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정산
조회 : 113 추천 : 0 글자수 : 4,615 자 2026-01-26
철권문(鐵拳門)의 뒤편, 잡동사니가 널브러진 낡은 창고 앞. 평소라면 쥐 죽은 듯 고요했을 그곳은 지금 터질 듯한 분노와 고성으로 들끓고 있었다.
"이 사기꾼 놈들아! 원금만 돌려준다는 게 말이 되냐!" "내가 건 돈이 얼만데! 당장 배당금을 내놓아라!"
아우성치는 이들은 이번 비무를 구경하러 온 외부인들과 큰맘 먹고 돈을 건 철권문 제자들이었다. '조영의 기혈(氣血)이 뒤틀렸다'는 핑계로 판돈을 무효화하고 원금만 돌려주겠다고 공지하자, 분노한 사람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그들 앞에는 삼수가 몽둥이를 든 2대 제자들을 대동한 채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시끄럽다! 다들 조용히 안 해?"
삼수가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이번 비무는 조영이 갑작스런 주화입마 조짐으로 제 실력을 못 낸 '무효' 판이라고! 땅을 파 봐라, 돈 한 푼 나오나! 원금이라도 건진 걸 다행으로 여기고 썩 꺼져!"
억지였다. 승패는 명확했고, 돈을 걸었으면 따는 것이 도박판의 철칙이다. 하지만 삼수의 뒤에는 철권문의 실세인 대사형 장칠이 버티고 있었고, 그 너머에는 뒷돈을 챙기는 박 장로의 비호가 있었다.
비록 쇠락해가는 조그만 문파라 해도 엄연한 무림 문파다. 일반인들이 감히 무력을 행사하며 난동을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힘없는 3대 제자들 역시 입으로만 불만을 터뜨릴 뿐, 감히 무력을 행사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삼수 사형 말씀이 맞습니다. 확실히 '이변(異變)'이 있었죠."
소란을 뚫고 차분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뭐야? 어떤 놈이..."
삼수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창고 건물이 만들어낸 길게 늘어진 그림자 속에서 두 개의 형상이 걸어 나왔다.
먼저 붉은 노을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낸 건 낡은 도복 차림의 백운이었다. 그리고 그 뒤, 역광에 가려진 짙은 그늘 속에서 마치 거대한 바위 같은 실루엣이 터벅터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쿵, 쿵.
묵직한 발소리가 울릴 때마다 소란스럽던 창고 앞은 찬물을 끼얹은 듯 빠르게 식어갔다.
"와, 왕... 왕호 사형?"
삼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단순히 덩치가 커서가 아니었다. 저 남자는 철권문의 그 누구도, 심지어 문주조차 힘으로는 함부로 제어할 수 없는 '통제 불능의 괴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왕호는 삼수나 군중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지루한 듯 하품만 쩍 할 뿐이었다. 그 철저한 무심함이 오히려 삼수에게는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저, 저 괴물이 왜 여기에...'
백운은 얼어붙은 삼수 앞으로 여유롭게 다가갔다.
"이변은 바로잡아야죠. 조영 사형의 몸 상태... 아니, 기혈이 뒤틀린 건 유감입니다만, 엄연히 시합은 치러졌고 승패의 결론도 났습니다. 그렇다면 배당금은 제대로 지급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운은 품에서 전표를 꺼내 삼수의 코앞에서 흔들었다.
"여기, 제 몫 50냥과 뒤에 서 있는 동문들의 정당한 배당금까지. 셈은 깔끔할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이, 미친... 이게 얼마인 줄 알고..."
삼수는 본능적으로 욕설을 뱉으려던 순간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왕호의 시선과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 삼수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왕호는 그저 무심히 쳐다봤을 뿐이지만, 그 눈빛은 마치 거대한 맹수가 코앞에서 입을 벌린 듯한 서늘함을 품고 있었다. 압도적인 위압감에 숨이 턱 막혀와, 삼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얼어붙고 말았다.
"자, 잠깐! 기다려! 대사형께 여쭤보고 올 테니!"
