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6: 기록되지 않는 사건
조회 : 81 추천 : 0 글자수 : 5,262 자 2026-01-29
자정을 넘긴 시간대의 신주쿠는 밤과 아침이 겹치는 시간이었다. 네온은 절반쯤 꺼져 있었고, 술집 앞 간판은 청소 물로 씻겨 있었다. 유이는 편의점 봉투를 들고 역 방향으로 걸었다. 오늘은 별로 길지 않은 날이었다. 돈도 그만큼이었다. 귀가하는 사람들과 스카우트들이 섞여 느슨한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
골목을 돌아 역 입구 쪽으로 나오자, 검은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유이에게 다가왔다. 말투는 익숙했다. “괜찮은 조건 있어요. 잠깐만 얘기…”
유이는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했지만 남자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잠깐만, 10초만. 진짜 괜찮은...”
“됐어요.” 유이는 짧게 잘라 말했다. 예의도 없고 공격적이지도 않은, 그냥 피곤한 말투였다.
보통은 이쯤에서 끝났다. 그런데 남자가 웃으며 다시 붙었다. “아니 진짜 잠깐만, 얼굴 진짜 괜찮으니까...”
유이는 그때야 얇게 한숨을 내쉬었다. 밀치면 귀찮아지고, 말하면 길어지고, 무시하면 더 붙는다. 이 동네는 그런 식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만하시죠.”
뒤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공격적이진 않았지만, 불필요한 감정이 섞이지도 않은 말투였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뭐야, 아는 사람이야?”
“아니요.” 나오야는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니까 그만 두셔도 되겠죠.”
남자는 눈을 찡그렸다. “뭔데. 경찰이야?”
“그쪽이 경찰이어도 질문할 필요 없는 문제예요.” 나오야는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지도 않았고, 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문장은 정확했다. “지금 이 사람한테 접근한 건 스카우트 맞죠? 시간도 늦었고 기록 남기는 사람 있으면 귀찮아질 텐데요.”
남자는 욕을 삼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한 번 혀를 차고 뒤로 걸어갔다. 그게 끝이었다. 그 동네는 손익 계산 빠른 사람이 오래 살아남았다.
조용해지자 유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자에요?”
나오야는 잠깐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TV에서 잠깐 본 적 있어요.” 나오야는 웃지도 않았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대신 되물었다. “괜찮아요?”
유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흔한 일이에요.”
그 말을 하면서도 유이는 나오야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가로등 아래에서 그의 얼굴은 단정해 보였다. 말끔한 정장, 셔츠 깃, 두툼하지 않은 코트, 지쳐 보이는 눈 아래 잔 그림자. 신주쿠의 공기와는 잘 안 어울리는 종류였다.
유이는 갑자기 피곤이 밀려오듯 말을 덧붙였다. “도와준 건 고마워요. 근데 진짜 흔한 일이에요.”
나오야는 단정한 말투로 “흔하다는 게 좋아 보이진 않는데요.” 라고 말했다.
유이는 어깨를 아주 작게 으쓱했다. “여긴 원래 그래요.”
두 사람 사이에 바람이 스쳤다. 시끄러운 네온과 소음 속에서 잠깐 생긴 조용한 틈이었다. 유이는 봉투를 들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럼 이만.”
나오야는 굳이 잡지 않았다. “조심해요.”
유이는 반응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게 최선이었다. 과한 공감이나 관심은 오히려 불편했다. 남들은 유이를 몰랐고, 유이도 남들을 몰랐다. 거기서 끝이었다. 뒤돌아보지 않고 걸으며 유이는 희미하게 한 생각을 했다. 그 사람은 이상하게 깔끔했다. 이 동네 사람 같지 않게. 그 정도였다. 의미도 기억도 남지 않는 인상. 그걸로 충분했다.
나오야는 잠시 그 자리에 남아 유이가 걸어가는 방향을 바라봤다. 추적도 관심도 아닌, 단순한 확인이었다. 안전한 거리까지 갔다고 판단하자 코트를 여미고 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자라는 직업 탓인지 몸이 먼저 움직였고, 그 뒤에 생각이 따라왔다. 방금 전 일은 인터뷰도 아니고 사건도 아니었지만, 머릿속 어딘가에 조용히 저장되는 종류의 장면이었다.
이 동네에서는 저게 흔한 일인가.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오야는 곧 생각을 접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다. 내일은 교육 개편안 자료를 정리해야 했고, 진광회 관련 속보도 체크해야 했다. 별일 아닌 하루의 끝이었다.
