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 5화 “설레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조회 : 39 추천 : 0 글자수 : 4,426 자 2025-12-12
“그땐 진짜 몰랐어요.
아니, 몰랐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윤서가 문득 고개를 떨군다.
지우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시선을 내려다본다.
대답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윤서는 계속 말한다.
“그냥... 항상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어요.
늘 똑같은 시간에 연락 오고,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궁금할 일도 없고,
마치... 공기처럼요.”
잠시 정적이 흐른다.
윤서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쉰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또렷하게 덧붙인다.
“그 사람을 좋아하진 않았어요.
설레지도 않았고,
가슴이 뛰거나, 얼굴이 붉어지거나…
그런 건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편했어요.”
지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말의 무게를 잘 안다는 듯이.
“편안함은 사랑이 아니란 걸…
그땐 몰랐어요.
그러니까, 설레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사랑이 꼭 불타야 하나요?
잔잔한 것도 좋다고,
주변에선 다들 그렇게 말했으니까...”
지우는 노트에 한 문장을 적는다.
그녀의 손끝은 부드럽지만, 적는 문장은 단단하다.
‘편안함은 때때로, 자기감정에 무지한 이가 가장 선호하는 감정 구조다.’
윤서가 다시 입을 연다.
“그러다 보니… 그 사람이 없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어요.
너무 당연하게, 그 자리에 있을 거라 믿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와서 그 사람이 날 좋아했다면,
그 모든 순간들이 다 뒤틀려 버리는 거예요.”
지우는 고개를 들고 윤서의 눈을 바라본다.
“그게 지금, 가장 혼란스러운 부분이죠?”
윤서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편했거든요.
그냥, 그랬어요.
하지만 그 편안함이…
지금은 왜 이렇게,
무서운지 모르겠어요.”
지우는 잠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침묵은 무례하지 않았다.
오히려, 윤서의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것처럼 따뜻했다.
그리고 이윽고,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편안함은, 누구에게 더 유익했을까요?”
윤서가 멍하니 지우를 바라본다.
지우의 눈빛은 차갑지 않았지만, 그 안엔 선명한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윤서 씨에게 그 관계는 부담 없고, 평온한 거였죠.
하지만 하진 씨는 어땠을까요?”
윤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을 조금 열었다가, 닫았다.
“감정은요, 나눠 갖는 게 아니에요.
언제나 누가 더 감당했는지가 중요하거든요.”
지우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무언가를 그리는 듯, 원을 그리고 멈췄다.
“같은 대화, 같은 기억, 같은 시간이라 해도
그 무게는 사람마다 전혀 다릅니다.”
윤서가 마른침을 삼킨다.
“하진 씨가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건,
당연해서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그가 감당하고 있었던 거죠.
윤서 씨가 모르는 감정의 무게들을.”
윤서가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그 말이 뼈처럼 박힌다.
“그걸 이제야 깨달은 제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건 아닐까요?”
지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기심이 아니에요.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편한 방식으로 감정을 해석하거든요.
다만, 그 해석이 한 사람만을 편하게 했을 때—
그 순간부터, 감정의 책임은 기울기 시작합니다.”
윤서는 어렴풋이 그 말을 이해했지만,
곧바로 수긍하지는 못했다.
아니, 수긍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 사람, 예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윤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넌 그냥 내 옆에 있어주면 돼. 나는 그걸로 충분해.’”
지우는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를 묻지 않았다.
그보다, 윤서가 그 말을 지금 이 순간에 떠올렸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땐요, 정말... 고마웠어요.
내가 뭔가를 해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주는 느낌이었거든요.”
윤서는 잠시 웃었다.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죠?”
지우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윤서는 그 고개 끄덕임이 동의인지, 이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 말이 너무... 완결적이었달까.
‘그냥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된다’는 말이,
사실은 제가 뭘 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이상은 하지 말라’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왜 그렇게 느끼셨나요?”
지우의 물음은 단순했다.
그러나 그 안엔 감정을 풀어내는 도구가 섬세하게 숨겨져 있었다.
윤서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정확하게 답했다.
“그 사람은, 늘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어요.
제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말을 할지.
그래서 전 점점, 제 방식대로 행동하는 법을 잊어버렸던 것 같아요.”
그 말은 윤서 자신에게도 처음 내보인 자각이었다.
“그래서, 그때 ‘옆에 있어만 줘도 된다’는 말이,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사라져도 괜찮다는 뜻처럼 들리는 거예요.
있는 듯 없는 듯, 그의 무대 배경처럼…”
지우는 끝까지 말을 자르지 않았다.
