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성기사 엘리오스?… 지금은 윤재현
조회 : 3 추천 : 0 글자수 : 6,256 자 2025-12-13
1. 엘리오스의 눈빛이 있었다
복도 창가에 기댄 수련의 등 뒤로, 수업 종이 멀게 들렸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매점으로, 운동장으로, 체육관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수련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이, 붙들렸다.
멀리 체육관 유리창 너머—
햇살을 받아 윤처럼 반짝이는 먼지 속에서,
윤재현이 반쯤 젖은 체육복 상의를 손에 들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은 이마에 눌려 엉겨붙었고,
햇빛이 그의 쇄골과 어깨 위로 떨어지며 땀과 섞여 반짝였다.
그는 그냥 걷고 있었을 뿐인데…
수련의 눈엔, 그 모습이 너무 낯익었다.
아니.
그건 ‘낯선 익숙함’이었다.
— “나는 당신을, 죽음 직전까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사랑하지 않았을 뿐.”
갑작스레, 허공이 열렸다.
그 말이 귓가를 맴돌며 수련의 시간 감각을 휘갈겼다.
순간,
눈앞의 윤재현이 흰 갑옷을 입은 남자로 겹쳐졌다.
하얀 갑옷. 붉은 피.
기름 종이처럼 얇고 차가운 고요 위에 떨어지던 핏방울.
엘리오스였다.
그가 칼을 꺼내던 순간.
르샤벨은 화려한 의자에 앉아 그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그의 눈은,
그때도 지금도—
감정 없이, 너무 조용하게, 그녀를 '단죄'하고 있었다.
“그 눈… 아직도 그 눈이다.”
수련의 속눈썹이 떨렸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복도 창문 너머의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을 뿐인데—
눈을 감자, 더 선명한 영상이 그녀의 뇌리에 박혔다.
그날.
황금 계단 위에 선 마녀.
그리고 단두대 아래, 끝까지 무릎 꿇지 않던 남자.
그 남자의 목이, 떨어졌을 때
르샤벨은 처음으로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프지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다만, ‘끝났다’는 감정이 너무 깊었다.
그리고 지금—
그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의 몸에. 그의 눈빛에. 그의 기척에.
윤재현은 지금 체육관 문을 열고 나왔다.
학생들 사이를 지나가며 무심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모든 제스처가—
전생의 엘리오스였다.
“……확신이 드는 기라.”
수련의 입에서 작게 흘러나온 말은 한기처럼 차가웠다.
“그놈이 맞다. 엘리오스.
내가… 죽였던 남자.”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빠르게, 그리고 깊게.
그건 두려움이 아니라,
마치 아주 오랜 기다림이 끝났다는 신호 같았다.
그때 윤재현이 고개를 들었다.
창문 너머 수련의 시선을 느꼈는지,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
그 순간, 수련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전생의 죽음이 되살아나는 느낌.
처형이 반복되는 착각.
그 눈빛이, 단두대보다 더 냉정했다.
“그가 날 다시 죽이려는 건 아닐까…”
르샤벨의 목소리가 내면에서 조용히 울렸다.
비웃음처럼, 죄처럼, 속삭이는 형벌처럼.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눈빛을 본 수련의 입가엔 묘하게 미소가 번졌다.
“…이번에는 내가 살려낼 기라.
이번에는, 니가 날 죽이지 못하게 만들 거다.”
복도에 놓인 그림자 두 개.
하나는 과거에서, 하나는 현재에서—
서로를 닮아가고 있었다.
2. 또 쳐다봐? / 니가 자꾸 보여서 그런기라
교실 문이 열리고, 땀에 젖은 체육복을 갈아입은 윤재현이 복도로 들어섰다.
그 순간, 수련은 또 눈이 갔다.
아니, ‘눈을 돌릴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그는 지나가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너무 뚜렷했다.
기척이, 공기의 흐름이, 존재감이… 전생의 그것과 똑같았다.
그는 그저 걸어가고 있을 뿐인데
수련의 눈에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마녀를 향해 칼을 빼들던 ‘성기사 엘리오스’가 겹쳐졌다.
