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 7화 거절당하지 않기 위한 배려
조회 : 16 추천 : 0 글자수 : 4,869 자 2025-12-14
“그 사람은 내가 싫어할 만한 걸 절대 하지 않았어요.”
윤서의 말은 유난히 조용했지만, 그 안엔 낯선 울림이 있었다.
“언제나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미리 준비해놨거든요.
그게 고마웠고, 한편으론... 이상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항상 알고 있을 수 있었을까요?”
지우는 메모를 멈췄다. 윤서가 방금 뱉은 말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감정의 방향을 되짚는 **‘반사의 시작점’**처럼 들렸다.
윤서는 천천히 자신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저도 처음엔… 참 배려심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사람 흔치 않잖아요. 무리하지 않고, 맞춰주고, 조용히 배려하는 사람.”
“그런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지우는 시선을 맞추며 가볍게 물었다.
“어떤 기분이었나요?”
윤서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숨을 참는 기분이요.”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상담실의 공기마저 가늘게 흔들렸다.
“언제나 내가 먼저 말하기 전에,
그 사람이 미리 알아서 움직였어요.
먹고 싶은 음식, 듣고 싶어 했던 이야기,
심지어 제가 꺼려하는 장소까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듯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건 제가 싫어할 기회를,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빼앗긴 거잖아요.”
지우는 고개를 아주 천천히 끄덕였다.
윤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처음으로 자신이 받은 ‘배려’라는 감정의 껍질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감각.
“그 사람이 미리 다 준비해버리니까...
저는 늘 감사해야 했고,
괜히 제가 변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 같았어요.”
“그게, 왜인지… 점점 숨이 막혔어요.”
그 순간, 지우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감정을 미리 준비한다는 건,
감정의 흐름을 설계하려는 시도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상대는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감정의 주도권을 넘기게 된다.”
“감정을 앞서서 준비한다는 건요,”
지우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상대의 반응을 ‘설계’하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어요.”
윤서는 말없이 지우를 바라봤다.
그 말은 어딘가 거슬리면서도… 이상하게 납득되는 지점이 있었다.
“그가 정말 당신을 배려한 걸까요,
아니면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연습한 걸까요?”
그 질문은 마치 날이 빠진 칼처럼 천천히 윤서의 내면을 가르고 들어왔다.
거절당하지 않기 위한 준비.
사전에 행동을 통제함으로써, ‘실패할 감정’을 없애는 방식.
“당신은 계속 ‘고마웠다’고 말하셨죠.
그 사람의 배려에.
그런데 지금의 감정은 ‘불편함’이에요.
왜일까요?”
윤서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몰랐으니까요.
그게 저를 위한 게 아니었다는 걸.”
지우는 노트를 덮고, 테이블 위의 유리컵을 손끝으로 툭, 밀었다.
컵은 짧게 움직이다, 곧 멈췄다.
조용하고 정교한, 그러나 인위적인 흐름.
“감정을 설계하는 사람은요,
‘실패’를 두려워해요.
감정의 거절, 반대, 충돌… 그 모든 걸 피하려고 하죠.
그래서 먼저 움직이고, 먼저 포기하고, 먼저 알아채죠.”
“그런데 그게 반복되면,
상대는 ‘자신이 감정을 선택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돼요.”
윤서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자신이 ‘고른 감정’이라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이미 누군가의 계산된 배려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감각.
“그 사람은 늘 ‘착한 사람’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착함’이… 너무 완벽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무서웠어요.”
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감정의 안전지대는요,
때로는 상대의 ‘거절’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완성돼요.
그건 결코 따뜻한 배려가 아니에요.
오히려… 조용한 통제에 더 가깝죠.”
“그날이었어요.”
윤서가 천천히 회상 속으로 빠져들며 말했다.
“정확히 뭘 부탁했는지는 기억 안 나요.
아마… 어디 같이 가자는 이야기였을 거예요.”
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바라봤다.
머릿속에서는 마치 영화처럼 장면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
그날 밤,
하진은 택배 박스를 들고 윤서의 자취방 앞에 서 있었다.
생각보다 무거워 보이는 상자 안에는, 윤서가 말도 꺼내기 전에 필요해졌던 것들이 이미 들어 있었다.
“이건…?”
“그냥. 너 그때 종종 이런 거 필요하다고 했었잖아.”
윤서는 말문이 막혔다.
분명 필요하긴 했지만, 그걸 꺼낸 적은 없었는데.
