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3: 오프 더 레코드
조회 : 135 추천 : 0 글자수 : 5,440 자 2026-01-26
아침 8시 반, JR 요츠야역은 출근길 사람들로 이미 포화 상태였다. 나오야는 에어팟도 끼지 않은 채 게이트를 통과했다. 전철 안에서는 종이 신문을 펼친 사람보다 스마트폰으로 뉴스 헤드라인을 스크롤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그 중 몇 개 제목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편집부에서 쓴 기사였다. 별 감흥은 없었다.
전철이 이치가야를 지나고 이덴바시에서 속도를 줄일 때쯤, 나오야는 창밖으로 흐린 하늘을 한 번 확인했다. 비가 올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흐리기만 할 수도 있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10시 회의 전에 자료를 정리해두는 일이었다. 신문사 건물 로비에는 커피 냄새와 복사기 열기가 항상 같이 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느리게 올라갔고, 나오야는 문이 열리자마자 모니터 불빛이 새어나오는 편집국으로 발을 들였다. 그렇게 또 하루가 시작됐다.
편집국은 아침인데도 벌써 피곤했다. 누군가는 전날 밤 늦게 들어온 공문을 인쇄하느라 프린터 옆에 서 있었고, 누군가는 모니터 두 개를 나란히 켜놓은 채 기사 초안을 고치고 있었다. 데스크 코너 쪽에서는 전화벨이 10초에 한 번씩 울렸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표정은 전혀 공손하지 않은 기자들이 하나같이 수화기를 어깨에 끼운 채 속기하듯 메모를 적었다. 취재원에게 공손한 건 예의라기보다는 생존 방식에 가까웠다.
기자들 사이의 대화는 짧고 건조했다. 여러 질문들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창가 쪽 자리에는 전날 새벽까지 교정 본 기자가 엎드려 자고 있었고, 묘하게 다들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나오야는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나오야의 자리에는 전날 오후 회의에서 나눠준 취재 아이템 목록과, 커피 얼룩이 묻은 자료철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컴퓨터를 켜는 동안, 옆자리 선배가 종이컵을 들고 와서 말했다.
“어제 그 건 아직도 결말 안 났대. 오노데라 의원 건도 계속 타래 나올 거 같고.”
그 말에 나오야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아무런 감정도 티내지 않았고, 티낼 이유도 없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스쳐 지나갔던 헤드라인 몇 개가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자신의 아버지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게 이 업계의 아이러니였다. 회사 사람들은 나오야의 성과만 보고, 출처만 물었을 뿐 집안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10시 정각이 조금 지나자, 데스크 쪽에서 “회의 들어갑니다”라는 짧은 말이 들렸다. 기자들이 종이컵과 노트북, 볼펜을 들고 천천히 모였다. 회의실 문은 닫히지 않았다. 누가 보기에도 그건 회의라기보다 브리핑에 가까웠다. 팀장은 이미 자료를 펼쳐놓은 상태였고, 커피는 반 이상 식어 있었다.
“일단 오늘자 기준으로 들어온 건.” 팀장은 손에 들고 있던 프린트를 탁탁 정리하며 이어 말했다. “진광회 후원 관련 정황, 그리고 오노데라 도의원 쪽 반론. 둘 다 아직은 확정 못 박을 건 없어. 시민단체에서 제보 들어온 건 추석 전에 처리하고, 방송국은 우리 쪽 보고 기다리는 상황.”
한 기자가 손을 들지도 않고 말했다. “검증은요? 자금 흐름 쪽?”
“거기 확인 중인데 금융 쪽 자료가 좀 애매해. 진광회는 종교법인이고, 오노데라는 도의원이지 국회의원이 아니니까 덮어놓고 확정으로 쓰면 우리만 피곤해진다. 일단은 지역문화 후원 라벨 붙여놓고 지켜보자.”
