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 여명(黎明)의 압박
조회 : 8 추천 : 0 글자수 : 1,999 자 2026-03-01
해는 아직 지평선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창덕궁의 하늘은 잉크를 풀어놓은 듯 검었고,
별빛은 새벽안개에 가려 희미하게 명멸했다.
하지만 궁궐은 잠들지 못했다.
수천 개의 숨결이 죽은 듯 가라앉아 왕의 기척만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창 앞에 서서 서늘한 새벽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이 차가운 감각.
의열단원으로서 경성역의 차가운 보도 위에 서 있던 그때와 닮아 있었다.
그때 나는 지켜보았다.
무력한 왕실과 부패한 대신들이 나라를 팔아넘기고,
백성들이 이름도 없이 죽어가는 것을.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통증이 선명했다.
'이번에는 다르다.
내 손으로 이 나라를 다시 세우리라.'
살아남은 자들의 방문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내관이 조용히 들어와 엎드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채 가시지 않은 경악이 섞여 있었다.
“…전하.”
“말하라.”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남아 있는 대신들이...
대전 밖에서 전하를 뵙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남아 있는 자들이라.”
나는 차갑게 읊조렸다.
벽파의 핵심들이 옥에 갇힌 지금,
궐에 남은 자들은 기회를 엿보던 소론(少論)과 남인(南人),
그리고 눈치 빠른 중도파들일 터였다.
그들은 확인하러 온 것이다.
보위에 앉은 이 아이가,
정말로 노론의 거목들을 뿌리째 뽑아버릴 작정인지,
아니면 그저 하룻밤의 광기에 그칠 것인지를.
“들라 하라.”
내관이 고개를 들며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지금 말씀이옵니까? 아직 해가 뜨지 않았사온데...
법도에 어긋남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나의 눈빛에 내관은 숨을 들이키며 다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지금이다. 조선의 법도는 이제 내가 새로 쓴다.”
누구의 신하인가
잠시 후, 세 명의 대신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좌의정 이시수와 소론 계열의 중신들이었다.
그들의 관복은 정돈되어 있었으나, 안색은 잿빛이었다.
“전하... 심야에 무례를 무릅쓰고 뵙기를 청하나이다.”
이시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침묵을 지켰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알고 왔느냐.”
나의 낮은 물음에 대신들이 어깨를 움찔했다.
“...무엇을 말씀이옵니까, 전하.”
“심환지가 자백하였다.”
그 한마디에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정조대왕,
나의 아바바마를 독살한 그 모든 전말을 고했단 말이다.
그 배후가 누구인지, 그 손발이 된 자들이 누구인지까지.”
대신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으나 차마 말을 뱉지 못했다.
나는 한 걸음 다가가 그들을 압박했다.
“묻겠다.
너희는 그동안 무엇을 보았느냐.
선왕이 고통 속에 숨을 거두실 때,
너희는 진정 몰랐단 말이냐,
아니면 알고도 눈을 감았느냐?”
“전하! 소신들은 정녕...!”
“대답하라!”
나의 일갈이 천둥처럼 울리자,
대신들은 비명을 지르듯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너희는 누구의 신하냐?
노론의 종복이냐,
대비의 개냐? 아니면 조선의 신하냐?”
지독한 정적이 흐른 뒤,
좌의정 이시수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토해냈다.
“…전하의 신하이옵니다!
오직 전하만을 따르겠나이다!”
뒤를 이어 나머지 두 사람도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맹세했다.
“…소신들의 목숨은 전하의 것이옵니다!
부디 거두어 주시옵소서!”
새로운 태양
나는 그들의 굽은 등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충성심보다는 공포가 앞선 맹세였으나,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기억하라.”
나는 창밖을 가리켰다.
지평선 너머로 붉은 빛줄기가 어둠을 찢으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조선의 왕은 오직 나 하나뿐이다.
나를 속이려 하거나, 내 백성을 해치려 한다면...
다음은 너희의 목이 떨어질 순서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대신들이 물러가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동시에 창덕궁 기와 위로 눈부신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지독하게 길었던 밤이 가고,
조선의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바바마, 보고 계십니까.
