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르샤벨, 나댐의 끝에서 추방당하다
조회 : 168 추천 : 0 글자수 : 5,894 자 2025-12-08
1. 마녀의 절정, 신의 심판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는 그를 죽였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 사랑받아야만 살아날 수 있다.
하늘은 자줏빛이었다.
아스페리안 제국의 성채 꼭대기, 검은 대리석 위에 한 남자가 무릎 꿇고 있었다.
은빛 갑옷은 핏물에 젖어 붉게 물들었고, 흙과 피에 절인 긴 머리카락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엘리오스.
전설의 성기사.
그리고 지금, 마녀 여왕 르샤벨 앞에서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다.
“...변명은 없느냐, 성기사.”
르샤벨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겨울날처럼 매서웠다.
검은 망토가 바람결에 나부끼고, 머리 위로는 붉은 달이 떴다.
그녀의 손끝에선 마력이 소용돌이쳤고, 발아래 마법진은 오만한 기하학으로 휘돌았다.
“감정은… 인간의 약함일 뿐.”
르샤벨은 스스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엘리오스는 눈을 들지 않았다.
그의 눈은 뜨고 있었지만, 감정은 사라진 듯했다.
그 눈빛이, 르샤벨을 건드렸다.
“...왜 너만,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
그녀는 웃지 않았다.
단지 그 물음 속에 무언가를 갈아넣었다.
모욕, 굴욕, 그리고 애증.
모든 황제와 기사단장, 대사제들마저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지만—
이 남자만은, 끝까지 무릎 꿇지 않았다.
자발적으로는.
“나는 너를—”
엘리오스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보다 먼저 마법진을 완성시켰다.
“네 침묵이 곧 죄다.”
그리고 선언했다.
“엘리오스. 반역의 죄로, 이 자리에 널 처형한다.”
그 순간.
빛이 갈라졌다.
마치 하늘이 갈라지듯, 하얀 균열이 허공을 찢었다.
르샤벨의 손끝에서 쏘아올린 푸른 마법창이 엘리오스의 가슴팍을 꿰뚫자, 성기사는 고개를 젖히며 피를 토했다.
그리고—
그녀의 세계가, 산산이 부서졌다.
천공에서 쏟아진 것은 신의 심판이었다.
사방이 순백으로 물들며, 눈부신 광채 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르샤벨. 너는 감정을 조롱했다.
이제, 감정으로 구원받아라.”
르샤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떠는 기색이 떠올랐다.
“신이여… 감정이… 나를 구원한다고?”
광채는 그녀를 삼켰다.
몸이 붕 떴다.
마법도 통하지 않았고, 세상의 모든 기운이 끊긴 듯했다.
그렇게 그녀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르샤벨은 마지막까지 외쳤다.
“이 여왕을 감히 심판해?… 웃기는군. 신이든 뭐든, 다 내 앞에 무릎 꿇었어!!”
그러나 그 외침은,
국밥 냄새와 함께 깨어나는 한 중학생의 입술에서 이어졌다.
2. 급식 줄 위에 떨어진 마녀
얼굴이 뜨거웠다.
피도 아니고, 용암도 아니고… 콩나물국이었다.
르샤벨은 순간 눈을 떴다.
하늘도 성채도 없었다.
보인 건, 형광등이 덜덜거리는 낮고 탁한 천장.
그리고—
“야, 똑바로 좀 서라꼬! 국 쏟았잖아, 느그 엄마가 국 쏟으라 켔나?!”
르샤벨… 아니, 지금은 수련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 마디.
“마!!! 니 지금 내 얼굴에 국 처부은 거 보이고도 사과도 안 할끼가?!”
눈앞의 남학생이 멈칫했다.
콩나물 국자 쥔 채 고개를 돌려 수련을 위아래로 훑는다.
“뭐꼬 또라이가. 니, 오늘도 캐릭터 하나 만들었나?”
르샤벨은 당황했다.
이게 무슨 말투지?
방금… 방금 '마'라고 했다.
그리고 '니'에 '처부었다'고?
(내면) “이 몸은 우아한 정재高어만을 써왔거늘…”
(입으로) “아이고 내 팔자야, 내 얼굴에 국 쳐붓고도 뻔뻔하기는. 요즘 애들은 참말로~!!”
