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 남자, 전생에도 날 싫어했었다
조회 : 31 추천 : 0 글자수 : 5,235 자 2025-12-12
1. 기묘한 눈빛, 전생을 찌른다
교실 뒷자리, 창가 쪽.
수련은 턱을 괸 채로 윤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선생님 목소리는 물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멀게만 들렸다.
지금 그녀의 시야엔 딱 하나,
그의 뒷목, 어깨, 팔의 움직임.
"……"
지루하게 펜을 돌리는 그 손,
가끔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쉬는 턱선,
모르고 보면 평범한 중학생일 뿐인데—
왜일까.
눈을 뗄 수 없었다.
“엘리오스...”
입 밖으로 나올 뻔한 이름을
수련은 꾹 누르며 속으로 되뇌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가 '윤재현'이 아닌
‘엘리오스’로 보였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남자, 전생에도 날 싫어했지.”
수련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뭔가가 피어올랐다.
서늘하고 잔인한 장면 하나가.
불타는 단두대 앞,
정적을 가르는 나팔 소리.
수많은 군중들의 함성 속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수련— 아니, 르샤벨을 바라보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난 그를 죽였다.”
그것이
르샤벨의 자존심이 허락한 유일한 처벌이었다.
세상 모든 자들이 그녀를 숭배했지만,
그 남자만은 아니었다.
단 한 번도 무릎 꿇지 않았다.
그 무릎 꿇지 않음이,
그 사랑하지 않음이—
그녀에게는 모욕이었고,
그 모욕이 결국 죽음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때 그 눈… 지금이랑 똑같네.”
수련은 조용히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속에서,
르샤벨의 기억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차갑고 냉정한 눈빛,
‘감정’ 따윈 허용하지 않았던 성기사의 단호함.
그런데—
지금 이 교실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윤재현의 시선은
기묘하게 그와 겹쳐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보다 더 격렬했다.
싫음. 불쾌함. 위화감. 짜증.
이 모든 감정이 윤재현의 눈빛 안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수련은 깨달았다.
“지금 이 남자도…
날, 똑같이 싫어하고 있네.”
심장이 뭔가에 쿡 찔린 것처럼 저려왔다.
하지만 그건—
예전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통증이었다.
살아 있는 감정.
기억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감각.
“니가 날 또다시 미워하든 말든…
이번엔 내가 끝까지 가줄 낀데.
무릎 꿇든지, 날 다시 사랑하든지—
어디 두고 보자, 윤재현.”
2. 비키라고. 너 진짜 지겹다.
복도, 점심시간.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급식실로 향하는 사이.
수련은 혼자 복도 끝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을 윤재현이 지나갔다.
"어이."
그가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수련이 작정한 듯 길을 막아섰다.
“니, 내 피하제?”
윤재현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아주 짧게,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또 뭐.”
“또 뭐고, 니 눈빛이 그래. 딱, 사람 거슬리게 만드는 기라.”
“비켜.”
“…왜, 니 겁나나?”
윤재현의 발이 멈칫했다.
수련은 한 발 다가갔다.
턱을 들고, 한껏 웃음을 머금은 채.
“내가 너한테 뭐 그리 큰 죄를 지었노, 서울 양반?”
“…….”
“아무리 봐도 니는 날 알지도 못하면서 미워하거든.
그 눈빛, 어릴 적부터 익숙하다.
다른 애들도 나 볼 때 그라더라.”
수련의 말투는 느긋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어딘가—
르샤벨의 왕좌에 앉아, 사람을 내려보는 시선 같았다.
윤재현은 결국, 입을 열었다.
“…너, 진짜 지겹다.”
“뭐라카노?”
“니 같은 애. 관심 끌려고 별짓 다 하는 거.
말투도 일부러 이상하게 쓰고,
계속 앞에서 기웃거리고… 진짜, 피곤하다고.”
수련의 표정이 굳었다.
"……"
“솔직히 좀 무섭기도 해.
