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싹트는 가능성
조회 : 29 추천 : 0 글자수 : 5,841 자 2026-02-04
"푸하아—!"
우물가에서 몇 번이나 찬물을 끼얹고 나서야 백운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몸을 뒤덮고 있던 끈적한 검은 오물은 차가운 물줄기에 씻겨 내려갔지만,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갈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젖은 손으로 두레박을 다시 길어 올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역시 약성이 지독하군. 갈증이 이토록 심한 건, 아마도 육신에 박힌 물리적인 노폐물을 밀어내는 과정에서 체내 수분이 용매(溶媒)로 과하게 소모된 탓이겠지. 나중에 좀 더 정밀하게 검증해 볼 필요가 있겠어.'
부작용의 원인을 분석한 백운은 한참이나 물을 들이켜며 타들어 가는 목구멍을 축였다.
어느 정도 갈증이 가라앉자 백운은 대충 물기를 털어내고 옷을 갈아입은 뒤 숙소로 향했다. 숙소 근처에 다다르자,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지독한 악취를 견디지 못하고 길목까지 나와 서성이던 마석이 백운을 발견하고 황급히 다가왔다.
"야, 너... 좀 잘생겨진 거 같다? 사람이 며칠 사이에 허물이라도 벗고 나온 것 같네."
"헛소리 그만하고 이거 받아."
백운은 품속에서 흑오강체단 한 알을 꺼내 마석에게 툭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것을 얼결에 낚아챈 마석이 조심스레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에는 은은한 묵색 광택을 내뿜는 단약이 놓여 있었다.
마석의 호흡이 가빠졌다. 이름과 효능은 아직 모르지만, 백운이 쓰러져 있을 때 곁에서 자세히 관찰했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저잣거리에서 아무리 못해도 은자 두 냥은 족히 받을 법한, 평범한 제자들은 평생 구경조차 하기 힘든 고품질 단약임이 확실했다.
"이 귀한 걸 진짜 나한테 그냥 준다고? 백운, 너 진심이야? 이거 시장에만 내다 팔아도 최소 두 냥은 받을 텐데."
"네 밑천도 들어갔잖아. 네 몫이니까 잘 챙겨 둬."
"야... 진짜 고맙다. 감사히 잘 먹을게."
마석은 감격에 겨워 단약을 소중히 품에 넣었다. 이 정도 품질의 환약을 직접 복용해 볼 기회란 그에게 단 한 번도 없었다.
"근데 이거 이름이 뭐야? 무슨 효과가 있는 건데?"
마석이 궁금한 듯 묻자 백운은 침상에 걸터앉아 핵심만 짚어 설명했다.
"이름은 흑오강체단(黑烏剛體丹)이다. 효과는 굳어 있는 근육과 관절 마디마디를 이완시키고, 체내 깊숙이 박힌 노폐물을 강제로 배출해 주지."
"오... 그럼 그냥 먹으면 돼?"
"응. 다만 먹었을 때의 감각이 꽤 독할 거야. 처음엔 근육이 풀리는 듯하다가, 곧바로 위장에서부터 화주(火酒)를 들이켠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전신으로 역류할 거다. 모공에서는 끈적한 오물이 쏟아져 나올 거고."
백운은 마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경고를 덧붙였다.
"가장 큰 문제는 갈증이야. 약 기운이 노폐물을 밀어낼 때 몸속 수분을 전부 끌어다 쓰거든.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강한 약력에 오히려 장기가 상할 수 있고, 귀한 약력을 허망하게 낭비하게 될 거다."
마석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백운이 말한 주의사항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알았어. 시키는 대로 할게. 진짜 고맙다."
"그래. 넌 이 방에서 내가 말한 대로 약 먹고 수련하고 있어. 난 잠시 다녀올 데가 있으니까."
백운은 남은 환약이 든 호리병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권문 뒷산, 대나무 숲. 바람이 대나무 잎을 스치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리는 그곳에, 익숙한 굉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쾅! 콰아앙!
집채만 한 바위가 맨주먹에 깨져나가고 있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거대한 등판, 왕호였다. 그는 마치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오직 파괴만을 위해 존재하는 수도승처럼 묵묵히 권(拳)을 내지르고 있었다.
"누구냐."
