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 몸이, 급식을 받아야 한단 말이냐?
조회 : 20 추천 : 0 글자수 : 5,997 자 2025-12-11
1. 김치 한 조각 없단 말이가?!
“수련이 오늘도 식판 안 들고 가네~ 금식 중인가봐~”
“ㅋㅋㅋ 어제는 물도 안 마시던데~ 혹시 수행 중?”
애들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터졌다.
수련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의자에 앉은 채 수저를 든 친구들 사이를 지나갔다.
마치,
그들이 다 자기가 밟고 지나온 궁중의 신하들이기라도 한 양.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진짜루… 배고프다……’
수련은 급식 배식대를 앞에 두고 멈춰 섰다.
오늘 메뉴는 제육볶음 + 깍두기 + 된장국.
하지만, 식판은 없었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식판을 건네주지 않았다.
“하…하…하…하…”
입꼬리가 떨렸다.
전생에 황궁 주방장이 금사슴 고기 하나 잘못 굽기만 해도 지하 감옥으로 직행이었는데,
지금은… 지금은…
“이 몸이… 제육볶음을 쳐다보며 군침을 삼키고 있단 말이가…?”
잔반통으로 눈이 향했다.
마치 본능처럼.
거기엔 반쯤 먹다 버린 고기 조각과 물에 불은 김치, 그리고 젓가락 자국만 남은 밥풀들이—
“……윽.”
르샤벨의 자존심이 그곳에서 토악질을 시작했다.
“어허… 감히 이 몸에게 잔반이라니…
내가 누구고, 이 손이 어떤 손인데,
고기 국물 한 방울 얻어먹으려고 저기 다가간다?”
몸은 배고팠지만, 정신은 고귀했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르샤벨이 분노의 사투리를 뱉기 시작했다.
“야 이 썩을 인간들아!
내 배는 귀족 위장이라꼬!
국밥 따위로는 돌아가지도 않는다 아이가!”
물론…
그 말은 목구멍까지만 차오르고, 그대로 삼켜졌다.
‘아니, 이래 참자니 분하다. 그렇다고 저걸 주워 묵자니 미치겠다.’
배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등뼈를 뜯고 있었고,
정신은 점점 망가지고 있었으며,
그 순간…
손끝이 찌릿, 했다.
‘……어라?’
정확히는,
왼손 약지.
전날 윤재현 앞에서 주먹을 쥐었던 그 손가락에서—
딱, 그 위치에서 미세한 전류 같은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거, 또 왔네…?
방금, 진짜 찌릿했단 말이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도 보지 않는 틈에 수련은 주먹을 펴봤다.
없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하지만 느껴진다.
그 느낌은 명확하다.
‘이건… 마법이다.
내 안의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다.’
감정.
그 감정이 마법의 문고리를 비트는 기분.
‘이거, 배고픔 때문에 헛것 본 건가…
아니야. 어제도 이랬다 아이가. 그놈 때문에 욱할 때…’
다시 한 번 주먹을 꽉 쥐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뜨거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잔반통 속 김치 한 조각이…
스르르 움직였다.
“……!”
진짜다.
방금 김치가… 내 쪽으로 기어왔다.
‘…마법이 돌아오고 있다.
근데 왜 하필… 김치냐…’
수련은 입술을 꾹 깨물며 생각했다.
‘좋다.
이 감정, 이 분노, 이 굴욕감.
이게 마법의 뚜껑을 열 수 있다면…
이 몸, 잔반도 받아들이마.’
그리고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르샤벨의 미소.
“마, 감정이면 뭐든 끌어올려주께.
고작 김치 한 조각으로… 내가 세상을 다시 바꿀 기라.”
바로 그 순간,
저 멀리 복도에서 누군가 그 광경을 슬쩍 바라보고 있었다.
윤재현이었다.
2. 왕따 후배의 작은 반찬 통
누가 봐도 ‘잔반 각’이었다.
수련은 잔반통 앞에 섰고,
그 앞에선 반쯤 퍼먹다 버려진 달걀말이, 묽은 된장국,
그리고 정체불명의 검은 고기 찌꺼기들이...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이거, 고기 맞긴 하냐… 꼬투리도 없고… 그냥 탄 거 같은데…’
이제는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그 손이 슬금슬금… 뚜껑을—
“언, 언니…!”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수련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쪽 구석, 복도 끝.
