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조회 : 96 추천 : 0 글자수 : 6,971 자 2025-12-22
제21화
민서영의 안전가옥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폐공장이었지만, 그 내부는 알키미스트 재단에 대항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구축된 최첨단 요새였다. 이곳에서의 한 달은 강윤과 지호에게 단순한 은신과 도피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년의 껍질을 깨고 전사로 다시 태어나는, 처절하고도 고통스러운 성장의 시간이었다.
강윤은 민서영이 건네준 어머니의 유산, '리미터 해제 코드'와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시험했다. 그것은 단순히 초능력을 강화하는 훈련이 아니었다. 뇌의 신경망을 재구성하고, 불안정한 감정의 파도를 이성의 댐으로 가두는 정신 수련에 가까웠다.
"으아아아악!"
매일 밤, 강윤의 방에서는 고통스러운 비명이 새어 나왔다. 뇌파 증폭기를 머리에 쓴 채, 그는 가상의 공간에서 수천 번의 폭주와 죽음을 경험했다.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제노-7의 에너지는 마치 야생마처럼 날뛰었지만, 강윤은 포기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죽음, 다솜의 부상, 지호의 눈물. 그 모든 기억들이 그를 지탱하는 강철 같은 척추가 되었다.
한 달 후, 강윤은 달라져 있었다. 그의 눈빛은 더 깊고 차분해졌으며,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에너지는 더 이상 불안하게 일렁이지 않고 정교한 칼날처럼 날카롭게 정제되어 있었다. 그는 이제 단순한 염력을 넘어, 전자기기의 회로를 흐르는 전자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제어하는 '테크노패스(Technopath)'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지호 역시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그는 민서영의 베테랑 정보 요원들에게 해킹과 정보 분석 기술을 배웠고, 밤낮으로 아버지 표진석이 남긴 방대한 데이터의 바다를 항해했다. 그는 아버지의 비틀린 천재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재단의 약점을 파악해 나갔다.
"찾았습니다."
어느 날 새벽, 지호가 핏발 선 눈으로 모니터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보다는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의 흥분이 서려 있었다.
"표진석의 모든 자금 세탁 경로, 불법 임상실험 데이터, 그리고 재단의 비밀 통신망까지. 이 모든 정보가 최종적으로 모이는 곳이 있어요."
지호가 띄운 홀로그램 지도에는 서울 강남 한복판, 테헤란로에 우뚝 솟은 마천루 '네오 바이오텍' 빌딩이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
"이 건물의 지하 5층, '딥 코어(Deep Core)'라고 불리는 메인 서버실. 이곳이 바로 알키미스트 재단의 심장입니다. 이곳의 데이터를 확보하고 서버를 파괴한다면, 표진석뿐만 아니라 재단 전체를 뇌사 상태로 만들 수 있어요."
민서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네오 바이오텍… 그곳은 난공불락의 요새야. 전직 국정원과 CIA 요원들이 설계한 5중 보안 시스템에, 자체 무장 병력이 24시간 상주하고 있어. 물리적인 침투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물리적으로 갈 필요 없습니다."
강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제가 네트워크를 통해 직접 들어가겠습니다. 문이 없다면, 데이터의 길을 따라 들어가면 됩니다."
그의 계획은 미친 짓에 가까웠다. 건물 외부 지하에 매설된 초고속 광케이블망에 자신의 의식을 직접 접속시켜, 육체를 버리고 순수한 데이터의 형태로 서버에 침투하는 것. 지난번 네오젠 연구소 탈출 때, 잠시 경험했던 데이터 간섭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작전이었다.
"너무 위험해요, 강윤 씨. 인간의 뇌는 그런 방대한 데이터를 감당할 수 없어요. 자칫하면 뇌가 타버리거나, 의식이 데이터의 미로 속에 영원히 갇혀버릴 수도 있어요.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고요!"
민서영이 강하게 만류했지만, 강윤은 고개를 저었다.
"해야만 합니다. 그곳에… 아버지가 남기신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표진석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재단을 무너뜨릴 진짜 열쇠가 그곳에 있을 겁니다."