왕호는 주먹질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 묵직한 타격음이 몇 차례 더 숲을 울리고 나서야 백운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형, 백운입니다."
그제야 몸을 돌린 왕호가 땀을 닦아내며 백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단번에 상대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고작 며칠 사이에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은 물론이고, 겉으로 드러난 근육의 선 또한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고 탄탄해져 있었다.
"…호오. 실력이 좀 늘었네? 배당금으로 영약이라도 좀 챙겨 먹었냐?"
"다 사형 덕분입니다."
"입에 발린 소리는 집어치워. 그래, 빈손으로 온 건 아닐 테고."
왕호의 시선이 백운의 손에 들린 호리병에 머물렀다.
"지난번 수금 때 도와주신 것에 대한 답례입니다."
"술인가?"
백운이 다가가 호리병에서 환약 한 알을 꺼내 왕호에게 건넸다.
"술보다 더 좋은 겁니다."
왕호는 투박한 손으로 환약을 받아 들어 코끝에 가져다 댔다. 쌉싸름하면서도 맑은 약향에 정신마저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자 그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비약을 접해본 경험이 많아 안목이 높았던 터라, 냄새만으로 단번에 품질을 짐작해낸 모양이었다. 곧이어 흥미롭다는 듯 이채(異彩)가 서린 눈빛으로 백운을 바라보았다.
"이건 처음 보는 단약인데. 어디서 난 거야? 이 정도 품질이면 네가 받아 간 배당금을 다 쏟아부어도 몇 알 못 샀을 텐데. 이걸 왜 나한테 내미는 거냐?"
백운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흑오강체단이라 합니다. 근골(筋骨) 강화에 특효가 있죠. 그리고… 제가 직접 만든 것입니다."
백운의 말이 끝나자 왕호의 눈썹 끝이 움찔거렸다. 그는 손바닥 위의 환약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어 백운을 다시 보았다. 어렴풋한 짐작이 확신으로 바뀌는 찰나, 그의 눈에 머물던 여유로운 기색이 사라졌다.
"이 정도 수준의 단약을 네가 직접 만들었다고?"
백운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조금 유별날 뿐, 결과물은 사형께서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왕호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환약을 챙겼다.
"재밌네. 너, 생각보다 쓸모 있는 재주를 가졌어."
왕호는 잠시 백운을 바라보더니, 옆쪽 너럭바위에 물통과 함께 놓아두었던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집어 들어 백운에게 툭 던졌다.
"받아."
"대가는 이미 지난번 도움으로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냥 드리는 겁니다."
"난 공짜는 질색이야. 이건 투자라고 생각해라."
백운이 받아든 주머니는 예상보다 훨씬 묵직했다. 환약 한 알 값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무게였지만, 왕호는 백운의 '재능'에 미리 값을 매긴 모양이었다.
"효과가 없으면 다시 찾아갈 거다. 그때는 내 주먹을 감당해야 할 거야."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드실 때 주의하실 점은 갈증입니다. 약 기운이 노폐물을 밀어낼 때 체내 수분을 과하게 끌어다 쓰니, 반드시 충분한 물을 곁에 두십시오."
"알았다. 허투루 듣지는 않지. 그만 가 봐."
왕호는 툭 내뱉듯 말을 던지고는 다시 바위를 향해 몸을 돌렸고, 백운은 가볍게 예를 표한 뒤 대나무 숲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는 다시금 바위를 부수는 묵직한 굉음이 시원하게 터져 나오며 멀어졌다.
기대 이상의 수확을 거둔 덕분인지 숲을 내려가는 백운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으나,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악취가 그를 반겼다.
"벌써 시작했나 보군."
백운이 방문을 열자 마석이 상체를 드러낸 채 침상 위에서 위태롭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의 온몸은 이미 모공을 뚫고 나온 검은 진액으로 뒤덮여 번들거렸고, 거친 숨을 내뱉을 때마다 전신의 근육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후으... 윽...!"
마석은 백운이 들어온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열기와의 사투에 몰입해 있었다. 백운은 잠시 멈춰 서서 지켜보다 별다른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왕호에게 받은 묵직한 주머니를 탁자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주머니를 풀어 그 안을 확인하자 가지런히 담긴 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림잡아도 족히 20냥에 달하는 거금을 확인하자 백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확실히 시원시원한 성격이군.'
