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왕따들의 표정은 너무 투명했다 그리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조회 : 61 추천 : 0 글자수 : 5,671 자 2025-12-10
1. 급식 줄은 전쟁터고, 마녀에겐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이게… 뭔 꼴이고…?”
르샤벨, 아니 이수련은 멀찍이 줄 서 있는 애들 틈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왜 줄을 서는 거지?’
처음엔 뭔 제물이라도 바치는 줄 알았다. 교복 입은 인간들이 수저 통을 들고, 양손을 뻗은 채 줄줄이 복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급식 타러 가는 거지. 안 서면 밥 못 먹어.”
같은 반 정수진이 한마디 툭 던지고 사라졌다.
“하, 하하… 이 몸이, 급식을… 받아야 한단 말이냐?”
르샤벨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열한 피조물들에게 애걸복걸 받아먹던 시절은 전생에도 없었다. 왕이건 장군이건, 급식이건, 다들 알아서 접시에 올려다 바쳤다.
지금? 무슨 줄이 이리 길노. 마치 전투 병사들이 배급 받으러 줄 선 전장이었다.
게다가 옆에 선 애는 대놓고 코를 후비며 말했다.
“야, 니 차례 땜에 밀렸다 아이가. 빨리 안 가나.”
그 말에 수련은 흠칫 물러섰다.
“어…어허. 감히 이 몸에게 명령을…”
“뭐라꼬?”
“아, 아이다. 알았어예… 지금 갈깁니더…”
밀양 사투리가 툭 터져 나왔다. 본능적으로.
‘젠장… 뭐꼬, 왜 자꾸 이래 되는기고…?’
그녀의 머릿속은 멍했지만, 손발은 눈치껏 움직였다. 급식판을 들고 앞으로 한 칸, 한 칸.
그러다, 만났다.
윤. 재. 현.
하필이면 급식 배식 라인 너머에, 그가 서 있었다.
머리엔 위생모, 앞치마에 고무장갑, 그리고 멀쩡한 얼굴.
“학생회 봉사야. 급식 당번이라고.”
뒤에서 누가 속삭였지만, 수련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왜 저런 게… 여길 지키고 있지?’
그는 수련을 쓱 바라보았다. 무표정.
아무 감정도, 기억도 없는 듯한 눈.
‘몰라본다. 다행이다…’
그런데, 윤재현의 입이 열렸다.
“밥은? 줄 거야? 말 거야?”
수련은 얼어붙었다. 손에 든 접시가 덜덜 떨렸다.
그의 시선이, 무심하게 그녀를 뚫고 지나갔다.
“그 손 덜덜 떨면서… 밥 먹을 자격은 있어?”
“……뭐?”
“됐어. 다음.”
퉁명스럽게 말하며, 재현은 고개를 돌렸다.
수련은 접시를 든 채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무언가가 깨졌다. 아니, 가라앉았다.
왕이었는데.
여왕이었는데.
세상이 엎드렸었는데…
지금은.
급식판 들고, 무시당하고, 말도 못 꺼내고…
“……됐어예. 밥은… 나중에 먹을게예…”
그녀는 뒷줄에 밀린 채 접시를 내려놓았다.
눈이, 마치 마법처럼 벌겋게 물들었다.
‘윤재현… 니는 진짜 끝났다.’
2. “지금… 쟤, 누구랑 얘기하는 기고?”
체육 시간 끝.
체육복 갈아입는 것도, 짝이 되어주는 것도,
이수련은 언제나 없었다.
그게 원래 그런 거였다.
“어이~ 왕따~ 거기서 옷 갈아입으면 안 된대~”
한 무리의 여자애들이 히죽이며 말한다.
늘 있는 조롱이다. 이수련은 대꾸하지 않는다.
사실, 이젠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르샤벨이 처음 이 몸을 썼을 땐, 분노했다.
“감히! 나한테 손가락질을 해?”
어디서 한심한 것들이, 감히 대우받던 나를 무시해?
하지만 지금은…
좀 많이 길들여졌다.
‘인간들이란… 말이 너무 많다.
왕이 되면 다 조용해질 줄 알았는데…’
르샤벨, 아니 수련은 혼잣말을 중얼였다.
작은 목소리지만, 누군가 귀신같이 듣는다.
“지금… 쟤, 누구랑 얘기하는 기고?”