사람들이 끄덕이거나 메모했다. 나오야도 메모는 했지만 거기에 아무 주석도 달지 않았다. 팀장은 페이지를 넘기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진광회 쪽에서 다음 주 문화행사 홍보하려고 기자 접촉 들어올 거야. 누가 갈지는 아직. 근데 이 건으로 오노데라 라인 접근하기는 힘들 거고, 대신 시민단체나 교육계 라인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쪽 의견 따오면 균형은 맞춰질 거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가 컵 뚜껑을 살짝 눌러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팀장은 마지막 프린트를 들어 올리며 결론처럼 말했다.
“정리하면, 아직은 팩트 아니다. 의혹 단계고, 우리가 앞장서서 단정 지을 필요 없고, 괜히 오버하면 반격만 당한다. 나중에 묶여서 나올 수도 있으니까 일단 축적.”
회의에서 자주 듣는 문장이었다. 단정하지 말 것, 관계 엮지 말 것, 감정 나누지 말 것. 신문사에서 제일 많이 쓰는 단어는 밝혀졌다거나 드러났다가 아니라, '아직'이었다.
사람들이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팀장이 그제야 나오야를 향해 슬쩍 말했다. “너는 이 건 관심 없어?”
어느 순간부터 편집부에서는 오노데라 히로유키가 나오야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알지만 말하지 않는 정보”가 되어 있었다. 회사 내부에서는 그런 정보를 다룰 줄 아는 게 성숙한 태도라고 여겨졌다.
나오야는 팀장을 잠깐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지금은 다른 건 맡아서요.”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가족이라고 해서 피해야 할 의무도, 덤벼야 할 의무도 없는 거니까.” 그 말은 맞는 말이었지만, 별로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다.
회의가 끝난 뒤, 사람들은 자리로 돌아가면서 각자의 화면에 속도를 붙였다. 기사 초안, 보도자료, 사진 요청, 통신사 속보 정리. 편집국은 다시 소음과 커피 냄새로 채워졌다. 나오야는 노트북을 열었지만 히로유키와 진광회의 키워드가 적힌 종이를 굳이 뒤집어두었다. 괜히 화면에 띄워놓으면 모니터 반사로 자기 얼굴에 뜰 것만 같았다.
사실 피한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기자는 취재원과 싸우는 직업이지 가족과 싸우는 직업은 아니니까. 업계에서는 그걸 충돌 회피라고 불렀다. 그건 비겁함이 아니라, 때로는 곧잘 합리성이었다.
옆자리 선배가 잠깐 몸을 돌렸다. “너라면 더 잘 알겠지만… 오노데라 라인 건드리면 골치 아파. 종교 쪽까지 붙어 있으면 더 그래. 아무도 이득 못 봐.”
나오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배가 잘못 말한 것도 아니었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아는 방식대로 조언했다. 그 안에는 애정도 없고 냉정도 없었다. 그냥 경험이었다. 나오야는 모니터 창을 전환해 자신이 맡은 다른 취재 파일을 열었다. 공교육 개편안 관련 회의록과 인터뷰 스케줄이었다. 이해하기 쉽고, 충돌이 적고, 누가 손가락질하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기사였다. 그게 편했다.
팀장이 지나가던 길에 한 마디 더 던졌다. “그 건은 누가 맡아도 꽤 오래 걸릴 거야. 증거도 애매하고, 당사자들은 확신에 차 있고, 주변에서는 소문만 돌아다니고.”
나오야는 고개를 들었다. “언젠가는 정리되겠죠.”
팀장은 그 말에 웃지도 않고 말했다. “언젠가는. 근데 언젠가는 보통 타이밍이 최악일 때 오지.”
그 말을 남기고 팀장은 다른 쪽 데스크로 향했다. 나오야는 한동안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린 채 멈춰 있었다. 아버지 이름이 적힌 기사들을 쓰는 건 누가 봐도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흥미롭다고 해서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힐끗 열린 자료 폴더 한쪽에는 ‘오노데라 히로유키 — 진광회’라는 파일명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오야는 그것을 닫지도 열지도 않았다. 그냥 그대로 두었다. 그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회피였다.