삼수는 도망치듯 황급히 몸을 돌려 장칠의 처소 쪽으로 내달렸다.
"뭐? 왕호 그 새끼가 백운이랑 같이 왔다고?"
장칠의 손에서 미끄러진 찻잔이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와장창!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그는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났다.
"이런 빌어먹을! 감히 내 앞마당까지 기어와서 행패를 부려?"
공들여 준비한 계획이 모조리 틀어진 것도 분통 터지는데, 감히 백운 따위가 왕호를 등에 업고 협박하러 왔다는 사실이 이성의 끈을 툭 끊어놓았다.
"사형! 지, 지금 나가시면 안 됩니다! 왕호 사형이..."
"비켜! 내가 나가서 그놈들 뼈마디를 죄다 부러뜨려 놓을 테니까!"
장칠은 만류하는 삼수를 거칠게 뿌리치고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기세등등하게 방문 밖으로 발을 내딛으려던 찰나.
'......!'
문득, 뇌리 깊숙이 묻어두었던 서늘한 기억이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수년 전, 천수문(天手門)의 고수들이 철권문을 급습했던 그날의 지옥도(地獄圖). 압도적인 전력 차에 문주조차 저항을 포기하려 했던 절망적인 밤. 그때 홀로 천수문의 고수들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던 것이 바로 왕호였다.
'으아아아아!'
적의 검이 몸을 베든 말든, 미친 듯이 웃으며 맨손으로 천수문 고수들의 사지를 찢어발기던 그 모습.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적의 피를 뒤집어쓰고, 붉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포효하던 피의 악귀. 그날 철권문이 멸문하지 않고 지금까지 천곡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그 괴물 한 명 덕분이었다.
당시 고작 평범한 2대 제자였던 장칠은 구석에 숨어 그 압도적인 살육을 지켜보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사시나무 떨듯 떨기만 했었다.
'내가 지금... 나가서 뭘 할 수 있지?'
찬물을 끼얹은 듯, 불타오르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내렸다. 지금 나가서 주먹을 뻗는 순간.
'죽는다.'
뼛속 깊이 각인된 트라우마와 현실적인 공포가 자존심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사형...?"
뒤따라 나온 삼수가 멈춰 선 장칠을 의아하게 불렀다. 장칠은 숨을 길게 내쉬더니 이를 꽉 깨물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내줘라."
"예? 방금 뭐라고..."
"돈 줘서 보내버리라고!"
장칠이 잡아먹을 듯이 삼수를 노려보았다. 왕호 앞에서 억눌렸던 공포와 수치심이, 만만한 삼수를 향해 봇물 터지듯 폭발했다.
"안 들려?! 돈 줘서 쫓아내란 말이다!"
"하, 하지만 사형... 탈탈 털어도 돈이 턱없이 모자랍니다... 그게 한두 푼도 아니고..."
"모자라면 빚을 내서라도 채워! 객잔이든 전당포든, 내 이름으로 차용증을 써서라도 만들어 와!"
장칠은 엉거주춤 서 있는 삼수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문밖으로 떠밀어 버렸다. 삼수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쫓겨나자, 장칠은 분을 이기지 못해 문가에 있던 의자를 걷어차 부숴버렸다.
우지끈!
그러고는 거칠게 문을 쾅 닫아버렸다. 요란한 소리에 문 앞에 남겨진 삼수는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잠시 후.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삼수가 돌아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융통해 온 은자 주머니들을 한데 모았다. 그러고는 그중에서 가장 먼저 백운의 몫을 챙겨 내밀었다.
"자... 여기. 네 몫이다. 다 됐지?"
백운은 건네받은 주머니를 품에 넣고는 슬쩍 한 발 옆으로 비켜섰다. 팔짱을 낀 채 턱짓으로 뒤를 가리키는 동작은 명확했다. 길을 터줄 테니 정산을 계속하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쭈뼛거리며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감히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때, 철권문 3대 제자가 백운의 뒤에 서있는 왕호를 한번 보더니 용기를 내 앞으로 나섰다.
