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 4화 그날 밤, 그는 울고 있었다
조회 : 20 추천 : 0 글자수 : 5,175 자 2025-12-11
리포트 파일명: [Case_Y23-HJ3] 감정 기울기 구조 분석
작성자: 상담사 지우
“감정은 언제나 균형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실제 관계를 움직이는 건, 기울기다.”
지우는 노트북 화면에 타이핑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유리창을 한 번 툭 치고 지나갔다.
‘윤서’라는 이름은 리포트에서 다섯 번째 등장 중이었다.
관계는 상호작용이 아니다.
그것은 두 개의 독립된 감정이 만든 무게중심이며,
감정의 ‘흐름’보다 중요한 건, 그 흐름이 어디로 기울어졌는가이다.
지우는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따뜻한 잔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오늘 내담자의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감정의 기울기가 크면 클수록, 상대방은
타인의 감정까지 설계하려는 충동에 빠진다.
그것이 다정이라는 이름을 가질 때,
피해자는 끝까지 '보호받고 있다'고 착각한다.
지우는 마침표 하나를 찍고, 커서를 잠시 멈췄다.
그리고 한 문장을 덧붙였다.
“감정은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노트북을 덮었다.
조만간 윤서에게 이 말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윤서의 기억은, 아직 '기억의 편집자'가 누구인지 모른 채
그저 슬픈 이야기 속에서 머무르고 있었으니까.
창밖엔 아직 빗소리가 남아 있었다.
마치 그날 밤, 누군가의 울음처럼.
“그 사람 얘기를 하다 보니… 문득 그때 생각이 나더라고요.”
윤서는 천천히 시선을 낮추며 말을 잇는다.
창밖에서 빗소리가 잦아들고, 상담실 안은 마치 시간도 고여 있는 듯 고요하다.
“그 사람은, 제가 전 남자친구랑 사귀던 시절에도 늘 옆에 있었어요.
늘…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편하게.”
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윤서는 생각을 더듬듯,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연애가 처음엔 좋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가 줄었어요.
그 사람… 아니, 전 남친이 갑자기 차가워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냥, 점점…”
그녀는 단어를 고르다 말고 짧게 한숨을 쉰다.
“…내가 혼자 말하고, 혼자 듣는 느낌이랄까.
근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하진이랑은 대화가 잘 됐어요.”
그녀의 눈은 창밖을 바라보지만, 시선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자취방 이사하던 날, 남자친구는 바쁘다고 못 왔는데
하진은 일 끝나고 와서 박스 정리 다 도와줬어요.
밤새 라면 끓여주고, 거실에서 같이 졸다가 갔죠.”
그 장면을 떠올리는 듯 윤서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인다.
“그게 고마웠어요.
그 사람은 날 돕는 데 익숙했거든요.
기대도 안 했는데, 늘 거기 있었어요.”
지우는 노트에 무언가를 조용히 적는다.
그 소리만이 방 안의 유일한 움직임이다.
“그리고 어느 날, 생리통 때문에 쓰러졌을 때도
남자친구는 전화만 했는데, 하진은 무작정 찾아왔어요.
죽 사 오고, 약 챙겨주고… 말없이 옆에만 있었죠.”
그때 윤서의 눈에 감정이 스친다.
감사의 미소 같은 것도, 그리움도 아니다.
오히려… 혼란에 가까운 빛.
“그땐 그냥… 그런 게 고마웠어요.
누군가 날 신경 써주는 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작게 덧붙인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친구가 할 수 있는 선이었을까요?”
지우의 손끝이 노트 위에서 멈춘다.
윤서의 혼잣말은 마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같았다.
“나는… 그 사람에게 경계란 걸 한 번도 친 적이 없었어요.
아니, 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냥… 편했으니까.”
그 마지막 말엔 약간의 후회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 후회는, 다음 절에서 점점 감정의 실체로 변모한다.
“혹시 그때, 하진 씨와 당신 남자친구 사이에 대화가 오간 적은 없었나요?”
지우의 질문은 마치 수면 위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조용했지만,
그 물결은 생각보다 깊은 곳에서부터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 둘이요?”
윤서는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표정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기억을 더듬는 사람의 것.
“글쎄요… 같이 밥 먹은 적도 몇 번은 있었어요.
하진이 워낙 다정하고 무던한 편이라,
남자친구도 특별히 싫어하지 않았던 것 같고요.”
“그럼, 하진 씨가 그분에게 당신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가능성은요?”
그 말에 윤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그건… 글쎄요. 전, 그 사람 앞에서 제 이야기를 거의 안 했는데.”