그 말에 옆 급식줄에서도 킥킥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 개웃겨, 또 시작이네~”
“미친, 국 쳐붓고도 싸가지 없다카네ㅋㅋㅋ”
르샤벨은 순간,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마법을 써서 이 자슥의 혀를 태워버리겠—’
…마력이, 없다.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짧고 통통한 손.
손등에 살짝 올라온 좁쌀 여드름.
거울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이 얼굴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뒤통수에 땀과 먼지가 엉겨붙은 듯 끈적였고, 교복 깃엔 멸치 대가리 두 개가 딱 붙어 있었다.
“이건, 재앙이야… 이건 모욕이야… 이건—”
(입에서 튀어나온 말)
“아이고, 지지배들 진짜 인심이 이래가꼬, 학교를 다니겄나!”
르샤벨은 순간 다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여왕의 품위를 되찾으려 했다.
“이 몸은— 아스페리안의—”
“이 몸이고 자시고, 느그 밥이나 먼저 퍼가라, 국 줄 끝났으니까.”
뒤에서 급식 담당 선생의 짜증 섞인 목소리.
순간, 뒤에 줄 서 있던 아이들 수군댔다.
“야, 또 또 또 시작이네.”
“쟤, 어제는 전생 얘기하다가 국 쏟은 애 아니냐?”
“ㅋㅋㅋ 밀양 마녀 또 강림하셨다.”
르샤벨은 이를 악물었다.
모든 세계가 무너졌던 순간보다…
이 국밥 한 사발이 더 치욕스러웠다.
“감히 이 몸을...! 이 몸을! 내가 누군데...”
“그 몸이 니 몸이제 뭐~ 맨날 주책떠노~ 니 저번에도 반찬 뺏고 우끼끼 소리질렀다 아이가~”
그녀는 결국,
젖은 콩나물 국물을 훔치며 말했다.
“지금은 이래도… 나, 언젠간 진짜 여왕으로 돌아간다카이. 니덜 다 후회할기다.”
...근데 목소리 끝이
어째 울먹거렸다.
3. 밀양 여중, 왕따 수련의 귀환
“어이구야… 또 온다 또 와…”
교실 문을 열자, 정적 대신 수군거림이 스멀스멀 번졌다.
르샤벨은 국물 밴 교복치마를 쓱쓱 털어내며 입장했다.
콩나물 냄새와 자존심이 함께 퍼졌다.
“뭐 저리 축축 처져있노? 김 말아먹었나?”
“지 혼자 급식판에 빠졌대카더라~ 개웃겨 진짜.”
“쟤 또 ‘마’ 했다며. 국 쳐붓고 사투리 발작했다 카던데.”
르샤벨은 한 걸음씩 교실을 지나가며 시선을 느꼈다.
검은 드레스 자락은 없었다.
귀부인의 발걸음 대신—
젖은 치마 끝이 쓸리는 질척한 소리만 남았다.
자리에 앉자, 담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수련아, 요즘… 좀 혼란스럽제? 혹시 무슨 일이—”
“혼란스럽긴 뭐가 혼란스럽습니까.
느그가 나를 이상하게 보는 기라.
나는 지금 정상임미더.”
순간 교실이 얼었다.
르샤벨은 교탁을 쿵 치며 일어났다.
눈에 분노가 일렁였다.
(내면) “이 여왕을 감히… 광인 취급이라니.”
(외면) “야. 니덜 뭔데 사람을 이래 훑어보고 웃고 조까고 하는데?
마, 왕따 시키는 거지? 지금도?”
뒤편에서 쿡쿡 웃는 소리.
“와아~ 오늘은 진짜 세게 오시네.”
“누가 또 캐릭터 잘못 건드렸다 ㅋㅋ”
르샤벨은 참지 않았다.
결국 교탁 위로 한 발을 올리며 외쳤다.
“들어라, 이 허접한 중생들아!
이 몸 안엔 마(魔)가 있다!
감히 날 무시하다간, 느그 혼은 내 발톱 끝에서 떨게 될 기라!”
…교실 전체, 조용.
“마가 있대ㅋㅋㅋ 또 시작이네 미친~”
“쟤는 확실히 우리 반 마녀 맞다, 확정ㅋㅋ”
르샤벨의 눈꼬리가 떨렸다.
숨을 고르며, 침묵 속에 중얼였다.
(속으로) “내 이름은 르샤벨. 아스페리안 제국의 마녀 여왕.