그 순간이었다.
“야.”
쾅—!
윤재현이 발을 굳게 멈추고, 수련 앞에 서더니 벽에 손을 짚었다.
딱 수련을 가둔 포즈다. 주변 친구들이 놀라서 힐끔거렸다.
“또 쳐다봐? 진짜, 왜 자꾸 뚫어지게 쳐다보는 건데?”
그 목소리, 날카롭고 차가웠다.
그의 눈빛엔 짜증과 불쾌감이 가득 서려 있었다.
수련은 잠시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무의식적으로—내면의 르샤벨이 속삭였다.
“엘리오스… 니 또 날 미워하는 거가.”
입이 먼저 나갔다.
“…니가 자꾸, 보인다 아이가.”
“뭐?”
“그때도, 지금도. 니 눈빛이 너무 똑같아서,
자꾸… 자꾸 그때 생각이 난단 말이다.”
수련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밀양 사투리에 섞인 혼잣말이 아니라, 뼛속에서 튀어나온 고백 같았다.
그녀의 말투는 낮고 진지했다. 오히려… 슬펐다.
윤재현은 잠시 굳었다.
“…니, 진짜 좀 이상하다?”
목소리에 당혹이 묻어났다.
짜증을 내려다 멈췄다. 뭔가, 수련의 눈동자가 평범하지 않아서였다.
순간, 이상한 이미지가 머릿속을 스쳤다.
불타는 궁전, 화려한 옷을 입고 웃고 있는 여자, 그리고… 날카로운 단검의 형상.
윤재현은 이마를 찌푸렸다.
“…기분 나빠. 진짜. 그만 좀 쳐다봐.”
돌아서며 그는 작은 욕설을 삼켰다.
수련은 가만히 그 등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날 미워하는 거지.
그래도 괜찮다.
그 미움도 감정인 기라.”
그녀의 속눈썹이 조금 떨렸고, 심장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창문 밖으로 햇살이 내려와, 두 사람의 긴장을 조용히 덮었다.
그러나 그 따뜻함 속에서,
누군가는 기억을 떠올렸고
또 누군가는 기억을 몰라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3. 내가 죽인 그가, 다시 살아 있다면?
방문을 닫자마자, 수련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바닥엔 그녀가 입고 있던 교복이 우수수 흘러내렸다.
무릎을 끌어안고, 벽에 이마를 기댄 채 한참을 말이 없었다.
방 안엔 고요했다.
달그락,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거실에서 TV를 크게 켜둔 아빠의 드문 숨소리.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심장 소리.
“내가 그를 죽였지.”
작게 내뱉은 말.
입술은 거의 붙어있었고, 눈동자는 허공만 맴돌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지금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 붉은 궁전이 떠올랐다.
—
[전생 회상]
르샤벨은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대관식 때조차도 입지 않았던, 자수 놓인 고귀한 마녀의 옷.
그는, 엘리오스는… 흰색 갑옷을 입은 채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있었다.
아니, 꿇게 만든 것이었다.
"성기사 엘리오스. 반역죄로, 네 죄를 선고한다."
자기 입에서 나온 말.
하지만 누가 봐도, 그건 억지였다.
그는 단 한 번도 반역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
그것이 죄였다.
온 나라가 마녀를 숭배했는데, 그는 경멸했으니까.
그의 눈빛 속엔 ‘사랑하지 않아서 미안하다’는 죄책감조차 없었다.
그건 르샤벨에게 있어… 모욕이었다.
“그때, 내가 진심으로 원했던 건… 용서도, 권력도 아니었어.”
—
다시 현실.
수련은 조용히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땀에 젖은 이수련의 초라한 모습이 있었다.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눈썹은 흐리고, 중학교 2학년인데도 키가 작고 어깨가 좁았다.
눈을 찡그리고 거울을 뚫어져라 보았다.
“내가… 이 몸 안에 들어왔을 때, 벌써 벌이었지.
감정이 없던 마녀에게… 감정이라는 짐을 씌운 신의 장난.”
손끝이 떨렸다.
그 떨림은 단순한 긴장도, 분노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부끄러움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 이유가… 감정이 아니고, 감정 ‘없음’이라면.”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거울을 짚었다.