거기서 도시락을 조심스레 꺼내고 있는 한 여학생이 있었다.
잔뜩 고개 숙인 채,
오목한 턱에 커다란 안경까지 눌러쓴 채,
수련만큼이나 존재감이 없던 그 아이.
유리.
전교생 중, 수련보다도 먼저 투명 인간이 되어 있었던 전설의 왕따.
‘어라… 저 아이… 전생에도 본 거 같기도 하고… 아닌가…’
그 아이가 조심스럽게 작은 반찬통을 열었다.
달걀말이 두 조각, 볶음김치, 그리고 뭔가 정체모를 흰 덩어리 하나.
‘저건… 두부…? 설마 어제 꺼…?’
유리는 눈치를 보다,
쭈뼛쭈뼛 수련에게로 다가왔다.
“이… 이거… 어제 남은 건데…
그… 혹시… 드실래요…?”
말투는 새쥐같이 작았지만,
그 말은 수련의 가슴에 번개처럼 박혔다.
“………”
‘방금… 뭐라카노?’
“괜찮아요! 진짜… 저 배 안 고파서… 진짜루…”
유리는 허둥지둥 반찬통을 건넸고,
그 작은 손끝이 수련의 손등에 닿았다.
그 순간.
- 찌릿.
아니,
부드럽고 따뜻한 무언가가 수련의 손끝에서 퍼졌다.
불꽃도 아니고, 번개도 아니고,
그건 그냥…
‘온기…다.’
손가락에서 시작된 따뜻함이,
팔을 타고, 가슴까지 퍼져왔다.
“……이걸… 날 주겠다고예?”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의식도 못 했다.
“이… 이 몸이 반찬을 ‘받았다’꼬…?”
감정이었다.
굶주림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고,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뭘 주겠다고 한 그 감정.
그건 르샤벨이 한 번도 제대로 경험해본 적 없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눈물은 안 났다.
그 대신,
손끝이 다시 한 번 찌릿, 반짝였다.
아무도 못 봤다.
하지만 수련은 느꼈다.
‘마법이야.
근데… 분노가 아니라 따뜻함에서 나온 마법이다.’
유리는 반찬통을 놓고 빠르게 도망가듯 자리를 떴고,
수련은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았다.
“감정이… 감정이 나를 일으키고 있다…
이 몸이 감정 따위에 움직이고 있다니…”
그리고는 반찬 하나를 집어들었다.
입에 넣는 순간—
“……이건 뭐꼬. 왜 이리 짜노.”
짜고,
시고,
묘하게 텁텁했다.
하지만 그 맛이,
이상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줬다.
수련은 작게 웃었다.
“마법보다… 강하네. 이게… 감정이가.”
3. 감정이 움직일 때, 공기가 흔들린다
손끝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수련은 자기도 모르게
그 손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게 뭔 기가… 방금, 분명히… 따땃했다.”
파르르,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바람도 없고,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손가락이 떨릴 리가 없었다.
‘이건 그냥 떨림이 아니야. 안에서 나왔다.
무슨 기운처럼… 심장처럼.’
급식실 구석,
싸늘하게 식은 김치조림 한 조각 위에
수련의 손이 가만히 놓여 있었다.
그 순간—
그 김치 위로 아주 작고 희미한 파란 불씨 하나,
“텁—” 하고 솟았다가 사라졌다.
“……!”
수련은 깜짝 놀라 손을 뺐다.
“이… 이게… 마법 아이가?! 진짜로?!”
방금 전까지 잔반통에 코 박고 있던 인간이
지금은 자기 손끝에서 나온 파란 불빛을 보며
눈이 동그래졌다.
그건 ‘분노’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굶주림’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딱 한순간.
누군가가 나를 위해 손 내밀었던 그 순간.
“그 조그마한 반찬 한 조각이…
감정이라는 걸 일으켰고,
그 감정이… 이 빛을 만든 기가?”
수련은 허탈하게 웃었다.
“전생에 마법은 기합과 지식으로 다뤘는데,
지금은… 감정으로 나오네.