퇴근 시간은 늘 애매했다. 특별히 늦게까지 일한 것도 아닌데, 집에 들어가면 이미 저녁 식사가 끝난 뒤였다. 나오야는 오모테산도 근처에 있는 히로유키의 집 현관 비밀번호를 눌러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건 집이라는 느낌보다는 정돈된 사무실 같은 냄새였다. 식탁 위에는 반쯤 비워진 접시들과 고급스러운 냅킨, 접시 가장자리에 남은 소스가 있었다. 테이블 끝에는 와인병이 서 있었다.
거실 쪽에서는 낮은 볼륨으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여전히 자막을 타고 지나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히로유키는 소파에 기대어 핸드폰으로 뭔가를 읽고 있었고, 어머니는 맞은편에 앉아 티잔을 들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그게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왔니.” 어머니가 먼저 말할 뿐, 히로유키는 고개만 살짝 들었다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다였다.
벽면에는 해외에서 받은 표창장이나 기부 감사패 같은 것들이 액자에 담겨 있었다. 유리 진열장에는 문화재 후원회나 청년 정책 관련 행사에서 받은 트로피가 정리되어 있었다. 여느 정치인 집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다만 유이의 집에는 없던 성취와 안정 같은 단어들이 이 공간에는 자연스럽게 붙어 있었다.
“저녁 먹고 갈래?”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아뇨, 회사에서 먹었어요.”
어머니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히로유키는 뉴스 소리를 조금 더 높였다. 기자가 화면에서 진광회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히로유키는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반응도, 변명도, 해명도 없었다. 그런 건 이미 식상하다는 듯이.
나오야는 조용히 소파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어머니가 건넨 물 잔은 차갑고 투명했다. TV 화면 속 기자가 말하는 ‘오노데라 의원 측은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방 안에 울렸다. 히로유키는 아무 말 없이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나오야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서는 뉴스가 아니라 소음이었고, 아버지의 이름은 이슈가 아니라 일상이었다. 그런 종류의 일상이었다.
식탁 정리가 끝나갈 즈음, 여동생 나오미가 곧장 방에서 나왔다. 외출복이 아닌 홈웨어였고,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나오야를 보더니 고개만 까딱했다.
“오빠 왔네.”
히로유키는 신문을 접으며 말했다. “요즘 회사 괜찮나?”
그 말투는 관심이라기보다 형식적인 체크에 가깝았다. “네. 바쁘죠. 항상.”
나오미가 그 말을 듣자마자 티비 화면을 가리켰다. “이거, 또 나오던데? 진광회 뭐시기.” 말투는 가벼웠지만 내용만큼은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히로유키는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고 물만 마셨다. “언론은 원래 물어뜯을 소재를 찾는 법이야.”
나오미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래도 아빠 덕분에 청소년, 청년 정책은 잘 돌아간다더라. 친구들도 좋게 말하던데?”
그 말에 어머니가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 아버지 덕분에 지역 행사도 잘 되고... 괜히 오해받는 거지.”
순간 방 안의 온도는 묘하게 따뜻해졌다. 하지만 나오야에게는 그 온기가 낯설었다.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조용히 말했다. “오해든 아니든, 기사 나오는 건 사실이니까.”
짧은 말이었지만 공기가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나오미는 표정을 바꾸며 휴대폰 화면으로 눈을 돌렸고, 어머니는 티잔을 내려놓았다. 히로유키는 잠깐 나오야를 보았다. 그 시선은 언짢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저 알고 있다는 종류의 시선이었다.
“기자라면 기사를 쓰면 되고, 정치는 정치가 할 일 하면 된다. 서로 영역이 다른 거지.”
그 말은 논쟁을 끝내는 방식이었다. 아니, 애초에 논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끝나 있었다.
나오미가 무겁지 않게 분위기를 바꿨다. “근데 오빠, 이번엔 교육 쪽 하는 거지? 아빠랑 같은 분야는 아니라서 다행이네.”
