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 핏빛 명단, 지워지는 이름들
조회 : 69 추천 : 0 글자수 : 1,963 자 2026-02-26
대비전의 묵직한 문이 닫히며 낸 파열음이 밤의 정적 속으로 비산했다.
나는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미련이 남은 자들의 유희일 뿐,
사냥을 끝낸 포식자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 표적을 향한 서늘한 감각뿐이다.
정순왕후는 이제 화려한 수의를 입은 채 생매장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복도를 지나는 나의 발소리는 작았으나,
그 울림은 창덕궁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내관들은 죄지은 자들처럼 바닥에 이마를 박았고,
도열한 장용영 무사들은 살기 띤 눈빛으로 왕의 뒷모습을 수호했다.
그러나 승취에 취할 때는 아니었다.
뱀의 머리를 짓눌렀으나,
몸통은 여전히 살아 꿈틀대며 독니를 세우고 있었다.
살생부(殺生簿)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낮게 읊조렸다.
“백동수.”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나타난 백동수가 즉시 무릎을 꿇었다.
그의 견갑(肩甲)이 차갑게 부딪히며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전하, 명하시옵소서.”
“대비전에 머물던 쥐새끼들의 이름을 가져왔느냐.”
백동수가 품속에서 거칠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바쳤다.
종이 위에는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여섯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노론 벽파의 심장부이자,
정순왕후의 손과 발이 되어 조선을 유린해온 핵심 중신들.
나는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었다.
이름 위로 그들이 저지른 탐욕과 아바바마를 향했던 비수들이 겹쳐 보였다.
“모두.”
나는 종이를 구기며 명령했다.
“체포하라.
단 한 명도 담장 밖을 나가지 못하게 묶어라.”
백동수의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불꽃처럼 튀었다.
일국의 판서와 참판들을 한꺼번에 압송하는 것은 조정의 절반을 도려내는 일이었다.
“전하... 저항이 거세다면 어찌하리까.”
나는 무심하게 그를 보며 대답했다.
“베어라.
왕명을 거부하는 자에게 조선의 땅은 허락되지 않는다.”
내 목소리는 감정이 배제된 채 시리도록 투명했다.
백동수는 짧고 굵은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망설임이 아니라, 주군의 결단에 응답하는 무사의 투지였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가 일어섰다.
검은 옷을 입은 장용영 무사들이 그의 뒤를 따라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제부터는 말의 시간이 아니라, 철(鐵)의 시간이었다.
자경전의 몰락
자경전 내부, 남겨진 대신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패였던 정순왕후가 유폐되는 광경을,
목격하고도 현실을 부정하려 애썼다.
“주상이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우리를 어찌하겠는가?
노론의 뿌리는 이 나라의 근간일세!”
이조판서가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었을 때였다.
쾅—!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백동수가 난입했다.
그 뒤로 시퍼런 칼날을 세운 무사들이 전각 안을 메우자,
대신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이게 무슨 무도한 짓이냐!
감히 사대부의 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
호조판서가 악을 썼으나,
백동수는 거침없이 다가가 그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왕명이다.”
백동수의 짧은 일갈이 천둥처럼 전각을 울렸다.
“심환지와 공모하여 선왕을 시해하고,
대비를 부추겨 국본을 흔든 대역죄인들이다.
전원 오라를 받아라!”
“무, 무슨 근거로! 증거를 내놔라!”
백동수가 조용히 검을 뽑아 판서의 목줄기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검신이 닿자마자 판서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비명이 잦아들었다.
“증거는 이미 국문장에서 피를 흘리며 증언하고 있다.
살고 싶다면 무릎을 꿇어라.
아니면, 이 자리에서 그 오만한 목을 쳐 조상의 무덤 곁으로 보내주마.”
백동수의 안광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대신들의 무릎이 하나둘씩 힘없이 꺾였다.
평생을 권력의 단맛에 취해 살던 자들의 비참한 몰락이었다.
침전으로 돌아온 나는 창밖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대신들이 끌려가는 비통한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노론 벽파.
수십 년간 왕권을 위협하며 조선을 좀먹던 거대한 독버섯이 오늘 밤,
나의 손에 의해 그 뿌리가 뽑히고 있었다.
나는 떨리지 않는 손으로 찻잔을 들었다.
‘이름들은 지워졌다.
이제 그들이 남긴 핏자국 위로,
새로운 조선의 그림을 그리리라.’