“야, 미친 거 아냐? 혼잣말 했다.”
“봤나? 또라이 맞다니까.”
“소름… 저러니까 친구가 없지.”
수련은 옷을 입다 말고 잠시 멈춘다.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선 르샤벨의 눈빛이 번뜩인다.
하지만… 이 몸의 눈은 시무룩한 졸린 눈이다.
“너희들, 너무 시끄럽다.”
사투리 섞인 말이 툭 튀어나온다.
“시끄럽다꼬? 뭐래, 쟤가 지금 반항하나?”
“ㅋㅋㅋ 얘 봐라, 촌년이 성질내네~”
르샤벨은 깊은 숨을 쉰다.
‘아… 참아야 한다.
감정이 진심이 돼야 마법이 발현되니까.’
그 순간,
탈의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파지직! 하고 깜빡인다.
“꺄악! 뭐야!”
“정전이야?”
“야, 쟤 때문 아냐? 뭔가 이상해…”
르샤벨은 고개를 숙인 채 웃는다.
거울 속 이수련은 아무 표정도 없다.
그러나 속은 기묘하게… 흥분돼 있다.
‘조금씩, 감정이… 나오고 있다.
마법도… 따라오고 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다가온다.
윤재현이다.
전학 온 지 며칠 안 된 서울놈.
근데 어쩐지 이 공간에 낯설지 않게 선다.
“여기, 네 자리 맞나?”
그는 수련을 보고 말한다.
“……뭔 자리?”
“나 옷 가져가려고.
네 가방 밑에 깔려 있더라.”
그는 차분하게 가방을 들어올린다.
수련은 갑자기 떨린다.
르샤벨의 촉각이 반응한다.
‘이놈… 이 감정은 뭔데…
왜 이리 익숙하지?’
윤재현의 손이 가방을 집는 순간—
둘의 손끝이 닿는다.
찰나의 접촉.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마치 전생이 쑥 하고 끼어든다.
“…엘리오스?”
수련의 눈동자가 휘청거린다.
윤재현도 순간 정지한 듯 멈춘다.
서로를 바라보는 3초.
그 3초가… 아주 길게 이어졌다.
“……됐고.”
윤재현은 갑자기 쌀쌀하게 말한다.
“앞으론 조심해라.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그는 돌아서서 나간다.
수련은 그대로 얼어붙은 채,
자기 가슴을 조심스럽게 쥐어본다.
쿵.
쿵.
쿵.
심장이… 심장이 왜 이러노.
‘방금, 마법이 튄 거 아니다.
그건 그냥… 심장이 내는 소리였다.’
3. “지 눈엔 뭐가 보이는 기고?”
복도를 걷는데, 마치 내가 없었던 사람인 듯한 시선들이 스쳐갔다.
뭐, 관심 없는 척하는 눈빛은 익숙하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니, 안 들리나?”
“아, 아아… 죄송해요.”
교실 문을 열다 말고, 어떤 애가 허둥지둥 사라진다.
내가 ‘르샤벨’일 땐, 저런 반응은… 내가 칼을 휘두를 때나 나왔는데.
아니, 지금도 마법은 못 써도… 내가 누군데!
아스페리안 제국의 ‘검은 불꽃’, 마녀의 여왕님 르샤벨이라고!
근데 지금은?
“니, 급식 줄 서봤나?”
“……급식?”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내 자존심이 흔들렸다.
그게 뭐라고.
“선생님이 먼저 먹으라 카드래이~”
“그래야 뒷줄 덜 밀린다고… 짠내 나도 질서는 지켜야제.”
하, 기가 찬다.
어디서 감히, 마녀 여왕에게 줄을 세워?
이게 내가 밀양 여중에서 맞을 환대란 말이가?
나는 최대한 여왕의 품위를 지키며 고개를 들었다.
…근데 왜 다들, 날 피하지?
그리고 저 애들, 뭔 눈빛이 저리도 맹맹한지.
왕따들이 날 경계한다.
그 경계 속엔 두려움도 없고, 호기심도 없고, 그냥… 투명한 무심함만 가득하다.
나를 본다. 아니, 보지 않는다. 그냥 지나칠 뿐이다.
“이수련, 니 그… 윤재현이한테 뭔 짓 했노.”
“하…?”
갑자기 들려온 말에, 내 머릿속이 띵하다.
윤재현?
그, 서울에서 왔다는 남학생?