재료비로 밑천이 바닥나 남은 환약이라도 장터에 내다 팔아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때마침 요긴한 돈이 생겼다.
'이제 내공에 섞인 탁기를 마저 뽑아내야 해.'
흑오강체단은 훌륭한 비약이었지만, 완벽주의자인 백운에게 남은 '탁기 $1\%$ '는 여전히 눈엣가시였다.
'흡(吸).'
그는 눈을 감고 삼재심법을 운용했다. 단전에서 일어난 기운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구석구석 숨어 있는 탁기들을 훑어 내렸다. 이미 육신의 노폐물이 비워진 뒤라 기운의 흐름이 한결 수월했다.
한편, 대나무 숲. 백운이 떠난 후에도 한참 동안 수련을 하던 왕호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평상에 앉았다. 땀을 닦던 그의 시선이 탁자 위에 놓인 영롱한 흑갈색 환약에 머물렀다.
"근골 강화라…."
그는 백운이 말한 경고를 상기하며 미리 물통을 옆에 챙겨 두었다. 그리고 환약을 입에 툭 털어 넣었다.
"……."
처음엔 뭉근한 온기가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는 듯했다. 굳어있던 근육이 이완되고, 수천 번 주먹을 내지르며 쌓인 관절의 피로가 서서히 녹아내렸다. 마치 녹슨 기계 마디마디에 최상급 기름을 들이붓는 듯한 매끄러운 감각이었다.
그러나 평온함은 찰나였다. 온화하던 기운은 순식간에 불길로 변해 위장에서부터 거칠게 치밀어 올랐다. 아주 독한 화주(火酒)를 병째 들이켠 것 같은 화끈함이 전신의 모공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그와 동시에 뼛속 깊이 박혀있던 탁하고 끈적한 진액들이 들끓는 약력에 밀려 밖으로 배어 나왔다. 곧이어 혀끝이 바짝 말라붙는 극심한 갈증이 밀려왔다.
"크으…!"
왕호는 자리에 앉아 호흡을 골랐다. 내장을 훑고 지나가는 열기가 꽤 사나웠지만, 그 투박하고 강렬한 힘이 정체되어 있던 그의 육체를 기분 좋게 자극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던 왕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펴다 하며 손끝에 감도는 힘을 확인했다.
"재밌네."
입가에 짙은 흥미가 서린 미소가 번졌다. 고작 3대 제자가 만든 환약이라 얕봤는데, 예상보다 훨씬 쓸 만했다.
"백운이라…."
왕호는 땀에 젖은 몸을 일으키며 탁자 옆에 미리 준비해둔 물병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갈증은 여전했지만, 주먹 끝에 걸리는 힘의 감각이 짜릿했다.
빈 물통을 거칠게 내려놓은 왕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백운의 숙소가 있을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그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백운... 저놈의 비범한 재능이 외부로 알려진다면, 아직 힘없는 저놈으로서는 그 탐욕의 물결을 막아낼 재간이 없을 터.”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펴며 눈빛을 굳혔다.
“제 몫의 영약을 안정적으로 수급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 유용한 '동업자'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내가 저놈의 울타리가 되어줘야겠군. 입단속은 물론이고 보안에도 더 각별히 신경을 써야겠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왕호는 자연스레 현실적인 다음 단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앞으로 돈이 꽤나 들어가겠군. 저놈이 만든 물건을 계속 손에 넣으려면 지금의 수금 일정 정도로는 기별도 안 가겠어. 위험하더라도 확실하게 더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는 건수들을 찾아봐야겠군.”
왕호는 다시 한번 백운의 숙소 방향을 말없이 응시했다. 마치 어둠 속에 숨겨둔 보물을 확인하는 파수꾼 같은 눈빛이었다. 이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너럭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생각을 마치자 왕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단전에 고인 기운을 다스리며 깊은 운기조식에 들어가자, 대나무 숲에는 다시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우물가에서 몇 번이나 찬물을 끼얹고 나서야 백운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몸을 뒤덮고 있던 끈적한 검은 오물은 차가운 물줄기에 씻겨 내려갔지만,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갈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젖은 손으로 두레박을 다시 길어 올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역시 약성이 지독하군. 갈증이 이토록 심한 건, 아마도 육신에 박힌 물리적인 노폐물을 밀어내는 과정에서 체내 수분이 용매(溶媒)로 과하게 소모된 탓이겠지. 나중에 좀 더 정밀하게 검증해 볼 필요가 있겠어.'
