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시비
조회 : 108 추천 : 0 글자수 : 5,590 자 2026-01-29
"흐으으…."
어둠이 내려앉은 철권문의 숙소. 마석은 바닥에 쏟아진 은자 뭉치를 끌어안고 짐승 같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평생 만져본 적 없는 거금, 28냥이었다. 총 당첨금 50냥에서 왕호에게 바친 10냥을 제하고 남은 40냥. 거기서 백운에게 약속한 수수료 3할을 떼어주고도 이만큼이나 남은 것이다.
"이게 다 내 돈이라니… 꿈은 아니겠지?"
마석이 떨리는 손으로 은자를 깨물어 보려는 찰나, 옆에서 차분하게 장부를 정리하던 백운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이빨 나간다. 진짜니까 그만해."
백운은 자신의 몫으로 챙긴 은자 12냥을 가지런히 정리해 주머니에 넣었다. 3대 제자의 월급이 고작 동전 몇 푼인 걸 감안하면, 12냥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일단 시드머니는 확보했군.'
백운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보통의 무인들이라면 승리에 취해 기루로 달려가 흥청망청 써버렸겠지만, 그에게 이 돈은 단순한 화폐가 아니었다. 미래를 위한 투자금이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가?
그는 냉철하게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렸다. 물론 초반에 좋은 장비를 맞추는 건 정석 중 하나다. 날카로운 검은 사냥 속도를 높여주고, 단단한 갑옷은 생존율을 보장하니까. 하지만 지금의 빈약한 피지컬로는 아무리 명검을 쥐어도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다. 게다가 장비는 레벨이 오르면 결국 갈아치워야 할 소모품이지만, 한번 강화한 육체와 영구적으로 상승한 스탯은 끝까지 남는다.
'지금 내 상황에서 12냥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길은 오직 하나.'
바로 육체라는 '그릇'을 키우는 것이다. 장비가 전투력을 더해주는 덧셈이라면, 육체의 강화는 효율을 곱절로 만드는 곱셈이다. 남들이 겉멋 든 검을 휘두를 때, 나는 내실을 다져 성장 곡선 자체를 수직으로 끌어올린다.
그것이 바로 '스노우볼'의 핵심이다. 작은 눈 뭉치를 굴려 거대한 눈사태를 만드는 것. 지금의 12냥은 그 눈사태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마석."
"어, 어? 형님? 아니, 백운아?"
돈맛을 보더니 호칭이 오락가락하는 마석을 보며 백운이 피식 웃었다.
"내일 아침 일찍 나갈 거야. 짐꾼이 필요해."
"지, 짐꾼? 어디 가는데?"
"장 좀 보러."
다음 날 아침, 천곡현(天谷縣)의 시장 거리. 활기찬 아침 시장의 풍경 속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천곡현 최대의 약재상인 '백초당(百草堂)'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찾으십니까?"
점소이가 밝은 미소로 맞이하려다, 백운과 마석의 도복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천곡현에 자리 잡은 철권문의 제자들. 비록 행색은 남루할지라도, 힘없는 상인들에게 지역 문파의 무인들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전이나 다름없었다.
"철권문의 제자분들이시군요. 타박상 연고는 저쪽 구석에…."
"독활(獨活), 우슬(牛膝), 그리고 당귀(當歸). 각각 다섯 근씩."
백운은 점소이의 말을 자르며 묵직한 은자 하나를 계산대 위에 툭 올려놓았다. 턱. 은자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에 점소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이고,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최상급으로 대령하겠습니다!"
점소이는 한층 더 공손해진 태도로 허리를 숙이더니, 재빠른 동작으로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자본주의의 원리는 무림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야, 백운. 저것들은 관절에 좋은 약초잖아? 어디 아파?"
마석이 의아한 듯 물었다. 독활과 우슬은 주로 노인들이나 다친 무인들이 뼈를 붙일 때 쓰는 흔한 약재였다.
"기본 재료야. 진짜는 지금부터지."
백운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약재상 구석,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진열대였다. 그곳에는 상품 가치가 떨어져 밀려난 '잡동사니'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백운은 그 잡동사니 틈에서 쭈글쭈글하게 말라비틀어진 검은 버섯 하나를 집어 들었다.
'흑오(黑烏) 버섯.'
일반인에겐 쥐 잡을 때나 쓰는 독버섯 취급을 받고, 무림인들조차 법제 과정은 까다로운데 약효는 미미하다며 거들떠보지 않는 폐급 약재. 하지만 백운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이 좋은 걸 이렇게 방치해 놓다니.'
