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대나무 숲에서의 조우
조회 : 45 추천 : 0 글자수 : 5,639 자 2026-01-09
머릿속 감각이 근육 하나하나에 깊숙이 스며드는 동안, 어느덧 창호지 문틈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
동기화의 낯선 감각이 잦아들기가 무섭게, 말도 안 되는 허기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백운은 급히 고개를 돌려 방 안을 훑었다. 하지만 굴러다니는 건 먼지뭉치뿐, 당장 입에 넣을 만한 건 전무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문고리를 잡으려던 찰나였다.
드르륵.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문이 열리며 마석이 들이닥쳤다. 문 앞에서 백운과 정면으로 마주친 마석은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지만, 백운의 시선은 그가 아닌 손에 들린 물체에 꽂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기름진 닭고기 반 마리.
평소 먹던 멀건 죽과는 차원이 다른,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진한 고소함이 코끝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백운. 가져왔어."
마석이 쭈뼛거리며 내민 닭고기를 본능적으로 낚아채려던 찰나, 백운의 손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미친 듯한 허기 속에서도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부여잡은 그는 젓가락을 거꾸로 쥐어 손잡이 쪽을 마석에게 툭 내밀었다.
"한 입 먹어 봐."
"뭐?"
마석은 이내 백운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독이라도 탔을까 봐?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그 정도 쓰레기는 아니거든!"
백운은 대꾸 없이 그저 묵묵히 마석을 응시했다.
"하, 진짜…."
결국 마석은 억울하다는 듯 숨을 크게 몰아쉬더니, 젓가락을 낚아채 닭 살코기를 크게 뜯어 입에 넣었다. 우걱우걱. 그는 시위하듯 거칠게 씹어 삼키고는 입을 벌려 보였다.
잠시 정적.
일 분이 지나도록 마석에게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백운은 그제야 닭고기를 집어 들었다. 체면 따위는 사치였다. 그는 굶주린 짐승처럼 허겁지겁 살코기를 뜯어 삼켰다. 소금 간만 살짝 된 투박한 맛이었지만, 극한의 허기에 시달린 미각에는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황홀하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뼈만 앙상하게 남긴 백운이 깊은 만족감과 함께 한숨을 내쉬며 배를 두드렸다.
"후우, 이제야 좀 사람 사는 것 같네."
기름진 입가를 닦으며 해사하게 웃는 백운. 마석은 그 모습을 보며 묘한 괴리감에 휩싸였다.
어제 자신을 서늘하게 협박하던 악귀는 온데간데없고, 눈앞에는 영락없는 철없는 십 대 소년만이 앉아 있었다. 도무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놈이었다.
마석은 어색함에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 뭐냐?"
백운이 종이를 받아 펼치며 무심하게 물었다.
"대진표."
그 짧은 한마디에 분위기가 단번에 바뀌었다.
백운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싹 가셨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건 감정이 배제된 서늘한 눈빛뿐이었다. 백운은 말없이 종이 위를 훑어 내리다, 이내 익숙한 이름 하나에 시선을 고정했다.
"…조영(趙影)."
마석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장칠 형님이, 아니 장칠 그 새끼가 아주 작정을 했어. 조영은 알지? 별호가 독사(毒蛇)인 거. 비무 중에 상대방 눈을 찌르거나 관절 꺾는 걸 즐기는 미친놈이야."
백운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열 3위. 꽤나 까다로운 상대다.
"야, 너 반응이 왜 그래? 지금 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라고. 차라리 기권해. 기권하고 연무장에서 빠르게 나오면 병신 되는 꼴은 면할 거야."
마석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났다. 물론 백운이 죽으면 자신도 엮일까 봐 두려운 마음이 크겠지만, 그 투박한 말투 속에 일말의 인간적인 연민이 섞여 있음을 백운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백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어깨를 돌렸다.
"걱정 마."
그가 마석의 어깨를 툭 치며 씩 웃었다.