부작용의 원인을 분석한 백운은 한참이나 물을 들이켜며 타들어 가는 목구멍을 축였다.
어느 정도 갈증이 가라앉자 백운은 대충 물기를 털어내고 옷을 갈아입은 뒤 숙소로 향했다. 숙소 근처에 다다르자,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지독한 악취를 견디지 못하고 길목까지 나와 서성이던 마석이 백운을 발견하고 황급히 다가왔다.
"야, 너... 좀 잘생겨진 거 같다? 사람이 며칠 사이에 허물이라도 벗고 나온 것 같네."
"헛소리 그만하고 이거 받아."
백운은 품속에서 흑오강체단 한 알을 꺼내 마석에게 툭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것을 얼결에 낚아챈 마석이 조심스레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에는 은은한 묵색 광택을 내뿜는 단약이 놓여 있었다.
마석의 호흡이 가빠졌다. 이름과 효능은 아직 모르지만, 백운이 쓰러져 있을 때 곁에서 자세히 관찰했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저잣거리에서 아무리 못해도 은자 두 냥은 족히 받을 법한, 평범한 제자들은 평생 구경조차 하기 힘든 고품질 단약임이 확실했다.
"이 귀한 걸 진짜 나한테 그냥 준다고? 백운, 너 진심이야? 이거 시장에만 내다 팔아도 최소 두 냥은 받을 텐데."
"네 밑천도 들어갔잖아. 네 몫이니까 잘 챙겨 둬."
"야... 진짜 고맙다. 감사히 잘 먹을게."
마석은 감격에 겨워 단약을 소중히 품에 넣었다. 이 정도 품질의 환약을 직접 복용해 볼 기회란 그에게 단 한 번도 없었다.
"근데 이거 이름이 뭐야? 무슨 효과가 있는 건데?"
마석이 궁금한 듯 묻자 백운은 침상에 걸터앉아 핵심만 짚어 설명했다.
"이름은 흑오강체단(黑烏剛體丹)이다. 효과는 굳어 있는 근육과 관절 마디마디를 이완시키고, 체내 깊숙이 박힌 노폐물을 강제로 배출해 주지."
"오... 그럼 그냥 먹으면 돼?"
"응. 다만 먹었을 때의 감각이 꽤 독할 거야. 처음엔 근육이 풀리는 듯하다가, 곧바로 위장에서부터 화주(火酒)를 들이켠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전신으로 역류할 거다. 모공에서는 끈적한 오물이 쏟아져 나올 거고."
백운은 마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경고를 덧붙였다.
"가장 큰 문제는 갈증이야. 약 기운이 노폐물을 밀어낼 때 몸속 수분을 전부 끌어다 쓰거든.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강한 약력에 오히려 장기가 상할 수 있고, 귀한 약력을 허망하게 낭비하게 될 거다."
마석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백운이 말한 주의사항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알았어. 시키는 대로 할게. 진짜 고맙다."
"그래. 넌 이 방에서 내가 말한 대로 약 먹고 수련하고 있어. 난 잠시 다녀올 데가 있으니까."
백운은 남은 환약이 든 호리병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권문 뒷산, 대나무 숲. 바람이 대나무 잎을 스치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리는 그곳에, 익숙한 굉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쾅! 콰아앙!
집채만 한 바위가 맨주먹에 깨져나가고 있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거대한 등판, 왕호였다. 그는 마치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오직 파괴만을 위해 존재하는 수도승처럼 묵묵히 권(拳)을 내지르고 있었다.
"누구냐."
왕호는 주먹질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 묵직한 타격음이 몇 차례 더 숲을 울리고 나서야 백운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형, 백운입니다."
그제야 몸을 돌린 왕호가 땀을 닦아내며 백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단번에 상대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고작 며칠 사이에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은 물론이고, 겉으로 드러난 근육의 선 또한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고 탄탄해져 있었다.
"…호오. 실력이 좀 늘었네? 배당금으로 영약이라도 좀 챙겨 먹었냐?"
"다 사형 덕분입니다."