윤서가 감정의 저편을 스스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말의 결을 따라갔다.
“그땐 설레진 않았지만, 편했거든요.
근데 그 편안함이… 그 사람한테는 어떤 감정이었을지,
이제야 궁금해지네요.”
“하나 더 있어요. 그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지금 떠오르는 일이 있어요.”
윤서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듯, 천천히 말했다.
“예전에 남자친구랑 크게 싸운 적이 있었어요.
그날은… 정말 속상해서 누구한테도 말 안 하고, 그냥 집에 들어갔거든요.”
지우는 말없이 윤서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말을 이어가도 좋다’는 침묵의 수신이었다.
“근데요.
자취방 앞에 도착했는데… 그 사람이 있었어요.
하진이.”
윤서는 잠시 말을 멈췄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이어갔다.
“문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어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는데, 우산도 없이.”
“…연락은요?”
“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그날 싸운 얘기도 누구한테 말한 적 없었고요.”
지우는 시선을 내리고, 다시 윤서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그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그땐… 그냥 감동했어요.
‘어떻게 알았지?’, ‘기다려줬구나’ 싶었고요.”
윤서는 살짝 웃었지만, 그 웃음엔 명확한 균열이 있었다.
“근데 지금은…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면, 이상해요.
제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고 왔을까요?”
“혹시, 평소에도 그런 일이 종종 있었나요?”
“그땐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사람은 제가 힘든 날엔 이상하게,
언제나 먼저 연락이 오거나, 집 앞에 있거나…
항상 먼저 와 있었어요.”
지우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윤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땐 그런 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날 잘 아는 거, 말 안 해도 느끼는 거…”
윤서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런데,
그건 제가 허용한 것도, 요청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지켜준다는 건, 결국 어디까지가 배려고 어디까지가 침범일까요?”
윤서의 말이었다.
지우는 고개를 살짝 젖힌 채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윤서 씨는 그분이 당신의 ‘최후의 편’이라고 믿었죠.”
“…네.
모두가 등을 돌려도, 그 사람만은 내 편일 거라고…”
윤서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 믿음이 지금은 얼마나 허약한 근거 위에 있었는지를,
자신도 이제 조금씩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우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신이 ‘힘들어할 때’ 항상 나타난 게 아니라,
당신의 ‘모든 틈’을 예감처럼 알고 있었어요.
그건 단순한 공감이 아니에요.”
“…그럼, 뭐였을까요?”
“감정은 보통, 함께 쌓이죠.
하지만 그분은 당신이 인식하지 못한 순간에도 이미 당신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조용하게, 당신을 중심으로.”
윤서는 입을 다물었다.
마치 말할수록 더 많은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윤서 씨는 그분이 당신의 감정을 ‘받아준 존재’라고 생각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사실은…
그는 계속해서 당신의 삶에 개입해온 사람이에요.
당신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요.”
지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지만,
그 안에 담긴 진단은 단호하고 선명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을 사랑이라 착각하지만,
그건 때때로, 상대의 삶을 감시해온 결과일 수도 있어요.”
윤서는 숨을 삼켰다.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천천히 떨구었다.
윤서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손끝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리듯 치며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제가 누구랑 대화했는지도 알고 있었어요.
어디서 만났는지, 언제 통화했는지까지도.”
지우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처음엔 그냥…
우연인가 싶었어요.
제가 말한 적이 없는데, 친구 얘기를 꺼낸다거나,
제가 갔던 카페를 알고 있다거나.”
윤서의 목소리는 아슬아슬했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그 마지막 끈 위에 올라선 감정.
“그때는…
그게 신기했어요.
‘어떻게 알았지? 대단하다.’
그런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 와서 보니까,
그건 그냥… 제가 바보였던 거죠.”
지우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으로 짧은 문장을 되뇌었다.
“사랑이 통제로 흘러갈 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건
‘말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 믿었던 자신감’이다.”
지우는 윤서의 고백에서 감정 통제의 뿌리를 읽고 있었다.
그 통제는 폭력적이지 않았다.
대신, 너무 자연스러워서 무서웠다.
관심처럼, 걱정처럼, 그리고… 사랑처럼 가장된 조율.
“그 사람,
제가 누구를 좋아했는지도 알았어요.
아무 말 안 했는데도요.”
윤서의 고백은,
마치 ‘내 감정이 내 것이 아니었다’는 자각처럼 들렸다.
아니, 몰랐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윤서가 문득 고개를 떨군다.
지우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시선을 내려다본다.
대답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윤서는 계속 말한다.
“그냥... 항상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어요.
늘 똑같은 시간에 연락 오고,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궁금할 일도 없고,
마치... 공기처럼요.”