나는 아직 제대로 얼굴도 못 봤다.
근데 벌써 뒷말이 돈다고?
왕따의 생태는 빠르다.
물처럼 흐르고, 구멍처럼 새고, 소문처럼 찌든다.
“누가 그르더라. 재현이 니보고 ‘극혐’이라 카던데.”
“……!”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극혐’?
그게 뭐야. 극도로 혐오? 그걸 나한테?
…엘리오스.
그 이름이 내 뇌리를 스친다.
“감히 나를 거부한 성기사.”
그가 지금, ‘윤재현’이라는 이름으로 이 학교에 있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되고 있었다.
거부당하고, 피하고, 오해받고, 조롱받고…
하, 참말로.
이래서 내가 다시 태어난 건가?
사랑받으려면, 이 모든 걸 견디란 말이가?
4. “어이가 없네, 이 촌년이 왜 화를 내고 있노”
복도는 조용했다.
누가 복도 청소를 해놨는지, 유난히 물기가 자르르 남아있었다.
그런데 수련은 그대로 걷고 있었다.
누구보다 기품 있게.
마치 왕궁 대리석을 밟는 여왕처럼.
“……미친 거 아이가.”
윤재현이 그걸 처음으로 입 밖에 냈다.
“방금 뭐라 했노?”
수련이 멈춰 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윤재현을 바라봤다.
눈동자는 붉은 빛이 번들거렸고, 눈꼬리는 스르르 치켜올라갔다.
그 얼굴에… 이상하게 뭔가가 겹쳐 보였다.
“뭐, 뭐라카노?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미친…?”
“아, 이제 와서 말 돌리는 기가?”
수련이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물기 자르르한 바닥을 사각사각 밟으며, 윤재현 앞에 다가갔다.
그 속도, 그 리듬, 그 표정이—
어딘가 기묘하게… 어른스러웠다.
아니, 위협적이었다.
“아까부터 뭐 자꾸 삐딱하게 구노, 서울 사는 놈은 남 무시해도 되는 기가?”
“아니 그게 아니고—”
“쪼매 참아주니까 날 아주 하대하네.
사람 무시하믄 안 되는 기라, 알긋나?”
윤재현이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수련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그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네. 니는 내가 촌년이고, 찐따고, 좀… 구질구질하다 싶을 긴데—”
“…….”
“내가 니한테 왜 이리 신경이 쓰이는 건데?”
그 한마디에, 윤재현의 눈썹이 불쑥 떨렸다.
“신경 안 쓰인다고. 전혀.”
“거짓말.”
“뭐?”
“나도 알아. 내 몸뚱아리가 이래서, 아무도 안 쳐다보는 거.
근데 니는 계속 날 쳐다보잖아.
그게 더 웃기다 아이가?”
수련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그 순간, 윤재현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방금 저 표정.
어디서 본 것 같았다.
‘근데 어디서 봤더라…?’
그가 멈칫한 사이, 수련은 쿡 웃으며 덧붙였다.
“아, 맞다. 너, 나 본 적 있나?
단두대 앞에서 울지도 않던 그 얼굴… 지금이랑 똑같네?”
“……뭐라고?”
수련은 눈을 찡긋하며 돌아섰다.
“모를끼다. 니는 아직 모르겠지. 근데 곧 알게 될 기라.”
그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뚜벅뚜벅 복도를 걸어갔다.
윤재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심장이 미묘하게 뛰고 있었다.
분명 무슨 감정이 올라오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익숙한, 그러나 기억할 수 없는 감정.
‘이 촌년, 뭐지… 진짜 뭐지…?’
5. 감정이 흐르자, 마법이 따라왔다
윤재현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몸은 굳었고, 머릿속은 텅 비었다.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촌스러운 여중생.
그런데, 왜…
‘왜 저걸 보고… 등골이 서늘하지?’
수련은 멀어지고 있었다.
천천히. 뚜벅, 뚜벅.
마치 이 학교 복도를 본인이 만든 것처럼.
고개는 꼿꼿이 들렸고, 뒷짐을 진 손끝은 단 한 점의 떨림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지직…
천장에서 미세한 전류 소리와 함께, 형광등 하나가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퍽— 소리와 함께 터졌다.
“어, 뭐야?”
지나가던 여학생이 놀라며 주춤거렸다.