어째서 다행인지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대화는 그렇게 끝났고, 사람들은 각자 조용한 공간으로 흩어졌다. 나오야는 방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이 집에서 가장 많이 하는 대화는 설명이 아니라 정리라는 걸. 그리고 가장 많이 빠져 있는 건 감정이라는 걸.
전철이 이치가야를 지나고 이덴바시에서 속도를 줄일 때쯤, 나오야는 창밖으로 흐린 하늘을 한 번 확인했다. 비가 올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흐리기만 할 수도 있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10시 회의 전에 자료를 정리해두는 일이었다. 신문사 건물 로비에는 커피 냄새와 복사기 열기가 항상 같이 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느리게 올라갔고, 나오야는 문이 열리자마자 모니터 불빛이 새어나오는 편집국으로 발을 들였다. 그렇게 또 하루가 시작됐다.
편집국은 아침인데도 벌써 피곤했다. 누군가는 전날 밤 늦게 들어온 공문을 인쇄하느라 프린터 옆에 서 있었고, 누군가는 모니터 두 개를 나란히 켜놓은 채 기사 초안을 고치고 있었다. 데스크 코너 쪽에서는 전화벨이 10초에 한 번씩 울렸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표정은 전혀 공손하지 않은 기자들이 하나같이 수화기를 어깨에 끼운 채 속기하듯 메모를 적었다. 취재원에게 공손한 건 예의라기보다는 생존 방식에 가까웠다.
기자들 사이의 대화는 짧고 건조했다. 여러 질문들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창가 쪽 자리에는 전날 새벽까지 교정 본 기자가 엎드려 자고 있었고, 묘하게 다들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나오야는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나오야의 자리에는 전날 오후 회의에서 나눠준 취재 아이템 목록과, 커피 얼룩이 묻은 자료철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컴퓨터를 켜는 동안, 옆자리 선배가 종이컵을 들고 와서 말했다.
“어제 그 건 아직도 결말 안 났대. 오노데라 의원 건도 계속 타래 나올 거 같고.”
그 말에 나오야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아무런 감정도 티내지 않았고, 티낼 이유도 없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스쳐 지나갔던 헤드라인 몇 개가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자신의 아버지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게 이 업계의 아이러니였다. 회사 사람들은 나오야의 성과만 보고, 출처만 물었을 뿐 집안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10시 정각이 조금 지나자, 데스크 쪽에서 “회의 들어갑니다”라는 짧은 말이 들렸다. 기자들이 종이컵과 노트북, 볼펜을 들고 천천히 모였다. 회의실 문은 닫히지 않았다. 누가 보기에도 그건 회의라기보다 브리핑에 가까웠다. 팀장은 이미 자료를 펼쳐놓은 상태였고, 커피는 반 이상 식어 있었다.
“일단 오늘자 기준으로 들어온 건.” 팀장은 손에 들고 있던 프린트를 탁탁 정리하며 이어 말했다. “진광회 후원 관련 정황, 그리고 오노데라 도의원 쪽 반론. 둘 다 아직은 확정 못 박을 건 없어. 시민단체에서 제보 들어온 건 추석 전에 처리하고, 방송국은 우리 쪽 보고 기다리는 상황.”
한 기자가 손을 들지도 않고 말했다. “검증은요? 자금 흐름 쪽?”
“거기 확인 중인데 금융 쪽 자료가 좀 애매해. 진광회는 종교법인이고, 오노데라는 도의원이지 국회의원이 아니니까 덮어놓고 확정으로 쓰면 우리만 피곤해진다. 일단은 지역문화 후원 라벨 붙여놓고 지켜보자.”
사람들이 끄덕이거나 메모했다. 나오야도 메모는 했지만 거기에 아무 주석도 달지 않았다. 팀장은 페이지를 넘기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진광회 쪽에서 다음 주 문화행사 홍보하려고 기자 접촉 들어올 거야. 누가 갈지는 아직. 근데 이 건으로 오노데라 라인 접근하기는 힘들 거고, 대신 시민단체나 교육계 라인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쪽 의견 따오면 균형은 맞춰질 거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가 컵 뚜껑을 살짝 눌러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팀장은 마지막 프린트를 들어 올리며 결론처럼 말했다.