뭔가… 니한테선 이상한 느낌이 난다.”
그 말에, 수련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섭다꼬? 내가?”
“그래. 무섭고, 불쾌하고… 어쩐지 자꾸 눈에 밟혀.
그래서 더 싫어.”
윤재현은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본인도 무슨 말을 하는지 헷갈린 듯.
“그러니까 제발—좀 비켜줘.”
그 말에 수련은 조용히 뒷짐을 졌다.
그리고,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한단 말, 잘 들었다.”
“….”
“근데 있잖아.”
수련은 살짝 앞으로 다가가며,
고개를 갸웃했다.
“니가 날 진심으로 싫어하는 게… 참 고맙다.”
“…뭐?”
“니 감정은, 적어도 진심이거든.”
그 말과 동시에—
수련의 발밑,
물기가 자르르 흐르던 복도 바닥 위에서
작은 기류가 휘몰아쳤다.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공기 떨림.
하지만 분명 있었다.
윤재현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방금 뭐였지?’
수련은 피식 웃으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싫어도, 고맙다.
적어도— 날 안 본 척은 안 하잖아.”
복도 끝을 향해 걸어가는 수련의 등 뒤,
윤재현은 멍하니 서 있었다.
뭔가에 휘말린 기분.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
3. 싫어하는 것도… 감정이었나?
옥상 한편,
수련은 난간 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그 뒤로는 끝없이 반복되는 아파트 단지와 산등성이.
점심시간의 떠들썩한 소음과는 멀리 떨어진,
작은 고요였다.
그 고요 속에서,
수련은 자신의 심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라카노, 진짜.”
말이 아니었다.
윤재현.
그놈 눈빛이며 말투며, 너무 거슬렸다.
"니 같은 스타일 제일 싫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처음엔 단순히 기분 나빴다.
마녀의 자존심을 긁는 말투,
이 몸 르샤벨을 하찮게 본 듯한 시선.
근데 곱씹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싫어한다, 그랬지.”
그는 자신을 무섭다고 했다.
불쾌하다고 했다.
어디서 본 듯한 기분이 든다고도 했다.
“……근데 말이야.”
수련은 무릎을 끌어안고,
이마를 묻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게 진심이더라.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 감정은 분명했다.
그는 ‘무관심’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집요하게’ 자기를 인식하고 있었다.
“…….”
눈을 감자,
전생의 단두대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엘리오스.
그는 단 한 번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은 늘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무관심한 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혹시, 그때도…’
그렇게 생각하자,
손끝이 살짝 떨렸다.
“……!”
순간, 바닥에 깔린 먼지들이
미세하게 일어섰다.
아주 작게.
거의 보이지 않게.
하지만 분명히,
수련의 주위로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마치,
‘무언가’가 반응하는 느낌.
수련은 천천히 손을 펴 보았다.
손바닥 위로,
작은 먼지가 나풀나풀 춤을 췄다.
"……또 나왔다. 마법."
이유는 하나.
진심이었다.
방금 느낀 이 감정이,
가짜가 아니었다.
“싫어하는 것도, 감정이었나.”
그 한마디에,
작은 불꽃 같은 빛이
손끝에서 사르르 피었다가 사라졌다.
‘그래. 날 사랑하진 않더라도…
그는 나를 ‘인식’하고 있다.
그건, 무시당하는 것보단 낫다.’
수련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푸르게, 너무도 푸르게 열려 있었다.
4. 그 애만 보면, 속이 울렁거린다
복도 끝에서 수련이 혼자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다른 애들이랑 섞여 있을 땐 아무 존재감도 없던 애였다.
근데— 혼자 있을 땐, 괜히 눈에 밟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눈에 ‘걸렸다’.
윤재현은 창틀에 팔을 괴고, 고개를 돌렸다.
그 촌스러운 여중생이
자꾸만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
"니, 자꾸 나 쳐다보제? 이유가 뭔데?"