형광등에서 떨어진 유리 파편이, 바닥의 물자국 위로 사르르 녹아내렸다.
기온도 떨어진 듯, 뺨을 스치는 공기가 싸늘했다.
그 순간이었다.
수련의 발밑에서, 아주 옅은 안개 같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누구는 몰랐겠지만, 윤재현은 봤다.
그건 안개도, 연기도 아니었다.
빛의 알갱이였다.
검푸른 듯 반투명한 입자들이, 수련의 뒤를 흐르듯 따라오고 있었다.
‘저건 뭐지…’
윤재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가슴께가 콕콕 쑤셨다.
아주 익숙한,
하지만 절대 기억나지 않는 감정이 목줄기를 따라 올라왔다.
그리고—
짠!
코끝에 닿은 냄새.
비누 향과 섞인 로즈메리 향기.
방금 전까지 기름 냄새 난다며 투덜대던 그녀에게선,
어쩐지 기이하게 맑은 냄새가 흘러나왔다.
“……뭐야, 진짜.”
윤재현은 무심결에 중얼였다.
머릿속 한쪽에서 번뜩이는 이미지.
불길.
단두대.
눈을 치켜든 붉은 눈동자.
그 여자의 웃음.
그가 입을 틀어막는 순간—
수련은 멈춰 섰다.
멀리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옆으로 고개만 살짝 비틀었다.
마치 등 뒤를 다 알고 있다는 듯.
“기억 안 나도 괜찮다.
곧 날 기억하게 될 기다.”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발끝에서 번개처럼 파르르, 작은 균열이 퍼졌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금이
세상의 껍데기를 깨기 시작하는 것처럼.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는 다시 뚜벅뚜벅 걸어갔다.
윤재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이건 뭐지?
공포?
당황?
아니면… 감정?
아니었다.
경외.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감정.
‘……이 촌년, 진짜 뭐지?’
그의 뇌리 한쪽에선 이미 ‘이 촌년’이라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게… 뭔 꼴이고…?”
르샤벨, 아니 이수련은 멀찍이 줄 서 있는 애들 틈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왜 줄을 서는 거지?’
처음엔 뭔 제물이라도 바치는 줄 알았다. 교복 입은 인간들이 수저 통을 들고, 양손을 뻗은 채 줄줄이 복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급식 타러 가는 거지. 안 서면 밥 못 먹어.”
같은 반 정수진이 한마디 툭 던지고 사라졌다.
“하, 하하… 이 몸이, 급식을… 받아야 한단 말이냐?”
르샤벨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열한 피조물들에게 애걸복걸 받아먹던 시절은 전생에도 없었다. 왕이건 장군이건, 급식이건, 다들 알아서 접시에 올려다 바쳤다.
지금? 무슨 줄이 이리 길노. 마치 전투 병사들이 배급 받으러 줄 선 전장이었다.
게다가 옆에 선 애는 대놓고 코를 후비며 말했다.
“야, 니 차례 땜에 밀렸다 아이가. 빨리 안 가나.”
그 말에 수련은 흠칫 물러섰다.
“어…어허. 감히 이 몸에게 명령을…”
“뭐라꼬?”
“아, 아이다. 알았어예… 지금 갈깁니더…”
밀양 사투리가 툭 터져 나왔다. 본능적으로.
‘젠장… 뭐꼬, 왜 자꾸 이래 되는기고…?’
그녀의 머릿속은 멍했지만, 손발은 눈치껏 움직였다. 급식판을 들고 앞으로 한 칸, 한 칸.
그러다, 만났다.
윤. 재. 현.
하필이면 급식 배식 라인 너머에, 그가 서 있었다.
머리엔 위생모, 앞치마에 고무장갑, 그리고 멀쩡한 얼굴.
“학생회 봉사야. 급식 당번이라고.”
뒤에서 누가 속삭였지만, 수련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왜 저런 게… 여길 지키고 있지?’
그는 수련을 쓱 바라보았다. 무표정.
아무 감정도, 기억도 없는 듯한 눈.
‘몰라본다. 다행이다…’
그런데, 윤재현의 입이 열렸다.
“밥은? 줄 거야? 말 거야?”
수련은 얼어붙었다. 손에 든 접시가 덜덜 떨렸다.
그의 시선이, 무심하게 그녀를 뚫고 지나갔다.
“그 손 덜덜 떨면서… 밥 먹을 자격은 있어?”