감정 따위 조롱하던 전생을 떠나… 지금은 이딴 곳에 갇혔다.
신이시여, 날 벌하신 거 맞다.
근데… 너무한 거 아니십니까?”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똑.
또각.
구두가 아닌 운동화.
그런데 걸음걸이가… 이상하리만치 단정했다.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그 남자애가, 들어왔다.
4. 그놈이 나타났다: 전학 온 서울남자
교실 문이
‘철컥—’
소리도 없이 열렸다.
그 순간,
공기부터 달라졌다.
수련… 아니, 르샤벨은,
등짝에 소름이 돋는 낌새를 느꼈다.
누가 문을 열었는지도 보기도 전에,
‘저건 뭔가 다르다’는 본능이 먼저 경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절대 이 반엔 어울리지 않을 무언가’가
천천히 발을 디뎠다.
**
하얀 운동화.
비뚤어짐 없는 교복 깃.
들쑥날쑥한 머리칼 대신 딱 단정하게 눌린 앞머리.
그리고—
“안녕하세요. 윤재현입니다.”
**
교실에 울린 목소리는
깔끔했고,
매끈했고,
너무나 서울말이었다.
수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한 줄, 두 줄, 삼삼오오 속삭이던 애들의 입이 일제히 다물어졌다.
딱 그 한 마디에.
딱 그 목소리 톤 하나에.
“서울에서 왔대….”
“야, 잘생긴 거 실화가…?”
“야야, 저거 아역배우 느낌 난다. 와 미쳤다.”
소곤대던 소리도, 이젠 질투 반 감탄 반으로 바뀌었다.
**
하지만 수련은,
그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이… 맞았다.
그 남자의 눈과.
어느 순간, 윤재현의 눈동자도
수련에게 정확히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딱 그 찰나에.
“싫다.”
그 감정이—
수련의 뼛속을 찔렀다.
윤재현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눈동자는 말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역겹다.”
“모르겠는데, 너무 싫다.”
수련의 머릿속이 쨍 울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손끝에 서늘한 기운이 돋았다.
온몸의 털이 솟구쳤다.
**
‘엘리오스다.’
‘맞다, 이 눈… 이 목소리…’
‘전생에 나를 끝까지 사랑하지 않았던,
내가 누명을 씌워 죽였던—
그 성기사.’
콱, 이를 악물었다.
두 눈을 번뜩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교실이 웅성거렸다.
수련이 누군가에게 먼저 소리치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모두가 놀라 고개를 돌렸고,
윤재현도 눈을 크게 떴다.
수련은 거침없이 말했다.
“니 방금 나 쳐다봤지?
뭔 눈빛으로 본 건데?!
딱! 전생에 날 조지고 간 그 싸가지 눈깔 그대로네!”
윤재현은 멈칫했다.
순간, 벙쪘다.
“…전생?”
그 말 한마디.
그 서울말 톤.
그 이성적이고 무미건조한 발음.
르샤벨의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다.
“그래, 전생!
니 모르나 본데…
니가 나 안 사랑해서 내가 니 조져불었다!
근데 지금도 날 싫어하제?! 또 눈에서 티가 다 난다 아이가!!”
윤재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 못 하겠다는 듯.
“…아 진짜 뭐라는 거야.”
“와, 저 또 시작이네.”
“전학생 들어오자마자 싸움 거네 ㅋㅋ”
“얘 이번엔 전생 타령이다 진심 헬이다.”
주변은 또 수련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병풍처럼.
하지만 수련은 달랐다.
지금 이 남자를 향한 감정은…
그냥 짜증도, 창피도 아니었다.
정확히 ‘집착’과 ‘운명’의 결합이었다.
가슴이 떨리고,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래.
이놈은 모를 기라.
아무것도 기억 못 할 기고,
날 왜 싫어하는지도 모를 기다.
하지만…
나만큼은 알고 있다.
니가…
나를 죽인 것도, 내가 널 죽인 것도,
모두 사랑 때문이었다는 걸.”
르샤벨은
윤재현을 노려보며 천천히 중얼였다.
“좋아. 이번 생엔,
내가 널 사랑하게 만들 끼다.”
“죽였던 그 남자에게—
사랑받아서 살아날 끼다.”
운명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그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5. 사랑받으면 돌아갈 수 있다고요?
수련은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로 달렸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자존심이 먼저 나를 찔렀고, 자존감은 벌써 숨을 죽였다.