"입에 발린 소리는 집어치워. 그래, 빈손으로 온 건 아닐 테고."
왕호의 시선이 백운의 손에 들린 호리병에 머물렀다.
"지난번 수금 때 도와주신 것에 대한 답례입니다."
"술인가?"
백운이 다가가 호리병에서 환약 한 알을 꺼내 왕호에게 건넸다.
"술보다 더 좋은 겁니다."
왕호는 투박한 손으로 환약을 받아 들어 코끝에 가져다 댔다. 쌉싸름하면서도 맑은 약향에 정신마저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자 그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비약을 접해본 경험이 많아 안목이 높았던 터라, 냄새만으로 단번에 품질을 짐작해낸 모양이었다. 곧이어 흥미롭다는 듯 이채(異彩)가 서린 눈빛으로 백운을 바라보았다.
"이건 처음 보는 단약인데. 어디서 난 거야? 이 정도 품질이면 네가 받아 간 배당금을 다 쏟아부어도 몇 알 못 샀을 텐데. 이걸 왜 나한테 내미는 거냐?"
백운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흑오강체단이라 합니다. 근골(筋骨) 강화에 특효가 있죠. 그리고… 제가 직접 만든 것입니다."
백운의 말이 끝나자 왕호의 눈썹 끝이 움찔거렸다. 그는 손바닥 위의 환약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어 백운을 다시 보았다. 어렴풋한 짐작이 확신으로 바뀌는 찰나, 그의 눈에 머물던 여유로운 기색이 사라졌다.
"이 정도 수준의 단약을 네가 직접 만들었다고?"
백운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조금 유별날 뿐, 결과물은 사형께서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왕호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환약을 챙겼다.
"재밌네. 너, 생각보다 쓸모 있는 재주를 가졌어."
왕호는 잠시 백운을 바라보더니, 옆쪽 너럭바위에 물통과 함께 놓아두었던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집어 들어 백운에게 툭 던졌다.
"받아."
"대가는 이미 지난번 도움으로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냥 드리는 겁니다."
"난 공짜는 질색이야. 이건 투자라고 생각해라."
백운이 받아든 주머니는 예상보다 훨씬 묵직했다. 환약 한 알 값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무게였지만, 왕호는 백운의 '재능'에 미리 값을 매긴 모양이었다.
"효과가 없으면 다시 찾아갈 거다. 그때는 내 주먹을 감당해야 할 거야."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드실 때 주의하실 점은 갈증입니다. 약 기운이 노폐물을 밀어낼 때 체내 수분을 과하게 끌어다 쓰니, 반드시 충분한 물을 곁에 두십시오."
"알았다. 허투루 듣지는 않지. 그만 가 봐."
왕호는 툭 내뱉듯 말을 던지고는 다시 바위를 향해 몸을 돌렸고, 백운은 가볍게 예를 표한 뒤 대나무 숲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는 다시금 바위를 부수는 묵직한 굉음이 시원하게 터져 나오며 멀어졌다.
기대 이상의 수확을 거둔 덕분인지 숲을 내려가는 백운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으나,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악취가 그를 반겼다.
"벌써 시작했나 보군."
백운이 방문을 열자 마석이 상체를 드러낸 채 침상 위에서 위태롭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의 온몸은 이미 모공을 뚫고 나온 검은 진액으로 뒤덮여 번들거렸고, 거친 숨을 내뱉을 때마다 전신의 근육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후으... 윽...!"
마석은 백운이 들어온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열기와의 사투에 몰입해 있었다. 백운은 잠시 멈춰 서서 지켜보다 별다른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왕호에게 받은 묵직한 주머니를 탁자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주머니를 풀어 그 안을 확인하자 가지런히 담긴 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림잡아도 족히 20냥에 달하는 거금을 확인하자 백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확실히 시원시원한 성격이군.'
재료비로 밑천이 바닥나 남은 환약이라도 장터에 내다 팔아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때마침 요긴한 돈이 생겼다.
'이제 내공에 섞인 탁기를 마저 뽑아내야 해.'
흑오강체단은 훌륭한 비약이었지만, 완벽주의자인 백운에게 남은 '탁기 $1\%$ '는 여전히 눈엣가시였다.
'흡(吸).'