차가운 유리가 손바닥에 닿았다.
“그를 죽게 만든 건, 내 칼이 아니었다.
내 감정이었다.
사랑받고 싶단 집착.
자존심.
거절당한 분노.
그리고 끝까지 인정받고 싶단… 애처로운 허세.”
거울 속의 이수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동자 깊은 곳엔, 르샤벨의 그늘이 깊게 스며 있었다.
“이렇게까지 엉망이 될 줄 알았으면…
그땐, 눈 한번 제대로 마주쳐볼 걸 그랬다.
날 사랑하지 않는 그 눈빛을…
한 번만, 정면으로 봐줬더라면.”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그 순간, 방 안 공기에서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마법이 다시 반응할 듯 말 듯,
그녀의 감정이 정직해질 때마다—
아주 미세하게, 공기 속 먼지가 흔들렸다.
그건 신호였다.
용서를 구하는 감정이 마법의 문을 다시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는 신호.
4. 윤재현, 혼란에 빠지다
“야, 윤재현. 걔 또 너 째려보더라.”
수업 끝나고 교실을 나서려던 참에, 옆자리 태성이가 슬쩍 팔꿈치로 그를 툭 찔렀다.
“누가.”
“누가긴, 그 시골 애. 수련이 걔.”
재현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향하는 발소리는 평소보다도 거칠었다.
무언가 속이 뒤틀리는 기분.
진짜, 그 애만 보면— 아니, 그 애 눈만 마주치면, 머리가 욱신거리고 속이 울렁였다.
‘기분이 더러워진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
“뭘 자꾸 쳐다봐.”
아까 체육 시간에도 그랬다.
분명히 멀리 서 있었는데도,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말도 안 되게 강한 시선.
그 시선을 받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눈을 돌려 확인했을 때—
수련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내린 채 눈동자만 올리고 있었다.
딱, 그렇게… 어딘가 사냥감을 쳐다보는 듯한 눈빛.
“진짜 소름 돋게 만든다니까, 저년.”
재현은 무심결에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상한 건, 그 불쾌함 뒤에 오는 기묘한 끌림이었다.
‘왜 자꾸 생각나냐고.’
—
그날 저녁, 재현은 침대에 누운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수면등만이 방 안을 흐릿하게 비추고, 어둠 속에선 스마트폰 화면이 유난히 밝았다.
“야, 너 요즘 좀 이상하다?”
영상 통화 너머로 태성이가 말했다.
“그니까, 그 시골 애한테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냐고.
맨날 욕은 하면서 왜 맨날 걔 말만 하냐?”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라.”
재현은 짜증이 난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태성이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정말 그랬다.
그 애를 보면 짜증이 나고, 무섭고, 뭔가 껄끄러운데…
이상하게 생각이 남는다.
지워지질 않는다.
—
그날 밤, 꿈을 꿨다.
시뻘건 불꽃 속이었다.
이름도 없는 전장처럼, 붉은 연기가 공중을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하얀 옷을 입은 한 여자가—그 여자의 실루엣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는 고요했지만, 그 안에 무언가가 번득였다.
심판, 원망, 사랑, 다 담지 못한 감정의 흔적.
그리고—
“엘리오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입술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 이름. 들어본 적도, 말해본 적도 없는 이름.
하지만 꿈속의 재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떨며 물러섰다.
그 이름이, 너무도 익숙했다.
“아…”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이마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심장이, 이유 없이 빨리 뛰고 있었다.
—
‘엘리오스’란 이름.
‘불꽃 속 여자’
‘날 노려보던 눈빛’
‘그리고, 수련…’
윤재현은 방금까지 꾼 꿈을 다시 떠올리며,
이 모든 게 어쩐지—
단지 꿈으로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뭔가, 연결되어 있었다.
어디서 본 것도, 들어본 것도 아닌데…
기억보다 먼저 감정이 반응하고 있었다.
5. 그를 사랑하게 만든다면, 내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
수련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펜도, 책도 들려 있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거울을 마주 보고 있었다.
