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대호(大虎)를 깨우다
조회 : 115 추천 : 0 글자수 : 7,913 자 2026-01-22
비무가 끝난 직후, 장칠의 처소.
"으아아악! 이 빌어먹을 새끼가!"
와장창!
고급 청자 찻잔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장칠의 분노는 그것만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씩씩거리며 방 안을 서성이다가, 눈에 보이는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감히 네놈이 나를 물 먹여? 천한 잡종 새끼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시야가 붉게 물들 지경이었다. 조영이 졌다는 사실보다, 그 쥐새끼 같은 백운 놈이 자신을 비웃듯 승리를 챙겨갔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쾅, 쾅, 쾅!
그때, 닫힌 방문을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야! 뒈지고 싶어? 꺼지라고 했지!"
장칠이 핏발 선 눈으로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문밖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혀, 형님! 접니다, 삼수입니다! 문 좀 열어보십쇼!"
"삼수?"
"큰일 났습니다! 도박판... 도박판에 사단이 났습니다!"
장칠이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문밖에는 삼수가 땀범벅이 된 채 사색이 되어 서 있었다.
"무슨 소리야? 도박판에 사단이 나다니?"
삼수는 숨을 헐떡이며 방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다리가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았다.
"형님... 좆됐습니다. 판돈 계산을 해봤는데... 수지가 아예 안 맞습니다."
"뭐? 수지가 안 맞아? 똑바로 말해 봐."
장칠에게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방금 정산을 끝냈는데... 당장 내줘야 할 배당금이... 무려 삼백 냥입니다."
"뭐? 몇 냥?"
"사, 삼백 냥이요..."
장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삼수의 멱살을 틀어쥐고 거칠게 흔들었다.
"삼백 냥? 야 이 개새끼야, 지금 나랑 숫자 놀음하냐? 비무장이 터져나가든 말든, 그 거지 떼 놈들 주머니를 탈탈 털어도 삼백 냥이 나올 구석이 있어? 네놈이 중간에서 슈킹한 거 아니야?"
"아이고, 형님! 억울합니다! 제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형님 돈을 어떻게 건드립니까! 저도 눈깔 빠지게 다시 세어봤는데 맞습니다. 그냥 백운한테 건 사람이 생각보다 너무 많았습니다."
장칠은 잡고 있던 멱살을 거칠게 밀쳐 삼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똑바로 불어. 대체 무슨 짓거리를 벌인 거야."
"시키신 대로 했잖습니까! 호구 새끼들 꼬시려면 판때기 좀 불려야 한다고, 백운 쪽 배당을 파격적으로 올리라고..."
"그래, 어차피 질 놈이니 배당을 열 배로 띄웠지. 그게 뭐?"
"그게 사단이었습니다. 아무도 안 걸 줄 알았는데, 배당이 높으니까 혹시나 하고 푼돈을 건 놈들이 예상보다 너무 많았습니다! 워낙 고배당이라 그 푼돈들이 죄다 거금이 되어버렸단 말입니다!"
삼수의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조영 쪽에 걸린 돈을 전부 합쳐도 어림없습니다. 배당이 열 배인데 무슨 수로 감당합니까! 들어온 돈으로 메꾸는 건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장칠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현기증을 느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러니까... 조영 쪽에 걸린 돈을 다 털어넣고도, 내 생돈을 그만큼이나 더 뱉어내란 말이냐?"
"예... 워낙 배당이 세서 조영 쪽 판돈으로는 턱도 없습니다. 형님 사비로 적어도 이백 냥은 넘게 메꾸셔야 하는데..."
"형님, 어쩝니까? 밖에는 돈 내놓으라고 난리들인데... 지금 금고 탈탈 털어도 오십 냥이 안 됩니다. 배당금 다 내주면 우리 그냥 죽습니다!"