“……뭐?”
“됐어. 다음.”
퉁명스럽게 말하며, 재현은 고개를 돌렸다.
수련은 접시를 든 채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무언가가 깨졌다. 아니, 가라앉았다.
왕이었는데.
여왕이었는데.
세상이 엎드렸었는데…
지금은.
급식판 들고, 무시당하고, 말도 못 꺼내고…
“……됐어예. 밥은… 나중에 먹을게예…”
그녀는 뒷줄에 밀린 채 접시를 내려놓았다.
눈이, 마치 마법처럼 벌겋게 물들었다.
‘윤재현… 니는 진짜 끝났다.’
2. “지금… 쟤, 누구랑 얘기하는 기고?”
체육 시간 끝.
체육복 갈아입는 것도, 짝이 되어주는 것도,
이수련은 언제나 없었다.
그게 원래 그런 거였다.
“어이~ 왕따~ 거기서 옷 갈아입으면 안 된대~”
한 무리의 여자애들이 히죽이며 말한다.
늘 있는 조롱이다. 이수련은 대꾸하지 않는다.
사실, 이젠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르샤벨이 처음 이 몸을 썼을 땐, 분노했다.
“감히! 나한테 손가락질을 해?”
어디서 한심한 것들이, 감히 대우받던 나를 무시해?
하지만 지금은…
좀 많이 길들여졌다.
‘인간들이란… 말이 너무 많다.
왕이 되면 다 조용해질 줄 알았는데…’
르샤벨, 아니 수련은 혼잣말을 중얼였다.
작은 목소리지만, 누군가 귀신같이 듣는다.
“지금… 쟤, 누구랑 얘기하는 기고?”
“야, 미친 거 아냐? 혼잣말 했다.”
“봤나? 또라이 맞다니까.”
“소름… 저러니까 친구가 없지.”
수련은 옷을 입다 말고 잠시 멈춘다.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선 르샤벨의 눈빛이 번뜩인다.
하지만… 이 몸의 눈은 시무룩한 졸린 눈이다.
“너희들, 너무 시끄럽다.”
사투리 섞인 말이 툭 튀어나온다.
“시끄럽다꼬? 뭐래, 쟤가 지금 반항하나?”
“ㅋㅋㅋ 얘 봐라, 촌년이 성질내네~”
르샤벨은 깊은 숨을 쉰다.
‘아… 참아야 한다.
감정이 진심이 돼야 마법이 발현되니까.’
그 순간,
탈의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파지직! 하고 깜빡인다.
“꺄악! 뭐야!”
“정전이야?”
“야, 쟤 때문 아냐? 뭔가 이상해…”
르샤벨은 고개를 숙인 채 웃는다.
거울 속 이수련은 아무 표정도 없다.
그러나 속은 기묘하게… 흥분돼 있다.
‘조금씩, 감정이… 나오고 있다.
마법도… 따라오고 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다가온다.
윤재현이다.
전학 온 지 며칠 안 된 서울놈.
근데 어쩐지 이 공간에 낯설지 않게 선다.
“여기, 네 자리 맞나?”
그는 수련을 보고 말한다.
“……뭔 자리?”
“나 옷 가져가려고.
네 가방 밑에 깔려 있더라.”
그는 차분하게 가방을 들어올린다.
수련은 갑자기 떨린다.
르샤벨의 촉각이 반응한다.
‘이놈… 이 감정은 뭔데…
왜 이리 익숙하지?’
윤재현의 손이 가방을 집는 순간—
둘의 손끝이 닿는다.
찰나의 접촉.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마치 전생이 쑥 하고 끼어든다.
“…엘리오스?”
수련의 눈동자가 휘청거린다.
윤재현도 순간 정지한 듯 멈춘다.
서로를 바라보는 3초.
그 3초가… 아주 길게 이어졌다.
“……됐고.”
윤재현은 갑자기 쌀쌀하게 말한다.
“앞으론 조심해라.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그는 돌아서서 나간다.
수련은 그대로 얼어붙은 채,
자기 가슴을 조심스럽게 쥐어본다.
쿵.
쿵.
쿵.
심장이… 심장이 왜 이러노.
‘방금, 마법이 튄 거 아니다.
그건 그냥… 심장이 내는 소리였다.’
3. “지 눈엔 뭐가 보이는 기고?”
