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조회 : 103 추천 : 0 글자수 : 6,644 자 2025-12-23
제22화
"거래는 없다, 표진석. 오늘, 여기서 모든 악연을 끊는다."
강윤의 선언과 함께 옥상 위에는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맴돌았다. 7월의 무더운 여름밤이었지만, 그의 주변 공기는 마치 시베리아의 설원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은 표진석의 뒤에 도열한 수십 명의 무장 용병들을 압도했다. 그들은 살인 병기로 훈련받은 자들이었지만, 강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정체불명의 위압감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강윤의 몸 주변으로 미세한 먼지와 작은 돌멩이들이 중력을 잃고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염력의 발현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가 그의 거대한 의지에 공명하며 떨리고 있는 것이었다.
"오만하구나, 아들아. 네놈이 제아무리 기고만장해봐야, 인질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을 텐데."
표진석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솜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더욱 깊게 눌렀다. 차가운 금속 총구가 다솜의 하얀 피부를 파고들었다. 의식을 잃은 다솜의 고개가 힘없이 흔들렸다. 창백한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린 한 가닥 머리카락이 바람에 위태롭게 흩날렸다. 그 모습을 본 강윤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주먹 쥔 손에는 핏줄이 돋아났다. 당장이라도 표진석을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지만, 그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분노로 요동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지금 그의 뇌리에는 아버지의 유산, '프로젝트 제로'의 설계도가 완벽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는 단순히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힘의 흐름을 역이용할 찰나의 타이밍을 계산하고 있었다. 감정은 연료일 뿐, 운전대는 이성이 잡아야 했다.
"저격수 배치 완료. 타겟 락온(Lock-on). 명령만 내리십시오."
용병 대장의 무전 소리가 정적을 깨고 들려왔다. 사방의 건물 옥상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붉은 레이저 포인트가 강윤과 지호, 민서영의 심장과 머리를 정확히 겨누었다. 마치 피에 굶주린 맹수들의 눈빛처럼 섬뜩했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즉시 사살하겠다는 무언의 경고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옥상을 감쌌다.
"지호야, 준비됐지?"
강윤이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텔레파시처럼 지호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것은 데이터의 흐름을 읽는 강윤의 능력을 응용한, 둘만의 비밀 채널이었다. 뇌파를 미세한 전기 신호로 변환하여 지호의 귓속에 심어둔 초소형 수신기로 직접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지호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 속의 장치를 만지작거렸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지만, 그의 손가락은 정확한 위치를 찾고 있었다. 그것은 네오 바이오텍 서버 해킹 당시 강윤이 몰래 심어둔 백도어를 통해 작동하는, 도시 전체의 전력망을 제어할 수 있는 마스터 키였다. 이 키 하나면 강남 일대를 순식간에 암흑으로 만들 수 있었다.
"지금!"
지호가 버튼을 누르는 순간,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 건물의 불빛들이 일제히 꺼졌다. 강남 일대의 모든 불빛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화려했던 네온사인, 가로등, 건물의 조명들이 순식간에 죽어버리고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정전 사태에 도시는 혼란에 빠졌고, 용병들은 당황하여 주춤거렸다. 그들의 최첨단 야간 투시경이 작동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2초. 하지만 초인적인 반사 신경을 가진 강윤에게 그 2초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는 어둠을 틈타 움직였다.
강윤은 그 짧은 틈을 타 자신의 염력을 폭발시켰다.
콰광!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옥상을 휩쓸었다. 표진석의 손에 들린 권총이 강력한 힘에 의해 튕겨 나가고, 다솜을 붙잡고 있던 용병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허공으로 날아갔다. 강윤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다솜을 낚아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동시에 민서영은 훈련된 동작으로 섬광탄을 터뜨려 용병들의 시야를 완벽하게 마비시켰다.
"으아악! 눈이! 내 눈!"
강렬한 빛에 노출된 용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싸 쥐었다. 혼란에 빠진 그들이 허공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지만, 강윤이 펼친 반투명한 에너지 방어막에 튕겨 나갈 뿐이었다. 총알이 방어막에 부딪힐 때마다 푸른 스파크가 튀며 어둠을 밝혔다. 팅, 팅, 팅! 금속성 소음이 빗발쳤다.