집에 들어오자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가 금방 사라졌다. 불을 켜지 않아도 집 안 구조는 손에 잡힐 만큼 익숙했다. 유이는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 스마트폰 화면이 손끝에서 켜졌다. 사무실 단톡, 지출 내역, 전기요금 고지서, 빚 상환 앱, 알림창 몇 개가 겹쳤다.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숫자들이 셈해지고, 다시 셈해졌다.
조용한 방에서 화면 밝기만 유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어제 번 금액, 오늘 번 금액, 앞으로 있어야 하는 비용, 다음 달까지 버티는 방법. 아무리 돌려봐도 계산은 비슷한 결론으로 흘렀다.
내일이면 또 다시 스스로를 팔아야 한다. 수치심 따위는 버린 지 오래였다. 이 업계에서 그런 감정 같은 건 아무도 취급해주지 않았다. 화류계에 입문한 이후부터는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된다면 도망치듯 손절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걸까.
문득 그 생각이 들었지만 유이는 크게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그냥 잠깐 스쳤다가 사라지는 정도로 놔뒀다. 대답이 없는 질문은 오래 붙잡을수록 피곤해졌고, 피곤한 질문은 대개 며칠 뒤 다시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선택이나 자유 같은 단어는 여기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버는 방법과 그 다음에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지만 남았다.
스마트폰 화면은 자동으로 어두워졌다가 다시 켜졌다. 유이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자는 시점은 늦어지고 있었다. 내일도 같을 것이고, 모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딱히 비극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었다. 그냥 이어지는 날들이었다.
다음 날 정오 무렵, 대기실 소파에 앉아 차갑게 식은 커피를 마시며 스마트폰을 스크롤하다가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 진광회 행사 논란... 사회부 오노데라 기자 후속 취재 예정
이름을 알아보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화면을 오래 보지도 않았다. 단지 특별하다고 할 만한 건, 유이가 그토록 증오하는 인물인 히로유키와 성씨가 같다는 점이었다. 유이는 스크롤을 멈춘 채 기사를 잠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노데라라는 이름은 최근 들어 진광회 관련 기사에서 자주 보이는 이름이었고, 후속 취재를 맡는 기자라는 설명도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이 어떤 관계인지, 어떤 맥락인지 같은 건 유이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유이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 히로유키라는 이름이었다.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여러 파국과 연결된 인물. 그런 사람과 성씨가 같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잠깐 막히는 기분이었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데 한 묶음처럼 보이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친척이라도 되는 걸까.
그 물음에는 궁금함도 없었다. 굳이 알고 싶은 정보가 아니었고 알아서 좋은 정보도 아니었다. 유이는 엄지를 움직여 화면을 위로 밀어버렸다. 기사는 뒤로 사라졌고, 대신 쇼핑몰 광고가 화면을 채웠다. 숨도 그제야 풀렸다. 대기실은 여전히 조용했다. 형광등의 낮은 진동음과, 옆자리 여자가 화면을 넘기는 소리 정도만 들렸다. 풍경 속에서 유이는 문득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자각했다. 세상은 더 이상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정보가 흘러가는 화면이라는 사실을.
유이에게 남아 있는 것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이름, 기사, 요금 납부일, 호출 여부, 예약 현황 같은 것들이었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몇 년 사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스마트폰 화면이 자동으로 꺼지자, 유이는 기기를 무심하게 가방에 밀어 넣었다. 생각은 붙잡을수록 피곤해졌고, 이런 종류의 생각은 며칠 뒤면 다시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그때 사무실 전화가 짧게 울렸다.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매니저가 수화기를 들고 주소를 확인했다. “신주쿠 1배차.”
이어서 한 명의 이름이 불렸다. 그 이름은 유이가 아니었다. 대기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유이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기사 속 이름이 아무리 지독해도, 유이에게 중요한 건 결국 단 하나뿐이었다. 오늘 콜이 잡히느냐, 아니냐. 그게 유이의 세계였고, 감당할 수 있는 전부였다.
대기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에어컨 바람만 천천히 벽을 타고 흘렀다. 유이는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가 바로 내려놓았다. 이미 식어 있었고, 이 방의 공기랑 잘 어울렸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맛이 아니라 시간을 버티는 방법이었다.
