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오랜 기다림의 끝이 다가왔다.
수많은 빛이 하늘을 따라 내려온다.
붉은 피가 눈앞을 가리고, 시체들이 산을 이루어 앞 길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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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XXX
나이: 19세
스킬: [XXX Lv.MAX], [XXXX Lv.MAX], [XXX Lv.MAX]……
특성: [사자(死者)의 요람기], [화염에 그을린 자], [영월의……
장비: [무영검(無影劒)]
직업: 최후의 검사
소속: XX고등학교 선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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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 소리.
귓가에 맴도는 사이렌 소리.
허공을 떠다니는 정신을 겨우 붙잡은 채,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물이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염분이 가득한 물이 상처에 떠밀려 와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하나둘 물에 뜨기 시작하는 시체들.
겨우 시체들을 옆으로 밀어 놓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머리가 잘려 나가 죽은 XXX가 있었고, 수많은 칼에 찔려 죽은 XXX가 있었다.
그 아래로 손가락이 전부 잘려나간 XXX이 있었고, 붉어진 하늘을 바라본 채 숨이 멎은 XXX가 있었다.
지옥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이 세계는 더 이상 사람이 사는 세계가 아니었다.
[전투모드 비활성화.]
[특성이 해제 됩니다.]
[스킬, XXXX가 중지됩니다.]
[무영검의 특수 효과가…….]
콰직.
푸른색 창이 계속해서 뜨자 검으로 푸른 창을 박살 내 버렸다.
나를 이곳까지 이끈 장본인이 바로 이 푸른색 창이니까.
내 손에 들려있던 검도 어느새 부러져 있었다.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았단 청록색 검이.
검을 바닥에 집어던지듯 툭 떨궈 놓고, 앞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의 끝맺음' 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몬스터도 아니고, 광기에 물든 인간도 아니다.
우리는 그 존재를 흔히 신이라 불렀고,
신에게 도전했다 전멸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 그대만 남았구나."
"그래. 이제 나 밖에 없어. 배에 살아있는 사람은."
신의 등장 이후 우리는 종말을 맞이했다.
학생, 경찰관, 사서, 대통령, 국회의원, 회사원, 선생님.
뭐라 할 것 없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신' 에 의해서.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15명의 인간이 신에게 대적하기 위해 배에 올랐지만,
삶의 시간을 조금 더 연장 했을 뿐,
나를 제외하고 전부 죽었다.
"죽여 빨리."
나는 이미 삶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이미 아무 생명체도 없는 이 지구에, 미련 따위는 없었다.
그저 빨리, 신이라는 존재가 나를 죽여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번에도 실패하였구나."
"…… 뭐?"
신은 나를 향해 내려왔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게 아닌, 나의 눈높이에 맞췄다.
"이번 실패로 921번째."
"잠깐…… 자꾸 무슨 소리를……."
921번째라는 소리가 머리 속을 떠나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 중 내가 921번째라는 걸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상에 단 하나만 남은 필멸자여. 922번째 과거를 마주하겠는가?"
922번째 과거.
기억이 없다.
나는 19살이다. 고작 19년 밖에 살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922번이란 숫자를 듣자 몸이 반응하는 것일까.
손과 다리가 굳은 듯 멈추고,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귀가 먹먹해지고, 심장이 2배는 빨리 뛰는 것 같았다.
"선택은 강요하지 않겠다. 다만 이곳에 남아있겠다면, 나는 그대를 죽이지 않을 것이고, 혼자 이 세계의 끝을 맞이할 것이다."
"하……. 그래서 지금 나보고 과거로 돌아갈 지 결정하라는 거야?"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망설일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나의 선택을 정해져 있었고, 정해져야만 했다.
"과거로 돌려 보내줘."
어째서 이 삶을 반복하고, 다시 고통을 느끼고, 피를 흘려야 하는 건지 알지 못했지만,
이 세상의 끝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나의 마지막은 옆에 누군가 있어주길 바랄 뿐이었다.
신이 무엇을 바래서 이런 제안을 하는 지, 900번이 넘도록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목을 따낼 것이다.
몇 백 번이고 몇 천 번이고 반복해서라도.
"반복되는 마지막 922번째 과거를 마주하라."
신의 외침이 하늘 전체에 울리고,
곧 나의 발 밑에 파장이 일어나며 깊은 심연 속으로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내 눈으로 본 것은, 신의 푸른 두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