"도망쳐! 헬기가 온다!"
민서영이 외쳤다. 미리 준비해둔 스텔스 헬리콥터가 옥상 끝에서 굉음을 내며 솟아올랐다. '두두두두두-' 프로펠러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강윤은 다솜을 안고, 지호와 민서영을 따라 헬기 안으로 뛰어들었다. 헬기가 이륙하는 순간, 강윤은 옥상에 홀로 남아 분노에 차 소리치는 표진석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표진석의 일그러진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패배감과 분노로 뒤틀린 그 얼굴은 악귀와도 같았다.
"다음에 만날 때는,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될 거야. 당신이 쌓아올린 그 더러운 제국도, 당신의 목숨도."
강윤의 마지막 경고가 프로펠러 소리에 묻혀 흩어졌다. 헬기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표진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지만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이성을 잃은 광기가 서려 있었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내 세상에서.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잡아주마. 내 아들도, 내 실험체도, 모두 되찾아올 것이다."
민서영의 안전가옥으로 돌아온 그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마지막 반격을 준비했다. 이곳은 표진석의 감시망이 닿지 않는 유일한 장소였다. 다솜은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지만, 충격과 마취제의 영향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다솜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지만, 강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는 잠든 다솜의 손을 한 번 꼭 잡아주고는 작전 회의실로 향했다. 그의 표정은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비장했다.
그곳에는 민서영과 지호, 그리고 '새벽'의 핵심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벽면 가득한 모니터에는 알키미스트 재단의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중앙 스크린에는 강윤이 빼내 온 '프로젝트 제로'의 설계도가 복잡하게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수식과 도면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지만, 그 중심에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이 설계도… 정말 대단해. 차태주 박사님은 천재셨어. 제노-7 에너지의 고유 파동을 분석하고, 이를 역위상으로 상쇄시켜 무력화하는 장치를 고안하셨어. 이론적으로는 완벽해. 노이즈 캔슬링 기술과 비슷한 원리지만, 차원은 훨씬 높아. 이걸 완성하면 표진석의 초능력 부대를 한순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어. 그들의 힘을 0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야."
민서영이 감탄하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밤새 설계도를 분석하며 차태주 박사의 선구적인 혜안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곧 어두워졌다. 해결해야 할 치명적인 문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코어'야. 이 장치를 가동하려면 엄청난 양의 제노-7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증폭시킬 촉매제가 필요해. 일반적인 배터리나 발전기로는 어림도 없어. 순간적인 출력뿐만 아니라 지속성도 필요한데, 현재 우리 기술로는 그런 고순도 에너지 물질을 만들 수 없어. 재료가 없으면 설계도는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희망이 보이는 듯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그때, 강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할게요."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강윤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제가 그 코어가 되겠습니다. 제 몸에는 순수한 제노-7이 흐르고 있어요. 제 생체 에너지를 증폭시켜 장치를 가동하면 됩니다. 저는… 살아있는 배터리나 마찬가지니까요. 제 피, 제 세포 하나하나가 그 에너지원입니다."
"말도 안 돼! 그건 자살행위야! 미친 짓이라고!"
지호가 펄쩍 뛰며 반대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을 내리쳤다. 그의 눈은 공포와 걱정으로 커져 있었다.
"네 몸이 그 거대한 에너지를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러다간 네 혈관이 다 터지고, 장기가 녹아내릴 수도 있어! 심하면… 네가 소멸할 수도 있다고! 넌 인간이야, 기계가 아니라고!"
민서영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강윤 씨, 지호 군 말이 맞아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 이론상 가능하다고 해도, 인간의 몸이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있어요. 부작용을 예측할 수조차 없어요. 다른 방법을 찾아봅시다. 인공적으로 합성할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안전한 방법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강윤이 민서영의 말을 잘랐다.
"표진석은 곧 자신의 초능력 부대를 가동할 겁니다. 그러면 세상은 끝이에요. 그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세상을 지배하려 들 겁니다. 인공 합성?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공격해올 텐데, 언제까지 기다릴 겁니까? 제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강윤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눈에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비장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이 싸움의 끝에 자신의 자리가 없을지라도.