"난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주의거든. 죽으러 가는 거 아니니까 배당률 계산이나 잘해둬."
백운이 윙크를 날리며 방문을 나서려 하자, 마석이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야, 잠깐!"
백운이 의아한 듯 돌아보자, 마석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더니 결심한 듯 품 안 깊숙한 곳에서 꼬깃꼬깃한 얇은 책자 하나를 꺼내 휙 던지듯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
"…이게 뭔데?"
백운이 얼떨결에 받아든 책자의 표지에는 투박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유수보(流水步)].
"우리 같은 2대 제자들만 익히는 비급이야. 원칙상 사적인 전수는 엄금이라고. 걸리면 나도 뼈도 못 추리는데... 에이 씨, 몰라."
마석은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제 비무 보니까 너 철권 제법 쓰더라. 무공에 소질은 있는 것 같은데... 월례 비무까지 시간이 얼마 없어서 얼마나 익힐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빨라져도 살아서 나올 확률이 커지지 않겠냐! 괜히 뒤져서 나까지 곤란하게 만들지 말고."
백운은 잠시 손에 들린 책자와 마석을 번갈아 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고맙다. 요긴하게 쓸게."
백운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문을 나섰다. 마석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짜 알다가도 모를 놈이네."
뒷산 대나무 숲.
쏴아아-.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가 머릿속을 맑게 씻어주었다.
백운은 눈을 지그시 감고 숨을 골랐다. 배도 채웠으니, 이제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정리해 볼 시간이었다.
'상대는 2대 제자 중 서열 3위, 조영(趙影). 별호는 독사.'
소문에 의하면 놈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눈 찌르기든 급소 공격이든 개의치 않는 위험한 놈이다.
'지금의 내 철권(鐵拳) 경지로도 승산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여기서 큰 부상이라도 입었다간 장칠 그 놈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분명 상처를 빌미로 더 악랄한 수작을 부려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울 게 뻔하다.
'그러니 최대한 다치지 않고 끝내야 해.'
그렇다면 답은 하나. 맞지 않고 때린다.
즉, '스텝(Step)'이다.
백운은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품 안에서 방금 마석에게 받은 얇은 책자를 꺼냈다.
'녀석, 그냥 쓰레긴줄 알았는데 의외로 인간미는 있네.'
[유수보(流水步)].
3대 제자인 백운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다. 2대 제자들부터 익힐 수 있는 보법이니까. 마석 녀석, 정말로 큰맘 먹고 내놓은 게 분명했다.
백운은 빠르게 책자를 훑어 내렸다.
당장 남은 기능점이 없어 시스템의 힘을 빌려 즉시 습득할 순 없지만 상관없다.
백운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닌 보법의 구조를 파악하고, 흐름을 읽어내고 있었다. 수만 번의 경기를 복기하며 길러진 프로게이머의 분석력이 비급의 난해한 구결을 빠르게 이해하고, 머릿속에 체계적으로 저장해 나갔다.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나자, 백운은 책을 한 손에 들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 보았다.
'왼발을 축으로 삼고, 오른발은 흐르는 물처럼 곡선을 그리며….'
그는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아주 느린 속도로 비급에 적힌 궤적을 따라 발을 내디뎠다. 머릿속에 저장된 데이터를 몸으로 출력하는 일종의 테스트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론과 실전은 엄연히 달랐다. 머리로는 발을 어디에 둬야 할지 완벽하게 그려지는데, 아직 단련되지 않은 근육이 그 박자를 따라가지 못했다. 뇌와 몸의 싱크가 어긋나는 불쾌한 삐걱거림.
방법은 하나뿐이다. 머리가 아닌 세포가 기억할 때까지, 무한히 반복해서 새겨넣는 수밖에.
탓!
백운이 거칠게 땅을 박찼다.
불규칙하게 솟은 대나무 숲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아직 몸에 익지 않은 보법 탓에 발이 꼬여 어깨를 찧고, 중심을 잃어 비틀거렸다.