장칠은 입술을 깨물었다. 욕심을 부려 판을 너무 키운 게 화근이었다. 백운이라는 쥐새끼 한 마리가 둑을 무너뜨려 버린 것이다. 이대로 빈털터리가 되면 끝장이다. 당장 박 장로에게 바쳐야 할 상납금도 마련하지 못하게 되면, 쓸모가 없어진 자신은 가차 없이 버려질 게 뻔했다.
"막아."
"예?"
"단 한 푼도 못 준다고 해! 배를 가르든 말든 맘대로 하라 그래!"
장칠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조영이 실수한 거고, 백운이 비겁한 암수를 썼다고 우겨. 이번 판은 무효야! 본전만 돌려주고, 따지는 새끼들은 본보기로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서 내쫓아!"
"하, 하지만 보는 눈이..."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돈 주면 내가 죽어!"
장칠의 악에 받친 고함이 처실을 울렸다.
같은 시각, 백운의 처소.
낡은 침상에 걸터앉은 백운은 피와 땀으로 엉겨 붙은 상의를 힘겹게 벗어냈다.
"으윽..."
굳어가는 상처 부위가 옷감에서 떨어져 나갈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뇌를 찔렀다. 백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눈동자는 허공에 떠 있는 상태창을 냉철하게 훑고 있었다.
[근력: 14 (+2) \\ 민첩: 14 (+1) \\ 감각: 17 (+2)]
'나쁘지 않군.'
근력이 단숨에 2나 올랐다. 뼈를 깎는 수련으로도 몇 달은 걸릴 성취가, 단 한 번의 목숨을 건 실전으로 이루어졌다.
'3대 제자가 2대 제자를 꺾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해.'
어깨가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문파 내에서의 입지 변화와 실전 경험, 그리고 스탯 상승까지. 회복에 필요한 시간과 약값을 대입해 계산해봐도 이득이 훨씬 컸다.
그때였다. 끼익.
백운의 방문이 힘없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마석이었다. 그런데 녀석의 상태가 묘했다. 세상 다 잃은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들어오더니, 백운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바닥만 멍하니 응시했다.
백운은 상의를 걸치다 말고 그런 마석을 힐끔 쳐다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백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제야 마석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장칠 형님이... 돈을 못 주겠대."
"돈?"
"그래, 배당금 말이야. 이번 판은 무효라면서 원금만 던져주더라."
마석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나는 형님 라인 아니냐. 그래서 가서 따로 사정 좀 했지. 형님, 접니다. 제 몫은 좀 챙겨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하고."
"그랬더니?"
"눈치 없는 새끼라고 쌍욕을 박으면서 쫓아내더라. 한 번만 더 돈 달라고 얼쩡거리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겠대."
마석이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허벅지를 내리쳤다.
"내가 지 밑에서 궂은일은 도맡아 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 내가 그동안 형님한테 바친 충성이 얼만데!"
백운은 잠시 침묵했다.
"얼마나 걸었는데?"
"다섯냥... 내 전 재산을 다 걸었어. 배당금까지 합치면 쉰다섯냥이야. 그 돈이면 앞으로 몇년은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데... 그걸 다 날리게 생겼다고!"
마석이 울분을 토하며 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전표를 꺼내 보였다.
"밖에서는 장칠 형님이 이번 판 키우려고 바람잡이까지 썼다는 소문이 파다해. 자기 돈까지 미끼로 넣어서 배당률 뻥튀기해놨는데, 막상 잃게 생기니까 우리 같은 아랫것들 돈부터 떼어먹는 거라고."
"바람잡이?"
순간, 백운의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정황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졌다. 장칠은 판을 키우기 위해 제 돈을 미끼로 던져 배당을 조작하고 바람을 잡았다. 사람들은 그 분위기에 휩쓸려 돈을 걸었지만, 결과는 백운의 승리. 즉, 지금 배당금을 내주려다간 도박판의 수익은커녕, 미끼로 던져놓은 제 쌈짓돈까지 몽땅 토해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자충수(自充手)를 뒀군.'