복도를 걷는데, 마치 내가 없었던 사람인 듯한 시선들이 스쳐갔다.
뭐, 관심 없는 척하는 눈빛은 익숙하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니, 안 들리나?”
“아, 아아… 죄송해요.”
교실 문을 열다 말고, 어떤 애가 허둥지둥 사라진다.
내가 ‘르샤벨’일 땐, 저런 반응은… 내가 칼을 휘두를 때나 나왔는데.
아니, 지금도 마법은 못 써도… 내가 누군데!
아스페리안 제국의 ‘검은 불꽃’, 마녀의 여왕님 르샤벨이라고!
근데 지금은?
“니, 급식 줄 서봤나?”
“……급식?”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내 자존심이 흔들렸다.
그게 뭐라고.
“선생님이 먼저 먹으라 카드래이~”
“그래야 뒷줄 덜 밀린다고… 짠내 나도 질서는 지켜야제.”
하, 기가 찬다.
어디서 감히, 마녀 여왕에게 줄을 세워?
이게 내가 밀양 여중에서 맞을 환대란 말이가?
나는 최대한 여왕의 품위를 지키며 고개를 들었다.
…근데 왜 다들, 날 피하지?
그리고 저 애들, 뭔 눈빛이 저리도 맹맹한지.
왕따들이 날 경계한다.
그 경계 속엔 두려움도 없고, 호기심도 없고, 그냥… 투명한 무심함만 가득하다.
나를 본다. 아니, 보지 않는다. 그냥 지나칠 뿐이다.
“이수련, 니 그… 윤재현이한테 뭔 짓 했노.”
“하…?”
갑자기 들려온 말에, 내 머릿속이 띵하다.
윤재현?
그, 서울에서 왔다는 남학생?
나는 아직 제대로 얼굴도 못 봤다.
근데 벌써 뒷말이 돈다고?
왕따의 생태는 빠르다.
물처럼 흐르고, 구멍처럼 새고, 소문처럼 찌든다.
“누가 그르더라. 재현이 니보고 ‘극혐’이라 카던데.”
“……!”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극혐’?
그게 뭐야. 극도로 혐오? 그걸 나한테?
…엘리오스.
그 이름이 내 뇌리를 스친다.
“감히 나를 거부한 성기사.”
그가 지금, ‘윤재현’이라는 이름으로 이 학교에 있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되고 있었다.
거부당하고, 피하고, 오해받고, 조롱받고…
하, 참말로.
이래서 내가 다시 태어난 건가?
사랑받으려면, 이 모든 걸 견디란 말이가?
4. “어이가 없네, 이 촌년이 왜 화를 내고 있노”
복도는 조용했다.
누가 복도 청소를 해놨는지, 유난히 물기가 자르르 남아있었다.
그런데 수련은 그대로 걷고 있었다.
누구보다 기품 있게.
마치 왕궁 대리석을 밟는 여왕처럼.
“……미친 거 아이가.”
윤재현이 그걸 처음으로 입 밖에 냈다.
“방금 뭐라 했노?”
수련이 멈춰 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윤재현을 바라봤다.
눈동자는 붉은 빛이 번들거렸고, 눈꼬리는 스르르 치켜올라갔다.
그 얼굴에… 이상하게 뭔가가 겹쳐 보였다.
“뭐, 뭐라카노?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미친…?”
“아, 이제 와서 말 돌리는 기가?”
수련이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물기 자르르한 바닥을 사각사각 밟으며, 윤재현 앞에 다가갔다.
그 속도, 그 리듬, 그 표정이—
어딘가 기묘하게… 어른스러웠다.
아니, 위협적이었다.
“아까부터 뭐 자꾸 삐딱하게 구노, 서울 사는 놈은 남 무시해도 되는 기가?”
“아니 그게 아니고—”
“쪼매 참아주니까 날 아주 하대하네.
사람 무시하믄 안 되는 기라, 알긋나?”
윤재현이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수련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그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네. 니는 내가 촌년이고, 찐따고, 좀… 구질구질하다 싶을 긴데—”
“…….”
“내가 니한테 왜 이리 신경이 쓰이는 건데?”
그 한마디에, 윤재현의 눈썹이 불쑥 떨렸다.
“신경 안 쓰인다고. 전혀.”
“거짓말.”
“뭐?”
“나도 알아. 내 몸뚱아리가 이래서, 아무도 안 쳐다보는 거.
