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 6화 생일선물과 향기 — 기억의 틈
조회 : 19 추천 : 0 글자수 : 4,888 자 2025-12-13
“제가 생일 선물로 향수를 받은 적이 있어요.”
윤서는 처음엔 망설였지만, 이내 부드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말끝에 묻어 있는 건 따뜻한 기억이 아니라, 어딘가 낯선 이물감이었다.
“근데... 전 그 사람한테
내가 어떤 향을 좋아한다고,
한 번도 말한 적 없었거든요.”
지우는 윤서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윤서의 말은 단순한 에피소드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선을 넘은 감정의 사전 연출이 숨겨져 있었다.
“그 사람은, 그냥…
안대요.
제가 무슨 향을 좋아할지를요.
너무 자연스럽게.”
그 말 끝에, 윤서는 짧게 웃었다.
감탄처럼, 체념처럼.
그리고 그 감정은 점점 무너지는 기억 속으로 윤서를 이끌었다.
“그날, 제가 딱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는데요.
불 꺼진 거실에 촛불 켜진 테이블이 있었고,
그 옆에 포장지에 싸인 작은 상자가 하나 있었어요.”
윤서의 눈빛이 멍하니 떠올랐다.
기억이라는 스크린 위에 생생히 투사된 과거.
“열어보니까…
향수더라고요.
처음 맡아보는 향인데, 이상하게 익숙했어요.
포근하고, 달콤하고, 살짝 우디한 느낌…”
지우는 메모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향기의 묘사는 구체적일수록, 감정의 흔적도 명확해진다.
“근데 이상한 건요…
그 향이,
진짜 ‘저 같은 향기’라는 거예요.
정말 이상하죠?
제가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고,
같이 백화점에서 구경한 적도 없는데…”
윤서는 순간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그 사람 말로는,
내가 예전에 백화점 지나가면서 그걸 유심히 봤다고 했어요.
근데 전, 기억이 안 나요.
그걸 내가 봤는지조차도.”
지우는 천천히 말했다.
“기억은,
감정보다 빠르니까요.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기억에 의해
우리의 감정을 소급당하곤 하죠.”
지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탄도, 비판도 아닌 온도의 리듬.
그저 ‘이해하고 있다’는 리듬만으로 윤서를 받아주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그 향수를 받은 날, 기분이 어땠어요?”
질문은 단순했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엔 감정의 실체를 꺼내는 장치가 숨겨져 있었다.
“처음엔 감동이었죠.”
윤서의 말은 빠르게 흘러나왔다.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걸 알아챈 게…
되게 신기하고,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그녀의 손끝이 무릎 위에서 가볍게 말려 있었다.
하지만 말이 끝나자 그 긴장이 천천히 풀렸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한 박자 늦은 깨달음처럼 낮았다.
“근데…
며칠 지나고 나니까 좀…
소름 끼치더라고요.”
지우는 시선을 낮추며 응시했다.
“왜요?”
“제가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그 사람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니까, 마치—
내 기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정해놓은 감정을 제가 연기하는 것 같은…”
말을 잇던 윤서가 숨을 삼켰다.
“생일날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잖아요.
받는 사람이 주인공인데…
그땐 제가 주인공이 아니었던 느낌이에요.
이미 준비된 무대 위에
저만 올라간 거였던 것 같아요.”
지우의 시선이 차분히 굳어졌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상대가 안다는 건—
듣기엔 로맨틱하지만,
사실은 감정의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일 수도 있어요.”
“…감정의 주도권이요?”
“네.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는
그만한 ‘과정’이 필요하잖아요.
사소한 고민이나 작은 갈등 같은.”
“그런데 그 사람이
그걸 모두 건너뛰고 바로 ‘정답’만 제시한다면,
당신은 어느 순간부터
‘고민할 권리’를 잃게 되는 거예요.”
지우의 말은 날이 서지 않았지만,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윤서의 마음을 뚫고 들어갔다.
“그 향수가요.
처음엔 따뜻했는데…
그게, 점점 무서워졌어요.”
그날은 평일이었다.
윤서는 회사 일로 늦게 퇴근했고, 생일이라곤 하지만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오히려 조용히 보내고 싶었다.
모든 기념일이 꼭 화려할 필요는 없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도착한 자취방 문을 열자,
실내엔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었고
테이블 위엔 케이크와 직접 만든 음식들이 정갈히 놓여 있었다.
냄새는… 단호박죽.
잣이 들어가지 않은, 윤서가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버전.