백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장칠이 배 째라 식으로 나오는 이유가 명확해졌다. 단순히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정직하게 정산해줬다가는 장칠 본인이 파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놈들은 지금 지들이 설계한 사기판에서 역으로 털리게 생기니까, 만만한 너희들한테 책임을 떠넘기고 입을 씻어버렸다. 이거군."
"그래! 장칠 그 사람 평소 씀씀이 보면 사금고에 50냥도 없을걸? 그러니까 눈에 불을 켜고 안 준다고 난리지... 젠장, 내 돈... 형님 믿고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마석이 바닥을 치며 울분을 토했다. 장칠의 탐욕이 부른 자멸의 수. 이것은 단순한 채무 불이행이 아니다.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이자, 동문들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인 명백한 약점이다.
이것은 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명분이다. 문파 내에서 겉돌고 있는 '그 괴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명분.
백운은 말없이 마석의 손에 들린 구겨진 전표를 낚아챘다.
"야, 그거 가져가서 뭐 하게? 이미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어. 형님이 배 째라는데 우리가 무슨 힘으로 받아내? 가서 따지다가 진짜 맞나 죽는다고. 지금 독이 바짝 올랐어."
"힘이 없으면 빌리면 그만이지."
"빌려? 누구한테?"
백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증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기회'가 보였다.
"마석, 돌려받은 원금 있지? 다섯 냥."
"어? 야, 이건 안 돼! 내 전 재산이라고!"
"겨우 본전만 건지고 물러날 거야? 아니면 투자해서 55냥 다 받아낼 거야?"
"......!"
"투자해. 확실하게 회수해 줄 테니까. 대신 회수 대행 수수료는 3할이다."
백운의 확신에 찬 눈빛. 마석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기엔 배신감이 너무 컸고, 백운의 눈빛은 이상하게도 신뢰가 갔다.
"에라, 모르겠다! 다 날려도 내 팔자지!"
마석이 눈을 질끈 감고 품에 꼭 쥐고 있던 은자 주머니를 건넸다. 백운은 그 돈을 받아 들고 객잔으로 향했다.
'놈이 거절하지 못할 술을 사야겠군.'
철권문 뒤편, 인적이 드문 대나무 숲 깊은 곳.
콰직! 쾅!
숲 입구에서부터 대지를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거대한 바위들이 산산조각이 난 채 흩어져 있었고, 그 잔해 한가운데에 상의를 탈의한 거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왕호(王虎). 문파 내 권력 다툼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 유배를 자처한 2대 제자 서열 1위.
'천생신력(天生神力)의 소유자이자 선대 문주에 의해 키워진 고아. 스승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썩어가는 문파를 차마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유배를 자처한 2대 제자 서열 1위.'
"흡!"
그는 굵은 동아줄로 칭칭 감은 참나무 기둥을 향해 정권(正拳)을 내질렀다. 얼핏 단순하고 투박해 보이는 지르기였으나, 그 안에 담긴 경력(勁力)은 흉기 그 자체였다. 타격과 함께 나무 기둥이 비명을 지르며 깊게 패어 들어갔고,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주변의 공기를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게 만들었다.
'역시... 데이터로 보던 것보다 훨씬 압도적이군.'
백운은 인기척을 내며 다가갔다. 왕호는 주먹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빛은 맹수의 그것처럼 형형했다.
"누구냐. 내 수련 시간에는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백운은 "누구냐"는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들고 온 묵직한 항아리를 평상 위에 툭 내려놓고는 보란 듯이 뚜껑을 열어젖혔다.
확!
진하고 향긋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퍼졌으니, 그것은 마석의 전 재산을 탈탈 털어 사 온 천곡현 최고의 명주 '백화주(百花酒)'였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 데다, 고된 육체 수련으로 목이 타던 왕호의 콧구멍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코끝을 스치는 향기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파고들자, 그가 맹수 같은 눈빛을 거두고 항아리에 시선을 꽂았고 그 틈을 타 백운이 입을 열었다.