하진은 그 모든 걸 이미 알아낸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며칠 뒤, 윤서가 말끝을 망설이며 뭔가를 거절하려던 순간—
하진이 먼저 말했다.
“괜찮아. 안 해도 돼.”
“네가 불편하면, 안 해도 돼. 나는 네가 싫어할 일, 안 하고 싶어.”
그 순간, 윤서는 말문을 잃었다.
거절할 틈조차 없이,
그는 먼저 물러나 있었다.
—
“그때는 고마웠어요.”
윤서가 말했다.
“제가 말 꺼내기 힘들어하는 걸 알아주는 사람 같았거든요.”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며 이상한 감각이 차올랐다.
‘왜 그 사람 앞에선 내가 아무 말도 못 할까?’
‘왜 항상, 내가 감정 표현을 꺼내기도 전에 모든 게 끝나 있었을까?’
“그 말이요.
‘안 해도 돼.’
그 말이, 점점 ‘넌 내 뜻대로 안 움직여도 돼. 하지만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까지 했어.’처럼 들리더라고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 사람이 착한 줄만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게 너무 정교하게 설계된 착함 같아요.”
“그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윤서는 마치 이제야 스스로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천천히 말을 잇는다.
“제가 뭘 하자고 하진 않았는데도,
어쩐지 항상 그 사람이 먼저 움직였어요.
그리고 제가 망설일 틈도 없이… 먼저 물러섰죠.”
지우는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의 목소리에 묘한 감정이 섞인다.
무언가를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흘려보낸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묵직한 당혹감.
“기억나요.
한 번은 주말에 친구들이랑 여행 가기로 했는데,
그 사람이랑 약속이 겹쳐 있었거든요.
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사람이 먼저 말했어요.”
“괜찮아. 너 가.
친구들이랑 보내는 시간도 중요하잖아.”
“그때는 ‘아, 이 사람 진짜 배려심 깊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이상하죠.
그 말이 항상 먼저 나왔어요.
제가 부탁하지 않아도,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전에.”
지우는 조용히 묻는다.
“혹시 그럴 때마다, 윤서 씨는 어떤 기분이었나요?”
윤서는 잠시 입을 다문다.
입꼬리를 살짝 올려보려 했지만, 어딘가 삐걱거린다.
“…처음엔 고마웠어요.
근데 나중엔… 내가 매번 빼앗기는 기분이었어요.
내가 감정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상황이 정리돼버리는 거예요.”
“그럼요.”
지우는 천천히, 단단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건 표현의 기회를 빼앗긴 거예요.
누군가가 미리 감정을 포장해서 내밀어줄수록,
우린 점점 말할 이유를 잃게 되죠.”
윤서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또, 마음 한가운데에 콕 박힌다.
“제가 미안하다고 말할 틈도 없었고,
화낼 이유도 주지 않았어요.
언제나 먼저 ‘괜찮다’고 했으니까요.”
“그 사람 앞에선…
제가 한 번도,
정말로 화를 낸 적이 없어요.”
윤서는 자신의 말에 순간 스스로 놀란 듯 잠시 멈춘다.
말을 뱉고 나서야, 그 공백의 무게가 새삼스럽게 몸에 내려앉는다.
지우는 그 말의 결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짚는다.
“왜일까요.
하진 씨는 왜 당신이 화낼 ‘기회’조차 갖지 않도록 만든 걸까요?”
윤서는 눈을 내리깔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낮고 단단하게 말했다.
“…그 사람이 먼저 움직였어요.
항상 제가 감정을 느끼기 전에, 그 사람이 ‘정리’했어요.”
“괜찮아, 내가 바쁠 수도 있으니까 약속은 미리 정하지 말자.”
“내가 좀 지나쳤지? 너 말이 맞아.”
“이런 말들…
사실, 그 사람이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요.
제가 무언가를 불편해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항상 선점했어요.
그래서… 이상하게 화를 낼 기회가 없었어요.”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당신의 감정을 미리 생각해줬다’고 느끼는 건,
때론 배려일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배려가 늘 갈등보다 먼저였다는 건,
감정의 흐름 자체를 제어했다는 뜻이기도 하죠.”
윤서가 천천히 숨을 내쉰다.
표정은 여전히 조용하지만, 내면의 어딘가는 흔들린다.
“…그 사람이 배려한 줄 알았어요.