그는 눈을 감고 삼재심법을 운용했다. 단전에서 일어난 기운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구석구석 숨어 있는 탁기들을 훑어 내렸다. 이미 육신의 노폐물이 비워진 뒤라 기운의 흐름이 한결 수월했다.
한편, 대나무 숲. 백운이 떠난 후에도 한참 동안 수련을 하던 왕호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평상에 앉았다. 땀을 닦던 그의 시선이 탁자 위에 놓인 영롱한 흑갈색 환약에 머물렀다.
"근골 강화라…."
그는 백운이 말한 경고를 상기하며 미리 물통을 옆에 챙겨 두었다. 그리고 환약을 입에 툭 털어 넣었다.
"……."
처음엔 뭉근한 온기가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는 듯했다. 굳어있던 근육이 이완되고, 수천 번 주먹을 내지르며 쌓인 관절의 피로가 서서히 녹아내렸다. 마치 녹슨 기계 마디마디에 최상급 기름을 들이붓는 듯한 매끄러운 감각이었다.
그러나 평온함은 찰나였다. 온화하던 기운은 순식간에 불길로 변해 위장에서부터 거칠게 치밀어 올랐다. 아주 독한 화주(火酒)를 병째 들이켠 것 같은 화끈함이 전신의 모공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그와 동시에 뼛속 깊이 박혀있던 탁하고 끈적한 진액들이 들끓는 약력에 밀려 밖으로 배어 나왔다. 곧이어 혀끝이 바짝 말라붙는 극심한 갈증이 밀려왔다.
"크으…!"
왕호는 자리에 앉아 호흡을 골랐다. 내장을 훑고 지나가는 열기가 꽤 사나웠지만, 그 투박하고 강렬한 힘이 정체되어 있던 그의 육체를 기분 좋게 자극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던 왕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펴다 하며 손끝에 감도는 힘을 확인했다.
"재밌네."
입가에 짙은 흥미가 서린 미소가 번졌다. 고작 3대 제자가 만든 환약이라 얕봤는데, 예상보다 훨씬 쓸 만했다.
"백운이라…."
왕호는 땀에 젖은 몸을 일으키며 탁자 옆에 미리 준비해둔 물병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갈증은 여전했지만, 주먹 끝에 걸리는 힘의 감각이 짜릿했다.
빈 물통을 거칠게 내려놓은 왕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백운의 숙소가 있을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그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백운... 저놈의 비범한 재능이 외부로 알려진다면, 아직 힘없는 저놈으로서는 그 탐욕의 물결을 막아낼 재간이 없을 터.”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펴며 눈빛을 굳혔다.
“제 몫의 영약을 안정적으로 수급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 유용한 '동업자'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내가 저놈의 울타리가 되어줘야겠군. 입단속은 물론이고 보안에도 더 각별히 신경을 써야겠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왕호는 자연스레 현실적인 다음 단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앞으로 돈이 꽤나 들어가겠군. 저놈이 만든 물건을 계속 손에 넣으려면 지금의 수금 일정 정도로는 기별도 안 가겠어. 위험하더라도 확실하게 더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는 건수들을 찾아봐야겠군.”
왕호는 다시 한번 백운의 숙소 방향을 말없이 응시했다. 마치 어둠 속에 숨겨둔 보물을 확인하는 파수꾼 같은 눈빛이었다. 이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너럭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생각을 마치자 왕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단전에 고인 기운을 다스리며 깊은 운기조식에 들어가자, 대나무 숲에는 다시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작가의 말
등록된 작가의 말이 없습니다.
닫기![]()
상태창으로 천하제패
13.제13화 판로 계획조회 : 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810 12.제12화 싹트는 가능성조회 : 3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841 11.제11화. 흑오강체단(黑烏剛體丹)조회 : 5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272 10.제10화 광연(狂煉)조회 : 10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723 9.제9화 시비조회 : 10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90 8.제8화 정산조회 : 11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615 7.제7화 대호(大虎)를 깨우다조회 : 11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913 6.제6화 독사 사냥조회 : 15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233 5.제5화 대나무 숲에서의 조우조회 : 22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639 4.제4화 덫조회 : 25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640 3.제3화 카운터조회 : 28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759 2.제2화 수련조회 : 21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576 1.제1화 백운조회 : 38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