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어의들: 장막 안의 칼날
조회 : 38 추천 : 1 글자수 : 3,373 자 2026-02-22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창덕궁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하늘은 잉크를 쏟은 듯 검었다.
새벽의 기운이 대지를 적시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으나,
궁궐의 심장부는 이미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등불은 타오르는 분노처럼 꺼질 줄 몰랐고,
복도를 적시는 발소리는 비명처럼 날카로웠다.
왕이 깨어난 밤이었다.
그리고— 왕이 독살(毒殺) 당한 밤이었다.
나는 침상 위에 정좌하고 있었다.
열한 살 아이의 육체는 이 숨 막히는 긴장에 저항하듯 떨려왔다.
심장은 갈비뼈를 두들겼고, 손등의 솜털까지 꼿꼿이 일어섰다.
하지만 그 안의 정신은 만년설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의열단 시절,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골수에 새긴 가르침이 있었다.
‘몸은 속여도, 정신은 결코 속이지 마라.
육체는 죽어도 의지는 죽지 않는다.’
내관이 문밖에서 고개를 깊숙이 처박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전하… 어의들이 도착하였사옵니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라 하라.”
육중한 문이 열리고 두 남자가 방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선두에 선 이는 나이가 지긋했다.
서리 맞은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왔고,
눈동자는 수천 권의 의서를 삼킨 듯 깊었다.
강명길.
조선 최고의 어의이자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자.
그의 걸음은 조심스러웠으나,
그 뒤에 숨겨진 흐트러짐 없는 기세는,
그가 이 죽음의 향연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짐작게 했다.
그 뒤를 따르는 젊은 사내는 피재길이었다.
그는 강명길보다 눈빛이 형형했다.
그것은 사물의 표면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죽음의 원인,
그 내면의 검은 그림자를 끝까지 추적하는,
‘도살자’ 혹은 ‘해부학자’의 눈이었다.
독을 아는 자.
냄새만으로도 생과 사의 갈림길을 찾아내는 자.
두 사람은 내 발치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소신들, 전하를 뵙사옵니다.”
나는 한동안 그들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역사 속에서 이들은 정조의 죽음을 가장 먼저 의심했으나,
곧 거대한 권력의 장막 아래 침묵을 강요받았던 자들이다.
그들은 죽지 않았으나, 그들의 혀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침묵을 깨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젯밤.”
내 목소리는 미성이었다.
그러나 그 울림은 고목을 가르는 서늘한 바람과 같았다.
“아바님께서… 승하하시기 전.”
강명길의 마른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글자도 빠짐없이 고하라.”
강명길은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 찰나, 옆에 서 있는 권력의 그림자들을 훑었다.
병풍 뒤에는 정순왕후가 서 있었다.
그 옆엔 심환지가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존재 자체가 '함구하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방 안의 공기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나는 그 비릿한 대치를 끝내기로 했다.
“이 방에 있는 자들은… 모두 나가라.”
내관들이 경악하며 나를 보았다.
정순왕후가 부드럽지만 뼈가 있는 어조로 가로막았다.
“전하. 어의들의 보고는 국본의 안위와 직결된 것이니,
이 할미도 함께 들어야—”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쏘아보았을 뿐이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방 안의 온도는 빙점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의 화려한 비단 옷자락 아래서,
권력의 오만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다시 말했다. 이번엔 심해의 압력처럼 더 낮고 명확하게.
“모두. 나가라.”
단호한 일갈이었다.
정순왕후의 입술이 경련하듯 굳었고,
심환지의 가늘게 뜬 눈에 살기가 스쳤다.
하지만 그들은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비록 어린 왕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그는 조선의 유일한 태양이었다.
“…전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정순왕후가 소매를 거칠게 휘저으며 돌아섰다.
심환지가 뱀처럼 소리 없이 뒤를 따랐다.
콰앙—!
문이 닫히는 소리가 천둥처럼 방 안을 울렸다.
이제 이 공간에는 나와, 두 명의 어의만이 남았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제 말하라.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다.”
강명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노쇠한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꺾이지 않은 의사로서의 양심이 뒤섞여 있었다.
“전하... 송구하오나...
소신의 미천한 식견으로 보건대... 대왕마마의 승하는...”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결기를 다지듯 내뱉었다.
“…천수(天壽)를 다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옵니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피재길이 바닥을 짚은 손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전하. 소신은 대왕마마의 마지막 경련을 직접 목격하였사옵니다.
급격한 구토와 전신의 강직, 그리고 의식의 급속한 혼탁.”
그는 숨을 몰아쉬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선언했다.
“이는 병증이 아니라… 명백한 독(毒)이옵니다.”
방 안은 얼음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역사는 역시 피로 써진 진실이었다.