“정리하면, 아직은 팩트 아니다. 의혹 단계고, 우리가 앞장서서 단정 지을 필요 없고, 괜히 오버하면 반격만 당한다. 나중에 묶여서 나올 수도 있으니까 일단 축적.”
회의에서 자주 듣는 문장이었다. 단정하지 말 것, 관계 엮지 말 것, 감정 나누지 말 것. 신문사에서 제일 많이 쓰는 단어는 밝혀졌다거나 드러났다가 아니라, '아직'이었다.
사람들이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팀장이 그제야 나오야를 향해 슬쩍 말했다. “너는 이 건 관심 없어?”
어느 순간부터 편집부에서는 오노데라 히로유키가 나오야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알지만 말하지 않는 정보”가 되어 있었다. 회사 내부에서는 그런 정보를 다룰 줄 아는 게 성숙한 태도라고 여겨졌다.
나오야는 팀장을 잠깐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지금은 다른 건 맡아서요.”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가족이라고 해서 피해야 할 의무도, 덤벼야 할 의무도 없는 거니까.” 그 말은 맞는 말이었지만, 별로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다.
회의가 끝난 뒤, 사람들은 자리로 돌아가면서 각자의 화면에 속도를 붙였다. 기사 초안, 보도자료, 사진 요청, 통신사 속보 정리. 편집국은 다시 소음과 커피 냄새로 채워졌다. 나오야는 노트북을 열었지만 히로유키와 진광회의 키워드가 적힌 종이를 굳이 뒤집어두었다. 괜히 화면에 띄워놓으면 모니터 반사로 자기 얼굴에 뜰 것만 같았다.
사실 피한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기자는 취재원과 싸우는 직업이지 가족과 싸우는 직업은 아니니까. 업계에서는 그걸 충돌 회피라고 불렀다. 그건 비겁함이 아니라, 때로는 곧잘 합리성이었다.
옆자리 선배가 잠깐 몸을 돌렸다. “너라면 더 잘 알겠지만… 오노데라 라인 건드리면 골치 아파. 종교 쪽까지 붙어 있으면 더 그래. 아무도 이득 못 봐.”
나오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배가 잘못 말한 것도 아니었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아는 방식대로 조언했다. 그 안에는 애정도 없고 냉정도 없었다. 그냥 경험이었다. 나오야는 모니터 창을 전환해 자신이 맡은 다른 취재 파일을 열었다. 공교육 개편안 관련 회의록과 인터뷰 스케줄이었다. 이해하기 쉽고, 충돌이 적고, 누가 손가락질하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기사였다. 그게 편했다.
팀장이 지나가던 길에 한 마디 더 던졌다. “그 건은 누가 맡아도 꽤 오래 걸릴 거야. 증거도 애매하고, 당사자들은 확신에 차 있고, 주변에서는 소문만 돌아다니고.”
나오야는 고개를 들었다. “언젠가는 정리되겠죠.”
팀장은 그 말에 웃지도 않고 말했다. “언젠가는. 근데 언젠가는 보통 타이밍이 최악일 때 오지.”
그 말을 남기고 팀장은 다른 쪽 데스크로 향했다. 나오야는 한동안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린 채 멈춰 있었다. 아버지 이름이 적힌 기사들을 쓰는 건 누가 봐도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흥미롭다고 해서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힐끗 열린 자료 폴더 한쪽에는 ‘오노데라 히로유키 — 진광회’라는 파일명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오야는 그것을 닫지도 열지도 않았다. 그냥 그대로 두었다. 그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회피였다.