전생의 그는 수많은 게임을 섭렵했던 지독한 '분석광'이었다. 남들이 눈앞의 레벨업과 PK에 열을 올릴 때, 그는 시스템 이면에 숨겨진 재료의 속성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합식을 완성하곤 했다. 비록 가상 세계에서 얻은 지식이라 할지라도, 눈앞에 놓인 약재들이 전생의 데이터와 완벽히 일치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과연 게임 속 공식이 이 현실에서도 통용될 것인가?' 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백운은 기억 속에 저장된 수만 가지 비법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독활, 우슬과 7:3:1 비율. 그리고 120도의 고열.$$
이 조건이 충족되면, 흑오 버섯의 치명적인 독성은 근육을 파괴하고 초고속으로 재생시키는 미친 효율의 '도핑제'로 변한다. 전생의 그가 이 제조법을 독점하여 '흙수저의 대환단'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했고, 덕분에 떼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이것도 전부 담아 주시오."
"예? 그, 그건 독버섯인데… 쥐 잡을 때나 쓰는 겁니다만?"
"상관없소. 싸게 주시오."
점소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악성 재고를 처리해 준다니 마다할 리 없었다. 백운은 우선 검증에 필요한 분량만큼만 흑오 버섯을 챙기고, 보조 약초들도 비율에 맞춰 구매했다. 값을 치르고 나니, 마석의 등 뒤에는 제법 묵직한 짐꾸러미가 만들어졌다.
"으어억… 야,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독초라며."
"다 쓰는 방법이 있지. 걱정 마라."
백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비켜, 이 거지들아!"
시장통을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호통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졌다. 푸른색 도복을 입은 사내 셋이 어깨를 펴고 거만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가슴팍에 새겨진 물결 문양. 그리고 소매 끝단에 수놓아진 두 줄의 은색 선.
천곡현의 실질적인 지배자, '청수문(淸水門)'의 제자들이었다.
"쯧, 청수문 놈들이잖아?"
마석이 혀를 차며 백운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방향을 틀었다.
"저쪽 골목으로 돌아가자. 마주쳐봤자 피곤해."
철권문 제자들에게 청수문은 껄끄러운 기피 대상이었다. 왕호라는 존재 때문에 시비가 붙어 길거리 싸움이 나더라도 불구나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의 '선'은 넘지 않았지만, 괜히 얽혀서 몸만 상해봤자 손해였기 때문이다.
백운은 마석에게 이끌려 발걸음을 돌리면서도, 곁눈질로 그들을 관찰했다.
'소매에 은선이 두 줄. 청수문의 2대 제자들이다.'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 체중을 앞꿈치에 싣는 데 익숙해져 있어. 제대로 된 보법(步法)을 익혔다는 증거다.'
백운의 시선이 사내들의 허리춤과 손목으로 옮겨갔다. 손목의 굵기, 그리고 칼자루가 닿는 검지 안쪽의 두터운 굳은살. 꽤 오랫동안 검을 휘두른 흔적이다.
'일개 제자들인데도 기본기가 제법 탄탄하군.'
백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만만치 않군.' 같은 삼류 문파라 해도 자본과 환경의 차이가 제자들의 수준 차이를 벌려놓은 것이다. 그렇게 마석을 따라 막 골목으로 몸을 숨기려던 찰나였다.
"어? 거기 서 봐. 너희 철권문 놈들 아니냐?"
청수문 제자 중 하나가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는 마석의 등판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 불러 세웠다.
"꼴에 약초는 잔뜩 샀네? 야, 너희 문파 요즘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며? 이딴 잡초나 끓여 먹고 연명하냐? 낄낄."
"……."
"벙어리야? 대답 안 해?"
퍽.
사내의 발길질에 마석이 애써 챙긴 약재 꾸러미가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마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명색이 같은 2대 제자라 해도, 청수문의 제자들과 정면으로 부딪치기엔 자신의 실력이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백운이 마석의 앞을 가로막으며 시선은 바닥에 약재가 아닌, 사내의 눈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남의 문파 살림살이까지 챙겨주고, 청수문은 참 할 짓 없나 봐?"
"뭐, 뭐?"
"이 자식이 돌았나… 죽고 싶어 환장했어?!"
챙그랑!
사내가 험악한 욕설과 함께 허리춤의 검을 반쯤 뽑아 들었다. 서슬 퍼런 칼날이 햇빛을 받아 번뜩였지만, 백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덤벼보라는 듯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를 응시할 뿐이었다.
살벌한 긴장감이 감돌던 찰나.
"멈춰! 검 거두라고!"
