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덫
조회 : 89 추천 : 0 글자수 : 4,640 자 2026-01-08
장칠이 사라진 연무장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백운이 보여준 압도적인 일격, 그리고 장칠의 턱을 돌려버린 그 충격적인 광경에 압도된 탓이었다.
백운은 그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서 있기도 힘들었다. 모든 힘을 쏟아부은 대가로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태연한 척 걸음을 옮겼다. 훈련이고 뭐고, 지금은 휴식이 절실했다.
숙소로 향하는 인적 드문 샛길.
뒤에서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살기는 없었다.
누군가 주변 눈치를 살피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백운의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툭."
옷깃이 스치는 찰나, 백운의 소매 안쪽으로 묵직한 무언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마석이었다.
그는 멈추지도,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입술만 달싹여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를 남겼다.
"장칠 방... 깊숙한 곳에 있더라. 걸릴까 봐 죽는 줄 알았어."
마석은 그대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행인처럼. 하지만 스쳐 지나가는 그의 귓가와 목덜미는 극도의 긴장과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백운은 멈춰 서지 않고 자연스럽게 소매를 갈무리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약병의 감촉.
제대로 가져왔군.
그는 마석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날 밤. 백운은 숙소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낮의 전투 데이터는 명확했다. 장칠의 근력 18. 지금 몸으론 정면 승부 불가. 격차를 줄여야 한다.
백운은 품에서 마석이 몰래 건네준 약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쌉싸름한 약초 향이 코끝을 찔렀다. 손바닥 위에 굴러나온 것은 검붉은 빛이 감도는 엄지 손톱만한 환약이었다.
'정기환(精氣丸).'
철권문에서 오직 1대 제자들에게만 매달 한 알씩 지급된다는 특별 보급품. 문파의 핵심 전력에게만 허락된 물건이니, 잡일꾼인 백운이나 마석 같은 3대 제자들은 평생 구경조차 하기 힘든 물건이다.
[ 아이템: 정기환 (등급: 범급 최상) ]
[ 효과: 기혈 소통, 내공 소폭 상승 ]
망설임 없이 환약을 털어 넣었다.
식도를 타고 넘어간 약 기운이 위장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단순한 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빈약한 혈관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거칠고 뜨거운 기운이었다.
"으윽…!"
백운은 즉시 삼재심법을 운용했다. 사방으로 흩어지려는 기운을 의념(意念)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아직 내공은 미약하고 통제는 거칠었지만, 전생의 감각을 총동원해 제멋대로 날뛰는 에너지를 끈질기게 한 곳으로 유도했다.
'목표는 단중혈(膻中穴).'
백운은 겨우 모아낸 기운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쾅-!
가슴 정중앙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울렸다. 동시에 불에 달군 쇠꼬챙이가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끔찍한 격통이 뇌를 강타했지만
백운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이를 꽉 깨물어 삼켰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집중력만은 놓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충격으로 무너질 벽이 아니었다.
백운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고, 흩어진 기운을 다시 긁어모았다.
열 번이 안 되면 백 번, 백 번이 안 되면 천 번.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반복되는 격통에 감각이 무뎌지고, 한계에 다다른 의식이 툭 하고 끊어지려던 찰나였다.
콰직.
그 순간, 내면 깊은 곳에서 묵직한 진동이 울렸다.
마치 꽉 막혀있던 둑이 터지듯, 응집된 기운이 혈도를 뚫고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지옥 같던 고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머리가 맑아질 정도의 청량함이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에너지가 전신의 찌꺼기를 쓸어내는 듯한 강렬한 해방감.
곧이어 모공에서는 역한 냄새를 풍기는 검붉은 노폐물이 쏟아져 나왔다. 몸속에 쌓여있던 탁기가 배출되는 현상, 모공세수(毛孔洗髓)였다. 비록 환골탈태와 같은 극적인 재구축은 아니었지만, 썩은 물이 고여있던 육체가 비로소 흐르는 강물처럼 바뀐 것이다.