하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서프라이즈~
네 생일이라고 그냥 지나치긴 싫어서.”
윤서는 그때 웃었다.
정말, 아무 의심 없이 웃었다.
“이걸 언제 준비한 거예요?”
“네가 오늘 야근하는 날이라고 해서…
점심시간에 미리 왔다 갔지.”
그 말에 윤서는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그저 앉아 하진이 덜어준 죽을 먹고, 함께 케이크를 자르고,
어색한 생일 축하 노래를 들었다.
그러다 하진이 슬쩍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작은 선물.
별거 아니야.”
포장을 열자, 거기엔 향수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윤서가 평소에 자주 쓰던 브랜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병 디자인은, 이상하리만치 마음에 들었다.
“이거… 예쁘다.”
“전에 같이 백화점 지날 때,
네가 잠깐 멈춰서 이 향수 시향지 오래 봤었거든.
그때 기억나?”
윤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날을 기억은 했지만,
자신이 그렇게 오래 머문지도 몰랐고
심지어 그 향에 끌렸는지조차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때 난 그냥 향수 코너 스쳐지나간 건데.”
하진은 웃었다.
“그래도 넌 눈이 멈췄었어.
난 그거 보면 네 맘 좀 알겠던데.”
그때까지만 해도 윤서는
‘역시 하진이야’라는 안도감에 미소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장면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사람은,
내가 나도 모르게 멈춘 시선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걸 기념일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자연스럽게 ‘정답’처럼 포장해서 내게 건넸다.
“그날의 향기요.
처음엔 기분 좋았는데…
지금은, 그 향 맡으면 무슨 역할을 해야 할지 헷갈려요.”
지우는 조용히 메모지를 넘겼다.
윤서가 방금 전 말한 ‘기억’과 ‘향기’에 대한 감정의 떨림을
심리 도식으로 옮기고 있었다.
“향수, 생일상, 단호박죽…
그 모든 것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윤서가 고개를 들었다.
지우는 메모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선을 연결하며 말했다.
“선점된 감정.
당신이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가 그 감정을 예상하고 준비한 구조예요.”
“선점된… 감정이요?”
“네.
사랑은 때로 상대를 위해 감정을 준비하는 일이 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게 반복될 경우,
상대는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 기회를 점점 잃게 되죠.”
지우는 윤서를 바라봤다.
“그 선물, 정말 기뻤나요?
아니면 기뻐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였나요?”
윤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녀의 뇌리에는 그날의 분위기가 다시 떠올랐다.
촛불, 향기, 조명…
모든 게 완벽했지만,
그 완벽함이 어쩐지 ‘내 감정’ 같진 않았다.
“감정은 기억보다 느리게 오기도 해요.
그런데 하진 씨는 항상 당신보다 먼저 ‘정답’을 알고 있었죠.”
“그건… 배려 아니었을까요?”
지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렇게 느껴질 수 있어요.
하지만 감정이란 건, 상대가 말하기 전에 준비해두는 게 아니라, 함께 발견해가는 것이거든요.”
그 말에 윤서의 표정이 무너졌다.
“하진 씨는 당신이 어떤 걸 좋아할지,
어떤 말을 하면 웃을지,
어디에서 감동할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어요.”
“그게… 뭐가 문제인 거죠?”
“그 사람은 당신의 기억을 자신의 시나리오로 덧씌우고 있었던 거예요.”
“사랑처럼 보이지만,
그건 당신에게 감정을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는 방식이죠.”
윤서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잠시 후,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떨렸다.
“이상한 게 하나 있어요.”
지우가 고개를 들었다.
윤서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꼭 모은 채, 어딘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향수 있잖아요.
그거, 예전에 그 사람 전 여자친구도 쓰던 향이었어요.”
지우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진지해졌다.
“우연일 수도 있겠죠.
근데 그때 느꼈어요.
‘왜 나한테도 똑같은 향기를 선물했을까?’”
윤서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말했다.
“저만을 위한 선택 같지가 않았어요.
그 순간 너무 익숙하게 굴더라고요.
그 향을 맡은 표정이... 처음이 아닌 사람 같았어요.”
지우는 조용히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그는 그 향기에 당신을 담으려 한 걸까요,
아니면 당신을 그 향기에 끼워 맞추려 한 걸까요?”
윤서는 숨을 들이켰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가 끼어오르듯 답답해졌다.
“전 줄곧,
그 사람이 나를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다고 믿었거든요.
