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5: 다른 차원의 세상
조회 : 48 추천 : 0 글자수 : 5,024 자 2026-01-28
원룸 문을 닫자마자 바깥의 소음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새벽 두 시 반, 복도 형광등은 벌레 한 마리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유이의 집은 더 조용했다. 방 안엔 누군가 머문 흔적 같은 건 없었다. 희미하게 남은 샴푸 냄새도, 식사 후의 공기 같은 온기도 없었다. 바닥에 놓인 얇은 매트와 작은 테이블, 벽 쪽에 기대 놓은 접이식 의자가 전부였다.
컵에 물을 따라 마시려다 유이는 다시 주저앉았다.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시끄러운 곳에서 오래 있다가 조용한 곳으로 오면 가끔 이런 식이었다. 집이라는 공간이 안전하기보다는 갑자기 너무 쓸쓸하게 느껴졌다. 조명은 켜두었지만 노란색 등불은 유이의 기분을 덜어주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현관 쪽에 놓인 검은 하이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이 끝났다는 사실만 남아 있었다.
유이는 양말도 벗지 않은 채 리모컨을 찾아 들었다. 버튼을 누르자 TV 화면이 순간적인 청백색 섬광을 내더니 뉴스 채널로 바뀌었다. 집이 조용할 때는 사람 목소리가 필요했다. 말 거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누군가 떠드는 소리. 화면 속에서는 리포터가 문화센터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유이는 컵도 식탁 위에 내버려둔 채 화면만 가만히 바라봤다.
“오늘 도쿄 외곽 문화센터에서 열린 ‘청소년 문화예술 교류전'에는 지역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참석해 의미를 더했습니다.”
화면이 행사장 내부로 넘어갔다. 아이들이 태권도 시범을 보이고 있었고, 그 뒤편에 익숙한 로고가 걸려 있었다. 진광회. 유이는 그 단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포터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이번 행사는 종교단체 진광회가 주최하고, 도청과 문화센터가 후원하는 형태로 진행됐습니다. 행사는 종교색 없이 문화와 청년 활동에 중점을...”
리포터의 말이 끝나기 전에 화면이 바뀌었다. 정장 차림의 남자가 무대에 올라가 박수를 받았다. 현수막 위에는 ‘오노데라 도의원’이라는 이름이 큼지막하게 떴다. 유이는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기자는 계속 말했다. “행사에는 오노데라 히로유키 도의원이 참석해 지역 청년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행사장의 박수 소리가 TV를 통해 울려 퍼졌다. 의자에 앉아 있던 어르신들이 손뼉을 치고, 아이들이 관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 풍경이었다. 오히려 평화롭고 따뜻한 장면이었다. 유이는 목을 숙여 머리카락을 손으로 모았다. 젖은 끝부분에서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면은 한 번 더 바뀌어 리포터의 마무리 멘트가 나왔다.
“이번 행사와 관련된 논란에 대해 오노데라 의원 측은 ‘지역 발전을 위한 협력일 뿐’이라며 의혹을 일축했습니다. 방송국 사회부 마츠모토 기자였습니다.”
뉴스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부드러운 음악으로 넘어갔다. 유이는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용히.
화면이 꺼진 방은 다시 조용해졌고, 모니터에 남은 잔광만이 벽에 떨어졌다. 유이는 다리를 끌어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진광회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종교나 뉴스가 아니라 오래된 날짜 같은 것이었다. 잊혀진 적이 없는데, 입 밖에 꺼낸 적도 없는 종류의 날짜.
진광회라는 단어는 유이에게 뉴스나 종교가 아니라, 중학교 시절로 연결된 단어였다. 어머니가 “친절한 사람들 있는 모임”에 나가기 시작하던 시기, 행사와 봉사활동이 늘어나던 시기, 그리고 유이가 혼자 안쪽 방으로 불려 들어가던 시기였다. 체육관에서 떡을 썰고, 연필을 나눠주고, 아이들의 합창 공연을 듣는 일까지는 문제없었다. 처음에 유이가 기억하는 진광회는 그랬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건물 안쪽에는 일반 신도들이 잘 들어가지 않는 공간이 있었다. 교주나 지도부가 머무는 방이었고, 어른들은 그것을 축복을 주는 공간이라고 불렀다. 유이는 그 방에 두세 번 정도 혼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교주는 유이에게 등을 돌리게 하거나 의자에 앉히거나 했다. 그리고 있어서는 안될 접촉이 있었다. 처음엔 손을 잡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정도였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 있었다. 몸을 만지거나, 가까이 붙거나, 벗기려 들기도 했다. 기도도 치료도 아닌 행동이었다. 싫었고, 무서웠고, 잘못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유이는 곧장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오늘 그 사람이 이상한 짓 했어.”