그 말이 떠올라 입맛이 씁쓸해졌다.
쳐다본 적 없는데, 본 적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더 거슬렸다.
가슴팍이 이상하게 답답해졌다.
왼쪽 팔 안쪽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막 한겨울 물속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등줄기가 싸늘해지는데—
눈앞에서 번쩍.
한 장면이 스쳤다.
**
불빛.
피.
누군가를 가둬놓은 투명 감옥.
그리고,
그 속에서 웃고 있던 여자.
**
순간, 윤재현은 고개를 탁 쳐들었다.
눈앞엔 아무것도 없었다.
숨을 내쉬는데 목이 턱 막혔다.
왠지 모르게 그 촌년이… 방금 그 여자 같았다.
'미쳤나. 내가 뭘 본 거야, 방금?'
머리를 흔들고 눈을 감았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했다.
그 애를 보면, 왜 이렇게 속이 울렁거릴까.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좋아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애를 보면, 꼭 죄책감이 느껴졌다.
"…죄를 지은 것 같아."
자기 입에서 나온 말에
자신이 더 놀랐다.
무슨 죄? 누구한테?
그 순간,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그 바람 소리에 섞여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르샤벨."
아무도 없었다.
분명 들리지 않았는데,
귀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름이 뭐였는지도 모르는데,
그 발음이 입안에 남아 있었다.
그날 밤, 윤재현은 악몽을 꿨다.
꿈속에서 그는
불길에 둘러싸인 채 단두대 앞에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이상하게 낯익은 여자가 있었다.
흰 드레스를 입고,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그는 분명히 봤다.
그 얼굴은, 분명 수련이었다.
“…….”
식은땀이 베개를 적셨다.
윤재현은 한참을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그 애… 대체 뭐지?'
심장이 쿵, 하고 한 번 더 뛰었다.
그건 분명히
‘두려움’도, ‘좋아함’도 아닌 감정이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너무도 낯익은 무언가.
5. 싫어하는 감정이 시작이었다면?
수련은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햇빛이 비쳐서인지,
손끝이 유난히 투명해 보였다.
그 끝에서 아주 미세하게,
은은한 연보랏빛의 기류가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마치 실처럼 얇은 빛줄기.
기척도 없고, 열감도 없고,
심지어… 이게 존재한 적이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의 찰나.
“……또 나타났네.”
르샤벨의 마력이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그 힘이 아니었다.
이젠 마치… 감정의 그림자처럼
조심스레, 한 조각씩 세어나오고 있었다.
그건 언제나,
그 남자를 마주하고 난 직후에만 일어났다.
“나를 싫어해도… 날 봐주는 거니까.”
수련은 중얼였다.
자신도 놀랄 만큼 조용히, 또 또렷이.
“그 사람, 날 사랑하지 않았지. 전생에도. 지금도.”
“근데 그게, 그렇게 이상하진 않네…”
예전의 르샤벨이었다면—
그런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죽였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세상의 누구보다 강하고 정의로웠다.
그래서 거슬렸다.
그래서 두려웠다.
그래서 미워졌다.
그리고, 죽였다.
“사랑을 받으려고, 사람을 죽였다.”
수련은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잔인한 진실이지만… 외면하지 않았다.
“근데 그 사람, 지금도 나를 싫어한다.”
그게 오히려…
조금은 편했다.
“싫어하는 것도 감정이구나.”
그 순간—
손끝의 마법이 한 번 더 살짝 반짝였다.
이번엔 더 선명하게.
그걸 바라보며, 수련은 웃었다.
“사랑이 아니라도…
싫어해주는 것만으로도,
내가 느껴질 수 있다면—
그건 시작일 수 있지.”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교복 치마를 털고 일어섰다.
햇빛이 따사롭게 등을 눌렀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복도 저 너머,
윤재현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수련은 아주 짧게 그를 향해
미소 아닌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엔
조금의 후회와
많은 결심,
그리고 아주 조금—
감정이라는 걸 배워가는 인간의 조심스러운 설렘이 스며 있었다.