근데 지금은…”
“당신이 아니라,
‘그 사람이 기억하고 싶은 어떤 감정’을 재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나요?”
지우의 질문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엔 단단한 직관이 깃들어 있었다.
윤서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향이,
이젠 나한테서 나는 냄새 같지가 않아요.”
“그 사람의 기억에서 나는 냄새 같아요.”
윤서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지우는 조용히 기다렸다.
책상 위에 놓인 아로마 디퓨저에서 은은하게 퍼지던 라벤더 향이
그 순간 유난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다 윤서가 입을 열었다.
“그날, 그 사람 집에 간 적이 있어요. 생일 다음 날이었어요.”
지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사람이 저를 초대했거든요.
어색하게 분위기를 잡지도 않았고, 그냥... 편했어요. 항상 그랬으니까요.”
윤서는 순간 뒷덜미를 매만졌다.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지는 듯, 한 손으로 자신의 팔을 감싸 안았다.
“근데요, 그 사람 방 책장 위에...
그 향수, 같은 게 몇 병이나 있었어요.”
지우의 시선이 멈칫했다.
“제가 받은 거랑 똑같은 병이요.
심지어 포장도 안 뜯은 게 두 개나 있었어요.”
“하나는 제가 받은 거고,
나머지 두 개는 왜 있었을까요?”
지우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문장이 속으로 흘렀다.
“감정을 반복하는 사람은, 상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감정의 반응을 재현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윤서는 이어 말했다.
“그 향기.
그 사람에게는 뭔가 특별한 기억이었나 봐요.”
“하지만... 저한테는,
그 기억이 너무 낯설어요.
처음엔 감동이었는데, 지금은 소름이 돋아요.”
그녀의 눈동자에 서서히 물기가 맺혔다.
그것은 배신감도 아니고, 실망도 아니었다.
그저,
‘나만을 향한 것이라고 믿었던 감정이,
애초에 누군가의 재연 시나리오였을지도 모른다’는 불쾌한 각성.
지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감정이란 향기처럼 스며들지만,
한 번 틀어막힌 코로는
이질감조차 늦게야 알아차린다.”
윤서는 처음엔 망설였지만, 이내 부드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말끝에 묻어 있는 건 따뜻한 기억이 아니라, 어딘가 낯선 이물감이었다.
“근데... 전 그 사람한테
내가 어떤 향을 좋아한다고,
한 번도 말한 적 없었거든요.”
지우는 윤서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윤서의 말은 단순한 에피소드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선을 넘은 감정의 사전 연출이 숨겨져 있었다.
“그 사람은, 그냥…
안대요.
제가 무슨 향을 좋아할지를요.
너무 자연스럽게.”
그 말 끝에, 윤서는 짧게 웃었다.
감탄처럼, 체념처럼.
그리고 그 감정은 점점 무너지는 기억 속으로 윤서를 이끌었다.
“그날, 제가 딱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는데요.
불 꺼진 거실에 촛불 켜진 테이블이 있었고,
그 옆에 포장지에 싸인 작은 상자가 하나 있었어요.”
윤서의 눈빛이 멍하니 떠올랐다.
기억이라는 스크린 위에 생생히 투사된 과거.
“열어보니까…
향수더라고요.
처음 맡아보는 향인데, 이상하게 익숙했어요.
포근하고, 달콤하고, 살짝 우디한 느낌…”
지우는 메모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향기의 묘사는 구체적일수록, 감정의 흔적도 명확해진다.
“근데 이상한 건요…
그 향이,
진짜 ‘저 같은 향기’라는 거예요.
정말 이상하죠?
제가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고,
같이 백화점에서 구경한 적도 없는데…”
윤서는 순간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그 사람 말로는,
내가 예전에 백화점 지나가면서 그걸 유심히 봤다고 했어요.
근데 전, 기억이 안 나요.
그걸 내가 봤는지조차도.”
지우는 천천히 말했다.
“기억은,
감정보다 빠르니까요.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기억에 의해
우리의 감정을 소급당하곤 하죠.”
지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탄도, 비판도 아닌 온도의 리듬.
그저 ‘이해하고 있다’는 리듬만으로 윤서를 받아주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그 향수를 받은 날, 기분이 어땠어요?”
질문은 단순했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엔 감정의 실체를 꺼내는 장치가 숨겨져 있었다.
“처음엔 감동이었죠.”
윤서의 말은 빠르게 흘러나왔다.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걸 알아챈 게…
되게 신기하고,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그녀의 손끝이 무릎 위에서 가볍게 말려 있었다.
