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 화선(畵仙)의 붓, 왕의 눈물을 닦다
조회 : 182 추천 : 0 글자수 : 1,759 자 2026-03-13
인정전의 정적은 이제 무거운 납덩이가 아니라,
깊은 물속 같은 평온함이었다.
검과 지혜, 그리고 군권까지 모두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권력의 기틀은 완성되었으나,
내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메워지지 않은 공동(空洞)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기억이자,
내가 이 몸의 주인으로서 반드시 마주해야 할 과거였다.
나는 용상에 앉아 낮게 읊조렸다.
“들라 하라.”
내관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단원 김홍도를 들라!”
육중한 문이 열리고,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김홍도.
그의 몸은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굽어 있었고, 화
려한 관복보다는 낡은 필묵의 향취가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인정전의 공기는 묘하게 일렁였다.
그는 정조 대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아바바마의 꿈과 백성의 삶을 화폭에 담아냈던 자였다.
그는 왕의 얼굴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깊게 관찰했던 목격자이기도 했다.
김홍도는 전각 중앙에 이르러 떨리는 무릎을 꿇었다.
“신 김홍도, 전하의 부름을 받들어 뵙사옵니다.”
나는 그를 응시했다.
그는 아바바마의 죽음 이후 붓을 놓고 자취를 감추려 했던 자다.
주인을 잃은 화공의 슬픔이 그의 마른 어깨에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아라.”
김홍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의 눈과 그의 눈이 마주친 찰나,
노화공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는 내 얼굴에서 내가 아닌,
내가 계승한 누군가의 환영을 본 듯했다.
나는 침묵을 깨고 물었다.
“김홍도,
너는 짐의 아버지를 그렸느냐.
아바바마의 눈 속에 담긴 고독과 그
분이 꿈꾸셨던 조선을 진정으로 화폭에 담아냈느냐.”
김홍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 그러하옵니다,
전하. 소신, 선왕 전하의 어진(御眞)을 그리며
그분의 고뇌를 보았고,
백성들의 미소를 그리며 그분의 기쁨을 보았나이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진 가을 억새처럼 애처로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나의 그림자가 노화공의 앞에 드리워졌다.
“좋다. 그렇다면 이제 짐을 그려라.”
인정전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신하들은 숨을 죽였다. 왕의 얼굴을 그린다는 것,
어진을 남긴다는 것은 단순한 초상화 이상의 의미였다.
그것은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선포하고,
왕의 영혼을 역사에 박제하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정조를 그렸던 그 손으로,
그분의 눈을 기억하는 그 감각으로 짐의 모습을 남겨라.”
김홍도의 눈에 투명한 이슬이 맺혔다.
그는 내 어린 육신 너머로 타오르는,
아바바마보다 더 강렬하고 냉혹한 군주의 기운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짐은 아바바마의 유업을 잇되,
그분과는 다른 길을 갈 것이다.
그분이 자애로운 달이었다면,
짐은 어둠을 불사르는 태양이 될 것이다.
김홍도, 너는 그 차이를 담아낼 수 있겠느냐.”
김홍도는 바닥이 울릴 정도로 머리를 조아렸다.
“... 전하! 소신, 이미 늙어 눈이 침침하고 손이 떨리오나,
전하를 뵙고 나니 가슴 속에서 잊었던 불꽃이 일렁이나이다.
선왕 전하를 그리던 정성으로,
아니 그 이상의 필력으로,
전하의 위용을 역사에 영원히 새기겠나이다!”
그의 맹세는 비장했다.
그것은 한 화공의 복귀 선언이자,
새로운 시대의 얼굴이 탄생할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의 얼굴은 곧 조선의 얼굴이 될 것이다.
가감 없이, 그러나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제왕의 기개로 나를 기록하라.”
이제 검과 지혜에 이어,
예술과 기억마저 내 곁에 섰다.