옆자리 여자는 휴대폰 화면으로 네일 사진들을 넘기고 있었다. 그 옆의 여자는 주식 어플을 켜 놓고 가격 그래프를 보고 있었다. 각자 다른 세계에 있었지만, 목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늘 얼마 벌 수 있을까. 내일은 어떻게 될까. 서로 묻지 않았고 서로 알려주지 않았다. 여기서는 신상보다 스케줄이 우선이었다.
유이는 다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기사 화면은 이미 닫혀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남아 있었다. 진광회, 오노데라, 사회부, 후속 취재. 세 단어만으로도 충분했다. 유이는 그 단어들이 자기 인생과 다시 이어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이비는 과거였고, 빚은 현재였다. 정치인과 기자는 그 둘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연결되지 않을 영역. 그래야 편했다.
“신주쿠 쪽 아직 조용하네.” 매니저가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유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이 조용하든 바쁘든, 계산 방식은 비슷했다. 돈이 들어오면 생존이고, 안 들어오면 손해였다. 뉴스나 이름 같은 건 그 틈을 파고들 여유가 없었다.
그때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매니저가 재빠르게 받았다. “네, 가능합니다. 40분 안에 이동돼요.” 잠깐 침묵, 그리고 서류에 무언가를 적었다. “신주쿠 가부키쵸 2가, 호텔 ○○. 유이.”
유이는 조용히 가방을 들었다.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고, 특별히 감정이 들어갈 자리도 없었다. 그냥 다음 장소가 정해졌다는 사실만 있었다. 다른 여자 둘은 화면에서 고개도 들지 않았다. 누구 순서인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유이는 스마트폰 화면을 다시 켰다. 기사 내용은 이미 사라졌고, 대신 지도 앱과 시간 계산이 뜨는 화면이 있었다. 진광회나 오노데라 같은 단어는 그렇게 다시 뒤로 밀렸다. 유이에게 남은 건 주소, 거리, 소요 시간, 그리고 그 사이에 벌 수 있는 금액이었다.
바깥 공기는 아직 낮과 밤 사이였다. 택배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학생들이 편의점 앞을 떠들며 걸어갔다. 누구는 쉬는 시간이고, 누구는 집에 가는 시간이고, 누구는 일을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유이는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했다. 이 세계는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과 스카우트를 하는 사람들, 웃으면서 행사를 여는 사람들, 그리고 호출을 기다리는 사람들. 서로 닿지 않는 선들이었다. 그 선을 넘을 일은 없다고 유이는 믿었다.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자, 유이는 건너기 시작했다. 그게 하루의 계속이었다. 비극도 희망도 아니었고, 선택도 아니었다. 그냥 이어지는 일이었다.
골목을 돌아 역 입구 쪽으로 나오자, 검은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유이에게 다가왔다. 말투는 익숙했다. “괜찮은 조건 있어요. 잠깐만 얘기…”
유이는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했지만 남자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잠깐만, 10초만. 진짜 괜찮은...”
“됐어요.” 유이는 짧게 잘라 말했다. 예의도 없고 공격적이지도 않은, 그냥 피곤한 말투였다.
보통은 이쯤에서 끝났다. 그런데 남자가 웃으며 다시 붙었다. “아니 진짜 잠깐만, 얼굴 진짜 괜찮으니까...”
유이는 그때야 얇게 한숨을 내쉬었다. 밀치면 귀찮아지고, 말하면 길어지고, 무시하면 더 붙는다. 이 동네는 그런 식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만하시죠.”
뒤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공격적이진 않았지만, 불필요한 감정이 섞이지도 않은 말투였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뭐야, 아는 사람이야?”
“아니요.” 나오야는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니까 그만 두셔도 되겠죠.”
남자는 눈을 찡그렸다. “뭔데. 경찰이야?”
“그쪽이 경찰이어도 질문할 필요 없는 문제예요.” 나오야는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지도 않았고, 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문장은 정확했다. “지금 이 사람한테 접근한 건 스카우트 맞죠? 시간도 늦었고 기록 남기는 사람 있으면 귀찮아질 텐데요.”
남자는 욕을 삼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한 번 혀를 차고 뒤로 걸어갔다. 그게 끝이었다. 그 동네는 손익 계산 빠른 사람이 오래 살아남았다.
조용해지자 유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자에요?”
나오야는 잠깐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TV에서 잠깐 본 적 있어요.” 나오야는 웃지도 않았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대신 되물었다. “괜찮아요?”
유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흔한 일이에요.”