나는 정조의 죽음을,
조선의 심장이 멈추는 그 찰나를 다시 한번 겪어내고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어떤 독인가.”
피재길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열한 살 어린 왕이 이토록 차갑게 독의 성분을 묻다니.
그는 잠시 멍하니 나를 보다가 고개를 깊숙이 처박으며 답했다.
“…증상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마황(麻黃)과 비상(砒霜)을 극비리에 배합한 독일 가능성이 농후하옵니다.”
마황과 비상. 나는 그 치명적인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의열단 시절, 우리는 독을 연구했다.
암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놈들의 독수(毒手)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잡혔을 때 스스로를 지우기 위해.
“증명할 수 있겠느냐.”
두 어의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피재길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가능하옵니다.
다만, 대왕마마의 침전과 사용된 약재의 찌꺼기를,
세세히 조사할 권한이 필요하옵니다.”
“허락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궁 안의 모든 약재와 기록은 너희의 것이다.”
두 사람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호랑이 등에 올라탔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들을 뚫어질 듯 노려보며 쐐기를 박았다.
“이 일은 오직 나에게만 보고하라.
만약 정보가 새어 나간다면 너희의 목숨뿐만 아니라 삼족이 멸할 것이다.
이것은 왕명이다.”
강명길과 피재길이 바닥이 깨질 듯 머리를 박았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목숨을 걸고 진실을 밝히겠나이다!”
첫 번째 칼이 갈렸다.
이제— 두 번째 칼을 뽑을 차례였다.
나는 문을 향해 벽력이 치듯 외쳤다.
“내관!”
문이 열리자마자 내관이 거의 구르듯 들어왔다.
“백동수(白東脩)를 부르라.”
내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지... 지금 말씀이옵니까?
야밤에 장용영의 무사를…”
나는 그를 향해 서슬 퍼런 위압감을 쏟아냈다.
“지금 당장이다.
지체하는 찰나마다 누군가의 목이 날아갈 것이다.”
내관은 비명을 지르듯 대답하고는 밖으로 튀어 나갔다.
문이 닫히고 다시 찾아온 침묵 속에서 나는 내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칼조차 쥐어보지 못한 연약한 손.
하지만 이 손으로 조선의 역사를 피로 다시 쓰리라.
나는 마음속 살생부의 다음 칸에 이름을 새겼다.
심환지.
기다려라. 이번엔 내가 먼저 너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이니.
창덕궁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하늘은 잉크를 쏟은 듯 검었다.
새벽의 기운이 대지를 적시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으나,
궁궐의 심장부는 이미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등불은 타오르는 분노처럼 꺼질 줄 몰랐고,
복도를 적시는 발소리는 비명처럼 날카로웠다.
왕이 깨어난 밤이었다.
그리고— 왕이 독살(毒殺) 당한 밤이었다.
나는 침상 위에 정좌하고 있었다.
열한 살 아이의 육체는 이 숨 막히는 긴장에 저항하듯 떨려왔다.
심장은 갈비뼈를 두들겼고, 손등의 솜털까지 꼿꼿이 일어섰다.
하지만 그 안의 정신은 만년설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의열단 시절,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골수에 새긴 가르침이 있었다.
‘몸은 속여도, 정신은 결코 속이지 마라.
육체는 죽어도 의지는 죽지 않는다.’
내관이 문밖에서 고개를 깊숙이 처박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전하… 어의들이 도착하였사옵니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라 하라.”
육중한 문이 열리고 두 남자가 방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선두에 선 이는 나이가 지긋했다.
서리 맞은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왔고,
눈동자는 수천 권의 의서를 삼킨 듯 깊었다.
강명길.
조선 최고의 어의이자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자.
그의 걸음은 조심스러웠으나,
그 뒤에 숨겨진 흐트러짐 없는 기세는,
그가 이 죽음의 향연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짐작게 했다.
그 뒤를 따르는 젊은 사내는 피재길이었다.
그는 강명길보다 눈빛이 형형했다.
그것은 사물의 표면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죽음의 원인,
그 내면의 검은 그림자를 끝까지 추적하는,
‘도살자’ 혹은 ‘해부학자’의 눈이었다.
독을 아는 자.
냄새만으로도 생과 사의 갈림길을 찾아내는 자.
두 사람은 내 발치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소신들, 전하를 뵙사옵니다.”
나는 한동안 그들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역사 속에서 이들은 정조의 죽음을 가장 먼저 의심했으나,
곧 거대한 권력의 장막 아래 침묵을 강요받았던 자들이다.
그들은 죽지 않았으나, 그들의 혀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침묵을 깨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젯밤.”
내 목소리는 미성이었다.
