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 1화 비 오는 밤, 우린 친구였을까?
조회 : 157 추천 : 0 글자수 : 4,389 자 2025-12-08
비 오는 밤, 우린 친구였을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원 가로등 불빛은 흐릿했고, 사람 하나 없는 벤치 옆에 두 사람이 마주 서 있었다.
남자는 검은 우산을 들고 있었고, 그녀는 비를 맞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이런 장면을 그가 미리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랬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정확하게 그녀의 상태를 읽었다.
오늘도, 마치 여기까지 흘러올 걸 예견이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처음 이 공원을 찾은 것도 그와 함께였다.
벚꽃이 피던 4월이었다. 그녀는 실연 후 무기력했고, 그는 그냥 조용히 옆에 앉아 있었다.
말없이 벤치에서 하루를 보낸 날, 그는 “시간은 원래 천천히 가야 해. 그게 정상이야.”라고 말했다.
그 순간부터였다. 그를 ‘위로’라고 받아들인 건.
그날 이후, 그들은 친구라는 이름으로 일상의 수많은 밤을 함께 보냈다.
같이 술을 마셨고, 서로의 연애 상담을 했고, 기념일에도, 심지어 생일도 함께 보냈다.
애매하게 가까운 거리.
그녀는 언젠가부터 그가 다른 여자와 있을 때 불편해졌고,
그는 그녀가 힘들다고 연락하면 언제든 달려왔다.
그러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친구니까’라는 말이 모든 경계를 지켜주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은 깨지고 있었다.
“...그만하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지쳤어. 그 사람과도, 그리고... 너랑도.”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흐린 불빛 아래 그의 눈빛은 어딘가 이상하게 고요했다.
“7년이나 친구로 지냈잖아. 우리.”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이 말로 끝날 거라 믿었다. 아니, 끝내고 싶었다.
이 감정이 더 커지기 전에, 더 이상 착각하지 않도록.
그런데 그 순간—
남자가 우산을 그녀 쪽으로 기울이며, 조용히 다가왔다.
“...잠깐만.”
그녀가 뒤로 물러설 틈도 없이,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다음 순간 입술이 닿았다.
우산 아래, 젖은 공기 속에서
키스는 조용히, 그러나 너무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녀는 처음엔 멈췄다.
심장이 쿵, 하고 울렸고
입술이 닿은 곳에 뭔가 전류처럼 번졌다.
눈을 감지도, 떼지도 못한 채 순간이 멈춰버린 듯 서 있었다.
그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그녀의 심장에도 옮겨 붙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경직된 채 그를 밀쳐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목소리는 떨렸고, 눈동자는 흔들렸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저, 눈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미쳤어? 우린 친구잖아. 7년 동안…”
그녀는 두 팔을 자신에게 감싸듯 움켜쥐었다.
혼란, 배신, 부끄러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였다.
그 모든 감정 위로,
‘왜 나도 심장이 이렇게 뛰지?’
그 의문이 겹쳐올라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상황이 어딘가 익숙했다.
마치 누군가가 오래전부터 상상해온 시나리오처럼,
지나치게 매끄럽고, 정교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자신이 아니라, 그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서려던 발이 멈칫했다.
머릿속은 복잡했다.
‘혹시 내가 더 먼저 흔들린 건 아닐까?
언제부터였지?
그의 문자가 늦게 오면 서운했던 때?
그가 내 생일에 다른 약속 있다고 했을 때 울컥했던 그 순간?
그게... 질투였던 걸까?’
모든 기억이 되감기처럼 밀려왔다.
친구로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기 직전의 순간들이.
“아니야... 아니야, 말도 안 돼.”
그녀는 도망치듯 돌아섰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남자는, 우산 아래 그대로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은 채, 비를 맞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날 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뜬눈으로 새벽을 넘겼다.
창밖에선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조명도 끈 채, 휴대폰 화면만이 간헐적으로 어둠을 깼다.
그녀는 휴대폰을 열었다 닫았다.
메시지 창을 몇 번이고 눌렀다.
“...잘 들어갔어?”
손가락이 멈췄다가, 다시 뒤로가기 버튼을 눌렀다.
“미안해. 나도 놀랐어.”
다시 적다가, 지웠다.
‘아무렇지 않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할 수도 없다.’
그녀는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핸드폰을 얼굴 위로 들어 올렸다가, 다시 천천히 내려놓았다.
불 꺼진 천장은 텅 비어 있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너무 복잡했다.
‘왜 하필 그날이었을까?’
‘내가 그 얘길 해서? 그 순간을 노렸던 거야?’