"크윽!"
하지만 백운은 멈추지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허벅지가 비명을 질러댔지만, 가슴 한구석에선 오히려 뜨거운 희열이 솟구쳤다.
전생의 육신은 고작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손목 터널 증후군과 허리 디스크로 삐걱거렸었다. 모니터 속 아바타가 화려하게 비상할 때, 정작 그것을 조종하는 본체는 의자에 묶인 채 병들어가는 것이 프로게이머의 비참한 숙명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피부 위를 흐르는 땀방울, 귓가를 때리는 심장 박동. 내가 직접 땅을 박차고, 내 몸으로 바람을 가른다. 살아있다는 이 생생한 감각이 잠들어 있던 온몸의 세포를 깨우고 있었다.
'더, 더 빠르게!'
사아악- 팟!
수십 번을 땅에 처박히고 구른 끝에야, 백운의 움직임은 아주 조금 나아졌다. 여전히 투박하고 위태로웠지만, 적어도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빈도는 줄어들었다. 흩날리는 대나무 잎 사이로, 백운은 가상의 조영이 뻗은 독수(毒手)를 꼴사납게라도 피해내는 이미지를 간신히 머릿속에 그렸다.
수십 번을 땅에 처박히고 구른 끝에야, 백운의 움직임은 아주 조금 나아졌다. 여전히 투박하고 위태로웠지만, 적어도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빈도는 줄어들었다. 흩날리는 대나무 잎 사이로, 백운은 가상의 조영이 뻗은 독수(毒手)를 꼴사납게라도 피해내는 이미지를 간신히 머릿속에 그렸다.
"호오."
그가 수련에 전념하고 있을 때, 묵직한 저음이 숲의 정적을 깼다.
순간, 백운의 몸이 이성보다 먼저 반응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놓이듯, 무의식적으로 뻗은 철권(鐵拳)이 소리의 근원을 향해 터져 나갔다.
파앙-!
명경(明鏡)의 경지에 맞닿은 주먹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토해냈다.
그 찰나, 숲 입구에 서 있던 거구의 사내, 왕호의 동공이 아주 미세하게 수축했다.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3대 제자의 권격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매서운 기세였기 때문이다.
"누, 누구…!"
백운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주먹을 거두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숲 입구에 서 있는 거구의 사내를 확인하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단순히 덩치가 큰 수준이 아니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근육은 갑옷처럼 전신을 두르고 있었고, 어깨에 걸친 호랑이 가죽조차 그의 흉폭한 야성을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마치 직립 보행하는 맹수 그 자체.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만큼 압도적인 피지컬이었다.
'2대 제자 서열 1위, 왕호(王虎).'
직접 대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토록 비현실적인 규격의 육체는 문파 내에 단 한 명뿐이니까.
'미친, 사람이 아니라 괴물 아냐? 마주 선 것만으로 숨이 턱 막히네.'
백운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피부로 와닿는 위압감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절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마주한 듯, 본능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왕호의 눈동자에 스쳤던 놀라움은 금세 가라앉고, 그 자리에 짙은 흥미가 들어찼다.
"제법이군. 방금 그 주먹, 웬만한 녀석들이었다면 뼈도 못 추렸겠어. 하지만 조영을 상대로는 쉽지 않을 거다. 이번 비무, 무운(武運)을 빈다."
왕호는 그 말만 남기고 몸을 돌렸다. 숲을 빠져나가는 거대한 몸집에 대나무들이 이리저리 밀려 흔들리며, 잎사귀들이 거칠게 부딪혔다.
멀어지는 왕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백운은 헛웃음을 흘렸다.
"허, 참. 별 싱거운 양반 다 보겠네. 갑자기 나타나서 본인 할 말만 하고 가네."
백운은 왕호의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도 뭐, 응원받아서 나쁠 건 없지."