근데 니는 계속 날 쳐다보잖아.
그게 더 웃기다 아이가?”
수련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그 순간, 윤재현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방금 저 표정.
어디서 본 것 같았다.
‘근데 어디서 봤더라…?’
그가 멈칫한 사이, 수련은 쿡 웃으며 덧붙였다.
“아, 맞다. 너, 나 본 적 있나?
단두대 앞에서 울지도 않던 그 얼굴… 지금이랑 똑같네?”
“……뭐라고?”
수련은 눈을 찡긋하며 돌아섰다.
“모를끼다. 니는 아직 모르겠지. 근데 곧 알게 될 기라.”
그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뚜벅뚜벅 복도를 걸어갔다.
윤재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심장이 미묘하게 뛰고 있었다.
분명 무슨 감정이 올라오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익숙한, 그러나 기억할 수 없는 감정.
‘이 촌년, 뭐지… 진짜 뭐지…?’
5. 감정이 흐르자, 마법이 따라왔다
윤재현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몸은 굳었고, 머릿속은 텅 비었다.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촌스러운 여중생.
그런데, 왜…
‘왜 저걸 보고… 등골이 서늘하지?’
수련은 멀어지고 있었다.
천천히. 뚜벅, 뚜벅.
마치 이 학교 복도를 본인이 만든 것처럼.
고개는 꼿꼿이 들렸고, 뒷짐을 진 손끝은 단 한 점의 떨림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지직…
천장에서 미세한 전류 소리와 함께, 형광등 하나가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퍽— 소리와 함께 터졌다.
“어, 뭐야?”
지나가던 여학생이 놀라며 주춤거렸다.
형광등에서 떨어진 유리 파편이, 바닥의 물자국 위로 사르르 녹아내렸다.
기온도 떨어진 듯, 뺨을 스치는 공기가 싸늘했다.
그 순간이었다.
수련의 발밑에서, 아주 옅은 안개 같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누구는 몰랐겠지만, 윤재현은 봤다.
그건 안개도, 연기도 아니었다.
빛의 알갱이였다.
검푸른 듯 반투명한 입자들이, 수련의 뒤를 흐르듯 따라오고 있었다.
‘저건 뭐지…’
윤재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가슴께가 콕콕 쑤셨다.
아주 익숙한,
하지만 절대 기억나지 않는 감정이 목줄기를 따라 올라왔다.
그리고—
짠!
코끝에 닿은 냄새.
비누 향과 섞인 로즈메리 향기.
방금 전까지 기름 냄새 난다며 투덜대던 그녀에게선,
어쩐지 기이하게 맑은 냄새가 흘러나왔다.
“……뭐야, 진짜.”
윤재현은 무심결에 중얼였다.
머릿속 한쪽에서 번뜩이는 이미지.
불길.
단두대.
눈을 치켜든 붉은 눈동자.
그 여자의 웃음.
그가 입을 틀어막는 순간—
수련은 멈춰 섰다.
멀리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옆으로 고개만 살짝 비틀었다.
마치 등 뒤를 다 알고 있다는 듯.
“기억 안 나도 괜찮다.
곧 날 기억하게 될 기다.”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발끝에서 번개처럼 파르르, 작은 균열이 퍼졌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금이
세상의 껍데기를 깨기 시작하는 것처럼.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는 다시 뚜벅뚜벅 걸어갔다.
윤재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이건 뭐지?
공포?
당황?
아니면… 감정?
아니었다.
경외.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감정.
‘……이 촌년, 진짜 뭐지?’
그의 뇌리 한쪽에선 이미 ‘이 촌년’이라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작가의 말
등록된 작가의 말이 없습니다.
닫기![]()
짠내 마녀는 아직도 설렌다
7.7화 나에게만 진짜 모습이 보인다고?조회 : 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539 6.6화 성기사 엘리오스?… 지금은 윤재현조회 : 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256 5.5화 그 남자, 전생에도 날 싫어했었다조회 : 3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35 4.4화 이 몸이, 급식을 받아야 한단 말이냐?조회 : 2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997 3.3화 왕따들의 표정은 너무 투명했다 그리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조회 : 6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71 2.2화 나는 마녀 여왕이다… 그런데 급식 반찬도 못 챙긴다조회 : 7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456 1.1화 르샤벨, 나댐의 끝에서 추방당하다조회 : 16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