그 말을 하면서도 유이는 나오야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가로등 아래에서 그의 얼굴은 단정해 보였다. 말끔한 정장, 셔츠 깃, 두툼하지 않은 코트, 지쳐 보이는 눈 아래 잔 그림자. 신주쿠의 공기와는 잘 안 어울리는 종류였다.
유이는 갑자기 피곤이 밀려오듯 말을 덧붙였다. “도와준 건 고마워요. 근데 진짜 흔한 일이에요.”
나오야는 단정한 말투로 “흔하다는 게 좋아 보이진 않는데요.” 라고 말했다.
유이는 어깨를 아주 작게 으쓱했다. “여긴 원래 그래요.”
두 사람 사이에 바람이 스쳤다. 시끄러운 네온과 소음 속에서 잠깐 생긴 조용한 틈이었다. 유이는 봉투를 들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럼 이만.”
나오야는 굳이 잡지 않았다. “조심해요.”
유이는 반응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게 최선이었다. 과한 공감이나 관심은 오히려 불편했다. 남들은 유이를 몰랐고, 유이도 남들을 몰랐다. 거기서 끝이었다. 뒤돌아보지 않고 걸으며 유이는 희미하게 한 생각을 했다. 그 사람은 이상하게 깔끔했다. 이 동네 사람 같지 않게. 그 정도였다. 의미도 기억도 남지 않는 인상. 그걸로 충분했다.
나오야는 잠시 그 자리에 남아 유이가 걸어가는 방향을 바라봤다. 추적도 관심도 아닌, 단순한 확인이었다. 안전한 거리까지 갔다고 판단하자 코트를 여미고 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자라는 직업 탓인지 몸이 먼저 움직였고, 그 뒤에 생각이 따라왔다. 방금 전 일은 인터뷰도 아니고 사건도 아니었지만, 머릿속 어딘가에 조용히 저장되는 종류의 장면이었다.
이 동네에서는 저게 흔한 일인가.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오야는 곧 생각을 접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다. 내일은 교육 개편안 자료를 정리해야 했고, 진광회 관련 속보도 체크해야 했다. 별일 아닌 하루의 끝이었다.
집에 들어오자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가 금방 사라졌다. 불을 켜지 않아도 집 안 구조는 손에 잡힐 만큼 익숙했다. 유이는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 스마트폰 화면이 손끝에서 켜졌다. 사무실 단톡, 지출 내역, 전기요금 고지서, 빚 상환 앱, 알림창 몇 개가 겹쳤다.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숫자들이 셈해지고, 다시 셈해졌다.
조용한 방에서 화면 밝기만 유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어제 번 금액, 오늘 번 금액, 앞으로 있어야 하는 비용, 다음 달까지 버티는 방법. 아무리 돌려봐도 계산은 비슷한 결론으로 흘렀다.
내일이면 또 다시 스스로를 팔아야 한다. 수치심 따위는 버린 지 오래였다. 이 업계에서 그런 감정 같은 건 아무도 취급해주지 않았다. 화류계에 입문한 이후부터는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된다면 도망치듯 손절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걸까.
문득 그 생각이 들었지만 유이는 크게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그냥 잠깐 스쳤다가 사라지는 정도로 놔뒀다. 대답이 없는 질문은 오래 붙잡을수록 피곤해졌고, 피곤한 질문은 대개 며칠 뒤 다시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선택이나 자유 같은 단어는 여기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버는 방법과 그 다음에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지만 남았다.
스마트폰 화면은 자동으로 어두워졌다가 다시 켜졌다. 유이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자는 시점은 늦어지고 있었다. 내일도 같을 것이고, 모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딱히 비극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었다. 그냥 이어지는 날들이었다.
다음 날 정오 무렵, 대기실 소파에 앉아 차갑게 식은 커피를 마시며 스마트폰을 스크롤하다가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 진광회 행사 논란... 사회부 오노데라 기자 후속 취재 예정
이름을 알아보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화면을 오래 보지도 않았다. 단지 특별하다고 할 만한 건, 유이가 그토록 증오하는 인물인 히로유키와 성씨가 같다는 점이었다. 유이는 스크롤을 멈춘 채 기사를 잠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노데라라는 이름은 최근 들어 진광회 관련 기사에서 자주 보이는 이름이었고, 후속 취재를 맡는 기자라는 설명도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이 어떤 관계인지, 어떤 맥락인지 같은 건 유이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유이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 히로유키라는 이름이었다.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여러 파국과 연결된 인물. 그런 사람과 성씨가 같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잠깐 막히는 기분이었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데 한 묶음처럼 보이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친척이라도 되는 걸까.