근데 지금 생각하면,
제가 어떻게 느낄지 그 사람이 먼저 결정한 것 같아요.
제가 감정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이렇게 느끼게 될 거야’라는 틀 안에 넣어버린 거죠.”
지우는 마지막으로 천천히 말한다.
“그게 바로 감정 통제의 시작이에요.
상대가 화낼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게 아니라,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판단하고,
그 감정의 길을 사전에 차단하는 거죠.”
윤서의 눈빛에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
마치 오래된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는 듯한 순간.
“그 사람이요…”
윤서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아주 느리고 낮은 목소리였다.
“…늘, 제가 싫어할까 봐 걱정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언제나 제가 마음에 안 들어할까 봐 조심스러운 눈빛이었고,
말 한마디도 조심조심 했고요.
항상—너무 배려했어요.”
그 말의 끝이 닿았을 때,
윤서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그건 감정 때문인지, 지각의 충격 때문인지 모를 진동이었다.
“근데 지금은요…”
윤서는 고개를 들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그러나 확신에 찬 눈으로 말했다.
“…그 얼굴조차,
거절을 선점하려는 표정처럼 느껴져요.”
정적이 흐른다.
지우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 말은 정확했기에, 위로 대신 침묵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조심하는 이유가,
진짜 날 위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윤서는 한참을 말끝을 머금다, 힘겹게 내뱉었다.
“…제가 언제 그 사람을 떠날지 몰라서,
떠날 빌미조차 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걸, 사랑이라고 믿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건 ‘나를 절대 잃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네요.”
지우의 시선이 잠시 책상 위에 놓인 노트를 스친다.
그리고 속으로 단정짓듯 중얼린다.
“상대를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는 배려는,
사실상 감정의 권리를 빼앗는 일이다.”
하진은 한 번도 거칠게 말한 적 없었다.
화를 낸 적도, 윤서의 감정을 깎아내린 적도 없다.
하지만 윤서는 지금 그 모든 ‘착한 얼굴’이
자신의 감정을 조용히 압박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폭력이 아니었지만—
자유도 아니었다.
윤서의 말은 유난히 조용했지만, 그 안엔 낯선 울림이 있었다.
“언제나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미리 준비해놨거든요.
그게 고마웠고, 한편으론... 이상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항상 알고 있을 수 있었을까요?”
지우는 메모를 멈췄다. 윤서가 방금 뱉은 말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감정의 방향을 되짚는 **‘반사의 시작점’**처럼 들렸다.
윤서는 천천히 자신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저도 처음엔… 참 배려심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사람 흔치 않잖아요. 무리하지 않고, 맞춰주고, 조용히 배려하는 사람.”
“그런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지우는 시선을 맞추며 가볍게 물었다.
“어떤 기분이었나요?”
윤서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숨을 참는 기분이요.”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상담실의 공기마저 가늘게 흔들렸다.
“언제나 내가 먼저 말하기 전에,
그 사람이 미리 알아서 움직였어요.
먹고 싶은 음식, 듣고 싶어 했던 이야기,
심지어 제가 꺼려하는 장소까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듯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건 제가 싫어할 기회를,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빼앗긴 거잖아요.”
지우는 고개를 아주 천천히 끄덕였다.
윤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처음으로 자신이 받은 ‘배려’라는 감정의 껍질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감각.
“그 사람이 미리 다 준비해버리니까...
저는 늘 감사해야 했고,
괜히 제가 변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 같았어요.”
“그게, 왜인지… 점점 숨이 막혔어요.”
그 순간, 지우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감정을 미리 준비한다는 건,
감정의 흐름을 설계하려는 시도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상대는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감정의 주도권을 넘기게 된다.”
“감정을 앞서서 준비한다는 건요,”
지우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상대의 반응을 ‘설계’하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어요.”
윤서는 말없이 지우를 바라봤다.
그 말은 어딘가 거슬리면서도… 이상하게 납득되는 지점이 있었다.
“그가 정말 당신을 배려한 걸까요,
아니면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연습한 걸까요?”
그 질문은 마치 날이 빠진 칼처럼 천천히 윤서의 내면을 가르고 들어왔다.
거절당하지 않기 위한 준비.
사전에 행동을 통제함으로써, ‘실패할 감정’을 없애는 방식.
“당신은 계속 ‘고마웠다’고 말하셨죠.
그 사람의 배려에.
그런데 지금의 감정은 ‘불편함’이에요.
왜일까요?”
윤서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몰랐으니까요.