교실 뒷자리, 창가 쪽.
수련은 턱을 괸 채로 윤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선생님 목소리는 물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멀게만 들렸다.
지금 그녀의 시야엔 딱 하나,
그의 뒷목, 어깨, 팔의 움직임.
"……"
지루하게 펜을 돌리는 그 손,
가끔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쉬는 턱선,
모르고 보면 평범한 중학생일 뿐인데—
왜일까.
눈을 뗄 수 없었다.
“엘리오스...”
입 밖으로 나올 뻔한 이름을
수련은 꾹 누르며 속으로 되뇌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가 '윤재현'이 아닌
‘엘리오스’로 보였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남자, 전생에도 날 싫어했지.”
수련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뭔가가 피어올랐다.
서늘하고 잔인한 장면 하나가.
불타는 단두대 앞,
정적을 가르는 나팔 소리.
수많은 군중들의 함성 속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수련— 아니, 르샤벨을 바라보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난 그를 죽였다.”
그것이
르샤벨의 자존심이 허락한 유일한 처벌이었다.
세상 모든 자들이 그녀를 숭배했지만,
그 남자만은 아니었다.
단 한 번도 무릎 꿇지 않았다.
그 무릎 꿇지 않음이,
그 사랑하지 않음이—
그녀에게는 모욕이었고,
그 모욕이 결국 죽음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때 그 눈… 지금이랑 똑같네.”
수련은 조용히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속에서,
르샤벨의 기억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차갑고 냉정한 눈빛,
‘감정’ 따윈 허용하지 않았던 성기사의 단호함.
그런데—
지금 이 교실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윤재현의 시선은
기묘하게 그와 겹쳐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보다 더 격렬했다.
싫음. 불쾌함. 위화감. 짜증.
이 모든 감정이 윤재현의 눈빛 안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수련은 깨달았다.
“지금 이 남자도…
날, 똑같이 싫어하고 있네.”
심장이 뭔가에 쿡 찔린 것처럼 저려왔다.
하지만 그건—
예전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통증이었다.
살아 있는 감정.
기억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감각.
“니가 날 또다시 미워하든 말든…
이번엔 내가 끝까지 가줄 낀데.
무릎 꿇든지, 날 다시 사랑하든지—
어디 두고 보자, 윤재현.”
2. 비키라고. 너 진짜 지겹다.
복도, 점심시간.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급식실로 향하는 사이.
수련은 혼자 복도 끝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을 윤재현이 지나갔다.
"어이."
그가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수련이 작정한 듯 길을 막아섰다.
“니, 내 피하제?”
윤재현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아주 짧게,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또 뭐.”
“또 뭐고, 니 눈빛이 그래. 딱, 사람 거슬리게 만드는 기라.”
“비켜.”
“…왜, 니 겁나나?”
윤재현의 발이 멈칫했다.
수련은 한 발 다가갔다.
턱을 들고, 한껏 웃음을 머금은 채.
“내가 너한테 뭐 그리 큰 죄를 지었노, 서울 양반?”
“…….”
“아무리 봐도 니는 날 알지도 못하면서 미워하거든.
그 눈빛, 어릴 적부터 익숙하다.
다른 애들도 나 볼 때 그라더라.”
수련의 말투는 느긋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어딘가—
르샤벨의 왕좌에 앉아, 사람을 내려보는 시선 같았다.
윤재현은 결국, 입을 열었다.
“…너, 진짜 지겹다.”
“뭐라카노?”
“니 같은 애. 관심 끌려고 별짓 다 하는 거.
말투도 일부러 이상하게 쓰고,
계속 앞에서 기웃거리고… 진짜, 피곤하다고.”
수련의 표정이 굳었다.
"……"
“솔직히 좀 무섭기도 해.
뭔가… 니한테선 이상한 느낌이 난다.”