"아버지가 남기신 방패를, 제 손으로 완성하고 싶어요. 그리고… 더 이상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아요. 부모님을 잃었고, 다솜이가 다치는 걸 봤어요. 제 목숨 하나로 모두를 구할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그 길을 가겠습니다. 그게 제가 살아남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강윤의 단호함에 지호와 민서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결심은 바위처럼 단단했다.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들은 강윤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대신, 강윤의 신체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보조 장치를 개발하는 데 '새벽'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기로 했다.
일주일 후. '프로젝트 제로' 장치는 마침내 완성되었다. 그것은 강윤의 몸에 딱 맞는 특수 나노 슈트 형태였다. 슈트 곳곳에는 제노-7 에너지를 증폭하고 제어하는 회로가 핏줄처럼 얽혀 있었고, 가동될 때마다 신비로운 푸른빛을 내뿜었다. 슈트의 가슴 부분에는 에너지를 모으고 방출하는 코어 제어 장치가 장착되어 있었다.
"이게… 내 마지막 무기인가."
강윤은 슈트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슈트는 제2의 피부처럼 몸에 밀착되었다. 에너지가 흐르는 느낌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이제 남은 건 표진석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뿐이야."
지호가 알키미스트 재단의 비밀 기지 위치를 지도에 띄웠다. 붉은 점이 깜박이는 그곳은 다름 아닌 17년 전,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던 네오젠 연구소의 폐허 지하에 새로 건설된 거대 요새였다.
"운명의 장소군."
강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시작과 끝이 같은 곳이라니, 지독한 악연이었다. 마치 운명의 수레바퀴가 한 바퀴 돌고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곳에서 부모님이 연구를 시작했고, 그곳에서 부모님을 잃을 뻔했으며, 이제 그곳에서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출격 전날 밤, 강윤은 깨어난 다솜과 마주 앉았다. 안전가옥의 작은 정원 벤치였다. 다솜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강윤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따뜻했다.
"강윤아, 꼭 돌아올 거지?"
다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강윤이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강윤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응. 약속할게. 모든 걸 끝내고, 다시 너랑 학교 갈 거야. 떡볶이도 먹고, 영화도 보고. 평범하게… 그렇게 살자. 지호랑 셋이서, 예전처럼."
강윤은 다솜의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했다. 그것은 지키지 못할 수도 있는 약속이었지만, 그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그는 다솜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밝게 웃어 보였지만, 마음 한구석은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기다릴게. 네가 올 때까지."
다솜이 강윤의 품에 안겼다. 강윤은 그녀를 꼭 안아주며 맹세했다.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고.
다음 날 새벽, '새벽'의 모든 요원들과 강윤, 지호는 최후의 결전을 위해 네오젠 연구소로 향했다. 헬기 안에서 강윤은 아버지의 설계도가 담긴 칩을 목걸이처럼 걸고 있었다. 차가운 금속 칩이 가슴에 닿을 때마다 아버지의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옆에 앉은 지호는 노트북을 펴고 작전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긴장되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결연했다.
'아버지, 어머니. 지켜봐 주세요. 제가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당신들이 지키고 싶어 했던 세상을, 제 손으로 지켜내겠습니다. 그리고 표진석, 당신의 그 더러운 야망을 내 손으로 부숴버리겠어.'
헬기가 어둠을 뚫고 날아올랐다. 프로펠러 소리가 전쟁의 북소리처럼 울렸다. 저 멀리, 동이 터오는 지평선 너머로 네오젠 연구소의 실루엣이 검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곳에는 표진석과 그의 완성된 양산형 초능력 부대, 그리고 그들의 운명을 가를 최후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윤의 몸을 감싼 슈트가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장치가 아니었다. 소년의 의지와 부모님의 사랑이 빚어낸, 세상을 구할 마지막 희망의 빛이었다. 이제, 전설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바람이 거세졌다. 폭풍의 전조였다. 강윤은 심호흡을 하며 주먹을 쥐었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그는 준비되었다. 모든 것을 끝낼 준비가.