결전의 밤이 밝았다.
세 사람은 네오 바이오텍 빌딩이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맞은편 호텔 옥상에 자리를 잡았다.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와 긴장된 공기를 식혔다. 지호가 노트북을 펴고 외부 네트워크 접속 경로를 확보하자, 강윤은 특수 제작된 뇌파 증폭 헤드기어를 머리에 썼다.
"강윤아, 신호가 불안정해지면 바로 연결 끊을 거야. 절대 무리하지 마."
지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강윤의 어깨를 잡았다.
"걱정 마. 금방 다녀올게."
강윤은 지호와 민서영을 향해 짧게 미소 짓고,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눈을 감았다.
"접속 개시."
지호의 엔터키 소리와 함께, 강윤의 의식은 육체의 굴레를 벗어던졌다.
슈우우욱-!
강윤의 시야에서 현실의 풍경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고, 그 자리에 0과 1로 이루어진 무한한 빛의 터널이 펼쳐졌다. 빛보다 빠른 데이터의 급류가 그의 의식을 휩쓸었다. 그는 그 거대한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 흐름을 타고 네오 바이오텍을 향해 질주했다.
그의 눈앞에 거대한 디지털 성벽이 나타났다. 네오 바이오텍의 1차 방화벽이었다. 수천 개의 암호화 코드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돋아나 침입자를 위협했다. 강윤은 자신의 의지를 날카로운 창으로 형상화했다.
'뚫는다.'
그의 의지가 방화벽에 닿는 순간, 복잡한 암호들이 마치 유리가 깨지듯 산산조각 났다.
"1차 방화벽 돌파… 2차 보안 프로토콜 우회 성공… 침투 속도가 너무 빨라! 강윤아, 뇌파 수치가 위험 수위야!"
현실 세계의 지호가 모니터를 보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강윤의 코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려 입술을 적셨다. 뇌의 혈관이 터질 듯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강윤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데이터의 바다를 헤치며 더 깊은 곳, 더 어두운 심연을 향해 나아갔다.
마침내, 그는 네오 바이오텍의 심장부, '딥 코어' 서버에 도달했다. 그곳은 거대한 검은색 큐브의 형태를 하고 있었고, 표면에는 수억 개의 데이터가 핏줄처럼 흐르고 있었다. 강윤은 그 큐브에 손을 얹었다. (가상 공간에서의 손이었다.)
순식간에 표진석의 모든 악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무고한 사람들을 납치해 진행한 생체 실험 영상, 전 세계적인 테러와 분쟁을 조장하여 이익을 챙긴 금융 거래 내역, 그리고… 17년 전, 자신의 부모님을 살해하고 연구소 화재로 위장했던 그날의 끔찍한 진실까지.
강윤의 영혼이 분노로 타올랐다. 그는 당장이라도 이 모든 데이터를 파괴해버리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파괴가 목적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을 세상에 폭로하고, 그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것이 진정한 복수였다.
그는 서버의 데이터를 복사하여 민서영의 안전한 서버로 전송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환영한다, 차강윤.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올 줄 알았다.]
강윤의 의식 속에, 낯익고도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벼락처럼 울려 퍼졌다. 표진석이었다.
"함정이다!"
강윤이 반사적으로 연결을 끊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주변의 데이터 흐름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변하며, 거대한 쇠사슬처럼 변해 그의 팔다리를 옭아맸다.
"네놈이 네트워크를 통해 들어올 것이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 너의 그 경이로운 능력, 테크노패스의 자질을 내가 모를 리 없지 않나."
표진석의 목소리는 비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널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내 서버 깊숙한 곳에 심어둔, 정신 파괴 프로그램. 이름하여 '트라우마 루프(Trauma Loop)'."
콰아아앙!
강윤의 눈앞이 핏빛으로 물들며, 가상 공간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그가 가장 두려워하고,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기억들이 실체화되어 기어 나왔다.
불타는 집의 잔해 속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아버지.
자신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숨을 거두는 어머니.