그 물음에는 궁금함도 없었다. 굳이 알고 싶은 정보가 아니었고 알아서 좋은 정보도 아니었다. 유이는 엄지를 움직여 화면을 위로 밀어버렸다. 기사는 뒤로 사라졌고, 대신 쇼핑몰 광고가 화면을 채웠다. 숨도 그제야 풀렸다. 대기실은 여전히 조용했다. 형광등의 낮은 진동음과, 옆자리 여자가 화면을 넘기는 소리 정도만 들렸다. 풍경 속에서 유이는 문득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자각했다. 세상은 더 이상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정보가 흘러가는 화면이라는 사실을.
유이에게 남아 있는 것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이름, 기사, 요금 납부일, 호출 여부, 예약 현황 같은 것들이었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몇 년 사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스마트폰 화면이 자동으로 꺼지자, 유이는 기기를 무심하게 가방에 밀어 넣었다. 생각은 붙잡을수록 피곤해졌고, 이런 종류의 생각은 며칠 뒤면 다시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그때 사무실 전화가 짧게 울렸다.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매니저가 수화기를 들고 주소를 확인했다. “신주쿠 1배차.”
이어서 한 명의 이름이 불렸다. 그 이름은 유이가 아니었다. 대기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유이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기사 속 이름이 아무리 지독해도, 유이에게 중요한 건 결국 단 하나뿐이었다. 오늘 콜이 잡히느냐, 아니냐. 그게 유이의 세계였고, 감당할 수 있는 전부였다.
대기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에어컨 바람만 천천히 벽을 타고 흘렀다. 유이는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가 바로 내려놓았다. 이미 식어 있었고, 이 방의 공기랑 잘 어울렸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맛이 아니라 시간을 버티는 방법이었다.
옆자리 여자는 휴대폰 화면으로 네일 사진들을 넘기고 있었다. 그 옆의 여자는 주식 어플을 켜 놓고 가격 그래프를 보고 있었다. 각자 다른 세계에 있었지만, 목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늘 얼마 벌 수 있을까. 내일은 어떻게 될까. 서로 묻지 않았고 서로 알려주지 않았다. 여기서는 신상보다 스케줄이 우선이었다.
유이는 다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기사 화면은 이미 닫혀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남아 있었다. 진광회, 오노데라, 사회부, 후속 취재. 세 단어만으로도 충분했다. 유이는 그 단어들이 자기 인생과 다시 이어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이비는 과거였고, 빚은 현재였다. 정치인과 기자는 그 둘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연결되지 않을 영역. 그래야 편했다.
“신주쿠 쪽 아직 조용하네.” 매니저가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유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이 조용하든 바쁘든, 계산 방식은 비슷했다. 돈이 들어오면 생존이고, 안 들어오면 손해였다. 뉴스나 이름 같은 건 그 틈을 파고들 여유가 없었다.
그때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매니저가 재빠르게 받았다. “네, 가능합니다. 40분 안에 이동돼요.” 잠깐 침묵, 그리고 서류에 무언가를 적었다. “신주쿠 가부키쵸 2가, 호텔 ○○. 유이.”
유이는 조용히 가방을 들었다.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고, 특별히 감정이 들어갈 자리도 없었다. 그냥 다음 장소가 정해졌다는 사실만 있었다. 다른 여자 둘은 화면에서 고개도 들지 않았다. 누구 순서인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유이는 스마트폰 화면을 다시 켰다. 기사 내용은 이미 사라졌고, 대신 지도 앱과 시간 계산이 뜨는 화면이 있었다. 진광회나 오노데라 같은 단어는 그렇게 다시 뒤로 밀렸다. 유이에게 남은 건 주소, 거리, 소요 시간, 그리고 그 사이에 벌 수 있는 금액이었다.
바깥 공기는 아직 낮과 밤 사이였다. 택배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학생들이 편의점 앞을 떠들며 걸어갔다. 누구는 쉬는 시간이고, 누구는 집에 가는 시간이고, 누구는 일을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유이는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했다. 이 세계는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과 스카우트를 하는 사람들, 웃으면서 행사를 여는 사람들, 그리고 호출을 기다리는 사람들. 서로 닿지 않는 선들이었다. 그 선을 넘을 일은 없다고 유이는 믿었다.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자, 유이는 건너기 시작했다. 그게 하루의 계속이었다. 비극도 희망도 아니었고, 선택도 아니었다. 그냥 이어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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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키쵸걸과 1억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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