하지만 말이 끝나자 그 긴장이 천천히 풀렸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한 박자 늦은 깨달음처럼 낮았다.
“근데…
며칠 지나고 나니까 좀…
소름 끼치더라고요.”
지우는 시선을 낮추며 응시했다.
“왜요?”
“제가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그 사람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니까, 마치—
내 기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정해놓은 감정을 제가 연기하는 것 같은…”
말을 잇던 윤서가 숨을 삼켰다.
“생일날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잖아요.
받는 사람이 주인공인데…
그땐 제가 주인공이 아니었던 느낌이에요.
이미 준비된 무대 위에
저만 올라간 거였던 것 같아요.”
지우의 시선이 차분히 굳어졌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상대가 안다는 건—
듣기엔 로맨틱하지만,
사실은 감정의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일 수도 있어요.”
“…감정의 주도권이요?”
“네.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는
그만한 ‘과정’이 필요하잖아요.
사소한 고민이나 작은 갈등 같은.”
“그런데 그 사람이
그걸 모두 건너뛰고 바로 ‘정답’만 제시한다면,
당신은 어느 순간부터
‘고민할 권리’를 잃게 되는 거예요.”
지우의 말은 날이 서지 않았지만,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윤서의 마음을 뚫고 들어갔다.
“그 향수가요.
처음엔 따뜻했는데…
그게, 점점 무서워졌어요.”
그날은 평일이었다.
윤서는 회사 일로 늦게 퇴근했고, 생일이라곤 하지만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오히려 조용히 보내고 싶었다.
모든 기념일이 꼭 화려할 필요는 없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도착한 자취방 문을 열자,
실내엔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었고
테이블 위엔 케이크와 직접 만든 음식들이 정갈히 놓여 있었다.
냄새는… 단호박죽.
잣이 들어가지 않은, 윤서가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버전.
하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서프라이즈~
네 생일이라고 그냥 지나치긴 싫어서.”
윤서는 그때 웃었다.
정말, 아무 의심 없이 웃었다.
“이걸 언제 준비한 거예요?”
“네가 오늘 야근하는 날이라고 해서…
점심시간에 미리 왔다 갔지.”
그 말에 윤서는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그저 앉아 하진이 덜어준 죽을 먹고, 함께 케이크를 자르고,
어색한 생일 축하 노래를 들었다.
그러다 하진이 슬쩍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작은 선물.
별거 아니야.”
포장을 열자, 거기엔 향수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윤서가 평소에 자주 쓰던 브랜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병 디자인은, 이상하리만치 마음에 들었다.
“이거… 예쁘다.”
“전에 같이 백화점 지날 때,
네가 잠깐 멈춰서 이 향수 시향지 오래 봤었거든.
그때 기억나?”
윤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날을 기억은 했지만,
자신이 그렇게 오래 머문지도 몰랐고
심지어 그 향에 끌렸는지조차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때 난 그냥 향수 코너 스쳐지나간 건데.”
하진은 웃었다.
“그래도 넌 눈이 멈췄었어.
난 그거 보면 네 맘 좀 알겠던데.”
그때까지만 해도 윤서는
‘역시 하진이야’라는 안도감에 미소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장면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사람은,
내가 나도 모르게 멈춘 시선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걸 기념일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자연스럽게 ‘정답’처럼 포장해서 내게 건넸다.
“그날의 향기요.
처음엔 기분 좋았는데…
지금은, 그 향 맡으면 무슨 역할을 해야 할지 헷갈려요.”
지우는 조용히 메모지를 넘겼다.
윤서가 방금 전 말한 ‘기억’과 ‘향기’에 대한 감정의 떨림을
심리 도식으로 옮기고 있었다.
“향수, 생일상, 단호박죽…
그 모든 것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윤서가 고개를 들었다.
지우는 메모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선을 연결하며 말했다.
“선점된 감정.
당신이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가 그 감정을 예상하고 준비한 구조예요.”
“선점된… 감정이요?”
“네.
사랑은 때로 상대를 위해 감정을 준비하는 일이 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게 반복될 경우,
상대는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 기회를 점점 잃게 되죠.”
지우는 윤서를 바라봤다.
“그 선물, 정말 기뻤나요?
아니면 기뻐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였나요?”
윤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녀의 뇌리에는 그날의 분위기가 다시 떠올랐다.
촛불, 향기, 조명…
모든 게 완벽했지만,
그 완벽함이 어쩐지 ‘내 감정’ 같진 않았다.