"3대 제자 백운입니다. 사형께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왕호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백운을 훑어보았다.
"아까 비무는 잘 봤다. 3대 제자 치곤 제법이었어. 그런데 그 몸으로 여긴 웬일이지? 축하주라도 받으러 온 거냐?"
"아뇨. 채권 추심을 의뢰하러 왔습니다."
"채권... 추심?"
왕호가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무장 놈들이 제가 이긴 판돈을 떼어먹으려 하더군요. 장칠 사형의 지시라면서요."
왕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장칠'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칠 그 놈이 운영하는 도박판 이야기군. 더러운 돈놀이나 하는 꼴이 역겨워서 피해 있었는데, 이제는 같은 문파 식구 돈까지 떼어먹나?"
왕호가 혀를 찼다. 그는 이미 장칠이 월례 비무 때마다 도박판을 벌인다는 사실을, 그리고 문파가 얼마나 썩어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썩은내 나는 일엔 관심 없다. 문파 꼴이 개판인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돌아가라."
왕호는 매몰차게 돌아섰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백운은 당황하지 않고, 백화주 항아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알고 계시면서 왜 놔두십니까?"
왕호의 발걸음이 멈췄다.
"알고도 모른 척, 보고도 못 본 척. 그렇게 산속에 틀어박혀 주먹질이나 하면 문파가 알아서 깨끗해집니까? 아니면 선대 문주님에 대한 부채감이 사라집니까?"
우드득. 왕호가 쥔 주먹에서 뼈 소리가 났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살기가 서린 눈빛으로 백운을 노려보았다.
"이 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장칠 사형이 이번엔 판돈을 떼어먹는 걸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돈을 달라 항의하는 하급 제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다리몽둥이를 분지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더군요."
"......"
"사형이 지키고 싶어 하는 건 철권문의 간판입니까, 아니면 껍데기만 남은 자존심입니까? 사형이 외면하는 동안, 문파의 뿌리는 이미 썩어서 문드러졌습니다."
백운의 말은 정곡이었다. 왕호라고 처음부터 방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문파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으나, 우직한 성정 탓에 교활한 장칠 일당의 권모술수를 당해내지 못하고 가진 권력마저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남은 것은 무력뿐이었지만, 그마저도 함부로 휘두를 수 없었다. 자신이 나서서 피바람을 일으키면 그 틈을 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외부의 적들에게 문파가 먹히거나 멸문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대 문주의 유언인 '문파를 지켜달라'는 말에 묶인 그는, 결국 썩어가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제가 가서 따질 겁니다. 제 몫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떼인 하급 제자들의 몫까지."
"네놈 혼자서? 장칠이 순순히 내줄 것 같으냐?"
"물론 힘으로 찍어누르려 하겠죠. 그래서 사형이 필요합니다."
백운이 왕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같이 싸워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와서 '지켜봐' 주십시오. 장칠이 힘으로 입을 막으려 할 때, 사형이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놈은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지 못할 겁니다."
왕호는 백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건방진 놈. 하지만 그 눈빛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자신은 실패하고 끝내 포기해버린 그 싸움을, 고작 3대 제자 놈이 정면으로 부딪치겠다고 하고 있었다.
"구경값은 이 술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리고..."
백운이 입꼬리를 올렸다.
"재밌을 겁니다. 사형이 외면했던 그 썩은 고름이 터지는 꼴을 보는 게."
왕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찼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힌 듯 답답했던 체증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언제까지 귀 막고 눈 감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왕호가 성큼성큼 다가와 백화주 항아리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벌컥, 벌컥. 술을 단숨에 들이키는 목울대가 힘차게 움직였다.
"크으...!"
입가에 흐른 술을 닦아내며, 왕호가 씨익 웃었다.
"좋다. 구경 한번 가보지. 네놈이 말한 대로 고름이 터질지, 아니면 네놈 머리통이 터질지."