잠시 정적이 흐른다.
윤서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쉰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또렷하게 덧붙인다.
“그 사람을 좋아하진 않았어요.
설레지도 않았고,
가슴이 뛰거나, 얼굴이 붉어지거나…
그런 건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편했어요.”
지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말의 무게를 잘 안다는 듯이.
“편안함은 사랑이 아니란 걸…
그땐 몰랐어요.
그러니까, 설레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사랑이 꼭 불타야 하나요?
잔잔한 것도 좋다고,
주변에선 다들 그렇게 말했으니까...”
지우는 노트에 한 문장을 적는다.
그녀의 손끝은 부드럽지만, 적는 문장은 단단하다.
‘편안함은 때때로, 자기감정에 무지한 이가 가장 선호하는 감정 구조다.’
윤서가 다시 입을 연다.
“그러다 보니… 그 사람이 없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어요.
너무 당연하게, 그 자리에 있을 거라 믿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와서 그 사람이 날 좋아했다면,
그 모든 순간들이 다 뒤틀려 버리는 거예요.”
지우는 고개를 들고 윤서의 눈을 바라본다.
“그게 지금, 가장 혼란스러운 부분이죠?”
윤서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편했거든요.
그냥, 그랬어요.
하지만 그 편안함이…
지금은 왜 이렇게,
무서운지 모르겠어요.”
지우는 잠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침묵은 무례하지 않았다.
오히려, 윤서의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것처럼 따뜻했다.
그리고 이윽고,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편안함은, 누구에게 더 유익했을까요?”
윤서가 멍하니 지우를 바라본다.
지우의 눈빛은 차갑지 않았지만, 그 안엔 선명한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윤서 씨에게 그 관계는 부담 없고, 평온한 거였죠.
하지만 하진 씨는 어땠을까요?”
윤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을 조금 열었다가, 닫았다.
“감정은요, 나눠 갖는 게 아니에요.
언제나 누가 더 감당했는지가 중요하거든요.”
지우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무언가를 그리는 듯, 원을 그리고 멈췄다.
“같은 대화, 같은 기억, 같은 시간이라 해도
그 무게는 사람마다 전혀 다릅니다.”
윤서가 마른침을 삼킨다.
“하진 씨가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건,
당연해서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그가 감당하고 있었던 거죠.
윤서 씨가 모르는 감정의 무게들을.”
윤서가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그 말이 뼈처럼 박힌다.
“그걸 이제야 깨달은 제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건 아닐까요?”
지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기심이 아니에요.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편한 방식으로 감정을 해석하거든요.
다만, 그 해석이 한 사람만을 편하게 했을 때—
그 순간부터, 감정의 책임은 기울기 시작합니다.”
윤서는 어렴풋이 그 말을 이해했지만,
곧바로 수긍하지는 못했다.
아니, 수긍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 사람, 예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윤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넌 그냥 내 옆에 있어주면 돼. 나는 그걸로 충분해.’”
지우는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를 묻지 않았다.
그보다, 윤서가 그 말을 지금 이 순간에 떠올렸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땐요, 정말... 고마웠어요.
내가 뭔가를 해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주는 느낌이었거든요.”
윤서는 잠시 웃었다.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죠?”
지우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윤서는 그 고개 끄덕임이 동의인지, 이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 말이 너무... 완결적이었달까.
‘그냥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된다’는 말이,
사실은 제가 뭘 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이상은 하지 말라’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왜 그렇게 느끼셨나요?”
지우의 물음은 단순했다.
그러나 그 안엔 감정을 풀어내는 도구가 섬세하게 숨겨져 있었다.
윤서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정확하게 답했다.
“그 사람은, 늘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어요.
제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말을 할지.
그래서 전 점점, 제 방식대로 행동하는 법을 잊어버렸던 것 같아요.”
그 말은 윤서 자신에게도 처음 내보인 자각이었다.
“그래서, 그때 ‘옆에 있어만 줘도 된다’는 말이,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사라져도 괜찮다는 뜻처럼 들리는 거예요.
있는 듯 없는 듯, 그의 무대 배경처럼…”
지우는 끝까지 말을 자르지 않았다.
윤서가 감정의 저편을 스스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말의 결을 따라갔다.
“그땐 설레진 않았지만, 편했거든요.
근데 그 편안함이… 그 사람한테는 어떤 감정이었을지,
이제야 궁금해지네요.”
“하나 더 있어요. 그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지금 떠오르는 일이 있어요.”
윤서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듯, 천천히 말했다.
“예전에 남자친구랑 크게 싸운 적이 있었어요.