거울 속엔 어정쩡한 단발머리의, 촌스러운 얼굴이 하나 있었다.
볼살이 통통하고, 피부는 칙칙했다.
눈동자는 흐리멍덩하고, 입술은 물기를 잃은 채 굳어 있었다.
“내가, 이런 얼굴로 뭘 해보겠다고.”
속에서 르샤벨이 조용히 비웃었다.
하지만 그 비웃음조차 오늘은 어딘가 처연했다.
—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전생의 르샤벨은 수백만의 이들이 무릎 꿇던 ‘마녀 여왕’이었다.
권력도, 아름다움도, 마법도 가졌지만…
정작 한 사람의 사랑만은 가지지 못했다.
엘리오스.
성기사.
그 남자만은 끝끝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다. 감정 없는 사람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그 말이, 결국 자신의 모든 파멸의 시발점이었다.
그래서 누명을 씌워 그를 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수련은 그 말을, 그저 부정할 수 없었다.
—
“그때, 나는 사랑받고 싶었지만…
정작, 사랑을 줄 줄은 몰랐던 기라.”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수련은 이마를 책상 위에 대고 웅크렸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감정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를 다시 사랑하게 만들어야 내가 돌아간다.’
그 말의 의미는 처음엔 단순한 조건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제,
그 문장은 이렇게 바뀌어 들렸다.
“그가 날 다시 사랑할 수 있을 만큼…
내가 변해야 한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용서를 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감정.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다는 건,
그가 과거를 용서해준다는 뜻이며—
그가 용서해줄 수 있을 만큼
수련이 바뀌었다는 걸 증명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었다.
종이 한 장이 툭, 책상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위에 적혀 있던 문장 하나가 수련의 눈에 들어왔다.
국어 수업 시간, 교과서 필사 과제로 적었던 문장.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용서할 수 있는 힘이다.”
수련의 눈이 붉어졌다.
“나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를 사랑하게 만든다면, 나는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말에, 답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 어딘가가—
작게, 아주 작게
빛났다.
마법처럼.
—
“그가 날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라면…
나는, 그 감정이 다시 피어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용서를 받아야 한다면—
먼저, 내가 날 용서해야 한다.”
복도 창가에 기댄 수련의 등 뒤로, 수업 종이 멀게 들렸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매점으로, 운동장으로, 체육관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수련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이, 붙들렸다.
멀리 체육관 유리창 너머—
햇살을 받아 윤처럼 반짝이는 먼지 속에서,
윤재현이 반쯤 젖은 체육복 상의를 손에 들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은 이마에 눌려 엉겨붙었고,
햇빛이 그의 쇄골과 어깨 위로 떨어지며 땀과 섞여 반짝였다.
그는 그냥 걷고 있었을 뿐인데…
수련의 눈엔, 그 모습이 너무 낯익었다.
아니.
그건 ‘낯선 익숙함’이었다.
— “나는 당신을, 죽음 직전까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사랑하지 않았을 뿐.”
갑작스레, 허공이 열렸다.
그 말이 귓가를 맴돌며 수련의 시간 감각을 휘갈겼다.
순간,
눈앞의 윤재현이 흰 갑옷을 입은 남자로 겹쳐졌다.
하얀 갑옷. 붉은 피.
기름 종이처럼 얇고 차가운 고요 위에 떨어지던 핏방울.
엘리오스였다.
그가 칼을 꺼내던 순간.
르샤벨은 화려한 의자에 앉아 그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그의 눈은,
그때도 지금도—
감정 없이, 너무 조용하게, 그녀를 '단죄'하고 있었다.
“그 눈… 아직도 그 눈이다.”
수련의 속눈썹이 떨렸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복도 창문 너머의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을 뿐인데—
눈을 감자, 더 선명한 영상이 그녀의 뇌리에 박혔다.
그날.
황금 계단 위에 선 마녀.
그리고 단두대 아래, 끝까지 무릎 꿇지 않던 남자.
그 남자의 목이, 떨어졌을 때
르샤벨은 처음으로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프지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다만, ‘끝났다’는 감정이 너무 깊었다.
