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 침묵하는 궁, 깨어나는 용
조회 : 24 추천 : 0 글자수 : 1,788 자 2026-02-28
창덕궁의 새벽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선왕의 승하를 기리는 곡소리가,
궁궐의 담장을 넘어 도성까지 메아리쳤다.
내관들은 옷소매로 눈물을 닦기 바빴고,
궁녀들은 주인을 잃은 슬픔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울음소리는 칼로 벤 듯 멈췄다.
슬픔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차갑고 끈적한 침묵이었다.
그 정적 속에서 궁궐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보위에 앉은 열한 살 소년의 그림자가 더 이상 아이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정의 거목이었던 노론 대신들이 하룻밤 사이에 자취를 감췄다.
영의정 심환지는 옥에 갇혔고,
권력의 심장부였던 대비전은 장용영의 삼엄한 창날에 가로막혔다.
말소리는 없었으나 소문은 발이 없이도 궁궐 구석구석을 기어 다녔다.
기둥 뒤에서, 담장 너머에서,
상궁들의 떨리는 눈동자 사이에서 소생(蘇生)한 진실이 속삭여졌다.
"주상 전하께서 직접 검을 뽑으셨다."
"심 대감이 국문장에서 피를 토하며 자백했다더군."
어린 왕이 휘두른 칼날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서늘한 기운은 이미 궁궐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어두운 침전에 앉아 등불의 심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잠들지 않았다. 아니, 잠들 수 없었다.
권력의 이동은 찰나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법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살 길을 찾고,
누군가는 죽을 자리를 찾고 있을 터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백동수가 들어왔다.
그의 어깨엔 밤이슬이 맺혀 있었고,
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전하.”
“상황은.”
“궁의 모든 통로를 장용영이 장악하였사옵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전하의 허락 없이는 이 궐을 나가지 못할 것이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체스판의 모든 말이 내 손안에 들어왔다.
“소문은 어디까지 퍼졌느냐.”
백동수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미 나인들과 하인들 사이에서 전하의 추국 소식이 퍼지고 있사옵니다.
조정의 하급 관리들조차 공포에 질려 숨을 죽이고 있나이다.
입단속을 시킬까요?”
두려움이라는 통치
나는 타오르는 불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막지 마라.”
백동수의 눈이 의아함으로 흔들렸다.
“...전하? 아직 벽파의 잔당들이 도처에 있사옵니다.
소문이 커지면 저들이 결집할 수도—”
“두려움은 때로 백 마디의 교지(敎旨)보다 효과적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저들이 떨게 놔두어라.
자신들의 목 위에 칼날이 언제 떨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하란 말이다.
그 공포가 극에 달했을 때,
저들은 살기 위해 서로의 목을 물어뜯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분열이다.”
백동수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그는 이제야 깨달은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전하의 뜻이 정녕 그러하시다면,
소신 그 공포의 무게를 더하도록 하겠나이다.”
나는 창가로 걸어가 창덕궁의 하늘을 보았다.
지독하게 어두운 밤이었지만,
지평선 끝에서 희뿌연 여명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대비전은 여전한가.”
“예, 전하.
정순왕후께서는 식음을 전폐하고 고함을 지르다.
지금은 죽은 듯 고요하옵니다.
안의 대신들도 자중지란이 일어난 듯하옵니다.”
“좋다.
이제 사냥개들이 제 주인을 물어뜯을 시간이다.”
나는 창살 너머로 비치는 여명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선포했다.
“준비하라.
해가 완전히 뜨면, 나는 더 이상 '어린 주상'으로 불리지 않을 것이다.”
백동수가 물러가고 문이 닫혔다.
나는 흔들리는 등불을 입으로 불어 껐다.
방 안은 어둠에 잠겼지만,
나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 조선의 낡은 껍데기가 벗겨질 것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선왕의 승하를 기리는 곡소리가,
궁궐의 담장을 넘어 도성까지 메아리쳤다.
내관들은 옷소매로 눈물을 닦기 바빴고,
궁녀들은 주인을 잃은 슬픔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울음소리는 칼로 벤 듯 멈췄다.
슬픔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차갑고 끈적한 침묵이었다.
그 정적 속에서 궁궐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보위에 앉은 열한 살 소년의 그림자가 더 이상 아이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정의 거목이었던 노론 대신들이 하룻밤 사이에 자취를 감췄다.
영의정 심환지는 옥에 갇혔고,
권력의 심장부였던 대비전은 장용영의 삼엄한 창날에 가로막혔다.
말소리는 없었으나 소문은 발이 없이도 궁궐 구석구석을 기어 다녔다.
기둥 뒤에서, 담장 너머에서,
상궁들의 떨리는 눈동자 사이에서 소생(蘇生)한 진실이 속삭여졌다.
"주상 전하께서 직접 검을 뽑으셨다."
"심 대감이 국문장에서 피를 토하며 자백했다더군."
어린 왕이 휘두른 칼날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서늘한 기운은 이미 궁궐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어두운 침전에 앉아 등불의 심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잠들지 않았다. 아니, 잠들 수 없었다.
권력의 이동은 찰나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법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살 길을 찾고,
누군가는 죽을 자리를 찾고 있을 터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백동수가 들어왔다.
그의 어깨엔 밤이슬이 맺혀 있었고,
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전하.”
“상황은.”
“궁의 모든 통로를 장용영이 장악하였사옵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전하의 허락 없이는 이 궐을 나가지 못할 것이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체스판의 모든 말이 내 손안에 들어왔다.
“소문은 어디까지 퍼졌느냐.”
백동수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미 나인들과 하인들 사이에서 전하의 추국 소식이 퍼지고 있사옵니다.
조정의 하급 관리들조차 공포에 질려 숨을 죽이고 있나이다.
입단속을 시킬까요?”
두려움이라는 통치
나는 타오르는 불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막지 마라.”
백동수의 눈이 의아함으로 흔들렸다.
“...전하? 아직 벽파의 잔당들이 도처에 있사옵니다.
소문이 커지면 저들이 결집할 수도—”
“두려움은 때로 백 마디의 교지(敎旨)보다 효과적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저들이 떨게 놔두어라.
자신들의 목 위에 칼날이 언제 떨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하란 말이다.
그 공포가 극에 달했을 때,
저들은 살기 위해 서로의 목을 물어뜯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분열이다.”
백동수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그는 이제야 깨달은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전하의 뜻이 정녕 그러하시다면,
소신 그 공포의 무게를 더하도록 하겠나이다.”
나는 창가로 걸어가 창덕궁의 하늘을 보았다.
지독하게 어두운 밤이었지만,
지평선 끝에서 희뿌연 여명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대비전은 여전한가.”
“예, 전하.
정순왕후께서는 식음을 전폐하고 고함을 지르다.
지금은 죽은 듯 고요하옵니다.
안의 대신들도 자중지란이 일어난 듯하옵니다.”
“좋다.
이제 사냥개들이 제 주인을 물어뜯을 시간이다.”
나는 창살 너머로 비치는 여명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선포했다.
“준비하라.
해가 완전히 뜨면, 나는 더 이상 '어린 주상'으로 불리지 않을 것이다.”
백동수가 물러가고 문이 닫혔다.
나는 흔들리는 등불을 입으로 불어 껐다.
방 안은 어둠에 잠겼지만,
나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 조선의 낡은 껍데기가 벗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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