창덕궁의 새벽은 이제 단 한 사람,
나의 의지만을 남겨둔 채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미련이 남은 자들의 유희일 뿐,
사냥을 끝낸 포식자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 표적을 향한 서늘한 감각뿐이다.
정순왕후는 이제 화려한 수의를 입은 채 생매장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복도를 지나는 나의 발소리는 작았으나,
그 울림은 창덕궁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내관들은 죄지은 자들처럼 바닥에 이마를 박았고,
도열한 장용영 무사들은 살기 띤 눈빛으로 왕의 뒷모습을 수호했다.
그러나 승취에 취할 때는 아니었다.
뱀의 머리를 짓눌렀으나,
몸통은 여전히 살아 꿈틀대며 독니를 세우고 있었다.
살생부(殺生簿)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낮게 읊조렸다.
“백동수.”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나타난 백동수가 즉시 무릎을 꿇었다.
그의 견갑(肩甲)이 차갑게 부딪히며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전하, 명하시옵소서.”
“대비전에 머물던 쥐새끼들의 이름을 가져왔느냐.”
백동수가 품속에서 거칠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바쳤다.
종이 위에는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여섯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노론 벽파의 심장부이자,
정순왕후의 손과 발이 되어 조선을 유린해온 핵심 중신들.
나는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었다.
이름 위로 그들이 저지른 탐욕과 아바바마를 향했던 비수들이 겹쳐 보였다.
“모두.”
나는 종이를 구기며 명령했다.
“체포하라.
단 한 명도 담장 밖을 나가지 못하게 묶어라.”
백동수의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불꽃처럼 튀었다.
일국의 판서와 참판들을 한꺼번에 압송하는 것은 조정의 절반을 도려내는 일이었다.
“전하... 저항이 거세다면 어찌하리까.”
나는 무심하게 그를 보며 대답했다.
“베어라.
왕명을 거부하는 자에게 조선의 땅은 허락되지 않는다.”
내 목소리는 감정이 배제된 채 시리도록 투명했다.
백동수는 짧고 굵은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망설임이 아니라, 주군의 결단에 응답하는 무사의 투지였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가 일어섰다.
검은 옷을 입은 장용영 무사들이 그의 뒤를 따라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제부터는 말의 시간이 아니라, 철(鐵)의 시간이었다.
자경전의 몰락
자경전 내부, 남겨진 대신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패였던 정순왕후가 유폐되는 광경을,
목격하고도 현실을 부정하려 애썼다.
“주상이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우리를 어찌하겠는가?
노론의 뿌리는 이 나라의 근간일세!”
이조판서가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었을 때였다.
쾅—!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백동수가 난입했다.
그 뒤로 시퍼런 칼날을 세운 무사들이 전각 안을 메우자,
대신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이게 무슨 무도한 짓이냐!
감히 사대부의 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
호조판서가 악을 썼으나,
백동수는 거침없이 다가가 그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왕명이다.”
백동수의 짧은 일갈이 천둥처럼 전각을 울렸다.
“심환지와 공모하여 선왕을 시해하고,
대비를 부추겨 국본을 흔든 대역죄인들이다.
전원 오라를 받아라!”
“무, 무슨 근거로! 증거를 내놔라!”
백동수가 조용히 검을 뽑아 판서의 목줄기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검신이 닿자마자 판서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비명이 잦아들었다.
“증거는 이미 국문장에서 피를 흘리며 증언하고 있다.
살고 싶다면 무릎을 꿇어라.
아니면, 이 자리에서 그 오만한 목을 쳐 조상의 무덤 곁으로 보내주마.”
백동수의 안광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대신들의 무릎이 하나둘씩 힘없이 꺾였다.
평생을 권력의 단맛에 취해 살던 자들의 비참한 몰락이었다.
침전으로 돌아온 나는 창밖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대신들이 끌려가는 비통한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노론 벽파.
수십 년간 왕권을 위협하며 조선을 좀먹던 거대한 독버섯이 오늘 밤,
나의 손에 의해 그 뿌리가 뽑히고 있었다.
나는 떨리지 않는 손으로 찻잔을 들었다.
‘이름들은 지워졌다.
이제 그들이 남긴 핏자국 위로,
새로운 조선의 그림을 그리리라.’
창덕궁의 새벽은 이제 단 한 사람,
나의 의지만을 남겨둔 채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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