"저, 저기..."
떨리는 손으로 전표가 내밀어졌다. 삼수는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눈을 부릅떴으나, 앞에서 느껴지는 왕호의 서늘한 시선에 흠칫 어깨를 떨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결국 삼수는 씹어뱉듯 투덜거리면서도 전표에 적힌 금액을 정확히 세어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짤랑.
은자가 손에 쥐어지는 청아한 소리에 제자들의 눈빛이 일변했다.
"진짜 준다!"
물꼬가 트이자 눈치만 보던 나머지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너도나도 전표를 내밀며 정산을 요구했고, 삼수의 손에 들린 주머니는 순식간에 홀쭉해져 갔다. 돈을 받아 든 사람들은 백운의 곁을 지나며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정산이 끝나자, 백운은 그제야 왕호와 함께 유유히 자리를 떴다.
돌아가는 산길, 백운은 품 속의 묵직한 주머니를 다시 한번 쥐어보았다. 50냥. 장칠이 빚까지 져가며 토해낸, 그야말로 그의 살점 같은 거금이었다.
"자, 받으십시오."
백운은 주머니에서 은자 10냥을 꺼내 왕호에게 건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형. 덕분에 수금이 수월했습니다."
"흥, 도와주긴 누가."
왕호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표정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사양하는 기색 없이 덥석 은자를 받아 챙겼다.
"술값은 했다. 그리고..."
왕호가 백운을 내려다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조심해라. 장칠은 뒤끝이 긴 놈이다. 제 비상금까지 털리고 빚까지 졌으니, 네놈에 대한 살의가 뼈에 사무쳤을 게다. 오늘 일로 네놈은 확실히 찍혔어. 다음엔 나도 못 막아준다."
"걱정 마십시오. 제 목숨줄은 제가 알아서 챙깁니다."
백운의 당돌한 대답에 왕호는 픽 웃음을 터뜨리고는, 털이 숭숭 난 손을 들어 백운의 어깨를 툭 쳤다.
"배짱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살아남아라."
왕호는 그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산속으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왕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백운은 나직이 읊조렸다.
"이제 시작이다."
"이 사기꾼 놈들아! 원금만 돌려준다는 게 말이 되냐!" "내가 건 돈이 얼만데! 당장 배당금을 내놓아라!"
아우성치는 이들은 이번 비무를 구경하러 온 외부인들과 큰맘 먹고 돈을 건 철권문 제자들이었다. '조영의 기혈(氣血)이 뒤틀렸다'는 핑계로 판돈을 무효화하고 원금만 돌려주겠다고 공지하자, 분노한 사람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그들 앞에는 삼수가 몽둥이를 든 2대 제자들을 대동한 채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시끄럽다! 다들 조용히 안 해?"
삼수가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이번 비무는 조영이 갑작스런 주화입마 조짐으로 제 실력을 못 낸 '무효' 판이라고! 땅을 파 봐라, 돈 한 푼 나오나! 원금이라도 건진 걸 다행으로 여기고 썩 꺼져!"
억지였다. 승패는 명확했고, 돈을 걸었으면 따는 것이 도박판의 철칙이다. 하지만 삼수의 뒤에는 철권문의 실세인 대사형 장칠이 버티고 있었고, 그 너머에는 뒷돈을 챙기는 박 장로의 비호가 있었다.
비록 쇠락해가는 조그만 문파라 해도 엄연한 무림 문파다. 일반인들이 감히 무력을 행사하며 난동을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힘없는 3대 제자들 역시 입으로만 불만을 터뜨릴 뿐, 감히 무력을 행사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삼수 사형 말씀이 맞습니다. 확실히 '이변(異變)'이 있었죠."
소란을 뚫고 차분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뭐야? 어떤 놈이..."
삼수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창고 건물이 만들어낸 길게 늘어진 그림자 속에서 두 개의 형상이 걸어 나왔다.