백운은 잡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지켜보든, 누가 응원하든 상관없다. 지금 중요한 건, 오직 몸을 갈고닦아 실력을 키우는 것뿐이다.
"……."
동기화의 낯선 감각이 잦아들기가 무섭게, 말도 안 되는 허기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백운은 급히 고개를 돌려 방 안을 훑었다. 하지만 굴러다니는 건 먼지뭉치뿐, 당장 입에 넣을 만한 건 전무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문고리를 잡으려던 찰나였다.
드르륵.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문이 열리며 마석이 들이닥쳤다. 문 앞에서 백운과 정면으로 마주친 마석은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지만, 백운의 시선은 그가 아닌 손에 들린 물체에 꽂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기름진 닭고기 반 마리.
평소 먹던 멀건 죽과는 차원이 다른,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진한 고소함이 코끝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백운. 가져왔어."
마석이 쭈뼛거리며 내민 닭고기를 본능적으로 낚아채려던 찰나, 백운의 손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미친 듯한 허기 속에서도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부여잡은 그는 젓가락을 거꾸로 쥐어 손잡이 쪽을 마석에게 툭 내밀었다.
"한 입 먹어 봐."
"뭐?"
마석은 이내 백운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독이라도 탔을까 봐?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그 정도 쓰레기는 아니거든!"
백운은 대꾸 없이 그저 묵묵히 마석을 응시했다.
"하, 진짜…."
결국 마석은 억울하다는 듯 숨을 크게 몰아쉬더니, 젓가락을 낚아채 닭 살코기를 크게 뜯어 입에 넣었다. 우걱우걱. 그는 시위하듯 거칠게 씹어 삼키고는 입을 벌려 보였다.
잠시 정적.
일 분이 지나도록 마석에게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백운은 그제야 닭고기를 집어 들었다. 체면 따위는 사치였다. 그는 굶주린 짐승처럼 허겁지겁 살코기를 뜯어 삼켰다. 소금 간만 살짝 된 투박한 맛이었지만, 극한의 허기에 시달린 미각에는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황홀하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뼈만 앙상하게 남긴 백운이 깊은 만족감과 함께 한숨을 내쉬며 배를 두드렸다.
"후우, 이제야 좀 사람 사는 것 같네."
기름진 입가를 닦으며 해사하게 웃는 백운. 마석은 그 모습을 보며 묘한 괴리감에 휩싸였다.
어제 자신을 서늘하게 협박하던 악귀는 온데간데없고, 눈앞에는 영락없는 철없는 십 대 소년만이 앉아 있었다. 도무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놈이었다.
마석은 어색함에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 뭐냐?"
백운이 종이를 받아 펼치며 무심하게 물었다.
"대진표."
그 짧은 한마디에 분위기가 단번에 바뀌었다.
백운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싹 가셨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건 감정이 배제된 서늘한 눈빛뿐이었다. 백운은 말없이 종이 위를 훑어 내리다, 이내 익숙한 이름 하나에 시선을 고정했다.
"…조영(趙影)."
마석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장칠 형님이, 아니 장칠 그 새끼가 아주 작정을 했어. 조영은 알지? 별호가 독사(毒蛇)인 거. 비무 중에 상대방 눈을 찌르거나 관절 꺾는 걸 즐기는 미친놈이야."
백운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열 3위. 꽤나 까다로운 상대다.
"야, 너 반응이 왜 그래? 지금 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라고. 차라리 기권해. 기권하고 연무장에서 빠르게 나오면 병신 되는 꼴은 면할 거야."
마석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났다. 물론 백운이 죽으면 자신도 엮일까 봐 두려운 마음이 크겠지만, 그 투박한 말투 속에 일말의 인간적인 연민이 섞여 있음을 백운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백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어깨를 돌렸다.
"걱정 마."
그가 마석의 어깨를 툭 치며 씩 웃었다.
"난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주의거든. 죽으러 가는 거 아니니까 배당률 계산이나 잘해둬."