동이 터올 무렵, 문파 구석진 우물가에서 차가운 물로 끈적한 몸을 씻어낸 백운은 깃털처럼 가벼워진 감각을 느끼며 상태창을 띄웠다.
[ 경지: 삼류 - 최상급 ]
[ 내공: 8년 (정제됨) ]
[ 근력: 12 (▲4) / 민첩: 13 (▲2) ]
[ 기능점: 10 ]
“이제야 사람 구실을 좀 하는군.”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다만, 항상 달고 살던 만성 피로와 근육의 미세한 떨림이 사라졌다. 푸석푸석하던 피부에 약간의 혈색이 돌고, 흐릿했던 시야가 맑아졌다.
마이너스였던 상태가 겨우 '제로(0)'로 돌아온 셈이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해."
근력 12 대 18. 체급 차이는 명확했다. 이 상태로 붙었다간 뼈도 못 추릴 게 뻔하다. 게다가 단기간 내에 이 격차를 줄이는 건 불가능.
그렇다면 남은 수는 단 하나.
백운의 시선이 허공에 뜬 상태창의 [철권] 항목에 꽂혔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보유한 기능점 10점을 전부 그곳에 쏟아부었다.
그 순간,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뇌수를 태우는 듯한 끔찍한 격통. 백운은 비명조차 삼킨 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시간의 압축. 그리고 경험의 강제 이식.'
백운의 몸이 감전된 듯 격렬하게 경련했다. 손톱이 바닥을 긁어 핏물이 맺혔다.
의식이 흐릿해지는 고열 속에서 백운의 눈앞에는 한 장면이 펼쳐졌다. 눈보라 치는 설산 한복판에서, 혹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주먹이 짓무르도록 수천, 수만 번의 정권 지르기를 반복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 처절한 시간의 기록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신경계에 억지로 각인되고 있었다.
이마에 핏대가 솟고, 전신 근육이 비틀렸다.
영겁처럼 느껴지던 찰나의 고통이 훑고 지나간 자리. 고통은 예고 없이 찾아왔던 만큼이나 썰물처럼 빠르게 빠져나갔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토해내며 백운이 비틀대듯 몸을 일으켰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잠시 호흡을 고르는가 싶더니, 돌연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지면을 박차는 발끝의 파동이 허리의 회전을 타고 어깨로, 그리고 주먹 끝으로 전달되었다. 손가락 끝의 미세한 각도부터 근육의 수축과 이완,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된 일격.
파앙-!
마치 평생을 그 동작 하나만 깎아온 장인처럼, 백운의 주먹이 물 흐르듯 유려하게 허공을 갈랐다.
[ 철권(鐵拳) - [범급/명경] (숙련도: 1.00%) ]
명경(明鏡).
그것은 머리가 명령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경지. 수없는 반복 숙달이 빚어낸 육체의 본능, '근육 기억(Muscle Memory)'의 완성이었다.
"후우..."
백운은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낯설면서도, 소름 끼치도록 익숙한 감각.
정기환이 다져놓은 기초 체력 위에, 시스템이 강제로 덧씌운 수련의 데이터가 결합했다. 만약 오전에 이 정도 실력이었다면, 장칠은 제 발로 연무장을 걸어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 갖춰졌다.
같은 시각, 칠곡현(漆谷縣) 남쪽.
관아의 고관대작이나 상권을 쥔 거상들만이 모여 산다는 칠곡현 최고의 부촌(富村). 그 변두리에 위치한 저택 안.
"빌어먹을! 그 쥐새끼가!"
와장창!
깨진 찻잔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장칠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한 채 씩씩거렸다. 아침 연무장에서 당한 망신. 연습 대련이었다고는 하나, 천한 삼대 제자의 주먹에 턱이 돌아갔다는 사실이 그의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존심을 난도질했다.
"진정하게, 장칠."