먼저 붉은 노을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낸 건 낡은 도복 차림의 백운이었다. 그리고 그 뒤, 역광에 가려진 짙은 그늘 속에서 마치 거대한 바위 같은 실루엣이 터벅터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쿵, 쿵.
묵직한 발소리가 울릴 때마다 소란스럽던 창고 앞은 찬물을 끼얹은 듯 빠르게 식어갔다.
"와, 왕... 왕호 사형?"
삼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단순히 덩치가 커서가 아니었다. 저 남자는 철권문의 그 누구도, 심지어 문주조차 힘으로는 함부로 제어할 수 없는 '통제 불능의 괴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왕호는 삼수나 군중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지루한 듯 하품만 쩍 할 뿐이었다. 그 철저한 무심함이 오히려 삼수에게는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저, 저 괴물이 왜 여기에...'
백운은 얼어붙은 삼수 앞으로 여유롭게 다가갔다.
"이변은 바로잡아야죠. 조영 사형의 몸 상태... 아니, 기혈이 뒤틀린 건 유감입니다만, 엄연히 시합은 치러졌고 승패의 결론도 났습니다. 그렇다면 배당금은 제대로 지급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운은 품에서 전표를 꺼내 삼수의 코앞에서 흔들었다.
"여기, 제 몫 50냥과 뒤에 서 있는 동문들의 정당한 배당금까지. 셈은 깔끔할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이, 미친... 이게 얼마인 줄 알고..."
삼수는 본능적으로 욕설을 뱉으려던 순간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왕호의 시선과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 삼수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왕호는 그저 무심히 쳐다봤을 뿐이지만, 그 눈빛은 마치 거대한 맹수가 코앞에서 입을 벌린 듯한 서늘함을 품고 있었다. 압도적인 위압감에 숨이 턱 막혀와, 삼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얼어붙고 말았다.
"자, 잠깐! 기다려! 대사형께 여쭤보고 올 테니!"
삼수는 도망치듯 황급히 몸을 돌려 장칠의 처소 쪽으로 내달렸다.
"뭐? 왕호 그 새끼가 백운이랑 같이 왔다고?"
장칠의 손에서 미끄러진 찻잔이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와장창!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그는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났다.
"이런 빌어먹을! 감히 내 앞마당까지 기어와서 행패를 부려?"
공들여 준비한 계획이 모조리 틀어진 것도 분통 터지는데, 감히 백운 따위가 왕호를 등에 업고 협박하러 왔다는 사실이 이성의 끈을 툭 끊어놓았다.
"사형! 지, 지금 나가시면 안 됩니다! 왕호 사형이..."
"비켜! 내가 나가서 그놈들 뼈마디를 죄다 부러뜨려 놓을 테니까!"
장칠은 만류하는 삼수를 거칠게 뿌리치고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기세등등하게 방문 밖으로 발을 내딛으려던 찰나.
'......!'
문득, 뇌리 깊숙이 묻어두었던 서늘한 기억이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수년 전, 천수문(天手門)의 고수들이 철권문을 급습했던 그날의 지옥도(地獄圖). 압도적인 전력 차에 문주조차 저항을 포기하려 했던 절망적인 밤. 그때 홀로 천수문의 고수들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던 것이 바로 왕호였다.
'으아아아아!'
적의 검이 몸을 베든 말든, 미친 듯이 웃으며 맨손으로 천수문 고수들의 사지를 찢어발기던 그 모습.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적의 피를 뒤집어쓰고, 붉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포효하던 피의 악귀. 그날 철권문이 멸문하지 않고 지금까지 천곡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그 괴물 한 명 덕분이었다.
당시 고작 평범한 2대 제자였던 장칠은 구석에 숨어 그 압도적인 살육을 지켜보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사시나무 떨듯 떨기만 했었다.
'내가 지금... 나가서 뭘 할 수 있지?'
찬물을 끼얹은 듯, 불타오르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내렸다. 지금 나가서 주먹을 뻗는 순간.
'죽는다.'
뼛속 깊이 각인된 트라우마와 현실적인 공포가 자존심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사형...?"