그것도, 따스한 마음에서.”
그 말이 입 밖에 나오는 순간.
급식실 커튼 사이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스르륵 스쳤다.
윤재현이었다.
복도에 있던 그는
급식실 안에서 번쩍한 기운을 보고
무심결에 커튼 틈을 젖혔다.
그리고 그 순간—
수련의 손끝에서
파랗고 따뜻한 빛 한 점이
‘파르르’ 피어나는 걸
정확히 목격했다.
“……뭐, 뭐여… 지금 그거… 불이여?”
윤재현의 입에서
익숙한 서울말이 아니라
본능적인 전라도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얼어붙었다.
눈이 수련의 손끝에 고정됐다.
‘진짜… 나만 본 건가?’
그 불빛은 길지도, 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가슴 깊은 데까지 찌릿하게 꽂혔다.
“그 빛…
그 느낌, 이상하네.
따뜻하면서도… 무서웠어.”
그때,
수련이 커튼 사이를 눈치채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정확히 윤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커튼 너머인데도,
그녀의 눈동자에 기묘한 빛이 감돌았다.
“봤나…?”
입을 열진 않았지만,
그 눈빛은 분명히 말했다.
‘너, 봤지?
기억나지 않아?
그날도 이런 식이었잖아…’
윤재현은 화들짝 놀라
커튼에서 몸을 뺐다.
그의 뒷목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씨… 뭔 촌년이 눈빛이 저래.
진짜 뭐 봐부렀나…”
가슴이 미묘하게 뛰었다.
설렘이 아니라—
무서움에 가까운 어떤 낯선 떨림.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환청이여, 환각이여, 망상이여…
그 촌년이, 마법이라도 쓴다는 거여 뭐여.”
그는 그렇게 뒷걸음질치며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가슴 안의 떨림은
계속해서 작은 북소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수련은,
여전히 손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감정이고,
감정은 곧 마법이고…
마법은 나를 되찾는 열쇠다.”
4. 윤재현, 그걸 봤다
“씨… 미쳤다.”
복도 끝을 돌아 나온 윤재현은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별거 없다.
늘 그랬듯
손가락 열 개, 손금, 핸드크림 안 바른 피부.
그런데도
방금 그 손끝에서,
무언가 이상한 떨림이
‘찡’— 하고 올라왔었다.
“그 촌년… 손끝에서 불이 나왔잖아.
진짜, 파란 불… 그건 내 착각 아니었지?”
정확히 말하면,
불이라기보단 **‘빛’**이었다.
파랗고 따뜻하고…
낯설면서도 어디선가 익숙한.
“어디서… 봤드라…”
생각을 더 하려 하자,
머리가 ‘찌잉’ 하고 울렸다.
기억은 없다.
하지만 느낌은 있다.
그리고 그 느낌이,
윤재현을 점점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저 촌년만 보면…
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반응하고,
꿈까지 꿔지는 건데?’
불현듯
며칠 전의 꿈이 떠올랐다.
거대한 궁전의 계단.
핏빛 드레스의 여자가
자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에, 죄가 되었다.”
꿈속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자의 눈—
붉게 빛났었다.
그리고…
방금 급식실에서 본 그 눈이랑, 똑같았다.
“……씨.”
윤재현은 한쪽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숨이 거칠게 올라왔다.
“왜 내가… 그런 꿈을 꾸는 거지.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
손바닥에서 또 한 번 **‘짜릿’**한 감각이 퍼졌다.
놀라서 손을 폈다.
불은 없었다.
하지만 손바닥이 아주 미세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설마… 나도 뭐 이상한 거 걸린 건가…?”
아니면,
저 촌년한테 뭔가 주술이라도 걸렸나?
혼란에 빠진 윤재현은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손가락이 멈춘 건…
‘이수련 SNS 계정’ 검색창.
“아니, 내가 왜 이걸 검색하냐… 하…”
그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진짜, 저 촌년 뭐지… 대체 뭐냐고.”
바로 그때였다.
복도 창문 너머—
햇살이 살짝 흔들렸다.
마치 바람이 스쳤다가 아니라,
공기 자체가 뒤틀린 것처럼.
윤재현은 다시
등골을 쓸어내렸다.
그는 아직 모른다.