어머니는 잠깐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그런 분이 아니야. 네가 잘못 기억한 거야.”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 말을 하면 축복이 사라진다.”
시간이 지나자 유이는 입을 닫는 게 더 편해졌다. 아무도 정확히 묻지 않았다.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일을 당했는지. 유이는 자세히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어른들은 듣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 알고 혼자 넘기는 일이 늘어났다.
침대에 누웠지만 3시간 째 잠이 오지 않았다. 스마트폰 불빛이 벽지를 따라 번졌고, 에어컨 바람이 미세하게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스쳤다. 유이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지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방은 더 조용해졌고, 조용해질수록 생각은 또렷해졌다. TV 속 진광회 로고가 떠올랐다.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도. “그런 말을 하면 축복이 사라진다.” 유이는 코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축복이란 단어는 너무 과했고, 진광회는 너무 가벼웠다.
“축복 같은 게 어디 있어…” 유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공기 속으로 흩어졌고, 흩어진 감정도 다시 모양을 잃었다. 결국 남는 건 한 줄짜리 자조였다. 살았다는 사실, 벌었단 숫자, 지출할 금액, 갚을 빚, 그리고 내일의 시간표. 어느 순간 유이는 눈을 감았다. 잠든 건지 포기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방식이었다. 방 안에는 공조기 소음과 새벽 냄새 같은 공백만이 남아 있었다.
아침 공기는 밤보다 훨씬 가벼웠다. 잠을 잔 건지 그냥 누워 있었던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유이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세수를 하고 커피 대신 편의점 아이스티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출근이라는 단어가 어딘가 생경했지만, 이 일에도 출근 시간이 있었다. 가부키쵸 골목은 밤과 아침 사이의 표정이 달랐다. 네온은 꺼져 있고 간판만 남아 있었다. 술집 앞에는 청소하는 직원들이 담배꽁초와 병을 쓸어 담고 있었다.
사무실은 3층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지만 가볍지도 않았다. 현관문을 열면 향수 냄새와 제습기 냄새, 그리고 바탕에 깔린 피곤함 같은 공기가 섞여 있었다. 이미 도착한 여자 둘이 소파에 기대어 반쯤 누운 자세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아, 왔네.” 매니저가 서류함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인사라고 하기엔 짧았지만 서로에게 필요한 양만큼이었다.
유이는 소파 끝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 상단에는 사무실 단톡방 알림이 띄워져 있었다. 오늘 예약 상황표, 출근 명단, 지역별 대기 인원.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이었다.
데리헤루의 근무는 접객이 아니라 대기에서 시작되었다. 전화를 기다리는 시간, 주소가 떨어지는 시간, 콜이 취소되는 시간. 돈은 손님을 만나야 생기지만, 가장 긴 시간은 기다리는 데 쓰였다. 유이는 무릎 위에 휴대폰을 올려두고 화면을 켜둔 채 가만히 있었다. 화면은 잠금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신주쿠 쪽 조용하네.”
옆자리 여자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다른 여자가 이어받았다. “오늘 도청 행사 있대. 그럴 때는 좀 뜸한 것 같아.”
매니저가 명단을 확인하며 말했다. “일단 대기. 들어오면 순서대로 돌릴게.”
사무실 내부는 조용했지만 결코 편안하지는 않았다. 대기는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가진 시간이었다. 전화가 울리면 일이고, 울리지 않으면 비용이었다. 손님이 뜸하면, 그날은 손해였다. 유이는 화면을 똑바로 바라봤다. 손가락은 가만히 있었지만 내부는 끊임없이 세고 있었다. 오늘 남은 시간, 벌어야 할 금액, 그 금액 사이의 숫자들.