살기를 뿜어내던 찰나, 동료가 사색이 된 얼굴로 사내의 팔을 억세게 틀어쥐었다.
"이거 안 놔? 저 새끼가 청수문을 우습게 보고…!"
"입 닥쳐, 이 멍청아! 죽고 싶어 환장했어?"
동료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내를 잡아끌며 백운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눈에는 짙은 공포가 어려 있었다.
"저 녀석, 철권문의 백운이다."
"백운? 그게 누군데?"
"그 있잖아. 며칠 전 비무에서 조영의 팔을 부러뜨린 놈."
"……!"
순간, 사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며칠 전, 팔이 기괴하게 꺾인 채 들것에 실려 나가던 조영의 끔찍한 몰골. 당시 구경 갔던 청수문 제자들 사이에서 퍼졌던 그 목격담의 주인공이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왜소한 놈이라니.
사내는 마른침을 삼키며 백운을 다시 훑어보았다. 겉보기엔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제자였기에,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놈이라는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오늘은 바빠서 봐주는 거니까."
사내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잡고 있던 검자루에서 슬그머니 손을 뗐다. 여기서 소란을 피워봤자 득 될 것도 없고, 무엇보다 저 알 수 없는 놈과 얽히는 게 영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청수문 제자들은 찝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이 쫓기듯 사라진 골목에는 이내 무거운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마석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백운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려 죽는 줄 알았는데, 이 녀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세로 저들을 눌러버렸다.
'뭐야, 얘… 진짜로 뭔가 있나?'
비무 때 보여준 그 압도적인 모습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왕호 앞에서도, 청수문 놈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저 배짱. 지금의 철권문 꼬라지를 보면 미래가 캄캄한데, 어쩌면 이 녀석 옆에 붙어있는 게 진짜 살길일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감이 왔다.
'그래, 썩은 동아줄보단 튼튼한 칡넝쿨이 낫지.'
마석은 바닥에 떨어진 약재 꾸러미를 털어 다시 둘러메며, 슬그머니 백운의 눈치를 살폈다. 왠지 모르게 이 친구가 전보다 훨씬 커 보였다.
"뭐 해? 안 가고."
"어? 어! 가, 가야지! 같이 가!"
마석은 냉큼 달려와 백운의 옆에 바짝 붙었다. 든든한 구석이 생겼다는 생각 때문인지, 발걸음이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 보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철권문의 숙소. 마석은 바닥에 쏟아진 은자 뭉치를 끌어안고 짐승 같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평생 만져본 적 없는 거금, 28냥이었다. 총 당첨금 50냥에서 왕호에게 바친 10냥을 제하고 남은 40냥. 거기서 백운에게 약속한 수수료 3할을 떼어주고도 이만큼이나 남은 것이다.
"이게 다 내 돈이라니… 꿈은 아니겠지?"
마석이 떨리는 손으로 은자를 깨물어 보려는 찰나, 옆에서 차분하게 장부를 정리하던 백운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이빨 나간다. 진짜니까 그만해."
백운은 자신의 몫으로 챙긴 은자 12냥을 가지런히 정리해 주머니에 넣었다. 3대 제자의 월급이 고작 동전 몇 푼인 걸 감안하면, 12냥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일단 시드머니는 확보했군.'
백운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보통의 무인들이라면 승리에 취해 기루로 달려가 흥청망청 써버렸겠지만, 그에게 이 돈은 단순한 화폐가 아니었다. 미래를 위한 투자금이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가?
그는 냉철하게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렸다. 물론 초반에 좋은 장비를 맞추는 건 정석 중 하나다. 날카로운 검은 사냥 속도를 높여주고, 단단한 갑옷은 생존율을 보장하니까. 하지만 지금의 빈약한 피지컬로는 아무리 명검을 쥐어도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다. 게다가 장비는 레벨이 오르면 결국 갈아치워야 할 소모품이지만, 한번 강화한 육체와 영구적으로 상승한 스탯은 끝까지 남는다.
'지금 내 상황에서 12냥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길은 오직 하나.'
바로 육체라는 '그릇'을 키우는 것이다. 장비가 전투력을 더해주는 덧셈이라면, 육체의 강화는 효율을 곱절로 만드는 곱셈이다. 남들이 겉멋 든 검을 휘두를 때, 나는 내실을 다져 성장 곡선 자체를 수직으로 끌어올린다.
그것이 바로 '스노우볼'의 핵심이다. 작은 눈 뭉치를 굴려 거대한 눈사태를 만드는 것. 지금의 12냥은 그 눈사태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마석."
