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첫 번째 거점
조회 : 184 추천 : 0 글자수 : 4,619 자 2026-02-12
천곡현의 거리는 활기가 넘쳤지만, 백운의 발길은 인적이 드문 뒷골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화려한 기와집이 즐비한 중심가와 달리, 현의 끝자락으로 갈수록 풍경은 급격히 쇠락해갔다.
낯설면서도 지독하게 익숙한 악취가 코끝을 스치자,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기억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철권문에 입문하기 전, 그가 짐승처럼 구르며 생존해야만 했던 밑바닥이자 화려한 무림의 이면, 빛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가 바로 이곳이었다.
발걸음이 깊어질수록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가 스치며 마치 뒷골목을 쫓겨 다니는 쥐새끼가 된 기분이 들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혐오스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기회가 되면 밟아 죽이려 했던 그 시절의 기억이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듯했다.
비록 영혼은 바뀌었으나, 육신에 새겨진 트라우마는 여전히 이곳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백운은 혀를 차며 애써 불쾌한 감각을 떨쳐냈다.
'쓸데없는 감정에 휘둘릴 여유는 없어.'
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기억을 더듬어 골목의 가장 음습한 구석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다 쓰러져가는 처마 밑에 ‘복덕방(福德房)’이라 적힌 낡은 나무 간판이 걸린 가게 앞에 멈춰 섰다. 겉보기엔 평범한 중개소 같았지만, 실상은 무림의 잡다한 정보와 은밀한 거처를 거래하는 거간꾼들의 소굴이었다.
"어서 옵쇼.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번지수는 제대로 찾으신 것 같구먼."
곰방대를 물고 있던 쭈글쭈글한 노인이 백운을 맞이했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눈이 침침해 보였으나, 곰방대를 쥔 손마디는 기형적으로 굵었고 헐렁한 소매 사이로 언뜻 비치는 팔뚝 근육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단단해 보였다.
백운은 포권(抱拳)을 취해 가볍게 예를 표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외진 곳을 찾고 있는데, 다 무너져가는 곳이라도 상관없으니 그저 값이 싸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안에서 무슨 일을 하든 소리나 냄새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만한 장소여야 합니다."
조 노인이 곰방대를 탁탁 털며 음흉하게 웃었다.
"허허, 조건이 아주 구체적이시네. 냄새라… 혹시 시체라도 숨기시게?"
"……."
노인은 백운이 대답하기도 전에 낡은 장부를 뒤적거리더니, 먼지 쌓인 페이지 하나를 펼쳤다.
"마침 임자가 딱 맞는 물건이 하나 있긴 하오. 빈민가 가장 끝자락, 현의 경계인 산자락과 맞닿은 언덕배기에 덩그러니 남은 초가집인데… 뒤로는 관리가 안 된 대나무 군락이 야산까지 뻗어 있어 시야를 완전히 가려주고, 앞으론 현을 빠져나가는 개천이 흘러 소음을 덮어주니 은밀하게 쓰기엔 그만한 터가 없지."
"가격은 어느 정도입니까?"
"글쎄, 가격이야 물건을 직접 보고 이야기해도 늦지 않겠지. 워낙 험한 자리라 젊은 양반이 그곳 분위기를 견딜 수 있을지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 아니겠소?"
백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 노인이 앞장섰고,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빈민가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이었다. 길가에는 오물이 흐르고, 무너진 담벼락 뒤에서는 퀭한 눈빛의 사내들이 지나가는 두 사람을 주시했다.
평소라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었을 굶주린 늑대들이었으나, 백운의 몸에 걸쳐진 철권문의 도복을 확인하자마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거부할 수 없는 힘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와 비굴한 침묵이 골목을 가득 채웠지만, 백운은 그 익숙한 시선들을 무시한 채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현의 끝자락, 잡초가 무성한 언덕배기에 다다르자 낡은 초가집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요. 지붕만 좀 손보면 살 만할 게요."