"거래는 없다, 표진석. 오늘, 여기서 모든 악연을 끊는다."
강윤의 선언과 함께 옥상 위에는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맴돌았다. 7월의 무더운 여름밤이었지만, 그의 주변 공기는 마치 시베리아의 설원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은 표진석의 뒤에 도열한 수십 명의 무장 용병들을 압도했다. 그들은 살인 병기로 훈련받은 자들이었지만, 강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정체불명의 위압감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강윤의 몸 주변으로 미세한 먼지와 작은 돌멩이들이 중력을 잃고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염력의 발현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가 그의 거대한 의지에 공명하며 떨리고 있는 것이었다.
"오만하구나, 아들아. 네놈이 제아무리 기고만장해봐야, 인질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을 텐데."
표진석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솜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더욱 깊게 눌렀다. 차가운 금속 총구가 다솜의 하얀 피부를 파고들었다. 의식을 잃은 다솜의 고개가 힘없이 흔들렸다. 창백한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린 한 가닥 머리카락이 바람에 위태롭게 흩날렸다. 그 모습을 본 강윤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주먹 쥔 손에는 핏줄이 돋아났다. 당장이라도 표진석을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지만, 그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분노로 요동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지금 그의 뇌리에는 아버지의 유산, '프로젝트 제로'의 설계도가 완벽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는 단순히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힘의 흐름을 역이용할 찰나의 타이밍을 계산하고 있었다. 감정은 연료일 뿐, 운전대는 이성이 잡아야 했다.
"저격수 배치 완료. 타겟 락온(Lock-on). 명령만 내리십시오."
용병 대장의 무전 소리가 정적을 깨고 들려왔다. 사방의 건물 옥상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붉은 레이저 포인트가 강윤과 지호, 민서영의 심장과 머리를 정확히 겨누었다. 마치 피에 굶주린 맹수들의 눈빛처럼 섬뜩했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즉시 사살하겠다는 무언의 경고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옥상을 감쌌다.
"지호야, 준비됐지?"
강윤이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텔레파시처럼 지호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것은 데이터의 흐름을 읽는 강윤의 능력을 응용한, 둘만의 비밀 채널이었다. 뇌파를 미세한 전기 신호로 변환하여 지호의 귓속에 심어둔 초소형 수신기로 직접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지호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 속의 장치를 만지작거렸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지만, 그의 손가락은 정확한 위치를 찾고 있었다. 그것은 네오 바이오텍 서버 해킹 당시 강윤이 몰래 심어둔 백도어를 통해 작동하는, 도시 전체의 전력망을 제어할 수 있는 마스터 키였다. 이 키 하나면 강남 일대를 순식간에 암흑으로 만들 수 있었다.
"지금!"
지호가 버튼을 누르는 순간,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 건물의 불빛들이 일제히 꺼졌다. 강남 일대의 모든 불빛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화려했던 네온사인, 가로등, 건물의 조명들이 순식간에 죽어버리고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정전 사태에 도시는 혼란에 빠졌고, 용병들은 당황하여 주춤거렸다. 그들의 최첨단 야간 투시경이 작동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2초. 하지만 초인적인 반사 신경을 가진 강윤에게 그 2초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는 어둠을 틈타 움직였다.
강윤은 그 짧은 틈을 타 자신의 염력을 폭발시켰다.
콰광!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옥상을 휩쓸었다. 표진석의 손에 들린 권총이 강력한 힘에 의해 튕겨 나가고, 다솜을 붙잡고 있던 용병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허공으로 날아갔다. 강윤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다솜을 낚아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동시에 민서영은 훈련된 동작으로 섬광탄을 터뜨려 용병들의 시야를 완벽하게 마비시켰다.
"으아악! 눈이! 내 눈!"
강렬한 빛에 노출된 용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싸 쥐었다. 혼란에 빠진 그들이 허공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지만, 강윤이 펼친 반투명한 에너지 방어막에 튕겨 나갈 뿐이었다. 총알이 방어막에 부딪힐 때마다 푸른 스파크가 튀며 어둠을 밝혔다. 팅, 팅, 팅! 금속성 소음이 빗발쳤다.