"너 때문이야… 네가 우리를 죽인 거야…"라고 속삭이는 지호의 일그러진 얼굴.
총에 맞아 쓰러지며 "괴물…"이라고 중얼거리는 다솜.
악몽들이 살아있는 괴물이 되어 강윤을 물어뜯었다. 죄책감, 공포, 자기혐오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의 정신을 난도질했다.
"으아아아아악!"
현실 세계의 옥상에서, 강윤은 머리를 감싸 쥐며 짐승 같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 코, 귀, 입에서 검붉은 피가 동시에 쏟아져 나왔다. 그의 몸은 고압 전류에 감전된 듯 격렬하게 경련했다.
"강윤아! 안 돼! 정신 차려! 연결 끊어! 끊으라고!"
지호가 울부짖으며 강윤의 머리에서 헤드기어를 억지로 벗기려 했지만, 강력한 전자기장이 형성되어 그의 손을 튕겨냈다.
"안 돼요! 지금 강제로 끊으면 뇌가 완전히 파괴될 거예요! 스스로 깨어나야 해요!"
민서영이 지호를 말리며 절박하게 외쳤다. 하지만 강윤의 생체 신호는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가상 공간 속에서, 강윤은 어둠의 늪에 잠겨가고 있었다.
[포기해라. 너는 실패작이다. 넌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 너는 죽음만을 몰고 다니는 재앙이다.]
표진석의 목소리가 저주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강윤은 반박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아팠고, 너무나도 지쳤다. 이대로 모든 것을 놓고 편해지고 싶다는 유혹이 달콤하게 다가왔다.
'그래…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의 의식이 마지막 빛을 잃어가던 그 순간이었다.
깊은 어둠 속, 기억의 가장 밑바닥에서 아주 작고 따뜻한 빛 하나가 반짝였다. 그것은 트라우마 루프가 끄집어내지 못한, 혹은 건드리지 못한 유일한 기억이었다.
[강윤아… 내 사랑하는 아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민서영이 건네준 메모리 칩에 담겨 있던, 서지윤 박사의 마지막 음성 메시지.
[네가 가진 힘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 힘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란다. 누군가를 지키고, 사랑하기 위한 것이야. 너는 괴물이 아니야. 너는… 우리의 희망이란다.]
그리고 이어서, 투박하지만 든든했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아. 넘어져도 괜찮다. 다시 일어날 수만 있다면, 그건 실패가 아니야. 우린 널 믿는다.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다.]
부모님의 목소리는 차가운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빛이었다. 강윤은 깨달았다. 자신이 가진 기억들이 고통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고통 속에는 언제나 부모님의 사랑이, 친구들의 믿음이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혼자가 아니야."
강윤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동자에서 찬란한 푸른빛이 폭발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
콰아아아아-!
강윤의 내면에서 터져 나온 거대한 의지의 파동이, 그를 옭아매던 붉은색 사슬들을 산산조각 냈다. 악몽의 괴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순수한 정신력 하나만으로 표진석의 완벽한 함정, 트라우마 루프를 깨부순 것이다.
[시스템 오류. 정신 공격 무력화. 관리자 권한 탈취.]
가상 공간의 붉은빛이 사라지고, 다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강윤은 우뚝 서서, 표진석의 목소리가 들려오던 허공을 노려보았다.
"네 함정은 끝났다, 표진석."
강윤은 트라우마 루프가 걷힌 자리에서, 표진석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비밀 파티션 하나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그 어떤 암호화도 되어 있지 않은, 낡은 파일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Project Zero : 차태주 박사 연구 일지]
그것은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다. 제노-7 개발 초기부터 그 위험성을 감지한 아버지가, 혹시 모를 폭주나 악용을 막기 위해 비밀리에 연구했던 '제노-7 중화 시스템'. 초능력을 영원히 소멸시키거나, 폭주하는 에너지를 안전하게 분해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항 수단이었다. 아버지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훗날 태어날 아들이 짊어질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이 연구를 지켜왔던 것이다.
강윤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아버지의 설계도와 표진석의 모든 범죄 증거를 민서영의 서버로 전송했다.