사무실 구석의 작은 TV에서는 낮 뉴스를 틀어놓은 채 음소거가 되어 있었다. 화면에는 도쿄도청 앞에서 촬영 중인 리포터가 잡혔다. 부제목에는 ‘청소년 문화예술 교류전—진광회 후원’이라는 글자가 조용히 지나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유이만이 시선을 잠깐 그쪽으로 빼앗겼을 뿐이었다.
유이는 TV를 보려던 게 아니었다. 그냥 소파에 앉아있었고, TV는 켜져 있었을 뿐이었다. 뉴스는 행사 장면을 내보내다가 화면을 전환했다. 스튜디오. 기자. 짧은 자막. 이름과 소속. 그리고 아주 짧은 얼굴.
— 오노데라 나오야 / 사회부 기자
출연 시간은 10초도 되지 않았다. 나오야는 단정하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에 흑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형은 균형 잡혀 있었고 턱선은 부드러웠다. 누가 봐도 잘생겼다고 단숨에 말할 만큼 화려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말끔하고 정돈된 느낌이었다. 마치 흰 셔츠의 주름까지 세탁소에서 관리된 것 같은 종류의 단정함. 유이는 그런 디테일을 곰곰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화면을 스쳐 지나가듯 바라볼 뿐이었다. 나오야가 말한 내용도 귀에 남지 않았다. 오직 성, 이름, 그리고 정장 차림의 실루엣만 남았다.
다음 순간 화면은 다시 행사장으로 돌아갔다. 박수 소리와 무대. 유이는 시선을 돌리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대기 전화는 여전히 울리지 않았다. TV 화면에서는 여전히 나오야가 없는 뉴스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 짧은 10초짜리 얼굴은 아무 사건도 없이 지나갔다.
유이는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켜놓았다. 대기방은 조용했고, 시간은 미세하게 늘어져 있었다. 밖에서는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는지 사람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편의점 앞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고등학생들, 회사원들 웃음소리, 택배기사가 오토바이 시동을 거는 소리. 모두가 움직이고 있었다.
TV는 계속 진광회 행사를 비추고 있었다. 아이들이 뛰고, 부모들이 사진을 찍고, 정치인들이 악수를 하며 웃었다. 사회자는 밝게 말했고, 화면 속 사람들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행사이기 때문에 나온 웃음인지, 진심에서 나온 웃음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화면 위에서는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유이는 잠깐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웃는지, 누구를 위해 웃는지 따지는 건 뉴스의 일이었다. 유이에게는 그저 다른 세상이었다. 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조용했고, 전화 호출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컵에 물을 따라 마시려다 유이는 다시 주저앉았다.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시끄러운 곳에서 오래 있다가 조용한 곳으로 오면 가끔 이런 식이었다. 집이라는 공간이 안전하기보다는 갑자기 너무 쓸쓸하게 느껴졌다. 조명은 켜두었지만 노란색 등불은 유이의 기분을 덜어주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현관 쪽에 놓인 검은 하이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이 끝났다는 사실만 남아 있었다.
유이는 양말도 벗지 않은 채 리모컨을 찾아 들었다. 버튼을 누르자 TV 화면이 순간적인 청백색 섬광을 내더니 뉴스 채널로 바뀌었다. 집이 조용할 때는 사람 목소리가 필요했다. 말 거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누군가 떠드는 소리. 화면 속에서는 리포터가 문화센터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유이는 컵도 식탁 위에 내버려둔 채 화면만 가만히 바라봤다.
“오늘 도쿄 외곽 문화센터에서 열린 ‘청소년 문화예술 교류전'에는 지역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참석해 의미를 더했습니다.”
화면이 행사장 내부로 넘어갔다. 아이들이 태권도 시범을 보이고 있었고, 그 뒤편에 익숙한 로고가 걸려 있었다. 진광회. 유이는 그 단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포터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이번 행사는 종교단체 진광회가 주최하고, 도청과 문화센터가 후원하는 형태로 진행됐습니다. 행사는 종교색 없이 문화와 청년 활동에 중점을...”