자신이 ‘본다’는 것 자체가
신의 처벌이자 특혜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느끼는 이 기묘한 불안이
곧 운명의 부름이라는 것을.
5. 전생의 빛, 감정의 불꽃
수련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손을 씻지도 않고
그대로 방에 누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쓰러졌다.
온몸이 무겁고
가슴은 이상하게 먹먹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지치노…’
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며
손을 천천히 들었다.
그 손끝.
점심시간,
후배 유리의 손이 닿았던 순간—
거기서 확실히 무언가가 났다.
불?
빛?
기운?
정확히 설명은 못 하겠지만
‘뭔가 이상한 게 나왔다’는 감각은 확실했다.
“마법… 맞을낀가…”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펴며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마법은 죽은 줄 알았는데…
그때처럼… 전처럼…
그 위대하고 강력한,
르샤벨의 마법은 다 사라졌는데—”
그런데 오늘은
정말 이상했다.
유리가
자기한테 반찬 하나 내밀며 웃었을 뿐인데
가슴이 ‘확’ 하고 무너졌다.
그 아이가
자기를 이해해준 느낌,
그게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렸고…
그리고 바로,
그때 마법이 흘렀다.
“감정이… 곧 마법이라는 기라?”
르샤벨 시절엔 몰랐다.
감정을 얕잡아봤다.
슬픔?
연민?
배려?
‘힘 없는 자들의 위장술’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
이 촌스럽고 무기력한 몸뚱이 속에서,
그 감정들이 살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마법을 깨운다.
“이 몸이…
감정이란 걸 써야 한단 말이가…”
수련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 거울이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뾰루지 한두 개,
누가 봐도 별 매력 없는 중학생의 얼굴.
하지만 그녀는
그 속에서 아주 잠깐—
르샤벨의 눈동자를 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빨갛게, 서늘하게,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그라면, 이제부터는…
내가 먼저 감정을 줘볼란다.”
사랑받아야만 돌아갈 수 있는 운명.
그 운명을 이루기 위해
감정을 “써야” 한다면—
하겠다고,
기꺼이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르샤벨이 아닌,
이수련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위해 가슴이 움직이면,
내 마법도, 이 운명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을 기라…”
“수련이 오늘도 식판 안 들고 가네~ 금식 중인가봐~”
“ㅋㅋㅋ 어제는 물도 안 마시던데~ 혹시 수행 중?”
애들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터졌다.
수련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의자에 앉은 채 수저를 든 친구들 사이를 지나갔다.
마치,
그들이 다 자기가 밟고 지나온 궁중의 신하들이기라도 한 양.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진짜루… 배고프다……’
수련은 급식 배식대를 앞에 두고 멈춰 섰다.
오늘 메뉴는 제육볶음 + 깍두기 + 된장국.
하지만, 식판은 없었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식판을 건네주지 않았다.
“하…하…하…하…”
입꼬리가 떨렸다.
전생에 황궁 주방장이 금사슴 고기 하나 잘못 굽기만 해도 지하 감옥으로 직행이었는데,
지금은… 지금은…
“이 몸이… 제육볶음을 쳐다보며 군침을 삼키고 있단 말이가…?”
잔반통으로 눈이 향했다.
마치 본능처럼.
거기엔 반쯤 먹다 버린 고기 조각과 물에 불은 김치, 그리고 젓가락 자국만 남은 밥풀들이—
“……윽.”
르샤벨의 자존심이 그곳에서 토악질을 시작했다.
“어허… 감히 이 몸에게 잔반이라니…
내가 누구고, 이 손이 어떤 손인데,
고기 국물 한 방울 얻어먹으려고 저기 다가간다?”
몸은 배고팠지만, 정신은 고귀했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르샤벨이 분노의 사투리를 뱉기 시작했다.
“야 이 썩을 인간들아!
내 배는 귀족 위장이라꼬!
국밥 따위로는 돌아가지도 않는다 아이가!”
물론…
그 말은 목구멍까지만 차오르고, 그대로 삼켜졌다.
‘아니, 이래 참자니 분하다. 그렇다고 저걸 주워 묵자니 미치겠다.’