[데이터 전송 완료. 서버 자폭 시퀀스 가동.]
강윤이 마지막 명령어를 입력하자, 가상 공간의 거대한 큐브가 안쪽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돌아간다."
그는 빛의 속도로 데이터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허억!"
현실 세계의 옥상에서 강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깨어났다. 온몸이 땀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강렬했다.
"강윤아!"
지호와 민서영이 그를 부축했다.
"해냈어… 아버지의 유산을… 찾았어."
강윤은 피 묻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곳에 아버지의 사랑이, 어머니의 믿음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이제 그들에게는 표진석을 무너뜨릴 '증거'와, 그의 힘을 무력화시킬 '방패'라는 두 자루의 칼이 쥐어졌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었다.
두두두두두!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옥상 위로 강력한 서치라이트 불빛이 쏟아졌다. 표진석이 역추적을 통해 그들의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포위됐다! 전원 전투 준비!"
민서영이 소리치며 권총을 꺼내 들었다. 옥상 문이 폭파되며 수십 명의 중무장 용병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들 뒤로, 검은 코트를 입은 표진석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옆에는, 의식을 잃은 채 두 손이 묶인 다솜이 용병에게 붙들려 있었다.
"내 데이터를 훔쳐가면 뭐 하나. 이 아이의 목숨과 바꿀 텐가?"
표진석의 차가운 목소리가 옥상에 울려 퍼졌다. 그는 다솜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
강윤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또다시 인질극.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위협하는 비겁한 수법. 하지만 이번의 강윤은 예전과 달랐다. 그는 분노에 삼켜지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 '프로젝트 제로'의 개념을 이미 머릿속에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피투성이가 된 몸이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표진석을 압도했다.
"거래는 없다, 표진석."
강윤의 눈동자가 푸른색을 넘어, 시공간의 공허를 닮은 순백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오늘, 여기서 모든 악연을 끊는다."
마지막 싸움의 서막이 올랐다. 옥상 위에는 차가운 밤바람 대신, 뜨거운 에너지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민서영의 안전가옥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폐공장이었지만, 그 내부는 알키미스트 재단에 대항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구축된 최첨단 요새였다. 이곳에서의 한 달은 강윤과 지호에게 단순한 은신과 도피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년의 껍질을 깨고 전사로 다시 태어나는, 처절하고도 고통스러운 성장의 시간이었다.
강윤은 민서영이 건네준 어머니의 유산, '리미터 해제 코드'와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시험했다. 그것은 단순히 초능력을 강화하는 훈련이 아니었다. 뇌의 신경망을 재구성하고, 불안정한 감정의 파도를 이성의 댐으로 가두는 정신 수련에 가까웠다.
"으아아아악!"
매일 밤, 강윤의 방에서는 고통스러운 비명이 새어 나왔다. 뇌파 증폭기를 머리에 쓴 채, 그는 가상의 공간에서 수천 번의 폭주와 죽음을 경험했다.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제노-7의 에너지는 마치 야생마처럼 날뛰었지만, 강윤은 포기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죽음, 다솜의 부상, 지호의 눈물. 그 모든 기억들이 그를 지탱하는 강철 같은 척추가 되었다.
한 달 후, 강윤은 달라져 있었다. 그의 눈빛은 더 깊고 차분해졌으며,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에너지는 더 이상 불안하게 일렁이지 않고 정교한 칼날처럼 날카롭게 정제되어 있었다. 그는 이제 단순한 염력을 넘어, 전자기기의 회로를 흐르는 전자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제어하는 '테크노패스(Technopath)'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지호 역시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그는 민서영의 베테랑 정보 요원들에게 해킹과 정보 분석 기술을 배웠고, 밤낮으로 아버지 표진석이 남긴 방대한 데이터의 바다를 항해했다. 그는 아버지의 비틀린 천재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재단의 약점을 파악해 나갔다.
"찾았습니다."
어느 날 새벽, 지호가 핏발 선 눈으로 모니터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보다는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의 흥분이 서려 있었다.