그게 저를 위한 게 아니었다는 걸.”
지우는 노트를 덮고, 테이블 위의 유리컵을 손끝으로 툭, 밀었다.
컵은 짧게 움직이다, 곧 멈췄다.
조용하고 정교한, 그러나 인위적인 흐름.
“감정을 설계하는 사람은요,
‘실패’를 두려워해요.
감정의 거절, 반대, 충돌… 그 모든 걸 피하려고 하죠.
그래서 먼저 움직이고, 먼저 포기하고, 먼저 알아채죠.”
“그런데 그게 반복되면,
상대는 ‘자신이 감정을 선택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돼요.”
윤서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자신이 ‘고른 감정’이라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이미 누군가의 계산된 배려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감각.
“그 사람은 늘 ‘착한 사람’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착함’이… 너무 완벽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무서웠어요.”
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감정의 안전지대는요,
때로는 상대의 ‘거절’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완성돼요.
그건 결코 따뜻한 배려가 아니에요.
오히려… 조용한 통제에 더 가깝죠.”
“그날이었어요.”
윤서가 천천히 회상 속으로 빠져들며 말했다.
“정확히 뭘 부탁했는지는 기억 안 나요.
아마… 어디 같이 가자는 이야기였을 거예요.”
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바라봤다.
머릿속에서는 마치 영화처럼 장면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
그날 밤,
하진은 택배 박스를 들고 윤서의 자취방 앞에 서 있었다.
생각보다 무거워 보이는 상자 안에는, 윤서가 말도 꺼내기 전에 필요해졌던 것들이 이미 들어 있었다.
“이건…?”
“그냥. 너 그때 종종 이런 거 필요하다고 했었잖아.”
윤서는 말문이 막혔다.
분명 필요하긴 했지만, 그걸 꺼낸 적은 없었는데.
하진은 그 모든 걸 이미 알아낸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며칠 뒤, 윤서가 말끝을 망설이며 뭔가를 거절하려던 순간—
하진이 먼저 말했다.
“괜찮아. 안 해도 돼.”
“네가 불편하면, 안 해도 돼. 나는 네가 싫어할 일, 안 하고 싶어.”
그 순간, 윤서는 말문을 잃었다.
거절할 틈조차 없이,
그는 먼저 물러나 있었다.
—
“그때는 고마웠어요.”
윤서가 말했다.
“제가 말 꺼내기 힘들어하는 걸 알아주는 사람 같았거든요.”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며 이상한 감각이 차올랐다.
‘왜 그 사람 앞에선 내가 아무 말도 못 할까?’
‘왜 항상, 내가 감정 표현을 꺼내기도 전에 모든 게 끝나 있었을까?’
“그 말이요.
‘안 해도 돼.’
그 말이, 점점 ‘넌 내 뜻대로 안 움직여도 돼. 하지만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까지 했어.’처럼 들리더라고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 사람이 착한 줄만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게 너무 정교하게 설계된 착함 같아요.”
“그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윤서는 마치 이제야 스스로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천천히 말을 잇는다.
“제가 뭘 하자고 하진 않았는데도,
어쩐지 항상 그 사람이 먼저 움직였어요.
그리고 제가 망설일 틈도 없이… 먼저 물러섰죠.”
지우는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의 목소리에 묘한 감정이 섞인다.
무언가를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흘려보낸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묵직한 당혹감.
“기억나요.
한 번은 주말에 친구들이랑 여행 가기로 했는데,
그 사람이랑 약속이 겹쳐 있었거든요.
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사람이 먼저 말했어요.”
“괜찮아. 너 가.
친구들이랑 보내는 시간도 중요하잖아.”
“그때는 ‘아, 이 사람 진짜 배려심 깊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이상하죠.
그 말이 항상 먼저 나왔어요.
제가 부탁하지 않아도,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전에.”
지우는 조용히 묻는다.
“혹시 그럴 때마다, 윤서 씨는 어떤 기분이었나요?”
윤서는 잠시 입을 다문다.
입꼬리를 살짝 올려보려 했지만, 어딘가 삐걱거린다.
“…처음엔 고마웠어요.
근데 나중엔… 내가 매번 빼앗기는 기분이었어요.
내가 감정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상황이 정리돼버리는 거예요.”
“그럼요.”
지우는 천천히, 단단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건 표현의 기회를 빼앗긴 거예요.