지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람 앞”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묻지 않아도 알았다.
“그때는 그냥, 연애가 잘 안 되는 게 제 탓인 줄 알았어요.
성격이 맞지 않거나, 제가 더 무심하거나…”
윤서는 문장을 흐리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하진이 저와 전 남자친구 사이의 균열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어떻게 말로 설명은 안 되는데…
그 사람, 이상하게 그 타이밍에만 나타났거든요.”
지우는 조용히 노트를 덮는다.
지금은 기록보다 대화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다.
“혹시 그 시기에, 하진 씨가 했던 말 중에서
이상하거나, 지금 떠올리면 섬뜩했던 장면은 없었나요?”
윤서는 잠시 침묵한다.
그리고는 아주 조용히, 마치 꿈속에서 주운 조각처럼 꺼낸다.
“술자리에서, 전 남자친구가 그런 말을 한 적 있어요.”
“하진이 그러더라.
‘너랑 있는 윤서가, 뭔가 불안해 보인다’고.”
지우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그 말을, 전 남친에게 처음 들었을 땐
그냥 하진이 제 걱정을 해줬구나… 정도로만 넘겼는데…”
윤서는 다시 시선을 허공에 둔다.
거기엔 과거도, 현재도 없다.
오직 ‘그날의 말’만이 잔상처럼 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슬퍼할 타이밍을, 그 사람은 항상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윤서가 가장 무서워하는 순간이 된다.
“기억나요.
정확하진 않지만…
그날이, 그 사람과 전 남자친구가 함께 술 마셨던 날이었어요.”
윤서의 목소리는 아스라이 멀어진다.
지우는 말없이 기다린다.
윤서가 돌아보고 있는 장면은 지금 이 방보다 훨씬 오래되고, 훨씬 무거운 공간이다.
“하진이 먼저 연락했어요.
‘지금 혹시 괜찮냐’고.
술 마시고 나오는 길인데, 근처니까 얼굴만 보자고.”
윤서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기억은 흔히, 그때의 날씨를 함께 데려온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왔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편의점 앞이었어요.
그 사람은 맥주 하나 들고 있었고,
저는 따뜻한 음료만 샀죠.
그냥 잠깐 얼굴만 보려고 했는데…”
윤서의 말이 잠시 멈췄다.
숨소리가 조금 더 깊어졌다.
“하진이, 그날… 울었어요.”
지우가 처음으로 눈썹을 살짝 찡그린다.
“울었다고요?”
“네.
처음엔 잘 몰랐어요.
그 사람이 조용히 고개 숙이고 있어서,
비 때문인 줄 알았어요.
근데 가까이 가보니까…
볼에 맺힌 게, 빗물이 아니었어요.”
지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윤서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꼭 쥐었다.
“제가 물었어요. 무슨 일이냐고.
근데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고개만 저었어요.
‘별일 아니야. 그냥, 취했나 봐’… 그렇게 말하면서도, 계속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윤서는 그날의 공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눈동자, 말없이 떨리는 어깨,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전한 어설픈 위로의 말까지.
“그땐…
그 사람이 제가 힘들어하는 걸 너무 잘 알아서
대신 아파주는 줄 알았어요.
정말… 그런 줄 알았어요.”
말 끝이 떨린다.
지우는 노트를 덮는다.
“근데 지금 생각하면,
왜 그날 그렇게 울었던 걸까…
전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지우는 속으로 생각한다.
‘감정의 진짜 이유는, 당사자도 모를 때가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대개, 이미 오래전에 정해져 있다.’
그리고 곧, 윤서의 마지막 말이 이어진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 정말 그 사람이 절 지켜준다고 생각했어요.”
윤서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전 남자친구랑 사이가 서서히 멀어지고 있을 때,
하진은 항상 제가 가장 외로운 타이밍에 나타났거든요.”
지우는 눈길을 들어 윤서를 바라본다.
그 말에는 아직도 미련인지, 자책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의 잔향이 묻어 있었다.
“말 안 해도 알아줬고요.
딱히 말하지 않아도, 제가 뭘 원할지 다 맞췄어요.”
“정말, 우연 같았나요?”
지우의 질문에 윤서는 조금 멈칫했다.
“…그땐 그냥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이 사람은 날 이해해주는구나.’
그렇게요.”
지우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런 우연이 반복되면, 그건 아마… 설계일 수도 있어요.”
윤서는 당황한 눈빛으로 지우를 바라본다.
그러나 지우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도,
제가 전 남자친구와 다툰 날이면 꼭 문자가 왔어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어?’ 같은.”