조 노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곰방대로 집을 가리켰으나, 백운의 눈에 비친 집의 몰골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잡초가 허리까지 자란 마당은 물론이고, 서까래는 썩어 문드러져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백운은 집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벽면의 균열과 아궁이의 상태는 물론 주변 지형지물까지 꼼꼼히 살폈다. 뒤쪽으로 뻗은 대나무 숲은 은신처이자 훌륭한 도주로가 되어줄 것이었고, 앞쪽 개천 너머로는 인가가 드물어 인기척을 감지하기 용이해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퇴로와 보안 조건이 완벽하게 부합했다.
"위치는 마음에 드는군요. 그래서 가격은 얼마입니까?"
"일 년에 은자 한 냥은 받아야겠소. 아무리 집이 낡았어도, 관아의 순찰조차 돌지 않는 무법지대니 손님한텐 더할 나위 없이 귀한 물건 아니겠소?"
백운은 속내를 철저히 감춘 채 짐짓 심드렁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며 곧바로 집에 대한 하자를 조목조목 짚어내기 시작했다.
"지붕은 뚫렸고 기둥은 썩었으며, 관아의 눈이 닿지 않는다는 건 밤마다 칼침 맞은 놈들이 숨어들기 좋은 흉가라는 뜻이기도 하죠. 그런 위험까지 떠안는데 한 냥은 과하니 반 냥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노인이 떫은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노인이 대답하지 않자 백운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고, 이에 조 노인이 짐짓 다급한 척하며 곰방대를 내밀어 백운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 젊은 양반! 반 냥은 너무하지! 적어도 일곱 돈은 받아야…!"
"반 냥입니다. 대신 복덕방 복비로 조금 더 얹어 드리지요."
백운은 품 주머니에서 잘게 부순 은조각, 쇄은(碎銀)을 꺼내 노인에게 정중히 건넸다. 노인은 백운이 내민 은조각을 받아들고는 마치 밑지는 장사라도 한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좋소, 반 냥. 나중에 집이 무너졌다고 딴소리하기 없기네."
노인은 은조각을 품 깊숙이 챙겨 넣고 안쪽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 뭉치와 허리춤의 녹슨 열쇠 꾸러미를 함께 꺼내 백운에게 던졌다.
"옜다. 관아 인장이 찍힌 가옥 문서네. 명의는 공란으로 비워뒀으니 알아서 채워 넣으시게."
노인은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미련 없이 언덕을 내려갔다. 백운은 열쇠와 문서를 쥐고 삐걱거리는 사립문을 밀고 들어섰다.
'끼익-'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드러난 내부는 예상보다 넓었다. 먼지가 두껍게 쌓이긴 했으나, 본채에는 방이 세 개나 딸려 있었고, 한쪽에는 제법 큼직한 아궁이가 딸린 부엌이 붙어 있었다.
'방 하나는 약재 창고로 쓰고, 하나는 제조실, 나머지는 휴식 공간으로 쓰면 되겠군.'
백운은 부엌으로 들어가 굴뚝이 막혀 있는지 확인하고 솥을 걸 만한 자리를 가늠하며 아궁이 상태를 살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위치였는데, 지형 특성상 바람이 집을 거쳐 뒤편 대나무 숲으로 불어 들어가는 길목이라 약초를 달일 때 나는 독한 냄새가 자연스럽게 숲속 깊은 곳으로 빠져나갈 터였다.
'이 정도면 훌륭해.'
백운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충 거미줄을 걷어냈다. 이제 거점은 확보되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였다.
철권문 숙소로 돌아온 백운이 사립문 앞에 다다르자, 담장 너머로 거친 기합 소리가 먼저 귓가를 때렸다.
"흡! 핫!"
마당 한구석, 마석이 상의를 탈의한 채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철권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백운! 왔냐?"
인기척을 느낀 마석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동작을 멈췄다.
"사형이 웬일로 이 시간에 수련을 다 하십니까? 해가 서쪽에서 뜨겠습니다."