그리고 지금—
그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의 몸에. 그의 눈빛에. 그의 기척에.
윤재현은 지금 체육관 문을 열고 나왔다.
학생들 사이를 지나가며 무심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모든 제스처가—
전생의 엘리오스였다.
“……확신이 드는 기라.”
수련의 입에서 작게 흘러나온 말은 한기처럼 차가웠다.
“그놈이 맞다. 엘리오스.
내가… 죽였던 남자.”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빠르게, 그리고 깊게.
그건 두려움이 아니라,
마치 아주 오랜 기다림이 끝났다는 신호 같았다.
그때 윤재현이 고개를 들었다.
창문 너머 수련의 시선을 느꼈는지,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
그 순간, 수련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전생의 죽음이 되살아나는 느낌.
처형이 반복되는 착각.
그 눈빛이, 단두대보다 더 냉정했다.
“그가 날 다시 죽이려는 건 아닐까…”
르샤벨의 목소리가 내면에서 조용히 울렸다.
비웃음처럼, 죄처럼, 속삭이는 형벌처럼.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눈빛을 본 수련의 입가엔 묘하게 미소가 번졌다.
“…이번에는 내가 살려낼 기라.
이번에는, 니가 날 죽이지 못하게 만들 거다.”
복도에 놓인 그림자 두 개.
하나는 과거에서, 하나는 현재에서—
서로를 닮아가고 있었다.
2. 또 쳐다봐? / 니가 자꾸 보여서 그런기라
교실 문이 열리고, 땀에 젖은 체육복을 갈아입은 윤재현이 복도로 들어섰다.
그 순간, 수련은 또 눈이 갔다.
아니, ‘눈을 돌릴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그는 지나가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너무 뚜렷했다.
기척이, 공기의 흐름이, 존재감이… 전생의 그것과 똑같았다.
그는 그저 걸어가고 있을 뿐인데
수련의 눈에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마녀를 향해 칼을 빼들던 ‘성기사 엘리오스’가 겹쳐졌다.
그 순간이었다.
“야.”
쾅—!
윤재현이 발을 굳게 멈추고, 수련 앞에 서더니 벽에 손을 짚었다.
딱 수련을 가둔 포즈다. 주변 친구들이 놀라서 힐끔거렸다.
“또 쳐다봐? 진짜, 왜 자꾸 뚫어지게 쳐다보는 건데?”
그 목소리, 날카롭고 차가웠다.
그의 눈빛엔 짜증과 불쾌감이 가득 서려 있었다.
수련은 잠시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무의식적으로—내면의 르샤벨이 속삭였다.
“엘리오스… 니 또 날 미워하는 거가.”
입이 먼저 나갔다.
“…니가 자꾸, 보인다 아이가.”
“뭐?”
“그때도, 지금도. 니 눈빛이 너무 똑같아서,
자꾸… 자꾸 그때 생각이 난단 말이다.”
수련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밀양 사투리에 섞인 혼잣말이 아니라, 뼛속에서 튀어나온 고백 같았다.
그녀의 말투는 낮고 진지했다. 오히려… 슬펐다.
윤재현은 잠시 굳었다.
“…니, 진짜 좀 이상하다?”
목소리에 당혹이 묻어났다.
짜증을 내려다 멈췄다. 뭔가, 수련의 눈동자가 평범하지 않아서였다.
순간, 이상한 이미지가 머릿속을 스쳤다.
불타는 궁전, 화려한 옷을 입고 웃고 있는 여자, 그리고… 날카로운 단검의 형상.
윤재현은 이마를 찌푸렸다.
“…기분 나빠. 진짜. 그만 좀 쳐다봐.”
돌아서며 그는 작은 욕설을 삼켰다.
수련은 가만히 그 등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날 미워하는 거지.
그래도 괜찮다.
그 미움도 감정인 기라.”
그녀의 속눈썹이 조금 떨렸고, 심장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창문 밖으로 햇살이 내려와, 두 사람의 긴장을 조용히 덮었다.
그러나 그 따뜻함 속에서,
누군가는 기억을 떠올렸고
또 누군가는 기억을 몰라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3. 내가 죽인 그가, 다시 살아 있다면?