"표진석의 모든 자금 세탁 경로, 불법 임상실험 데이터, 그리고 재단의 비밀 통신망까지. 이 모든 정보가 최종적으로 모이는 곳이 있어요."
지호가 띄운 홀로그램 지도에는 서울 강남 한복판, 테헤란로에 우뚝 솟은 마천루 '네오 바이오텍' 빌딩이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
"이 건물의 지하 5층, '딥 코어(Deep Core)'라고 불리는 메인 서버실. 이곳이 바로 알키미스트 재단의 심장입니다. 이곳의 데이터를 확보하고 서버를 파괴한다면, 표진석뿐만 아니라 재단 전체를 뇌사 상태로 만들 수 있어요."
민서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네오 바이오텍… 그곳은 난공불락의 요새야. 전직 국정원과 CIA 요원들이 설계한 5중 보안 시스템에, 자체 무장 병력이 24시간 상주하고 있어. 물리적인 침투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물리적으로 갈 필요 없습니다."
강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제가 네트워크를 통해 직접 들어가겠습니다. 문이 없다면, 데이터의 길을 따라 들어가면 됩니다."
그의 계획은 미친 짓에 가까웠다. 건물 외부 지하에 매설된 초고속 광케이블망에 자신의 의식을 직접 접속시켜, 육체를 버리고 순수한 데이터의 형태로 서버에 침투하는 것. 지난번 네오젠 연구소 탈출 때, 잠시 경험했던 데이터 간섭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작전이었다.
"너무 위험해요, 강윤 씨. 인간의 뇌는 그런 방대한 데이터를 감당할 수 없어요. 자칫하면 뇌가 타버리거나, 의식이 데이터의 미로 속에 영원히 갇혀버릴 수도 있어요.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고요!"
민서영이 강하게 만류했지만, 강윤은 고개를 저었다.
"해야만 합니다. 그곳에… 아버지가 남기신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표진석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재단을 무너뜨릴 진짜 열쇠가 그곳에 있을 겁니다."
결전의 밤이 밝았다.
세 사람은 네오 바이오텍 빌딩이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맞은편 호텔 옥상에 자리를 잡았다.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와 긴장된 공기를 식혔다. 지호가 노트북을 펴고 외부 네트워크 접속 경로를 확보하자, 강윤은 특수 제작된 뇌파 증폭 헤드기어를 머리에 썼다.
"강윤아, 신호가 불안정해지면 바로 연결 끊을 거야. 절대 무리하지 마."
지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강윤의 어깨를 잡았다.
"걱정 마. 금방 다녀올게."
강윤은 지호와 민서영을 향해 짧게 미소 짓고,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눈을 감았다.
"접속 개시."
지호의 엔터키 소리와 함께, 강윤의 의식은 육체의 굴레를 벗어던졌다.
슈우우욱-!
강윤의 시야에서 현실의 풍경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고, 그 자리에 0과 1로 이루어진 무한한 빛의 터널이 펼쳐졌다. 빛보다 빠른 데이터의 급류가 그의 의식을 휩쓸었다. 그는 그 거대한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 흐름을 타고 네오 바이오텍을 향해 질주했다.
그의 눈앞에 거대한 디지털 성벽이 나타났다. 네오 바이오텍의 1차 방화벽이었다. 수천 개의 암호화 코드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돋아나 침입자를 위협했다. 강윤은 자신의 의지를 날카로운 창으로 형상화했다.
'뚫는다.'
그의 의지가 방화벽에 닿는 순간, 복잡한 암호들이 마치 유리가 깨지듯 산산조각 났다.
"1차 방화벽 돌파… 2차 보안 프로토콜 우회 성공… 침투 속도가 너무 빨라! 강윤아, 뇌파 수치가 위험 수위야!"
현실 세계의 지호가 모니터를 보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강윤의 코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려 입술을 적셨다. 뇌의 혈관이 터질 듯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강윤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데이터의 바다를 헤치며 더 깊은 곳, 더 어두운 심연을 향해 나아갔다.