백운이 짐짓 놀란 척 농을 건네자, 마석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야, 그 약 효과가 아주 기가 막히더라! 꽉 막혀 있던 혈도가 뻥 뚫린 기분으로 근육도 훨씬 유연해지고 기의 흐름마저 거침없어졌어. 철권 초식을 펼칠 때마다 근육이 찢어질 것 같아 늘 턱턱 막히던 구간도 아무 문제 없이 부드럽게 이어지더라니까!"
백운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 복용이라 몸 안의 노폐물이 빠져나가면서 기감이 예민해진 덕분에 약효가 더 강렬하게 다가왔을 거야. 하지만 앞으로는 지금처럼 극적인 변화를 느끼기는 힘들 테니 꾸준히 복용해서 기초를 다지는 게 중요해. 무엇보다 찌꺼기가 쌓이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으니, 매일 운기조식을 해서 약 때문에 생긴 탁기를 반드시 배출해야 해."
백운은 말을 마치며 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 뭉치를 꺼내 흔들었다.
"거간꾼을 통해 현 외곽 대나무 숲 근처에 있는 폐가로 집을 하나 구했어."
백운은 곧바로 쭈그리고 앉아 바닥에 나뭇가지로 약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정기적인 모임은 거기서 갖되, 절대로 둘이 같이 움직여선 안 된다는 걸 명심해. 네가 재료를 구해오면 내가 밤을 틈타 그곳으로 이동해 약을 만들고 판매까지 직접 할 거다."
"엥? 파는 건 내가 해도 되잖아? 너는 만들기만 하고."
백운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네 실력으로는 금방 꼬리가 밟힐 거야. 어설프게 움직이다간 제조처까지 들켜서 우리 둘 다 끝장이니 판매는 내가 맡는다."
마석은 자신의 부족한 실력을 인정한다는 듯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알았어. 그럼 난 재료 조달만 확실히 할게."
"좋아, 계획은 여기까지니 이제 슬슬 분장 준비를 시작할까?"
백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석이 씩 웃으며 수련장 한구석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럴 줄 알고 변장할 물건은 내가 미리 챙겨뒀지. 움직이기엔 아직 밖이 환하니까, 우선 든든하게 저녁이나 먼저 먹고 시작하자."
마석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자 백운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낯설면서도 지독하게 익숙한 악취가 코끝을 스치자,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기억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철권문에 입문하기 전, 그가 짐승처럼 구르며 생존해야만 했던 밑바닥이자 화려한 무림의 이면, 빛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가 바로 이곳이었다.
발걸음이 깊어질수록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가 스치며 마치 뒷골목을 쫓겨 다니는 쥐새끼가 된 기분이 들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혐오스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기회가 되면 밟아 죽이려 했던 그 시절의 기억이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듯했다.
비록 영혼은 바뀌었으나, 육신에 새겨진 트라우마는 여전히 이곳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백운은 혀를 차며 애써 불쾌한 감각을 떨쳐냈다.
'쓸데없는 감정에 휘둘릴 여유는 없어.'
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기억을 더듬어 골목의 가장 음습한 구석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다 쓰러져가는 처마 밑에 ‘복덕방(福德房)’이라 적힌 낡은 나무 간판이 걸린 가게 앞에 멈춰 섰다. 겉보기엔 평범한 중개소 같았지만, 실상은 무림의 잡다한 정보와 은밀한 거처를 거래하는 거간꾼들의 소굴이었다.
"어서 옵쇼.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번지수는 제대로 찾으신 것 같구먼."
곰방대를 물고 있던 쭈글쭈글한 노인이 백운을 맞이했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눈이 침침해 보였으나, 곰방대를 쥔 손마디는 기형적으로 굵었고 헐렁한 소매 사이로 언뜻 비치는 팔뚝 근육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단단해 보였다.
백운은 포권(抱拳)을 취해 가볍게 예를 표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외진 곳을 찾고 있는데, 다 무너져가는 곳이라도 상관없으니 그저 값이 싸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안에서 무슨 일을 하든 소리나 냄새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만한 장소여야 합니다."