뒤따라 나온 삼수가 멈춰 선 장칠을 의아하게 불렀다. 장칠은 숨을 길게 내쉬더니 이를 꽉 깨물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내줘라."
"예? 방금 뭐라고..."
"돈 줘서 보내버리라고!"
장칠이 잡아먹을 듯이 삼수를 노려보았다. 왕호 앞에서 억눌렸던 공포와 수치심이, 만만한 삼수를 향해 봇물 터지듯 폭발했다.
"안 들려?! 돈 줘서 쫓아내란 말이다!"
"하, 하지만 사형... 탈탈 털어도 돈이 턱없이 모자랍니다... 그게 한두 푼도 아니고..."
"모자라면 빚을 내서라도 채워! 객잔이든 전당포든, 내 이름으로 차용증을 써서라도 만들어 와!"
장칠은 엉거주춤 서 있는 삼수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문밖으로 떠밀어 버렸다. 삼수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쫓겨나자, 장칠은 분을 이기지 못해 문가에 있던 의자를 걷어차 부숴버렸다.
우지끈!
그러고는 거칠게 문을 쾅 닫아버렸다. 요란한 소리에 문 앞에 남겨진 삼수는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잠시 후.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삼수가 돌아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융통해 온 은자 주머니들을 한데 모았다. 그러고는 그중에서 가장 먼저 백운의 몫을 챙겨 내밀었다.
"자... 여기. 네 몫이다. 다 됐지?"
백운은 건네받은 주머니를 품에 넣고는 슬쩍 한 발 옆으로 비켜섰다. 팔짱을 낀 채 턱짓으로 뒤를 가리키는 동작은 명확했다. 길을 터줄 테니 정산을 계속하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쭈뼛거리며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감히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때, 철권문 3대 제자가 백운의 뒤에 서있는 왕호를 한번 보더니 용기를 내 앞으로 나섰다.
"저, 저기..."
떨리는 손으로 전표가 내밀어졌다. 삼수는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눈을 부릅떴으나, 앞에서 느껴지는 왕호의 서늘한 시선에 흠칫 어깨를 떨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결국 삼수는 씹어뱉듯 투덜거리면서도 전표에 적힌 금액을 정확히 세어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짤랑.
은자가 손에 쥐어지는 청아한 소리에 제자들의 눈빛이 일변했다.
"진짜 준다!"
물꼬가 트이자 눈치만 보던 나머지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너도나도 전표를 내밀며 정산을 요구했고, 삼수의 손에 들린 주머니는 순식간에 홀쭉해져 갔다. 돈을 받아 든 사람들은 백운의 곁을 지나며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정산이 끝나자, 백운은 그제야 왕호와 함께 유유히 자리를 떴다.
돌아가는 산길, 백운은 품 속의 묵직한 주머니를 다시 한번 쥐어보았다. 50냥. 장칠이 빚까지 져가며 토해낸, 그야말로 그의 살점 같은 거금이었다.
"자, 받으십시오."
백운은 주머니에서 은자 10냥을 꺼내 왕호에게 건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형. 덕분에 수금이 수월했습니다."
"흥, 도와주긴 누가."
왕호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표정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사양하는 기색 없이 덥석 은자를 받아 챙겼다.
"술값은 했다. 그리고..."
왕호가 백운을 내려다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조심해라. 장칠은 뒤끝이 긴 놈이다. 제 비상금까지 털리고 빚까지 졌으니, 네놈에 대한 살의가 뼈에 사무쳤을 게다. 오늘 일로 네놈은 확실히 찍혔어. 다음엔 나도 못 막아준다."
"걱정 마십시오. 제 목숨줄은 제가 알아서 챙깁니다."
백운의 당돌한 대답에 왕호는 픽 웃음을 터뜨리고는, 털이 숭숭 난 손을 들어 백운의 어깨를 툭 쳤다.
"배짱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살아남아라."
왕호는 그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산속으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왕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백운은 나직이 읊조렸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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