마침내, 그는 네오 바이오텍의 심장부, '딥 코어' 서버에 도달했다. 그곳은 거대한 검은색 큐브의 형태를 하고 있었고, 표면에는 수억 개의 데이터가 핏줄처럼 흐르고 있었다. 강윤은 그 큐브에 손을 얹었다. (가상 공간에서의 손이었다.)
순식간에 표진석의 모든 악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무고한 사람들을 납치해 진행한 생체 실험 영상, 전 세계적인 테러와 분쟁을 조장하여 이익을 챙긴 금융 거래 내역, 그리고… 17년 전, 자신의 부모님을 살해하고 연구소 화재로 위장했던 그날의 끔찍한 진실까지.
강윤의 영혼이 분노로 타올랐다. 그는 당장이라도 이 모든 데이터를 파괴해버리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파괴가 목적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을 세상에 폭로하고, 그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것이 진정한 복수였다.
그는 서버의 데이터를 복사하여 민서영의 안전한 서버로 전송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환영한다, 차강윤.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올 줄 알았다.]
강윤의 의식 속에, 낯익고도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벼락처럼 울려 퍼졌다. 표진석이었다.
"함정이다!"
강윤이 반사적으로 연결을 끊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주변의 데이터 흐름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변하며, 거대한 쇠사슬처럼 변해 그의 팔다리를 옭아맸다.
"네놈이 네트워크를 통해 들어올 것이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 너의 그 경이로운 능력, 테크노패스의 자질을 내가 모를 리 없지 않나."
표진석의 목소리는 비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널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내 서버 깊숙한 곳에 심어둔, 정신 파괴 프로그램. 이름하여 '트라우마 루프(Trauma Loop)'."
콰아아앙!
강윤의 눈앞이 핏빛으로 물들며, 가상 공간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그가 가장 두려워하고,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기억들이 실체화되어 기어 나왔다.
불타는 집의 잔해 속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아버지.
자신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숨을 거두는 어머니.
"너 때문이야… 네가 우리를 죽인 거야…"라고 속삭이는 지호의 일그러진 얼굴.
총에 맞아 쓰러지며 "괴물…"이라고 중얼거리는 다솜.
악몽들이 살아있는 괴물이 되어 강윤을 물어뜯었다. 죄책감, 공포, 자기혐오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의 정신을 난도질했다.
"으아아아아악!"
현실 세계의 옥상에서, 강윤은 머리를 감싸 쥐며 짐승 같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 코, 귀, 입에서 검붉은 피가 동시에 쏟아져 나왔다. 그의 몸은 고압 전류에 감전된 듯 격렬하게 경련했다.
"강윤아! 안 돼! 정신 차려! 연결 끊어! 끊으라고!"
지호가 울부짖으며 강윤의 머리에서 헤드기어를 억지로 벗기려 했지만, 강력한 전자기장이 형성되어 그의 손을 튕겨냈다.
"안 돼요! 지금 강제로 끊으면 뇌가 완전히 파괴될 거예요! 스스로 깨어나야 해요!"
민서영이 지호를 말리며 절박하게 외쳤다. 하지만 강윤의 생체 신호는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가상 공간 속에서, 강윤은 어둠의 늪에 잠겨가고 있었다.
[포기해라. 너는 실패작이다. 넌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 너는 죽음만을 몰고 다니는 재앙이다.]
표진석의 목소리가 저주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강윤은 반박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아팠고, 너무나도 지쳤다. 이대로 모든 것을 놓고 편해지고 싶다는 유혹이 달콤하게 다가왔다.
'그래…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의 의식이 마지막 빛을 잃어가던 그 순간이었다.
깊은 어둠 속, 기억의 가장 밑바닥에서 아주 작고 따뜻한 빛 하나가 반짝였다. 그것은 트라우마 루프가 끄집어내지 못한, 혹은 건드리지 못한 유일한 기억이었다.
[강윤아… 내 사랑하는 아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민서영이 건네준 메모리 칩에 담겨 있던, 서지윤 박사의 마지막 음성 메시지.