문을 벌컥 열고, 거울 앞에 섰다.
뿌연 형광등 불빛 아래,
낯선 여자애 하나가 거울 속에 서 있었다.
피부는 울긋불긋했고,
콧등엔 아직 콩나물 껍데기 하나가 붙어 있었다.
눈은 부어있고, 머리는 기름졌고, 입술엔 흰 쌀밥이 말라붙어 있었다.
“……이게, 나라고?”
눈을 껌뻑였다.
바뀌지 않았다.
무슨 장난도 아니고,
진짜로 이 몸이 된 거였다.
(내면) “아스페리안의 여왕.
마법과 유혹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자.
그런데 지금은…”
그때였다.
**
머릿속을 가르는 듯한 울림.
그날, 마지막으로 들었던
신의 목소리.
“감정을 조롱한 자여.
감정으로만 구원받으리라.
네가 죽인 자에게서—
진짜 사랑을 받게 된다면,
너의 벌은 끝날 것이다.”
수련은 눈을 감았다.
‘내가 죽였던 사람한테…
사랑을 받으라고?’
그게 벌이라고?
그게 구원이라고?
**
“와, 시방 그놈은 나를 본능적으로 혐오하던데예.
진짜 사랑은 무신 개뿔…”
입에선 사투리가 튀어나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왕좌 위의 마녀였다.
(내면) “사랑.
그깟 감정이 나를 이렇게까지 무너뜨릴 줄은…
몰랐다.
그래서…”
수련은 다시 눈을 떴다.
거울 속의 못생긴 얼굴.
하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왕좌에 앉아 있던 르샤벨의 그것과 똑같았다.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좋다, 윤재현.
전생엔 니가 날 사랑하지 않아서
내가 널 죽였지만—
이번 생엔,
니가 날 사랑하게 만들 끼다.
이 못난 얼굴로,
이 못난 말투로,
니 심장을 비틀어놓을 끼다.”
복수였고,
계획이었고,
마녀로서의 마지막 자존이었다.
거울 앞에서,
수련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슬픔인지 광기인지,
아니면 첫사랑의 서막이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전생에 내가 죽였던 남자.
그가 다시 날 사랑하게 된다면…
난, 돌아갈 수 있어.”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는 그를 죽였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 사랑받아야만 살아날 수 있다.
하늘은 자줏빛이었다.
아스페리안 제국의 성채 꼭대기, 검은 대리석 위에 한 남자가 무릎 꿇고 있었다.
은빛 갑옷은 핏물에 젖어 붉게 물들었고, 흙과 피에 절인 긴 머리카락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엘리오스.
전설의 성기사.
그리고 지금, 마녀 여왕 르샤벨 앞에서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다.
“...변명은 없느냐, 성기사.”
르샤벨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겨울날처럼 매서웠다.
검은 망토가 바람결에 나부끼고, 머리 위로는 붉은 달이 떴다.
그녀의 손끝에선 마력이 소용돌이쳤고, 발아래 마법진은 오만한 기하학으로 휘돌았다.
“감정은… 인간의 약함일 뿐.”
르샤벨은 스스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엘리오스는 눈을 들지 않았다.
그의 눈은 뜨고 있었지만, 감정은 사라진 듯했다.
그 눈빛이, 르샤벨을 건드렸다.
“...왜 너만,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
그녀는 웃지 않았다.
단지 그 물음 속에 무언가를 갈아넣었다.
모욕, 굴욕, 그리고 애증.
모든 황제와 기사단장, 대사제들마저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지만—
이 남자만은, 끝까지 무릎 꿇지 않았다.
자발적으로는.
“나는 너를—”
엘리오스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보다 먼저 마법진을 완성시켰다.
“네 침묵이 곧 죄다.”
그리고 선언했다.
“엘리오스. 반역의 죄로, 이 자리에 널 처형한다.”
그 순간.
빛이 갈라졌다.
마치 하늘이 갈라지듯, 하얀 균열이 허공을 찢었다.
르샤벨의 손끝에서 쏘아올린 푸른 마법창이 엘리오스의 가슴팍을 꿰뚫자, 성기사는 고개를 젖히며 피를 토했다.
그리고—
그녀의 세계가, 산산이 부서졌다.
천공에서 쏟아진 것은 신의 심판이었다.