백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까다로운 설득이 끝났다.
"가시죠, 사형. 구경하러."
"으아아악! 이 빌어먹을 새끼가!"
와장창!
고급 청자 찻잔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장칠의 분노는 그것만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씩씩거리며 방 안을 서성이다가, 눈에 보이는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감히 네놈이 나를 물 먹여? 천한 잡종 새끼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시야가 붉게 물들 지경이었다. 조영이 졌다는 사실보다, 그 쥐새끼 같은 백운 놈이 자신을 비웃듯 승리를 챙겨갔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쾅, 쾅, 쾅!
그때, 닫힌 방문을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야! 뒈지고 싶어? 꺼지라고 했지!"
장칠이 핏발 선 눈으로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문밖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혀, 형님! 접니다, 삼수입니다! 문 좀 열어보십쇼!"
"삼수?"
"큰일 났습니다! 도박판... 도박판에 사단이 났습니다!"
장칠이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문밖에는 삼수가 땀범벅이 된 채 사색이 되어 서 있었다.
"무슨 소리야? 도박판에 사단이 나다니?"
삼수는 숨을 헐떡이며 방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다리가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았다.
"형님... 좆됐습니다. 판돈 계산을 해봤는데... 수지가 아예 안 맞습니다."
"뭐? 수지가 안 맞아? 똑바로 말해 봐."
장칠에게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방금 정산을 끝냈는데... 당장 내줘야 할 배당금이... 무려 삼백 냥입니다."
"뭐? 몇 냥?"
"사, 삼백 냥이요..."
장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삼수의 멱살을 틀어쥐고 거칠게 흔들었다.
"삼백 냥? 야 이 개새끼야, 지금 나랑 숫자 놀음하냐? 비무장이 터져나가든 말든, 그 거지 떼 놈들 주머니를 탈탈 털어도 삼백 냥이 나올 구석이 있어? 네놈이 중간에서 슈킹한 거 아니야?"
"아이고, 형님! 억울합니다! 제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형님 돈을 어떻게 건드립니까! 저도 눈깔 빠지게 다시 세어봤는데 맞습니다. 그냥 백운한테 건 사람이 생각보다 너무 많았습니다."
장칠은 잡고 있던 멱살을 거칠게 밀쳐 삼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똑바로 불어. 대체 무슨 짓거리를 벌인 거야."
"시키신 대로 했잖습니까! 호구 새끼들 꼬시려면 판때기 좀 불려야 한다고, 백운 쪽 배당을 파격적으로 올리라고..."
"그래, 어차피 질 놈이니 배당을 열 배로 띄웠지. 그게 뭐?"
"그게 사단이었습니다. 아무도 안 걸 줄 알았는데, 배당이 높으니까 혹시나 하고 푼돈을 건 놈들이 예상보다 너무 많았습니다! 워낙 고배당이라 그 푼돈들이 죄다 거금이 되어버렸단 말입니다!"
삼수의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조영 쪽에 걸린 돈을 전부 합쳐도 어림없습니다. 배당이 열 배인데 무슨 수로 감당합니까! 들어온 돈으로 메꾸는 건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장칠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현기증을 느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러니까... 조영 쪽에 걸린 돈을 다 털어넣고도, 내 생돈을 그만큼이나 더 뱉어내란 말이냐?"
"예... 워낙 배당이 세서 조영 쪽 판돈으로는 턱도 없습니다. 형님 사비로 적어도 이백 냥은 넘게 메꾸셔야 하는데..."
"형님, 어쩝니까? 밖에는 돈 내놓으라고 난리들인데... 지금 금고 탈탈 털어도 오십 냥이 안 됩니다. 배당금 다 내주면 우리 그냥 죽습니다!"