윤서는 그 말을 하며 스스로 놀라는 듯 고개를 흔든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제가 그 사람한테 제 연애 얘기를 늘 한 것도 아닌데.”
지우는 속으로 혼잣말처럼 읊는다.
'감정의 진입은, 정보보다 감각으로 먼저 침투된다.'
“가끔은, 제가 그의 연애 대상이 아니라
관찰 대상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 말은 처음으로 윤서 스스로 입 밖으로 꺼낸
감정의 낯섦에 대한 자각이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제가 슬퍼질 타이밍을 항상 먼저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이상하죠.”
지우는 말없이 윤서를 바라본다.
윤서의 말은 점점 더 조심스러워지지만,
그 안에 담긴 불안의 결은 오히려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요…”
윤서가 문득 시선을 들었다.
지우의 눈동자에 조심스레 닿는 말투였다.
“제가 슬퍼질 타이밍을 항상 알고 있었어요.”
지우는 반응을 멈춘다.
말을 곱씹는다.
윤서는 계속 이어간다.
“정확했어요.
혼자 울다가 전화를 받은 적도 많았고,
말도 안 되게 외롭던 밤에 그 사람한테서 ‘밥은 먹었냐’는 문자가 왔었죠.”
잠시, 상담실이 정적에 잠긴다.
윤서는 아주 작게 웃으며, 스스로도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땐 그냥, 저랑 정말 잘 맞는 줄 알았어요.
그 사람은 늘, 제가 필요한 순간에만 있었으니까.
그게 좋았죠.”
지우는 노트에 천천히 한 문장을 적는다.
‘감정 개입은 흔히, 위로라는 가면을 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항상 제가 먼저 망가질 때까지 기다린 것 같기도 해요.”
그 말에, 지우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
“그 순간에만 다정했어요.
늘 그런 건 아니었고…
그냥, 제가 약해졌을 때만.”
윤서의 말은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우는 이해한다.
그건 감정이 뚫리는 지점이었다.
지우 (속마음):
“감정에 들어온다는 건,
상대의 삶을 몰래 편집하는 일과 같다.
위로는 순간이지만,
감정의 편집은 지속된다.
그리고…
편집된 기억은 언젠가, 진실을 파괴한다.”
윤서는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군다.
이제서야 자신이 어디까지 허용했는지를 돌아보려는 사람처럼.
지우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무언가가 시작되었다는 직감과 함께.
작성자: 상담사 지우
“감정은 언제나 균형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실제 관계를 움직이는 건, 기울기다.”
지우는 노트북 화면에 타이핑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유리창을 한 번 툭 치고 지나갔다.
‘윤서’라는 이름은 리포트에서 다섯 번째 등장 중이었다.
관계는 상호작용이 아니다.
그것은 두 개의 독립된 감정이 만든 무게중심이며,
감정의 ‘흐름’보다 중요한 건, 그 흐름이 어디로 기울어졌는가이다.
지우는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따뜻한 잔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오늘 내담자의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감정의 기울기가 크면 클수록, 상대방은
타인의 감정까지 설계하려는 충동에 빠진다.
그것이 다정이라는 이름을 가질 때,
피해자는 끝까지 '보호받고 있다'고 착각한다.
지우는 마침표 하나를 찍고, 커서를 잠시 멈췄다.
그리고 한 문장을 덧붙였다.
“감정은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노트북을 덮었다.
조만간 윤서에게 이 말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윤서의 기억은, 아직 '기억의 편집자'가 누구인지 모른 채
그저 슬픈 이야기 속에서 머무르고 있었으니까.
창밖엔 아직 빗소리가 남아 있었다.
마치 그날 밤, 누군가의 울음처럼.
“그 사람 얘기를 하다 보니… 문득 그때 생각이 나더라고요.”
윤서는 천천히 시선을 낮추며 말을 잇는다.
창밖에서 빗소리가 잦아들고, 상담실 안은 마치 시간도 고여 있는 듯 고요하다.
“그 사람은, 제가 전 남자친구랑 사귀던 시절에도 늘 옆에 있었어요.
늘…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편하게.”
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윤서는 생각을 더듬듯,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연애가 처음엔 좋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가 줄었어요.
그 사람… 아니, 전 남친이 갑자기 차가워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냥, 점점…”
그녀는 단어를 고르다 말고 짧게 한숨을 쉰다.
“…내가 혼자 말하고, 혼자 듣는 느낌이랄까.
근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하진이랑은 대화가 잘 됐어요.”
