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났니? 어서 준비해, 곧 선생님 뵈러 갈 시간이야.”
“할머니, 오늘이… 며칠이에요?”
“9월 1일이잖니.”
“8월 32일이 아니라요…?”
“장난 받아 줄 시간 없단다. 얼른 준비해. 오늘 할 게 많아. 진료 받고 나선 장도 봐야하고... 어제 미리 봐뒀어야 했는데...”
단호한 목소리. 그 말투가 나를 더 혼란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함께 있었는데. 눈앞의 이질적인 현실이 나를 억지로 쥐어짜는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준비를 마치고, 할머니와 함께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2021년 9월 1일.
“세림씨, 오늘도 시간 딱 맞춰 오셨네요. 매번 느끼지만 약속 시간을 잘 지키시는 것 같아요.”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아...할머니 덕분이죠, 뭐...”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불편함을 숨겼다.
“잠은 잘 잤나요?”
“오늘은... 잘 잤어요. 잠들기 전까진 좀 힘들었지만.”
“다행이네요. 좋은 꿈이라도 꿨나 봐요?”
“꿈이었나... 아닌 것 같은데.”
내 말에 의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끔 좋은 꿈은, 현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될 때가 있죠.”
현실이길 바라는 사람에게, 그건 지나치게 무심한 반응이었다.
진료는 길지 않았다.
“세림씨 증상이 많이 호전됐네요. 이 정도면 약을 반으로 줄여도 되겠어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할머니는 의사의 손을 꼭 잡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프지도 않은 나를 굳이 병원에 오게 하고, 매번 심문하듯 앉혀두는 저 사람에게, 할머니는 왜 고마워하는 걸까. 내기 의사는 고마운 사람이 아니라, 그저 감시자처럼 느껴졌다.
수납을 마치고 병원을 나섰다. 북적이는 사람들, 자동차들의 클락션 소리가 아까의 일이 마치 허상이었다는 듯 정신 차리라고 뺨을 때리는 것 같았다. 머릿속은 복잡했고, 나는 환기가 필요했다.
“할머니, 저 산책 좀 하고 올게요.”
“안 돼. 네 증상이 아직 완전히 나은 게 아니란 거, 너도 알잖니.”
“약도 반으로 줄었잖아요. 그리고 전 정상이에요. 할머니도 아시잖아요.”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야. 정상으로 돌아오기 전까진 할머니랑 같이 다녀야 해.”
그 억압적인 단호함에 진절머리가 났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할머니의 보호 아래에서 자유란 없었다.
“사람들은 오히려 18살 남자애 손 붙잡고 다니는 할머니 쪽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할 거에요.”
나는 할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세림아! 돌아오렴!”
할머니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리며, 발소리가 뒤따라 왔지만 성치 않은 무릎으로 고등학생 남자애를 붙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알아서 들어갈게요!”
한참을 달려 숨이 턱에 찰 무렵, 나는 어느새 동네 공원에 와 있었다.
“여긴…”
몇 시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지유와 함께 있었다. 혹시나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하, 뭐지… 진짜 꿈이었나?”
나는 벤치에 털썩 앉으며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앉은 것도 잠시, 급하게 뛰어온 탓에 목이 말랐다. 나는 공원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곳 또한 불과 몇 시간 전, 지유와 함께 나란히 들렀던 장소였다. 이 주변은 온통 지유와의 기억뿐인데, 그 모든 것이 단지 하룻밤의 환상이었다고?
편의점에 들어선 나는 냉장고에서 음료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까 지유가 내밀었던 것과 똑같은 차가운 캔. 그것은 꿈속의 감각처럼 손끝까지 시원했다.
“2,100원입니다. 카드는 앞에 꽂아주세요.”
편의점 직원의 무표정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현실의 단조로움을 강조했다.
나는 지갑을 꺼내려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때 얇게 반으로 접혀진 종이 하나가 바닥으로 가볍게 떨어졌다.
“손님, 뭐가 떨어졌는데요? 쪽지 같은데…”
직원의 말에 나는 바닥을 확인했다. 구겨졌다가 펼쳐진 흔적이 있는 쪽지가 정말로 놓여 있었다. 나에게 쪽지를 건네줄 만한 사람은 없는데… 누구지?
나는 쪽지를 주운 후 계산을 마치고, 다시 공원 벤치로 향했다. 철컥, 음료수 캔을 땄지만 마실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나를 붙잡는 것은 갈증이 아니라 그 쪽지였다. 펼친 쪽지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잊으면 안 돼. 나는 이지유. 여기서 널 기다릴 거야.]
지유의 맑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쪽지에서 튀어나와 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충격으로 몸이 굳었다. 내 주머니에 쪽지를 넣을 만큼 가깝게 붙어있던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이지유'라는 석 자를 적을 사람은 더더욱. 즉, 이것은 누군가의 장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꿈이라고 믿게 만든 주변 소음들을 부숴버리는, 멈춘 세상에서 날아온 명백한 증거였다.
나는 그 쪽지를 본 후,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며칠을 발악했다. 그날 잠들기 전의 뒤척임까지 생생히 떠올리며 재현했고, 그 세계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내용을 찾기 위해 뉴스, 미스터리 사건 기록, 평행우주 가설… 심지어는 이세계 판타지 소설까지 닥치는 대로 뒤졌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비슷한 소재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고, 그곳으로 향하는 방법은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무심히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