리포터의 말이 끝나기 전에 화면이 바뀌었다. 정장 차림의 남자가 무대에 올라가 박수를 받았다. 현수막 위에는 ‘오노데라 도의원’이라는 이름이 큼지막하게 떴다. 유이는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기자는 계속 말했다. “행사에는 오노데라 히로유키 도의원이 참석해 지역 청년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행사장의 박수 소리가 TV를 통해 울려 퍼졌다. 의자에 앉아 있던 어르신들이 손뼉을 치고, 아이들이 관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 풍경이었다. 오히려 평화롭고 따뜻한 장면이었다. 유이는 목을 숙여 머리카락을 손으로 모았다. 젖은 끝부분에서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면은 한 번 더 바뀌어 리포터의 마무리 멘트가 나왔다.
“이번 행사와 관련된 논란에 대해 오노데라 의원 측은 ‘지역 발전을 위한 협력일 뿐’이라며 의혹을 일축했습니다. 방송국 사회부 마츠모토 기자였습니다.”
뉴스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부드러운 음악으로 넘어갔다. 유이는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용히.
화면이 꺼진 방은 다시 조용해졌고, 모니터에 남은 잔광만이 벽에 떨어졌다. 유이는 다리를 끌어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진광회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종교나 뉴스가 아니라 오래된 날짜 같은 것이었다. 잊혀진 적이 없는데, 입 밖에 꺼낸 적도 없는 종류의 날짜.
진광회라는 단어는 유이에게 뉴스나 종교가 아니라, 중학교 시절로 연결된 단어였다. 어머니가 “친절한 사람들 있는 모임”에 나가기 시작하던 시기, 행사와 봉사활동이 늘어나던 시기, 그리고 유이가 혼자 안쪽 방으로 불려 들어가던 시기였다. 체육관에서 떡을 썰고, 연필을 나눠주고, 아이들의 합창 공연을 듣는 일까지는 문제없었다. 처음에 유이가 기억하는 진광회는 그랬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건물 안쪽에는 일반 신도들이 잘 들어가지 않는 공간이 있었다. 교주나 지도부가 머무는 방이었고, 어른들은 그것을 축복을 주는 공간이라고 불렀다. 유이는 그 방에 두세 번 정도 혼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교주는 유이에게 등을 돌리게 하거나 의자에 앉히거나 했다. 그리고 있어서는 안될 접촉이 있었다. 처음엔 손을 잡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정도였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 있었다. 몸을 만지거나, 가까이 붙거나, 벗기려 들기도 했다. 기도도 치료도 아닌 행동이었다. 싫었고, 무서웠고, 잘못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유이는 곧장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오늘 그 사람이 이상한 짓 했어.”
어머니는 잠깐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그런 분이 아니야. 네가 잘못 기억한 거야.”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 말을 하면 축복이 사라진다.”
시간이 지나자 유이는 입을 닫는 게 더 편해졌다. 아무도 정확히 묻지 않았다.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일을 당했는지. 유이는 자세히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어른들은 듣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 알고 혼자 넘기는 일이 늘어났다.
침대에 누웠지만 3시간 째 잠이 오지 않았다. 스마트폰 불빛이 벽지를 따라 번졌고, 에어컨 바람이 미세하게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스쳤다. 유이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지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방은 더 조용해졌고, 조용해질수록 생각은 또렷해졌다. TV 속 진광회 로고가 떠올랐다.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도. “그런 말을 하면 축복이 사라진다.” 유이는 코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축복이란 단어는 너무 과했고, 진광회는 너무 가벼웠다.
“축복 같은 게 어디 있어…” 유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공기 속으로 흩어졌고, 흩어진 감정도 다시 모양을 잃었다. 결국 남는 건 한 줄짜리 자조였다. 살았다는 사실, 벌었단 숫자, 지출할 금액, 갚을 빚, 그리고 내일의 시간표. 어느 순간 유이는 눈을 감았다. 잠든 건지 포기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방식이었다. 방 안에는 공조기 소음과 새벽 냄새 같은 공백만이 남아 있었다.
아침 공기는 밤보다 훨씬 가벼웠다. 잠을 잔 건지 그냥 누워 있었던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유이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세수를 하고 커피 대신 편의점 아이스티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출근이라는 단어가 어딘가 생경했지만, 이 일에도 출근 시간이 있었다. 가부키쵸 골목은 밤과 아침 사이의 표정이 달랐다. 네온은 꺼져 있고 간판만 남아 있었다. 술집 앞에는 청소하는 직원들이 담배꽁초와 병을 쓸어 담고 있었다.