배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등뼈를 뜯고 있었고,
정신은 점점 망가지고 있었으며,
그 순간…
손끝이 찌릿, 했다.
‘……어라?’
정확히는,
왼손 약지.
전날 윤재현 앞에서 주먹을 쥐었던 그 손가락에서—
딱, 그 위치에서 미세한 전류 같은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거, 또 왔네…?
방금, 진짜 찌릿했단 말이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도 보지 않는 틈에 수련은 주먹을 펴봤다.
없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하지만 느껴진다.
그 느낌은 명확하다.
‘이건… 마법이다.
내 안의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다.’
감정.
그 감정이 마법의 문고리를 비트는 기분.
‘이거, 배고픔 때문에 헛것 본 건가…
아니야. 어제도 이랬다 아이가. 그놈 때문에 욱할 때…’
다시 한 번 주먹을 꽉 쥐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뜨거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잔반통 속 김치 한 조각이…
스르르 움직였다.
“……!”
진짜다.
방금 김치가… 내 쪽으로 기어왔다.
‘…마법이 돌아오고 있다.
근데 왜 하필… 김치냐…’
수련은 입술을 꾹 깨물며 생각했다.
‘좋다.
이 감정, 이 분노, 이 굴욕감.
이게 마법의 뚜껑을 열 수 있다면…
이 몸, 잔반도 받아들이마.’
그리고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르샤벨의 미소.
“마, 감정이면 뭐든 끌어올려주께.
고작 김치 한 조각으로… 내가 세상을 다시 바꿀 기라.”
바로 그 순간,
저 멀리 복도에서 누군가 그 광경을 슬쩍 바라보고 있었다.
윤재현이었다.
2. 왕따 후배의 작은 반찬 통
누가 봐도 ‘잔반 각’이었다.
수련은 잔반통 앞에 섰고,
그 앞에선 반쯤 퍼먹다 버려진 달걀말이, 묽은 된장국,
그리고 정체불명의 검은 고기 찌꺼기들이...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이거, 고기 맞긴 하냐… 꼬투리도 없고… 그냥 탄 거 같은데…’
이제는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그 손이 슬금슬금… 뚜껑을—
“언, 언니…!”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수련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쪽 구석, 복도 끝.
거기서 도시락을 조심스레 꺼내고 있는 한 여학생이 있었다.
잔뜩 고개 숙인 채,
오목한 턱에 커다란 안경까지 눌러쓴 채,
수련만큼이나 존재감이 없던 그 아이.
유리.
전교생 중, 수련보다도 먼저 투명 인간이 되어 있었던 전설의 왕따.
‘어라… 저 아이… 전생에도 본 거 같기도 하고… 아닌가…’
그 아이가 조심스럽게 작은 반찬통을 열었다.
달걀말이 두 조각, 볶음김치, 그리고 뭔가 정체모를 흰 덩어리 하나.
‘저건… 두부…? 설마 어제 꺼…?’
유리는 눈치를 보다,
쭈뼛쭈뼛 수련에게로 다가왔다.
“이… 이거… 어제 남은 건데…
그… 혹시… 드실래요…?”
말투는 새쥐같이 작았지만,
그 말은 수련의 가슴에 번개처럼 박혔다.
“………”
‘방금… 뭐라카노?’
“괜찮아요! 진짜… 저 배 안 고파서… 진짜루…”
유리는 허둥지둥 반찬통을 건넸고,
그 작은 손끝이 수련의 손등에 닿았다.
그 순간.
- 찌릿.
아니,
부드럽고 따뜻한 무언가가 수련의 손끝에서 퍼졌다.
불꽃도 아니고, 번개도 아니고,
그건 그냥…
‘온기…다.’
손가락에서 시작된 따뜻함이,
팔을 타고, 가슴까지 퍼져왔다.
“……이걸… 날 주겠다고예?”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의식도 못 했다.
“이… 이 몸이 반찬을 ‘받았다’꼬…?”
감정이었다.
굶주림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고,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뭘 주겠다고 한 그 감정.
그건 르샤벨이 한 번도 제대로 경험해본 적 없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눈물은 안 났다.
그 대신,
손끝이 다시 한 번 찌릿, 반짝였다.
아무도 못 봤다.
하지만 수련은 느꼈다.
‘마법이야.