그러나 그 울림은 고목을 가르는 서늘한 바람과 같았다.
“아바님께서… 승하하시기 전.”
강명길의 마른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글자도 빠짐없이 고하라.”
강명길은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 찰나, 옆에 서 있는 권력의 그림자들을 훑었다.
병풍 뒤에는 정순왕후가 서 있었다.
그 옆엔 심환지가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존재 자체가 '함구하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방 안의 공기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나는 그 비릿한 대치를 끝내기로 했다.
“이 방에 있는 자들은… 모두 나가라.”
내관들이 경악하며 나를 보았다.
정순왕후가 부드럽지만 뼈가 있는 어조로 가로막았다.
“전하. 어의들의 보고는 국본의 안위와 직결된 것이니,
이 할미도 함께 들어야—”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쏘아보았을 뿐이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방 안의 온도는 빙점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의 화려한 비단 옷자락 아래서,
권력의 오만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다시 말했다. 이번엔 심해의 압력처럼 더 낮고 명확하게.
“모두. 나가라.”
단호한 일갈이었다.
정순왕후의 입술이 경련하듯 굳었고,
심환지의 가늘게 뜬 눈에 살기가 스쳤다.
하지만 그들은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비록 어린 왕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그는 조선의 유일한 태양이었다.
“…전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정순왕후가 소매를 거칠게 휘저으며 돌아섰다.
심환지가 뱀처럼 소리 없이 뒤를 따랐다.
콰앙—!
문이 닫히는 소리가 천둥처럼 방 안을 울렸다.
이제 이 공간에는 나와, 두 명의 어의만이 남았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제 말하라.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다.”
강명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노쇠한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꺾이지 않은 의사로서의 양심이 뒤섞여 있었다.
“전하... 송구하오나...
소신의 미천한 식견으로 보건대... 대왕마마의 승하는...”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결기를 다지듯 내뱉었다.
“…천수(天壽)를 다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옵니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피재길이 바닥을 짚은 손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전하. 소신은 대왕마마의 마지막 경련을 직접 목격하였사옵니다.
급격한 구토와 전신의 강직, 그리고 의식의 급속한 혼탁.”
그는 숨을 몰아쉬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선언했다.
“이는 병증이 아니라… 명백한 독(毒)이옵니다.”
방 안은 얼음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역사는 역시 피로 써진 진실이었다.
나는 정조의 죽음을,
조선의 심장이 멈추는 그 찰나를 다시 한번 겪어내고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어떤 독인가.”
피재길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열한 살 어린 왕이 이토록 차갑게 독의 성분을 묻다니.
그는 잠시 멍하니 나를 보다가 고개를 깊숙이 처박으며 답했다.
“…증상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마황(麻黃)과 비상(砒霜)을 극비리에 배합한 독일 가능성이 농후하옵니다.”
마황과 비상. 나는 그 치명적인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의열단 시절, 우리는 독을 연구했다.
암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놈들의 독수(毒手)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잡혔을 때 스스로를 지우기 위해.
“증명할 수 있겠느냐.”
두 어의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피재길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가능하옵니다.
다만, 대왕마마의 침전과 사용된 약재의 찌꺼기를,
세세히 조사할 권한이 필요하옵니다.”
“허락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궁 안의 모든 약재와 기록은 너희의 것이다.”
두 사람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호랑이 등에 올라탔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들을 뚫어질 듯 노려보며 쐐기를 박았다.
“이 일은 오직 나에게만 보고하라.
만약 정보가 새어 나간다면 너희의 목숨뿐만 아니라 삼족이 멸할 것이다.
이것은 왕명이다.”
강명길과 피재길이 바닥이 깨질 듯 머리를 박았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목숨을 걸고 진실을 밝히겠나이다!”
첫 번째 칼이 갈렸다.
이제— 두 번째 칼을 뽑을 차례였다.
나는 문을 향해 벽력이 치듯 외쳤다.
“내관!”
문이 열리자마자 내관이 거의 구르듯 들어왔다.
“백동수(白東脩)를 부르라.”
내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지... 지금 말씀이옵니까?
야밤에 장용영의 무사를…”
나는 그를 향해 서슬 퍼런 위압감을 쏟아냈다.
“지금 당장이다.
지체하는 찰나마다 누군가의 목이 날아갈 것이다.”
내관은 비명을 지르듯 대답하고는 밖으로 튀어 나갔다.
문이 닫히고 다시 찾아온 침묵 속에서 나는 내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칼조차 쥐어보지 못한 연약한 손.
하지만 이 손으로 조선의 역사를 피로 다시 쓰리라.
나는 마음속 살생부의 다음 칸에 이름을 새겼다.
심환지.
기다려라. 이번엔 내가 먼저 너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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