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여전히 깊었으나, 창덕궁의 공기는 이제 비릿한 살기(殺氣)로 일렁였다.
침전 안을 가득 채운 자극적인 향 냄새와 그 아래 깔린 시신의 부패 직전의 냄새.
그 기괴한 불협화음 속에서 소년 왕은 눈을 떴고, 독을 밝혀낼 어의들을 배치했다.
이제, 그 진실을 지키고 적의 목을 칠 '무력'을 불러들일 차례였다.
백동수.
나는 그 이름을 혀끝으로 천천히 굴려보았다.
조선의 국왕 친위부대, 장용영(壯勇營)의 전설적인 무사.
정조의 가장 믿음직한 검이었으나,
역사 속의 그는 주군이 떠난 뒤 무력하게 해체되는 군대를 지켜보며,
야인으로 사라져야 했던 비운의 사내였다.
검은 손이 있어야 존재한다.
손이 잘려 나가면 검은 고철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손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 독해진 채 돌아왔다.
문밖에서부터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허둥거리는 내관들의 가벼운 발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일정한 무게를 지닌 압도적인 진동.
망설임 없이 바닥을 짓누르는 그 소리는 궁궐의 복도가 아니라,
피 튀기는 전장의 대지를 걷는 자의 것이었다.
문이 열렸다.
등불의 노란 빛줄기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침전 안을 덮었다.
어깨는 성벽처럼 넓었고,
검은 무복 위에 덧대진 철편 갑옷은,
그가 살아온 수천 번의 찰나를 대변하듯,
군데군데 긁히고 패여 있었다.
허리춤에 매달린 투박한 칼집.
그것은 장식이 아니라,
수많은 적의 목숨을 집어삼킨 식인(食人)의 검이었다.
백동수. 그가 내 앞에 섰다.
그는 나를 보았다. 정확히는,
열한 살 아이의 껍데기 안에 들어앉은 '무언가'를 꿰뚫어 보려 했다.
그리고— 그는 지체 없이 무릎을 꿇었다.
“소신 백동수, 전하를 뵙사옵니다.”
낮고 단단한 음성.
거기엔 슬픔도, 당혹감도 없었다.
오직 주군의 명을 기다리는 무인의 순수한 날카로움뿐이었다.
나는 그를 한동안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조선을 피로 씻어낼 나의 첫 번째 칼날.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백동수.”
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왕이 대신들이 부르는 '저하'나 '주상'이 아닌,
그의 이름을 직접,
그것도 이토록 서늘한 무게를 담아 부르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예, 전하. 말씀하옵소서.”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는 누구의 검이냐.”
짧은 정적이 흘렀다.
백동수는 고개를 숙인 채 신중히 대답했다.
“…소신은 조선의 검이옵니다.”
충직한 대답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나는 한 옥타브 더 낮은 목소리로,
그의 고막을 찢을 듯이 다시 물었다.
“다시 묻는다. 너는 누구의 검이냐.”
백동수의 손가락이 방전 바닥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이 질문은 충성심을 묻는 의례적인 절차가 아니다.
자신의 목숨을 누구의 손아귀에 바칠 것인지,
이 미친 연극 같은 궁궐에서 누구를,
진정한 주인으로 섬길 것인지에 대한 '생사(生死)의 선택'이었다.
잠시 후, 백동수가 바닥에 머리를 깊게 박으며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이제 전율이 섞여 있었다.
“...전하의 검이옵니다.
오직 전하 한 분만을 위한 검이옵니다.”
나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검은 비로소 주인의 손을 찾았다.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어린 육체라 무게감은 없었지만,
내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방 안의 온도를,
빙점 아래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아바님께서—”
백동수의 어깨가 돌덩이처럼 굳었다.
“—독살당하셨다.”
침묵이 폭발하듯 방 안을 메웠다.
백동수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주먹등에 핏줄이 터질 듯 솟아올랐고,
꽉 맞물린 턱관절에서는 뿌드득 소리가 났다.
그는 이미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인의 감각으로,
이 죽음이 지나치게 매끄럽고 지나치게 기획되었다는 것을.
“강명길과 피재길이 증거를 찾고 있다.
그들이 진실을 캐낼 시간을 벌어야 한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화두를 던졌다.
“누가 이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느냐.”
백동수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하듯 뱉었다.
“…소신의 미천한 입에 담기엔,
너무도 거대한 이름들이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말해주지.
심환지(沈煥之).”
그 이름이 칼날이 되어 방 안을 가로질렀다.
백동수의 눈이 맹수처럼 번뜩였다.
주군의 원수의 이름을 확인한 무인의 살기가,
방 안의 등불을 흔들어 놓았다.
나는 이어 명령했다.
“그리고 그는 혼자가 아니다.
조정의 절반이 그와 뜻을 같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백동수, 대답하라. 장용영은 누구의 군대냐.”
“전하의 군대이옵니다!”
백동수의 외침에 나는 작지만 서슬 퍼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지금 즉시 준비하라.
창덕궁의 모든 문을 봉쇄한다.”
백동수의 숨이 멎었다.
궁궐 봉쇄. 그것은 사실상의 계엄이자,
왕이 신하들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 선포였다.
“내 명이 떨어질 때까지,
단 한 명의 정승도, 단 한 명의 궁녀도 이 궁을 나가지 못한다.
쥐 새끼 한 마리라도 담을 넘으려 하면,
그 즉시 목을 베어 담장에 걸어라. 알겠느냐?”
백동수는 전율했다.
열한 살 왕의 입에서 나온 명령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잔혹함과 결단력.
그는 이제야 확신했다. 자신의 주군 정조는 죽었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괴물이 그 아들의 육신을 빌려 부활했음을.
“...목숨을 다해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는 일어섰다.
돌아선 그의 등 뒤로 무거운 갑옷 소리가 챙강거리며 울렸다.
그의 걸음엔 이제 망설임이 없었다.
그것은 목표를 정한 살수(殺手)의 걸음이었다.
문이 닫히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흔들리는 등불 아래 내 작은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심환지, 그리고 정순왕후.
너희가 가둔 이 궁궐이, 오늘 밤 너희의 거대한 무덤이 될 것이다.
왕의 검이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