왕의 얼굴이 화폭 위에 새겨지는 날,
조선의 백성들은 비로소,
자신들을 이끌 태양이 누구인지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깊은 물속 같은 평온함이었다.
검과 지혜, 그리고 군권까지 모두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권력의 기틀은 완성되었으나,
내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메워지지 않은 공동(空洞)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기억이자,
내가 이 몸의 주인으로서 반드시 마주해야 할 과거였다.
나는 용상에 앉아 낮게 읊조렸다.
“들라 하라.”
내관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단원 김홍도를 들라!”
육중한 문이 열리고,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김홍도.
그의 몸은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굽어 있었고, 화
려한 관복보다는 낡은 필묵의 향취가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인정전의 공기는 묘하게 일렁였다.
그는 정조 대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아바바마의 꿈과 백성의 삶을 화폭에 담아냈던 자였다.
그는 왕의 얼굴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깊게 관찰했던 목격자이기도 했다.
김홍도는 전각 중앙에 이르러 떨리는 무릎을 꿇었다.
“신 김홍도, 전하의 부름을 받들어 뵙사옵니다.”
나는 그를 응시했다.
그는 아바바마의 죽음 이후 붓을 놓고 자취를 감추려 했던 자다.
주인을 잃은 화공의 슬픔이 그의 마른 어깨에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아라.”
김홍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의 눈과 그의 눈이 마주친 찰나,
노화공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는 내 얼굴에서 내가 아닌,
내가 계승한 누군가의 환영을 본 듯했다.
나는 침묵을 깨고 물었다.
“김홍도,
너는 짐의 아버지를 그렸느냐.
아바바마의 눈 속에 담긴 고독과 그
분이 꿈꾸셨던 조선을 진정으로 화폭에 담아냈느냐.”
김홍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 그러하옵니다,
전하. 소신, 선왕 전하의 어진(御眞)을 그리며
그분의 고뇌를 보았고,
백성들의 미소를 그리며 그분의 기쁨을 보았나이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진 가을 억새처럼 애처로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나의 그림자가 노화공의 앞에 드리워졌다.
“좋다. 그렇다면 이제 짐을 그려라.”
인정전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신하들은 숨을 죽였다. 왕의 얼굴을 그린다는 것,
어진을 남긴다는 것은 단순한 초상화 이상의 의미였다.
그것은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선포하고,
왕의 영혼을 역사에 박제하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정조를 그렸던 그 손으로,
그분의 눈을 기억하는 그 감각으로 짐의 모습을 남겨라.”
김홍도의 눈에 투명한 이슬이 맺혔다.
그는 내 어린 육신 너머로 타오르는,
아바바마보다 더 강렬하고 냉혹한 군주의 기운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짐은 아바바마의 유업을 잇되,
그분과는 다른 길을 갈 것이다.
그분이 자애로운 달이었다면,
짐은 어둠을 불사르는 태양이 될 것이다.
김홍도, 너는 그 차이를 담아낼 수 있겠느냐.”
김홍도는 바닥이 울릴 정도로 머리를 조아렸다.
“... 전하! 소신, 이미 늙어 눈이 침침하고 손이 떨리오나,
전하를 뵙고 나니 가슴 속에서 잊었던 불꽃이 일렁이나이다.
선왕 전하를 그리던 정성으로,
아니 그 이상의 필력으로,
전하의 위용을 역사에 영원히 새기겠나이다!”
그의 맹세는 비장했다.
그것은 한 화공의 복귀 선언이자,
새로운 시대의 얼굴이 탄생할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의 얼굴은 곧 조선의 얼굴이 될 것이다.
가감 없이, 그러나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제왕의 기개로 나를 기록하라.”
이제 검과 지혜에 이어,
예술과 기억마저 내 곁에 섰다.
왕의 얼굴이 화폭 위에 새겨지는 날,
조선의 백성들은 비로소,
자신들을 이끌 태양이 누구인지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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