조 노인이 곰방대를 탁탁 털며 음흉하게 웃었다.
"허허, 조건이 아주 구체적이시네. 냄새라… 혹시 시체라도 숨기시게?"
"……."
노인은 백운이 대답하기도 전에 낡은 장부를 뒤적거리더니, 먼지 쌓인 페이지 하나를 펼쳤다.
"마침 임자가 딱 맞는 물건이 하나 있긴 하오. 빈민가 가장 끝자락, 현의 경계인 산자락과 맞닿은 언덕배기에 덩그러니 남은 초가집인데… 뒤로는 관리가 안 된 대나무 군락이 야산까지 뻗어 있어 시야를 완전히 가려주고, 앞으론 현을 빠져나가는 개천이 흘러 소음을 덮어주니 은밀하게 쓰기엔 그만한 터가 없지."
"가격은 어느 정도입니까?"
"글쎄, 가격이야 물건을 직접 보고 이야기해도 늦지 않겠지. 워낙 험한 자리라 젊은 양반이 그곳 분위기를 견딜 수 있을지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 아니겠소?"
백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 노인이 앞장섰고,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빈민가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이었다. 길가에는 오물이 흐르고, 무너진 담벼락 뒤에서는 퀭한 눈빛의 사내들이 지나가는 두 사람을 주시했다.
평소라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었을 굶주린 늑대들이었으나, 백운의 몸에 걸쳐진 철권문의 도복을 확인하자마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거부할 수 없는 힘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와 비굴한 침묵이 골목을 가득 채웠지만, 백운은 그 익숙한 시선들을 무시한 채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현의 끝자락, 잡초가 무성한 언덕배기에 다다르자 낡은 초가집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요. 지붕만 좀 손보면 살 만할 게요."
조 노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곰방대로 집을 가리켰으나, 백운의 눈에 비친 집의 몰골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잡초가 허리까지 자란 마당은 물론이고, 서까래는 썩어 문드러져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백운은 집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벽면의 균열과 아궁이의 상태는 물론 주변 지형지물까지 꼼꼼히 살폈다. 뒤쪽으로 뻗은 대나무 숲은 은신처이자 훌륭한 도주로가 되어줄 것이었고, 앞쪽 개천 너머로는 인가가 드물어 인기척을 감지하기 용이해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퇴로와 보안 조건이 완벽하게 부합했다.
"위치는 마음에 드는군요. 그래서 가격은 얼마입니까?"
"일 년에 은자 한 냥은 받아야겠소. 아무리 집이 낡았어도, 관아의 순찰조차 돌지 않는 무법지대니 손님한텐 더할 나위 없이 귀한 물건 아니겠소?"
백운은 속내를 철저히 감춘 채 짐짓 심드렁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며 곧바로 집에 대한 하자를 조목조목 짚어내기 시작했다.
"지붕은 뚫렸고 기둥은 썩었으며, 관아의 눈이 닿지 않는다는 건 밤마다 칼침 맞은 놈들이 숨어들기 좋은 흉가라는 뜻이기도 하죠. 그런 위험까지 떠안는데 한 냥은 과하니 반 냥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노인이 떫은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노인이 대답하지 않자 백운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고, 이에 조 노인이 짐짓 다급한 척하며 곰방대를 내밀어 백운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 젊은 양반! 반 냥은 너무하지! 적어도 일곱 돈은 받아야…!"
"반 냥입니다. 대신 복덕방 복비로 조금 더 얹어 드리지요."
백운은 품 주머니에서 잘게 부순 은조각, 쇄은(碎銀)을 꺼내 노인에게 정중히 건넸다. 노인은 백운이 내민 은조각을 받아들고는 마치 밑지는 장사라도 한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좋소, 반 냥. 나중에 집이 무너졌다고 딴소리하기 없기네."
노인은 은조각을 품 깊숙이 챙겨 넣고 안쪽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 뭉치와 허리춤의 녹슨 열쇠 꾸러미를 함께 꺼내 백운에게 던졌다.