사방이 순백으로 물들며, 눈부신 광채 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르샤벨. 너는 감정을 조롱했다.
이제, 감정으로 구원받아라.”
르샤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떠는 기색이 떠올랐다.
“신이여… 감정이… 나를 구원한다고?”
광채는 그녀를 삼켰다.
몸이 붕 떴다.
마법도 통하지 않았고, 세상의 모든 기운이 끊긴 듯했다.
그렇게 그녀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르샤벨은 마지막까지 외쳤다.
“이 여왕을 감히 심판해?… 웃기는군. 신이든 뭐든, 다 내 앞에 무릎 꿇었어!!”
그러나 그 외침은,
국밥 냄새와 함께 깨어나는 한 중학생의 입술에서 이어졌다.
2. 급식 줄 위에 떨어진 마녀
얼굴이 뜨거웠다.
피도 아니고, 용암도 아니고… 콩나물국이었다.
르샤벨은 순간 눈을 떴다.
하늘도 성채도 없었다.
보인 건, 형광등이 덜덜거리는 낮고 탁한 천장.
그리고—
“야, 똑바로 좀 서라꼬! 국 쏟았잖아, 느그 엄마가 국 쏟으라 켔나?!”
르샤벨… 아니, 지금은 수련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 마디.
“마!!! 니 지금 내 얼굴에 국 처부은 거 보이고도 사과도 안 할끼가?!”
눈앞의 남학생이 멈칫했다.
콩나물 국자 쥔 채 고개를 돌려 수련을 위아래로 훑는다.
“뭐꼬 또라이가. 니, 오늘도 캐릭터 하나 만들었나?”
르샤벨은 당황했다.
이게 무슨 말투지?
방금… 방금 '마'라고 했다.
그리고 '니'에 '처부었다'고?
(내면) “이 몸은 우아한 정재高어만을 써왔거늘…”
(입으로) “아이고 내 팔자야, 내 얼굴에 국 쳐붓고도 뻔뻔하기는. 요즘 애들은 참말로~!!”
그 말에 옆 급식줄에서도 킥킥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 개웃겨, 또 시작이네~”
“미친, 국 쳐붓고도 싸가지 없다카네ㅋㅋㅋ”
르샤벨은 순간,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마법을 써서 이 자슥의 혀를 태워버리겠—’
…마력이, 없다.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짧고 통통한 손.
손등에 살짝 올라온 좁쌀 여드름.
거울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이 얼굴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뒤통수에 땀과 먼지가 엉겨붙은 듯 끈적였고, 교복 깃엔 멸치 대가리 두 개가 딱 붙어 있었다.
“이건, 재앙이야… 이건 모욕이야… 이건—”
(입에서 튀어나온 말)
“아이고, 지지배들 진짜 인심이 이래가꼬, 학교를 다니겄나!”
르샤벨은 순간 다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여왕의 품위를 되찾으려 했다.
“이 몸은— 아스페리안의—”
“이 몸이고 자시고, 느그 밥이나 먼저 퍼가라, 국 줄 끝났으니까.”
뒤에서 급식 담당 선생의 짜증 섞인 목소리.
순간, 뒤에 줄 서 있던 아이들 수군댔다.
“야, 또 또 또 시작이네.”
“쟤, 어제는 전생 얘기하다가 국 쏟은 애 아니냐?”
“ㅋㅋㅋ 밀양 마녀 또 강림하셨다.”
르샤벨은 이를 악물었다.
모든 세계가 무너졌던 순간보다…
이 국밥 한 사발이 더 치욕스러웠다.
“감히 이 몸을...! 이 몸을! 내가 누군데...”
“그 몸이 니 몸이제 뭐~ 맨날 주책떠노~ 니 저번에도 반찬 뺏고 우끼끼 소리질렀다 아이가~”
그녀는 결국,
젖은 콩나물 국물을 훔치며 말했다.
“지금은 이래도… 나, 언젠간 진짜 여왕으로 돌아간다카이. 니덜 다 후회할기다.”
...근데 목소리 끝이
어째 울먹거렸다.
3. 밀양 여중, 왕따 수련의 귀환
“어이구야… 또 온다 또 와…”
교실 문을 열자, 정적 대신 수군거림이 스멀스멀 번졌다.
르샤벨은 국물 밴 교복치마를 쓱쓱 털어내며 입장했다.