그녀의 눈은 창밖을 바라보지만, 시선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자취방 이사하던 날, 남자친구는 바쁘다고 못 왔는데
하진은 일 끝나고 와서 박스 정리 다 도와줬어요.
밤새 라면 끓여주고, 거실에서 같이 졸다가 갔죠.”
그 장면을 떠올리는 듯 윤서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인다.
“그게 고마웠어요.
그 사람은 날 돕는 데 익숙했거든요.
기대도 안 했는데, 늘 거기 있었어요.”
지우는 노트에 무언가를 조용히 적는다.
그 소리만이 방 안의 유일한 움직임이다.
“그리고 어느 날, 생리통 때문에 쓰러졌을 때도
남자친구는 전화만 했는데, 하진은 무작정 찾아왔어요.
죽 사 오고, 약 챙겨주고… 말없이 옆에만 있었죠.”
그때 윤서의 눈에 감정이 스친다.
감사의 미소 같은 것도, 그리움도 아니다.
오히려… 혼란에 가까운 빛.
“그땐 그냥… 그런 게 고마웠어요.
누군가 날 신경 써주는 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작게 덧붙인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친구가 할 수 있는 선이었을까요?”
지우의 손끝이 노트 위에서 멈춘다.
윤서의 혼잣말은 마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같았다.
“나는… 그 사람에게 경계란 걸 한 번도 친 적이 없었어요.
아니, 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냥… 편했으니까.”
그 마지막 말엔 약간의 후회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 후회는, 다음 절에서 점점 감정의 실체로 변모한다.
“혹시 그때, 하진 씨와 당신 남자친구 사이에 대화가 오간 적은 없었나요?”
지우의 질문은 마치 수면 위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조용했지만,
그 물결은 생각보다 깊은 곳에서부터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 둘이요?”
윤서는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표정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기억을 더듬는 사람의 것.
“글쎄요… 같이 밥 먹은 적도 몇 번은 있었어요.
하진이 워낙 다정하고 무던한 편이라,
남자친구도 특별히 싫어하지 않았던 것 같고요.”
“그럼, 하진 씨가 그분에게 당신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가능성은요?”
그 말에 윤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그건… 글쎄요. 전, 그 사람 앞에서 제 이야기를 거의 안 했는데.”
지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람 앞”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묻지 않아도 알았다.
“그때는 그냥, 연애가 잘 안 되는 게 제 탓인 줄 알았어요.
성격이 맞지 않거나, 제가 더 무심하거나…”
윤서는 문장을 흐리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하진이 저와 전 남자친구 사이의 균열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어떻게 말로 설명은 안 되는데…
그 사람, 이상하게 그 타이밍에만 나타났거든요.”
지우는 조용히 노트를 덮는다.
지금은 기록보다 대화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다.
“혹시 그 시기에, 하진 씨가 했던 말 중에서
이상하거나, 지금 떠올리면 섬뜩했던 장면은 없었나요?”
윤서는 잠시 침묵한다.
그리고는 아주 조용히, 마치 꿈속에서 주운 조각처럼 꺼낸다.
“술자리에서, 전 남자친구가 그런 말을 한 적 있어요.”
“하진이 그러더라.
‘너랑 있는 윤서가, 뭔가 불안해 보인다’고.”
지우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그 말을, 전 남친에게 처음 들었을 땐
그냥 하진이 제 걱정을 해줬구나… 정도로만 넘겼는데…”
윤서는 다시 시선을 허공에 둔다.
거기엔 과거도, 현재도 없다.
오직 ‘그날의 말’만이 잔상처럼 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슬퍼할 타이밍을, 그 사람은 항상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윤서가 가장 무서워하는 순간이 된다.
“기억나요.
정확하진 않지만…
그날이, 그 사람과 전 남자친구가 함께 술 마셨던 날이었어요.”
윤서의 목소리는 아스라이 멀어진다.
지우는 말없이 기다린다.
윤서가 돌아보고 있는 장면은 지금 이 방보다 훨씬 오래되고, 훨씬 무거운 공간이다.
“하진이 먼저 연락했어요.
‘지금 혹시 괜찮냐’고.
술 마시고 나오는 길인데, 근처니까 얼굴만 보자고.”
윤서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기억은 흔히, 그때의 날씨를 함께 데려온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왔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편의점 앞이었어요.
그 사람은 맥주 하나 들고 있었고,
저는 따뜻한 음료만 샀죠.
그냥 잠깐 얼굴만 보려고 했는데…”
윤서의 말이 잠시 멈췄다.
숨소리가 조금 더 깊어졌다.
“하진이, 그날… 울었어요.”