‘아니, 그도 혼란스러웠던 걸까…’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심장은 가만있지 않았다.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자신도 그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온 건 아닐까 하는 낯선 가능성이었다.
언젠가 그가 말했었다.
"우리는... 진짜 친구야."
그때는 그 말이 너무 고마웠다.
다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마음을, 그에게만은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그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아니, 착각하고 있던 건 어쩌면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덮고 소리 없이 울었다.
울면서도 메시지창을 다시 열었다.
“우리... 그냥 친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입력한 후, 다시 삭제.
결국 아무 말도 보내지 못한 채, 새벽 4시를 넘겼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거울을 들여다봤다.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입술엔 핏기조차 없었다.
출근도, 연락도 하기 싫었다.
단지 누군가에게 이 감정을 설명하고 싶었다.
아니, 묻고 싶었다.
이 감정은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그녀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
길을 걷다가, 한 건물 앞에서 멈췄다.
예전에 친구가 추천해줬던 ‘심리상담소’였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이런 말을 했었다.
“내가 상담 받으러 간다고 하니까, 의외지?
근데... 누군가가 내 말 들어주는 게 은근히 도움 되더라.”
그 말에 그녀는 한동안 놀랐고, 한편으론 위로받았다.
그때가 둘이 처음 가까워졌던 계기였다.
함께 야경을 보며, 서로의 가족 이야기를 털어놓은 밤.
그는 어릴 적 부모의 이혼을 얘기했고,
그녀는 오래 앓던 조부모를 혼자 간병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상하게, 그날 이후로 둘은 ‘고장난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조심스럽게 서로를 다독이게 되었다.
그런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상담소... 그가 추천했었지.’
결국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무작정 상담소 문 앞까지 와서, 몇 번이고 돌아설까 망설이다—
문을 열었다.
“예약 안 했는데… 혹시 상담 가능할까요?”
직원이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우 선생님 계세요. 이쪽으로요.”
—
그 시각, 남자는 여전히 공원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비는 멈췄지만, 마음속 폭우는 여전했다.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었다.
사실 키스는 계획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너무 멀어지려는 순간—
더는 참을 수 없었을 뿐이다.
7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해도, 울면서 전화해도,
그는 묵묵히 옆을 지켰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자신에게 마음이 올 거라 믿었다.
하지만 전날 그녀가 말했다.
“지쳤어. 그 사람과도, 그리고... 너랑도.”
‘나랑도.’ 그 말이 가슴을 찔렀다.
그 순간, 그는 모든 걸 잃을 각오로 다가갔다.
그녀가 자신을 밀어낼 걸 알았다.
하지만 단 한 번, 그 감정을 그녀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그마저 하지 않으면, 영영 끝일 것 같아서.
—
그녀는 상담 후 집으로 돌아와
자신이 했던 말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전, 그런 감정 아니었거든요...”
그 말은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
그녀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난 그를 잃는다는 생각에 이렇게 무너질까?’
‘왜 그의 침묵이 이렇게 아플까?’
과거를 다시 떠올렸다.
한밤중 갑자기 체한 날, 아무 말 없이 죽을 사 오던 그.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울던 날, 손목을 잡고 “괜찮아”라며 웃던 그.
그의 모든 순간들이,
이제 와서 사랑처럼 되살아났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마음은 늘 말보다 느렸고,
감정은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채 자라고 있었다는 걸.
다음 날, 그녀는 핸드폰 메모장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나를 지켜온 사람이었다.
그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그걸 인정하는 게 무서웠을 뿐이다.”
—
그날 밤, 남자는 혼자 술집에 앉아 있었다.
창가 쪽 자리, 그녀와 자주 앉았던 그 자리였다.
테이블 위에는 물방울이 맺힌 맥주잔 하나뿐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녀의 연락은 없었다.
그 역시 보내지 않았다.
‘지금쯤 무슨 생각하고 있을까…
혹시 나를 미워하고 있을까?
아니면... 잠깐이라도 흔들렸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문득, 그녀가 상담소에 다녀온다는 말을 했던 걸 떠올렸다.
예전엔 가볍게 넘겼지만, 지금은 그곳이 마지막 희망처럼 느껴졌다.
‘지금 그녀 곁에 있는 건... 나 아닌 누군가겠지.’
그는 술잔을 비우고,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후회는 없어.”
—
그녀의 진심은...
그가 나를 사랑한 게 무서운 게 아니었다.
혹시… 나도 그를 사랑했을까 봐,
그게 더 무서웠다.
그런데, 더 두려운 건—
이제 그를 친구로도 부를 수 없게 될까 봐였다.