“감정은 기억보다 느리게 오기도 해요.
그런데 하진 씨는 항상 당신보다 먼저 ‘정답’을 알고 있었죠.”
“그건… 배려 아니었을까요?”
지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렇게 느껴질 수 있어요.
하지만 감정이란 건, 상대가 말하기 전에 준비해두는 게 아니라, 함께 발견해가는 것이거든요.”
그 말에 윤서의 표정이 무너졌다.
“하진 씨는 당신이 어떤 걸 좋아할지,
어떤 말을 하면 웃을지,
어디에서 감동할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어요.”
“그게… 뭐가 문제인 거죠?”
“그 사람은 당신의 기억을 자신의 시나리오로 덧씌우고 있었던 거예요.”
“사랑처럼 보이지만,
그건 당신에게 감정을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는 방식이죠.”
윤서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잠시 후,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떨렸다.
“이상한 게 하나 있어요.”
지우가 고개를 들었다.
윤서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꼭 모은 채, 어딘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향수 있잖아요.
그거, 예전에 그 사람 전 여자친구도 쓰던 향이었어요.”
지우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진지해졌다.
“우연일 수도 있겠죠.
근데 그때 느꼈어요.
‘왜 나한테도 똑같은 향기를 선물했을까?’”
윤서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말했다.
“저만을 위한 선택 같지가 않았어요.
그 순간 너무 익숙하게 굴더라고요.
그 향을 맡은 표정이... 처음이 아닌 사람 같았어요.”
지우는 조용히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그는 그 향기에 당신을 담으려 한 걸까요,
아니면 당신을 그 향기에 끼워 맞추려 한 걸까요?”
윤서는 숨을 들이켰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가 끼어오르듯 답답해졌다.
“전 줄곧,
그 사람이 나를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다고 믿었거든요.
근데 지금은…”
“당신이 아니라,
‘그 사람이 기억하고 싶은 어떤 감정’을 재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나요?”
지우의 질문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엔 단단한 직관이 깃들어 있었다.
윤서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향이,
이젠 나한테서 나는 냄새 같지가 않아요.”
“그 사람의 기억에서 나는 냄새 같아요.”
윤서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지우는 조용히 기다렸다.
책상 위에 놓인 아로마 디퓨저에서 은은하게 퍼지던 라벤더 향이
그 순간 유난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다 윤서가 입을 열었다.
“그날, 그 사람 집에 간 적이 있어요. 생일 다음 날이었어요.”
지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사람이 저를 초대했거든요.
어색하게 분위기를 잡지도 않았고, 그냥... 편했어요. 항상 그랬으니까요.”
윤서는 순간 뒷덜미를 매만졌다.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지는 듯, 한 손으로 자신의 팔을 감싸 안았다.
“근데요, 그 사람 방 책장 위에...
그 향수, 같은 게 몇 병이나 있었어요.”
지우의 시선이 멈칫했다.
“제가 받은 거랑 똑같은 병이요.
심지어 포장도 안 뜯은 게 두 개나 있었어요.”
“하나는 제가 받은 거고,
나머지 두 개는 왜 있었을까요?”
지우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문장이 속으로 흘렀다.
“감정을 반복하는 사람은, 상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감정의 반응을 재현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윤서는 이어 말했다.
“그 향기.
그 사람에게는 뭔가 특별한 기억이었나 봐요.”
“하지만... 저한테는,
그 기억이 너무 낯설어요.
처음엔 감동이었는데, 지금은 소름이 돋아요.”
그녀의 눈동자에 서서히 물기가 맺혔다.
그것은 배신감도 아니고, 실망도 아니었다.
그저,
‘나만을 향한 것이라고 믿었던 감정이,
애초에 누군가의 재연 시나리오였을지도 모른다’는 불쾌한 각성.
지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감정이란 향기처럼 스며들지만,
한 번 틀어막힌 코로는
이질감조차 늦게야 알아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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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즌1 6화 생일선물과 향기 — 기억의 틈조회 : 2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88 5.시즌1 5화 “설레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조회 : 4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426 4.시즌1 4화 그날 밤, 그는 울고 있었다조회 : 2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75 3.시즌1 3화 그가 기억한 나, 내가 기억한 그조회 : 10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927 2.시즌1 2화 편했어요. 그 사람과 있으면. 설레진 않았지만...조회 : 9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797 1.시즌1 1화 비 오는 밤, 우린 친구였을까?조회 : 16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