콩나물 냄새와 자존심이 함께 퍼졌다.
“뭐 저리 축축 처져있노? 김 말아먹었나?”
“지 혼자 급식판에 빠졌대카더라~ 개웃겨 진짜.”
“쟤 또 ‘마’ 했다며. 국 쳐붓고 사투리 발작했다 카던데.”
르샤벨은 한 걸음씩 교실을 지나가며 시선을 느꼈다.
검은 드레스 자락은 없었다.
귀부인의 발걸음 대신—
젖은 치마 끝이 쓸리는 질척한 소리만 남았다.
자리에 앉자, 담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수련아, 요즘… 좀 혼란스럽제? 혹시 무슨 일이—”
“혼란스럽긴 뭐가 혼란스럽습니까.
느그가 나를 이상하게 보는 기라.
나는 지금 정상임미더.”
순간 교실이 얼었다.
르샤벨은 교탁을 쿵 치며 일어났다.
눈에 분노가 일렁였다.
(내면) “이 여왕을 감히… 광인 취급이라니.”
(외면) “야. 니덜 뭔데 사람을 이래 훑어보고 웃고 조까고 하는데?
마, 왕따 시키는 거지? 지금도?”
뒤편에서 쿡쿡 웃는 소리.
“와아~ 오늘은 진짜 세게 오시네.”
“누가 또 캐릭터 잘못 건드렸다 ㅋㅋ”
르샤벨은 참지 않았다.
결국 교탁 위로 한 발을 올리며 외쳤다.
“들어라, 이 허접한 중생들아!
이 몸 안엔 마(魔)가 있다!
감히 날 무시하다간, 느그 혼은 내 발톱 끝에서 떨게 될 기라!”
…교실 전체, 조용.
“마가 있대ㅋㅋㅋ 또 시작이네 미친~”
“쟤는 확실히 우리 반 마녀 맞다, 확정ㅋㅋ”
르샤벨의 눈꼬리가 떨렸다.
숨을 고르며, 침묵 속에 중얼였다.
(속으로) “내 이름은 르샤벨. 아스페리안 제국의 마녀 여왕.
감정 따위 조롱하던 전생을 떠나… 지금은 이딴 곳에 갇혔다.
신이시여, 날 벌하신 거 맞다.
근데… 너무한 거 아니십니까?”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똑.
또각.
구두가 아닌 운동화.
그런데 걸음걸이가… 이상하리만치 단정했다.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그 남자애가, 들어왔다.
4. 그놈이 나타났다: 전학 온 서울남자
교실 문이
‘철컥—’
소리도 없이 열렸다.
그 순간,
공기부터 달라졌다.
수련… 아니, 르샤벨은,
등짝에 소름이 돋는 낌새를 느꼈다.
누가 문을 열었는지도 보기도 전에,
‘저건 뭔가 다르다’는 본능이 먼저 경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절대 이 반엔 어울리지 않을 무언가’가
천천히 발을 디뎠다.
**
하얀 운동화.
비뚤어짐 없는 교복 깃.
들쑥날쑥한 머리칼 대신 딱 단정하게 눌린 앞머리.
그리고—
“안녕하세요. 윤재현입니다.”
**
교실에 울린 목소리는
깔끔했고,
매끈했고,
너무나 서울말이었다.
수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한 줄, 두 줄, 삼삼오오 속삭이던 애들의 입이 일제히 다물어졌다.
딱 그 한 마디에.
딱 그 목소리 톤 하나에.
“서울에서 왔대….”
“야, 잘생긴 거 실화가…?”
“야야, 저거 아역배우 느낌 난다. 와 미쳤다.”
소곤대던 소리도, 이젠 질투 반 감탄 반으로 바뀌었다.
**
하지만 수련은,
그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이… 맞았다.
그 남자의 눈과.
어느 순간, 윤재현의 눈동자도
수련에게 정확히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딱 그 찰나에.
“싫다.”
그 감정이—
수련의 뼛속을 찔렀다.
윤재현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눈동자는 말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역겹다.”
“모르겠는데, 너무 싫다.”
수련의 머릿속이 쨍 울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손끝에 서늘한 기운이 돋았다.
온몸의 털이 솟구쳤다.
**
‘엘리오스다.’
‘맞다, 이 눈… 이 목소리…’
‘전생에 나를 끝까지 사랑하지 않았던,
내가 누명을 씌워 죽였던—
그 성기사.’