그날은… 정말 속상해서 누구한테도 말 안 하고, 그냥 집에 들어갔거든요.”
지우는 말없이 윤서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말을 이어가도 좋다’는 침묵의 수신이었다.
“근데요.
자취방 앞에 도착했는데… 그 사람이 있었어요.
하진이.”
윤서는 잠시 말을 멈췄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이어갔다.
“문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어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는데, 우산도 없이.”
“…연락은요?”
“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그날 싸운 얘기도 누구한테 말한 적 없었고요.”
지우는 시선을 내리고, 다시 윤서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그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그땐… 그냥 감동했어요.
‘어떻게 알았지?’, ‘기다려줬구나’ 싶었고요.”
윤서는 살짝 웃었지만, 그 웃음엔 명확한 균열이 있었다.
“근데 지금은…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면, 이상해요.
제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고 왔을까요?”
“혹시, 평소에도 그런 일이 종종 있었나요?”
“그땐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사람은 제가 힘든 날엔 이상하게,
언제나 먼저 연락이 오거나, 집 앞에 있거나…
항상 먼저 와 있었어요.”
지우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윤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땐 그런 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날 잘 아는 거, 말 안 해도 느끼는 거…”
윤서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런데,
그건 제가 허용한 것도, 요청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지켜준다는 건, 결국 어디까지가 배려고 어디까지가 침범일까요?”
윤서의 말이었다.
지우는 고개를 살짝 젖힌 채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윤서 씨는 그분이 당신의 ‘최후의 편’이라고 믿었죠.”
“…네.
모두가 등을 돌려도, 그 사람만은 내 편일 거라고…”
윤서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 믿음이 지금은 얼마나 허약한 근거 위에 있었는지를,
자신도 이제 조금씩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우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신이 ‘힘들어할 때’ 항상 나타난 게 아니라,
당신의 ‘모든 틈’을 예감처럼 알고 있었어요.
그건 단순한 공감이 아니에요.”
“…그럼, 뭐였을까요?”
“감정은 보통, 함께 쌓이죠.
하지만 그분은 당신이 인식하지 못한 순간에도 이미 당신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조용하게, 당신을 중심으로.”
윤서는 입을 다물었다.
마치 말할수록 더 많은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윤서 씨는 그분이 당신의 감정을 ‘받아준 존재’라고 생각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사실은…
그는 계속해서 당신의 삶에 개입해온 사람이에요.
당신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요.”
지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지만,
그 안에 담긴 진단은 단호하고 선명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을 사랑이라 착각하지만,
그건 때때로, 상대의 삶을 감시해온 결과일 수도 있어요.”
윤서는 숨을 삼켰다.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천천히 떨구었다.
윤서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손끝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리듯 치며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제가 누구랑 대화했는지도 알고 있었어요.
어디서 만났는지, 언제 통화했는지까지도.”
지우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처음엔 그냥…
우연인가 싶었어요.
제가 말한 적이 없는데, 친구 얘기를 꺼낸다거나,
제가 갔던 카페를 알고 있다거나.”
윤서의 목소리는 아슬아슬했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그 마지막 끈 위에 올라선 감정.
“그때는…
그게 신기했어요.
‘어떻게 알았지? 대단하다.’
그런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 와서 보니까,
그건 그냥… 제가 바보였던 거죠.”
지우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으로 짧은 문장을 되뇌었다.
“사랑이 통제로 흘러갈 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건
‘말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 믿었던 자신감’이다.”
지우는 윤서의 고백에서 감정 통제의 뿌리를 읽고 있었다.
그 통제는 폭력적이지 않았다.
대신, 너무 자연스러워서 무서웠다.
관심처럼, 걱정처럼, 그리고… 사랑처럼 가장된 조율.
“그 사람,
제가 누구를 좋아했는지도 알았어요.
아무 말 안 했는데도요.”
윤서의 고백은,
마치 ‘내 감정이 내 것이 아니었다’는 자각처럼 들렸다.
작가의 말
등록된 작가의 말이 없습니다.
닫기![]()
상담실 연애기록
6.시즌1 6화 생일선물과 향기 — 기억의 틈조회 : 1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88 5.시즌1 5화 “설레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조회 : 4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426 4.시즌1 4화 그날 밤, 그는 울고 있었다조회 : 2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75 3.시즌1 3화 그가 기억한 나, 내가 기억한 그조회 : 10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927 2.시즌1 2화 편했어요. 그 사람과 있으면. 설레진 않았지만...조회 : 9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797 1.시즌1 1화 비 오는 밤, 우린 친구였을까?조회 : 16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