[네가 가진 힘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 힘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란다. 누군가를 지키고, 사랑하기 위한 것이야. 너는 괴물이 아니야. 너는… 우리의 희망이란다.]
그리고 이어서, 투박하지만 든든했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아. 넘어져도 괜찮다. 다시 일어날 수만 있다면, 그건 실패가 아니야. 우린 널 믿는다.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다.]
부모님의 목소리는 차가운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빛이었다. 강윤은 깨달았다. 자신이 가진 기억들이 고통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고통 속에는 언제나 부모님의 사랑이, 친구들의 믿음이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혼자가 아니야."
강윤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동자에서 찬란한 푸른빛이 폭발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
콰아아아아-!
강윤의 내면에서 터져 나온 거대한 의지의 파동이, 그를 옭아매던 붉은색 사슬들을 산산조각 냈다. 악몽의 괴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순수한 정신력 하나만으로 표진석의 완벽한 함정, 트라우마 루프를 깨부순 것이다.
[시스템 오류. 정신 공격 무력화. 관리자 권한 탈취.]
가상 공간의 붉은빛이 사라지고, 다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강윤은 우뚝 서서, 표진석의 목소리가 들려오던 허공을 노려보았다.
"네 함정은 끝났다, 표진석."
강윤은 트라우마 루프가 걷힌 자리에서, 표진석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비밀 파티션 하나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그 어떤 암호화도 되어 있지 않은, 낡은 파일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Project Zero : 차태주 박사 연구 일지]
그것은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다. 제노-7 개발 초기부터 그 위험성을 감지한 아버지가, 혹시 모를 폭주나 악용을 막기 위해 비밀리에 연구했던 '제노-7 중화 시스템'. 초능력을 영원히 소멸시키거나, 폭주하는 에너지를 안전하게 분해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항 수단이었다. 아버지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훗날 태어날 아들이 짊어질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이 연구를 지켜왔던 것이다.
강윤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아버지의 설계도와 표진석의 모든 범죄 증거를 민서영의 서버로 전송했다.
[데이터 전송 완료. 서버 자폭 시퀀스 가동.]
강윤이 마지막 명령어를 입력하자, 가상 공간의 거대한 큐브가 안쪽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돌아간다."
그는 빛의 속도로 데이터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허억!"
현실 세계의 옥상에서 강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깨어났다. 온몸이 땀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강렬했다.
"강윤아!"
지호와 민서영이 그를 부축했다.
"해냈어… 아버지의 유산을… 찾았어."
강윤은 피 묻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곳에 아버지의 사랑이, 어머니의 믿음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이제 그들에게는 표진석을 무너뜨릴 '증거'와, 그의 힘을 무력화시킬 '방패'라는 두 자루의 칼이 쥐어졌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었다.
두두두두두!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옥상 위로 강력한 서치라이트 불빛이 쏟아졌다. 표진석이 역추적을 통해 그들의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포위됐다! 전원 전투 준비!"
민서영이 소리치며 권총을 꺼내 들었다. 옥상 문이 폭파되며 수십 명의 중무장 용병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들 뒤로, 검은 코트를 입은 표진석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옆에는, 의식을 잃은 채 두 손이 묶인 다솜이 용병에게 붙들려 있었다.
"내 데이터를 훔쳐가면 뭐 하나. 이 아이의 목숨과 바꿀 텐가?"
표진석의 차가운 목소리가 옥상에 울려 퍼졌다. 그는 다솜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
강윤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또다시 인질극.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위협하는 비겁한 수법. 하지만 이번의 강윤은 예전과 달랐다. 그는 분노에 삼켜지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 '프로젝트 제로'의 개념을 이미 머릿속에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피투성이가 된 몸이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표진석을 압도했다.
"거래는 없다, 표진석."
강윤의 눈동자가 푸른색을 넘어, 시공간의 공허를 닮은 순백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오늘, 여기서 모든 악연을 끊는다."
마지막 싸움의 서막이 올랐다. 옥상 위에는 차가운 밤바람 대신, 뜨거운 에너지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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