"도망쳐! 헬기가 온다!"
민서영이 외쳤다. 미리 준비해둔 스텔스 헬리콥터가 옥상 끝에서 굉음을 내며 솟아올랐다. '두두두두두-' 프로펠러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강윤은 다솜을 안고, 지호와 민서영을 따라 헬기 안으로 뛰어들었다. 헬기가 이륙하는 순간, 강윤은 옥상에 홀로 남아 분노에 차 소리치는 표진석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표진석의 일그러진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패배감과 분노로 뒤틀린 그 얼굴은 악귀와도 같았다.
"다음에 만날 때는,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될 거야. 당신이 쌓아올린 그 더러운 제국도, 당신의 목숨도."
강윤의 마지막 경고가 프로펠러 소리에 묻혀 흩어졌다. 헬기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표진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지만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이성을 잃은 광기가 서려 있었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내 세상에서.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잡아주마. 내 아들도, 내 실험체도, 모두 되찾아올 것이다."
민서영의 안전가옥으로 돌아온 그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마지막 반격을 준비했다. 이곳은 표진석의 감시망이 닿지 않는 유일한 장소였다. 다솜은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지만, 충격과 마취제의 영향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다솜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지만, 강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는 잠든 다솜의 손을 한 번 꼭 잡아주고는 작전 회의실로 향했다. 그의 표정은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비장했다.
그곳에는 민서영과 지호, 그리고 '새벽'의 핵심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벽면 가득한 모니터에는 알키미스트 재단의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중앙 스크린에는 강윤이 빼내 온 '프로젝트 제로'의 설계도가 복잡하게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수식과 도면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지만, 그 중심에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이 설계도… 정말 대단해. 차태주 박사님은 천재셨어. 제노-7 에너지의 고유 파동을 분석하고, 이를 역위상으로 상쇄시켜 무력화하는 장치를 고안하셨어. 이론적으로는 완벽해. 노이즈 캔슬링 기술과 비슷한 원리지만, 차원은 훨씬 높아. 이걸 완성하면 표진석의 초능력 부대를 한순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어. 그들의 힘을 0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야."
민서영이 감탄하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밤새 설계도를 분석하며 차태주 박사의 선구적인 혜안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곧 어두워졌다. 해결해야 할 치명적인 문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코어'야. 이 장치를 가동하려면 엄청난 양의 제노-7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증폭시킬 촉매제가 필요해. 일반적인 배터리나 발전기로는 어림도 없어. 순간적인 출력뿐만 아니라 지속성도 필요한데, 현재 우리 기술로는 그런 고순도 에너지 물질을 만들 수 없어. 재료가 없으면 설계도는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희망이 보이는 듯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그때, 강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할게요."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강윤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제가 그 코어가 되겠습니다. 제 몸에는 순수한 제노-7이 흐르고 있어요. 제 생체 에너지를 증폭시켜 장치를 가동하면 됩니다. 저는… 살아있는 배터리나 마찬가지니까요. 제 피, 제 세포 하나하나가 그 에너지원입니다."
"말도 안 돼! 그건 자살행위야! 미친 짓이라고!"
지호가 펄쩍 뛰며 반대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을 내리쳤다. 그의 눈은 공포와 걱정으로 커져 있었다.
"네 몸이 그 거대한 에너지를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러다간 네 혈관이 다 터지고, 장기가 녹아내릴 수도 있어! 심하면… 네가 소멸할 수도 있다고! 넌 인간이야, 기계가 아니라고!"
민서영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강윤 씨, 지호 군 말이 맞아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 이론상 가능하다고 해도, 인간의 몸이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있어요. 부작용을 예측할 수조차 없어요. 다른 방법을 찾아봅시다. 인공적으로 합성할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안전한 방법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강윤이 민서영의 말을 잘랐다.
"표진석은 곧 자신의 초능력 부대를 가동할 겁니다. 그러면 세상은 끝이에요. 그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세상을 지배하려 들 겁니다. 인공 합성?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공격해올 텐데, 언제까지 기다릴 겁니까? 제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강윤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눈에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비장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이 싸움의 끝에 자신의 자리가 없을지라도.