사무실은 3층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지만 가볍지도 않았다. 현관문을 열면 향수 냄새와 제습기 냄새, 그리고 바탕에 깔린 피곤함 같은 공기가 섞여 있었다. 이미 도착한 여자 둘이 소파에 기대어 반쯤 누운 자세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아, 왔네.” 매니저가 서류함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인사라고 하기엔 짧았지만 서로에게 필요한 양만큼이었다.
유이는 소파 끝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 상단에는 사무실 단톡방 알림이 띄워져 있었다. 오늘 예약 상황표, 출근 명단, 지역별 대기 인원.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이었다.
데리헤루의 근무는 접객이 아니라 대기에서 시작되었다. 전화를 기다리는 시간, 주소가 떨어지는 시간, 콜이 취소되는 시간. 돈은 손님을 만나야 생기지만, 가장 긴 시간은 기다리는 데 쓰였다. 유이는 무릎 위에 휴대폰을 올려두고 화면을 켜둔 채 가만히 있었다. 화면은 잠금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신주쿠 쪽 조용하네.”
옆자리 여자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다른 여자가 이어받았다. “오늘 도청 행사 있대. 그럴 때는 좀 뜸한 것 같아.”
매니저가 명단을 확인하며 말했다. “일단 대기. 들어오면 순서대로 돌릴게.”
사무실 내부는 조용했지만 결코 편안하지는 않았다. 대기는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가진 시간이었다. 전화가 울리면 일이고, 울리지 않으면 비용이었다. 손님이 뜸하면, 그날은 손해였다. 유이는 화면을 똑바로 바라봤다. 손가락은 가만히 있었지만 내부는 끊임없이 세고 있었다. 오늘 남은 시간, 벌어야 할 금액, 그 금액 사이의 숫자들.
사무실 구석의 작은 TV에서는 낮 뉴스를 틀어놓은 채 음소거가 되어 있었다. 화면에는 도쿄도청 앞에서 촬영 중인 리포터가 잡혔다. 부제목에는 ‘청소년 문화예술 교류전—진광회 후원’이라는 글자가 조용히 지나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유이만이 시선을 잠깐 그쪽으로 빼앗겼을 뿐이었다.
유이는 TV를 보려던 게 아니었다. 그냥 소파에 앉아있었고, TV는 켜져 있었을 뿐이었다. 뉴스는 행사 장면을 내보내다가 화면을 전환했다. 스튜디오. 기자. 짧은 자막. 이름과 소속. 그리고 아주 짧은 얼굴.
— 오노데라 나오야 / 사회부 기자
출연 시간은 10초도 되지 않았다. 나오야는 단정하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에 흑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형은 균형 잡혀 있었고 턱선은 부드러웠다. 누가 봐도 잘생겼다고 단숨에 말할 만큼 화려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말끔하고 정돈된 느낌이었다. 마치 흰 셔츠의 주름까지 세탁소에서 관리된 것 같은 종류의 단정함. 유이는 그런 디테일을 곰곰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화면을 스쳐 지나가듯 바라볼 뿐이었다. 나오야가 말한 내용도 귀에 남지 않았다. 오직 성, 이름, 그리고 정장 차림의 실루엣만 남았다.
다음 순간 화면은 다시 행사장으로 돌아갔다. 박수 소리와 무대. 유이는 시선을 돌리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대기 전화는 여전히 울리지 않았다. TV 화면에서는 여전히 나오야가 없는 뉴스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 짧은 10초짜리 얼굴은 아무 사건도 없이 지나갔다.
유이는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켜놓았다. 대기방은 조용했고, 시간은 미세하게 늘어져 있었다. 밖에서는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는지 사람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편의점 앞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고등학생들, 회사원들 웃음소리, 택배기사가 오토바이 시동을 거는 소리. 모두가 움직이고 있었다.
TV는 계속 진광회 행사를 비추고 있었다. 아이들이 뛰고, 부모들이 사진을 찍고, 정치인들이 악수를 하며 웃었다. 사회자는 밝게 말했고, 화면 속 사람들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행사이기 때문에 나온 웃음인지, 진심에서 나온 웃음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화면 위에서는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유이는 잠깐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웃는지, 누구를 위해 웃는지 따지는 건 뉴스의 일이었다. 유이에게는 그저 다른 세상이었다. 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조용했고, 전화 호출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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