"어, 어? 형님? 아니, 백운아?"
돈맛을 보더니 호칭이 오락가락하는 마석을 보며 백운이 피식 웃었다.
"내일 아침 일찍 나갈 거야. 짐꾼이 필요해."
"지, 짐꾼? 어디 가는데?"
"장 좀 보러."
다음 날 아침, 천곡현(天谷縣)의 시장 거리. 활기찬 아침 시장의 풍경 속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천곡현 최대의 약재상인 '백초당(百草堂)'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찾으십니까?"
점소이가 밝은 미소로 맞이하려다, 백운과 마석의 도복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천곡현에 자리 잡은 철권문의 제자들. 비록 행색은 남루할지라도, 힘없는 상인들에게 지역 문파의 무인들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전이나 다름없었다.
"철권문의 제자분들이시군요. 타박상 연고는 저쪽 구석에…."
"독활(獨活), 우슬(牛膝), 그리고 당귀(當歸). 각각 다섯 근씩."
백운은 점소이의 말을 자르며 묵직한 은자 하나를 계산대 위에 툭 올려놓았다. 턱. 은자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에 점소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이고,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최상급으로 대령하겠습니다!"
점소이는 한층 더 공손해진 태도로 허리를 숙이더니, 재빠른 동작으로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자본주의의 원리는 무림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야, 백운. 저것들은 관절에 좋은 약초잖아? 어디 아파?"
마석이 의아한 듯 물었다. 독활과 우슬은 주로 노인들이나 다친 무인들이 뼈를 붙일 때 쓰는 흔한 약재였다.
"기본 재료야. 진짜는 지금부터지."
백운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약재상 구석,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진열대였다. 그곳에는 상품 가치가 떨어져 밀려난 '잡동사니'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백운은 그 잡동사니 틈에서 쭈글쭈글하게 말라비틀어진 검은 버섯 하나를 집어 들었다.
'흑오(黑烏) 버섯.'
일반인에겐 쥐 잡을 때나 쓰는 독버섯 취급을 받고, 무림인들조차 법제 과정은 까다로운데 약효는 미미하다며 거들떠보지 않는 폐급 약재. 하지만 백운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이 좋은 걸 이렇게 방치해 놓다니.'
전생의 그는 수많은 게임을 섭렵했던 지독한 '분석광'이었다. 남들이 눈앞의 레벨업과 PK에 열을 올릴 때, 그는 시스템 이면에 숨겨진 재료의 속성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합식을 완성하곤 했다. 비록 가상 세계에서 얻은 지식이라 할지라도, 눈앞에 놓인 약재들이 전생의 데이터와 완벽히 일치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과연 게임 속 공식이 이 현실에서도 통용될 것인가?' 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백운은 기억 속에 저장된 수만 가지 비법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독활, 우슬과 7:3:1 비율. 그리고 120도의 고열.$$
이 조건이 충족되면, 흑오 버섯의 치명적인 독성은 근육을 파괴하고 초고속으로 재생시키는 미친 효율의 '도핑제'로 변한다. 전생의 그가 이 제조법을 독점하여 '흙수저의 대환단'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했고, 덕분에 떼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이것도 전부 담아 주시오."
"예? 그, 그건 독버섯인데… 쥐 잡을 때나 쓰는 겁니다만?"
"상관없소. 싸게 주시오."
점소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악성 재고를 처리해 준다니 마다할 리 없었다. 백운은 우선 검증에 필요한 분량만큼만 흑오 버섯을 챙기고, 보조 약초들도 비율에 맞춰 구매했다. 값을 치르고 나니, 마석의 등 뒤에는 제법 묵직한 짐꾸러미가 만들어졌다.
"으어억… 야,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독초라며."
"다 쓰는 방법이 있지. 걱정 마라."
백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비켜, 이 거지들아!"
시장통을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호통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졌다. 푸른색 도복을 입은 사내 셋이 어깨를 펴고 거만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가슴팍에 새겨진 물결 문양. 그리고 소매 끝단에 수놓아진 두 줄의 은색 선.
천곡현의 실질적인 지배자, '청수문(淸水門)'의 제자들이었다.
"쯧, 청수문 놈들이잖아?"
마석이 혀를 차며 백운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방향을 틀었다.
"저쪽 골목으로 돌아가자. 마주쳐봤자 피곤해."
철권문 제자들에게 청수문은 껄끄러운 기피 대상이었다. 왕호라는 존재 때문에 시비가 붙어 길거리 싸움이 나더라도 불구나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의 '선'은 넘지 않았지만, 괜히 얽혀서 몸만 상해봤자 손해였기 때문이다.