지우가 처음으로 눈썹을 살짝 찡그린다.
“울었다고요?”
“네.
처음엔 잘 몰랐어요.
그 사람이 조용히 고개 숙이고 있어서,
비 때문인 줄 알았어요.
근데 가까이 가보니까…
볼에 맺힌 게, 빗물이 아니었어요.”
지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윤서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꼭 쥐었다.
“제가 물었어요. 무슨 일이냐고.
근데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고개만 저었어요.
‘별일 아니야. 그냥, 취했나 봐’… 그렇게 말하면서도, 계속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윤서는 그날의 공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눈동자, 말없이 떨리는 어깨,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전한 어설픈 위로의 말까지.
“그땐…
그 사람이 제가 힘들어하는 걸 너무 잘 알아서
대신 아파주는 줄 알았어요.
정말… 그런 줄 알았어요.”
말 끝이 떨린다.
지우는 노트를 덮는다.
“근데 지금 생각하면,
왜 그날 그렇게 울었던 걸까…
전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지우는 속으로 생각한다.
‘감정의 진짜 이유는, 당사자도 모를 때가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대개, 이미 오래전에 정해져 있다.’
그리고 곧, 윤서의 마지막 말이 이어진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 정말 그 사람이 절 지켜준다고 생각했어요.”
윤서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전 남자친구랑 사이가 서서히 멀어지고 있을 때,
하진은 항상 제가 가장 외로운 타이밍에 나타났거든요.”
지우는 눈길을 들어 윤서를 바라본다.
그 말에는 아직도 미련인지, 자책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의 잔향이 묻어 있었다.
“말 안 해도 알아줬고요.
딱히 말하지 않아도, 제가 뭘 원할지 다 맞췄어요.”
“정말, 우연 같았나요?”
지우의 질문에 윤서는 조금 멈칫했다.
“…그땐 그냥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이 사람은 날 이해해주는구나.’
그렇게요.”
지우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런 우연이 반복되면, 그건 아마… 설계일 수도 있어요.”
윤서는 당황한 눈빛으로 지우를 바라본다.
그러나 지우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도,
제가 전 남자친구와 다툰 날이면 꼭 문자가 왔어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어?’ 같은.”
윤서는 그 말을 하며 스스로 놀라는 듯 고개를 흔든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제가 그 사람한테 제 연애 얘기를 늘 한 것도 아닌데.”
지우는 속으로 혼잣말처럼 읊는다.
'감정의 진입은, 정보보다 감각으로 먼저 침투된다.'
“가끔은, 제가 그의 연애 대상이 아니라
관찰 대상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 말은 처음으로 윤서 스스로 입 밖으로 꺼낸
감정의 낯섦에 대한 자각이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제가 슬퍼질 타이밍을 항상 먼저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이상하죠.”
지우는 말없이 윤서를 바라본다.
윤서의 말은 점점 더 조심스러워지지만,
그 안에 담긴 불안의 결은 오히려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요…”
윤서가 문득 시선을 들었다.
지우의 눈동자에 조심스레 닿는 말투였다.
“제가 슬퍼질 타이밍을 항상 알고 있었어요.”
지우는 반응을 멈춘다.
말을 곱씹는다.
윤서는 계속 이어간다.
“정확했어요.
혼자 울다가 전화를 받은 적도 많았고,
말도 안 되게 외롭던 밤에 그 사람한테서 ‘밥은 먹었냐’는 문자가 왔었죠.”
잠시, 상담실이 정적에 잠긴다.
윤서는 아주 작게 웃으며, 스스로도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땐 그냥, 저랑 정말 잘 맞는 줄 알았어요.
그 사람은 늘, 제가 필요한 순간에만 있었으니까.
그게 좋았죠.”
지우는 노트에 천천히 한 문장을 적는다.
‘감정 개입은 흔히, 위로라는 가면을 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항상 제가 먼저 망가질 때까지 기다린 것 같기도 해요.”
그 말에, 지우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
“그 순간에만 다정했어요.
늘 그런 건 아니었고…
그냥, 제가 약해졌을 때만.”
윤서의 말은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우는 이해한다.
그건 감정이 뚫리는 지점이었다.
지우 (속마음):
“감정에 들어온다는 건,
상대의 삶을 몰래 편집하는 일과 같다.
위로는 순간이지만,
감정의 편집은 지속된다.
그리고…
편집된 기억은 언젠가, 진실을 파괴한다.”
윤서는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군다.
이제서야 자신이 어디까지 허용했는지를 돌아보려는 사람처럼.
지우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무언가가 시작되었다는 직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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