아니,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친구라는 단어 뒤에
다른 의미를 숨기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사랑은 시작되기 전에,
우정이라는 가면을 벗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원 가로등 불빛은 흐릿했고, 사람 하나 없는 벤치 옆에 두 사람이 마주 서 있었다.
남자는 검은 우산을 들고 있었고, 그녀는 비를 맞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이런 장면을 그가 미리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랬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정확하게 그녀의 상태를 읽었다.
오늘도, 마치 여기까지 흘러올 걸 예견이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처음 이 공원을 찾은 것도 그와 함께였다.
벚꽃이 피던 4월이었다. 그녀는 실연 후 무기력했고, 그는 그냥 조용히 옆에 앉아 있었다.
말없이 벤치에서 하루를 보낸 날, 그는 “시간은 원래 천천히 가야 해. 그게 정상이야.”라고 말했다.
그 순간부터였다. 그를 ‘위로’라고 받아들인 건.
그날 이후, 그들은 친구라는 이름으로 일상의 수많은 밤을 함께 보냈다.
같이 술을 마셨고, 서로의 연애 상담을 했고, 기념일에도, 심지어 생일도 함께 보냈다.
애매하게 가까운 거리.
그녀는 언젠가부터 그가 다른 여자와 있을 때 불편해졌고,
그는 그녀가 힘들다고 연락하면 언제든 달려왔다.
그러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친구니까’라는 말이 모든 경계를 지켜주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은 깨지고 있었다.
“...그만하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지쳤어. 그 사람과도, 그리고... 너랑도.”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흐린 불빛 아래 그의 눈빛은 어딘가 이상하게 고요했다.
“7년이나 친구로 지냈잖아. 우리.”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이 말로 끝날 거라 믿었다. 아니, 끝내고 싶었다.
이 감정이 더 커지기 전에, 더 이상 착각하지 않도록.
그런데 그 순간—
남자가 우산을 그녀 쪽으로 기울이며, 조용히 다가왔다.
“...잠깐만.”
그녀가 뒤로 물러설 틈도 없이,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다음 순간 입술이 닿았다.
우산 아래, 젖은 공기 속에서
키스는 조용히, 그러나 너무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녀는 처음엔 멈췄다.
심장이 쿵, 하고 울렸고
입술이 닿은 곳에 뭔가 전류처럼 번졌다.
눈을 감지도, 떼지도 못한 채 순간이 멈춰버린 듯 서 있었다.
그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그녀의 심장에도 옮겨 붙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경직된 채 그를 밀쳐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목소리는 떨렸고, 눈동자는 흔들렸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저, 눈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미쳤어? 우린 친구잖아. 7년 동안…”
그녀는 두 팔을 자신에게 감싸듯 움켜쥐었다.
혼란, 배신, 부끄러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였다.
그 모든 감정 위로,
‘왜 나도 심장이 이렇게 뛰지?’
그 의문이 겹쳐올라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상황이 어딘가 익숙했다.
마치 누군가가 오래전부터 상상해온 시나리오처럼,
지나치게 매끄럽고, 정교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자신이 아니라, 그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서려던 발이 멈칫했다.
머릿속은 복잡했다.
‘혹시 내가 더 먼저 흔들린 건 아닐까?
언제부터였지?
그의 문자가 늦게 오면 서운했던 때?
그가 내 생일에 다른 약속 있다고 했을 때 울컥했던 그 순간?
그게... 질투였던 걸까?’
모든 기억이 되감기처럼 밀려왔다.
친구로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기 직전의 순간들이.
“아니야... 아니야, 말도 안 돼.”
그녀는 도망치듯 돌아섰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남자는, 우산 아래 그대로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은 채, 비를 맞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날 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뜬눈으로 새벽을 넘겼다.
창밖에선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조명도 끈 채, 휴대폰 화면만이 간헐적으로 어둠을 깼다.
그녀는 휴대폰을 열었다 닫았다.
메시지 창을 몇 번이고 눌렀다.
“...잘 들어갔어?”
손가락이 멈췄다가, 다시 뒤로가기 버튼을 눌렀다.
“미안해. 나도 놀랐어.”
다시 적다가, 지웠다.
‘아무렇지 않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할 수도 없다.’
그녀는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핸드폰을 얼굴 위로 들어 올렸다가, 다시 천천히 내려놓았다.
불 꺼진 천장은 텅 비어 있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너무 복잡했다.
‘왜 하필 그날이었을까?’
‘내가 그 얘길 해서? 그 순간을 노렸던 거야?’
‘아니, 그도 혼란스러웠던 걸까…’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심장은 가만있지 않았다.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자신도 그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온 건 아닐까 하는 낯선 가능성이었다.