그 말에, 수련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섭다꼬? 내가?”
“그래. 무섭고, 불쾌하고… 어쩐지 자꾸 눈에 밟혀.
그래서 더 싫어.”
윤재현은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본인도 무슨 말을 하는지 헷갈린 듯.
“그러니까 제발—좀 비켜줘.”
그 말에 수련은 조용히 뒷짐을 졌다.
그리고,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한단 말, 잘 들었다.”
“….”
“근데 있잖아.”
수련은 살짝 앞으로 다가가며,
고개를 갸웃했다.
“니가 날 진심으로 싫어하는 게… 참 고맙다.”
“…뭐?”
“니 감정은, 적어도 진심이거든.”
그 말과 동시에—
수련의 발밑,
물기가 자르르 흐르던 복도 바닥 위에서
작은 기류가 휘몰아쳤다.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공기 떨림.
하지만 분명 있었다.
윤재현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방금 뭐였지?’
수련은 피식 웃으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싫어도, 고맙다.
적어도— 날 안 본 척은 안 하잖아.”
복도 끝을 향해 걸어가는 수련의 등 뒤,
윤재현은 멍하니 서 있었다.
뭔가에 휘말린 기분.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
3. 싫어하는 것도… 감정이었나?
옥상 한편,
수련은 난간 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그 뒤로는 끝없이 반복되는 아파트 단지와 산등성이.
점심시간의 떠들썩한 소음과는 멀리 떨어진,
작은 고요였다.
그 고요 속에서,
수련은 자신의 심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라카노, 진짜.”
말이 아니었다.
윤재현.
그놈 눈빛이며 말투며, 너무 거슬렸다.
"니 같은 스타일 제일 싫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처음엔 단순히 기분 나빴다.
마녀의 자존심을 긁는 말투,
이 몸 르샤벨을 하찮게 본 듯한 시선.
근데 곱씹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싫어한다, 그랬지.”
그는 자신을 무섭다고 했다.
불쾌하다고 했다.
어디서 본 듯한 기분이 든다고도 했다.
“……근데 말이야.”
수련은 무릎을 끌어안고,
이마를 묻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게 진심이더라.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 감정은 분명했다.
그는 ‘무관심’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집요하게’ 자기를 인식하고 있었다.
“…….”
눈을 감자,
전생의 단두대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엘리오스.
그는 단 한 번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은 늘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무관심한 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혹시, 그때도…’
그렇게 생각하자,
손끝이 살짝 떨렸다.
“……!”
순간, 바닥에 깔린 먼지들이
미세하게 일어섰다.
아주 작게.
거의 보이지 않게.
하지만 분명히,
수련의 주위로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마치,
‘무언가’가 반응하는 느낌.
수련은 천천히 손을 펴 보았다.
손바닥 위로,
작은 먼지가 나풀나풀 춤을 췄다.
"……또 나왔다. 마법."
이유는 하나.
진심이었다.
방금 느낀 이 감정이,
가짜가 아니었다.
“싫어하는 것도, 감정이었나.”
그 한마디에,
작은 불꽃 같은 빛이
손끝에서 사르르 피었다가 사라졌다.
‘그래. 날 사랑하진 않더라도…
그는 나를 ‘인식’하고 있다.
그건, 무시당하는 것보단 낫다.’
수련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푸르게, 너무도 푸르게 열려 있었다.
4. 그 애만 보면, 속이 울렁거린다
복도 끝에서 수련이 혼자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다른 애들이랑 섞여 있을 땐 아무 존재감도 없던 애였다.
근데— 혼자 있을 땐, 괜히 눈에 밟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눈에 ‘걸렸다’.
윤재현은 창틀에 팔을 괴고, 고개를 돌렸다.
그 촌스러운 여중생이
자꾸만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
"니, 자꾸 나 쳐다보제? 이유가 뭔데?"
그 말이 떠올라 입맛이 씁쓸해졌다.