근데… 분노가 아니라 따뜻함에서 나온 마법이다.’
유리는 반찬통을 놓고 빠르게 도망가듯 자리를 떴고,
수련은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았다.
“감정이… 감정이 나를 일으키고 있다…
이 몸이 감정 따위에 움직이고 있다니…”
그리고는 반찬 하나를 집어들었다.
입에 넣는 순간—
“……이건 뭐꼬. 왜 이리 짜노.”
짜고,
시고,
묘하게 텁텁했다.
하지만 그 맛이,
이상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줬다.
수련은 작게 웃었다.
“마법보다… 강하네. 이게… 감정이가.”
3. 감정이 움직일 때, 공기가 흔들린다
손끝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수련은 자기도 모르게
그 손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게 뭔 기가… 방금, 분명히… 따땃했다.”
파르르,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바람도 없고,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손가락이 떨릴 리가 없었다.
‘이건 그냥 떨림이 아니야. 안에서 나왔다.
무슨 기운처럼… 심장처럼.’
급식실 구석,
싸늘하게 식은 김치조림 한 조각 위에
수련의 손이 가만히 놓여 있었다.
그 순간—
그 김치 위로 아주 작고 희미한 파란 불씨 하나,
“텁—” 하고 솟았다가 사라졌다.
“……!”
수련은 깜짝 놀라 손을 뺐다.
“이… 이게… 마법 아이가?! 진짜로?!”
방금 전까지 잔반통에 코 박고 있던 인간이
지금은 자기 손끝에서 나온 파란 불빛을 보며
눈이 동그래졌다.
그건 ‘분노’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굶주림’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딱 한순간.
누군가가 나를 위해 손 내밀었던 그 순간.
“그 조그마한 반찬 한 조각이…
감정이라는 걸 일으켰고,
그 감정이… 이 빛을 만든 기가?”
수련은 허탈하게 웃었다.
“전생에 마법은 기합과 지식으로 다뤘는데,
지금은… 감정으로 나오네.
그것도, 따스한 마음에서.”
그 말이 입 밖에 나오는 순간.
급식실 커튼 사이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스르륵 스쳤다.
윤재현이었다.
복도에 있던 그는
급식실 안에서 번쩍한 기운을 보고
무심결에 커튼 틈을 젖혔다.
그리고 그 순간—
수련의 손끝에서
파랗고 따뜻한 빛 한 점이
‘파르르’ 피어나는 걸
정확히 목격했다.
“……뭐, 뭐여… 지금 그거… 불이여?”
윤재현의 입에서
익숙한 서울말이 아니라
본능적인 전라도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얼어붙었다.
눈이 수련의 손끝에 고정됐다.
‘진짜… 나만 본 건가?’
그 불빛은 길지도, 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가슴 깊은 데까지 찌릿하게 꽂혔다.
“그 빛…
그 느낌, 이상하네.
따뜻하면서도… 무서웠어.”
그때,
수련이 커튼 사이를 눈치채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정확히 윤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커튼 너머인데도,
그녀의 눈동자에 기묘한 빛이 감돌았다.
“봤나…?”
입을 열진 않았지만,
그 눈빛은 분명히 말했다.
‘너, 봤지?
기억나지 않아?
그날도 이런 식이었잖아…’
윤재현은 화들짝 놀라
커튼에서 몸을 뺐다.
그의 뒷목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씨… 뭔 촌년이 눈빛이 저래.
진짜 뭐 봐부렀나…”
가슴이 미묘하게 뛰었다.
설렘이 아니라—
무서움에 가까운 어떤 낯선 떨림.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환청이여, 환각이여, 망상이여…
그 촌년이, 마법이라도 쓴다는 거여 뭐여.”
그는 그렇게 뒷걸음질치며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가슴 안의 떨림은
계속해서 작은 북소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수련은,
여전히 손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감정이고,
감정은 곧 마법이고…
마법은 나를 되찾는 열쇠다.”
4. 윤재현, 그걸 봤다
“씨… 미쳤다.”
복도 끝을 돌아 나온 윤재현은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별거 없다.
늘 그랬듯
손가락 열 개, 손금, 핸드크림 안 바른 피부.