"아버지가 남기신 방패를, 제 손으로 완성하고 싶어요. 그리고… 더 이상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아요. 부모님을 잃었고, 다솜이가 다치는 걸 봤어요. 제 목숨 하나로 모두를 구할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그 길을 가겠습니다. 그게 제가 살아남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강윤의 단호함에 지호와 민서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결심은 바위처럼 단단했다.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들은 강윤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대신, 강윤의 신체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보조 장치를 개발하는 데 '새벽'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기로 했다.
일주일 후. '프로젝트 제로' 장치는 마침내 완성되었다. 그것은 강윤의 몸에 딱 맞는 특수 나노 슈트 형태였다. 슈트 곳곳에는 제노-7 에너지를 증폭하고 제어하는 회로가 핏줄처럼 얽혀 있었고, 가동될 때마다 신비로운 푸른빛을 내뿜었다. 슈트의 가슴 부분에는 에너지를 모으고 방출하는 코어 제어 장치가 장착되어 있었다.
"이게… 내 마지막 무기인가."
강윤은 슈트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슈트는 제2의 피부처럼 몸에 밀착되었다. 에너지가 흐르는 느낌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이제 남은 건 표진석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뿐이야."
지호가 알키미스트 재단의 비밀 기지 위치를 지도에 띄웠다. 붉은 점이 깜박이는 그곳은 다름 아닌 17년 전,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던 네오젠 연구소의 폐허 지하에 새로 건설된 거대 요새였다.
"운명의 장소군."
강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시작과 끝이 같은 곳이라니, 지독한 악연이었다. 마치 운명의 수레바퀴가 한 바퀴 돌고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곳에서 부모님이 연구를 시작했고, 그곳에서 부모님을 잃을 뻔했으며, 이제 그곳에서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출격 전날 밤, 강윤은 깨어난 다솜과 마주 앉았다. 안전가옥의 작은 정원 벤치였다. 다솜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강윤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따뜻했다.
"강윤아, 꼭 돌아올 거지?"
다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강윤이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강윤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응. 약속할게. 모든 걸 끝내고, 다시 너랑 학교 갈 거야. 떡볶이도 먹고, 영화도 보고. 평범하게… 그렇게 살자. 지호랑 셋이서, 예전처럼."
강윤은 다솜의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했다. 그것은 지키지 못할 수도 있는 약속이었지만, 그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그는 다솜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밝게 웃어 보였지만, 마음 한구석은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기다릴게. 네가 올 때까지."
다솜이 강윤의 품에 안겼다. 강윤은 그녀를 꼭 안아주며 맹세했다.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고.
다음 날 새벽, '새벽'의 모든 요원들과 강윤, 지호는 최후의 결전을 위해 네오젠 연구소로 향했다. 헬기 안에서 강윤은 아버지의 설계도가 담긴 칩을 목걸이처럼 걸고 있었다. 차가운 금속 칩이 가슴에 닿을 때마다 아버지의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옆에 앉은 지호는 노트북을 펴고 작전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긴장되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결연했다.
'아버지, 어머니. 지켜봐 주세요. 제가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당신들이 지키고 싶어 했던 세상을, 제 손으로 지켜내겠습니다. 그리고 표진석, 당신의 그 더러운 야망을 내 손으로 부숴버리겠어.'
헬기가 어둠을 뚫고 날아올랐다. 프로펠러 소리가 전쟁의 북소리처럼 울렸다. 저 멀리, 동이 터오는 지평선 너머로 네오젠 연구소의 실루엣이 검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곳에는 표진석과 그의 완성된 양산형 초능력 부대, 그리고 그들의 운명을 가를 최후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윤의 몸을 감싼 슈트가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장치가 아니었다. 소년의 의지와 부모님의 사랑이 빚어낸, 세상을 구할 마지막 희망의 빛이었다. 이제, 전설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바람이 거세졌다. 폭풍의 전조였다. 강윤은 심호흡을 하며 주먹을 쥐었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그는 준비되었다. 모든 것을 끝낼 준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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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 아이 더 오리지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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