백운이 윙크를 날리며 방문을 나서려 하자, 마석이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야, 잠깐!"
백운이 의아한 듯 돌아보자, 마석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더니 결심한 듯 품 안 깊숙한 곳에서 꼬깃꼬깃한 얇은 책자 하나를 꺼내 휙 던지듯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
"…이게 뭔데?"
백운이 얼떨결에 받아든 책자의 표지에는 투박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유수보(流水步)].
"우리 같은 2대 제자들만 익히는 비급이야. 원칙상 사적인 전수는 엄금이라고. 걸리면 나도 뼈도 못 추리는데... 에이 씨, 몰라."
마석은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제 비무 보니까 너 철권 제법 쓰더라. 무공에 소질은 있는 것 같은데... 월례 비무까지 시간이 얼마 없어서 얼마나 익힐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빨라져도 살아서 나올 확률이 커지지 않겠냐! 괜히 뒤져서 나까지 곤란하게 만들지 말고."
백운은 잠시 손에 들린 책자와 마석을 번갈아 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고맙다. 요긴하게 쓸게."
백운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문을 나섰다. 마석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짜 알다가도 모를 놈이네."
뒷산 대나무 숲.
쏴아아-.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가 머릿속을 맑게 씻어주었다.
백운은 눈을 지그시 감고 숨을 골랐다. 배도 채웠으니, 이제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정리해 볼 시간이었다.
'상대는 2대 제자 중 서열 3위, 조영(趙影). 별호는 독사.'
소문에 의하면 놈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눈 찌르기든 급소 공격이든 개의치 않는 위험한 놈이다.
'지금의 내 철권(鐵拳) 경지로도 승산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여기서 큰 부상이라도 입었다간 장칠 그 놈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분명 상처를 빌미로 더 악랄한 수작을 부려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울 게 뻔하다.
'그러니 최대한 다치지 않고 끝내야 해.'
그렇다면 답은 하나. 맞지 않고 때린다.
즉, '스텝(Step)'이다.
백운은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품 안에서 방금 마석에게 받은 얇은 책자를 꺼냈다.
'녀석, 그냥 쓰레긴줄 알았는데 의외로 인간미는 있네.'
[유수보(流水步)].
3대 제자인 백운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다. 2대 제자들부터 익힐 수 있는 보법이니까. 마석 녀석, 정말로 큰맘 먹고 내놓은 게 분명했다.
백운은 빠르게 책자를 훑어 내렸다.
당장 남은 기능점이 없어 시스템의 힘을 빌려 즉시 습득할 순 없지만 상관없다.
백운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닌 보법의 구조를 파악하고, 흐름을 읽어내고 있었다. 수만 번의 경기를 복기하며 길러진 프로게이머의 분석력이 비급의 난해한 구결을 빠르게 이해하고, 머릿속에 체계적으로 저장해 나갔다.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나자, 백운은 책을 한 손에 들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 보았다.
'왼발을 축으로 삼고, 오른발은 흐르는 물처럼 곡선을 그리며….'
그는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아주 느린 속도로 비급에 적힌 궤적을 따라 발을 내디뎠다. 머릿속에 저장된 데이터를 몸으로 출력하는 일종의 테스트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론과 실전은 엄연히 달랐다. 머리로는 발을 어디에 둬야 할지 완벽하게 그려지는데, 아직 단련되지 않은 근육이 그 박자를 따라가지 못했다. 뇌와 몸의 싱크가 어긋나는 불쾌한 삐걱거림.
방법은 하나뿐이다. 머리가 아닌 세포가 기억할 때까지, 무한히 반복해서 새겨넣는 수밖에.
탓!
백운이 거칠게 땅을 박찼다.
불규칙하게 솟은 대나무 숲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아직 몸에 익지 않은 보법 탓에 발이 꼬여 어깨를 찧고, 중심을 잃어 비틀거렸다.
"크윽!"