그런데도
방금 그 손끝에서,
무언가 이상한 떨림이
‘찡’— 하고 올라왔었다.
“그 촌년… 손끝에서 불이 나왔잖아.
진짜, 파란 불… 그건 내 착각 아니었지?”
정확히 말하면,
불이라기보단 **‘빛’**이었다.
파랗고 따뜻하고…
낯설면서도 어디선가 익숙한.
“어디서… 봤드라…”
생각을 더 하려 하자,
머리가 ‘찌잉’ 하고 울렸다.
기억은 없다.
하지만 느낌은 있다.
그리고 그 느낌이,
윤재현을 점점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저 촌년만 보면…
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반응하고,
꿈까지 꿔지는 건데?’
불현듯
며칠 전의 꿈이 떠올랐다.
거대한 궁전의 계단.
핏빛 드레스의 여자가
자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에, 죄가 되었다.”
꿈속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자의 눈—
붉게 빛났었다.
그리고…
방금 급식실에서 본 그 눈이랑, 똑같았다.
“……씨.”
윤재현은 한쪽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숨이 거칠게 올라왔다.
“왜 내가… 그런 꿈을 꾸는 거지.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
손바닥에서 또 한 번 **‘짜릿’**한 감각이 퍼졌다.
놀라서 손을 폈다.
불은 없었다.
하지만 손바닥이 아주 미세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설마… 나도 뭐 이상한 거 걸린 건가…?”
아니면,
저 촌년한테 뭔가 주술이라도 걸렸나?
혼란에 빠진 윤재현은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손가락이 멈춘 건…
‘이수련 SNS 계정’ 검색창.
“아니, 내가 왜 이걸 검색하냐… 하…”
그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진짜, 저 촌년 뭐지… 대체 뭐냐고.”
바로 그때였다.
복도 창문 너머—
햇살이 살짝 흔들렸다.
마치 바람이 스쳤다가 아니라,
공기 자체가 뒤틀린 것처럼.
윤재현은 다시
등골을 쓸어내렸다.
그는 아직 모른다.
자신이 ‘본다’는 것 자체가
신의 처벌이자 특혜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느끼는 이 기묘한 불안이
곧 운명의 부름이라는 것을.
5. 전생의 빛, 감정의 불꽃
수련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손을 씻지도 않고
그대로 방에 누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쓰러졌다.
온몸이 무겁고
가슴은 이상하게 먹먹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지치노…’
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며
손을 천천히 들었다.
그 손끝.
점심시간,
후배 유리의 손이 닿았던 순간—
거기서 확실히 무언가가 났다.
불?
빛?
기운?
정확히 설명은 못 하겠지만
‘뭔가 이상한 게 나왔다’는 감각은 확실했다.
“마법… 맞을낀가…”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펴며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마법은 죽은 줄 알았는데…
그때처럼… 전처럼…
그 위대하고 강력한,
르샤벨의 마법은 다 사라졌는데—”
그런데 오늘은
정말 이상했다.
유리가
자기한테 반찬 하나 내밀며 웃었을 뿐인데
가슴이 ‘확’ 하고 무너졌다.
그 아이가
자기를 이해해준 느낌,
그게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렸고…
그리고 바로,
그때 마법이 흘렀다.
“감정이… 곧 마법이라는 기라?”
르샤벨 시절엔 몰랐다.
감정을 얕잡아봤다.
슬픔?
연민?
배려?
‘힘 없는 자들의 위장술’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
이 촌스럽고 무기력한 몸뚱이 속에서,
그 감정들이 살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마법을 깨운다.
“이 몸이…
감정이란 걸 써야 한단 말이가…”
수련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 거울이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뾰루지 한두 개,
누가 봐도 별 매력 없는 중학생의 얼굴.
하지만 그녀는
그 속에서 아주 잠깐—
르샤벨의 눈동자를 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빨갛게, 서늘하게,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그라면, 이제부터는…
내가 먼저 감정을 줘볼란다.”
사랑받아야만 돌아갈 수 있는 운명.
그 운명을 이루기 위해
감정을 “써야” 한다면—
하겠다고,
기꺼이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르샤벨이 아닌,
이수련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위해 가슴이 움직이면,
내 마법도, 이 운명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을 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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