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31일.
여느 때처럼 주 2회 정기 검진을 받는 날이었다.
“세림 씨,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의사가 물었다.
“별다를 건 없어요…”
“작년서부터 약을 줄이고 있는 건 기억하시죠? 이제 다시 정신역동치료와 심리치료를 시작할 생각인데… 컨디션이 따라줘야 해서요. 저번과 같은 일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요. 평소 식사와 수면 패턴도 치료에 영향을 끼칠 테니 이 부분은 특히 신경 써야 하거든요.”
“요즘은 빨리 자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밥도 제대로 먹고 있고… 내일을 살아야 하니까.”
그 말을 들은 의사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일을 기다리는 듯 말한 것은 내가 이곳에 온 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좋은 일이라도 생기신 건가요? 취미가 생겼다든가, 목표를 세우셨다든가. 아무거나요!”
“희망…이라고나 할까요?”
나는 쭈뼛거리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어딘가 낯간지러웠다.
그러나 의사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언제나 밝은 미소로 나를 반겼지만, 그 눈빛 속에는 차가운 거리감이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의 변화를 진심으로 기뻐하는 친구처럼 느껴졌다.
의사에게 말했듯 오늘 밤 잠들면 지유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 막연한 희망이 나를 눕게 하고, 나를 걷게 하고 있었다. '그날'을 기다리는 날이 오늘이고 내일이고, 모레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세림씨, 저에게 다 말씀해 주세요. 세림씨에게 생긴 희망이 너무도 궁금하거든요.”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고 싶지는 않아 열심히 조사했지만…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인터넷과 책으론 부족했던 걸까란 생각을 하던 참이었는데... 의사라면 무언가 알고 있지 않을까?
“선생님… 혹시 8월 32일을 아시나요?”
“8월…32일이요?”
“네, 제가 작년에 다녀왔거든요.”
“하하… 세림 씨, 정말 특별한 경험을 하셨네요. 거기서 무엇을 보셨나요?”
의사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이미 이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춘 세상이에요. 사람도, 자동차도… 날아가던 새와 구름, 바람까지.”
내가 말을 하면, 의사는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뭘 그렇게 기록하는 걸까? 내가 말한 세상을 이해하고, 알아봐주려는 걸까?
“그곳에서 한 여자아이를 만났어요. 혼자 그곳에 있어요, 지금까지도… 외롭겠죠.”
“그렇군요… 세림씨의 걱정이, 그 아이에게도 전해지길 바랄게요.”
의사가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곳에 대해 알고 계신 건 전혀 없으신가요?”
“네… 도와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렇게 진료가 끝났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지만, 누군가에게 털어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은 만족스러웠다.
진료실을 나와 원무팀에서 처방전을 받았다. 할머니가 처방전을 확인하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할머니?”
“자, 잠깐만… 약이 늘어난 건가요…?”
할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 의사 선생님께서 망상장애가 의심된다고 하셔서, 일단 약을 먼저 복용하시고 증상을 지켜보자고 하셨어요.”
간호사의 대답에 할머니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째서… 좋아지고 있던 거 아니었나요…?”
할머니는 얼굴을 손으로 감싼 채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나는 그 순간, 8월 32일의 비현실성이 더욱 선명해짐을 느꼈다. 내가 직접 보고, 느꼈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망상'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유가 여전히 그곳에 있으니까, 외로운 그녀를 도와주고 싶으니까.
충격받은 할머니는 잠시 동안 병원 로비에 앉아 몸을 기댔다. 떨림은 멈췄지만, 나를 향한 걱정스러운 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림아, 내일을 위해 장을 좀 보러 가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말을 거는 할머니는 억지로 웃고 계셨다. 마치 내게 ‘망상장애’라는 말은 잊으라고, 넌 정상이라고 위로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위로가 무색하게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물론 약이 늘어날 것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원래 사람들 사이에서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는 허상으로 치부되는 것이 당연하니 감당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했다.
의사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놀란 사람은 할머니였고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데, 할머니는 왜 나를 위로하는 걸까? 의문이 밀려왔지만 그 이유를 물어볼 수는 없었다.
마트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장바구니를 들고 리스트를 되짚었다.
“생선은… 조기로 사고... 나물도 해야하니까...고사리랑...과일은 배랑 감... 세림아 떡집도 들려야 하니까 오늘 영업하는지 확인해보렴. ”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왜 9월 1일 식사는 항상 정성스럽게 차리는 걸까.
“평소처럼 간단히 하면 안 돼요?”
“그런 거엔 규칙이 있고, 예절이 필요한 거란다. 단순히 먹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을 담는 법이지.”
작년부터 생긴, 오직 9월 1일을 위한 이 규칙… 난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장을 다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작스런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작년부터 8월 31일만 되면 찾아오는 통증.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내리친다면 이런 느낌일까. 정신을 붙들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숨이 막히는 두통이었다.
“세림아, 택시 잡을게. 조금만 참아.”
할머니가 급히 잡은 택시를 타고, 집 앞에 내려 현관문을 지나, 방 안까지 들어오는 그 모든 순간 동안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나 때문에 걱정도, 신경 쓸 일도 많은 할머니껜 너무 미안했지만, 약도 듣지 않는 이 고통 속에서 할머니의 손 만큼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진정제였다.
방 안에 들어와 침대에 몸을 눕히자, 시야가 아득해졌다.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자꾸만 덮쳐오는 불안감에 가슴이 저려온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불안이 싫지 않았다.
오늘은 분명히 ‘그 날’로 넘어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고, 거기서 따라오는 기대감이 나의 눈을 덮었다.
눈을 떴을 때 핸드폰 시계는 정확히 00:00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