장칠은 입술을 깨물었다. 욕심을 부려 판을 너무 키운 게 화근이었다. 백운이라는 쥐새끼 한 마리가 둑을 무너뜨려 버린 것이다. 이대로 빈털터리가 되면 끝장이다. 당장 박 장로에게 바쳐야 할 상납금도 마련하지 못하게 되면, 쓸모가 없어진 자신은 가차 없이 버려질 게 뻔했다.
"막아."
"예?"
"단 한 푼도 못 준다고 해! 배를 가르든 말든 맘대로 하라 그래!"
장칠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조영이 실수한 거고, 백운이 비겁한 암수를 썼다고 우겨. 이번 판은 무효야! 본전만 돌려주고, 따지는 새끼들은 본보기로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서 내쫓아!"
"하, 하지만 보는 눈이..."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돈 주면 내가 죽어!"
장칠의 악에 받친 고함이 처실을 울렸다.
같은 시각, 백운의 처소.
낡은 침상에 걸터앉은 백운은 피와 땀으로 엉겨 붙은 상의를 힘겹게 벗어냈다.
"으윽..."
굳어가는 상처 부위가 옷감에서 떨어져 나갈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뇌를 찔렀다. 백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눈동자는 허공에 떠 있는 상태창을 냉철하게 훑고 있었다.
[근력: 14 (+2) \\ 민첩: 14 (+1) \\ 감각: 17 (+2)]
'나쁘지 않군.'
근력이 단숨에 2나 올랐다. 뼈를 깎는 수련으로도 몇 달은 걸릴 성취가, 단 한 번의 목숨을 건 실전으로 이루어졌다.
'3대 제자가 2대 제자를 꺾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해.'
어깨가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문파 내에서의 입지 변화와 실전 경험, 그리고 스탯 상승까지. 회복에 필요한 시간과 약값을 대입해 계산해봐도 이득이 훨씬 컸다.
그때였다. 끼익.
백운의 방문이 힘없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마석이었다. 그런데 녀석의 상태가 묘했다. 세상 다 잃은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들어오더니, 백운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바닥만 멍하니 응시했다.
백운은 상의를 걸치다 말고 그런 마석을 힐끔 쳐다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백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제야 마석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장칠 형님이... 돈을 못 주겠대."
"돈?"
"그래, 배당금 말이야. 이번 판은 무효라면서 원금만 던져주더라."
마석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나는 형님 라인 아니냐. 그래서 가서 따로 사정 좀 했지. 형님, 접니다. 제 몫은 좀 챙겨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하고."
"그랬더니?"
"눈치 없는 새끼라고 쌍욕을 박으면서 쫓아내더라. 한 번만 더 돈 달라고 얼쩡거리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겠대."
마석이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허벅지를 내리쳤다.
"내가 지 밑에서 궂은일은 도맡아 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 내가 그동안 형님한테 바친 충성이 얼만데!"
백운은 잠시 침묵했다.
"얼마나 걸었는데?"
"다섯냥... 내 전 재산을 다 걸었어. 배당금까지 합치면 쉰다섯냥이야. 그 돈이면 앞으로 몇년은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데... 그걸 다 날리게 생겼다고!"
마석이 울분을 토하며 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전표를 꺼내 보였다.
"밖에서는 장칠 형님이 이번 판 키우려고 바람잡이까지 썼다는 소문이 파다해. 자기 돈까지 미끼로 넣어서 배당률 뻥튀기해놨는데, 막상 잃게 생기니까 우리 같은 아랫것들 돈부터 떼어먹는 거라고."
"바람잡이?"
순간, 백운의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정황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졌다. 장칠은 판을 키우기 위해 제 돈을 미끼로 던져 배당을 조작하고 바람을 잡았다. 사람들은 그 분위기에 휩쓸려 돈을 걸었지만, 결과는 백운의 승리. 즉, 지금 배당금을 내주려다간 도박판의 수익은커녕, 미끼로 던져놓은 제 쌈짓돈까지 몽땅 토해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자충수(自充手)를 뒀군.'