퇴근 시간은 늘 애매했다. 특별히 늦게까지 일한 것도 아닌데, 집에 들어가면 이미 저녁 식사가 끝난 뒤였다. 나오야는 오모테산도 근처에 있는 히로유키의 집 현관 비밀번호를 눌러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건 집이라는 느낌보다는 정돈된 사무실 같은 냄새였다. 식탁 위에는 반쯤 비워진 접시들과 고급스러운 냅킨, 접시 가장자리에 남은 소스가 있었다. 테이블 끝에는 와인병이 서 있었다.
거실 쪽에서는 낮은 볼륨으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여전히 자막을 타고 지나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히로유키는 소파에 기대어 핸드폰으로 뭔가를 읽고 있었고, 어머니는 맞은편에 앉아 티잔을 들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그게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왔니.” 어머니가 먼저 말할 뿐, 히로유키는 고개만 살짝 들었다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다였다.
벽면에는 해외에서 받은 표창장이나 기부 감사패 같은 것들이 액자에 담겨 있었다. 유리 진열장에는 문화재 후원회나 청년 정책 관련 행사에서 받은 트로피가 정리되어 있었다. 여느 정치인 집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다만 유이의 집에는 없던 성취와 안정 같은 단어들이 이 공간에는 자연스럽게 붙어 있었다.
“저녁 먹고 갈래?”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아뇨, 회사에서 먹었어요.”
어머니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히로유키는 뉴스 소리를 조금 더 높였다. 기자가 화면에서 진광회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히로유키는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반응도, 변명도, 해명도 없었다. 그런 건 이미 식상하다는 듯이.
나오야는 조용히 소파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어머니가 건넨 물 잔은 차갑고 투명했다. TV 화면 속 기자가 말하는 ‘오노데라 의원 측은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방 안에 울렸다. 히로유키는 아무 말 없이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나오야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서는 뉴스가 아니라 소음이었고, 아버지의 이름은 이슈가 아니라 일상이었다. 그런 종류의 일상이었다.
식탁 정리가 끝나갈 즈음, 여동생 나오미가 곧장 방에서 나왔다. 외출복이 아닌 홈웨어였고,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나오야를 보더니 고개만 까딱했다.
“오빠 왔네.”
히로유키는 신문을 접으며 말했다. “요즘 회사 괜찮나?”
그 말투는 관심이라기보다 형식적인 체크에 가깝았다. “네. 바쁘죠. 항상.”
나오미가 그 말을 듣자마자 티비 화면을 가리켰다. “이거, 또 나오던데? 진광회 뭐시기.” 말투는 가벼웠지만 내용만큼은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히로유키는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고 물만 마셨다. “언론은 원래 물어뜯을 소재를 찾는 법이야.”
나오미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래도 아빠 덕분에 청소년, 청년 정책은 잘 돌아간다더라. 친구들도 좋게 말하던데?”
그 말에 어머니가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 아버지 덕분에 지역 행사도 잘 되고... 괜히 오해받는 거지.”
순간 방 안의 온도는 묘하게 따뜻해졌다. 하지만 나오야에게는 그 온기가 낯설었다.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조용히 말했다. “오해든 아니든, 기사 나오는 건 사실이니까.”
짧은 말이었지만 공기가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나오미는 표정을 바꾸며 휴대폰 화면으로 눈을 돌렸고, 어머니는 티잔을 내려놓았다. 히로유키는 잠깐 나오야를 보았다. 그 시선은 언짢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저 알고 있다는 종류의 시선이었다.
“기자라면 기사를 쓰면 되고, 정치는 정치가 할 일 하면 된다. 서로 영역이 다른 거지.”
그 말은 논쟁을 끝내는 방식이었다. 아니, 애초에 논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끝나 있었다.
나오미가 무겁지 않게 분위기를 바꿨다. “근데 오빠, 이번엔 교육 쪽 하는 거지? 아빠랑 같은 분야는 아니라서 다행이네.”
어째서 다행인지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대화는 그렇게 끝났고, 사람들은 각자 조용한 공간으로 흩어졌다. 나오야는 방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이 집에서 가장 많이 하는 대화는 설명이 아니라 정리라는 걸. 그리고 가장 많이 빠져 있는 건 감정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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