그의 앞에는 눈매가 뱀처럼 가늘고 음흉한 인상의 노인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철권문의 재정을 담당하는 장로, 이 저택의 주인인 '박쥐 영감'이라 불리는 박 장로였다. 그는 장칠의 무례를 못본것마냥 여유롭게 찻잔을 기울였다. 그에게 장칠은 문파의 제자 뿐만아니라, 돈을 물어오는 쓸만한 '사냥개'에 불과했으니까. 사냥개가 좀 짖는다고 주인이 화를 내지는 않는 법이다.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그놈 눈빛을 보셨어야 합니다. 아주 독이 바짝 올랐더군요. 그냥 놔뒀다간 제 입지가 위험해질 겁니다."
박 장로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고작 삼대 제자 하나 때문에 이 난리란 말인가?"
철권문의 실세인 그에게, 말단 제자의 반항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래서, 어쩌려는 게냐?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라도 해달라는 건가? 보는 눈이 많아. 명분 없이 제자를 죽였다간 자네가 곤란해져."
"압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러 온 거 아닙니까."
장칠이 박 장로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
"곧 있을 '월례 비무(月例 比武)'... 대진표를 좀 손봐주십시오."
"대진표라."
박 장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예. 그놈을 가장 잔인하고 처참하게 짓밟힐 수 있는 상대로 붙여주십시오."
박 장로는 즉답 대신, 윤기 흐르는 자단목(紫檀木)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의미심장한 침묵을 지켰다.
장칠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재빠르게 품속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철그럭.
둔탁하면서도 묵직한 금속음. 삼대 제자들의 고혈을 짜내어 모은 은자(銀子) 뭉치였다.
"이 정도면, 그 쥐새끼의 노잣돈으로는 충분하겠지요?"
박 장로는 주머니의 끈을 풀어 슬쩍 내용물을 확인했다. 반짝이는 은전들을 확인하자 그의 얼굴에 비로소 자애로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암, 충분하고말고. 걱정 말게. 이번 비무가 끝나면 백운 그놈은 제 발로 걸어서는 나가지 못할 테니."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백운이 보여준 압도적인 일격, 그리고 장칠의 턱을 돌려버린 그 충격적인 광경에 압도된 탓이었다.
백운은 그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서 있기도 힘들었다. 모든 힘을 쏟아부은 대가로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태연한 척 걸음을 옮겼다. 훈련이고 뭐고, 지금은 휴식이 절실했다.
숙소로 향하는 인적 드문 샛길.
뒤에서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살기는 없었다.
누군가 주변 눈치를 살피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백운의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툭."
옷깃이 스치는 찰나, 백운의 소매 안쪽으로 묵직한 무언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마석이었다.
그는 멈추지도,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입술만 달싹여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를 남겼다.
"장칠 방... 깊숙한 곳에 있더라. 걸릴까 봐 죽는 줄 알았어."
마석은 그대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행인처럼. 하지만 스쳐 지나가는 그의 귓가와 목덜미는 극도의 긴장과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백운은 멈춰 서지 않고 자연스럽게 소매를 갈무리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약병의 감촉.
제대로 가져왔군.
그는 마석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날 밤. 백운은 숙소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낮의 전투 데이터는 명확했다. 장칠의 근력 18. 지금 몸으론 정면 승부 불가. 격차를 줄여야 한다.
백운은 품에서 마석이 몰래 건네준 약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쌉싸름한 약초 향이 코끝을 찔렀다. 손바닥 위에 굴러나온 것은 검붉은 빛이 감도는 엄지 손톱만한 환약이었다.
'정기환(精氣丸).'
철권문에서 오직 1대 제자들에게만 매달 한 알씩 지급된다는 특별 보급품. 문파의 핵심 전력에게만 허락된 물건이니, 잡일꾼인 백운이나 마석 같은 3대 제자들은 평생 구경조차 하기 힘든 물건이다.
[ 아이템: 정기환 (등급: 범급 최상) ]
[ 효과: 기혈 소통, 내공 소폭 상승 ]
망설임 없이 환약을 털어 넣었다.