백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장칠이 배 째라 식으로 나오는 이유가 명확해졌다. 단순히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정직하게 정산해줬다가는 장칠 본인이 파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놈들은 지금 지들이 설계한 사기판에서 역으로 털리게 생기니까, 만만한 너희들한테 책임을 떠넘기고 입을 씻어버렸다. 이거군."
"그래! 장칠 그 사람 평소 씀씀이 보면 사금고에 50냥도 없을걸? 그러니까 눈에 불을 켜고 안 준다고 난리지... 젠장, 내 돈... 형님 믿고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마석이 바닥을 치며 울분을 토했다. 장칠의 탐욕이 부른 자멸의 수. 이것은 단순한 채무 불이행이 아니다.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이자, 동문들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인 명백한 약점이다.
이것은 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명분이다. 문파 내에서 겉돌고 있는 '그 괴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명분.
백운은 말없이 마석의 손에 들린 구겨진 전표를 낚아챘다.
"야, 그거 가져가서 뭐 하게? 이미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어. 형님이 배 째라는데 우리가 무슨 힘으로 받아내? 가서 따지다가 진짜 맞나 죽는다고. 지금 독이 바짝 올랐어."
"힘이 없으면 빌리면 그만이지."
"빌려? 누구한테?"
백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증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기회'가 보였다.
"마석, 돌려받은 원금 있지? 다섯 냥."
"어? 야, 이건 안 돼! 내 전 재산이라고!"
"겨우 본전만 건지고 물러날 거야? 아니면 투자해서 55냥 다 받아낼 거야?"
"......!"
"투자해. 확실하게 회수해 줄 테니까. 대신 회수 대행 수수료는 3할이다."
백운의 확신에 찬 눈빛. 마석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기엔 배신감이 너무 컸고, 백운의 눈빛은 이상하게도 신뢰가 갔다.
"에라, 모르겠다! 다 날려도 내 팔자지!"
마석이 눈을 질끈 감고 품에 꼭 쥐고 있던 은자 주머니를 건넸다. 백운은 그 돈을 받아 들고 객잔으로 향했다.
'놈이 거절하지 못할 술을 사야겠군.'
철권문 뒤편, 인적이 드문 대나무 숲 깊은 곳.
콰직! 쾅!
숲 입구에서부터 대지를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거대한 바위들이 산산조각이 난 채 흩어져 있었고, 그 잔해 한가운데에 상의를 탈의한 거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왕호(王虎). 문파 내 권력 다툼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 유배를 자처한 2대 제자 서열 1위.
'천생신력(天生神力)의 소유자이자 선대 문주에 의해 키워진 고아. 스승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썩어가는 문파를 차마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유배를 자처한 2대 제자 서열 1위.'
"흡!"
그는 굵은 동아줄로 칭칭 감은 참나무 기둥을 향해 정권(正拳)을 내질렀다. 얼핏 단순하고 투박해 보이는 지르기였으나, 그 안에 담긴 경력(勁力)은 흉기 그 자체였다. 타격과 함께 나무 기둥이 비명을 지르며 깊게 패어 들어갔고,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주변의 공기를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게 만들었다.
'역시... 데이터로 보던 것보다 훨씬 압도적이군.'
백운은 인기척을 내며 다가갔다. 왕호는 주먹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빛은 맹수의 그것처럼 형형했다.
"누구냐. 내 수련 시간에는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백운은 "누구냐"는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들고 온 묵직한 항아리를 평상 위에 툭 내려놓고는 보란 듯이 뚜껑을 열어젖혔다.
확!
진하고 향긋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퍼졌으니, 그것은 마석의 전 재산을 탈탈 털어 사 온 천곡현 최고의 명주 '백화주(百花酒)'였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 데다, 고된 육체 수련으로 목이 타던 왕호의 콧구멍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코끝을 스치는 향기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파고들자, 그가 맹수 같은 눈빛을 거두고 항아리에 시선을 꽂았고 그 틈을 타 백운이 입을 열었다.