언젠가 그가 말했었다.
"우리는... 진짜 친구야."
그때는 그 말이 너무 고마웠다.
다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마음을, 그에게만은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그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아니, 착각하고 있던 건 어쩌면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덮고 소리 없이 울었다.
울면서도 메시지창을 다시 열었다.
“우리... 그냥 친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입력한 후, 다시 삭제.
결국 아무 말도 보내지 못한 채, 새벽 4시를 넘겼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거울을 들여다봤다.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입술엔 핏기조차 없었다.
출근도, 연락도 하기 싫었다.
단지 누군가에게 이 감정을 설명하고 싶었다.
아니, 묻고 싶었다.
이 감정은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그녀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
길을 걷다가, 한 건물 앞에서 멈췄다.
예전에 친구가 추천해줬던 ‘심리상담소’였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이런 말을 했었다.
“내가 상담 받으러 간다고 하니까, 의외지?
근데... 누군가가 내 말 들어주는 게 은근히 도움 되더라.”
그 말에 그녀는 한동안 놀랐고, 한편으론 위로받았다.
그때가 둘이 처음 가까워졌던 계기였다.
함께 야경을 보며, 서로의 가족 이야기를 털어놓은 밤.
그는 어릴 적 부모의 이혼을 얘기했고,
그녀는 오래 앓던 조부모를 혼자 간병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상하게, 그날 이후로 둘은 ‘고장난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조심스럽게 서로를 다독이게 되었다.
그런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상담소... 그가 추천했었지.’
결국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무작정 상담소 문 앞까지 와서, 몇 번이고 돌아설까 망설이다—
문을 열었다.
“예약 안 했는데… 혹시 상담 가능할까요?”
직원이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우 선생님 계세요. 이쪽으로요.”
—
그 시각, 남자는 여전히 공원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비는 멈췄지만, 마음속 폭우는 여전했다.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었다.
사실 키스는 계획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너무 멀어지려는 순간—
더는 참을 수 없었을 뿐이다.
7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해도, 울면서 전화해도,
그는 묵묵히 옆을 지켰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자신에게 마음이 올 거라 믿었다.
하지만 전날 그녀가 말했다.
“지쳤어. 그 사람과도, 그리고... 너랑도.”
‘나랑도.’ 그 말이 가슴을 찔렀다.
그 순간, 그는 모든 걸 잃을 각오로 다가갔다.
그녀가 자신을 밀어낼 걸 알았다.
하지만 단 한 번, 그 감정을 그녀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그마저 하지 않으면, 영영 끝일 것 같아서.
—
그녀는 상담 후 집으로 돌아와
자신이 했던 말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전, 그런 감정 아니었거든요...”
그 말은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
그녀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난 그를 잃는다는 생각에 이렇게 무너질까?’
‘왜 그의 침묵이 이렇게 아플까?’
과거를 다시 떠올렸다.
한밤중 갑자기 체한 날, 아무 말 없이 죽을 사 오던 그.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울던 날, 손목을 잡고 “괜찮아”라며 웃던 그.
그의 모든 순간들이,
이제 와서 사랑처럼 되살아났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마음은 늘 말보다 느렸고,
감정은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채 자라고 있었다는 걸.
다음 날, 그녀는 핸드폰 메모장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나를 지켜온 사람이었다.
그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그걸 인정하는 게 무서웠을 뿐이다.”
—
그날 밤, 남자는 혼자 술집에 앉아 있었다.
창가 쪽 자리, 그녀와 자주 앉았던 그 자리였다.
테이블 위에는 물방울이 맺힌 맥주잔 하나뿐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녀의 연락은 없었다.
그 역시 보내지 않았다.
‘지금쯤 무슨 생각하고 있을까…
혹시 나를 미워하고 있을까?
아니면... 잠깐이라도 흔들렸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문득, 그녀가 상담소에 다녀온다는 말을 했던 걸 떠올렸다.
예전엔 가볍게 넘겼지만, 지금은 그곳이 마지막 희망처럼 느껴졌다.
‘지금 그녀 곁에 있는 건... 나 아닌 누군가겠지.’
그는 술잔을 비우고,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후회는 없어.”
—
그녀의 진심은...
그가 나를 사랑한 게 무서운 게 아니었다.
혹시… 나도 그를 사랑했을까 봐,
그게 더 무서웠다.
그런데, 더 두려운 건—
이제 그를 친구로도 부를 수 없게 될까 봐였다.
아니,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친구라는 단어 뒤에
다른 의미를 숨기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사랑은 시작되기 전에,
우정이라는 가면을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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