식도를 타고 넘어간 약 기운이 위장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단순한 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빈약한 혈관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거칠고 뜨거운 기운이었다.
"으윽…!"
백운은 즉시 삼재심법을 운용했다. 사방으로 흩어지려는 기운을 의념(意念)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아직 내공은 미약하고 통제는 거칠었지만, 전생의 감각을 총동원해 제멋대로 날뛰는 에너지를 끈질기게 한 곳으로 유도했다.
'목표는 단중혈(膻中穴).'
백운은 겨우 모아낸 기운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쾅-!
가슴 정중앙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울렸다. 동시에 불에 달군 쇠꼬챙이가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끔찍한 격통이 뇌를 강타했지만
백운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이를 꽉 깨물어 삼켰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집중력만은 놓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충격으로 무너질 벽이 아니었다.
백운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고, 흩어진 기운을 다시 긁어모았다.
열 번이 안 되면 백 번, 백 번이 안 되면 천 번.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반복되는 격통에 감각이 무뎌지고, 한계에 다다른 의식이 툭 하고 끊어지려던 찰나였다.
콰직.
그 순간, 내면 깊은 곳에서 묵직한 진동이 울렸다.
마치 꽉 막혀있던 둑이 터지듯, 응집된 기운이 혈도를 뚫고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지옥 같던 고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머리가 맑아질 정도의 청량함이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에너지가 전신의 찌꺼기를 쓸어내는 듯한 강렬한 해방감.
곧이어 모공에서는 역한 냄새를 풍기는 검붉은 노폐물이 쏟아져 나왔다. 몸속에 쌓여있던 탁기가 배출되는 현상, 모공세수(毛孔洗髓)였다. 비록 환골탈태와 같은 극적인 재구축은 아니었지만, 썩은 물이 고여있던 육체가 비로소 흐르는 강물처럼 바뀐 것이다.
동이 터올 무렵, 문파 구석진 우물가에서 차가운 물로 끈적한 몸을 씻어낸 백운은 깃털처럼 가벼워진 감각을 느끼며 상태창을 띄웠다.
[ 경지: 삼류 - 최상급 ]
[ 내공: 8년 (정제됨) ]
[ 근력: 12 (▲4) / 민첩: 13 (▲2) ]
[ 기능점: 10 ]
“이제야 사람 구실을 좀 하는군.”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다만, 항상 달고 살던 만성 피로와 근육의 미세한 떨림이 사라졌다. 푸석푸석하던 피부에 약간의 혈색이 돌고, 흐릿했던 시야가 맑아졌다.
마이너스였던 상태가 겨우 '제로(0)'로 돌아온 셈이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해."
근력 12 대 18. 체급 차이는 명확했다. 이 상태로 붙었다간 뼈도 못 추릴 게 뻔하다. 게다가 단기간 내에 이 격차를 줄이는 건 불가능.
그렇다면 남은 수는 단 하나.
백운의 시선이 허공에 뜬 상태창의 [철권] 항목에 꽂혔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보유한 기능점 10점을 전부 그곳에 쏟아부었다.
그 순간,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뇌수를 태우는 듯한 끔찍한 격통. 백운은 비명조차 삼킨 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시간의 압축. 그리고 경험의 강제 이식.'
백운의 몸이 감전된 듯 격렬하게 경련했다. 손톱이 바닥을 긁어 핏물이 맺혔다.
의식이 흐릿해지는 고열 속에서 백운의 눈앞에는 한 장면이 펼쳐졌다. 눈보라 치는 설산 한복판에서, 혹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주먹이 짓무르도록 수천, 수만 번의 정권 지르기를 반복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 처절한 시간의 기록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신경계에 억지로 각인되고 있었다.
이마에 핏대가 솟고, 전신 근육이 비틀렸다.