하지만 백운은 멈추지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허벅지가 비명을 질러댔지만, 가슴 한구석에선 오히려 뜨거운 희열이 솟구쳤다.
전생의 육신은 고작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손목 터널 증후군과 허리 디스크로 삐걱거렸었다. 모니터 속 아바타가 화려하게 비상할 때, 정작 그것을 조종하는 본체는 의자에 묶인 채 병들어가는 것이 프로게이머의 비참한 숙명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피부 위를 흐르는 땀방울, 귓가를 때리는 심장 박동. 내가 직접 땅을 박차고, 내 몸으로 바람을 가른다. 살아있다는 이 생생한 감각이 잠들어 있던 온몸의 세포를 깨우고 있었다.
'더, 더 빠르게!'
사아악- 팟!
수십 번을 땅에 처박히고 구른 끝에야, 백운의 움직임은 아주 조금 나아졌다. 여전히 투박하고 위태로웠지만, 적어도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빈도는 줄어들었다. 흩날리는 대나무 잎 사이로, 백운은 가상의 조영이 뻗은 독수(毒手)를 꼴사납게라도 피해내는 이미지를 간신히 머릿속에 그렸다.
수십 번을 땅에 처박히고 구른 끝에야, 백운의 움직임은 아주 조금 나아졌다. 여전히 투박하고 위태로웠지만, 적어도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빈도는 줄어들었다. 흩날리는 대나무 잎 사이로, 백운은 가상의 조영이 뻗은 독수(毒手)를 꼴사납게라도 피해내는 이미지를 간신히 머릿속에 그렸다.
"호오."
그가 수련에 전념하고 있을 때, 묵직한 저음이 숲의 정적을 깼다.
순간, 백운의 몸이 이성보다 먼저 반응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놓이듯, 무의식적으로 뻗은 철권(鐵拳)이 소리의 근원을 향해 터져 나갔다.
파앙-!
명경(明鏡)의 경지에 맞닿은 주먹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토해냈다.
그 찰나, 숲 입구에 서 있던 거구의 사내, 왕호의 동공이 아주 미세하게 수축했다.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3대 제자의 권격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매서운 기세였기 때문이다.
"누, 누구…!"
백운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주먹을 거두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숲 입구에 서 있는 거구의 사내를 확인하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단순히 덩치가 큰 수준이 아니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근육은 갑옷처럼 전신을 두르고 있었고, 어깨에 걸친 호랑이 가죽조차 그의 흉폭한 야성을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마치 직립 보행하는 맹수 그 자체.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만큼 압도적인 피지컬이었다.
'2대 제자 서열 1위, 왕호(王虎).'
직접 대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토록 비현실적인 규격의 육체는 문파 내에 단 한 명뿐이니까.
'미친, 사람이 아니라 괴물 아냐? 마주 선 것만으로 숨이 턱 막히네.'
백운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피부로 와닿는 위압감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절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마주한 듯, 본능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왕호의 눈동자에 스쳤던 놀라움은 금세 가라앉고, 그 자리에 짙은 흥미가 들어찼다.
"제법이군. 방금 그 주먹, 웬만한 녀석들이었다면 뼈도 못 추렸겠어. 하지만 조영을 상대로는 쉽지 않을 거다. 이번 비무, 무운(武運)을 빈다."
왕호는 그 말만 남기고 몸을 돌렸다. 숲을 빠져나가는 거대한 몸집에 대나무들이 이리저리 밀려 흔들리며, 잎사귀들이 거칠게 부딪혔다.
멀어지는 왕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백운은 헛웃음을 흘렸다.
"허, 참. 별 싱거운 양반 다 보겠네. 갑자기 나타나서 본인 할 말만 하고 가네."
백운은 왕호의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도 뭐, 응원받아서 나쁠 건 없지."
백운은 잡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지켜보든, 누가 응원하든 상관없다. 지금 중요한 건, 오직 몸을 갈고닦아 실력을 키우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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