"3대 제자 백운입니다. 사형께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왕호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백운을 훑어보았다.
"아까 비무는 잘 봤다. 3대 제자 치곤 제법이었어. 그런데 그 몸으로 여긴 웬일이지? 축하주라도 받으러 온 거냐?"
"아뇨. 채권 추심을 의뢰하러 왔습니다."
"채권... 추심?"
왕호가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무장 놈들이 제가 이긴 판돈을 떼어먹으려 하더군요. 장칠 사형의 지시라면서요."
왕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장칠'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칠 그 놈이 운영하는 도박판 이야기군. 더러운 돈놀이나 하는 꼴이 역겨워서 피해 있었는데, 이제는 같은 문파 식구 돈까지 떼어먹나?"
왕호가 혀를 찼다. 그는 이미 장칠이 월례 비무 때마다 도박판을 벌인다는 사실을, 그리고 문파가 얼마나 썩어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썩은내 나는 일엔 관심 없다. 문파 꼴이 개판인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돌아가라."
왕호는 매몰차게 돌아섰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백운은 당황하지 않고, 백화주 항아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알고 계시면서 왜 놔두십니까?"
왕호의 발걸음이 멈췄다.
"알고도 모른 척, 보고도 못 본 척. 그렇게 산속에 틀어박혀 주먹질이나 하면 문파가 알아서 깨끗해집니까? 아니면 선대 문주님에 대한 부채감이 사라집니까?"
우드득. 왕호가 쥔 주먹에서 뼈 소리가 났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살기가 서린 눈빛으로 백운을 노려보았다.
"이 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장칠 사형이 이번엔 판돈을 떼어먹는 걸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돈을 달라 항의하는 하급 제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다리몽둥이를 분지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더군요."
"......"
"사형이 지키고 싶어 하는 건 철권문의 간판입니까, 아니면 껍데기만 남은 자존심입니까? 사형이 외면하는 동안, 문파의 뿌리는 이미 썩어서 문드러졌습니다."
백운의 말은 정곡이었다. 왕호라고 처음부터 방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문파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으나, 우직한 성정 탓에 교활한 장칠 일당의 권모술수를 당해내지 못하고 가진 권력마저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남은 것은 무력뿐이었지만, 그마저도 함부로 휘두를 수 없었다. 자신이 나서서 피바람을 일으키면 그 틈을 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외부의 적들에게 문파가 먹히거나 멸문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대 문주의 유언인 '문파를 지켜달라'는 말에 묶인 그는, 결국 썩어가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제가 가서 따질 겁니다. 제 몫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떼인 하급 제자들의 몫까지."
"네놈 혼자서? 장칠이 순순히 내줄 것 같으냐?"
"물론 힘으로 찍어누르려 하겠죠. 그래서 사형이 필요합니다."
백운이 왕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같이 싸워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와서 '지켜봐' 주십시오. 장칠이 힘으로 입을 막으려 할 때, 사형이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놈은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지 못할 겁니다."
왕호는 백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건방진 놈. 하지만 그 눈빛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자신은 실패하고 끝내 포기해버린 그 싸움을, 고작 3대 제자 놈이 정면으로 부딪치겠다고 하고 있었다.
"구경값은 이 술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리고..."
백운이 입꼬리를 올렸다.
"재밌을 겁니다. 사형이 외면했던 그 썩은 고름이 터지는 꼴을 보는 게."
왕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찼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힌 듯 답답했던 체증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언제까지 귀 막고 눈 감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왕호가 성큼성큼 다가와 백화주 항아리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벌컥, 벌컥. 술을 단숨에 들이키는 목울대가 힘차게 움직였다.
"크으...!"
입가에 흐른 술을 닦아내며, 왕호가 씨익 웃었다.
"좋다. 구경 한번 가보지. 네놈이 말한 대로 고름이 터질지, 아니면 네놈 머리통이 터질지."
백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까다로운 설득이 끝났다.
"가시죠, 사형. 구경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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