방문을 닫자마자, 수련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바닥엔 그녀가 입고 있던 교복이 우수수 흘러내렸다.
무릎을 끌어안고, 벽에 이마를 기댄 채 한참을 말이 없었다.
방 안엔 고요했다.
달그락,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거실에서 TV를 크게 켜둔 아빠의 드문 숨소리.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심장 소리.
“내가 그를 죽였지.”
작게 내뱉은 말.
입술은 거의 붙어있었고, 눈동자는 허공만 맴돌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지금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 붉은 궁전이 떠올랐다.
—
[전생 회상]
르샤벨은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대관식 때조차도 입지 않았던, 자수 놓인 고귀한 마녀의 옷.
그는, 엘리오스는… 흰색 갑옷을 입은 채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있었다.
아니, 꿇게 만든 것이었다.
"성기사 엘리오스. 반역죄로, 네 죄를 선고한다."
자기 입에서 나온 말.
하지만 누가 봐도, 그건 억지였다.
그는 단 한 번도 반역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
그것이 죄였다.
온 나라가 마녀를 숭배했는데, 그는 경멸했으니까.
그의 눈빛 속엔 ‘사랑하지 않아서 미안하다’는 죄책감조차 없었다.
그건 르샤벨에게 있어… 모욕이었다.
“그때, 내가 진심으로 원했던 건… 용서도, 권력도 아니었어.”
—
다시 현실.
수련은 조용히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땀에 젖은 이수련의 초라한 모습이 있었다.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눈썹은 흐리고, 중학교 2학년인데도 키가 작고 어깨가 좁았다.
눈을 찡그리고 거울을 뚫어져라 보았다.
“내가… 이 몸 안에 들어왔을 때, 벌써 벌이었지.
감정이 없던 마녀에게… 감정이라는 짐을 씌운 신의 장난.”
손끝이 떨렸다.
그 떨림은 단순한 긴장도, 분노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부끄러움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 이유가… 감정이 아니고, 감정 ‘없음’이라면.”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거울을 짚었다.
차가운 유리가 손바닥에 닿았다.
“그를 죽게 만든 건, 내 칼이 아니었다.
내 감정이었다.
사랑받고 싶단 집착.
자존심.
거절당한 분노.
그리고 끝까지 인정받고 싶단… 애처로운 허세.”
거울 속의 이수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동자 깊은 곳엔, 르샤벨의 그늘이 깊게 스며 있었다.
“이렇게까지 엉망이 될 줄 알았으면…
그땐, 눈 한번 제대로 마주쳐볼 걸 그랬다.
날 사랑하지 않는 그 눈빛을…
한 번만, 정면으로 봐줬더라면.”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그 순간, 방 안 공기에서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마법이 다시 반응할 듯 말 듯,
그녀의 감정이 정직해질 때마다—
아주 미세하게, 공기 속 먼지가 흔들렸다.
그건 신호였다.
용서를 구하는 감정이 마법의 문을 다시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는 신호.
4. 윤재현, 혼란에 빠지다
“야, 윤재현. 걔 또 너 째려보더라.”
수업 끝나고 교실을 나서려던 참에, 옆자리 태성이가 슬쩍 팔꿈치로 그를 툭 찔렀다.
“누가.”
“누가긴, 그 시골 애. 수련이 걔.”
재현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향하는 발소리는 평소보다도 거칠었다.
무언가 속이 뒤틀리는 기분.
진짜, 그 애만 보면— 아니, 그 애 눈만 마주치면, 머리가 욱신거리고 속이 울렁였다.
‘기분이 더러워진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
“뭘 자꾸 쳐다봐.”
아까 체육 시간에도 그랬다.
분명히 멀리 서 있었는데도,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말도 안 되게 강한 시선.
그 시선을 받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눈을 돌려 확인했을 때—
수련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내린 채 눈동자만 올리고 있었다.
딱, 그렇게… 어딘가 사냥감을 쳐다보는 듯한 눈빛.
“진짜 소름 돋게 만든다니까, 저년.”
재현은 무심결에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상한 건, 그 불쾌함 뒤에 오는 기묘한 끌림이었다.