이제 조선은 다른 길을 갈 것입니다.’
나의 눈은 해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창덕궁의 하늘은 잉크를 풀어놓은 듯 검었고,
별빛은 새벽안개에 가려 희미하게 명멸했다.
하지만 궁궐은 잠들지 못했다.
수천 개의 숨결이 죽은 듯 가라앉아 왕의 기척만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창 앞에 서서 서늘한 새벽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이 차가운 감각.
의열단원으로서 경성역의 차가운 보도 위에 서 있던 그때와 닮아 있었다.
그때 나는 지켜보았다.
무력한 왕실과 부패한 대신들이 나라를 팔아넘기고,
백성들이 이름도 없이 죽어가는 것을.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통증이 선명했다.
'이번에는 다르다.
내 손으로 이 나라를 다시 세우리라.'
살아남은 자들의 방문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내관이 조용히 들어와 엎드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채 가시지 않은 경악이 섞여 있었다.
“…전하.”
“말하라.”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남아 있는 대신들이...
대전 밖에서 전하를 뵙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남아 있는 자들이라.”
나는 차갑게 읊조렸다.
벽파의 핵심들이 옥에 갇힌 지금,
궐에 남은 자들은 기회를 엿보던 소론(少論)과 남인(南人),
그리고 눈치 빠른 중도파들일 터였다.
그들은 확인하러 온 것이다.
보위에 앉은 이 아이가,
정말로 노론의 거목들을 뿌리째 뽑아버릴 작정인지,
아니면 그저 하룻밤의 광기에 그칠 것인지를.
“들라 하라.”
내관이 고개를 들며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지금 말씀이옵니까? 아직 해가 뜨지 않았사온데...
법도에 어긋남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나의 눈빛에 내관은 숨을 들이키며 다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지금이다. 조선의 법도는 이제 내가 새로 쓴다.”
누구의 신하인가
잠시 후, 세 명의 대신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좌의정 이시수와 소론 계열의 중신들이었다.
그들의 관복은 정돈되어 있었으나, 안색은 잿빛이었다.
“전하... 심야에 무례를 무릅쓰고 뵙기를 청하나이다.”
이시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침묵을 지켰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알고 왔느냐.”
나의 낮은 물음에 대신들이 어깨를 움찔했다.
“...무엇을 말씀이옵니까, 전하.”
“심환지가 자백하였다.”
그 한마디에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정조대왕,
나의 아바바마를 독살한 그 모든 전말을 고했단 말이다.
그 배후가 누구인지, 그 손발이 된 자들이 누구인지까지.”
대신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으나 차마 말을 뱉지 못했다.
나는 한 걸음 다가가 그들을 압박했다.
“묻겠다.
너희는 그동안 무엇을 보았느냐.
선왕이 고통 속에 숨을 거두실 때,
너희는 진정 몰랐단 말이냐,
아니면 알고도 눈을 감았느냐?”
“전하! 소신들은 정녕...!”
“대답하라!”
나의 일갈이 천둥처럼 울리자,
대신들은 비명을 지르듯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너희는 누구의 신하냐?
노론의 종복이냐,
대비의 개냐? 아니면 조선의 신하냐?”
지독한 정적이 흐른 뒤,
좌의정 이시수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토해냈다.
“…전하의 신하이옵니다!
오직 전하만을 따르겠나이다!”
뒤를 이어 나머지 두 사람도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맹세했다.
“…소신들의 목숨은 전하의 것이옵니다!
부디 거두어 주시옵소서!”
새로운 태양
나는 그들의 굽은 등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충성심보다는 공포가 앞선 맹세였으나,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기억하라.”
나는 창밖을 가리켰다.
지평선 너머로 붉은 빛줄기가 어둠을 찢으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조선의 왕은 오직 나 하나뿐이다.
나를 속이려 하거나, 내 백성을 해치려 한다면...
다음은 너희의 목이 떨어질 순서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대신들이 물러가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동시에 창덕궁 기와 위로 눈부신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지독하게 길었던 밤이 가고,
조선의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바바마, 보고 계십니까.
이제 조선은 다른 길을 갈 것입니다.’
나의 눈은 해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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