누군가가 미리 감정을 포장해서 내밀어줄수록,
우린 점점 말할 이유를 잃게 되죠.”
윤서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또, 마음 한가운데에 콕 박힌다.
“제가 미안하다고 말할 틈도 없었고,
화낼 이유도 주지 않았어요.
언제나 먼저 ‘괜찮다’고 했으니까요.”
“그 사람 앞에선…
제가 한 번도,
정말로 화를 낸 적이 없어요.”
윤서는 자신의 말에 순간 스스로 놀란 듯 잠시 멈춘다.
말을 뱉고 나서야, 그 공백의 무게가 새삼스럽게 몸에 내려앉는다.
지우는 그 말의 결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짚는다.
“왜일까요.
하진 씨는 왜 당신이 화낼 ‘기회’조차 갖지 않도록 만든 걸까요?”
윤서는 눈을 내리깔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낮고 단단하게 말했다.
“…그 사람이 먼저 움직였어요.
항상 제가 감정을 느끼기 전에, 그 사람이 ‘정리’했어요.”
“괜찮아, 내가 바쁠 수도 있으니까 약속은 미리 정하지 말자.”
“내가 좀 지나쳤지? 너 말이 맞아.”
“이런 말들…
사실, 그 사람이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요.
제가 무언가를 불편해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항상 선점했어요.
그래서… 이상하게 화를 낼 기회가 없었어요.”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당신의 감정을 미리 생각해줬다’고 느끼는 건,
때론 배려일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배려가 늘 갈등보다 먼저였다는 건,
감정의 흐름 자체를 제어했다는 뜻이기도 하죠.”
윤서가 천천히 숨을 내쉰다.
표정은 여전히 조용하지만, 내면의 어딘가는 흔들린다.
“…그 사람이 배려한 줄 알았어요.
근데 지금 생각하면,
제가 어떻게 느낄지 그 사람이 먼저 결정한 것 같아요.
제가 감정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이렇게 느끼게 될 거야’라는 틀 안에 넣어버린 거죠.”
지우는 마지막으로 천천히 말한다.
“그게 바로 감정 통제의 시작이에요.
상대가 화낼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게 아니라,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판단하고,
그 감정의 길을 사전에 차단하는 거죠.”
윤서의 눈빛에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
마치 오래된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는 듯한 순간.
“그 사람이요…”
윤서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아주 느리고 낮은 목소리였다.
“…늘, 제가 싫어할까 봐 걱정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언제나 제가 마음에 안 들어할까 봐 조심스러운 눈빛이었고,
말 한마디도 조심조심 했고요.
항상—너무 배려했어요.”
그 말의 끝이 닿았을 때,
윤서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그건 감정 때문인지, 지각의 충격 때문인지 모를 진동이었다.
“근데 지금은요…”
윤서는 고개를 들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그러나 확신에 찬 눈으로 말했다.
“…그 얼굴조차,
거절을 선점하려는 표정처럼 느껴져요.”
정적이 흐른다.
지우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 말은 정확했기에, 위로 대신 침묵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조심하는 이유가,
진짜 날 위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윤서는 한참을 말끝을 머금다, 힘겹게 내뱉었다.
“…제가 언제 그 사람을 떠날지 몰라서,
떠날 빌미조차 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걸, 사랑이라고 믿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건 ‘나를 절대 잃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네요.”
지우의 시선이 잠시 책상 위에 놓인 노트를 스친다.
그리고 속으로 단정짓듯 중얼린다.
“상대를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는 배려는,
사실상 감정의 권리를 빼앗는 일이다.”
하진은 한 번도 거칠게 말한 적 없었다.
화를 낸 적도, 윤서의 감정을 깎아내린 적도 없다.
하지만 윤서는 지금 그 모든 ‘착한 얼굴’이
자신의 감정을 조용히 압박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폭력이 아니었지만—
자유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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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즌1 7화 거절당하지 않기 위한 배려조회 : 2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69 6.시즌1 6화 생일선물과 향기 — 기억의 틈조회 : 2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88 5.시즌1 5화 “설레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조회 : 4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426 4.시즌1 4화 그날 밤, 그는 울고 있었다조회 : 2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75 3.시즌1 3화 그가 기억한 나, 내가 기억한 그조회 : 10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927 2.시즌1 2화 편했어요. 그 사람과 있으면. 설레진 않았지만...조회 : 9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797 1.시즌1 1화 비 오는 밤, 우린 친구였을까?조회 : 17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