영겁처럼 느껴지던 찰나의 고통이 훑고 지나간 자리. 고통은 예고 없이 찾아왔던 만큼이나 썰물처럼 빠르게 빠져나갔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토해내며 백운이 비틀대듯 몸을 일으켰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잠시 호흡을 고르는가 싶더니, 돌연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지면을 박차는 발끝의 파동이 허리의 회전을 타고 어깨로, 그리고 주먹 끝으로 전달되었다. 손가락 끝의 미세한 각도부터 근육의 수축과 이완,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된 일격.
파앙-!
마치 평생을 그 동작 하나만 깎아온 장인처럼, 백운의 주먹이 물 흐르듯 유려하게 허공을 갈랐다.
[ 철권(鐵拳) - [범급/명경] (숙련도: 1.00%) ]
명경(明鏡).
그것은 머리가 명령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경지. 수없는 반복 숙달이 빚어낸 육체의 본능, '근육 기억(Muscle Memory)'의 완성이었다.
"후우..."
백운은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낯설면서도, 소름 끼치도록 익숙한 감각.
정기환이 다져놓은 기초 체력 위에, 시스템이 강제로 덧씌운 수련의 데이터가 결합했다. 만약 오전에 이 정도 실력이었다면, 장칠은 제 발로 연무장을 걸어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 갖춰졌다.
같은 시각, 칠곡현(漆谷縣) 남쪽.
관아의 고관대작이나 상권을 쥔 거상들만이 모여 산다는 칠곡현 최고의 부촌(富村). 그 변두리에 위치한 저택 안.
"빌어먹을! 그 쥐새끼가!"
와장창!
깨진 찻잔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장칠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한 채 씩씩거렸다. 아침 연무장에서 당한 망신. 연습 대련이었다고는 하나, 천한 삼대 제자의 주먹에 턱이 돌아갔다는 사실이 그의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존심을 난도질했다.
"진정하게, 장칠."
그의 앞에는 눈매가 뱀처럼 가늘고 음흉한 인상의 노인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철권문의 재정을 담당하는 장로, 이 저택의 주인인 '박쥐 영감'이라 불리는 박 장로였다. 그는 장칠의 무례를 못본것마냥 여유롭게 찻잔을 기울였다. 그에게 장칠은 문파의 제자 뿐만아니라, 돈을 물어오는 쓸만한 '사냥개'에 불과했으니까. 사냥개가 좀 짖는다고 주인이 화를 내지는 않는 법이다.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그놈 눈빛을 보셨어야 합니다. 아주 독이 바짝 올랐더군요. 그냥 놔뒀다간 제 입지가 위험해질 겁니다."
박 장로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고작 삼대 제자 하나 때문에 이 난리란 말인가?"
철권문의 실세인 그에게, 말단 제자의 반항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래서, 어쩌려는 게냐?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라도 해달라는 건가? 보는 눈이 많아. 명분 없이 제자를 죽였다간 자네가 곤란해져."
"압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러 온 거 아닙니까."
장칠이 박 장로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
"곧 있을 '월례 비무(月例 比武)'... 대진표를 좀 손봐주십시오."
"대진표라."
박 장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예. 그놈을 가장 잔인하고 처참하게 짓밟힐 수 있는 상대로 붙여주십시오."
박 장로는 즉답 대신, 윤기 흐르는 자단목(紫檀木)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의미심장한 침묵을 지켰다.
장칠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재빠르게 품속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철그럭.
둔탁하면서도 묵직한 금속음. 삼대 제자들의 고혈을 짜내어 모은 은자(銀子) 뭉치였다.
"이 정도면, 그 쥐새끼의 노잣돈으로는 충분하겠지요?"
박 장로는 주머니의 끈을 풀어 슬쩍 내용물을 확인했다. 반짝이는 은전들을 확인하자 그의 얼굴에 비로소 자애로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암, 충분하고말고. 걱정 말게. 이번 비무가 끝나면 백운 그놈은 제 발로 걸어서는 나가지 못할 테니."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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