"옜다. 관아 인장이 찍힌 가옥 문서네. 명의는 공란으로 비워뒀으니 알아서 채워 넣으시게."
노인은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미련 없이 언덕을 내려갔다. 백운은 열쇠와 문서를 쥐고 삐걱거리는 사립문을 밀고 들어섰다.
'끼익-'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드러난 내부는 예상보다 넓었다. 먼지가 두껍게 쌓이긴 했으나, 본채에는 방이 세 개나 딸려 있었고, 한쪽에는 제법 큼직한 아궁이가 딸린 부엌이 붙어 있었다.
'방 하나는 약재 창고로 쓰고, 하나는 제조실, 나머지는 휴식 공간으로 쓰면 되겠군.'
백운은 부엌으로 들어가 굴뚝이 막혀 있는지 확인하고 솥을 걸 만한 자리를 가늠하며 아궁이 상태를 살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위치였는데, 지형 특성상 바람이 집을 거쳐 뒤편 대나무 숲으로 불어 들어가는 길목이라 약초를 달일 때 나는 독한 냄새가 자연스럽게 숲속 깊은 곳으로 빠져나갈 터였다.
'이 정도면 훌륭해.'
백운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충 거미줄을 걷어냈다. 이제 거점은 확보되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였다.
철권문 숙소로 돌아온 백운이 사립문 앞에 다다르자, 담장 너머로 거친 기합 소리가 먼저 귓가를 때렸다.
"흡! 핫!"
마당 한구석, 마석이 상의를 탈의한 채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철권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백운! 왔냐?"
인기척을 느낀 마석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동작을 멈췄다.
"사형이 웬일로 이 시간에 수련을 다 하십니까? 해가 서쪽에서 뜨겠습니다."
백운이 짐짓 놀란 척 농을 건네자, 마석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야, 그 약 효과가 아주 기가 막히더라! 꽉 막혀 있던 혈도가 뻥 뚫린 기분으로 근육도 훨씬 유연해지고 기의 흐름마저 거침없어졌어. 철권 초식을 펼칠 때마다 근육이 찢어질 것 같아 늘 턱턱 막히던 구간도 아무 문제 없이 부드럽게 이어지더라니까!"
백운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 복용이라 몸 안의 노폐물이 빠져나가면서 기감이 예민해진 덕분에 약효가 더 강렬하게 다가왔을 거야. 하지만 앞으로는 지금처럼 극적인 변화를 느끼기는 힘들 테니 꾸준히 복용해서 기초를 다지는 게 중요해. 무엇보다 찌꺼기가 쌓이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으니, 매일 운기조식을 해서 약 때문에 생긴 탁기를 반드시 배출해야 해."
백운은 말을 마치며 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 뭉치를 꺼내 흔들었다.
"거간꾼을 통해 현 외곽 대나무 숲 근처에 있는 폐가로 집을 하나 구했어."
백운은 곧바로 쭈그리고 앉아 바닥에 나뭇가지로 약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정기적인 모임은 거기서 갖되, 절대로 둘이 같이 움직여선 안 된다는 걸 명심해. 네가 재료를 구해오면 내가 밤을 틈타 그곳으로 이동해 약을 만들고 판매까지 직접 할 거다."
"엥? 파는 건 내가 해도 되잖아? 너는 만들기만 하고."
백운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네 실력으로는 금방 꼬리가 밟힐 거야. 어설프게 움직이다간 제조처까지 들켜서 우리 둘 다 끝장이니 판매는 내가 맡는다."
마석은 자신의 부족한 실력을 인정한다는 듯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알았어. 그럼 난 재료 조달만 확실히 할게."
"좋아, 계획은 여기까지니 이제 슬슬 분장 준비를 시작할까?"
백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석이 씩 웃으며 수련장 한구석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럴 줄 알고 변장할 물건은 내가 미리 챙겨뒀지. 움직이기엔 아직 밖이 환하니까, 우선 든든하게 저녁이나 먼저 먹고 시작하자."
마석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자 백운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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