콱, 이를 악물었다.
두 눈을 번뜩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교실이 웅성거렸다.
수련이 누군가에게 먼저 소리치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모두가 놀라 고개를 돌렸고,
윤재현도 눈을 크게 떴다.
수련은 거침없이 말했다.
“니 방금 나 쳐다봤지?
뭔 눈빛으로 본 건데?!
딱! 전생에 날 조지고 간 그 싸가지 눈깔 그대로네!”
윤재현은 멈칫했다.
순간, 벙쪘다.
“…전생?”
그 말 한마디.
그 서울말 톤.
그 이성적이고 무미건조한 발음.
르샤벨의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다.
“그래, 전생!
니 모르나 본데…
니가 나 안 사랑해서 내가 니 조져불었다!
근데 지금도 날 싫어하제?! 또 눈에서 티가 다 난다 아이가!!”
윤재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 못 하겠다는 듯.
“…아 진짜 뭐라는 거야.”
“와, 저 또 시작이네.”
“전학생 들어오자마자 싸움 거네 ㅋㅋ”
“얘 이번엔 전생 타령이다 진심 헬이다.”
주변은 또 수련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병풍처럼.
하지만 수련은 달랐다.
지금 이 남자를 향한 감정은…
그냥 짜증도, 창피도 아니었다.
정확히 ‘집착’과 ‘운명’의 결합이었다.
가슴이 떨리고,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래.
이놈은 모를 기라.
아무것도 기억 못 할 기고,
날 왜 싫어하는지도 모를 기다.
하지만…
나만큼은 알고 있다.
니가…
나를 죽인 것도, 내가 널 죽인 것도,
모두 사랑 때문이었다는 걸.”
르샤벨은
윤재현을 노려보며 천천히 중얼였다.
“좋아. 이번 생엔,
내가 널 사랑하게 만들 끼다.”
“죽였던 그 남자에게—
사랑받아서 살아날 끼다.”
운명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그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5. 사랑받으면 돌아갈 수 있다고요?
수련은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로 달렸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자존심이 먼저 나를 찔렀고, 자존감은 벌써 숨을 죽였다.
문을 벌컥 열고, 거울 앞에 섰다.
뿌연 형광등 불빛 아래,
낯선 여자애 하나가 거울 속에 서 있었다.
피부는 울긋불긋했고,
콧등엔 아직 콩나물 껍데기 하나가 붙어 있었다.
눈은 부어있고, 머리는 기름졌고, 입술엔 흰 쌀밥이 말라붙어 있었다.
“……이게, 나라고?”
눈을 껌뻑였다.
바뀌지 않았다.
무슨 장난도 아니고,
진짜로 이 몸이 된 거였다.
(내면) “아스페리안의 여왕.
마법과 유혹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자.
그런데 지금은…”
그때였다.
**
머릿속을 가르는 듯한 울림.
그날, 마지막으로 들었던
신의 목소리.
“감정을 조롱한 자여.
감정으로만 구원받으리라.
네가 죽인 자에게서—
진짜 사랑을 받게 된다면,
너의 벌은 끝날 것이다.”
수련은 눈을 감았다.
‘내가 죽였던 사람한테…
사랑을 받으라고?’
그게 벌이라고?
그게 구원이라고?
**
“와, 시방 그놈은 나를 본능적으로 혐오하던데예.
진짜 사랑은 무신 개뿔…”
입에선 사투리가 튀어나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왕좌 위의 마녀였다.
(내면) “사랑.
그깟 감정이 나를 이렇게까지 무너뜨릴 줄은…
몰랐다.
그래서…”
수련은 다시 눈을 떴다.
거울 속의 못생긴 얼굴.
하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왕좌에 앉아 있던 르샤벨의 그것과 똑같았다.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좋다, 윤재현.
전생엔 니가 날 사랑하지 않아서
내가 널 죽였지만—
이번 생엔,
니가 날 사랑하게 만들 끼다.
이 못난 얼굴로,
이 못난 말투로,
니 심장을 비틀어놓을 끼다.”
복수였고,
계획이었고,
마녀로서의 마지막 자존이었다.
거울 앞에서,
수련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슬픔인지 광기인지,
아니면 첫사랑의 서막이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전생에 내가 죽였던 남자.
그가 다시 날 사랑하게 된다면…
난, 돌아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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