‘왜 자꾸 생각나냐고.’
—
그날 저녁, 재현은 침대에 누운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수면등만이 방 안을 흐릿하게 비추고, 어둠 속에선 스마트폰 화면이 유난히 밝았다.
“야, 너 요즘 좀 이상하다?”
영상 통화 너머로 태성이가 말했다.
“그니까, 그 시골 애한테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냐고.
맨날 욕은 하면서 왜 맨날 걔 말만 하냐?”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라.”
재현은 짜증이 난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태성이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정말 그랬다.
그 애를 보면 짜증이 나고, 무섭고, 뭔가 껄끄러운데…
이상하게 생각이 남는다.
지워지질 않는다.
—
그날 밤, 꿈을 꿨다.
시뻘건 불꽃 속이었다.
이름도 없는 전장처럼, 붉은 연기가 공중을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하얀 옷을 입은 한 여자가—그 여자의 실루엣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는 고요했지만, 그 안에 무언가가 번득였다.
심판, 원망, 사랑, 다 담지 못한 감정의 흔적.
그리고—
“엘리오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입술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 이름. 들어본 적도, 말해본 적도 없는 이름.
하지만 꿈속의 재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떨며 물러섰다.
그 이름이, 너무도 익숙했다.
“아…”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이마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심장이, 이유 없이 빨리 뛰고 있었다.
—
‘엘리오스’란 이름.
‘불꽃 속 여자’
‘날 노려보던 눈빛’
‘그리고, 수련…’
윤재현은 방금까지 꾼 꿈을 다시 떠올리며,
이 모든 게 어쩐지—
단지 꿈으로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뭔가, 연결되어 있었다.
어디서 본 것도, 들어본 것도 아닌데…
기억보다 먼저 감정이 반응하고 있었다.
5. 그를 사랑하게 만든다면, 내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
수련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펜도, 책도 들려 있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거울을 마주 보고 있었다.
거울 속엔 어정쩡한 단발머리의, 촌스러운 얼굴이 하나 있었다.
볼살이 통통하고, 피부는 칙칙했다.
눈동자는 흐리멍덩하고, 입술은 물기를 잃은 채 굳어 있었다.
“내가, 이런 얼굴로 뭘 해보겠다고.”
속에서 르샤벨이 조용히 비웃었다.
하지만 그 비웃음조차 오늘은 어딘가 처연했다.
—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전생의 르샤벨은 수백만의 이들이 무릎 꿇던 ‘마녀 여왕’이었다.
권력도, 아름다움도, 마법도 가졌지만…
정작 한 사람의 사랑만은 가지지 못했다.
엘리오스.
성기사.
그 남자만은 끝끝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다. 감정 없는 사람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그 말이, 결국 자신의 모든 파멸의 시발점이었다.
그래서 누명을 씌워 그를 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수련은 그 말을, 그저 부정할 수 없었다.
—
“그때, 나는 사랑받고 싶었지만…
정작, 사랑을 줄 줄은 몰랐던 기라.”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수련은 이마를 책상 위에 대고 웅크렸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감정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를 다시 사랑하게 만들어야 내가 돌아간다.’
그 말의 의미는 처음엔 단순한 조건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제,
그 문장은 이렇게 바뀌어 들렸다.
“그가 날 다시 사랑할 수 있을 만큼…
내가 변해야 한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용서를 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감정.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다는 건,
그가 과거를 용서해준다는 뜻이며—
그가 용서해줄 수 있을 만큼
수련이 바뀌었다는 걸 증명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었다.
종이 한 장이 툭, 책상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위에 적혀 있던 문장 하나가 수련의 눈에 들어왔다.
국어 수업 시간, 교과서 필사 과제로 적었던 문장.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용서할 수 있는 힘이다.”
수련의 눈이 붉어졌다.
“나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를 사랑하게 만든다면, 나는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말에, 답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 어딘가가—
작게, 아주 작게
빛났다.
마법처럼.
—
“그가 날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라면…
나는, 그 감정이 다시 피어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용서를 받아야 한다면—
먼저, 내가 날 용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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