쳐다본 적 없는데, 본 적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더 거슬렸다.
가슴팍이 이상하게 답답해졌다.
왼쪽 팔 안쪽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막 한겨울 물속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등줄기가 싸늘해지는데—
눈앞에서 번쩍.
한 장면이 스쳤다.
**
불빛.
피.
누군가를 가둬놓은 투명 감옥.
그리고,
그 속에서 웃고 있던 여자.
**
순간, 윤재현은 고개를 탁 쳐들었다.
눈앞엔 아무것도 없었다.
숨을 내쉬는데 목이 턱 막혔다.
왠지 모르게 그 촌년이… 방금 그 여자 같았다.
'미쳤나. 내가 뭘 본 거야, 방금?'
머리를 흔들고 눈을 감았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했다.
그 애를 보면, 왜 이렇게 속이 울렁거릴까.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좋아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애를 보면, 꼭 죄책감이 느껴졌다.
"…죄를 지은 것 같아."
자기 입에서 나온 말에
자신이 더 놀랐다.
무슨 죄? 누구한테?
그 순간,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그 바람 소리에 섞여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르샤벨."
아무도 없었다.
분명 들리지 않았는데,
귀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름이 뭐였는지도 모르는데,
그 발음이 입안에 남아 있었다.
그날 밤, 윤재현은 악몽을 꿨다.
꿈속에서 그는
불길에 둘러싸인 채 단두대 앞에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이상하게 낯익은 여자가 있었다.
흰 드레스를 입고,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그는 분명히 봤다.
그 얼굴은, 분명 수련이었다.
“…….”
식은땀이 베개를 적셨다.
윤재현은 한참을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그 애… 대체 뭐지?'
심장이 쿵, 하고 한 번 더 뛰었다.
그건 분명히
‘두려움’도, ‘좋아함’도 아닌 감정이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너무도 낯익은 무언가.
5. 싫어하는 감정이 시작이었다면?
수련은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햇빛이 비쳐서인지,
손끝이 유난히 투명해 보였다.
그 끝에서 아주 미세하게,
은은한 연보랏빛의 기류가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마치 실처럼 얇은 빛줄기.
기척도 없고, 열감도 없고,
심지어… 이게 존재한 적이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의 찰나.
“……또 나타났네.”
르샤벨의 마력이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그 힘이 아니었다.
이젠 마치… 감정의 그림자처럼
조심스레, 한 조각씩 세어나오고 있었다.
그건 언제나,
그 남자를 마주하고 난 직후에만 일어났다.
“나를 싫어해도… 날 봐주는 거니까.”
수련은 중얼였다.
자신도 놀랄 만큼 조용히, 또 또렷이.
“그 사람, 날 사랑하지 않았지. 전생에도. 지금도.”
“근데 그게, 그렇게 이상하진 않네…”
예전의 르샤벨이었다면—
그런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죽였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세상의 누구보다 강하고 정의로웠다.
그래서 거슬렸다.
그래서 두려웠다.
그래서 미워졌다.
그리고, 죽였다.
“사랑을 받으려고, 사람을 죽였다.”
수련은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잔인한 진실이지만… 외면하지 않았다.
“근데 그 사람, 지금도 나를 싫어한다.”
그게 오히려…
조금은 편했다.
“싫어하는 것도 감정이구나.”
그 순간—
손끝의 마법이 한 번 더 살짝 반짝였다.
이번엔 더 선명하게.
그걸 바라보며, 수련은 웃었다.
“사랑이 아니라도…
싫어해주는 것만으로도,
내가 느껴질 수 있다면—
그건 시작일 수 있지.”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교복 치마를 털고 일어섰다.
햇빛이 따사롭게 등을 눌렀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복도 저 너머,
윤재현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수련은 아주 짧게 그를 향해
미소 아닌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엔
조금의 후회와
많은 결심,
그리고 아주 조금—
감정이라는 걸 배워가는 인간의 조심스러운 설렘이 스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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