백운은 마석에게 이끌려 발걸음을 돌리면서도, 곁눈질로 그들을 관찰했다.
'소매에 은선이 두 줄. 청수문의 2대 제자들이다.'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 체중을 앞꿈치에 싣는 데 익숙해져 있어. 제대로 된 보법(步法)을 익혔다는 증거다.'
백운의 시선이 사내들의 허리춤과 손목으로 옮겨갔다. 손목의 굵기, 그리고 칼자루가 닿는 검지 안쪽의 두터운 굳은살. 꽤 오랫동안 검을 휘두른 흔적이다.
'일개 제자들인데도 기본기가 제법 탄탄하군.'
백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만만치 않군.' 같은 삼류 문파라 해도 자본과 환경의 차이가 제자들의 수준 차이를 벌려놓은 것이다. 그렇게 마석을 따라 막 골목으로 몸을 숨기려던 찰나였다.
"어? 거기 서 봐. 너희 철권문 놈들 아니냐?"
청수문 제자 중 하나가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는 마석의 등판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 불러 세웠다.
"꼴에 약초는 잔뜩 샀네? 야, 너희 문파 요즘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며? 이딴 잡초나 끓여 먹고 연명하냐? 낄낄."
"……."
"벙어리야? 대답 안 해?"
퍽.
사내의 발길질에 마석이 애써 챙긴 약재 꾸러미가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마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명색이 같은 2대 제자라 해도, 청수문의 제자들과 정면으로 부딪치기엔 자신의 실력이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백운이 마석의 앞을 가로막으며 시선은 바닥에 약재가 아닌, 사내의 눈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남의 문파 살림살이까지 챙겨주고, 청수문은 참 할 짓 없나 봐?"
"뭐, 뭐?"
"이 자식이 돌았나… 죽고 싶어 환장했어?!"
챙그랑!
사내가 험악한 욕설과 함께 허리춤의 검을 반쯤 뽑아 들었다. 서슬 퍼런 칼날이 햇빛을 받아 번뜩였지만, 백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덤벼보라는 듯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를 응시할 뿐이었다.
살벌한 긴장감이 감돌던 찰나.
"멈춰! 검 거두라고!"
살기를 뿜어내던 찰나, 동료가 사색이 된 얼굴로 사내의 팔을 억세게 틀어쥐었다.
"이거 안 놔? 저 새끼가 청수문을 우습게 보고…!"
"입 닥쳐, 이 멍청아! 죽고 싶어 환장했어?"
동료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내를 잡아끌며 백운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눈에는 짙은 공포가 어려 있었다.
"저 녀석, 철권문의 백운이다."
"백운? 그게 누군데?"
"그 있잖아. 며칠 전 비무에서 조영의 팔을 부러뜨린 놈."
"……!"
순간, 사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며칠 전, 팔이 기괴하게 꺾인 채 들것에 실려 나가던 조영의 끔찍한 몰골. 당시 구경 갔던 청수문 제자들 사이에서 퍼졌던 그 목격담의 주인공이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왜소한 놈이라니.
사내는 마른침을 삼키며 백운을 다시 훑어보았다. 겉보기엔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제자였기에,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놈이라는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오늘은 바빠서 봐주는 거니까."
사내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잡고 있던 검자루에서 슬그머니 손을 뗐다. 여기서 소란을 피워봤자 득 될 것도 없고, 무엇보다 저 알 수 없는 놈과 얽히는 게 영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청수문 제자들은 찝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이 쫓기듯 사라진 골목에는 이내 무거운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마석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백운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려 죽는 줄 알았는데, 이 녀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세로 저들을 눌러버렸다.
'뭐야, 얘… 진짜로 뭔가 있나?'
비무 때 보여준 그 압도적인 모습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왕호 앞에서도, 청수문 놈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저 배짱. 지금의 철권문 꼬라지를 보면 미래가 캄캄한데, 어쩌면 이 녀석 옆에 붙어있는 게 진짜 살길일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감이 왔다.
'그래, 썩은 동아줄보단 튼튼한 칡넝쿨이 낫지.'
마석은 바닥에 떨어진 약재 꾸러미를 털어 다시 둘러메며, 슬그머니 백운의 눈치를 살폈다. 왠지 모르게 이 친구가 전보다 훨씬 커 보였다.
"뭐 해? 안 가고."
"어? 어! 가, 가야지! 같이 가!"
마석은 냉큼 달려와 백운의 옆에 바짝 붙었다. 든든한 구석이 생겼다는 생각 때문인지, 발걸음이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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