 때 겪은 큰 사고 때문에, 가끔 자기도 모르게 주변에 이상한 일이 생기는 것 같아. 트라우마 같은 거야. 자기도 제어를 못 해서 힘들어하고 있어. 그리고 그날 밤, 걔는 널 지키려고 그랬던 거, 그거 하나만은 진짜야.”
지호의 진심 어린 사과와 설명에, 다솜의 마음도 조금씩 움직였다. 그녀는 여전히 강윤의 힘이 두려웠지만, 그를 ‘괴물’이 아닌, 남모를 아픔을 가진 ‘아픈 친구’로 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점심시간에 혼자 밥을 먹는 강윤의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식판에 있던 계란말이 하나를 강윤의 식판 위에 올려주었다.
“어제… 지호한테 얘기 들었어. 많이 힘들었겠다. 그래도… 그날 구해줘서 고마워.”
강윤은 놀라 다솜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다. 대신, 따뜻한 걱정과 연민이 담겨 있었다. 강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란말이를 입에 넣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목이 메었다. 그 작은 행동 하나로, 세 사람의 얼어붙었던 관계는 아주 조금씩, 서툴게 녹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위태롭지만, 그들의 관계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봉합되는 것처럼 보였다. 지호는 아버지에게 ‘계획대로 관계가 회복되고 있음’이라고 보고했다. 표진석은 아들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믿으며 만족했다.
하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지호는 더 이상 맹목적인 감시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아버지에게 제출하는 보고서의 정보를 선별하고, 때로는 교묘하게 왜곡하며 강윤을 보호하려는 ‘이중 스파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몰래 관련 서적들을 빼내 읽으며, 염력, 초심리학, 뇌과학 등 강윤의 힘에 대한 정보를 독자적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언젠가 친구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강윤 역시 변했다. 그는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자신의 비밀을 온전히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자신의 아픔을 이해해주려는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상상 이상의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친구들을 다시는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다고, 그러기 위해 이 정체 모를 힘을 반드시 완벽하게 통제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날 밤, 강윤은 자신의 방에서 낡은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첫 페이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의 힘에 대한 보고서 - 통제와 이해를 위한 기록]
그는 그날부터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기록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가설 1: 강한 감정(분노, 공포, 보호 본능)은 힘의 출력을 제어 불가능할 정도로 증폭시킨다. (가장 시급한 통제 대상)
가설 2: 힘의 사용은 신체 에너지(특히 정신력)를 극심하게 소모하며, 과도한 사용은 신체적 손상(두통, 비출혈, 현기증 등)을 유발한다. (한계점 명확히 인지하고 관리할 것)
실험 1: 매일 5분씩, 작은 물체(압정)를 공중에 띄우는 훈련. 두통이 시작되는 시점, 유지 시간, 집중력의 변화 등을 상세히 기록.
목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한 상태에서 의식적으로 힘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방법을 찾는다. (궁극적 목표: 완벽한 제어와 응용)
그의 눈에는 더 이상 평범한 십대 소년의 혼란이 없었다. 그 자리에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자의 차갑고 단단한 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노트를 덮고, 지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호야. 나 혼자서는 안 될 것 같아. 도와줘.]
메시지는 짧았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더 이상 혼자 끙끙 앓지 않겠다는 의지이자, 상처를 딛고 친구를 다시 한번 온전히 믿어보겠다는 용기였다. 잠시 후, 지호에게서 답장이 왔다.
[언제나. 내가 옆에 있을게.]
짧은 답장이었지만, 강윤은 그 안에 담긴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두 소년의 우정은 가장 큰 위기를 겪으며 산산조각 날 뻔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균열을 통해 더욱 단단하고 성숙한 형태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각자의 위치에서, 같은 비밀을 공유하고 함께 싸워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한 명은 자신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 다른 한 명은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부터 친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의 위태로운 동맹은 그렇게 다시, 진정한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작가의 말
등록된 작가의 말이 없습니다.
닫기![]()
초능력 아이 더 오리지널스
11.제10화조회 : 44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155 10.제09화조회 : 45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129 9.제08화조회 : 39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054 8.제07화조회 : 44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691 7.제06화조회 : 56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591 6.제05화조회 : 56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065 5.제04화조회 : 56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989 4.제03화조회 : 73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763 3.제02화조회 : 51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8,431 2.제01화조회 : 61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9,047 1.프롤로그조회 : 1,08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8,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